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명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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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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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559년 2월 21일
건주여진 허투아라 숙수후부
(現 랴오닝성 푸순시 신빈 만족 자치현)
즉위
1616년 2월 17일
건주여진 허투아라 숙수후부
(現 랴오닝성 푸순시 신빈 만족 자치현)
사망
1626년 9월 30일 (향년 67세)
후금 성경 복릉 융은문
(現 랴오닝성 선양시 위훙구)
능묘
복릉(福陵)
재위기간
청 초대 황제
1616년 2월 17일 ~ 1626년 9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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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
중국식 : 애신각라(愛新覺羅)
만주어 : 아이신기오로(ᠠᡳ᠌ᠰᡳᠨ ᡤᡳᡠ᠋ᡵᠣ)

중국식 : 누얼하츠(努爾哈赤)
만주어 : 누르하치(ᠨᡠᡵᡤᠠᠴᡳ)
한국식 독음 : 노이합적
부모
부황 현조 선황제
모후 선황후
형제자매
5남 중 장남
배우자
정비 - 효원고황후 동가씨
계비 - 효선고황후 부찰씨
정후 - 효열무황후 오랍나랍씨, 효자고황후 예허나라씨
후궁
13명 [ 펼치기 · 접기 ]

자녀
16남 8녀
신장
170cm[1]
한호
만주어 : 수러 겅옌 한(ᠰᡠᡵᡝ ᡤᡝᠩᡤᡳᠶᡝᠨ ᡥᠠᠨ)
묘호
태조(太祖)
시호
중국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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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천광운성덕신공조기입극
(承天廣運聖德神功肇紀立極)
인효예무단의흠안홍문정업고황제
(仁孝睿武端毅欽安弘文定業高皇帝)


만주어 : 더르기 황디(ᡩᡝᡵᡤᡳ ᡥᡡᠸᠠᠩᡩᡳ)
연호
1616년 ~ 1626년
중국식 : 천명(天命)
만주어 : 압카이 푸링아(ᠠᠪᡴᠠᡳ ᡶᡠᠯᡳᠩᡤᠠ)


1. 개요
2. 생애
2.1. 어린 시절
2.2. 조부와 부친의 죽음
2.3. 여진족의 통일
2.3.1. 건주여진 통일
2.3.2. 해서여진 복속
2.3.3. 후금 건국
2.4. 명나라와의 전쟁
2.5. 죽음
3. 업적
4. 여담
5. 평가
6. 가족
6.1. 조상
6.2. 형제자매
6.3. 비 및 후궁
6.4. 자녀
7. 《청태조실록》
8. 대중매체
9.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중국 최후의 통일왕조인 청나라(후금)의 창업군주.

창업군주이다 보니 일반적으로 청태조나 천명제는 잘 사용하지 않고 휘인 누르하치로 불린다. 1583년 추장에 오른 뒤 건주여진을 통합하면서 강성해졌다. 그러자 명나라가 경쟁 부족인 해서여진과만 무역을 하겠다며 건주여진에게 금수조치를 내렸다. 이에 반기를 든 그는 만주를 통합하고 명나라로 쳐들어갔다가 명나라의 마지막 명장이었던 원숭환에게 영원성 전투에서 패배한 뒤 붕어했다.

아이신기오로(愛新覺羅)[1]아이신(愛新)을 뜻하고,[2] 기오로(覺羅)큰 여섯 부족을 말한다.[3] 즉, 아이신기오로쇠 부족이라는 뜻이다.[4] 누르하치(努爾哈赤)[5]의 뜻은 만주어멧돼지 가죽이라고 한다.


2. 생애[편집]



2.1. 어린 시절[편집]


누르하치는 랴오닝성 출신으로 오도리 만호부(斡朶里 萬戶府)의 만호였던 먼터무(孟特穆)[6]의 6대손이었다. 아버지 탁시와 할아버지 기오창가는 여진족이었지만 고려 출신 귀화인의 후손인 명나라 요동 총병 이성량에게 복속해 있었다.

