카헤티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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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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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는 트빌리시를 중심으로 한 동부, A는 서북부의 압하지야, B는 서남부의 바투미 일대, O는 북중부의 오세티야 지역



파일:카헤티 왕국 국기.png
카헤티 왕국의 국기

파일:카헤티 왕국 국장.png
카헤티 왕국의 국장

1. 개요
2. 역사
3. 역대 군주
3.1. 카헤티 왕국(1466년 ~ 1762년)
3.2. 카헤티와 카르틀리 연합 왕국(1762년 ~ 1800년)



1. 개요[편집]


조지아어: კახეთის სამეფო
영어: Kingdom of Kakheti

1466년부터 1762년까지 조지아 동부의 카헤티주에서 바그라티온 왕조의 일원에 의해 세워진 군주국. 8세기에 출현했다가 12세기에 다비트 4세의 조지아 왕국에 병합된 카헤티 왕국이 있어서 2차 카헤티 왕국이라 일컬어지기도 한다. 수도는 1466년부터 1664년까지 그레미(Gremi, გრემი)였고, 이후로는 텔라비(Telavi, თელავი)였다. 이메레티 왕국, 카르틀리 왕국과 함께 조지아 왕국의 후신으로, 대부분의 기간 동안 사파비 왕조오스만 제국의 봉신국으로 자처하다 1762년 카르틀리 왕국과 연합 왕국을 형성하여 1800년까지 이어졌다.


2. 역사[편집]



2.1. 건국 과정[편집]


1412년에 즉위한 알렉산드레 1세티무르 제국카라 코윤루 등 외세의 침략으로 황폐화된 조지아 왕국을 재건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이때 그는 강력한 귀족들이 각지에서 막강한 권세를 누리고 중앙 정부의 명령에 제대로 따르지 않는 상황에 직면했다. 이에 귀족들을 숙청하는 한편, 바그라티온 왕조가 조지아 전역을 통제하려면 아들들을 중용해야겠다고 판단하고, 대귀족들을 숙청한 뒤 장남 바크탕 4세를 카헤티, 차남 디미트리오스를 이메레티, 그리고 3남 기오르기 8세를 카르틀리의 공동 통치자로 임명했다. 그러나 이 조치는 역효과를 초래했다. 아들들은 무제한적인 왕권을 마음껏 사용하면서도 아버지의 지시를 그다지 따르지 않았고, 더 나아가 경쟁자를 제치고 절대 권력을 손에 쥐겠다는 야심을 품었다. 상황이 이처럼 좋지 않게 흘러가자, 그는 자기가 살아있을 때 왕위 승계를 진행하기로 마음먹고 1442년 장남 바크탕 4세에게 양위한 뒤 아타나시오스라는 이름으로 수도원 서약을 하고 므츠헤타의 스베티츠호벨리 수도원에 들어갔다.

바크탕 4세는 왕위에 오른 뒤 자신을 왕중왕이라고 칭하면서 동생들을 통제하려 했지만, 디미트리오스와 기오르기 8세가 그의 명령에 순순히 따르지 않았고, 귀족들도 각자의 주군을 추종했기 때문에 통치가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았다. 1446년 12월 바크탕 4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이메레티의 권력자 디미트리오스와 카르틀리의 권력자 기오르기 8세가 왕위를 놓고 경쟁했다. 그 결과 기오르기 8세가 승리하여 조지아 왕이 되었지만, 디미트리오스는 이메레티에서 여전히 막강한 권력을 누렸다. 그러다가 1452년 또는 1453년에 이메레티에서 권세를 누리던 디미트리오스가 사냥 사고로 사망했다. 이리하여 조지아의 유일한 군주가 된 기오르기 8세는 디미트리오스의 아들 콘스탄틴 2세를 자기 보호 하에 두었으며, 1455년 바그라트 6세를 이메레티 통치자로 세웠다.

1462년, 이메레티의 통치자 바그라트 6세는 삼츠헤의 쿠바르쿠바레 3세와 함께 기오르기 8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기로 밀약을 맺했다. 그는 삼츠헤 외에도 밍그렐리아의 리파리트 1세, 구리아의 마미아, 압하지야 및 스바네티아의 영주들에게 "자신을 도와주면 중앙 정부에 과세를 낼 의무를 면제해주겠다"라고 약속했다. 이리하여 반란이 발발하자, 기오르기 8세는 즉각 토벌에 나섰다. 1463년, 리키 산맥을 넘어 이메레티로 진군한 기오르기 8세는 공식적으로 반란에 가담하지 않고 있던 쿠바르쿠바레 3세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쿠바르쿠바레 3세는 군대를 이끌고 이메레티에 도착했지만, 전장에서 멀리 진을 치고 전황을 관망했다. 양군은 치코리에서 격전을 벌였다. 그 결과 반란군이 정부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바그라트 6세는 여세를 몰아 쿠타이시를 점령하고 밍그렐리아, 구리아, 압하지야, 삼츠헤, 스바네티의 대귀족들 앞에서 자신을 이메레티의 왕으로 선포했다.

1465년, 기오르기 8세가 삼츠헤를 정벌하려 했다가 파라바니 호수 인근 전투에서 사로잡혀 아할치헤로 이송된 뒤 1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러는 사이, 바그라트 6세는 군대를 이끌고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에 입성한 뒤 조지아의 왕으로 즉위했다. 카헤티의 통치자 다비트가 이에 맞서 반기를 들었지만, 조지아 대부분은 바그라트 6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 상황을 지켜본 쿠바르쿠바레 3세는 바그라트 6세가 지나치게 강해지면 자신에게 좋을 것 없다고 판단하고, 기오르기 8세를 자신의 딸인 타마르 자켈리와 결혼하는 조건으로 풀어주기로 했다.

이리하여 석방된 그는 삼츠헤군의 도움을 받으며 카르틀리를 탈환하려 했다. 그러나 카르틀리 귀족들은 그가 바그라트 6세에게 충성을 맹세한 자신들을 가만두지 않을 걸 우려해 따르지 않았다. 결국 카르틀리에서 패배한 그는 잔여 병력을 수습한 뒤 카헤티로 이동하여 다비트를 내쫓고 1466년 카헤티 왕을 칭했다. 이리하여 카헤티 왕국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2.2. 기오르기 8세알렉산드레 1세[편집]


카헤티 왕국 초대 군주 기오르기 8세는 자신을 적대시하는 카헤티의 몇몇 귀족들을 토벌하고 싶었지만, 바그라트 6세가 이들과 힘을 합칠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1467년 바그라트 6세와 협의한 끝에 바그라트 6세가 자신을 카헤티 왕으로 인정해주고 카헤티의 완고한 귀족들을 토벌하는 데 협조하기로 하고, 자신은 카르틀리에서 반기를 든 콘스탄틴 2세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바그라트 6세를 돕기로 합의했다.

