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원
덤프버전 :
경복궁의 후원에 대한 내용은 경복궁 북원 문서
'북원'의 범주를 토구스 테무르 카안이 시해당한 1388년까지로 설정하느냐, 아니면 이후 내몽골 제부가 청나라에 복속하기 전까지의 몽골 정권까지를 모두 북원으로 보느냐에 대해 여전히 논란이 있다.[4] 전자라면 원나라의 직계 후손으로서 20여 년간 존재했다는 의미이고, 후자라면 250여 년간 존재한 수많은 몽골계 세력을 통틀어 보는 것이다.
원나라의 연장선이라 할 수 있는 1368년~1388년의 북원은 1388년 제3대 천원제 토구스 테무르 카안때 부이르 누르[5] 에서 남옥이 이끄는 명나라의 15만 대군에게 습격을 당했고, 결국 카라코룸으로 탈출하다가 툴 강 근처에서 예수데르에게 시해당했다. 예수데르는 과거 세조 쿠빌라이 칸과 툴루이 내전을 벌였던 아리크부카의 후손으로, 124년만에 쿠빌라이 칸의 황통을 무너뜨리고, 원나라의 황제 지위를 포기한 후, 조릭투 카안으로 즉위함으로써 대칸으로서의 지위를 되찾았다. 북원의 멸망 이후 몽골은 차하르, 할하, 투메드 우량하이 등을 중심으로 한 6부족 연맹 단위로 재편되었고, 이들 부족들이 서로 투닥거리며 통일되기도 하고, 간간히 명나라를 침공해 세종 가정제때의 경술의 변과 같은 사건을 일으켜 위세를 떨치다가 청초 만주 정권에 순차적으로 복속되었다.
1368년 혜종은 강남에서부터 급격히 세를 불려가면서 북진을 해온 명나라의 맹공을 이겨내지 못했다. 결국 수도 대도를 빼앗긴 채 만리장성 이북의 상도[6] 로 도주했고, 곧 응창(應昌)에서 할거(割據)했다. 이로써 중원은 완전히 명나라의 손에 떨어지게 되었다.
혜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소종 아유시리다라 카안은 외몽골로 들어갔고, 이후 1372년에 명나라의 원정군을 격파하며 산서성을 되찾기도 했다. 하지만 소종과 명장 코케 테무르의 사후에 북원은 급격히 힘을 잃어갔고, 중국 진출을 단념해야 했다. 북원의 뒷배 역할을 착실히 해주던 만주의 군벌인 잘라이르 나하추마저 명군의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항복하자 북원의 세력은 더욱 쇠락할 수 밖에 없었고, 끝내 1388년 부이르 누르의 동북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명군에게 대패했다. 소종의 뒤를 이은 천원제 토구스 테무르 카안도 도주하던 중 툴 강 기슭에서 아리크부카의 후손인 예수데르에게 피살당하면서 북원은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다.
예수데르는 조리그투 칸으로 즉위해 대칸위를 이었으나 북원의 황제 지위는 본래 세조 쿠빌라이 칸이 선포한 것이었고, 예수데르 자신은 쿠빌라이 칸에 의해 권력 경쟁에서 밀려난 아리크부카의 후손이었으므로 중원 황제의 칭호를 포기하고, 몽골의 대칸 지위만 유지했다.
이후 몽골은 차하르족, 할하족, 우량카이족을 중심으로 한 부족 연맹으로 전락했다. 그리고 쿠빌라이 칸 황통과 아리크부카 황통이 대칸의 자리를 가지고 끊임없이 경쟁하다가 다얀 칸의 치세 이후 쿠빌라이 황통이 다시 대칸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명나라에서는 북원이 멸망해 몽골 부족 연맹으로 분리되자, '몽골'을 원래 호칭인 '몽고' 대신에 '달단'(타타르)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는 어디까지나 명나라에서 부르던 명칭으로, 여전히 몽골족 스스로는 '대원'이나 '몽골'이라고 불렀으며, 만주에 사는 여진족(후의 만주족) 역시 북원을 '투메드 몽골' 내지는 "우브르 몽골"이라고 했다.