원래 만주 지역은 668년 고구려 멸망 이후 잠시 당나라가 관할했으나, 698년 발해가 세워지고, 이후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가 지배하다가 북원의 장수인 나하추가 명나라에 귀순하면서 역사상 처음으로[7] 한족 왕조인 명나라의 관할이 되었다. 명나라는 이렇게 민감한 지역인 만주를 다스리기 위해, 일반 행정구역처럼 6부의 이부에서 관할하는 것이 아니라 병부에서 관장하도록 했다. 왜냐하면 여진족 자체도 안보상으로 문제였거니와, 만주 서쪽에 있는 몽골도 명나라의 안보에 위험한 존재였다. 그리하여 이곳에는 대군이 주둔하며 군인이 행정과 군사를 총괄했다. 이성량은 이곳을 다스렸는데, 점점 요동을 사적으로 영지화했다.[8]

누르하치의 조상들은 수극소허부(또는 수크수허 아이먼) 소속으로 전체 부를 다스리는 족장은 아니었지만, 그럭저럭 유력한 가문은 되었다. 그리하여 대대로 명나라에 복속해 있었다. 그리고 건주위의 여진족들은 명나라와의 교역으로 계속 문화 수준이 높아져 있었으며, 수렵-채집-유목생활을 버리고 점점 정착생활을 하게 되었다.

누르하치는 탁시의 장남으로 태어났고, 어릴 때부터 기골이 장대했다. 명나라의 문화적인 영향 때문에 누르하치는 어릴 때부터 글(한문)을 배워 다른 정복왕조의 개창자처럼 문맹이 아니었고, 여진족이 살아가는 데 필수적이었던 말타기와 무예도 열심히 익혔다. 하지만 9세 때 생모가 죽고 아버지가 계모 하다나라씨를 맞자, 아버지와 사이가 나빠져 통갸씨 가문의 딸과 결혼한 후 18세에 집을 나가 처가에 머물렀다. 아버지는 가축 몇 필과 노비 몇 명을 주면서 누르하치를 분가시켰다.[9] 이때 누르하치는 넉넉한 상태가 아니었고, 만주의 산에서 약초와 산삼을 캐내 명나라 상인들에게 파는 심마니 노릇으로 생계를 이었다. 그는 만주뿐만 아니라 명나라 북방의 여러 곳을 떠돌면서 중국어몽골어를 익혔다.

하지만 이런 약초상 생활에 싫증이 난 누르하치는 요동 총병 이성량의 휘하에[10] 입대했다. 승마와 활쏘기에 재주가 있었기 때문에 당장 이성량의 눈에 들었고, 그는 이성량 휘하에서 점점 승진했다.


2.2. 조부와 부친의 죽음[편집]


1583년 24세 되던 나이에 누르하치의 삶에 큰 변화가 생겼다. 당시 여진의 한 추장인 아타이 장긴이 고성(古城)에서 명나라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아타이의 난) 이성량이 지휘하는 명나라군은 즉시 반란 진압에 나섰고, 이성량에 복속해 있었던 누르하치의 조부 기오창가와 부친인 탁시는 아타이 장긴을 설득하려고 성안에 들어갔다. 그 이유는 아타이의 아내가 기오창가의 손녀, 즉 누르하치와는 사촌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누르하치가 속한 수극소허부(또는 여진어로 수크수후 아이먼)의 족장(또는 대추장)인 니칸 와이란은 명군에게 공격을 하도록 설득했고, 명군의 공격에 반란군 및 반란군을 설득하러 성에 들어간 탁시와 기오창가는 모두 사망하게 되었다.[11]

반란은 진압되었으나, 누르하치는 이 때문에 이성량에게 크게 항의를 했다. 이성량은 누르하치에게 사과하고, 그를 좌위지휘사로 승진시키는 한편, 명나라 조정은 칙령 30통[12]과 말 30필을 누르하치에게 배상금조로 주었다. 그리고 조부와 부친의 시신을 정중히 누르하치에게 인도했다. 누르하치는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비명에 세상을 떠났지만, 벼슬도 높아졌고 재산도 불어났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를 이어 자기 가문의 추장이 되는 행운도 얻었다. 그렇다고 해서 누르하치가 이들의 죽음을 기뻐한 것은 아니고, 명나라에 깊은 한을 품었다.


2.3. 여진족의 통일[편집]



2.3.1. 건주여진 통일[편집]


누르하치는 이렇게 24세의 젊은 나이로 자기 일족의 추장(수러 바일러)이 되었다. 누르하치는 그의 일족을 무순의 동쪽 지방으로 옮기고 다스렸다. 하지만 누르하치가 추장에 오른 것에 반대한 누르하치의 일족도 많았는데, 이들은 누르하치의 원수인 부족장 니칸 와이란과 손을 잡았다. 누르하치의 부족은 큰 규모가 아니었기 때문에 당시의 병력은 100여 명에 불과했으며, 그래서 누르하치는 여동생인 가하샨과 사르후 지역의 추장이었던 노미나를 혼인시키고 그의 부족과 동맹을 맺은 후, 조부와 아버지의 원수인 니칸 와이란을 죽이려고 했다.