1470년 산악 지대로 피신한 뒤 왕위 복귀를 꾀했던 다비트를 완전히 제압하는 데 성공한 그는 반 자치 공국을 폐지하고 치지치, 엘리세니, 츠우헤티, 디도에티, 티아네티, 치아우리, 칠다, 크바렐리, 마르트코피, 그레미 및 판키시 등 여러 현을 설립했다. 이 현의 관리로 이명된 무라비스들은 세금을 징수해 수도인 그리미로 보내는 역할을 수행했다. 무라비스는 정기적으로 교체되며 세습은 금지되었다. 그 후 그는 군사 개혁을 실시해 카헤티 왕국을 사드로초라는 이름의 4개 지역으로 나누었고 각 지역에는 왕이 임명한 주교가 이끄는 군대를 신설했다.

또한 알라베르디 수도원의 대수도원장을 대주교로 승격시키고 다른 지역 주교들을 감독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조지아 정교회 총대주교의 권위를 인정했지만, 총대주교의 의향과는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종교 정책을 실시하게 했다. 또한 그레미 시를 수도로 승격하고 도시를 확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에도 불구하고 카라 코윤루의 지속되는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결국 그는 카라 코윤루를 종주국으로 인정하고 매년 남녀 노예를 공물로 바쳐야 했다. 그러면서도 조지아의 나머지 지역을 재정복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했지만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1476년 사망했다.

파일:중근세 조지아 지도.png
1489년 조지아 왕국 헤체 당시 조지아 세력도.

이후 왕위에 오른 알렉산드레 1세는 1489년 카르틀리 왕국콘스탄틴 2세, 이메레티 왕국알렉산드레 2세와 평화 협정을 맺으면서 정식으로 인정받았다. 그는 적대적인 이슬람 세력과의 갈등을 진정시키기 위해 외교적 타협을 모색했다. 1477년 카라 코윤루의 우즈오운 하산 칸이 카르틀리 왕국을 황폐화시킨 후 카헤티로 쳐들어오려 하자, 그는 카라 코윤루의 봉신을 자처하고 막대한 공물을 바쳤다. 이에 우즈오운 하산 칸은 만족하고 돌아갔고, 카헤티 왕국은 위기에서 벗어났다.

사파비 제국이 날로 강성해지자, 그는 1483년과 1491년 모스크바 대공국이반 3세에게 사절을 보내 외교 관계를 맺어서 사바피 제국을 견제하려 했다. 그러나 이반 3세가 별다른 도움을 주지 않자, 1501년 차남 디미트리오스를 사파비 제국이스마일 1세에게 보내 충성을 서약하고 공물을 바쳤다. 당시 쉬르반을 정복한 후 여세를 몰아 카헤티까지 석권하려 했던 이스마일 1세는 제발로 충성을 서약한 것에 만족을 표하고 돌아갔다. 그 덕분에 카헤티 왕국은 멸망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1511년 4월 27일, 동생 디미트리오스에게 후계자 자리를 빼앗길까 두려워한 장남 기오르기 2세의 정변으로 피살당했다.


2.3. 기오르기 2세, 레반[편집]


기오르기 2세는 아버지 알렉산드레 1세를 살해하고 동생 디미트리오스를 실명형에 처한 뒤 왕위에 오른 뒤, 군사적 위업을 세워 백성들의 인정을 받기로 하고 카르틀리 왕국을 침략했다. 카르틀리 왕 다비트 10세는 이에 대항하기 위해 두 왕국의 국경 지대에 무크라니 공국을 세우고 동생 바그라트를 초대 공작으로 세웠다. 1512년, 기오르기 2세는 무크라니 공국의 주요 요새인 치키스지리를 공격했으나 함락에 실패했다. 1513년, 다시 므츠헤타 인근으로 진군했다가 바그라트의 군대에게 매복 공격을 받고 생포된 뒤 므트베리 요새에 투옥된 후 얼마 안가 옥사했다.

다비트 10세는 여세를 몰아 카헤티 왕국을 침공해 성공적으로 병합했다. 기오르기 2세의 아들 레반은 충성스러운 귀족들과 함께 산에 숨어서 몇년 간 은신했다. 1518년, 사파비 제국이스마일 1세가 카르틀리 왕국을 침공한 틈을 타 모습을 드러내 스스로 카헤티 왕을 칭했다. 다비트 10세는 이를 막고자 군대를 파견했지만, 그는 2년간 항전한 끝에 격파했다. 결국 1520년, 다비트 10세는 그와 평화 협약을 맺고 카헤티 왕위를 인정했다. 그 후 동부 조지아의 고지대 부족들을 복종시키고 타르쿠의 삼칼을 역임하고 있던 카말 카라무셀과 친선 관계를 맺었다. 그러면서 사파비 제국이스마일 1세타흐마스프 1세에게 경의를 표하고 충실한 가신으로서의 모습을 보여 그들의 신임을 얻었다. 1551년과 1555년에 남부 코카서스 일대를 복종시키기 위한 사파비 제국의 원정에 보조병들을 이끌고 동행하기도 했다.

1555년 사파비 왕조와 오스만 제국 사이에 아마사 조약이 체결되었다. 카헤티 왕국은 이 조약에 따라 사파비 왕조의 영향권에 포함되었다. 그는 둘째 아들 예세를 사파비 왕조에 인질로 보냈다. 예세는 이사 칸으로 개명하고 이슬람교로 개종해 샤카 총독을 맡았다. 1559년 카르틀리 왕국의 시몬 1세와 다우드 칸과의 전쟁이 벌어졌다. 시몬 1세는 그의 사위였고, 다우드 칸은 사파비 제국의 보호를 받았다. 양쪽 모두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그는 어느 쪽도 돕지 않고 중립을 체택했다. 한편, 그는 모스크바 대공국과의 외교 관계를 맺고자 했다. 1563년 이반 4세에게 사절을 보내 러시아 파견단을 카헤티 왕국에 주둔시키도록 했다. 그러나 사파비 제국이 압력을 가하자, 그는 1571년 모스크바 대공국과의 동맹을 포기하고 러시아군을 자국에서 철수하게 했다.

당시 이메레티 왕국카르틀리 왕국은 극심한 혼란에 휩싸였지만, 카헤티 왕국은 56년에 이르는 긴 통치를 구가하는 그의 치세 아래 평화와 번영을 구가했다.카헤티의 수도였던 그레미는 문화 및 예술의 집산지로서 화려한 꽃을 피웠으며, 수많은 페르시아 상인과 장인들이 이 나라에서 활약했다. 또한 그의 후원을 받은 교회들이 왕국 각지에 세워졌다.

그는 구리아 공국의 공작 마미아 1세 구리엘리의 딸 티나틴 구리엘리와 결혼하여 두 아들 알렉산드레 2세와 예세를 낳았다. 1529년 티나틴과 이혼한 뒤 타르쿠의 삼칼인 카말 카라무셀의 딸과 재혼하여 10명의 아들과 네 명의 딸을 낳았다. 이중 1578년까지 살아남은 아들은 알렉산드레 2세, 제시, 니콜라오즈, 알-미르자, 그리고 카이호스로였다. 원칙대로라면 장남인 알렉산드레 2세가 후계자가 되어야 했지만, 그가 후처에게서 낳은 자식들을 더욱 우대했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다. 그들은 왕위 계승권을 놓고 암투를 벌였고, 좀처럼 죽지 않는 아버지를 미워했다. 1574년, 알렉산드레 2세는 아버지가 자신을 제치고 이복 형제 중 한 명을 왕으로 세울 거라 두려워한 끝에 아버지를 암살하고 왕위를 쟁취했다.


