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라트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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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클라제티 공작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아쇼트 1세
바그라트 1세(타오-클라제티)
아다르나세 2세
과람
타오 공작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다비트 1세
구르겐 1세(타오)
아다르나세 3세
아쇼트 2세
타오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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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대
제7대
제8대
구르겐 2세
바그라트 1세
아쇼트 3세
아다르나세 4세
타오 공작
제9대
제10대
제11대
-
바그라트 2세(타오)
다비트 3세
바그라트 3세
-
클라제티 공작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숨바트 1세(클라제티)
다비트 1세(클라제티)
바그라트 1세(클라제티)
숨바트 2세
클라제티 공작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다비트 2세(클라제티)
바그라트 2세(클라제티)
숨바트 3세
바그라트 3세(클라제티)
이베리아 국왕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아다르나세
다비트 2세
숨바트 1세
바그라트 2세
이베리아 국왕
제5대
-
-
-
구르겐 1세
-
-
-
조지아 왕국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바그라트 3세
기오르기 1세
바그라트 4세
기오르기 2세
조지아 왕국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다비트 4세
데메트리우스 1세
다비트 5세
데메트리우스 1세
조지아 왕국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기오르기 3세
타마르
기오르기 4세
루수단
조지아 왕국
제13대
제14대
-
-
다비트 6세
다비트 6세
다비트 7세
-
-
서부 조지아 왕국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다비트 6세
콘스탄틴 1세(서부 조지아)
미켈(서부 조지아)
바그라트 1세(서부 조지아)
동부 조지아 왕국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다비트 7세
데메트리우스 2세
바흐탄그 2세
다비트 8세
동부 조지아 왕국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기오르기 5세
바흐탄그 3세
다비트 8세
기오르기 6세
동부 조지아 왕국
제9대
-
-
-
기오르기 5세
-
-
-
1차 통합 조지아 왕국
초대
제2대
제3대
-
기오르기 5세
다비트 9세
바그라트 5세
-
1차 이메레티 왕국
초대
제2대
제3대
-
알렉산드레 1세(이메레티)
기오르기 1세(이메레티)
콘스탄틴 2세(이메레티)
-
2차 동부 조지아 왕국
초대
2대
-
-
바그라트 5세
기오르기 7세
-
-
2차 통합 조지아 왕국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기오르기 7세
콘스탄틴 1세
알렉산드레 1세
바흐탄그 4세
2차 통합 조지아 왕국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기오르기 8세
바그라트 6세
알렉산드레 2세
콘스탄틴 2세
2차 이메레티 왕국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알렉산드레 2세
바그라트 3세(이메레티)
기오르기 2세(이메레티)
레반(이메레티)
2차 이메레티 왕국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로스톰(이메레티)
바그라트 4세(이메레티)
기오르기 3세(이메레티)
알렉산드레 3세
2차 이메레티 왕국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바그라트 5세(이메레티)
바흐탄그 츠추나슈빌리
아르칠리(이메레티)
디미트리오스 구리엘리
2차 이메레티 왕국
제13대
제14대
제15대
제16대
기오르기 4세(이메레티)
알렉산드레 4세
기오르기 5세(이메레티)
시몬(이메레티)
2차 이메레티 왕국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마미아 구리엘리
기오르기 6세(이메레티)
기오르기 7세(이메레티)
기오르기 8세(이메레티)
2차 이메레티 왕국
제21대
제22대
제23대
제24대
알렉산드레 5세
기오르기 9세(이메레티)
마무카
솔로몬 1세
2차 이메레티 왕국
제25대
제26대
제27대
-
테이무라즈(이메레티)
다비트 2세(이메레티)
솔로몬 2세
-
카헤티 왕국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기오르기 8세
알렉산드레 1세(카헤티)
기오르기 2세(카헤티)
레반(카헤티)
카헤티 왕국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알렉산드레 2세(카헤티)
다비트 1세(카헤티)
콘스탄틴 1세(카헤티)
테이무라즈 1세
카헤티 왕국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아르칠리(이메레티)
에레클레 1세
다비트 2세(카헤티)
콘스탄틴 2세(카헤티)
카헤티 왕국
제13대
제14대
-
-
테이무라즈 2세
타마르 2세
에레클레 2세
-
-
카르틀리 왕국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콘스탄틴 2세
다비트 10세
기오르기 9세
루아르사브 1세
카르틀리 왕국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시몬 1세
다비트 11세
기오르기 10세
루아르사브 2세
카르틀리 왕국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바그라트 7세
시몬 2세
로스톰
바흐탄그 5세
카르틀리 왕국
제13대
제14대
제15대
제16대
기오르기 11세
에레클레 1세
카이호스로(카르틀리)
예세
카르틀리 왕국
제17대
제18대
-
-
바흐탄그 6세
테이무라즈 2세
타마르 2세
-
-
카헤티와 카르틀리 연합 왕국
초대
제2대
-
-
에레클레 2세
기오르기 12세
-
-



