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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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특징
2.1. 태극전사
2.3. FC 코리아[1]
3.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특징을 정리한 문서.

2. 특징[편집]


강인한 체격과 지칠 줄 모르는 체력, 세계적인 수준의 빠른 스피드와 7번 넘어져도 또다시 일어서는 백절불굴의 처절한 투지, 극한에 몰릴수록 오히려 전투력이 점점 더 증가하는 불가사의한 정신력[2][3] 등 다른 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독특한 특징들로 무장한 것이 특징이며 종종 저 강점을 무기삼아 세계 최강팀에게 회심의 일격을 날려 침몰시키는 예측불허의 대이변을 일으키는, 알레산드로 델피에로의 말마따나 심한 농담을 만들어내는 팀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실 저런 케이스들은 말 그대로 자주 일어나기 정말 어려운 케이스이며, 어떨 때는 약팀에게까지 빌빌대다가 참패하는 등 경기력이 꾸준하지 못하고 성적이 들쑥날쑥 기복이 심한 편이라 해외에서는 한국을 강호보다는 도깨비팀으로 분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는 그리스가 유로 2004에서 우승하였다고 그리스를 독일, 스페인과 같은 우승 후보로 여기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아무튼 카잔 대첩 이후 한국이 승점자판기 취급을 받는 일은 크게 줄었으며, '방심했다가는 큰 코 다치는 1라운드 조별리그 상대적 약체팀' 정도로 취급받는다.[4]

2.1. 태극전사[편집]


전통적으로 남자 축구 대표팀을 태극전사라고 불렀다. 물론 축구뿐만 아니라 다른 스포츠 종목에서도 국가대표를 이렇게 호칭하고 있다. 또한 여자 축구 대표팀도 태극낭자로 불린다. 근래에는 과거와는 달리 붉은 악마보다는 이 별명으로 많이 지칭하는 편이다.

2.2. 붉은 악마[편집]


붉은 악마라는 별칭은 1983년 멕시코 세계 청소년 축구 대회에서 준결승 신화를 이룩해 세계를 놀라게 했던 한국 청소년 대표 팀을 현지 언론에서 붉은 악령(Red Furies)이라고 부른 데서 유래했다. 이걸 번역하는 과정에서 악령이 악마가 되었고 후에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서포터즈가 결성이 되면서 공식적으로 붉은 악마로 이름을 내걸었다. 그러나 이 붉은악마의 원조는 벨기에 축구 국가대표팀콩고 공화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별칭 또한 붉은 악마이다보니 최근에는 잘 쓰이지 않는다.

2.3. FC 코리아[5][편집]


한국인이라면 붉은악마[6], 태극전사, 국가대표, 평가전, 친선경기는 성인 남자 축구 대표팀의 A매치를 떠올릴 정도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대한민국의 모든 스포츠를 통틀어 가장 인기 있는 국가대표팀이다.

그로 인해 축구 국가대표팀의 인기로 많은 방송사들이 시청률이 보장되는 이들 축구 국가대표팀의 경기, 특히 손흥민, 황의조, 황희찬, 이강인, 김민재 등 유럽 해외파가 참가하는 경기의 중계권을 무척 따내고 싶어한다.[7] 이런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인기는 다른 대한민국의 스포츠 팀들과 비교해봐도 차원이 다른 수준이며, 또한 대한축구협회를 실질적으로 좌지우지하는 범현대가를 비롯해 공식 스폰서인 나이키, KT, 하나은행 등 국내외 대기업들의 빵빵한 지원까지 더해져 대한축구협회는 국내 스포츠 협회 중 유일하게 스폰서만으로 자급자족이 되는 기관이다. 세금은 1,000억이 넘는 예산중 10억 정도밖에 받지 않는다.

역설적으로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을 "FC 코리아"라는 비판이 섞인 명칭이라고도 불린다. 이게 무슨 의미냐면 평소에 해외 축구나 K리그에는 관심이 전혀 없다가 월드컵 등 국가대표 경기 기간에 한해서만 축구 국가대표팀에 과도한 관심을 보이는 국내 스포츠팬들의 기이한 현상에 대한 비판의 뜻이다. 평소에는 해외 축구K리그 조차 시청하지 않다가도 평가전이나 월드컵 같은 축구 관련 행사있으면 마치 자신이 축구 전문가인 것처럼 국가대표 선수나 감독, 축구 협회 등에 지나친 관심을 보이기 때문이다. 관심을 가지는 것은 상관이 없으나, 이것은 곧 과도한 비난으로 이어지기에 한국 축구에 악영향을 끼친다.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FIFA 월드컵 아시아 최다 진출(11회), 아시아 최다 누적 승점 31점(26위 아시아 1위)[8], FIFA 월드컵 최고 성적 4위, FIFA 월드컵 총 6회 19위권[9] 등 큰 업적을 세웠다.

2.4. 응원 구호[편집]


2002년 한일 월드컵 이후 응원 구호는 모르면 간첩일 수밖에 없다. 준결승 진출을 하면서 한국은 하나가 되었다. 응원가는 박수를 다섯 번 치면서 '대~한민국! 짝짝 짝 짝 짝'[10][11] ,응원곡은 전통민요 '아리랑', 윤도현'오!! 필승 코리아!'[12], 교향곡 제9번(베토벤), 트랜스픽션'승리를 위하여', 레이지본'우리의 힘을...'[13] 등을 부른다. 득점 후에는 김수철의 '젊은 그대'를 부르는 전통이 있다. 자세한 사항은 역대 응원가 참조.

2.5. 아시아의 호랑이[편집]


1948년 축구 국가대표팀이 창설된 이후 1948런던올림픽 축구 8강(8위)를 시작으로 세계무대와의 격차를 꾸준히 좁혀왔다. 아시아에서는 최강이었지만 국제대회에서는 1980년대, 1990년대 동네북 신세였다. 다만, 1986년 월드컵과 1994년 월드컵때는 운이 안 따라주었던 것도 있기 때문에 일방적인 승점자판기는 아니었다.

2000년대 이전에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동아시아 골목대장이라고 할 수 있었다. 동아시아 골목대장이라는 하는 이유는 아시아권 내에서 최대 규모의 축구 대회인 AFC 아시안컵에서 초대 대회 1956년, 제 2회 1960년 우승으로 2연패를 달성한 이후 무려 63년간 우승을 하지 못했고, 그 후 아시아 대회 우승은 1990 월드컵 아시아 예선 우승 진출[14][15] 아시안 게임 축구 종목에서는 1970, 1978, 1986[16], 2014, 2018, 2022에 금메달을 6회 따냈으며, 아시아 게임 참가 국가들 중에서 최다 우승 국가며,[17] 아시아 클럽 대회 AFC 아시아챔피언스리그 12회 최다 우승국가이다. 하지만 더 큰 대회인 올림픽에서는 상대적으로 저조해서 본선 진출조차도 쉽지 않았다. U23 대회가 된 이후가 오히려 더 성적이 좋다. 이런 면을 종합해서 보자면 동아시아 골목대장 정도가 맞는 수식어다.


다시, 카타르

2023년 A매치 대한민국 대표팀의 슬로건


2000년대 이후에 이르러서는 일본이 동아시아 골목대장 자리를 차지했다고 봐야 하지만, 1990년대 이후로 일본과 전력이 비슷해지면서 1990년대 이전에는 일본 축구가 약체였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보자면 동아시아 골목대장이 맞다.

