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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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훌레구인 울루스
ᠬᠦᠯᠦᠭ ᠦᠨ ᠤᠯᠤᠰ
Hülegü-yn Ulus
سلسله لخانی
Silsila īlkhānī

파일:일 칸국 국기.svg
국기
위치
파일:이란 칸.png
1259 ~ 1336 / 1357
성립 이전
멸망 이후
아바스 칼리파국
잘라이르 왕조
수도
마라게(1256년~1265년)
타브리즈(1265년~1306년)
술타니야(1306년~1335년)
정치 체제
군주제
국가원수

주요 칸
훌라구 칸(1256~1265)
가잔 칸 (1295~1304)
아부 사이드 칸(1316~1335)
주요 재상
라시드 앗딘
언어
중세 몽골어, 페르시아어
민족
몽골인, 페르시아인
종교
샤머니즘, 네스토리우스파, 불교(1256년~1295년)
이슬람 수니파(1295년~1335년)

언어별 명칭
중세 몽골어
ᠬᠦᠯᠦᠭ ᠦᠨ ᠤᠯᠤᠰ (Hülegü-yn Ulus)
몽골어
Хүлэгийн улс
페르시아어
سلسله ایلخانی
영어
Ilkhanate

1. 개요
2. 약사(略史)
3. 맘루크 왕조와의 대립
4. 멸망
5. 역대 칸
6. 역사보기 틀
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일한국(표준국어대사전)


일 칸국의 역사.

칭기즈 칸 사후 몽골 제국에서 갈라져 나온 사 한국(四汗國) 중 하나로, 1258년 훌라구의 정복으로 이란, 소아시아를 중심으로 형성된 국가. 일 칸국의 영역은 서쪽은 아나톨리아 고원에서 동쪽은 아무다리야까지, 북쪽은 캅카스 산맥에서 남쪽은 페르시아 만에 이르렀다. 당시 자료에 '이란 땅(Iran-zamin)'이라고 자주 표현되었으나 오늘날의 '이란'보다는 광의의 개념이다. '일 칸'이라는 칭호는 "대칸[1]에게 복종하는 칸"을 의미한다고 잘못 알려져 왔으나, 튀르크 제어의 '일'은 몽골어의 '울루스'에 상응하는 단어이기 때문에 그 뜻은 '울루스의 군주'로 해석된다.[2] 기존에 서아시아에 존재하던 아바스 왕조의 칼리파 국가들을 없애고, 룸 셀주크를 패퇴시킨 뒤 시리아까지 진격했지만 맘루크 왕조에게 가로막혀 그 이상의 팽창은 하지 못했다. 맘루크-일칸국 전쟁을 잘 정리해 놓은 사이트 북쪽의 킵차크 칸국과 분쟁을 일으켜 대립했으며, 1335년 아부 사이드의 혈통이 단절된 뒤 사실상 분열한 것으로 여겨진다.

2. 약사(略史)[편집]


파일:Bagdad1258-1.jpg
훌라구 칸의 바그다드 공성전
우구데이 가문으로부터 칸위를 빼앗아 즉위한 툴루이 가문의 몽케 칸이, 각 울루스에서 군사를 뽑아 훌레구주치 세력을 주력으로 삼은 후 서아시아 원정군을 편성한 것이 그 시초이다. 이들의 목적은 서아시아의 칼리프 정권과 어쌔신으로 악명이 높았던 시아파 세력을 없애는데 있었다.

1253년 툴루이의 아들 훌레구가 군대를 이끌고 중앙아시아로 나아갔다. 훌라구는 군량 보급에 신경쓰며 이례적으로 천천히 진격해 들어갔다.

1256년 훌라구가 이스마일파(아사신)와 대면, 갓 즉위한 신임 교주가 항복을 청해오자 알라무트 요새의 잔당들을 물리쳤다. 항복한 교주는 대칸 몽케를 알현하러 갔지만 거부당하자 돌아오던 중 살해당했다.