1583년 누르하치는 원수인 니칸 와이란을 제거하기 위해 공격을 개시했는데 니칸 와이란은 번번히 도망쳤다. 누르하치는 자신의 작전이 자꾸 누설되는 것을 알고 동맹자인 노미나가 니칸 와이란과 내통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결국 누르하치는 노미나를 계략으로 죽이고 사르후를 차지했다. 이어서 니칸 와이란을 계속 추격했으나 친족이 배신하여 다시 중지했다. 누르하치는 친족들의 배신을 토벌했고 1583년까지는 모든 친족의 반항을 진압하여 이들로부터 충성을 맹세받았다.

1584년 동악부(동오 아이먼)의 족장인 아하이는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던 누르하치를 두려워하여 먼저 싸움을 걸었다. 이에 양측은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누르하치는 이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본거지인 허투알라에 돌아왔다. 상처를 회복한 누르하치는 자신을 견제하기 위해 뭉친 여러 여진 부족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9월에는 혼하부(후너허 아이먼)를 손에 넣었다.

1586년 결국 니칸 와이란의 거점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니칸 와이란은 명나라로 도망갔고, 누르하치는 명나라에게 그를 인도해줄 것을 요구했다. 당시 명나라 측 지휘관이었던 이성량은 누르하치를 달랠 겸, 니칸 와이란의 이용가치가 없다고 판단하여 누르하치에게 넘겨주었고, 누르하치는 그를 참수하여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원수를 갚았다.

이렇게 세력을 키운 누르하치는 주변 부족을 공격하여 1587년에는 저천(哲陳)부, 1588년에는 마지막으로 완안부를 복속시켰다. 이로써 누르하치는 건주여진 8부를 모두 지배하게 되었다.

불과 병력 100여 명을 가졌을 뿐이었던 누르하치는 단 5년 만에 병력 15,000명의 병력을 가진 건주여진 전체의 지도자가 되었다.


2.3.2. 해서여진 복속[편집]


건주여진이 통합된 직후인 1592년임진왜란이 발발했다. 누르하치의 세력을 주시하던 명나라는 조선에 상륙한 일본군을 막기 위해 한반도로 향했고, 이틈을 타서 누르하치는 동쪽에 있는 해서여진을 통합하기 위한 작전을 짜게 되었다.

해서여진의 주요 부족은, 울라(烏拉)씨, 호이파(輝發)씨, 하다(哈達)씨, 예허(葉赫)씨 등 4개 부족이었다. 이들은 스스로 금나라의 후예를 자칭하고 있었으며, 당시까지만 해도 해서여진은 건주여진보다 세력이 더 컸다. 같은 여진 동족이었지만 해서여진과 건주여진은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다. 그 이유는 명나라가 교역권을 가지고, 해서여진과 건주여진, 그리고 각 부족끼리 서로 반목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때문에 누르하치 이전에 두 여진 대부족의 사이에서는 크고 작은 전쟁이 일어났다.

명나라가 조선에서의 대일 전쟁에 정신이 팔린 동안, 누르하치의 건주여진은 해서여진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해서여진은 1593년 9월 구러산 전투 당시, 4개 부에다가 일부 몽골 부족을 끌어들여 9개 갈래의 병력 30,000명으로 병력이 10,000~15,000명이었던 건주여진을 쳤지만 누르하치의 눈부신 지휘 끝에 건주여진이 승리했다. 이때부터 누르하치는 명나라의 주의를 끌게 되었으며, 명나라측에서는 이후

군대가 위세를 떨치며, 멀고 가까운 곳이 모두 복종하고 있다.(軍威大震,遠邇懾服)

라며 우려를 표했다.

구러산 전투 이후, 건주여진 내부에서 누르하치와 그의 동생 슈르하치의 사이가 나빠져 누르하치가 동생을 죽이는 등, 형제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누르하치는 이후 하다부, 호이파부, 울라부를 차례차례 항복시켜 예허부를 제외한 해서여진을 휘하에 복속시켰다. 이 시점부터 누르하치는 여진족 전체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때 조선 사신들도 북경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누르하치의 군대를 목격하고, 광해군에게 이들이 절대로 야만족의 군대가 아니라 군율이 엄정하며 모두 갑주를 입을 정도로 무장도 충실했다고 보고했다. 당시 조선측은 누르하치를 "누르하치 추장"이라는 의미에다가 비하의 의미로 "종 노"()를 써서 노추(奴酋)라고 불렀는데 광해군의 조선 조정에서도 이들을 계속 주시하고 있었으며, 《광해군일기》에 160번이나 나올 정도였다. 광해군은 함경도와 평안도쪽의 경계를 소홀히 하지 말라는 명령을 계속 하달했다.