카르틀리 공작
압하지야 왕국 22대 군주
타오 공국 11대 공작
조지아 왕국 초대 군주

ბაგრატ | 바그라트 3세
파일:바그라트 3세.jpg
제호
한국어
바그라트 3세
조지아어
ბაგრატ
라틴어
Bagrat III
가족
구르겐 1세(친아버지)
다비트 3세(양아버지)
구란두크트(어머니)
마르타(아내)
기오르기 1세(장남)
바실(차남)
생몰 년도
960년대 ~ 1014년 5월 7일
재위 기간
카르틀리 공작
975년 ~ 978년
압하지야 국왕
978년 ~ 1008년
타오 공작
1001년~1008년
조지아 국왕
1008년~1014년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압하지야 왕국 22대 군주, 타오 공국 11대 공작, 조지아 왕국 초대 군주. 400여 년간 이어진 조지아 왕국의 창건자이다.

2. 생애[편집]


960년대 이베리아 왕국 바그라티온 왕조의 왕자 구르겐 1세와 압하지야 왕국의 18대 군주 기오르기 2세의 딸 두란두크트(Gurandukht)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상류 타오 공작이며 자녀가 없었던 다비트 3세의 양자로 보내졌다. 이는 구르겐 1세가 허울뿐인 이베리아 왕위를 물려주는 것보다는 조지아에서 가장 강력한 권세를 구가하는 다비트 3세의 후계자가 되는 편이 아들에게 더 나은 선택이라고 여겼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다비트 3세의 궁정에서 우수한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당시 이베리아는 현재의 조지아 서쪽에 자리잡은 압하지야 왕국의 지배에 놓여 있었다. 압하지야 왕국은 본래 동로마 제국의 속국이었지만, 동로마 제국이 아랍과 전쟁을 벌이느라 정신없는 틈을 타 독립을 선포하고 세력을 날로 확장해 조지아 각지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960년 게오르기 2세가 사망한 뒤 국력이 갈수록 약해지더니 976년 테오도시오스 3세가 왕위에 오른 뒤 귀족들과 내전을 벌이면서 전국에 혼란에 휩싸였다. 동부 조지아를 통치하던 카케티아의 크비리케 2세는 이를 틈타 압하지야를 몰아붙여 영토를 상당부분 뜯어냈다.

그러나 크비리케 2세의 잔혹한 통치에 불만을 품은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다비트 3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976년, 다비트 3세는 크비리케를 물리치고 카르틀리를 확보한 뒤 아직 10대 소년이었던 그를 카르틀리 통치자로 임명했다. 그는 아버지 구르겐 1세의 섭정을 받으며 정무 경험을 쌓았다. 978년 테오도시오스 3세가 다비트 3세의 강한 압력으로 폐위된 뒤, 그가 압하지야의 새 국왕에 선출되었고 어머니 구란두크트가 섭정을 맡았다. 2년 후, 카르틀리 귀족들은 그를 왕으로 인정하는 걸 거부하고 카브타르 트벨리를 지도자로 내세웠다. 그는 친히 군대를 이끌고 카르틀리로 진군해 모그리 전투에서 반란군을 격파했다. 이 일을 계기로 두란두크트는 섭정을 끝냈고, 그가 본격적으로 친정했다.

그는 탁월한 통치술을 발휘해 반란을 일삼았던 압하지야 귀족들을 복종시키고 왕국에 질서를 가져왔으며,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던 990년, 트라이엘리티, 망기시 계곡, 스코레티 등 압하지야 동부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라티 공작이 복종을 거부했다. 그는 이들을 토벌하기로 하고 동원령을 선포했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 동로마 황제 바실리오스 2세에게 굴복하여 자신이 죽으면 영지를 제국에 바치겠다고 서약한 일로 마음이 상했던 다비트 3세는 양아들이 자신을 해치려 든다고 의심했다. 그는 친자식을 돕기 위해 이동 중이던 구르겐 1세의 군대를 기습 공격해 섬멸해버렸고, 구르겐 1세는 한 요새로 도피했다.

이 소식을 접한 그는 홀로 다비트 3세에게 가서 그의 발 앞에 엎드리며, 자신은 복종을 거부한 라티 공작을 정벌하려 했을 뿐이지 그를 칠 의도는 전혀 없었다고 해명했다. 이에 다비트 3세는 오해를 풀고 그를 돌려보냈다. 그는 압하지야로 돌아간 뒤 라티가 자신의 영역으로 돌아가도록 내버려둔 뒤, 겨울 동안에 군대를 소집하고 기습 공격을 가하여 라티를 클데카르니에서 크게 격패했다. 그는 항복한 라티를 용서하고 서부 조자이의 아르그베티 공작으로 임명했다.