2.4. 알렉산드레 2세, 다비트 1세, 콘스탄틴 1세[편집]


아버지 알렉산드레 2세를 시해하고 왕위에 오른 알렉산드레 2세는 이복 형제 알-미르자와 카이호스로의 반란에 직면했지만 다우드 칸이 지원해준 덕분에 디샤오르 전투에서 승리하고 왕위 경쟁자들을 축출했다. 그 후 사파비 제국오스만 제국 사이에서 독립을 유지하고자 외교 전술을 구사했다. 처음에는 사파비 제국의 봉신 노릇을 하다가 찰디란 전투에서 오스만군이 압승을 거두자 오스만 제국의 편에 섰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의 셀림 1세는 그를 신용할 수 없다고 여기고 다케스탄의 이슬람 산악 거주민들을 부추겨서 카헤티 왕국을 습격하게 했다. 이에 루스 차르국의 도움을 받기로 하고, 1585년에서 1587년 사이에 모스크바에 사절을 보내 동맹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은 차르 표도르 1세의 특사인 베르킨에 의해 1587년 9월 28일에 비준되었다. 그러나 아바스 1세의 지도 아래 혼란을 수습한 사파비 제국은 러시아가 동부 조지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걸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사파비 제국의 압력에 두려워하여 넷째 아들 콘스탄틴 1세를 페르시아 궁정에 인질로 보냈다. 콘스탄틴 1세는 그곳에서 이슬람교로 개종하고 "콘스탄틴 칸"으로 개명했다.

1601년 10월, 알렉산드레 2세는 이복 동생 기오르기와 차남 다비트 1세가 정변을 일으키면서 폐위된 뒤 수도원에 유폐되었다. 다비트 1세는 왕위에 오른 뒤 아라그비 공작 누르자르 1세에 대한 원정을 승리로 이끌었고, 동생 기오르기의 반역 음모를 조기에 밝혀내 기오르기를 투옥하고 추종자 17명을 처형했다. 그러나 1602년 10월 21일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이후 수도원에 유폐되었던 알렉산드레 2세가 복위했다. 1603년, 아바스 1세가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전쟁을 개시해 아르메니아의 예레반을 포위했다. 그러면서 봉신인 카헤티와 카르틀리 왕국에 참여를 요구했다. 그는 몇달 간 망설이다가 1604년 4월에 병사들을 이끌고 페르시아군에 참여했다. 1605년 초, 아바스 1세는 쉬르반을 정복하는 임무를 콘스탄틴 칸 왕자가 지휘하는 카헤티군에게 맡겼다. 이때 다케스탄에서 타르쿠의 샴칼에 대항하는 원정을 계획하고 있던 러시아 차르 보리스 고두노프가 그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알렉산드레 2세가 아바스 1세와 러시아의 요청 중 어느 쪽을 택할 지 고심하고 있을 때, 아바스 1세는 이 이야기를 전해듣고 카헤티를 자기 편으로 확실히 굳히기 위해 그를 제거하기로 했다. 1605년 3월 12일, 콘스탄틴 1세는 아바스 1세의 은밀한 지시에 따라 아버지와 형제 기오르기 및 고문들을 모조리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했다. 이후 다비트 1세의 미망인인 케테반과 결혼하려 했지만, 케테반은 재혼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한편, 살아남은 카헤티 귀족들은 그의 폭거에 분노하여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다. 1605년 10월, 그는 군대를 이끌고 반란을 진압하려 했으나 참패를 면치 못하고 전사했다.


2.5. 테이무라즈 1세, 아르칠리[편집]


콘스탄틴 1세를 처단한 카헤티 귀족들은 아바스 1세에게 이란 궁정에 인질로 간 테이무라즈 1세를 돌려보내라고 청했다. 아바스 1세는 자신의 계획이 틀어진 것에 진노했지만, 카헤티 왕국을 공격하기엔 여건이 좋지 않다고 판단해 테이무라즈 왕자를 그곳으로 돌려보내 왕으로 삼게 했다. 그는 왕위에 오른 뒤 사냥에 열중했고, 정무는 어머니 케테반이 도맡았다. 1613년, 아바스 1세는 그에게 사냥에 참여하라고 권유했다. 그는 샤가 자신을 해칠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하여 거부했다. 아바스 1세는 이를 명분으로 삼아 1614년 대군을 이끌고 카헤티로 진격했다.

테이무라즈 1세는 이에 당황하여 두 아들 레반과 알렉산드레를 인질로 보내겠다고 제안했으나, 아바스 1세는 단호히 거부하고 카헤티를 침략하여 무자비한 약탈과 학살을 자행했다. 페르시아군은 뒤이어 카르틀리 왕국도 공격해 역시 막대한 인명을 학살했다. 그와 카르틀리 왕 루아르사브 2세이메레티 왕국으로 망명했다. 아바스 1세는 두 사람을 용서할 테니 복귀하라고 권유했고, 루아르사브 2세는 이를 믿고 돌아갔다가 이슬람교로 개종하라는 제안을 거부했다가 처형당했다. 하지만 그는 아바스 1세를 믿지 않고 이메레티 왕국에 남았다. 그는 페르시아에 대항하기 위해 루스 차르국에 사절을 보내 미하일 1세에게 지원을 호소했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는 혼란 시대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온 상태였기에 캅카스 문제에 개입할 의지가 없었다.

1615년 9월 15일, 카헤티 귀족들은 다비트 잔디에리의 지휘하에 봉기하여 아바스 1세가 선임한 카헤티 총독 이사 칸을 축출했다. 카르틀리에서도 잇따라 반란이 일어났고, 페르시아는 조지아 동부 일대에 대한 통제력을 일시적으로 상실했다. 조지아 귀족들은 그를 조지아 동부 전체의 왕으로 추대했다. 아바스 1세는 알리 굴리칸에게 군대를 맡겨 이들을 토벌하게 했지만, 그는 치차무리에서 그들을 섬멸했다. 아바스 1세는 이 일련의 상황에 분노하여 1616년 친히 대군을 이끌고 조지아로 쳐들어갔다. 카헤티 전역이 파괴되었고, 6~7만 명이 학살당했으며, 10만 명 이상이 페르시아로 끌려갔다. 이리하여 공백이 발생한 카헤티에는 투르코만인들이 정착했다.