아시아권의 국가들 사이에서 가장 기복없이 꾸준히 상위권에 자리를 유지하고 있던 것은 단연 한국이라고 할 수 있다. 약점이 있다면 아시안컵에서 1인자의 자리를 차지했던 것이 너무 오래됐다는 것이다. 물론, 2002년으로부터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으나 아시아 대회 우승이 없던 가운데 툭 튀어나온 대회 하나이기 때문에 애매하다면 애매하고 할 수 있다.

아시안 게임도 성인대회였던 시절인데 1986년 우승 이후 U23 대회로 바뀐 2014년에야 우승했기 때문에, 아시안게임도 아시안컵도 2개의 대회 우승이 없이 2002년 4위만으로 확고한 1인자였던 시기라고 하기에는 뭔가 조금 애매하다. 경쟁국인 이란, 사우디, 일본이 1위를 할 때만큼의 강력한 지배력을 발휘했던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시아의 맹주보다는 동아시아권의 골목대장 정도가 더 확실하고 온건하지만 그래도 아시아의 맹주도 아예 못 쓸 정도의 수식어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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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FIFA 월드컵 발자취[편집]


FIFA 월드컵 누적 승점 아시아 1위
한국은 일본을 이기고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월드컵 본선 진출을 이뤄냈다. 그 월드컵이 1954년 스위스 월드컵 16개국 본선에 진출[18] 이후 아시아+타 대륙 합동예선에서 탈락으로 16개국 본선 진출 실패, 기권[19], 신청서 분실[20] 등의 사유로 32년 동안 본선에 나가지 못하다가, 1986년 멕시코 월드컵(24강 본선)에 두 번째로 진출한 뒤로 2022년 카타르 월드컵까지 10회 연속 월드컵 본선진출하며, 통산 11회 월드컵 진출을 기록, 아시아 최다 월드컵 승점 31점(2026월드컵 기준 전승 우승 승점 24점) 획득하며, 월드컵 서열 26위, 아시아 1위를 기록하였다.[21]

2022 카타르 월드컵까지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월드컵에서 38경기를 치러 7승 10무 21패 39득점 78실점출처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한 경기에서 3골 이상 넣은 적은 없으며, 한 경기 개인 멀티 골을 기록한 선수도 조규성 1명뿐이다.[22][23] 그리고 1998년 네덜란드전과 1954년 두 경기를 제외하고는 5점 차 이상의 패배 기록도 없다.[24]

지난 2022 카타르 월드컵 32개국 본선 진출국 안에서 한국의 월드컵 우승 확률은 약 0.5%로 나왔다.[25]

FIFA 월드컵 아시아 최다 본선 진출
2002년 한일월드컵 4위에 오른 것이 최고로 높이 올라간 기록이다. 최고순위, 연속진출[26], 최다 진출 횟수 세 가지 모두 아시아 최고 기록이다. 또한 2026년 월드컵부터 본선 진출국이 48개국 48강으로 대폭 확대되고 아시아에 배당된 진출권도 8장으로 2배 가까이 늘어남에 따라, 앞으로도 연속 본선 진출 기록을 이어나갈 가능성이 현재로서는 대단히 높다.

하지만 월드컵 본선 조별리그나 아시아 예선에서 다른 나라의 도움으로 탈락을 모면하고 진출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27] 1994 FIFA 월드컵 미국 아시아 최종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만약 일본이[28] 이라크에게 승리했다면 우리는 떨어질 수도 있었지만 이라크와의 무승부로 인해 골득실이 앞서 아시아 예선 우승 진출한 사우디에 이어 한국이 아시아 예선 준우승하여 월드컵 본선 24강에 진출하게 되었다(도하의 기적).[29]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아르헨티나 덕분에 32강 조별리그 1라운드 탈락의 위기를 모면하고 16강에 진출했으며[30], 2018 러시아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에서는 이란 덕분에 월드컵 본선 진출 실패 위기에서 벗어나 32강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는데 2018 러시아 월드컵에서는 32강 본선 조별리그 3차전에서 한국이 독일을 잡아준 덕분멕시코가 스웨덴에 대패를 함에도 불구하고 멕시코가 조 2위로 16강에 간신히 올라갔다.

조별리그 이름이 알파벳으로 변경된 1986년 월드컵 24강 조별리그 이후로 한국은 전 세계에서 월드컵의 모든 조(A~H조)에 1회 이상씩 모두 속해본 적이 있는 유일한 국가이다.[31] 이는 역대 월드컵 최다 진출국인 브라질이나 전통의 강호 독일, 이탈리아조차도 가지고 있지 않은 기록이다.[32] 2018년 월드컵 전까지는 E조만 두 번 들어갔고 나머지 조는 F조를 제외하고 모두 다 한 번씩 들어갔었는데, 10번째로 참가한 2018년 월드컵 조 추첨에서 들어가 보지 못한 F조에 편성됨으로서 이 진기록을 달성했다. 월드컵 진출 단 10회, 1986년 이후로는 9회만에 월드컵 조별리그 8개 조에 모두 들어가본 적이 있다는게 대단히 특이한 점. 이 특이한 기록은 2022년 카타르 월드컵을 끝으로 지금까지의 32개팀, 8개 조가 48개팀, 16개 조 체제로 바뀜에 따라 한국 축구 국가 대표팀만이 보유한 기록으로 남게 될 예정이다.

FIFA 월드컵 아시아 통산 랭킹 1위
아시아에서 FIFA 월드컵 통산 랭킹이 꽤 높은 편이다. 유럽과 남미를 제외하면 멕시코, 미국에 이어 3위, 전체적으로 따지면 28위에 랭크되어 있다. 하지만 FIFA 랭킹은 2014년 8월 57위에서 2014년 12월~2015년 1월 69위까지 하락했던 적이 있었다. 2018년 6월에는 57위. 브라질 월드컵 및 러시아 월드컵 지역예선과 평가전에서의 삽질이 워낙 심해서 축협이 그나마 아시안컵 준우승은 하고, 아시아권 하위권 팀들 상대로도 양민학살을 좀 하고, 2022년 카타르 월드컵 개최 직전쯤 되어야 30위권으로의 복구가 가능할 것으로 보였으나 결국 아시안컵 준우승 없이도 금방 30위권에 다시 들어 꾸준히 유지하고 있고 2022년 들어서는 20위권에 진입하고 이를 유지하고 있다.

FIFA 월드컵 준결승 진출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우승후보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을 격파하는 돌풍을 일으키며 아시아 최초로 4위에 올랐다.

자세한 성적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FIFA 월드컵 참고.

아시아 유일 총 6회 월드컵 19위권 기록
일본을 이기고 본선 진출한 1954월드컵 16위를 시작으로 2002월드컵에서 4위, 2006월드컵 17위, 2010월드컵 15위(16강), 2018월드컵 19위, 2022월드컵 16위(16강)로 총 6번 기록했다.