두만강 동쪽, 현재의 백두산 동쪽에 살았던 야인여진은 문화 수준이 낮았기 때문에 부족 단위로 복속시키지 않고, 그냥 개인별로 팔기에 소속시켰다고 한다. 어쨌든 야인여진도 부족별로 편제되지는 않았지만 상당수가 후금 쪽으로 간 것은 맞다. 그래서 누르하치가 일어선 이후 함경도쪽의 여진족의 노략질은 없어졌다. 인구가 적었던 만주족의 형편상, 청나라는 산해관 안으로 들어간 이후에도 넓은 의미에서 동족인 야인여진인들을 중국 본토로 데려와 만주족의 규모를 조금이라도 늘리려고 노력했으나, 그것을 거부하고 만주 - 연해주의 산악 지역에 살았던 이들이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분명한 여진족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만주족에 편입되지는 않았다.

누르하치는 해서여진과의 전쟁 와중인 1606년 수러 쿤둘언 한에 등극했다.


2.3.3. 후금 건국[편집]


해서여진을 통합한 누르하치는 1616년 허투알라에서 후금의 건국을 선포하고, 수러 겅옌 한으로 즉위했다. 생여진의 완안(完颜)부가 1115년에 세운 옛 금나라를 계승해 국호를 아이신(aisin, 金)으로 정하고, 연호를 압카이 풀링아(abkai fullingga, 天命)라고 했다.


2.4. 명나라와의 전쟁[편집]



2.4.1. 이성량[편집]


위에서 보았듯이 누르하치는 명나라의 요동총병 이성량 휘하에서 성장한 인물이었다. 이성량이라는 인물은 ‘요동왕’이라는 별명을 가졌을 정도로 요동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13] 누르하치는 이성량의 부대내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이성량의 양아들이라는 소문도 퍼져 있을 정도로 이성량과 사이가 좋았다. 명나라는 만주를 장악한 이래 이이제이와 분할지배를 통해 여진족을 분열시키고, 서로 싸움을 붙였으며, 일부 여진족은 명나라편에 붙어서 동족을 공격하거나 북원(몽골) 원정에 동원되었다.

이성량은 능력이 출중해서 여진족을 분열시키고 북원의 좌익을 견제하는 공작을 성공적으로 해냈으며, 특히 북원의 대칸인 차하르부의 투먼 칸의 공격을 몇번이나 저지했다. 그래서 당시 암군인 신종 만력제의 재위 기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명나라의 북방은 안정되어 있었다. 이렇게 이성량이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여진족들은 이성량을 두려워했고, 누르하치조차 이성량이 좌천되기 전까지는 명나라에 직접적으로 도전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성량은 만주를 영지화하고 전횡을 일삼았으며, 사치도 엄청났다.[14] 이렇게 이성량은 점점 독립 군벌처럼 행세하기 시작했다.[15] 당시 만력제가 등극하고 있었음에도 군비를 마음대로 쓰며 만주를 개인왕국화하는 이성량의 행태를 북경의 조정에서 두고 보기 힘들어졌다. 게다가 이성량은 휘하 여진병을 이용하여 왜란으로 약화된 조선을 침공해 전주 이씨를 대체하고 한반도를 지배할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16] 이런 이성량의 행태가 너무 심각하여 결국 1591년 웅정필에게 탄핵되어 자리를 잃었다. 이후 어떻게 다시 복직하여 요동으로 돌아갔으나 임진왜란이 끝난 후인 1608년 다시 재탄핵되었고, 베이징에 돌아와 사망했다.

