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마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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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 왕국 10대 군주
თამარ | 타마르
파일:Queen_Tamara_of_Georgia.jpg
제호
한국어
타마르
조지아어
თამარ
라틴어
Tamar
가족
기오르기 3세(아버지)
알라니아의 부르두한(어머니)
루수단(여동생)
유리 보골류프스키(첫째 남편)
다비트 소슬란(둘째 남편)
기오르기 4세(장남)
루수단(장녀)
생몰 년도
미상 ~ 1213년 1월 18일
재위 기간
1184년 3월 27일 ~ 1213년 1월 18일
서명

1. 개요
2. 생애
3. 사후
4. 평가
5. 미디어



1. 개요[편집]


조지아 왕국 10대 여왕. 내치와 외정 모두 성공을 거두면서 다비트 4세부터 시작된 조지아 황금시대의 정점을 이끈 명군이다. 후대의 여왕 타마르 2세가 있어서 구별을 위해 '타마르 1세'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2. 생애[편집]


조지아 왕국 9대 군주 기오르기 3세와 북캅카스의 알란 부족 지도자 쿠르단의 딸 부르두한의 장녀다. 여동생으로 루수단이 있었다. 1177년 다비트 5세의 아들이자 기오르기 3세의 조카였던 뎀나가 이바네 오르벨리의 추대를 받아 반란을 일으켰다. 기오르기 3세는 반란을 가차없이 토벌했고, 뎀나는 실명형과 거세형을 동시에 받은 뒤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곧 죽었다. 당시 기오르기 3세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유일한 남자 왕족이었던 뎀나를 자기 손으로 처단했으니, 이제 남은 후계자는 두 딸 뿐이었다. 기오르기 3세는 심사숙고한 끝에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지도력이 뛰어난 그녀를 후계자로 삼기로 마음먹었다.

1178년, 기오르기 3세는 모든 조지아 귀족과 고위 성직자들을 소집한 뒤 딸을 공동 통치자에 선임했다. 두 사람은 같은 해에 회의를 소집해 강도와 도적을 사형에 처하는 법을 마련하고 도둑을 잡는 치안관들을 신설하기로 했다. 이 법은 13세기까지 유효했지만 강도는 오랫동안 근절되지 않았다. 1184년 3월 27일 기오르기 3세가 트빌리시에서 사망한 후 겔라티 수도원에 안장되면서, 그녀는 조지아 왕국의 단독 여왕이 되었다. 그러나 일부 귀족들은 여왕의 통치에 문제를 제기했고, 다른 귀족들은 그녀를 약한 상대로 여기고 자기들 입맛대로 부리려 했다.

조지아 왕국 6, 8대 군주 디미트리오스 1세의 장녀이자 그녀의 숙모이며 셀주크 제국 술탄 아흐마드 산자르의 미망인이었던 루수단은 아직 10대 소녀였던 그녀의 집권이 정당하다며 귀족들을 설득했고, 그래도 반대하는 이들을 궁정에서 축출했다. 조지아 총대주교 미하일 7세 미리안니스제 역시 그녀를 지지해 백성들이 여왕의 집권을 받아들이게 했다. 이리하여 그녀는 정당한 통치자로 인정받았지만, 그 과정에서 귀족들에게 큰 특권을 부여해야 했다. 또한 그녀의 아버지가 임명한 차차크족 출신의 아미르스파살라리(당시 군사령관)를 포함한 외국인과 전직 농노 출신 인사들을 파면하라는 요구를 받아들였다.

귀족들은 이에 기고만장해 급기야 자신들이 장관을 임명하고 법을 제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져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녀는 이것마저 받아들이면 자신은 꼭두각시 신세가 될 것임을 직감하고 단호히 거부하고 그들의 대표 쿠틀루 아르슬란을 긴급 체포했다. 이에 귀족들이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하자, 그녀는 아르슬란을 사면할 테니 반란을 일으키지 말라고 권유해 겨우 진정시켰다. 한편, 자신의 집권을 옹호했던 미하일 2세 미리안니스제 총대주교의 권세가 왕권을 저해할 정도로 커켰다. 그녀는 이를 제어하기 위해 1185년 교회 인사와 귀족으로 구성된 평의회를 소집해 미하일 2세를 파면하려 했지만, 평의회는 미하일 2세를 옹호하기로 결정하고 오히려 미하일에게 적대적이었던 주교들을 파면했다.