아바스 1세는 여세를 몰아 카르틀리마저 정복하기로 하고, 조지아계 장군인 기오르기 사카제에게 이 임무를 맡겼다. 이메레티 왕국에 망명해 있던 그는 이에 맞서 백성들에게 이슬람교 수용을 단호히 거부하고 끝까지 맞서라고 호소했고, 백성들은 이에 호응해 침략자에 끝까지 대항했다. 이에 분노한 아바스 1세는 1624년 9월 13일 포로로 잡혀 있던 그의 어머니 케테반을 고문해 죽이고 그의 아들 레반과 알렉산드레를 거세했다. 기오르기 사카제는 동족을 심하게 박해하는 아바스 1세에게 반감을 품고 반기를 들었다. 아바스 1세가 임명한 카헤티 총독 페이카르 칸이 그를 진압하려 했으나, 1625년 3월 25일 마르코피 전투에서 완패했다. 사카제는 투르코만인 이민자들을 모조리 축출하고 테이무라즈를 카르틀리와 카헤티의 왕으로 복위시켰다. 1625년 7월 1일, 아바스 1세가 친정하여 마라브다 전투에서 조지아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뒀다. 그러나 조지아인들이 고지대에서 유격전을 벌이며 끝까지 저항한데다 오스만 제국의 침공이 가시화되자, 아바스 1세는 어쩔 수 없이 조지아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기오르기 사카제와 추종자들은 테이무라즈 1세가 지나치게 강해지는 걸 우려해 카르틀리의 새 왕으로 이메레티 왕 기오르기 3세의 아들 알렉산드레 왕자를 추대하려 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카헤티 귀족들과 함께 사카제를 공격하여 1626년 말 바잘레티 호수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사카제는 오스만 제국으로 망명하여 이브라힘 1세 밑에서 복무하다가 1629년에 반역 혐의로 처형되었다. 그 후 아바스 1세가 사망한 뒤 페르시아가 내란에 휩싸이면서, 그의 왕국은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과거 사카제와 함께 페르시아군에 맞서 싸웠지만 그에 동조하지 않고 자신을 지지했던 아라그비의 주라브를 의심한 끝에 처단했다.

그는 사파비 제국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페르시아의 영향력을 조지아에서 완전히 박멸하려 했다. 1631년 카헤티의 파괴에 적극 가담했던 다케스탄의 산악 부족들을 정벌해 몇몇 정착지들을 파괴했다. 1633년 파르스, 라르, 바레인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이맘쿨리 칸이 사피 샤에게 살해되자, 이만쿨리 칸의 처남이며 간자와 카라바흐의 총독인 다우드 칸이 그에게 망명했다. 그는 다우드 칸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고 그의 부대를 조지아군에 배속시켰다. 한편 니콜라스 이르바치를 서유럽으로 보내 스페인의 펠리페 4세와 교황 우르바노 8세에게 구원을 청하게 했다. 그러나 당시 유럽의 통치자들은 30년 전쟁에 몰두하고 있었기에 조지아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사피 샤는 다우드 칸을 돌려보내라고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테이무라즈 1세의 폐위를 선언하고 로스톰을 새 왕으로 내세워 조지아를 침공하게 했다. 1633년 로스톰이 이끄는 페르시아군이 카르틀리와 카헤티를 휩쓸었고, 그는 또다시 이메레티로 망명했다. 1634년 카헤티로 이동한 뒤 카헤티 왕을 선포하고 로스톰에 맞서 싸웠다. 양자의 대결은 수년간 이어지다가 1638년 카헤티 왕으로 인정받는 대신 페르시아에 충성을 맹세하는 조건으로 전쟁을 종식했다. 그는 페르시아로부터 벗어나고 싶어서 1639년 4월 23일 미하일 1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원군을 보내달라고 호소했지만 별다른 응답을 받지 못했다. 1641년, 로스톰에 반감을 품고 있던 카르틀리 귀족들을 부추겨 반란을 일으키게 하고 자신은 군대를 이끌고 카르틀리 왕국의 수도인 트빌리시로 진격했다. 그러나 음모가 발각당하여 귀족들이 살해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어쩔 수 없이 철수했다. 1648년, 로스톰은 페르시아군과 함께 카헤티로 쳐들어가 마가로에서 그의 군대를 격파했다. 이 전투에서 테이무라즈 1세의 마지막 아들 다비트가 전사했고, 테이무라즈 1세는 이메레티로 망명했다.

그 후 카헤티 일대는 카르틀리 왕국의 영역으로 귀속되었지만, 카헤티 귀족들이 카르틀리 왕국의 통제에 불응하여 반란을 일삼았기 때문에 매우 불안정했다. 1664년, 카르틀리 왕 바크탕 5세는 아들 아르칠리를 카헤티 국왕으로 세워서 귀족들의 불만을 잠재우고자 했다. 아르칠리는 왕위에서 쫓겨난 테이무라즈 1세 일가의 복위 시도를 물리치고 카헤티가 어느정도 안정을 되찾고 번영하는 기반을 닦았다. 그러나 1675년 페르시아의 대총독 샤이크 알리 칸의 음모로 인해 카헤티를 떠나 압하시헤의 아슬란 파샤에게 망명했다.


2.6. 헤라클리오스 1세, 다비트 2세, 콘스탄틴 2세[편집]


페르시아 대총독 샤이크 알리 칸은 아르칠리를 몰아낸 뒤 주군 솔레이만 1세에게 헤라클리오스 1세를 카헤티 왕으로 세우라고 청했다. 솔레이만 1세는 그의 청을 받아들여 헤라클리오스 1세를 왕으로 옹립했다. 1675년 솔레이만 1세의 초대를 받은 그는 즉시 페르시아 궁정으로 향한 뒤 솔레이만 1세로부터 그때까지 신앙으로 삼고 있던 조지아 정교회를 버리고 이슬람교로 개종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헤라클리오스는 처음엔 망설였지만 거듭된 강요에 못이겨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이후 나자알리 칸( ნაზარალი-ხანი)으로 개명한 그는 이스파한에서 14년간 억류되었다가 1688년 카르틀리 국왕으로 임명되었고, 카헤티 일대는 사파비 제국의 직접 지배를 받았다.

1703년, 사파비 제국 샤한샤 술탄 호세인은 기오르기 11세를 카르틀리 왕으로 세우고 헤라클리오스 1세를 카헤티 왕으로 이전시켰다. 그러나 헤라클리오스는 이스파한으로 이송된 뒤 페르시아 궁정에서 여생을 보냈고, 실제 통치는 총독들이 맡았다. 1709년 사망했고, 아들 다비트 2세가 뒤이어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이스파한 궁정으로 불려갔다. 그의 동생 테이무라즈 2세와 어머니 안나는 그를 대신하여 5년간 나라를 다스렸으나 다케스탄 산악민족의 침략과 농민 반란에 시달렸다. 1715년 페르시아에서 돌아온 그는 비로소 통치를 행사했으나, 다케스탄 산악인들의 습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카르틀리 국왕 예세와 동맹 맺고 라지아 부족과 맞붙었으나 패배했고, 카헤티 국경 지대는 라지아 부족에게 영구적으로 점령되었다.