1258년 몽골군이라크로 진군, 아바스 왕조의 마지막 칼리파 알 무스타심에게 항복을 요구한다. 당초 '마그레브와 이라크까지 모든 무슬림들이 도우러 올 것이다'라고 잔뜩 허세를 부리며 이를 묵살했던 칼리파는 대패 후 재상(바지르)의 설득에 항복하나 몽골군은 바그다드를 약탈하고 주민들을 살해한 뒤 칼리파도 죽였다.[3][4]

1260년 몽골 제국군이 서쪽으로 진격해 시리아에서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알 나시르 유수프를 포로로 잡고, 알레포와 다마스쿠스까지 차지한다. 안티오크 공국과 트리폴리 백국이 몽골군에 항복한다. 1259년 큰형 몽케 칸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작은형 쿠빌라이와 동생 아릭 부케의 분쟁에 대한 우려로 훌레구는 주력부대를 거느리고 정복지 페르시아로 돌아왔다. 키트 부카(Kit-buqa)가 거느린 별동대가 시리아에 잔류. 이 부대가 아인 잘루트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사령관 키트 부카도 여기서 전사했다. 이후 맘루크 군대는 시리아에서 몽골 세력을 몰아냈다.[5]

파일:Bataille_du_Terek_(1262).jpeg.jpeg.jpg
테레크 강 전투, 이곳에서 훌라구의 군대는 대패해 아제르바이잔으로 후퇴한다.[6]
1261~62년 훌라구와 킵차크 칸국 베르케의 사이가 악화해 두 칸국간 전쟁 발발. 킵차크 칸국은 일 칸국의 주요 통상로 및 페르시아의 목초지 획득에 관심이 있었다.[7] 또 베르케 개인이 무슬림이었기에, 칼리파를 살해한 행위에 분노한 탓도 있었다.[8] 이 시기에 다시 한번 맘루크를 치려고 시도했지만 북방의 병란(兵亂)이 이어지는 와중이라 실패로 돌아갔다.

1262년 무렵 훌라구가 프랑스루이 9세에게 보낸 서한에, 시리아에서 철수한 이유를 '군대에 필수적인 마초(馬草)와 목초지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언급했다. 이 시기 이후 일 칸국은 서유럽 군주들이나 교황과 접촉하며 맘루크에 맞선 동맹 구축을 시도했다. 이에 유럽의 십자군 전쟁 때 지원병을 보내주었다.

1263년 캅카스를 점령하기 위해 수차례 공격했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이는 결국 몽골 제국의 내전으로 발전했다.

1265~82년 아바카 칸마라게에서 타브리즈[9]로 천도하였다. 아바카의 통치기에는 중과세로 토지에서 이탈하는 농민이 늘어났다.

파일:Tegüder_recevant_une_ambassade.jpeg-1.jpg
"술탄 아흐무드" 테쿠데르 칸
1283~84년 테쿠데르 칸의 치세, 본래 아르군에게 돌아갔어야 할 칸의 자리를 찬탈하고, 이슬람에 매료되어 개종한건 물론 스스로를 "술탄"이라 칭하고, 몽골인들에게 이슬람을 강요하다 쿠빌라이에게 경고를 듣는 등, 지나친 친이슬람 정책을 펼치다 아르군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나, 이미 테쿠데르에게 질린 그의 장군들이 테쿠데르를 아르군에게 넘겨 테쿠데르는 처형당한다.

파일:1280px-AbaqaOnHorseArghunStandingGhazanAsAChild.jpg
아바카 칸과 아르군 칸, 아르군 칸의 어깨에 업혀있는 아이는 가잔 칸이다.
1284~91년 아르군(Arghun) 칸의 치세. 아르군은 타브리즈 교외에 아르구니야라는 도시를 세우고 자신과 비슷한 조각상을 안치하는 불교 사원을 세웠다.그가 세운 또 다른 도시는 샤루야즈였는데, 샤루야즈는 그의 아들 올제이투의 통치 기간에 완성되었다. 유대계 무슬림인 재상 사드 앗 다울라(Sad al-Daula)의 개혁. 그는 귀족의 특권을 제한하여 수입을 삭감하고 정부재정을 늘리려 했다. 이 같은 조치는 당연히 몽골인 귀족들의 반감을 사 사드 앗 다울라는 칸이 중병으로 눕자마자 살해당했다.

1287년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수도자인 랍반 사우마(Rabban Sauma)를 유럽에 사절로 파견. 사우마는 교황 및 각국 군주들과 만나고 유럽에 대한 인상기(印象記)를 남겼다.