명나라에서 몽골을 타타르로 불렀던 것은 타타르가 야만인같은 멸칭으로 통용되었기 때문이다. 원래의 타타르족은 카마그 몽골족과 대대로 원수지간이었고, 결국 칭기즈 칸에 의해 멸족당하며 몽골족에 흡수되었는데 몽골에게 '타타르'란 용어는 바로 '야만인' 정도의 멸칭으로 사용되었다. 몽골이 중국을 정복하자 '야만인'이란 의미로 타타르라는 말이 중국에 퍼지기 시작했는데, 명나라가 성립된 이후, 몽골을 경멸하는 용어로 '타타르'를 호칭하기 시작하더니 아예 북방 유목민족 전체를 비하하는 용어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청나라를 건국한 만주족도 명나라에서는 타타르라고 불렀다. 비유하자면 우리나라에서 북방민족을 비하해서 불렀던 오랑캐란 말과 같다고 보면 된다. 당연히 청나라에서는 '달단'이라는 명칭이 폐기되었고, 한자 표기 역시 '달단'에서 '몽고'(몽골)로 되돌아갔다. 물론 여기서의 달단은 내몽골을 말하는 것으로 러시아의 타타르인과는 무관하며, 현재의 내몽골 자치구와 관련이 있고, 칭기즈 칸의 동생인 카사르의 후손들이다.
줄곧 오이라트와 세력을 겨루었으며, 한 때 오이라트 출신이자 훗날 다이온타슨다이 칸이 되는 에센 타이시는 일시적으로 몽골의 제부족들을 제압하고, 명나라를 상대로 토목의 변을 일으켜 명나라 황제를 사로잡는 등 당대에 큰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이렇듯 분열하며, 오이라트에게 권력을 내주기도 하다가 몽골 부족을 재통일한 칸은 다얀 칸이었다. '다얀'이라는 이름도 한자인 '대원'(大元)을 몽골어로 음차한 것이었으며 그의 아내인 만투하이는 현명한 왕비로 유명해 몽골에서 존경받고 있다. 다얀 칸은 에센 타이시 때부터 정립되어가던 6대 부락을 6만호 체제로 재정비하고, 몽골 제국 부활의 토대를 닦아 나갔다. 다얀 칸의 손자인 알탄 칸이 경술의 변을 일으키면서 명나라를 공격, 한때 허베이성과 산시성을 수복하는 등 예전의 기세를 많이 회복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알탄 칸때문에 대칸의 권력이 쇠퇴해 몽골 6부족은 다시 분열되었고, 17세기경 수십 년의 시간차를 두고 만주족의 청나라에 귀부하며 운명이 갈라졌다. 어차피 몽골인은 청나라를 중국이 아닌 만주인으로 봐서 가능했던 일이었고, 훗날 청나라가 멸망하자 독립했다.
이후 만주족의 한(汗)이자 청나라의 황제가 대대로 몽골의 칸위에 올랐다. 그래서 청나라 황제는 한족에게는 중국식 황제호를 썼으나 만주족에게는 만주식 한호, 몽골인에게는 몽골식 칸호를 썼다. 한 예로 태조 누르하치는 후금을 건국하면서 중국식 연호가 아니라 몽골식으로 "텡그린 술데투"라고 연호를 선포했으며. 태종 홍타이지부터는 정식으로 칸호로 스스로 호칭했다. 청태종의 칸호는 "복다 카간"이다. 청나라는 공문서도 만주어, 몽골어, 중국어로 기록하는 등 3국을 모두 정복한 정복왕조로서의 정체성을 이어갔다.
이후 역사에 대한 내용은 청나라/역사 문서
내/외몽골과 부랴티아의 부랴트인, 그리고 칼미키야의 토르구트까지 모두가 몽골 제국을 전신으로 삼았다.
그러나 몽골 제국이 무너진 이후 북원 시대에 몽골은 크게 둘로 양분되었다. 일반적으로 몽골과 오이라트로 분리되었는데, 간단히 정리하자면 쿠빌라이계에 충성하는 원(元)조 세력과 반 쿠빌라이계 동맹인 오이라트로 볼 수 있다.
기실 양 집단은 민족적 구성으로는 그렇게 크게 다른 것은 아니었다. 오이라트 역시 원래의 오이라트 부족에 케레이트와 나이만 등의 부족들이 연합한 부족 연합체적인 성격을 지닌 집단이었다.