FIFA 월드컵 기타 기록
한국은 월드컵에서 페널티 지역 밖에서 시도한 슛으로 10대회 연속(1986~2022) 득점에 성공 했고, 2022년 카타르 월드컵까지 기록을 이어가고 있다. 순서대로 살펴보면 1986-박창선, 최순호 1990-황보관[33] 1994-홍명보X2(FK) 1998-하석주(FK) 2002-유상철, 이을용(FK), 송종국 2006-이천수(FK), 안정환 2010-박주영(FK) 2014-이근호 2018-손흥민 2022-백승호 순이다. 특히 이 기간중 1990~2010은 6개 대회 연속 프리킥 득점에 성공하기도 했다. 아시아 최다 득점 기록을 보유하고 있으며 1986년 멕시코 월드컵부터 2022년 카타르 월드컵까지 총 39골을 득점했다. 한국은 아시아 최초로 독립국 자격으로 FIFA 월드컵에 참여한 팀이다. 아시아팀 최초로 FIFA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팀은 네덜란드령 동인도[34]였으나 독립국은 아니었다. 우리나라는 광복후 6년 후인 1954년 아시아 국가 중 독립국으로서는 최초로 일본을 이기고 월드컵 16개국 본선(16위)에 진출했으며 일본과 함께 최초로 월드컵을 공동개최한 국가이며 이 때문에 월드컵 32개국 조편성에서 개최국임에도 D조에 배치되었다.

2.7. 강팀에 강한 팀[편집]


신기하게 축구 강팀들에게 거세게 저항해서 대체로 무승부로 승점 1점을 획득하거나 아예 역관광 태워버린 전적이 꽤 된다.

1948런던올림픽 축구에 첫 진출하여 멕시코를 5:3으로 격파하며 첫 8강(준준결승전) 진출을 시작으로 아시아 최초로 1999년 A매치에서[35] 피파랭킹 1위 브라질[36]1:0으로 승리한 적이 있으며, 2001한일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 컨페드 디펜딩챔피언 멕시코를 2:1로 격파하였고[37], 2002 월드컵에서는 본선 진출국 중 프랑스, 아르헨티나, 잉글랜드,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 등 우승후보들을 제치고 월드컵 4위를 기록하였다. 또한 2004년 A매치에서는 2002 월드컵 3위팀 터키[38]를 처음으로 2:1로 이겼으며[39], 최정예 독일과 A매치에서 3:1로 승리[40]했으며, 기어코 2018 러시아 월드컵에서 아시아 최초로 원정 월드컵에서 피파 랭킹 1위 & 디펜딩 챔피언 요아힘 뢰브 감독의 독일을 2:0으로 독일을 탈락시켜 80년만에 독일의 월드컵 1라운드 탈락[41]이라는 결과를 만들어내기에 이른다.[42] 여기서 끝나지 않고 2018년 10월 A매치에서 역대 월드컵 우승팀 우루과이를 2:1 격파,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는 수아레스와 카바니의 우루과이에 무승부 승점 1점 획득, 그리고 불가능해 보였던 호날두의 포르투갈을 2대 1로 박살내버리는 위엄까지 선보인다.[43] 심지어 이러한 언더독 기질은 피파마저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FIFA, 2002 한국 4강 재조명.."월드컵 대본 뒤집은 언더독" 2019년 U20때는 아르헨티나를 격파하고, 4년 뒤인 2023년 U20때는 프랑스를 격파했다.

파일: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소개 영상(FIFA)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이 경향은 특히 국가 간 감정이 굉장히 좋지 못한 한일전 때 최대로 끌어올려져서, 아시아권에서 강팀으로 꼽히는 일본을 상대로 중요 경기에서 패배시킨 경우가 제법 된다. 지금까지 일본과의 상대전적이 무려 81전 42승 23무 16패인데[44], 이 말은 곧 절반 이상은 한국팀이 이겼다는 것이다. 그리고 중요 경기에서 패배시킨 적이 제법 된다고 말했는데, 그 예시로 FIFA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여러차례 일본을 이겼으며, 2012 런던 올림픽에서 피파 랭킹 1위 스페인을 격파한 일본을 2:0으로 격파해 첫 동메달을 획득했으며, 2017년 일본 동아시안컵 도쿄에서 알제리쇼크 감독의 일본을 4:1로 격파했다.[45]

이 외에도 1986 멕시코 월드컵에서 불가리아와 1:1 승점 1점[46], 2006 독일 월드컵에서 프랑스와 1:1 승점 1점[47], 1994 미국 월드컵에서 스페인과 2:2 승점 1점[48], 남미팀 볼리비아와 0:0 승점 1점[49],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 벨기에를 1:1 무승부로 발목을 잡아 탈락시켰고[50], 2002 한일 월드컵에서 북중미 미국에 1:1 승점 1점[51], 88 서울올림픽 축구에서 한국이 금메달팀 소련에게 0:0무승부 승점 1점 획득[52],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 러시아전 1:1 무승부 승점 1점[53] 등 강팀과 치열한 경기를 펼친 적이 생각보다 제법 많다. 신기하게도 강팀들이 한국에게 점유율 면에서는 압도할지 몰라도 결과만 놓고 봤을 때는 경기가 잘 풀리지 않았던 경우가 제법 많다. 하지만 강팀에는 언더독으로 나름 강함을 보여줄 때가 있지만 반대로 약팀이라고 여기고 무시했던 팀들에게 얻어맞은 경우도 많다.[54]

이러한 모습이 가장 극명히 드러난 대표팀 경기는 2018년과 2022년 두 차례의 월드컵이다. 2018 러시아 월드컵에서는 32강 조별리그에서 카잔의 기적을 보여주면서 독일을 떨어뜨렸다. 당시 독일 대표팀의 노쇠화 문제가 나타났다고는 하지만 스웨덴을 2:1로 격파하였고[55], 전문가들 대부분이 우승 1순위로 꼽는 팀이었다. 이후 독일 대표팀은 조별리그에서 졸전을 펼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1라운드 조별리그[56]는 우격다짐으로 통과하던 독일이 대한민국 대표팀에 패배한다고 상상조차 한 사람은 없었다. 피파랭킹 기준으로 독일이 당시 디펜딩챔피언과 피파랭킹 1위, 한국은 57위였으니, 이러한 예상이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월드컵에서 모두의 예상을 깨고 대한민국 대표팀은 독일을 2:0으로 격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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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카타르 월드컵 Doug tierlist[57][58]

2022 카타르 월드컵 32강[59] 조별리그에서는 아예 강강약약을 의미 그대로 실천해버렸다. 조별리그에서 피파랭킹이 가장 높은 포르투갈(9위)에게는 승리하고 두번째로 높은 우루과이(12위)에게 무승부로 승점 1점을 획득했으나, 오히려 대한민국보다도 피파랭킹이 낮은 가나(61위)에게는 패배하였다. 축구에서 농담삼아 이야기하는, 강팀의 승점을 털어 약팀에게 나눠주는 의적의 모습과 완전히 일치하는 행보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플레이 스타일 문서에 서술되었듯 한국 축구가 피지컬과 활동량, 투지를 내세우며 전통적으로 구사하던 늪 축구, 롱볼축구가 월등히 강한 팀을 상대로도 양쪽 모두 난전으로 몰아가며 의외의 변수를 창출하는데 용이했기 때문이다. 선수들 입장에도 육성 과정에서 학원 축구와 K리그를 통해 해당 전술을 꾸준히 훈련 받았기에 비교적 수월하게 구사할 수 있고, 월드컵에서의 성과를 엄청나게 중요시하는 문화도 이쪽에 치중되는 결과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피지컬적 요소도 무시할 수 없는데, 체격 이상으로 전술 이해도와 기술적 능력을 중요시하던 벤투호마저도 181.1cm로 2022 카타르 월드컵 대표팀 중 아시아에서 이란 다음으로 큰 평균 신장을 기록했다. 실제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 특유의 파워과 운동 능력에 완전한 열세를 보였던 가나전을 제외하면, 벤투호의 나머지 월드컵 경기들은 개인 기량의 차이와 주전 선수들의 체력 저하로 고전했지 피지컬적 차이가 결코 극복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대한민국 역대 월드컵 전적

3점차 이상 승리
0
2점차 승리
3
1점차 승리
4
무승부
10
1점차 패배
10
2점차 패배
6
3점차 이상 패배
5
해당 표에서 나와있듯이, 1점차 패배와 무승부 승점 1점 획득이 가장 많다.