1719년 이후 카르틀리의 새 국왕 바크탕 6세와 동맹을 맺고 다시 라지아 부족을 토벌하려 했으나, 전력 손실을 원치 않은 바크탕 6세가 제대로 협조하지 않아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722년 마가로의 여름 별장에서 사망했고 이란의 쿰에 묻혔다. 이후 콘스탄틴 2세테이무라즈 2세가 카헤티 왕위를 주장했다. 테이무라즈 2세는 현지에서 다케스탄 산악민족들을 상대로 원정을 떠나 승리를 거두는 등 통치 행위를 수행했으나, 사파비 제국의 샤한샤 술탄 호세인은 콘스탄틴 2세를 카헤티의 왕으로 세웠다. 테이무라즈 2세는 샤한샤의 결정을 받아들이고 콘스탄틴 2세의 조언자를 맡았다.

콘스탄틴 2세는 사파비 제국의 충실한 가신이었으나, 이웃 나라인 카르틀리 왕국의 바크탕 6세가 사파비 왕조의 통치로부터 독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기에 갈등을 벌였다. 1723년 바크탕 6세가 폐위되었을 때, 그는 카르틀리 왕이라는 칭호를 얻고 카르틀리에 진군해 트빌리시를 공략했지만, 바크탕 6세와 아들 바카르 1세가 카르틀리 상부 일대를 장악하고 항전하는 걸 막지 못했다. 얼마 후 오스만 제국이 동부 조지아를 침공하자, 그는 경쟁자 바크탕 6세와 화해하고 공동으로 오스만 제국에 맞섰다. 바크탕 6세는 1724년 오스만 제국의 공세에 못 이겨 바카르 1세와 함께 러시아로 망명했지만, 그는 끝까지 항전했다.

1725년 오스만 제국과 평화 협약을 맺고 카헤티 왕을 이어가되 수니파로 개종하기로 했다. 그러나 1730년경 나디르 샤가 오스만 제국을 물리치고 코카서스 일대에 대한 이란의 지위를 회복하기 시작하자, 그는 오스만 제국과 결별했다. 1732년 12월, 오스만 제국군 사령관 유수프 자켈리가 카헤티 왕국을 침공한 뒤 협상을 요구했다. 그는 이에 응해 그를 만나러 갔다가 도중에 암살당했다. 사후 이복 동생 테이무라즈 2세가 뒤이어 왕위에 올랐다.


2.7. 테이무라즈 2세, 헤라클리오스 2세[편집]


1732년 12월 이복 형 콘스탄틴 2세가 오스만군에게 피살된 뒤 카헤티 왕위에 오른 테이무라즈 2세는 오스만 제국에 맞섰지만 적군의 압력이 심해지자 프샤비로 피신했다. 그는 러시아로 망명하려 했지만 카헤티인들의 간절한 청원을 받아들여 계획을 취소했다. 1733년 트빌리시로 가서 오스만 제국의 아할치헤 총독 이사크 파샤와 만나 오스만 제국에 복종하는 대가로 카헤티 국왕으로 인정받았다. 1734년, 오스만 제국은 협약을 파기하고 카헤티 왕국을 완전 병합하고자 군대를 파견했다. 하지만 무라브 아벨이 지휘하는 카헤티군은 적을 물리쳤다. 같은 해, 그는 간자에 주둔한 나디르 샤에게 원조를 청하는 사절을 보냈다. 나디르 샤는 대규모 병력을 그에게 보냈고, 그는 이들과 함께 다케스탄 원정에 참여하여 차라 일대를 황폐화시키고 고지대의 요새들을 모조리 파괴했다.

이후 예레반에 주둔한 나디르 샤를 찾아와서 충성을 맹세하려 하는 순간 갑작스럽게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되었다. 페르시아군은 나디르 샤의 명령을 받들어 카헤티와 카르틀리 전역을 황폐화시켰고, 많은 조지아인이 학살당하거나 페르시아로 강제 이주되었다. 그는 감옥을 가까스로 탈출한 뒤 은신하다가 나디르 샤가 철수한 후 카헤티로 돌아왔다. 얼마 후, 트빌리시의 총독인 세피 칸이 카헤티 왕으로 인정해줄 테니 힘을 합쳐 나디르 샤에 대항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세피 칸과 고리에서 협상하는 척했다가 긴급 체포한 뒤 나디르 샤에게 세피 칸을 넘겼다. 나디르 샤는 그를 아프가니스탄 원정에 데려가면서, 장남 헤라클리오스 2세와 딸 케테반을 인질로 넘기는 대가로 카헤티 국왕으로 세워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는 이를 받아들여 카헤티로 돌아갔고, 나디르 샤는 헤라클리오스 2세를 인도 원정에 데려갔으며 케테반은 나디르 샤의 조카 알리 쿨리 칸과 결혼했다.

1738년 카헤티로 돌아왔지만 실질적인 통치는 트빌리시의 이란 총독에게 있었고, 그는 총독의 명령에 복종해야 했다. 1739년 나디르 샤의 형제이자 아제르바이잔 총독 이브라힘 칸의 다케스탄 원정에 참여했다. 페르시아군 32,000명은 자니카 시 인근에서 다케스탄 산악민족의 습격으로 패배했고, 이브라힘 칸과 우굴루 칸이 전사했다. 다만 그의 병력은 별다른 손실 없이 카헤티로 복귀했다. 1738년 인도 원정을 마친 나디르 샤는 헤라클리오스 2세를 카헤티로 돌려보냈다. 1741년 아제르바이잔에 도착한 나디르 샤의 소환을 받고 달려간 그는 아르다발에서 나디르 샤에게 절한 뒤 이란군의 지휘권을 부여받고 다케스탄 원정을 이끌었다. 그의 군대는 차라 일대를 파괴하고 많은 주민들을 학살하거나 포로로 잡았다. 다케스탄 원정을 성공적으로 마친 것에 만족한 나디르 샤는 그를 카헤티로 돌려보냈다.

한편, 나디르 샤는 카르틀리 고위 관료였던 기비 아밀라흐바리를 석방시키고 카르틀리의 최고 관료로 임명했다. 조지아로 돌아온 기비는 그에게 나디르 샤의 속박에서 벗어나라고 제안했지만, 그는 거부했다. 이에 기비는 트빌리시 총독에게 테이무라즈를 비난하는 편지를 보냈다. 트빌리시 총독이 다케스탄 원정에 다시 참여하라는 지시를 내리자, 그는 자기가 카르틀리에서 참여하는 건 곤란하지만 총독이 카헤티로 와준다면 참여하겠다고 답했다. 이에 트빌리시 총독은 그가 배신했다고 단정짓고 카헤티로 쳐들어가 사가레오 일대를 황폐화하고 현지인들을 노예로 삼았다. 또한 나디르 샤에게 사절을 보내 그가 반역을 꾸몄다고 규탄했다. 당시 데르벤트에 있던 나디르 샤는 그에게 다르벤트로 오라고 명령했다. 그는 즉시 나디르 샤를 찾아가 억울함을 호소했고, 나디르 샤는 받아주기로 했다. 대신 그의 아내 타마르 2세를 인질로 넘기게 했다.