몽골인들의 경우에는 여러 개의 집단이 있었고, 쉽사리 통일되지 않았으며 중간에는 오이라트 에센에게 권력을 내주기도 했는데 이것이 다얀 칸 때 비로소 6개의 대부락으로 정리되었다, 이 6개의 대부락을 6투멘(6만호)이라고 부르게 되는데 , 그 구성은 좌현이 차하르, 할하, 우량하이였으며, 우현이 오르도스, 융셰부, 투메드였다. 훗날 이들 중에서 차하르가 내몽골의 중심 부족이 되었고, 할하는 외몽골의 중심 부족으로 성장했다.
이 6부족 중 차하르부 등은 청나라에 복속되어 만•몽 연합 제국의 형태로 만주족, 즉 여진족들과 호흡을 같이 하게 되었고, 이러한 역사가 현대 내몽골 정체성의 기원이 되었다.
그리고 내몽골과 달리 오늘날의 몽골국인 외몽골은 할하부 등이 전신이며, 이러한 역사가 마찬가지로 현대 외몽골 정체성의 기원이 되었다. 그리고 이 외몽골에는 몽골국뿐만 아니라 시베리아 남부의 부랴트인과 칼미크의 토르구트인도 포함되고, 엉뚱하게 튀르크 계통의 투바인도 포함된다.
조리그투 칸 예수데이가 중국식 황제 칭호를 버린 후의 역대 대칸 목록이다. 대체적으로 동몽골의 칸들은 재위 시절이 평탄하지 못한 편인데, 개중에는 에센 타이시(다이온타슨다이칸)나 다얀 칸, 알탄 칸처럼 명나라를 위협했던 칸도 있었으나 대개 오이라트와 명나라에 시달리고 칸의 암살도 빈번했으며, 골육상쟁은 기본이었다.[8] 다이온타슨다이 칸 에센 타이시를 제외하고는 모두 몽골 제국의 황족이었던 보르지긴씨가 대칸의 지위를 이어갔고, 에제이가 청나라 태종 숭덕제에게 귀순하면서 멸망했다.
, 창덕궁의 후원에 대한 내용은 창덕궁 문서
참고하십시오.1. 개요[편집]
1368년 명나라의 태조 홍무제 주원장이 대도를 점령한 이후 중원 정복을 완수함에 따라 원나라의 제11대 황제인 혜종 토곤 테무르 카안이 북쪽으로 도주한 후 몽골 고원에서 지속된 정치체로, 주로 내몽골과 북만주가 중심이었으며, 일시적으로 중국 일부를 재점령하거나 외몽골에 들어가 외몽골 동부 지역과 부랴트까지 장악하기도 했다.
'북원'의 범주를 토구스 테무르 카안이 시해당한 1388년까지로 설정하느냐, 아니면 이후 내몽골 제부가 청나라에 복속하기 전까지의 몽골 정권까지를 모두 북원으로 보느냐에 대해 여전히 논란이 있다.[4] 전자라면 원나라의 직계 후손으로서 20여 년간 존재했다는 의미이고, 후자라면 250여 년간 존재한 수많은 몽골계 세력을 통틀어 보는 것이다.
원나라의 연장선이라 할 수 있는 1368년~1388년의 북원은 1388년 제3대 천원제 토구스 테무르 카안때 부이르 누르[5] 에서 남옥이 이끄는 명나라의 15만 대군에게 습격을 당했고, 결국 카라코룸으로 탈출하다가 툴 강 근처에서 예수데르에게 시해당했다. 예수데르는 과거 세조 쿠빌라이 칸과 툴루이 내전을 벌였던 아리크부카의 후손으로, 124년만에 쿠빌라이 칸의 황통을 무너뜨리고, 원나라의 황제 지위를 포기한 후, 조릭투 카안으로 즉위함으로써 대칸으로서의 지위를 되찾았다. 북원의 멸망 이후 몽골은 차하르, 할하, 투메드 우량하이 등을 중심으로 한 6부족 연맹 단위로 재편되었고, 이들 부족들이 서로 투닥거리며 통일되기도 하고, 간간히 명나라를 침공해 세종 가정제때의 경술의 변과 같은 사건을 일으켜 위세를 떨치다가 청초 만주 정권에 순차적으로 복속되었다.