그리고 축구 불모지인 아시아 팀들이 전부 그렇듯 국내 팀 역시도 전적이 그렇게까지 좋은 편은 아니지만 2002년 이전에도 무승부 승점 1점 기록과 석패가 꽤나 쌓여있다. 특히, 전적상 무승부 중 2002 월드컵 8강 준준결승전 스페인전 0:0무(승부차기 5:3승)[60]도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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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독이 든 성배[편집]


축구가 인기를 얻는 대부분의 나라가 그렇듯 한국의 스포츠 국가대표팀 중에서는 가장 관심도가 높다. 그러다보니 언론에서는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을 독이 든 성배라고 표현한다. 또한 여론과 언론의 영향이 매우 강해 몇몇 어그로성 여론이 팀을 좌우하려는 시도도 많았다. 언론의 적당한 입김은 축구 국가대표팀 쇄신에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그 입김이 지나쳐 도리어 많은 문제를 발생시켰다. 경기장에서의 실수와 성적 부진으로 인해 그 동안의 공헌도와는 상관없이 축구선수와 감독의 명예가 실추되는 일도 종종 벌어진다. 경기 중에 실수를 하면 조롱에 가까운 비난을 하거나 성적이 좋지 않으면 도중에 감독이 해임되기도 했다.

그러나 또 동시에 성공만 한다면 한국에서 이만큼 달콤한 보상이 따라오는 스포츠팀도 없다. 대표적으로 2002년 준결승 멤버는 은퇴 후 그야말로 예능의 단골손님이자 항상 나오기만 하면 찬사를 받는다. 안정환은 본인의 자질도 있지만 은퇴 후 오랜 시간 동안 연예인으로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다. 이천수도 은퇴 후 반 축구인, 반 셀럽의 인생을 살고 있다. 또한 어지간한 2002 주요멤버들은 K리그 무대에서 비교적 쉽게 감독직에 취임하고 있다. 감독이었던 거스 히딩크도 물론 국빈이자 전국민이 알아보는 귀인 대접을 받고 있다. 박항서, 압신 고트비, 핌 베어백 등 주요 스태프들도 유명하다고 할 수 있으며 다른 스태프들도 2002년 스태프였다고 하면 꽤 관심을 받는다. 이만큼 한 번 성공만 한다면 엄청난 명예가 뒤따라오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대표 입성에 경쟁이 치열하다.

또한 한때 유럽에서 전도유망한 지도자로 꼽혔다가 2010년대 중반 들어 지속된 하락세를 겪었던 파울루 벤투도 한국 대표팀을 이끌고 16강 진출(최종 16위)에 성공하자 폴란드 국가대표팀에서 고액의 연봉을 제안받은 바 있고 조규성, 나상호 등의 국내파 선수들도 유럽 구단의 링크가 나오는 등 유럽 각국의 주목을 받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2.9. 폐쇄성[편집]


한국은 중국, 일본[61]과는 달리 귀화 선수는 없다. 혼혈이 국가대표로 발탁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62][63]

귀화 선수는 과거 신의손이나 샤샤 드라쿨리치, 마시엘[64]을 상대로 시도되긴 했다. 신의손은 타지키스탄 대표로 1경기 뛴 전적이 있어 실패했다.[65] 샤샤는 귀화 의욕이 높았지만 정작 발이 느렸던 데다가 언어 문제로 인해 전술적으로 소통이 힘들다고 판단해서 히딩크가 거부했다. 마시엘은 2중 국적 유지 여부를 물으며 브라질 국적을 포기하지 않으려 했다. 2003년 이성남이싸빅이 실제 한국으로 귀화를 했으나, 이성남은 러시아 국가대표로 A매치 2경기를 뛴 경력이 있었고, 이싸빅은 크로아티아 올림픽 대표로 유럽 올림픽 예선 경기에 출전했던 이력이 있어 국가대표에 선발될 수는 없었다. 이후 최강희호 출범 당시 최강희 감독이 전북에서 잘 알고 지도했던 에닝요를 발탁하려 했지만, 당시 에닝요는 귀화 요건이 맞지 않아 실패했다.[66] 이후 조나탄이나 말컹 등이 귀화 의사를 보인 적도 있지만, 적극적이지 않기도 했고 귀화 요건도 맞지 않았다. 대구에서 뛰는 세징야가 상당히 강력한 귀화의사를 보였고[67] 실력도 K리그 탑급이라 귀화만 성공한다면 일단 몇 경기라도 대표팀에서 뛸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인터뷰에 따르면 귀화하고 싶은 이유는 국가대표가 목표가 아니며 치안이 좋다, 은퇴 후 지도자로 한국에서 쭉 지내고 싶다라 하는 등 한국이 좋아서였으며 결국 세징야의 한국국대 승선은 없었다.

혼혈 선수로는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차범근호의 수비수로 활동한 장대일[68]이 있으며, 2003년 김준[69]이 U-17세 대표로 발탁되었다. 최근에 유명했던 혼혈 선수는 강수일이지만, 슈틸리케호에 발탁되어 화려하게 재능을 꽃피우려는 차에 발모제 사건과 음주운전으로 커리어가 박살났다. 강수일 이후 젊은 선수들로 포항 출신의 골키퍼 김로만[70], FC 에르츠게비르게 아우에의 골키퍼 케빈 하르[71]가 있으며, 꼬꼬마 유망주로 영재발굴단에도 출연한 원태훈-원태진 형제[72], 온예카 오비 존[73] 등이 있다. 2017년에는 U-20 월드컵을 앞두고 야스퍼 테르 하이데가 화제가 되었고[74], 2018년 러시아 월드컵을 스웨덴과 한 조가 된 것을 계기로 스웨덴 리그에서 활동하는 요한 램혼세바스티안 램혼 형제 센터백이 축구팬들 사이에 알려지기도 했다.[75] 최근 레알 마드리드 1군에 데뷔하며 이슈가 됐었던 마빈 박 또한 한국인 어머니와 나이지리아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한국계 선수로 원칙적으로 한국 국가대표 차출이 가능한 선수다. 특히 이 선수의 포지션이 현대 축구에서 귀한 측면 수비기 때문에 팬들의 관심을 끌었다.[76][77] 2023년엔 독일계 혼혈[78] 선수인 옌스 카스트로프가 대한민국 국가대표 코치인 안드레아스 쾨프케와 만나고 어머니를 통해 한국 국가대표로 뛸 의향이 있음을 밝혔다.