카헤티로 무사히 돌아온 그는 자신을 모함한 기비를 공격하여 크사니 일대를 탈취했고, 1743년 아라그비 주민들이 그곳의 총독 베잔을 죽이고 귀순하는 걸 받아들였다. 1744년 아할치헤의 유수프 파샤가 15,000명의 오스만군을 이끌고 동부 조지아를 침공하자, 트빌리시 총독은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고리에서 트빌리시 총독과 합세한 뒤 오스만군에 대항했으나 패배했다. 유수프 파샤는 고리에 틀어박힌 적을 포위하고 군대 일부를 다케스탄의 고지대로 보냈다. 적군이 분산된 걸 알게 된 그는 아들 헤라클리오스 2세에게 그들을 요격하라고 지시했고, 헤라클리오스 2세는 아라그비 강둑에서 다케스탄으로 이동 중이던 오스만군을 습격해 큰 타격을 입히고 막대한 물자를 탈취했다. 뒤늦게 패전 소식을 전해들은 유수프 파샤는 고리 포위를 해제하고 아할치헤로 퇴각했다.

1744년, 나디르 샤는 그를 카르틀리의 왕으로 세우고 헤라클리오스 2세를 카헤티의 왕으로 선임했다. 1747년 나디르 샤가 암살된 뒤 이란이 혼란에 휩싸이자, 헤라클리오스 2세는 1749년 이란에서 본국으로 귀환한 아버지와 함께 독립을 꾀했다. 아스트라바드, 마잔다란, 길란 지방을 다스리고 있던 이란 사령관 무하마드 하산 칸 카자르가 이란으로부터 독립하려 드는 예레반 칸국을 포위 공격하자, 테이무라즈 2세는 예레반 주민들의 구원 요청을 받아들여 아들과 함께 에레반으로 진군했다. 헤라클리오스가 선봉에 서서 무하마드 하산 칸을 격파했고, 무하마드는 코르투라프 요새로 도주했다. 헤라클리오스는 요새를 곧 함락시킨 뒤 무하마드를 아버지에게 바쳤다. 테이무라즈 2세는 무하마드를 정중하게 대접하고 풀어준 뒤, 예레반 칸국을 자국의 속국으로 삼고 공물을 부과했다.

1751년, 아제르바이잔의 이란군 사령관 아자트 샤가 예레반을 포위 공격했다. 이번에도 예레반의 원조 요청을 받아들인 테이무라즈 2세는 아들에게 소규모 병력을 맡겼다. 헤라클리오스는 키르불라키 인근에서 더 많은 병력을 갖추고 있던 아자트 샤의 군대를 격파하고 아제르바이잔으로 쫓아냈다. 1752년, 간자 칸 샤하베르드는 더 이상 테이무라즈 2세에게 충성을 바치지 않겠으며 공물도 바칠 수 없다고 통보했다. 이에 테이무라즈 2세는 아들과 함께 간자로 진군했다. 샤하베르드는 셰키 칸, 다케스탄 산악 부족들과 연합하여 이에 대항했다. 테이무라즈 2세와 헤라클리오스는 수적으로 우세한 적에게 패퇴하여 조지아로 돌아갔다. 셰키 칸은 조지아에 대한 보복 원정을 계획하고, 아들 아가 키시 벡에게 다케스탄인, 쉬르반인, 다르벤트인, 간자인으로 구성된 대군을 맡겨 조지아를 침공하게 했다. 테이무라즈 2세와 헤라클리오스는 이에 대항하여 트빌리시 외곽에서 맞붙었다. 이번에는 조지아군이 대승을 거두었고, 아가 키시 벡은 50마일 동안 추격한 적군을 가까스로 회피해 본국으로 귀환했다.

1755년, 헤라클리오스는 크바렐리 전투에서 다케스탄 산악민족을 제압하여 다시는 조지아를 침략하지 못하게 했다. 한편, 조지아 영토를 배회하던 투르코만인들이 아르메니아로 이주했다. 아버지의 지시를 받아 예레반 칸국으로 파견된 헤라클리오스는 아르메니아에 이주한 투르코만인들이 이전 목초지로 돌아가도록 강요하고 투르코만인들에게 이주를 허용한 예레반들에게 벌금을 부과했다. 얼마 후, 셰키 칸의 세력이 날로 확장되는 걸 두려워한 간자, 카라바흐, 예레반, 카라다그, 나히체반 칸들이 헤라클리오스와 동맹을 맺고 공동으로 셰키 칸을 도모하는 문제를 논의했다. 간자 근처에서 회의가 진행되고 있을 때, 매복하고 있던 조지아군이 습격하여 5명의 칸을 체포했다. 셰키 칸은 이 사실을 알게 되자 "무슬림 칸들을 무단으로 잡은 이교도를 응징한다"라는 명분을 내세워 헤라클리오스를 추격해 악스타파차이 강 인근에서 격파하고 5명의 칸을 구출했다. 뒤이어 조지아를 침공해 카라바흐와 보르찰라 지역을 점령하고 아가 키시 벡을 그곳에 남겨뒀다. 헤라클리오스는 일단 후퇴했다가 병사들을 끌어모아 반격에 나섰고, 카라바흐인 2,000명이 가세한 것에 힘입어 아가 키시 벡을 셰키로 몰아냈다.

1758년, 카르틀리의 테이무라즈 2세, 카헤티의 헤라클리오스 이메레티 왕국솔로몬 1세는 동맹을 맺고 외세가 조지아를 침략할 때 공동으로 대응하기로 했다. 1762년 1월 8일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머물며 러시아 제국의 지원을 호소하던 아버지가 갑자기 사망했다. 그 후 헤라클리오스는 카르틀리-카헤티 연합 왕국의 초대 군주로 즉위했고, 명목상 카르틀리, 카헤티의 주군이었던 잔드 왕조의 카림 칸도 이를 받아들였다.


2.8. 카헤티-카르틀리 연합 왕국[편집]



2.8.1. 헤라클리오스 2세[편집]


헤라클리오스 2세는 카헤티-카르틀리 연합 왕국을 결성한 뒤 나라를 전면적으로 개혁하고 조지아 전역을 통합할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해 러시아에 사절을 보내 조지아에서 러시아 법률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요청하여 승인을 얻었다. 이와 동시에, 조지아의 진보주의자들을 끌어들여 국가 시스템의 근본적인 변화에 대한 법안 초안을 작성하게 했다. 진보주의자들은 강력한 중앙집권 정부를 수립해 조지아 전체를 통솔하게 하고, 무역 관계를 최대한 활성화시키고 국내 무역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여겼다. 그들은 충분한 원자재를 가지고 있는 조지아의 특성을 살려 광업 및 채굴업에 힘을 기울여야 하며, 공예품 개발을 위해 교육받은 사람이 필요하니 학교를 곳곳에 설립하고 국가가 교사들을 지원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들의 대표인 요안니스 바그라토니는 조지아의 중세 관직인 에리스타비, 사타바도스 등을 폐지하고, 이들이 보유하고 있는 토지들을 소작농들에게 나눠줘야 한다고 여겼다. 그는 이 모든 제안을 수락하고 나라의 체계를 러시아식으로 개편했으며, 서양 과학자와 기술자들을 초빙했다.