그러나 이렇게 이성량을 해임한 것은 결과적으로 명나라의 섣부른 판단이었는데 이성량이 아무리 타락했다고 하더라도 몽골이나 여진 같은 전투민족들을 제대로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명 조정은 이성량을 파면시키고 경험도 없는 사람을 보내버렸다. 새로운 인사들도 본국에서 들었던 것과 달리 예상외로 강한 누르하치의 세력에 놀랐고, 함부로 제압하지 못했다. 여기서 누르하치의 선택은 대적도 아닌 뇌물이었다. 누르하치는 해서여진과의 전쟁 중에 적을 동시에 여럿 만드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았고, 일단 명나라에게는 굽신거리면서 이성량의 후임자들에게 뇌물을 바쳐 명나라 조정을 안심시켰다. 게다가 건주여진과 해서여진이 싸우는 것은 명나라가 보기에는 그동안 여진족을 분열시켰던 이이제이책이 먹혀들어간다고 생각하는 면도 있어서 그다지 경계하지 않았다. 하지만 누르하치는 예전의 건주-해서 전쟁과는 달리 아예 해서여진을 복속 및 합병하려고 했고, 명나라는 여기서 누르하치의 대전략을 읽는 데 실패했다.

그래도 명나라는 당시의 건주여진 따위는 충분히 제압할 힘이 있었지만, 불운했던 것은 건주여진이 이렇게 누르하치 휘하에서 흥기할 때 쯤, 명나라만력 3대정에 휘말린 것이었다. 이 '만력 3대정'은 누르하치에게 있어서는 천재일우로 이후 명나라의 시선은 전부 이 3대정에 집중되어 누르하치는 아웃 오브 안중이 되어버렸다. 만력 3대정 중에 건주여진은 해서여진 및 야인여진을 모두 통합했다.

이성량은 두 번이나 좌천되었어도, 누르하치가 유일하게 두려워하고 존경한 명나라 장군인 듯하다. 이성량이 죽은 다음에야 누르하치는 소위 "7대한"을 이야기하며 명나라에 정식으로 선전포고했다. 또한 훗날 조선으로 망명하지 않고 청나라에 남은 이성량의 후손들은 한인 팔기에 소속되어 청나라에서도 대접을 받았다.


2.4.2. 사르후 전투[편집]


이성량이 죽자, 거칠 것이 없어진 누르하치는 1618년 "7가지 한(恨)" (또는 7대한)을 내걸고 명나라에 선전포고를 단행했다. 원래 건주여진이 이름을 바꾼 후금은 명나라의 신하국을 자처했으나, 이 7대한을 발표한 시점에서는 대명 침공을 공식적으로 밝힌 것이었다.

첫째, 명나라는 아무 이유없이 나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죽였다.

둘째, 명나라는 해서여진을 우대하고, 건주여진을 푸대접했다.

셋째, 명나라는 서로 합의한 국경선을 마음대로 바꾸고, 이를 넘어온 건주여진인을 죽였다.

넷째, 명나라는 건주여진과 해서여진의 전쟁에서 해서여진을 도왔다.

다섯째, 명나라는 누르하치와 약혼한 예허부의 딸을 몽골의 하르하부에 주도록 권했다.[17]

여섯째, 명나라는 건주위가 개간한 땅과 토지를 파괴했다.

일곱째, 명나라는 만주 사정을 잘 모르는 소백지(蕭栢芝)를 파견하여 건주여진을 완전히 무시했다.[18]


이후 후금의 수도인 허투알라 옆에 있는 명나라의 거점이자, 여진족과 명나라 간의 교역 도시였던 푸순(무순)을 함락시켰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누르하치의 군대는 상인으로 위장해서 무순에 입성한 후, 약탈을 하고 도주하여 명나라 군대를 성밖으로 유인했고, 명나라 군대가 이를 추격하자, 숨겨둔 복병으로 역습, 섬멸시킨 후 무순에 입성했다고 한다.[19]

무순을 함락시키면서 누르하치는 다른 유목민족 왕조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군사력만 믿고 중국을 정복했다가 단명한 다른 유목민족들과는 달리, 왕조를 오래 유지할 수 있도록 국가를 경영해보고 백성을 다스려 본 한족 인재들을 적극적으로 포섭한 것이었다. 이때 이성량의 손자였던 명나라 유격 이영방이 후금에 항복했다. 이영방은 후금에서 매우 후대를 받고 벼슬이 높아졌으며, 누르하치의 아들인 아바타이의 딸과 재혼하여 손주사위가 되었다. 그 이후에도 사르후 대전에 참가해 명나라군을 격파하는데 공을 세웠고, 정묘호란때도 선봉에 서서 조선을 침공했다.[20]