이렇듯 왕권 행사에 제약을 받기 일쑤였던 그녀는 급기야 결혼까지 간섭받았다. 귀족들은 류리크 왕조 출신의 유리 보골류프스키를 결혼 상대로 제안했다. 그녀가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않자, 귀족들은 사병을 거느리고 궁궐 앞까지 행진해 압력을 가했다. 결국 숙모 루수단의 권유를 받아들여 1185년 유리와 결혼했다. 유리는 노련한 군인이었지만 방탕했으며, 그녀를 우습게 여기고 조지아 왕권을 자기가 행사하려 들었다. 심지어 여왕을 신체적으로나 언어적으로 학대했다고 한다.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에게 신물이 났고, 왕권 행사에 제약을 가하는 모든 요소를 배제할 기회를 노렸다. 그러던 중 총대주교이자 최고 대신이었던 미하일 2세 미리안니스제가 사망했다. 그녀는 최고 대신의 자리에 자신의 지지자인 안톤 그놀리스타비제를 임명했다. 또한 자신에게 충성스러운 하급 귀족들을 궁정 고위직으로 끌여들였는데, 특히 쿠르드족 출신 인사들을 대거 발탁했다.

1187년, 그녀는 귀족 평의회를 소집해 남편이 매일 술에 취해 방탕한 생활을 누리고 동성애를 즐기며 성적 고문을 일삼으니 이혼을 승인해달라고 요청했다. 평의회는 이혼을 허가했고, 유리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내졌다. 유리는 이에 원한을 품고 자신을 지지하는 귀족들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꾀했다. 1191년, 유리는 바르단 다디아니, 구잔 아불라니스제, 봇소 자켈리 등과 동맹을 맺고 조지아 남서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그녀는 감레켈 토렐리 장군을 사령관으로 삼아 반란을 진압하게 했고, 반란군은 트모그비와 에루셰티 전투에서 완패했다. 유리는 항복한 뒤 여왕에게 용서받았지만, 1193년 다시 반란을 일으켜 카케티 지방을 침공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캄베차니 전투에서 패배한 후 사로잡힌 뒤 트빌리시의 루르지 수도원에 유폐되었다.

남편을 축출하고 자신에게 사사건건 맞서던 귀족들을 숙청한 뒤, 두번째 남편을 스스로 선택하기로 했다. 1191년, 그녀는 알라니아의 왕자 다비트 소슬란을 남편으로 삼았다. 소슬란은 알라니아의 왕자 아다론과 다비트 4세의 딸 루수단의 아들이다. 그는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갖춘 인물로, 유리가 이끄는 반란군 토벌에도 공을 세웠다. 그는 명목상 아내와 왕좌를 공유했지만 실제로는 충실한 신하로 행동했다. 그녀는 스스로를 "mep'et'mep'e(왕중왕)"이라 칭하며 누구도 자신의 권위에 도전할 수 없다는 것을 명백히 표명했다.

이렇게 왕권을 다진 뒤, 그녀는 본격적으로 통치에 정열을 쏟아부었다. 1195년, 다비트 소슬란이 이끄는 조지아군은 엘테네즈 토후국의 에미르 아부 바카르를 샴키르 전투에서 격파하고 샴키르 시를 함락했다. 1199년, 쿠르드족 출신의 형제 자카레와 이바네 음하르그르젤리는 샤다드 왕조로부터 아니 시를 탈환하고 그녀로부터 아니를 영지로 수여받았다. 이후 두 형제는 아니를 기반삼아 주변의 무슬림 토후국들을 잇따라 공략해 중앙 아르메니아 일대를 석권했다. 1201년 비진 시를 공략했고, 1203년 아르메니아의 옛 수도 드빈을 공략했다.

룸 술탄국의 통치자 쉴레이만샤 2세는 조지아의 이같은 확장에 두려움을 느끼고 에미르들을 소집해 조지아로 쳐들어갔다. 이때 그는 타마르에게 서신을 보내 그녀를 "단순한 여왕"이라 부르면서, 그녀가 이슬람교로 개종한다면 아내로 삼겠지만 그렇지 않는다면 여노예로 삼겠다고 비아냥거렸다. 이에 타마르는 군대를 소집한 뒤 교회 발코니에서 이교도의 침략으로부터 가족과 교회를 수호하라고 연설했다. 1203년 또는 1204년, 다비트 소슬란이 이끄는 조지아군은 슐레이만샤 2세를 상대로 바시아니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1206년 음하르그르젤리 형제는 그녀를 대신하여 카르스와 에르주름을 공략했지만 알하라트 공성전에선 실패를 맛보았다.