1291~95년 게이하투(Geikhatu) 칸의 치세. 극심한 우역(牛疫)이 횡행. 지폐인 '교초'의 발행 및 유통 시도가 실패.

파일:이란 가잔.jpg
파일:이란 가잔칸.jpg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가잔 칸
쿠란을 탐독하는 가잔 칸 내외

1295~1304년 가잔 칸의 치세. 가잔은 이슬람으로 개종하였고, 그의 치세 초반 실권자였던 나와루즈는 제국 내 모든 불교 사찰을 폐쇄시켰다.

'집사'의 저자인 재상 라시드 앗 딘(Rashid al-Din)의 개혁. 세율과 징세를 법정화하고 역참을 재편했으며, 화폐제도와 도량형을 개정했다. 또 무슬림 재판관인 카디(qadi)의 권한과 보수에 대해 규정하고, 황무지 개간을 장려하고 혜택을 주었다. 그 외에도 군대의 봉급 수단을 개편했다. 그 결과 국가의 1년 조세 수입이 1,700만 디나르에서 2,100만 디나르로 늘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가잔 칸이 죽은 뒤 그의 개혁은 대부분 무위로 돌아갔다.

이 외에도 농민을 토지에 묶어두려는 조치를 취했으며, 죽기 직전 몽골 군벌들이 지역 주민들의 노동력을 무상으로 징발하는 것을 제한하기 위해 이크타(اقطاع) 제도를 시행하였다. 이 이크타 제도는 한국사로 비교하자면 신라의 식읍, 녹읍 같은 개념보다는 고려시대의 수조권 개념에 가까웠다. 즉 세금을 대신 징수할 권리는 있었으나 주민들의 노동력을 징발할 권리는 없었다.

1299~1300년 가잔 칸이 처음으로 맘루크 군대를 패배시키고 다마스쿠스를 점령해 일시적으로 시리아 전역을 장악. 그러나 이를 계속 유지시킬 수가 없었기에[10] 일시적인 정복으로 약탈품을 챙긴 뒤 도로 물러나야 했다#.

1303년 다마스쿠스로 다시 진군하나, 맘루크 군대에 대패를 맛보고 결국 시리아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파일:1280px-Solt_dome_1.jpeg.jpg
올제이투 칸의 영묘인 "술타니야의 돔"
1304~16년 올제이투(Oljeitu) 칸의 치세. 기독교 세례성사를 받아 '니콜라오'라는 세례명[11]을 가졌지만, 가잔 칸의 영향으로 무슬림이 되었다. 타브리즈에서 술타니야(Sultaniyya)로 천도했고, 재상 라시드 앗 딘이 몽골족의 역사에 대한 가장 권위있는 사서(史書)인 '집사' 편찬을 마무리하도록 지원했다. 올제이투는 또한 치세 말엽에 쉬아 이슬람으로 개종하여 주류 아미르들에 충격을 주었다.

1312년 올제이투 칸이 최후의 맘루크 원정을 떠나나 결국 유프라테스 강 일대에서 패배한다.

1316~35년 아부 사이드(Abu Said) 칸의 치세. 그의 치세는 일 칸국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라는 평가가 있는가 하면, 내란과 음모로 쇠락한 시대라는 평가가 역사가들 사이에서 엇갈린다.

1322년 맘루크 왕조와 평화조약 체결. 이로써 일 칸국에서 서유럽과 적극적으로 연대하려는 움직임이 사라진다.

1327~35년, 라시드 앗 딘의 아들 기야스 앗 딘(Ghiyath al-Din)이 재상이 되어 통치했다.

1335년 여러 부인을 두고도 자식을 얻지 못한 아부 사이드가 죽자, 통치자가 사라진 일 칸국 정부의 통치력이 상실되어 칸국이 사실상 붕괴. 이후 티무르칭기즈 칸의 후손을 꼭두각시 칸으로 내세워 집권할 때까지 수십 년 동안 혼란 상태가 지속된다.