또한 누르하치는 한족 포로 중에서 대단한 지략을 가진 선비 범문정을 얻게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범문정의 집안은 역모에 휘말려 만주로 귀양을 온 처지였는데, 명나라에서 벼슬길이 막히자 명나라를 증오하게 되어 만주족을 도와 출세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이후 범문정은 제4대 성조 강희제때까지 후금ㆍ청나라 황제 4명을 섬기면서 여러 계책을 내 후금이 동북 만주의 지방 정권에서 광활한 대륙을 지배하는 중화제국으로 발돋움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21] 이렇게 누르하치는 민족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세력을 키울 수 있는 인재라면 파격적인 자리와 혜택을 주고 초빙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여진족 특유의 군사력에 큰그림을 그릴 수 있는 한족의 인재들까지 갖추니 누르하치의 세력은 점점 커졌다. 이 방침은 제2대 태종 숭덕제 홍타이지 시대에 와서도 변함이 없었고, 이후에도 홍승주, 오삼계모문룡의 부하들과 같은 명나라 측 한족 장수들이 후금의 이런 후한 대접을 보고 편을 바꾸어 결과적으로 청나라가 대륙을 장악하는 데 선봉에 섰고, 명나라 잔당 및 남명을 멸망시키는 데도 큰 활약을 했다.

이어 자신들이 점령한 명나라 도시들의 한족들을 상대해서도

그대들도 나의 백성이니라.

고 안심시키며 그대로 생업에 종사하도록 하는 한편, 점령된 도시의 명나라측 관원이 귀순 의사를 밝힐 경우 자리를 유지시켜주고 그대로 다스리도록 했다. 그리고 별 효과는 없었지만 한족과 여진족을 함께 거주하게 했다. 누르하치는 시들어가는 명나라를 대신해 진짜 금나라를 재건하려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1619년 4월, 명나라는 후금이 더 커지기 전에 싹을 잘라버리기로 결심하고 임진왜란에도 출정한 바 있었던 양호(명나라)를 총대장으로 삼아 중국 전토에서 끌어모은 10만~16만 명에 달하는 대군으로 동서남북 4면에서 후금의 수도인 허투알라를 포위 공격하려고 했다. 이를 위해 조선과 아직 후금에 복속하지 않은 해서여진의 예허부까지 끌어들였다. 이를 맞는 후금군은 약 6만 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후금은 황사바람이 불어 명나라군의 장기인 화력전을 하기 어렵고[22] 명나라의 4개 부대가 손발이 안맞는 틈을 타서 기병을 이용한 기동력으로 각개격파하는 방식으로 4개 부대를 차례대로 패퇴시켰다. 이 역사적인 대전에서 전사한 후금군은 약 2천 명에 불과했지만, 명나라군의 전사자는 4만 7천 명에 달했고 전사한 장수만 300명이 넘었다. 병력 1만 5천을 투입한 조선군도 무려 8천 명이 전사하는 극심한 손해를 입었다. 이를 사르후 전투라고 하며, 이후 명나라에게 미개한 여진족의 연맹 정도로 치부하던 후금은 확고히 위협 세력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사르후에서의 대승에 이어 누르하치는 자신에게 복속하지 않고 있었던 예허부도 곧 정복했다. 1621년에는 만주에 마지막으로 남은 명나라 거점인 심양요양을 함락시켰다. 이것으로 누르하치는 요하 동쪽에서 명나라의 세력을 몰아내고, 요동을 손에 넣었다.

사르후 전투 이후인 1621년 요양에서 5 km 떨어진 곳에 동경성을 짓고 천도했다. 기존의 수도였던 허투알라는 방어에는 유리했지만 인구 부양력이 낮은 지역이라 인간 사냥과 정복으로 늘어난 인구를 부양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 누르하치는 여진족과 한족이 한 집에서 동거하도록 조치했는데, 이는 한족들이 여진족들이 이용하는 우물에 독을 푸는 등 민족간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결국 5년 동안 이런 크고 작은 갈등이 지속되자 인내심이 바닥난 누르하치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요양의 한족들을 대규모로 학살하고, 남은 이들을 노예로 삼은 뒤 동경성을 떠나 심양으로 천도한 것이었다. 이는 하술할 영원성 전투와 함께 그의 인생에서 몇 안 되는 실패였다.


2.4.3. 영원성 전투[편집]


후금은 만주를 거의 장악했지만, 명나라의 하급 무관이었던 모문룡은 명나라의 패잔병을 모아 조직한 후 조선의 철산 가도에 주둔하여 후금군을 치고ㆍ빠지기 수법으로 괴롭혔다. 특히 수군을 동원하여 요동반도요하 강을 거슬러 올라가 후금의 심장부인 심양이나 푸순까지도 공략하곤 했다. 이 때문에 후금은 전군을 대명전에 투입하지 못하고, 요하나 요동반도 방면의 수비에 할당해야 했는데, 이것은 인구와 병력이 부족한 후금에게는 큰 문제였다.