해외 교포 선수로는 허정무호에 발탁된 바 있는 재일교포 3세 박강조가 있으며, 이충성도 청소년 대표까지는 한국에서 뛰었다. 재미교포로는 버지니아 주립대학에서 재학하던 유지영이 1999년 울산 현대에 입단해서 뛰기도 했다.[79] 교포 출신 선수의 경우 이충성의 경우 19세 이하 청소년 대표팀에 있을 때 '반쪽바리' 소리를 들으며 멸시를 당했다고 주장하는데, 정작 이충성을 대표팀에 추천한 오장은은 그런 일은 없었다고 밝혔다.[80] 축구협회에서도 일단은 해외에서 활약 중인 교포나 혼혈 선수를 지켜보고는 있다고 한다.[81] 최근 팬들 사이에선 재일교포 골키퍼인 박일규J리그에서 활약이 좋아서 대표팀 가능성 여부에 대한 토론이 있기도 했다.[82]

이렇게 귀화 선수나 혼혈 선수, 교포 출신 선수들이 대표팀에 쉽사리 발탁되지 않는 건 이들의 기량이 한국 선수들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거나, 귀화 요건[83] 등이 맞지 않거나, 또는 이성남이나 신의손처럼 기량이 충분히 있더라도 이미 다른 나라 국가대표로 뛰었기 때문에 못 뛰기 때문이다. 즉 딱히 한국이 외국계 선수를 차별하거나 이들에게 배타적이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잘하는 선수 있으면 어떻게든 귀화시키고 싶을 것이며, 엄밀히 말하면 귀화 선수 한 명에 드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드는 데다가 자국 선수의 기량이 이전보다 향상되면서 일본과 마찬가지로 더 이상 귀화 선수를 쓸 이유가 없어진 것이 크다.

K리그의 빈약한 경제력 역시 대한민국이 국대급 귀화 선수를 얻기 힘든 근본적 요인들 중 하나이다. 귀화 선수의 제일 대표적 케이스가 해당국가의 자국리그에서 오랜기간동안 특출난 활약을 한 용병선수를 귀화시켜 국대에 넣는 경우이다. 그런데 자금력이 빵빵한 중동, 중국, 일본 리그와 달리, 자금력이 밀리는 K리그가 한국 대표팀 자리를 차지할 만한 특출난 용병 선수를 5년 이상 잡아두기란 매우 힘들다. 현재 K리그는 용병을 들여와서 실력을 검증시킨 후 중동, 중국, 일본 리그에 파는 식의 셀링리그가 된 상황. K리그는 당연히 씹어먹는 실력이여야하고, 그렇다면 유럽 5대리그 중하위권팀 준 주전급은 되는 선수여야, 즉 대표팀에서 꼭 필요한 급의 선수여야 하는데, 이런 용병을 데려와 5년 이상 붙잡아 둘 수 있는 K리그 팀은 거의 없다고 봐야한다. 전북, 울산급 자금력도 힘들다고 보는게 현실적. 게다가 귀화 조건에 5년이란 시간이 필요하니 제대로 써먹으려면 20대 초반에 데려와야 하는데, 이런 용병들이 대표팀급 포텐이나 실력을 보여준다면 자금력 뛰어난 타국 리그에서 가만히 놔둘리 없고, 선수 스스로가 더 높은 곳을 원하며 K리그를 떠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케이스가 아닌, 20대 후반에 K리그에 와 리그를 씹어먹고, 슬슬 5년을 채워 귀화설이 도는 선수들은, 귀화조건이 채워지면 30대 중반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 애매하게 된다. 즉, K리그가 돈이 많아져서 포텐셜 높은 어린 용병선수들을 귀화조건이 채워질 정도로 오래 붙잡을 수 있고, 제대로 성장도 시킬 수 있는 수준으로 발전하지 않는다면, 용병선수들을 귀화시키 국대에 넣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볼 수 있다.

혼혈선수들의 숫자 자체도 적다. 혼혈선수들 풀 자체가 적다. 일반적으로 어떤 분야에 필요 수준 인재가 양성되려면 그만큼 도전하는 인원 자체가 많아야 한다. 물론 초천재 예외 경우가 있겠지만 이는 극히 드문 경우이다. 단적으로 비교하자면, 유럽리그에 유입되어 성장하는 아프리카계 유망주들의 숫자는 거의 만 단위라 보면 된다. 거기서 걸러진 극소수의 선수들, 그 중에서도 많아야 고작 열 몇명 정도가 매번 월드컵이나 대륙대회 직전에 국적선택 이슈로 언급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각종 축구 커뮤니티에 언급되는 유럽 유명팀 한국계 혼혈 유망주는 물론이고, 각잡고 조사한 일정 수준 이상 유소년 팀에서 활약하는 혼혈 선수들 숫자 자체도 겨우 두자리 수에 불과하다. 이런 근본적 숫자 자체가 적으니 해당 혼혈 선수가 귀화를 고려할 만큼 성장할 가능성도 좁아지게 되는 것이다.[84] 이런 혼혈선수 규모 차이는 유럽 국가들과 대한민국의 어쩔 수 없는 역사의 차이이다. 현재 유럽 5대리그 국가들 모두가 과거 아프리카, 중남미, 아시아 지역에 식민지를 대거 보유했던 열강 출신들이다. 당연히 혈통이 섞일 수 밖에 없고 각종 보상정책으로 구 식민지 지역에서의 선수 유입 장벽도 낮다. 대한민국은 순수하게 자국민의 노력으로 경제성장을 이루어 최근에야 선진국 대열에 합류한 후발주자이다. 혈통이 타 지역, 타 민족, 타 문화와 섞인 기간이 거의 한 세기 가량 차이가 난다. 즉, 혼혈 자체의 풀이 적으니 혼혈 유망주 숫자 자체도 현격하게 차이가 나고, 숫자 자체가 적으니 그 중에서 성인무대까지 올라가는 '완성된 성인 선수'가 나올 확률도, 찾기도 힘들다. 쉽게 말해 규모 자체의 근본적 차이가 심하기 때문이다.[85]


3. 관련 문서[편집]