1207년 다비트 소슬란이 병사한 후에도 조지아의 확장은 지속되었다. 1209년 부활절에 아제르바이잔의 술탄 아르다빌이 아니를 습격하여 기도 중이던 아르메니아인들을 학살했다. 이 소식에 분노한 그녀는 음하르그르젤리 형제에게 아제르바이잔 응징을 명령했다. 형제는 아드발리 시를 파괴한 뒤 나흐치반과 줄파에서 마란드, 타브리즈 및 카즈빈으로 진군하면서 도중에 마주친 여러 정착지를 약탈했다. 이 원정으로 아제르바이잔은 큰 타격을 입었고, 타브리즈와 카즈빈의 도시들은 잇따라 그녀에게 조공을 바쳤다. 그녀는 원정에서 약탈한 재화를 활용해 아니를 재건하게 했다.

조지아가 이렇듯 승승장구하던 1204년, 흑해 연안에 트라페준타 제국이 수립되었다. 그 나라를 세운 이는 그녀의 조카인 알렉시오스였다. 그녀는 트라페준타 제국이 자리를 잡도록 상당한 지원을 해주는 한편, 아이유브 왕조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십자군이 패배한 상황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국제 무대에서 조지아를 중동 기독교인의 수호자로 인식하도록 유도했다. 조지아 선교사들은 북 코카서스에서 활동했으며, 지중해 유역 전역에 수도원 공동체가 그녀의 후원으로 설립되었다. 중세 조지아 연대기에 따르면, 이집트에서 불가리아, 키프로스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서 수많은 교회와 수도원이 그녀의 지원 덕분에 설립되었다고 한다.

한편, 그녀는 예루살렘의 교회를 보호하는 데 관심을 보였다. 살라흐 앗 딘 유수프의 전기를 기술한 바하딘 이븐 샤다드에 따르면, 살라흐가 예루살렘을 점령한 직후 그녀가 사절을 보내 예루살렘에 있는 조지아 수도원의 몰수된 재산을 반환해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살라흐의 반응은 기록되지 않았지만 그녀의 이같은 노력은 성공한 듯하다. 아크레의 주교 자크 드 비트리는 조지아인들이 다른 기독교도들과는 달리 국기를 당당히 보여주고 도시에 들어갈 수 있었다고 기록했다. 또한 이븐 샤다드는 타마라가 십자가의 유물을 얻기 위해 동로마 황제보다 더 많은 돈을 살라흐에게 제시했다고 기술했다.

그녀의 통치가 끝나갈 무렵, 조지아의 국력과 영향력은 절정에 이르렀다. 북쪽의 대코카서스 산맥에서 남쪽의 에르주룸, 북서쪽의 지시에서 남동쪽에 간자까지 이르는 조지아와 아르메니아 북부 및 중부 일대가 그녀의 통치에 순종했으며, 시리반 토후국은 종속국을 자처했다. 여기에 서쪽의 트라페준타 제국은 충실한 동맹국이었으며, 흑해와 카스피해, 데르벤트, 카스파리아 일대에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1212년에 조지아 북동부 프호비와 디도 고지대에서 독립을 꾀한 부족민들의 반란이 일어났지만 3개월만에 이바네 음하르그르젤리에게 진압되었다. 당시에 주조된 동전은 그녀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신의 뜻에 따라 압하지야인, 카르틀리인, 아란인, 카헤티인, 아르메니아인의 왕중왕이자 여왕 중 여왕, 쉬르반샤와 샤한샤, 동양과 서양의 절대자, 세계와 종교의 영광, 예수의 수호자.