3. 맘루크 왕조와의 대립[편집]


파일:4888300.jpg
일 칸국과 맘루크 왕조 (화살표는 훌라구 칸의 서정)
일 칸국의 역사는 시리아-이집트의 맘루크 왕조와의 대립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만큼 서로에게 있어 숙적에 가까울 만큼 오랫동안 대립했다. 1243년 카세다 전투로 룸 술탄국을 복속 시키고 시리아의 아이유브 술탄국과 교전 한 것을 시작으로 긴 악연이 시작되었다.

파일:Ayyubids_1257.png
훌라구의 원정 당시 시리아 아이유브 왕조
파일:1200px-Campaign_of_the_Battle_of_Ain_Jalut_1260.svg-1.png
아인 잘루트 전투
훌라구가 1260년 시리아 아이유브 왕조를 점령하고, 아인 잘루트에서 바이바르스에게 대패한 이듬해 맘루크 왕조는 알 무스탄시르 2세를 바그다드로 보내 공격하지만 몽골군에게 패배하고, 이후 몽골 내전이 발발하자 맘루크 왕조는 훌라구와 대립하던 킵차크 칸국과 연합하고, 일 칸국은 쿠빌라이 칸동로마 제국과 연합한다.

파일:FF31k-pXsAofq-F.jpg
미하일 8세의 사생아이자 아바카 칸의 데스피나 카툰 (마리아 팔레올로기나)
동로마 제국의 미하일 8세는 사생아 마리아 팔레올로기나를 아바카 칸에게 시집보내 일 칸국과 결혼동맹을 맺었고, 이는 적어도 올제이투 칸 치세까지 유지되었다.

파일:EdwardICrusadeMap-1.jpg
9차 십자군 원정 당시 몽골군의 진군로
1271년 9차 십자군 당시 아바카 칸은 사마가르를 사령관으로 1만여명의 몽골군을 보내지만, 몽골 내부의 불안정한 정세 때문에 알레포를 점령하는 선에서 그치고 회군했다.

이후 1280년 아르군은 4만 군세를 이끌고 알레포를 점령하지만 홈즈에서 맘루크 군의 반격에 패배해 물러난다.

아바카 칸이 죽고 테쿠데르 칸이 친 이슬람 정책를 펼치며 잠시 맘루크와의 관계가 진전되지만, 테쿠데르가 아르군에게 처형당하고 아르군이 다시 맘루크를 적대해 무위로 돌아간다.

파일:1280px-VoyagesOfRabbanBarSauma-1.jpg
랍반 사우마의 여행로
파일:800px-ArghunLetterToPhilippeLeBelExtract1289.jpg
아르군 칸이 미남왕 필리프에게 십자군 원조를 요구하는 서신[12]
아르군 칸은 쿠빌라이 칸으로 부터 맘루크 토벌을 명령받고, 대도에서 온 사신 랍반 사우마를 로마 교황청과 프랑스로 보내 십자군 원조를 약속받게 하였다.
카이로를 일 칸국이 가지는 대신, 예루살렘을 예루살렘 왕국에 양도한다는 조건으로 1291년 8월에 성사된 이 동맹으로 교황 니콜라오 4세는 십자군 원정을 선포하지만 아르군 칸이 이미 1291년 3월에 죽고, 이듬해 니콜라오 4세마저 죽자 이 원정은 흐지부지 된다.

파일:1200px-Mongol_raids_into_Syria_and_Palestine_ca_1300.svg.png
가잔 칸의 시리아 원정로
이후 가잔 칸이 몽골군 6만과 4만의 아르메니아, 조지아 군을 이끌고 1299년 침공하여 맘루크 군을 격파하고 다마스쿠스를 점령하지만 차가타이 칸국의 침공으로 1300년 회군한다.[13]
다마스쿠스에 남은 몽골군들은 시리아 주변을 약탈하거나 가자까지 침공하다 맘루크 군의 반격에 패퇴했다. 이후 1301년 다시 다마스쿠스를 점령하고, 시리아를 약탈하다 철수, 이후 1303년 다시한번 다마스쿠스를 공격하지만 다마스쿠스 바로 앞의 마르즈 알 사파르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대패하고 철수한다.

