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 타다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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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전 축구선수

파일:ㅅㄱㅍㄹㅊㅅ.jpg
리 타다나리
李忠成[1] / Tadanari Lee

한국명
이충성
출생
1985년 12월 19일 (38세)
일본 도쿄도 니시토쿄시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1985~2006)
[[일본|
일본
display: none; display: 일본"
행정구
]]
(2006~현재) (재일교포 4세)
신체 조건
182cm, 73kg
포지션
공격수
유소년 클럽
도쿄 무사시노 시티 FC (1998~2000)
FC 도쿄 (2000~2004)
소속 클럽
FC 도쿄 (2004)
가시와 레이솔 (2005~2009)
산프레체 히로시마 (2009~2011)
사우스햄튼 FC (2012~2014)
FC 도쿄 (2013 / 임대)
우라와 레드 다이아몬즈 (2014~2018)
요코하마 F. 마리노스 (2019)
교토 상가 FC (2020~2021)
알비렉스 니가타 싱가포르 FC (2022~2023)
국가대표
11경기 2골 (일본 / 2011~2012)
SNS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1. 개요
2. 선수 경력
2.1. 클럽
2.2. 국가대표
3. 우승 기록
4. 여담



1. 개요[편집]


일본의 전 축구선수. 대한민국 국적의 재일교포 4세 출신으로 현재는 일본으로 귀화했다.

한국명은 이충성(李忠成)으로 '타다나리'는 '忠成' 을 그대로 훈독한 이름이다.


2. 선수 경력[편집]



2.1. 클럽[편집]


2004년 FC 도쿄에서 프로로 데뷔했다. 이후 가시와 레이솔산프레체 히로시마를 거쳤으며, 이후로 유럽 진출 소식이 많이 보도되곤 했는데 분데스리가 TSG 1899 호펜하임으로의 이적이 유력시되었다가 흐지부지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2011년 12월 31일 풋볼 리그 챔피언십사우스햄튼 FC로의 이적이 확정됐다. 본인은 2014 브라질 월드컵 출전을 대비해 유럽축구 경험을 쌓는 것이 이적의 배경이었다고 설명했으며, 사우스햄튼은 29라운드까지 2위를 달리고 있어[2] 승격이 유력하기도 했다. 이적 후 사우스햄튼의 올해의 골을 수상한 멋진 골을 넣는 등 순착하나 싶었으나 4월에 4~6개월의 큰 부상을 당해 시즌은 물론 다음 시즌 초반도 출장이 힘들게 되었다. 한편 팀은 프리미어 리그로 승격이 확정되었다.

허나 프리미어리그로 승격한 2012-13 시즌에는 부상의 여파로 제대로 뛰지 못하였는데, 소속팀 사우스햄튼이 강등권 가까이로 처지면서 고전 중이라는 점도 있었다. 결국, 프리미어 리그에서는 한 경기도 뛰지 못한 채 친정팀 FC 도쿄로 임대 이적했다. 4개월 동안 13경기 4골을 넣었으며 당초 예상한 것보다는 기대에 못 미치는 활약으로 2013년 6월 13일 사우스햄튼으로 복귀하였다.

2014년 1월 14일 사우스햄튼과 계약을 해지하며 자유계약 신분이 되었고, J리그로 유턴할 것이 유력했다. 그리고 1월 16일 우라와 레드 다이아몬즈로 이적하였다.

그런데, 2014년 3월 8일 우라와 레즈사간 도스의 경기가 열린 사이타마(埼玉) 스타디움 관람석 출입구에 강성 극우 팬덤으로 유명한 우라와 서포터들이 일본인만 입장하라는 JAPANESE ONLY라는 영문이 크게 적힌 현수막을 내걸었는데, 이를 이충성을 겨냥한 인종차별적 의도로 분석하였다. 실제로 이충성이 당일 교체로 투입되었을 때 야유가 쏟아졌다는 증언도 있었다. # 이에 팀 동료였던 마키노 토모아키가 자신의 트위터에서 이를 정면으로 비판하였다.

2016 AFC 챔피언스 리그 8강전 FC 서울 원정에서 2골을 넣으며 활약했지만 팀은 2:3으로 패배로 종료되었고 합산점수 끝에 승부차기전에서 6:7로 패해 탈락했다. 이후 인터뷰에서 이 경기를 올 시즌 아시아 최고의 경기라고 평했다. 또한 리그에서는 37경기 12골을 기록했다.

2018년 12월 27일, 자신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요코하마 F. 마리노스로 이적했음을 밝혔다. 이후 2019 시즌 종료 후에는 교토 상가 FC로 재차 이적했다. # 2021년 12월 28일, 알비렉스 니가타의 싱가포르의 위성구단알비렉스 니가타 싱가포르 FC로의 이적 소식이 알려졌다. #

2023년 9월 14일, 소속 구단 알비렉스 니가타 싱가포르 FC 공식 웹사이트를 통해 리 타다나리의 현역 은퇴가 발표되었다. 9월 16일 리그 최종전 종료 후에 은퇴식을 열 예정이라고.