[1] 후술되어있지만 이 단어는 주로 멸칭의 의미로 쓰인다.[2] 카잔 대첩 이후 브라질의 코치진이 한국을 평가하였을 때 "브라질보다 나은 점이 굳이 있다면?"이라는 질문을 받자 만장일치로 '절박할 때 나오는 정신력과 투지'라고 답했다고 한다. 브라질은 선수단이 여러 가지 요인으로 정신적으로 압박을 받자 미네이랑의 비극이라는 대참사를 썼지만, 한국은 최악의 상황에서 오히려 카잔의 기적을 일으킨 것을 인상 깊게 보았던 모양이다.[3] 하지만 이 탓에 1998 월드컵에서 멕시코전네덜란드전 2연패 탈락확정 후 3차전 벨기에전에서 벨기에를 무승부 탈락시켰고, 2010 월드컵에서 2차전 아르헨티나전에서 4:1 참패 후 3차전 나이지리아전에서 나이지리아를 무승부 탈락시키며 원정 2라운드(16강)진출, 2014 월드컵에서 2차전 알제리전에서 알제리한테 4:2 참패 후 3차전 벨기에전에서 아쉽게 0:1 석패, 2018 월드컵에서 스웨덴과 멕시코전에서 각각 아쉽게 PK 1점차 패배로 3전패 위기 가운데 마지막 3차전 독일전에서 FIFA 랭킹 1위 & 디펜딩 챔피언 독일을 2:0으로 격파하는 모습들을 본 팬들은 한국이 항상 32강 본선 조별리그 3차전 막판에만 잘한다고 까기도 한다. 최근 2022 카타르 월드컵 H조에서 우루과이전 무승부, 가나전 패배, 포르투갈전 2:1 승리로 더욱 확실한 별명이 되었다.[4] 냉정히 따지자면 과거에는 16강 조별본선 조 4위(54년 조 4위 대회 16위)와 24강 조별본선 조 3위~4위(86년 조 4위 대회 20위, 90년 조 4위 대회 22위, 94년 조 3위 대회 20위)로 점점 발전은 했지만 그 후 32강 조별본선 조 3위(06년 조 3위 대회 17위, 18년 조 3위 대회 19위)로 정말 잘 준비해야 32강 조별본선 조 1위(02년 조 1위 대회 4위)와 32강 조별본선 조 2위(10년 조 2위 대회 15위, 22년 조 2위 대회 16위)를 노려볼까 말까한 실력인 수준이었다. 물론 98년이나 14년같이 성적이 나쁜 경우도 있다. 이제는 48강 조별본선을 통과하더라도 32강 토너먼트도 통과를 해야하며, 여전히 전세계 16위(16강)안에 들기에는 상당히 부족한 전력이지만 스페인,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잉글랜드, 아르헨티나, 포르투갈, 크로아티아, 멕시코 등 세계 강호들도 그동안 98월드컵부터 32강 조별리그에서 탈락을 할 정도로 월드컵 본선 무대는 죽음의 조가 많은 만큼 쉬운 대회가 아니다.[5] 후술되어있지만 이 단어는 주로 멸칭의 의미로 쓰인다.[6] 벨기에 축구 국가대표팀의 별명과 같아서 오늘날은 잘 사용하지 않는다.[7] 실제로 '주간 서형욱'에서 이민호 MBC 스포츠국 PD가 직접 언급한 말이다. K리그의 중계권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냐는 질문에 축구 국가대표팀 중계권과 연계하면 판매하기 쉬울 것이라며 말한 바 있다.[8] 2026북미월드컵 기준 전승 우승 승점 24점[9] 1954 16위, 2002 4위, 2006 17위, 2010 15위, 2018 19위, 2022 16위[10]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1990년대 응원구호에서 따 온 것이다.[11] 다만 음원은 신해철의 ‘In to the Arena’다. 신해철 소속사에서는 공공재로서 저작권을 열어놓은 상태. 공교롭게도 함께 녹음한 서포터즈는 당시 안양 LG 치타스.[12] 부천 SK의 응원곡 '나의 부천 영원히'에서 따온 것이다.[13] 빌리지 피플Go West 번안곡[14] 준우승 진출은 UAE[15] 90 월드컵 아시아 예선 당시에는 아시아 전체가 합쳐서 단 2팀 우승팀과 준우승팀만 1990월드컵 본선 24강에 진출할 수 있었다.[16] A매치 아시아 대회 단독우승[17] 이 중에 1970년과 1978년은 공동 우승. 한편 라이벌 일본은, 2010년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서만 금메달을 획득했다. U23 게임이 된 이후 모든 팀들이 그렇듯 일본이 그렇게까지 신경을 쓰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성인대회였을 때는 그렇지만도 않았다.[18] 실질적인 아시아의 첫 번째 월드컵 진출국은 1938년 프랑스 월드컵 15개국(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흡수) 본선 진출의 네덜란드령 동인도(現 인도네시아), 한국은 일본을 이기고 아시아 독립국 최초로 54월드컵 16개국 본선에 진출하였다.(어떻게 16개국 본선에 진출할수 있었나 하면, 당시 피파가 38 월드컵 인도네시아 무혈입성 참패탈락과 더불어 아시아 수준을 파악하지 못하여 아시아를 타 대륙과 경쟁도 없이 아시아 끼리만 아시아예선을 치루게 하였고 그 결과 한국도 54 월드컵 16강 조별리그에서 헝가리에 0:9, 터키에 0:7 참패탈락하자, 피파는 아시아 수준이 낮다는것을 인지하고, 그 후 78 월드컵까지 아시아는 16개국 본선에 진출하기 위해서 유럽 또는 아프리카 또는 오세아니아와 경쟁을 치뤄야 16개국 본선에 진출 할 수 있게 바뀌었다. 그래서 한국도 54 월드컵 이후 78월드컵까지 16개국 본선에 진출 실패했다.) 1938년에는 아시아예선 그룹에 동인도와 일본만 포함되었지만 일본이 기권해 동인도가 무혈입성으로 38 월드컵 15개국 본선에 진출한 관계로, 아시아 예선 경기를 치러 통과한 것도 역시 한국이 처음이다.[19]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아시아+오세아니아+아프리카 예선에서 기권.[20] 1958년 스웨덴 월드컵 아시아+아프리카 예선 참가 신청 당시 그랬다.[21] 일본은 현재 월드컵 승점 27점(2026월드컵 기준 전승 우승 승점 24점)으로 아시아 2위이자 월드컵 서열 29위.[22] 한국이 다득점으로 승리한 경기는 2002년 대 폴란드 전의 2:0, 2002년 대 이탈리아 전의 2:1(연장), 2006년 대 토고전의 2:1, 2010년 대 그리스 전의 2:0, 2018년 대 독일전의 2:0, 2022년 대 포르투갈 전의 2:1이다.[23] 2022년 11월 29일 가나와의 경기에서 조규성이 멀티 골을 기록하며 처음으로 개인 멀티 골을 기록한 선수가 되었다.[24] 1954년 헝가리전 - 0:9 패
1954년 터키전 - 0:7 패
1998년 네덜란드전 - 0:5 패