파일:1280px-OljeituToPhilippeLeBel1305.jpg
올제이투 칸이 필리프 4세에게 보낸 서신[14]
이후 올제이투 칸의 치세, 이전 칸들 처럼 유럽, 원나라와의 동맹을 유지하며 신흥 아나톨리아 베이국과 맘루크 왕조와의 대립을 이어가며 다시한번 시리아 원정에 착수하지만 1312년 라바트 점령에 실패하자 다시 한번 수포로 돌아간다. 이러한 대립은 일 칸국이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잠잠해졌고 1322년 아부 사이드 칸이 맘루크와 평화조약을 맺으면서 마침내 두 나라의 갈등이 끝났다.

몽골을 '프레스터 존'이라 여겼던 14세기 이탈리아에서는 일 칸들의 이름을 따 아기들을 작명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 예시로는 대칸을 뜻하는 칸 그란데, 훌라구가 와전된 알라오네, 아르군이 와전된 아르고네, 가잔이 와전된 카사노 등이 있다.

4. 멸망[편집]


파일:이란 일칸국.png
14세기 중반, 일 칸국 멸망 후의 서아시아 판도

13세기 초엽 올제이투 칸의 치세부터 일 칸국은 내우외환에 시달렸고, 1319년 전후에 맘루크 왕조나 차가타이 칸국 등 기존의 적국들과 평화 협정을 맺었다. 하지만 귀족들의 반란은 이어졌고, 1330년대 서아시아를 강타한 흑사병은 아부 사이드 칸의 아들들의 목숨을 앗아가며 노쇠한 칸에게 장성한 후계자를 남기지 않았다. 1335년에는 아부 사이드 칸마저 흑사병에 희생되자, 지방의 귀족들은 그대로 자립하였다. 이로써 일 칸국은 허망히 붕괴되었고, 연이은 내부 반란과 외부 교섭을 통해 권력을 쌓은 추판 (초반) 가문과 잘라이르 왕조가 득세하여 마음대로 칸들을 옹립하고 권세를 휘둘렀다. 하지만 1357년 킵차크 칸국이 남하하여 타브리즈를 점령하면서 형식상으로나마 유지되던 일 칸국은 완전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15]


5. 역대 칸[편집]


파일:일 칸국 국기.svg
일 칸국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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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권 칸
초대
2대
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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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라구 칸
아바카 칸
테쿠데르 칸
아르군 칸
게이하투 칸
제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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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대
제9대
제10대
바이두 칸
가잔 칸
올제이투 칸
아부 사이드 칸
아르파 케운 칸
꼭두각시 칸
제11대
제12대
제13대
제14대
제15대
무사
무함마드
사티 벡
슐레이만
자한 테무르
제16대
제17대
아누시라완
가잔 2세
호라산 대립 칸
초대
제2대
토가 테무르
루크만
아케메네스 왕조 · 셀레우코스 왕조 · 아르사케스 왕조(파르티아) · 사산 왕조 · 사파비 왕조 · 아프샤르 왕조 · 잔드 왕조 · 카자르 왕조 · 팔라비 왕조 · 이란 라흐바르 · 이란 대통령



대수
칸호(휘)
재위기간
비고
초대
훌라구 칸
1256 ~ 1265
툴루이의 아들
2대
아바카 칸
1256 ~ 1282
3대
테쿠데르 칸
1282 ~ 1284
'무능한 칸'
4대
아르군 칸
1284 ~ 1291
5대
게이하투 칸
1291 ~ 1295
무슬림 칸
6대
바이두 칸
1291 ~ 1295
7대
가잔 칸
1295 ~ 1304
이슬람 국교화
8대
올제이투 칸
1304 ~ 1316
솔터니예 건설
9대
아부 사이드 칸
1316 ~ 1335
최장 기간 재위
10대
아르파 케운 칸
1335 ~ 1336
[16]

마지막 주권 군주인 아르파 이후 꼭두각시 군주들:
  • 무사
  • 무함마드
  • 사티 벡(여성)
  • 슐레이만
  • 자한 테무르
  • 아누시라완
  • 가잔 2세

호라산의 대립 군주들:
  • 토가 테무르
  • 루크만


6. 역사보기 틀[편집]




[각주]











파키스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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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다라
마케도니아 - 알렉산더
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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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우리야 왕조
인도 - 그리스 왕국
탁실라
메난데르 대왕
탁슬라
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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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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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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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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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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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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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샨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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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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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샨 샤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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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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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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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타
굽타 제국
신드
신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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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스 왕조
신드
M
신드
S
압히라
신드
구자라
숨라
K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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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산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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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파르 왕조
사만