2.2. 국가대표[편집]


2004년 당시 FC 도쿄에서 같이 뛰던 절친 오장은의 추천으로 인해 U-19 대표팀에 발탁됐다.

하지만 2006년 당시 일본 올림픽 대표팀(U-23) 감독이었던 소리마치 야스하루가 귀화를 권유하자, 일본으로 귀화 신청을 했으며 2007년 2월 일본 국적을 취득하였다. 성은 자신의 뿌리를 지킨다는 뜻으로 일본어 로마자 표기법에 의한 Ri를 사용하지 않고, 한국인 씨들이 가장 많이 쓰는 방식인 Lee를 택했다. '타다나리'는 '忠成' 을 그대로 훈독한 이름이다. 이 결정을 하고 나서, 이충성은 할아버지의 묘소에 가서 하염없이 울었다고 한다. "할아버지 미안해요. 이제 안되겠어요" 라면서. 할아버지는 이충성이 한국 국적으로 살았으면 좋겠다고 늘 말해왔기 때문이다. 그가 한국식 이름을 버리지 않고 한국 이름을 일본식으로 읽는 방식을 택한 이유의 배경에는 이런 사연이 있는 것이다.

이때 일본 귀화를 결심한 이유를 훗날 MBC 스페셜에 나와서 밝혔는데, 당시 U-19 대표팀에서 다른 선수들에게 상당한 따돌림과 차별을 받았으다고 한다. 그 중에서는 반쪽발이라고 욕하는 사람까지 있었다고.[3][4][5]

하지만 리 타다나리를 한국 대표팀에 추천한 절친 오장은은 완전히 정반대의 주장을 하였다. 오장은은 인터뷰에서 "솔직히 그런 느낌을 전혀 받지 못했다. 당시 개인적으로 최대한 충성이를 편하게 해주려고 했다. (박)주영이를 비롯한 동료들 방에 함께 일일이 돌아다니며 인사도 하고 친하게 지내도록 도왔다. 그래서 (따돌림을 받았다는 이충성의 말에)깜짝 놀랐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나왔을 때 솔직히 아쉽고 섭섭했다"라며 서운함을 드러냈다. #

그리고 J리그에서 활약하다가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2011 아시안컵에서 알베르토 자케로니 감독이 이끄는 일본 대표팀에 처음으로 발탁되었다.

2011년 1월 9일 조별 리그 1차전 요르단전 후반 처음부터 출전하여 A매치 첫 출전을 했다. 1월 29일 킹 칼리파 스타디움에서 열린 호주와의 결승전에서 연장 전반 8분부터 마에다 료이치와 교체 투입되었다. 그리고 연장 후반 4분 나가토모 유토의 크로스를 그대로 발리슛으로 집어넣으며 결승골을 득점, 일본의 4번째 아시안컵 우승에 기여하였다. 이후 2011년 8월 10일 한일전에서 백힐로 카가와 신지의 첫 골을 어시스트 하는 등 좋은 움직임을 보여줘 일본의 3:0 대승에 공헌했다.

그 후로는 점점 주전경쟁에서 밀려났고 2012년을 끝으로 더이상 대표팀에 소집되지 못했으며, 자연히 국내에서의 관심도 식었다.


3. 우승 기록[편집]






4. 여담[편집]


  • 한국 국적의 재일 한국인 3세인 아버지는 니시토쿄시에서 야키니쿠집을 운영하고 있으며, 실업 시절 요코하마 트라이스타 SC 소속의 축구 선수로 활동했었다. 이충성은 도쿄 조선 제9초등학교 5학년때 요코가와[6]주니어 유스팀의 시험을 통과해 6학년때부터 같은 팀 연습에 참가했으며 그때부터 축구를 시작해 2004년 FC 도쿄에서 프로 데뷔에 성공했다.

  • 리 타다나리를 소재로 한 영화가 한국에서 제작 준비 중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한국은 둘째치고 물 건너의 반응은 이하생략.

  • 아이돌 그룹 슈가 출신의 아유미(현 예명 이토 유미)와 연애한다는 보도가 떴었고 두 사람이 이를 인정하면서 많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서로에게 도움이 많이 되는 사이였고, 일본에 거주하는 재일 한국인라는 점에서 서로 통한 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2011년 6월 말 아유미가 이충성과는 현재는 결별했고 좋은 친구로 지내고 있다고 직접 밝혔다.

  • 2011년 아시안컵에서 일본의 우승을 이끈 영웅이었지만 그 이후 일본에서는 국적과 관련된 애매모호한 정체성 문제로 평이 썩 좋지는 않은 편이었다. 특히 사우스햄튼으로 이적하면서 일본인으로서가 아니라 아시아인으로서 활약하고 싶다는 발언을 하여 넷 우익들을 더욱 격분하게 만들었고, 혐한들 역시 귀화했다지만 저놈도 결국은 조선인이었다는 반응을 보이며 완전히 등을 돌려버렸다. 게다가 앞서 말한 대로 국내 적지 않은 커뮤니티에서도 아시안컵 한일전 당시 한국팀에게 참패를 안겨주었다는 이유로] 조국에 비수를 꽂은 매국노, 축구계의 이완용 운운하는 찌찔한 비난글이 올랐을 정도였다. 다만 해당 대회 준결승에서 벌어진 한일전에서는 본래 교체로 나설려고 했으나 갑작스레 부상선수가 발생해 다른선수가 교체로 들어가면서 리 타다나리는 출전하지 않았다.