2. 역사[편집]
1368년 혜종은 강남에서부터 급격히 세를 불려가면서 북진을 해온 명나라의 맹공을 이겨내지 못했다. 결국 수도 대도를 빼앗긴 채 만리장성 이북의 상도[6] 로 도주했고, 곧 응창(應昌)에서 할거(割據)했다. 이로써 중원은 완전히 명나라의 손에 떨어지게 되었다.
혜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소종 아유시리다라 카안은 외몽골로 들어갔고, 이후 1372년에 명나라의 원정군을 격파하며 산서성을 되찾기도 했다. 하지만 소종과 명장 코케 테무르의 사후에 북원은 급격히 힘을 잃어갔고, 중국 진출을 단념해야 했다. 북원의 뒷배 역할을 착실히 해주던 만주의 군벌인 잘라이르 나하추마저 명군의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항복하자 북원의 세력은 더욱 쇠락할 수 밖에 없었고, 끝내 1388년 부이르 누르의 동북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명군에게 대패했다. 소종의 뒤를 이은 천원제 토구스 테무르 카안도 도주하던 중 툴 강 기슭에서 아리크부카의 후손인 예수데르에게 피살당하면서 북원은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다.
예수데르는 조리그투 칸으로 즉위해 대칸위를 이었으나 북원의 황제 지위는 본래 세조 쿠빌라이 칸이 선포한 것이었고, 예수데르 자신은 쿠빌라이 칸에 의해 권력 경쟁에서 밀려난 아리크부카의 후손이었으므로 중원 황제의 칭호를 포기하고, 몽골의 대칸 지위만 유지했다.
이후 몽골은 차하르족, 할하족, 우량카이족을 중심으로 한 부족 연맹으로 전락했다. 그리고 쿠빌라이 칸 황통과 아리크부카 황통이 대칸의 자리를 가지고 끊임없이 경쟁하다가 다얀 칸의 치세 이후 쿠빌라이 황통이 다시 대칸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명나라에서는 북원이 멸망해 몽골 부족 연맹으로 분리되자, '몽골'을 원래 호칭인 '몽고' 대신에 '달단'(타타르)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는 어디까지나 명나라에서 부르던 명칭으로, 여전히 몽골족 스스로는 '대원'이나 '몽골'이라고 불렀으며, 만주에 사는 여진족(후의 만주족) 역시 북원을 '투메드 몽골' 내지는 "우브르 몽골"이라고 했다.
명나라에서 몽골을 타타르로 불렀던 것은 타타르가 야만인같은 멸칭으로 통용되었기 때문이다. 원래의 타타르족은 카마그 몽골족과 대대로 원수지간이었고, 결국 칭기즈 칸에 의해 멸족당하며 몽골족에 흡수되었는데 몽골에게 '타타르'란 용어는 바로 '야만인' 정도의 멸칭으로 사용되었다. 몽골이 중국을 정복하자 '야만인'이란 의미로 타타르라는 말이 중국에 퍼지기 시작했는데, 명나라가 성립된 이후, 몽골을 경멸하는 용어로 '타타르'를 호칭하기 시작하더니 아예 북방 유목민족 전체를 비하하는 용어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청나라를 건국한 만주족도 명나라에서는 타타르라고 불렀다. 비유하자면 우리나라에서 북방민족을 비하해서 불렀던 오랑캐란 말과 같다고 보면 된다. 당연히 청나라에서는 '달단'이라는 명칭이 폐기되었고, 한자 표기 역시 '달단'에서 '몽고'(몽골)로 되돌아갔다. 물론 여기서의 달단은 내몽골을 말하는 것으로 러시아의 타타르인과는 무관하며, 현재의 내몽골 자치구와 관련이 있고, 칭기즈 칸의 동생인 카사르의 후손들이다.