마찬가지로 명나라도 1620년대부터 중국 전역에서 농민 반란이 발발하여 대후금전에 전력을 투입할 수 없었다. 명나라는 수비 부담을 줄이기 위해 산해관 이북의 모든 병력을 이남으로 철수하여 만리장성을 방어하는 전략을 채택했다. 하지만 병부주사인 원숭환은 이에 반발하여 산해관과 만주의 중간에 있는 영원성에서 농성하자고 주장했다. 원숭환의 전략은 영원성을 지키되, 후금이 영원성을 우회하면 영원성에서 출진하여 후금의 보급로를 끊는 것이었다. 결국 원숭환의 주장이 채택되었으나, 명나라에서는 1만 명도 되지 않는 병력으로 원숭환에게 후금군을 막도록 했다.

1625년까지 후금군은 끈질기게 후방에서 괴롭히던 모문룡군을 몰아내고 뤼순을 탈환하여 요동 반도를 평정했다.

이어 누르하치는 전 병력인 6만 명을[23] 이끌고 서쪽으로 향하여 영원성을 공략했다. 이때 원숭환이 지휘하는 수비 병력은 1만 명도 되지 않았지만, 영원성은 성벽이 견고했고 홍이포 11문을 비롯한 수성용 병기들을 대량으로 운용했다. 1626년 2월 10일부터 22일까지 벌어진 농성전 끝에 후금군은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났고, 이를 영원성 전투라고 한다.


2.5. 죽음[편집]


영원성 전투에서 후금군은 큰 피해를 입었지만 재기불능으로 피해를 입은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소수 정예의 철기병이 중심이 된 후금 / 청군은 공성전에 유달리 약했고, 요양 및 심양을 공략할 때도 계략으로 명군을 성밖으로 끌어내거나 혹은 성안의 세작으로 공작을 펼친 후 함락시킨 것이었다. 10여 년 이후 병자호란때도 끝내 남한산성 자체는 함락시키지 못했지만 강화도를 함락시켜 조선의 항복을 받아냈다. 송산전투때의 금주성도 포위만 하고 있다가 식량을 모두 소진시켜 항복을 받았다. 원숭환이 지키던 영원성도 마찬가지로 공략에 어려움을 겪었고, 산해관도 결국 명나라가 멸망하고 이를 지키던 장군인 오삼계가 항복하고서야 넘을 수 있었다.

특히 누르하치가 홍이포를 맞고 부상을 입어 이후 이 부상을 이기지 못하여 붕어했다는 설도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더 크다. 영원성 전투 이후 겨우 석 달 만에 누르하치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몽골 고원으로 진격했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자신들의 군주가 부상을 입었다면 본진인 요동으로 돌아가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 우선이지 않겠는가?[24][25]

영원성 전투에서 일생 처음으로 참패하여 체면을 구긴 누르하치는 땅에 떨어진 후금군의 사기를 되살리려 했고 영원성 전투 3개월 후인 5월, 직접 내몽골로 친정하여 할하부를 정벌하고 이들의 항복을 받았다. 또한 6월에 몽골 귀족인 오오바 훵 타이지가 후금의 수도인 심양으로 찾아오자 직접 걸어나와 맞이한 행적도 있다.

1626년 8월 11일 67세 나이로 붕어했다. 청나라의 기록에는 "병으로 죽었다."라고 나온다.

홍이포에 부상을 당해 사망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홍이포에 맞았으면 즉사하거나 아예 움직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한 고조 같은 케이스를 보면 죽음의 원인으로 추정되는 부상을 입고 멀쩡히 다니다가 죽기도 한다. 더구나 홍이포에 입은 부상이 본래는 그렇게까지 치명적이지 않았거나 치료를 받아 완화되는 도중 당시 나이로는 고령이어서 갑자기 덧나서 죽을 수도 있기 때문에 홍이포에 부상을 입었다고 즉사하거나 아예 움직이지 못하게 된다는 것은 논리로 삼기에 부족하긴 하다. 하지만 누르하치가 아예 홍이포에 맞지도 않았다는 주장이 있기 때문에 누르하치가 진짜 홍이포로 인한 부상으로 죽었는지는 확실한 증거가 없는 상황이다.