  • 2017년 4월 J리그의 선수들을 중심으로 출범한 기부 단체인 SPOON FOUNDATION의 선수 앰배서더를 맡고 있다. #

  • 2017년 5월 31일, AFC 챔피언스 리그 16강 2차전 제주 유나이티드와의 경기에서 골을 넣어 팀이 1차전 패배를 뒤엎고 8강에 진출하는데 기여했다. 그러나 이 날 경기는 홍콩 출신 주심의 편파 판정 논란, 종료 직전 우라와의 경기 지연, 우라와 선수 몇 명의 자극적인 도발로 양팀 선수들 사이에 물리적 충돌이 발생했는데 이때 리 타다나리 또한 같이 비난을 받았었다. 당시 리 타다나리 본인은 충돌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으나, 도발적인 세레모니를 하여 충돌을 더욱 곤두세웠던 것. 물론 리 타다나리 본인이 소속팀을 위해 최선을 다 한 것 뿐이지만, 이 세레모니로 인해 이제 더 이상 한국 축구 팬들로부터 '조국이 버린 재일교포'라며 동정 어린 시선을 받기는 어려워질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7] 한편 이전 2016년 5월 우라와와 포항 스틸러스간의 경기에서도 경기 종료 후 당시 포항 선수들이 몸에 부착했던 압박용 테이프를 그라운드 위에 내다 버리고 가는 소동으로 인해 우라와 선수들과의 감정적 충돌이 있었는데[8], 이 일로 우라와 팬들 및 선수들 사이에서 한국 팀에게 이 일을 한번 복수해야 한다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았나 하는 분석도 있다. 제주U 사건의 주동자로 인식되는 마키노 토모아키의 경우 워낙 쇼맨십도 강하고 클럽 및 국가 대표팀에서의 프라이드가 강한 편이라 그럴 수도 있긴 하지만 그외 대부분의 선수들이 이번 소동에 가담한 것은 사실상 선수단 간의 공감대가 있지 않고서는 납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 2020년 1월 4일, 2살 연상의 모델 토요바 사키(樋場早紀)와 결혼을 발표했으나 2023년 현재 이혼하였다.

  • ‘리 타다나리’는 정확히 따지면 이충성이라는 한국식 이름을 그대로 일본식으로 훈독한 것이다. 귀화를 하면서 개명을 하는 케이스가 보통인데 이충성의 경우 귀화를 하면서 개명을 하지 않았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상당히 크다. 일본인들은 리 타다나리(이충성)이라는 이름만 딱 봐도 한국계라는 걸 알수 있는 것이다. 즉, 귀화를 하면서도 본인의 한국인이라는 핏줄을 지키기 위해 나름대로의 최선을 다한 것. 여러 인터뷰를 볼때, 이는 본인 할아버지의 영향이 큰 듯 하다.

  • 혼다 케이스케가 유일하게 리 타다나리를 이춘성 이라고 이름을 불러줬다고 한다. 일본 국가대표팀 선수들중에서는 유일하게 그의 한국식 이름으로 불러주었다고 하는데 이는 혼다 케이스케의 여담에서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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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리 타다나리는 한국명 ‘이충성’을 일본식으로 그대로 훈독한 것이다. 즉 귀화하면서 개명을 하지 않은 케이스[2] 당시 1위였던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와의 승점 차이가 6점이었다.[3] 이는 재일교포 축구평론가 신무광(40)의 저서 '우리가 보지 못했던 우리 선수'에도 실려있다.[4] 해당 인터뷰에서 반쪽발이라는 욕설을 누구에게 들었는지 명확하게 밝히지는 않았는데, 2011년 8월 조선일보 기사에서 "당시 마음고생이 심했다. 한국어 표현력이 부족해 동료들로부터 '반쪽발이(X발이)'라는 손가락질도 받았다"라고 기사가 난 것을 보면 선수들을 저격한게 맞는듯 싶다.[5] 한편 타다나리를 반쪽발이라 욕한 선수들 중에 김진규가 있었다는 루머가 있는데 당시 김진규는 U-19 대표팀이 아니라 올림픽 대표팀에 있었기 때문에 시간대가 안맞다.[6] 현 요코가와 무사시노 FC.[7] 하지만 앞서 서술했듯이 한국인들은 타다나리의 활약으로 한일전에 패배했다는 이유만으로 입에 담지 못할 욕설과 비하까지 서슴치 않았기 때문에 어차피 처음부터 한국인으로 부터 우호적이거나 중립적인 시선을 받는 것은 기대할 수 없었다.[8] 포항 선수중 한명이 내버려진 테이프를 일단 몇개 주워 동료 포항 선수에게 건넸는데, 건네받은 포항 선수가 다시 그라운드에 내다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