줄곧 오이라트와 세력을 겨루었으며, 한 때 오이라트 출신이자 훗날 다이온타슨다이 칸이 되는 에센 타이시는 일시적으로 몽골의 제부족들을 제압하고, 명나라를 상대로 토목의 변을 일으켜 명나라 황제를 사로잡는 등 당대에 큰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이렇듯 분열하며, 오이라트에게 권력을 내주기도 하다가 몽골 부족을 재통일한 칸은 다얀 칸이었다. '다얀'이라는 이름도 한자인 '대원'(大元)을 몽골어로 음차한 것이었으며 그의 아내인 만투하이는 현명한 왕비로 유명해 몽골에서 존경받고 있다. 다얀 칸은 에센 타이시 때부터 정립되어가던 6대 부락을 6만호 체제로 재정비하고, 몽골 제국 부활의 토대를 닦아 나갔다. 다얀 칸의 손자인 알탄 칸이 경술의 변을 일으키면서 명나라를 공격, 한때 허베이성과 산시성을 수복하는 등 예전의 기세를 많이 회복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알탄 칸때문에 대칸의 권력이 쇠퇴해 몽골 6부족은 다시 분열되었고, 17세기경 수십 년의 시간차를 두고 만주족의 청나라에 귀부하며 운명이 갈라졌다. 어차피 몽골인은 청나라를 중국이 아닌 만주인으로 봐서 가능했던 일이었고, 훗날 청나라가 멸망하자 독립했다.
이후 만주족의 한(汗)이자 청나라의 황제가 대대로 몽골의 칸위에 올랐다. 그래서 청나라 황제는 한족에게는 중국식 황제호를 썼으나 만주족에게는 만주식 한호, 몽골인에게는 몽골식 칸호를 썼다. 한 예로 태조 누르하치는 후금을 건국하면서 중국식 연호가 아니라 몽골식으로 "텡그린 술데투"라고 연호를 선포했으며. 태종 홍타이지부터는 정식으로 칸호로 스스로 호칭했다. 청태종의 칸호는 "복다 카간"이다. 청나라는 공문서도 만주어, 몽골어, 중국어로 기록하는 등 3국을 모두 정복한 정복왕조로서의 정체성을 이어갔다.
이후 역사에 대한 내용은 청나라/역사 문서
의 몽골 복속 부분을
참고하십시오.3. 의의[편집]
내/외몽골과 부랴티아의 부랴트인, 그리고 칼미키야의 토르구트까지 모두가 몽골 제국을 전신으로 삼았다.
그러나 몽골 제국이 무너진 이후 북원 시대에 몽골은 크게 둘로 양분되었다. 일반적으로 몽골과 오이라트로 분리되었는데, 간단히 정리하자면 쿠빌라이계에 충성하는 원(元)조 세력과 반 쿠빌라이계 동맹인 오이라트로 볼 수 있다.
기실 양 집단은 민족적 구성으로는 그렇게 크게 다른 것은 아니었다. 오이라트 역시 원래의 오이라트 부족에 케레이트와 나이만 등의 부족들이 연합한 부족 연합체적인 성격을 지닌 집단이었다.
몽골인들의 경우에는 여러 개의 집단이 있었고, 쉽사리 통일되지 않았으며 중간에는 오이라트 에센에게 권력을 내주기도 했는데 이것이 다얀 칸 때 비로소 6개의 대부락으로 정리되었다, 이 6개의 대부락을 6투멘(6만호)이라고 부르게 되는데 , 그 구성은 좌현이 차하르, 할하, 우량하이였으며, 우현이 오르도스, 융셰부, 투메드였다. 훗날 이들 중에서 차하르가 내몽골의 중심 부족이 되었고, 할하는 외몽골의 중심 부족으로 성장했다.
이 6부족 중 차하르부 등은 청나라에 복속되어 만•몽 연합 제국의 형태로 만주족, 즉 여진족들과 호흡을 같이 하게 되었고, 이러한 역사가 현대 내몽골 정체성의 기원이 되었다.
그리고 내몽골과 달리 오늘날의 몽골국인 외몽골은 할하부 등이 전신이며, 이러한 역사가 마찬가지로 현대 외몽골 정체성의 기원이 되었다. 그리고 이 외몽골에는 몽골국뿐만 아니라 시베리아 남부의 부랴트인과 칼미크의 토르구트인도 포함되고, 엉뚱하게 튀르크 계통의 투바인도 포함된다.