그는 군대에도 손을 댔다. 상병, 하사관, 상사, 장교, 포병 대령 등 계급 조직을 확립했으며, 포병 지휘관으로 펠드저그마이스터(feldzeugmeister)를 설립했다. 이와 동시에, 왕국의 군대는 러시아에서 파견된 군사 고문으로부터 훈련을 받았다. 이러한 헤라클리오스의 전면 개혁에 반감을 품은 카르틀리 귀족들은 바크탕 6세의 사생아인 파이타를 새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 1765년, 그는 이 음모를 적발하여 반대파를 모조리 처벌했다. 또한 노예 신분인 이들을 해방시키고 전 주인이 그들에게 손을 대지 못한다는 내용의 법령을 공표했다. 1763년 아르메니아 출신 러시아통 정치가 요제프 에민이 트빌리시를 망문하자, 그는 에민을 영예롭게 맞이하고 아르메니아인과 조지아인을 통합할 필요성에 관해 논의했다. 에민은 그가 지체없이 아르메니아인을 외세로부터 해방시키길 바란다고 밝혔다. 그는 이에 적극적으로 동의했고, 인도의 마드라스에서 아르메니아인 해방운동조직을 창설한 샤하마르 샤카미르얀과 손을 잡았다.

그러던 1768년,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이 전쟁을 단행했다. 러시아 차르 예카테리나 2세는 1770년 그에게 사절을 보내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 참여하라고 독려했다. 그는 이 기회에 오스만 제국의 치하로부터 아르메니아를 구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전쟁에 뛰어들었다. 그해 3월, 7,000명의 병력을 소집한 그는 코카서스로 진군한 1,200명의 러시아 분견대 지휘관 토틀레벤과 합세한 뒤 아할치헤로 쳐들어갔다. 4월 14일 사제르 요새를 공략한 연합군은 4월 17일 아즈쿠리 요새를 포위했다. 그는 아즈쿠리 요새를 공략하느라 시간 낭비하지 말고 아할치헤로 계속 진군하자고 제안했지만, 토틀레벤은 적 요새를 후방에 놔둘 수 없다고 판단해 공성전을 벌였으나 공략에 실패했다.

아할치헤 파샤가 구원군을 파견하자, 토틀레벤은 4월 19일에 갑자기 철수했다. 그는 단독으로 아할치헤군을 격파한 뒤 아할치헤로 계속 진격했다. 아할치헤 파샤는 이를 막기 위해 1,500명의 병사를 케르트비시 요새에서 차출하여 반격했지만, 그는 이번에도 격파했다. 얼마 후 8,000명의 오스만군이 아스핀자 근처에 나타나자, 그는 적군 대부분이 므트바리를 넘도록 허용한 뒤 야간에 아가바 에리스타, 시몬 무크란바톤, 쿠디아 보르바할렐리가 분견대를 이끌고 적의 퇴로를 끊게 했다. 1770년 4월 20일, 그가 이끄는 조지아군은 아스핀자 전투에서 오스만군과 맞붙었다. 그의 군대는 오스만군을 상대로 맹공을 퍼부었고, 후방에 매복하고 있던 아가바, 시몬, 쿠디아 휘하 분견대가 적이 다리 쪽으로 후퇴할 때 가로막았다. 이 전투에서 오스만군 4,000명이 전사했고, 여러 지휘관이 목숨을 잃거나 사로잡혔다. 또한 수많은 포로와 깃발, 기마 및 대포들을 노획했다.

그러나 토틀라벤이 러시아군을 이끌고 본국으로 돌아가버린 데다 오스만군이 더 많은 병력을 보낼 기미가 보이자 조지아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1771년 다시 공세를 개시해 케르트비시 요새를 공략했고, 1772년 조지아 총대주교 안톤과 그의 아들 레반이 이끄는 사절단을 러시아에 파견해 지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1773년 솔로몬 1세와의 상호 방위 동맹을 연장한 그는 1774년 의무군을 창설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결과, 그는 항시 5,000명의 병력을 보유할 수 있었고 아들 레반이 이들의 지휘관을 맡았다. 1777년 크사니 공국을 완전히 폐지하고 왕국의 영역에 배속시켰으며, 1778년, 간자의 통치자 알리 칸을 상대로 공세를 가해 상당한 타격을 입혔고, 1779~1780년에 예레반 칸국을 몰아붙인 끝에 굴복시켰다.

1782년 12월 21일 러시아 제국에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왕국을 보호해달라고 공식 요청했다. 1783년 7월 24일, 게오르기에프스크에서 러시아 제국과 카르틀리-카헤티 연합 왕국 사이에 조약이 체결되었고, 그해 11월 2일 2개의 러시아 대대가 트빌리시에 진입했다. 1784년, 조지아인과 러시아인 연합군은 라차 토후국을 공격해 큰 승리를 거두었다. 1785년 9월, 아바리의 통치자 오마르 칸은 2만 대군을 이끌고 조지아로 쳐들어갔다. 러시아군이 승산이 없다고 철수해 버리는 바람에 대항할 여지가 없던 그는 오마르 칸에게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고 돌려보냈다. 1786년, 그는 아할치혜의 쉴레이만 파샤와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그해 12월 18일 사가레조에서 고위급 간담회를 열고 지원에 소극적인 러시아에서 다른 나라로 외교 방향을 수정하는 문제를 논의했지만, 협조를 얻을 만한 나라가 따로 없었기에 러시아와 계속 손잡기로 했다.

한편, 이메레티의 국왕 솔로몬 1세는 자신에게 후계자가 없는 점을 고려하여 그의 손자이며 자신의 조카인 다비트 아르칠로비치를 후계자로 삼았다. 그런데 1784년 솔로몬 1세가 사망한 후 다비트 2세가 밍그렐리아 공작 카지아 2세 다디아니 등 일부 귀족들의 지원을 바탕으로 이메레티 왕으로 추대되었다. 1789년, 그는 손자 다비트를 왕좌에 앉히기 위해 이메레티 왕국으로 쳐들어갔다. 1789년 6월 10일 맛호지 전투에서 이메레티 귀족들의 배신으로 패배한 다비트 2세는 아할치헤로 도주했다. 다비트 아르칠로비치는 왕국의 수도 쿠타이시에 입성한 뒤 솔로몬 2세를 칭하고 즉위했다.

1790년, 이메레티 왕국의 군주 솔로몬 2세가 파견한 사절단이 그를 찾아와서 자신들이 그의 왕국에 합류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는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국무 회의를 열었다. 기오르기 바토니쉬빌리, 다비트 오르벨리아니, 차부아 오르벨리아니, 조지아 총대주교 안톤은 찬성했지만, 이오란 무크란 바토니 등은 반대했다. 그는 고심 끝에 이메레티 왕국을 병합하면 이메레티의 주군을 자처하는 오스만 제국을 심히 자극하여 전면전이 벌어질 우려가 있으니 받아들이지 않기로 하고, 그 대신 그의 손자인 솔로몬 2세의 이메레티 왕위를 인정하고 원조를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얼마 후, 다비트 2세가 솔로몬 2세를 무찌르기 위해 투르크군과 함께 이메리티로 진군했다. 한때 수도 쿠타이시를 장악하고 이메레티 왕위에 복귀했으나, 1791년 러시아 제국의 지원을 받은 솔로몬 2세에게 패배하고 오스만 제국에 망명했다. 그는 다비트 2세와 솔로몬 2세를 중재하여 화해시킨 뒤 다비트 2세가 이메레티로 귀환하여 많은 영지를 받게 했다. 하지만 왕위에 복귀할 야심을 포기하지 않았던 다비트 2세는 1792년 다케스탄에서 용병을 고용해 다시 반란을 일으켰으나 또다시 패배하고 오스만 제국으로 망명했다.