[25] 사실 이게 그렇게 가망 없는 확률은 아닌 게, 승부차기 성공률이 (상황 및 선수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80% 정도 되므로 80%로 계산해 보면 3연속 실축할 확률이 100/5^(3) = 0.8% 정도다. 그러니까 승부차기 3연뻥 이후 동전을 던져서 어느 면이 나올지를 맞추면 그 확률과 비슷하다. 3연뻥은 잘 안 나올것 같지만 있다.[26] 세계 전체에서도 월드컵 연속진출 기록으로는 무려 5위로, 세계 최상위권이다. 브라질(22회), 독일(17회), 이탈리아(14회), 아르헨티나(13회)만이 한국보다 위이며, 잉글랜드나 스페인처럼 일반적으로 알려진 강팀들은 한국보다 연속진출기록이 낮다.[27] 한국 대표팀만 그런게 아니라 토너먼트 대회의 조별리그에서 간신히 올라간 모든 팀들에게 적용할 수 있는 표현이다. 축구 강국에서도 흔한 케이스이며, 피파랭킹부터 16위에 든적도 없는 한국이 16강에 진출하는것이 굉장히 힘들기 때문이다.[28] 일본은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아시아 최종 예선 1위(우승)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29] 94 월드컵까지는 아시아예선이 합동예선이었고 아시아 예선 1위(우승)팀과 2위(준우승)팀만이 월드컵 24강 본선에 진출했으며, 90 월드컵 아시아 예선에서는 한국이 우승 진출, UAE가 준우승 진출하였다.[30] 사실 4년 전과 비슷한 양상이 있었지만, 그때는 토고프랑스를 상대로 최소한 비겨야 하는 상황이었다. 2010년때는 아르헨티나그리스를 이기면 16강 진출이 가능했기에 나름대로 편안하게 경기를 치를수 있었다.[31] 한국이 처음으로 진출했던 1954년 FIFA 월드컵 16강 조별리그는 1조부터 4조까지 4개 조 체제였으며, 당시에 한국은 2조로 편성되었다.[32] 브라질은 역대 월드컵에서 H조에 속해본 적이 없고, 독일은 B조와 H조, 이탈리아는 C조와 H조에 속해본 적이 없다.[33] 프리킥 상황에서 패스를 받고 슛한 것이라서 프리킥이 아니다.[34] 현재 인도네시아이며, 당시 1938월드컵 본선은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되어서 15개국 본선 15강 토너먼트였고, 인도네시아는 지역예선에서 일본도 기권하자 무혈입성 하여 헝가리에게 0:6 참패 탈락(15위)하였다.[35] 니시노 아키라(2018 월드컵 일본 16강 15위 감독) 감독의 일본 U-23 대표팀이 아시아 최초로 1996 애틀랜타 올림픽 축구에서 피파랭킹 1위이자 마리우 자갈루 감독의 호나우두 브라질을 1:0으로 이겼으며(참고로 저 1승을 제외하고는 6번 붙어서 전부 패배했다.), A매치에서 브라질을 이긴 것은 한국이 아시아 국가 대표팀들 중에서는 최초이다.[36] 당시 브라질은 94 월드컵 우승, 97 코파아메리카 전승 우승, 97 사우디컨페드컵 우승, 98 월드컵 준우승, 99 코파아메리카 전승 우승, 99 멕시코컨페드컵 준우승, 2002 월드컵 7승 전승 우승으로 최전성기 시절을 구가하고 있었음을 생각해보면 매우 특이한 기록이다.[37] 월드컵 우승팀, 각 대륙 우승팀, 개최국이 진출한 대회였고, 프랑스전 5:0참패로 유명한 대회이자 한국은 호주와 컨페드 디펜딩챔피언 멕시코를 격파하였으나, 준결승 진출은 실패하였고, 2승1패 승점 6점으로 대회 5위를 기록하였다. 그리고 FIFA A매치 대회에서 멕시코를 처음 이겼다.[38] 당시 피파랭킹 7위였다.[39] 2011년 A매치 평가전 터키 홈에서 히딩크 감독의 터키에 0:0 무승부 승점 1점을 기록했다.[40] 이 경기는 독일의 A매치 첫 아시아팀 패배 경기이다.[41] 1938 월드컵 1라운드 15강(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 토너먼트 탈락(10등), 2018 월드컵 1라운드 32강 조별리그 탈락(22등)[42] 참고로 이 대회 2018 월드컵에서 피파랭킹 4위, 메시의 아르헨티나는 한국의 신태용 감독보다 한 달 먼저 삼파올리 감독을 먼저 선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월드컵 직전 스페인과의 평가전에서도 1:6으로 대패하고 월드컵에서도 굉장히 부진했으며, 첫 진출한 아이슬란드에게 첫 골 허용과 1:1무승부로 승점 1점을 헌납하고, 크로아티아한테 0:3 완패, 나이지리아를 힘겹게 2:1로 이기고, 자력으로 16강도 진출하기 어렵게 된 상황에서 크로아티아가 아이슬란드를 이겨준 덕에 운 좋게 조 2위로 16강에 올랐지만 프랑스에 3:4 패배로 16위로 탈락하여, 지난 대회 2014 월드컵 준우승(2위)보다 무려 14계단 하락한 성적으로 탈락했다.[43]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당시 국대선수였던 박지성이 맨유로 2007-08 챔스 준결승전 풀타임으로 출전하여 바르셀로나의 메시를 1:0으로 승리도 하였다.[44] 이 중 승부차기전까지 포함하면 43승 19패[45] 당시 일본은 2018월드컵 아시아 예선 2위(B조 1위)로 통과했다.(1위는 이란(승점 22점, A조 1위), 2위 일본은 승점 20점)[46] 당시 불가리아는 유럽예선에서 프랑스를 2:0으로 승리였고, 유고슬라비아, 동독을 제치고 24강 본선 86월드컵에 진출하였고, 1차전에서 디펜딩 챔피언 이탈리아에게 1:1 무승부 승점 1점을 기록하며, 불가리아는 86월드컵 16강 15위를 기록했다. 이 불가리아를 상대로 한국이 월드컵 역사상 첫 승점을 기록했다. 지금은 월드컵 본선에서 보기 힘들지만 불가리아는 유럽예선을 여러차례 통과하여 1962월드컵 15위, 1966월드컵 15위, 1970월드컵 13위, 1974월드컵 12위를 기록과 94월드컵 4위를 기록할 정도로 20세기 시절에는 유럽의 강팀으로 평가받던 시절이었다.[47] 당시 프랑스는 피파랭킹 8위, 대회 준우승팀.[48] 당시 스페인은 피파랭킹 5위였다., 스페인에 승점 1점을 획득한 최초의 아시아팀.[49] 월드컵에서 남미팀을 상대로 첫 승점 획득. 당시 볼리비아는 남미예선에서 홈 고지대 어드밴티지를 활용해서 브라질을 상대로 2:0으로 승리(브라질 남미예선 사상 첫 패배.), 우루과이를 3:1로 격파하며, 아르헨티나를 제치고 남미예선 3위로 통과 후 본선 24강 94 월드컵에 진출했고 한국보다 높은 시드(포트)였으며, 당시 볼리비아는 93에콰도르 코파에서 콜롬비아와 1:1, 멕시코(초청국)와 0:0 각각 무승부로 승점 기록과 95우루과이 코파에서 미국(초청국)을 1:0으로 이기고, 칠레와 2:2무승부 승점 1점을 기록하며 8강 8위까지 기록하며 97년에 코파 준우승과 피파랭킹 18위를 기록할 정도로 볼리비아 최전성기 시절이었다. 1963코파아메리카 우승을 한 경력이 있었다.[50] 국내 대표팀이 월드컵 역사상 상대팀을 탈락시킨 첫 경기이기도 하다.[51] 1999년 A매치와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 독일을 3:0, 2:0으로 완파하고 컨페더레이션스컵 3위 기록, 2002 골드컵 우승과 북중미예선을 통과로 2002월드컵 32개국 본선에 진출을 하며, 미국은 피파랭킹 13위를 기록하였고, 한국은 2002월드컵에서 미국을 상대로 1:1무승부 승점 1점으로 월드컵에서 북중미팀에 첫 승점을 획득하였다.[52] 마지막 A매치 올림픽 축구 대회였고, 러시아 소련시절에는 유로1960 우승과 1966월드컵 4위를 기록할 정도로 우승후보에 해당하던 시절이었다.[53] 당시 한국은 피파랭킹 57위, 러시아는 피파랭킹 19위의 카펠로 감독이었다.[54] 아시아 최종예선에서 오만 쇼크와 2014년 월드컵 알제리 쇼크가 대표적이다. 그 밖에도 2022년 가나전이 있다.[55] 당시 스웨덴은 브라질과 공동 8강팀이었다.