4. 역대 지도자[편집]
4.1. 역대 황제[편집]
4.2. 북원 멸망 이후의 몽골 대칸[편집]
조리그투 칸 예수데이가 중국식 황제 칭호를 버린 후의 역대 대칸 목록이다. 대체적으로 동몽골의 칸들은 재위 시절이 평탄하지 못한 편인데, 개중에는 에센 타이시(다이온타슨다이칸)나 다얀 칸, 알탄 칸처럼 명나라를 위협했던 칸도 있었으나 대개 오이라트와 명나라에 시달리고 칸의 암살도 빈번했으며, 골육상쟁은 기본이었다.[8] 다이온타슨다이 칸 에센 타이시를 제외하고는 모두 몽골 제국의 황족이었던 보르지긴씨가 대칸의 지위를 이어갔고, 에제이가 청나라 태종 숭덕제에게 귀순하면서 멸망했다.
5. 기타[편집]
- 《조선왕조실록》에도 조선으로 유입된 북원 몽골인들의 후손에 관한 기록이 간간히 보인다. 명나라의 영향으로 달단의 후손이라고 기록되었는데, 이들은 조선에 자리를 잡고 버터를 공급하는 조건으로 병역을 면제받았다고 한다. 버터를 수유라고 했으므로 이들이 머무르는 곳을 수유치라고 불렀다. 그런데 수유치 주민은 병역이 면제된다는 소문이 퍼지자 너도나도 달단의 후예라고 주장하면서 이주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한 가구에 장정만 수십 명에 이르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결국 수유치를 없애고 이들에게 버터를 만드는 일 말고 새로운 생업을 주었는데, 그것이 바로 백정이었다.
- 무협소설에서는 새외무림 세력으로 등장하며, 명나라의 건국 이후 몽골 초원에서 원나라의 재건을 꿈꾸며 음모를 꾸미는 흑막 집단으로 자주 등장한다. 원말명초 몽골족과 한족간의 투쟁을 주무대로 하는 《의천도룡기》에서는 몽골 황족인 조민이 북원 지역으로 낙향하자, 한족 반군의 지도자였던 장무기가 이를 따라가는 것으로 결말이 난다.
- <징기스칸 4> 파워업키트 시나리오 4에서는 군주인 혜종 토곤 테무르와 아들인 소종 아유르시리다르가 카라코룸으로 피신한 이후의 북원이 나온다. 다른 시나리오에서의 몽골 진영에 비하면 암울하고 둘의 수명이 짧은 편이라 초기부터 자식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원나라 최후의 명장인 코케 테무르가 있고, 몽골기병과 화포병을 뽑을 수 있으며 개발할 수 있는 땅도 많고 컴퓨터가 조종하는 명나라는 북원보다 고려와 일본을 자주 공격하기 때문에 그렇게 어렵진 않다. 등용 특기가 있는 코케 테무르를 간첩 유닛으로 고려에 보내 초기 충성도가 낮은 이성계를 영입해도 좋다.
6. 같이보기[편집]
7. 둘러보기[편집]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01 06:31:57에 나무위키 북원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6] 상도는 몽골이 전 중국을 완전히 차지하기 전에 원나라의 수도였고, 통일 후에는 여름 피서용 수도로 쓰이던 도시였다(상도 유적 문서 참조).[7] 몽골 초원으로 이동해 북원이 성립된 시기는 1368년으로 북원 황제로는 2년 동안 제위했다. 물론 북원과 원은 북송과 남송처럼 같은 나라가 이어진 것이기에 대수로는 동일하게 11대가 된다.[8] 이는 유목제국이라면 누구나 겪은 문제로 확고한 계승법이 없거나 힘이 우선시되다보니 지도자가 휙휙 바뀌기 일쑤였다. 이미 북원도 전신격인 원나라 시절 원성종 테무르 카안 사후 원혜종의 즉위때까지 26년 사이에 즉위한 대칸이 10명이나 되었다.[9] 동방 3왕가 중 옷치긴 왕가의 요왕(遼王)은 명태조 주원장과 타협한 끝에 명나라 아래서 만주에 독자적 세력을 형성하여, 올량합 3위로 불린다.[10] 청나라가 내몽골에서 북원의 옥새를 얻어 몽골 제국의 계승을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