제국
Q
G
B
쿠프
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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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15세기
16세기 : 무굴 제국
17세기
나디르 샤
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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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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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라즘
티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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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굴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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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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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트
J
가즈니

구르 제국
맘루크 왕조
델리술탄 - 킬지
델리 술탄 왕조

투글루크 왕조

사이드 왕조
로디 왕조
미슬
L
G
L
H
구르 제국
델리
맘루크 왕조
M
구르 왕조
가즈니
물탄
C
M


제국

제국
일 칸국
미라반 왕조
무자파르
왕조

헤라트

카불
무굴
Q

호타키
B
호라즘
사파비 왕조
사파비 왕조
M
S
숨라
숨라
왕조
숨라
아르군
무굴
신드
K
※ K는 카슈미르, P는 페샤와르, L은 라호르, M은 물탄, P는 펀자브 남부, S는 신드 지방, Q는 퀘타, B는 발루치스탄, M은 마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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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국몽골 본토를 통치하는 칸[2] 울루스란 황금씨족이 분봉으로 받은 몽골인들로 구성된 단위였다.[3] 이때 살해된 주민의 수가 80만에서 200만에 이른다는 사료가 있으나 1184년에 이미 도시가 쇠락하고 있었다는 당대의 기록이 전해지기에 신뢰성은 낮은 편이다.그 정도가 시내에 있었다면 서로 낑겨서 움직이지도 못했을 듯[4] 이때 칼리파는 '고귀한 자'는 피를 보지 않는 방식으로 죽이는 몽골의 관습에 따라 칼리파를 카펫으로 둘둘 만 뒤 때려 죽였다(혹은 말로 짓밟아 죽였다)고 한다.[5] 이 전투가 최초로 폭발하는 포탄이 사용된 전투 중 하나이다.[6] 약 100여년 뒤, 일 칸국의 영토를 손에 넣은 티무르와 킵차크 칸국의 토크타미쉬가 이곳에서 결전을 벌여 티무르가 토크타미쉬를 패퇴시키고 킵차크 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다. 이를 계기로 킵차크 칸국은 쇠퇴일로를 걸었고 토크타미쉬도 칸 자리에서 쫓겨나 끝내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7] 사실 장자에게 가장 먼 지역을 분봉하는 관습에 따라 이란 지역은 주치 울루스의 영역이었던 것을 구유크 칸이 바투가 임명한 지방관들을 몰아내었다. 그처럼 실지 회복이라는 측면도 있고, 다른 방면인 러시아 북부와 동유럽은 가난하기 때문에 확장할 가치가 떨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8] 1251년 몽케가 즉위할 때 툴루이의 자식들이 오고타이 및 차가타이 쪽 혈족들을 대규모로 숙청한 데 이어, 1261~62년 사이 킵차크 칸국과 일 칸국이 정면충돌하는 일이 발생하면서 군주들끼리의 혈연관계를 통해 통일성을 유지하던 '몽골 제국'은 사실상 소멸하고 개별 칸국들이 병립(竝立)하는 시대가 된다.[9] 현대 이란 북서부의 대도시.[10] 차가타이 칸국의 침공으로 물러나야 했다.[11] 당시 로마 교황니콜라오 4세가 대부(!)가 되었다.[12] 서신에 찍힌 인장은 몽골 대칸의 인장이다.[13] 이 시기 키프로스에서 십자군 최후의 거점 루아드를 수비하기 위해 갤리 16척을 보내지만 패퇴했다.[14] 몽골 내전이 끝났다는 내용의 서신이다[15] 한편 호라산에서 칸위를 주장하던 토가 테무르의 아들 루크만을 티무르가 일 칸으로 옹립하였으나 1388년 그가 사망하면서 칭호마저 완전히 사라졌다.[16] 마지막으로 실질적인 권력을 가졌던 칸. 아르파 칸이 내전에서 패해 사망한 후 1357년까지 알려진 것만 해도 일곱 명의 황금씨족 칸이 군벌들과 후계 국가들에 의해 꼭두각시로 옹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