[56] 독일은 1938월드컵 15개국 본선 1라운드 15강 토너먼트에서 탈락(10등)한 적이 있고,(15강인 이유는 본선 진출국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되어 사라졌다.) 1978월드컵 당시 2라운드 8강 조별리그에서도 탈락(6등)한 적이 있으나, 2018월드컵 1라운드 32강 조별리그 탈락(22등)은 최초였다.[57] 'Capable of Making Noise'는 '이변을 만들어 낼 수 있는 (팀)'이라는 뜻이다.[58] 참고로 저 이미지에서는 멕시코, 미국, 세르비아와 함께 묶여서 언급되고 있는데, 한국은 저 팀들 못지않은 강팀 킬러로 평가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단, 미국은 상대전적에서 근소하게 앞서고 세르비아는 유고슬라비아 시절을 포함하면 압도적 열세지만 국가명을 세르비아로 바꾼 뒤에는 1승 1무 1패 백중세다.[59] 마지막 32강 조별리그 체제였고, 다음 2026북미월드컵부터는 48강 조별리그로 바뀐다.[60] 아시아 최초로 스페인을 탈락시킨 경기[61] 1997년 도쿄 대첩 시절 브라질 출신 귀화선수 로페즈 바그너가 있었고,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일본 대표팀으로 뛰었던 산투스 알레산드루, 어머니가 이탈리아계 브라질인인 다나카 마르쿠스 툴리오 등이 있었다. 이 중 툴리오는 혼혈임에도 처음부터 일본 국적을 보유하고 있지는 않았기 때문에, 2003년에 일본 국적을 취득했다.[62] 일본 대표 선수는 어머니가 독일인인 사카이 고토쿠, 미국인 아버지를 둔 슈미트 다니엘 등이 있다.[63] 부모가 모두 네덜란드 본토인 출신이지만, 집안 전체가 일본으로 귀화해 일본에서만 자란 마이크 하프나같은 케이스도 있다. 종목은 다르지만 우리나라 육상 기대주로 손꼽히는 비웨사 다니엘 가사마와 같은 케이스다.[64] 2000년대 초반 전남의 브라질 용병 수비수. 김태영, 강철로 이루어진 마태철 3백은 당시 알아주는 빗장수비였다.[65] 그 한 경기가 바로 한국과의 1997년 평가전이었다. 야구 국가대표팀처럼 국적 규정을 적용했다면 신의손이 한국 대표팀으로도 뛸 수 있었을 것이다.[66] 당시 기성용이 주어를 밝히지 않았지만 매우 뻔한 욕설 섞인 반대의사를 SNS를 통해서 밝히며 아주 강력한 반발을 보이기도 했다.[67] 특별귀화가 불발되어도 일반귀화를 할 것이라 밝히며 한국어 공부를 하고 있다.[68] 부친이 영국인이다. 홍명보 대타로 활약했는데, 의외로 프랑스 월드컵 미남 선수 베스트 11에 뽑혔고, 실제로도 잘생겼다. 선수 생활 은퇴 후 연예인으로 활동하며 MBC 드라마에도 출연한 바 있다.[69] 부친이 주한미군 상사였다고 한다. 수원 삼성에 2006년까지 있었고, 2012년까지 K3리그에서 활동했다.[70] 어머니가 러시아인인 러시아계 한국인이다.[71] 한국명 최민수. 2017, 2019 U-20 대표로 선발된 바 있으며 독일인 아버지를 둔 독일계 한국인이다.[72] 아버지가 모로코인이다.[73] 나이지리아계 아버지를 두었다. 아버지는 현재 한국인으로 귀화한 상태.[74] 이 선수는 좀 복잡한 배경을 가지고 있는데, 어머니는 인도네시아-네덜란드 혼혈이시고, 아버지는 3살때 한국에서 네덜란드로 입양온 한국계 네덜란드인이다. 따라서 혈통은 한국계 혈통이 맞지만, 법적으로 네덜란드 단일국적인 상태로, 선수가 한국인이 되기 위해선 일반귀화를 할 수 밖에 없다. 다만 2021년까지도 SNS 게시물로 한국 귀화 의지가 드러난 게시물을 여전히 올리고 있는 등 한국인의 정체성은 어느정도 가지고 있는 듯 하다.[75] 아버지가 스웨덴인, 어머니가 한국인으로, 둘 다 칼마크 FF 1군 선수였다. 스웨덴 U-17 국가대표로써 2013년 FIFA U-17 월드컵에 스웨덴 대표로 형제가 모두 출전해 스웨덴의 3위 입상을 이끌었다. 그러나 동생은 2018년 인대 부상으로 인해 은퇴를 했고, 형 또한 같은 해 칼마르 FF를 끝으로 프로 생활을 접었다.[76] 이 선수는 어머니의 국적인 한국, 아버지의 국적인 나이지리아, 태어나고 자란 스페인 등 3중국적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3개국 국가대표 중 한 국가를 선택할 수 있다.[77] 다만 본래의 주 포지션은 윙어다. 성인 무대에서는 아무래도 소속팀이 레알인지라 선수층이 워낙 두텁기 때문에 풀백으로도 출전하며, 풀백으로 나오는 경우에도 그럭저럭 괜찮은 활약을 보여준다. 만일 우리나라 대표팀에서 뛴다면 풀백 뿐만 아니라 취약한 포지션인 오른쪽 윙어로도 자주 출전할 것이다.[78] 어머니가 한국인, 아버지가 독일인이다.[79] 당시에 허정무 감독도 그를 살펴보긴 했지만 딱히 특출나진 못했다고 한다. K리그 등록명은 미국 이름을 그대로 발음한 제프 유였다고 한다.[80] 당시 공격진에 박주영, 심우연, 신영록, 김승용 등이 있고 경쟁이 치열해서 일본 대표팀 쪽으로 돌아섰을 것으로 보고 있다.[81] 혼혈 선수의 경우 앞서 언급되었던 장대일이나 김준도 있고, 강수일이 대표팀 근처까지 갔을 때 환영하던 여론이 대다수였던 것도 있으니 한국에서 자랐거나 한국인으로서의 의식이 좀 있는 경우라면 한국팬들도 많이 열려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82] K리그에서 아시아쿼터제도를 활용해 교포선수를 쓰고 있었으나, 박일규는 외국인 쿼터 문제로 인해 국내 선수 자격을 취득하기 위해 일본 국적을 취득하기로 결정했다.[83] 귀화자는 병역 의무가 없음에도 어지간한 경우가 아니면 특별귀화를 허용해주지 않는 데다가, 그렇게 특별귀화에 성공하더라도 5년 연속 거주와 함께 타 국가의 대표팀에 차출된 적이 없어야 하는 규정을 못박고 있는 FIFA의 귀화 선수 심사를 통과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84]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유망주는 유망주일 뿐, 이들이 유럽의 5대리그급이나 그 외 유명팀 성인무대 무사히 안착해서 준주전급 활약을 하게 된 다음 귀화를 기대해야 한다.[85] 본 문서의 내용과는 거리가 다소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한국은 후발주자인데다가 일본과 중국, 사우디 등의 같은 아시아 국가와 비교했을 때에도 턱없이 부족한 인프라에도 불구하고 K리그라는 아시아 최정상급의 리그를 가졌으며 수많은 유럽파 선수들은 물론 차범근, 최순호, 허정무, 박지성, 이영표, 홍명보, 손흥민, 이강인, 김민재 등의 세계적 선수를 배출한 경험이 있는 국가이다. 즉, 리그의 재정과 더 많은 인적 자원의 확대가 이루어진다면 여타 경쟁국가보다 더 큰 폭발적 성장을 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추었다고 보아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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