1001년 3월 31일 성대목요일, 다비트 3세가 귀족들의 음모로 독살당했다. 그는 친아버지 구르겐 1세의 협조에 힘입어 다비트 3세의 영지를 회수했다. 얼마 후, 바실리오스 2세가 다비트 3세가 "제가 죽으면 모든 영지를 제국에 헌납하겠습니다."라고 약속했던 걸 상기시키며 다비트 3세의 영지를 제국에 귀속시키라고 명령했다. 이에 그는 자신은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걸 전혀 몰랐으며 정당한 후계자인 자신이 아무것도 받지 못하는 건 억울하다며 거부했다.

당시 불가리아 제1제국사무일과 국가의 운명을 건 전쟁을 치르고 있던 황제는 조지아인들과 마찰을 벌이는 건 무익하다고 보고, 바그라트 3세가 다비트 3세의 영지를 그대로 가지는 걸 인정했다. 다만 이 과정에서 동로마 제국과 가까운 다비트 3세의 영지 일부는 제국에 귀속되었다. 바그라트 3세는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쿠로팔레스 칭호를 받았고, 그는 마기스테르 칭호를 받았다. 쿠로팔레스가 마기스테르보다 더 높은 칭호였는데, 이는 그가 아들에게 질투심을 느끼고 자중지란을 일으키도록 유도하려는 황제의 술책이었다. 그러나 구르겐이 아들이 자기보다 높은 직위를 가지는 걸 깨끗하게 인정해버리면서 무산되었다.

1008년 이베리아의 왕을 역임하던 구르겐 1세가 사망했다. 구르겐 1세는 임종 직전에 자신의 모든 직위와 재산을 아들에게 넘긴다는 유언을 남겼다. 그는 이에 따라 타오 공국 전체와 압하지야 전역을 석권하면서 클라제티 일대를 제외한 조지아 대부분을 장악했다. 그는 이 시기에 조지아 왕국의 출범을 각지에 선포했다. 이어 자신에게 복종하길 거부하는 카케티아 공국으로 쳐들어가 카케티아 공국의 동쪽 영토인 헤레티아를 황폐화시키고 대리인을 앉혔다. 그러나 헤레티아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대리인을 쫓아내고 카케티아와 통합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바그라트 3세는 재차 원정을 떠나 헤레티아 반란군을 무찌르고 헤레티아의 합병을 완료했으며, 조지아 서부에 해당하는 이메레티 지역 귀족들을 복종시켰다. 뒤이어 카케티아 정복 전쟁을 단행해 1010년 완수하고 조지아 왕국의 영역으로 합병시켰다. 그는 이 시기에 자신을 "압하지야인, 란스, 카흐인, 카르트벨인의 왕"이라 칭했다.

이제 그의 시선은 클라제티 공국으로 향했다. 1011년, 그는 클라제티 공작 숨바트 3세에게 파나스카르티 성에서 협상하고 싶으니 와달라고 요청했다. 숨바트 3세는 요청에 응해 그곳에 갔지만 곧바로 체포되어 트모그비 성에 갇혔다가 곧 처형되었고, 클라제티 공국은 바그라트 3세의 수중에 넘어갔다. 이리하여 조지아 전역이 그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숨바트 3세의 아들 바그라트 3세는 사촌 데메테르와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달아난 뒤 클라제티 공작을 칭하며 동로마 제국의 후원을 받아 바그라트 3세에 맞섰으나 대세를 뒤집지 못했다.

그는 뒤이어 이웃 나라들에 대한 전쟁을 전개했다. 1012년 아르메니아 왕국과 동맹을 맺고 조지아 동부를 지속적으로 습격하던 아제르바이잔의 토후국 파드룬을 공격했다. 그리고 란스를 점령하고 조지아의 속주로 삼고, 에미르 체다디드가 피신한 찬코르 요새를 포위 공격했다. 요새가 며칠 만에 함락되자 체다디드는 항복했고, 그는 파드룬을 조지아의 가신으로 삼고 공물을 받는 조건으로 풀어줬다. 체다디드는 조지아 왕 뿐만 아니라 바그라트 3세가 아제르바이잔을 합병하지 않고 평화를 맺도록 설득한 귀족들에게도 수많은 선물을 제공해야 했다.

이렇듯 영토 확장 정책을 추진한 그는 조지아 정교회 진흥 정책도 추진했다. 대주교좌를 설치하고 베디아 대성당을 포함한 여러 성당을 세웠다. 특히 수도 쿠타이시에 건설된 바그라티 대성당은 조지아 정교회의 상징으로서 조지아인들의 자긍심을 고취하는 역사적 유산으로 손꼽힌다. 그렇게 외치와 내치 모두에서 성과를 거두던 그는 1014년 5월 7일에 타오의 파나스케르티 성에서 사망하고 베디아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2016년 12월 22일 조지아 정교회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축일은 5월 7일로 확정되었다.

그는 마르타라는 이름의 여인과 결혼하여 기오르기 1세와 바실을 낳았다. 1014년 사망 후 장남 기오르기 1세가 왕위에 올라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을 단행했다. 또한 차남 바실은 이교도들을 개종시키는 데 크게 활약해 신실한 정교회 신자로 존경받았고, 조지아 정교회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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