1794년 이란을 통일하여 카자르 왕조를 창건한 아가 모하마드 칸은 조지아를 정복하기 위한 군사 원정을 기획했다. 1795년 6월, 코카서스 남동부의 많은 지역을 공략한 모하마드 칸은 예레반과 슈시 칸국을 마저 정복하러 군대를 파견했다가 헤라클리오스 2세의 아들 알렉산드레에게 격파되었다. 모하마드 칸은 헤라클리오스가 이란의 종주권을 다시 인정하고 러시아와의 관계를 단절한다면 왕위를 인정하겠다고 약속했다. 헤라클리오스가 거부하자, 모하마드 칸은 그해 9월 35,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조지아로 쳐들어갔다. 양군은 크르차니시 전투에서 맞붙었다. 초반에는 조지아군이 상대의 맹공을 번번이 격퇴했지만, 모하마드 칸의 끈질긴 공격을 견디지 못한 조지아군 일부 부대가 이탈하면서 헤라클리오스는 끝내 패배앴다. 이 전투에서 5천 명의 병력을 잃은 그는 트빌리시로 도주했다.

모하마드 칸이 트빌리시를 공격해오자 "이 소중한 도시를 떠나느니 차라리 죽겠다"라고 선언했지만, 경호원들과 가족들의 필사적인 호소에 굴복하여 도시를 떠났다. 모하마드 칸은 트빌리시에 입성한 뒤 도시를 황폐화시키고 백성들을 학살했다. 러시아 제국은 게오르기예프스키 조약에 의거해 조지아에 구원군을 보내야 할 의무가 있었지만, 헤라클리오스의 연이은 요청에도 제때 움직이지 않다가 트빌리시가 함락된 뒤에야 뒤늦게 출진했다. 그러나 1796년 예카테리나 2세가 사망했고, 뒤이어 차르가 된 파벨 1세는 모든 러시아군을 조지아에서 철수시켰다. 그 후 모하마드 칸이 러시아와 동맹을 맺은 조지아인들을 징벌하기 위한 2차 원정을 계획했으나 1797년 암살당하면서 조지아는 망국의 위기에서 벗어났다.


2.8.2. 기오르기 12세와 망국[편집]


헤라클리오스 2세는 생전에 세 번 결혼했다. 1740년 케테반 음하이트제와 결혼하여 아들 바크탕과 딸 루수단을 낳았다. 1744년 아내가 사망한 뒤 1745년 안나 아바시제와 재혼하여 기오르기 12세, 타마르를 낳았다. 1750년 다레얀 다디아니와 결혼하여 8남 9녀를 낳았다. 그는 두번째 아내에게서 낳은 기오르기 12세를 후계자로 일찌감치 지명했다. 이에 현 왕비 다레얀 다디아니 왕비는 헤라클리오스 2세에게 자기 아들들 중에서 후계자를 세우라고 강력히 권고했다. 그러나 헤라클리오스 2세는 그녀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798년 1월 11일 헤라클리오스 2세가 사망한 뒤, 기오르기 12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다레얀 다디아니 왕비와 이울론, 알렉산드레 왕자는 그의 즉위에 반발했다. 그들은 보르찰로, 카라바흐, 샴샤딜 등 무슬림이 다수인 지역을 점거하고 새 왕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했다. 그는 이에 대응하여 아버지가 창설했던 "의무군"을 복원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는 한편 조지아와 아르메니아 기독교의 통합을 위해 노력했으며,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정교회를 전파하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한편, 그는 아버지의 친 러시아 정책을 이어갔다. 러시아에 러시아군을 조지아에 진주시켜달라고 요청했으며, 조지아인들에게 러시아 시민권을 발부해달라고 청했다.

1799년 4월, 파벨 1세는 카헤티-카르틀리 연합 왕국과 후원 계약을 체결하고 그해 가을에 러시아군을 파견했다. 1799년 11월 26일 러시아군이 트빌리시에 진주하여 그의 영접을 받았다. 1800년 6월 24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조지아 사절단은 시민권에 관한 문서 초안을 러시아 외교부에 넘겼다. 그는 이 문서에서 자신의 후손, 성직자, 귀족 및 그에게 복종하는 모든 사람들이 러시아 제국의 시민권을 받아들이고 러시아인이 하는 모든 것을 신성하게 수행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장남 다비트가 왕위를 이어받도록 해주기를 희망했다.

1800년 9월 23일, 또다른 러시아군 연대가 트빌리시에 도착했다. 그해 11월 7일, 라자레프 장군이 이끄는 2개의 러시아 연대가 이오리 강 유역의 카카베티 마을 인근에서 조지아군과 함께 알렉산드레 왕자와 연합한 아바르 칸의 아제르바이잔군을 격멸했다. 이후 중병에 걸린 그는 라자레프 장군과 러시아 정부에서 파견한 관료들이 조지아의 권력을 장악하는 걸 용인했다. 1800년 11월 14일, 파벨 1세는 조지아 사절들에게 조지아인들에게 러시아 시민권을 발부하겠다고 약속했으며, 그의 아들 다비트를 왕으로 인정해주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1800년 12월 28일 그가 사망한 후, 파벨 1세는 조지아를 러시아에 병합하고 다비트를 러시아에 소속된 조지아 속주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1801년 1월 18일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에서 파벨 1세의 카헤티-카르틀리 왕국 합병에 관한 선언문이 공포되었고, 그해 2월 중순 트빌리시에서도 발표되었다.

1801년 3월 12일 파벨 1세가 암살된 뒤 새 차르에 오른 알렉산드르 1세는 조지아를 러시아에 합류시키는 문제를 재고려했다. 그들은 조지아가 중동에서 러시아의 진출에 중요한 교두보임을 고려하여 카르틀리와 카헤티의 자치 행정을 폐지하고 러시아 행정기구를 도입하기로 결의했다. 이 결정에 따라 기오르기 12세의 장남 다비트는 축출되었고, 라자레프 장군이 조지아 주지사로 임명되었다. 러시아의 결정에 분노한 다레얀 다디아니 왕비와 자식들은 조지아의 러시아 병합과 기오르기 12세의 장남 다비트 12세의 권력 승계를 절대적으로 거부했다. 이중 알렉산드레 왕자는 이란과 오스만 제국을 오가며 30여 년간 러시아를 상대로 항전했으나 끝내 진압당했다. 이리하여 조지아는 러시아에 완전히 병합되었다.


3. 역대 군주[편집]



3.1. 카헤티 왕국(1466년 ~ 1762년)[편집]




3.2. 카헤티와 카르틀리 연합 왕국(1762년 ~ 1800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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