한편, 이 시기에 기독교와 세속주의, 동로마 제국 문화와 페르시아 문화가 혼합된 독특한 조지아 문화가 번영했다. 조지아 정교회의 건축 양식이 재설계되어 일련의 대규모 돔형 대성당이 세워졌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조지아 통치자의 교회 초상화는 동로마 예술을 모델로 삼았지만, 여성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페르시아식 문화도 가미되었다. 또한 중동과 전쟁을 치르면서도 무역 거래를 꾸준히 이어갔다. 이는 조지아어와 아랍어로 쓰여진 당시의 조지아 주화에 반영되었다. 1200년경 그녀의 이름으로 주조된 동전의 한쪽에는 현지 버전의 동방 정교회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그녀를 "예수의 보호자"로 묘사하는 아랍어 글귀가 적혀 있었다. 또한 기독교식 도덕과 가부장적 문화가 담긴 조지아 연대기는 계속해서 번성했고, 기사문학이 서방에서 전해지면서 기사도의 이상을 추앙하는 문학작품이 숱하게 등장했다.

그녀는 치세 말기에 아들 기오르기 4세를 공동 통치자로 앉히고 함께 통치하다가 1213년 1월 13일 수도 트빌리시 인근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그녀의 유해는 게레티 수도원의 비밀 동굴에 안장되었는데, 현재까지 그녀가 묻힌 정확한 장소는 밝혀지지 않았다.


3. 사후[편집]


타마르의 치세 기간 동안 절정을 이루었던 조지아의 황금시대는 그녀가 죽은지 20여년 만에 몽골 제국의 침공으로 예상치 못한 종말을 맞이했다. 이후 기오르기 5세, 알렉산드레 1세 등 유능한 통치자가 등장하여 조지아의 부흥을 이끌었지만, 조지아는 타마르 시대에 버금가는 전성기를 구가하지 못했다. 급기야 티무르 제국의 침략 여파로 쇠락하다가 15세기에 이메레티 왕국, 카헤티 왕국, 카르틀리 왕국으로 분열되어 내우외환에 시달리다가 러시아 제국에게 병합되었다.


4. 평가[편집]


위에서 역사를 간직한 조지아이기에, 그녀는 현재까지 조지아인들로부터 역사상 최고의 여왕으로 추앙받고 있다.

조지아 50라리 지폐에도 그녀의 모습이 있다.


5. 미디어[편집]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 1187년, 1204년 시나리오를 선택하면 타마르로 플레이할 수 있다. 1187년 시나리오는 아직 유리와 결혼한 상태로, 부계결혼이라서 이 상태로 타마르가 아이를 낳으면 류리크 가문에 들어가기 때문에 유리를 암살하거나 이혼해서[1] 다비트나 다른 가신과 모계결혼 후 대를 이어야 한다. 게임에서 다비트와 결혼할 경우 타마르와 다비트의 능력치가 모두 높아서 자녀의 능력치를 기대할 수 있지만 친척이라 근친상간 트레잇이 자녀에게 붙을 수 있다는 단점이 있고, 가신과 모계결혼할 경우 궁정에 있는 가신의 능력치가 게임에서 복불복이고 왕 작위를 가진 타마르와의 신분 격차 때문에 타마르 쪽의 위신이 깎인다. 어느 쪽이든 후계 문제를 해결한 뒤에는 상황을 봐서 주변으로 영토를 넓히며 후계에 전념하면 된다. 1204년 시나리오를 선택하면 영토가 좀 더 넓어졌고 기오르기와 루수단도 있다.

문명 6의 확장팩 흥망성쇠(Rise and Fall)에서 조지아 문명의 지도자로 등장했다.[2]

대체역사물 동로마를 다시 위대하게에서는 주인공의 약혼자가 되었으며 그것을 위해 원역사와 달리 다비트 소슬란과 결혼하지 않고 나이도 원역사보다 어린 30살로 설정되었다.[3] 주인공의 개입덕에 룸 술탄국을 크게 무찌르고 주인공이 4차 십자군과 전쟁을 벌일때 군사 1만 명을 파견하며 힘을 보태주기도 한다. 특히 주인공에 푹 빠져 방을 그의 초상화로 도배하고[4] 얀데레끼까지 보이기도 한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결정판 DLC 마운틴 로열즈에 타마르를 다룬 캠페인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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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치트를 쓰지 않으면 곧바로 총대주교에게 이혼을 요청할 수 없어서 신앙심과 금화를 쌓을 필요가 있다.[2] 문명 5에서 어느 모더가 모드 문명으로 제작했지만 정식으로 조지아가 추가된 건 6편이다.[3] 다만 타미르는 실제 생몰년도가 미상이긴 하다. 보통 1160년 언저리가 출생년도로 추정될 뿐 확실한 기록은 없다.[4] 그 때문에 하인들이 보면 쪽팔려서 방 청소를 직접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