다만《만주실록》등의 기록에서 누르하치가 영원성 전투 패배를 자책하는 걸 보면 그에게 심리적인 타격을 입힌 것은 확실한 것 같다.[26] 이런 좌절감이 병으로 이어져 사망에 이르렀을 가능성도 충분히 제기할 수 있다. 어쨌든 당시 평균 수명을 훨씬 넘긴 68세로 사망한 것을 보면 사실 살만큼 살다가 사망했다고 봐도 무리가 없다.

그의 뒤를 8남인 홍타이지가 이었다. 1636년, 홍타이지는 후금의 국명을 대청으로 개칭했고 누르하치는 청나라의 태조로 불리게 되었다. 사후 홍타이지는 누르하치를 복릉(福陵)에 안장했다.


3. 업적[편집]


여진족 특유의 제도이자 경제와 사회 단위 겸 전쟁 당시 분대의 역할에 해당하는 팔기군을 편성했다. 19세기가 되면서 팔기군은 무용지물이 되긴 하지만, 적어도 청나라 초기에 대륙을 장악하는데는 혁혁한 공훈을 세웠다.

만주어를 기록하기 위한 만주 문자를 확립했다. 누르하치는 여진족이 자신의 언어를 제대로 표기할 수 없는 현상을 안타깝게 여겼다. 물론 이 당시에도 여진어를 표기하는 문자 체계인 여진 문자가 이미 있었지만, 글자수가 너무 많아 익히기가 너무 불편해서 쓰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고, 주로 몽골 문자여진어-만주어를 표기했지만 표기법이 공식적으로 확정된 건 아니라서 중구난방에 가까운 상태였다. 누르하치는 1599년 어르더니 박시와 가가이 자르쿼치로 하여금 몽골 문자를 기반으로 한 만주 문자를 개발했다. 이들은 몽골 문자에서 표기가 불가능한 만주어의 음을 표기할 수 있는 자모를 추가했다. 그리하여 만주어의 표기법을 공식적으로 확정지었고, 이 만주 문자는 이후 계속 쓰이지만, 19세기가 되면 만주족 대부분이 모어로 한어(=중국어)를 사용함에 사용 빈도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 국가 체제 정비
건주여진 시절부터 명나라의 관제를 모방하여 정부 기구를 구성하고, 조정과 6부를 두었다. 만주족북경을 점령한 후, 그대로 명나라의 6부를 접수하여 대륙을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

누르하치는 만주족이 미개 상태를 청산하고 문화 민족으로 발돋움하려면, 농업을 일으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반농반목수렵-채집 민족이었던 만주족을 농경 민족화하려고 했다. 이를 위해 점령지에서 대규모 학살을 저지르던 몽골과는 달리 점령지의 한족들을 그대로 두어 생업에 종사시키고, 후금 시절에는 만주를 개간하기 위해 화북에서 수많은 한족 포로들을 납치해 와서 만주에서 농업에 종사시켰다. 반(半) 유목 민족이었던 만주족정착 민족으로 만들기 위해서 지배층 만주족과 피지배층 한족을 함께 살게 했지만, 이는 민족 갈등을 부르는 역효과를 냈다.

만주족 경제는 물물교환으로 돌아갔지만, 누르하치는 화폐도 도입했다. 물론 당시 만주의 경제가 그다지 발달되지 않았던 데다가, 화폐를 주조할 기술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이는 별로 효과가 없었고 화폐 경제가 발달한 명나라를 점령한 후에야 만주족은 화폐를 널리 사용했다.

  • 대(對) 몽골 정책
만주족의 전신인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몽골의 흥기를 막지 못해 망해버렸다. 누르하치는 이를 교훈 삼아 몽골족을 포섭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후금이나 청나라 황제는 스스로 몽골대칸을 자칭했다. 자신들에게 순응하는 몽골 부족들을 후금 체제로 끌어들여 팔기에 소속시켰다. 이들은 대대로 청나라 황실과의 결혼을 통해 청나라의 귀족 계급 노릇을 했고[27], 몽골 기병들은 만주병들이 맛이 간 19세기까지도 청나라의 온전한 전투력으로 남았다. 이렇게 만주족 조정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내몽골 여러 부족들은 스스로를 중국의 일부라고 간주했고, 결국 20세기가 들어서면서 외몽골 부족들이 몽골 공화국으로 중국에서 독립할 때도 중국에 남았다. 이 또한 넓게 보면 몽골을 포섭하려던 누르하치의 정책과도 관련이 있다.


4. 여담[편집]


《만주실록》 삽화에 그려진 23~63세 누르하치의 모습

  • 고궁 박물관의 누르하치 화상은 실제 《만주실록》 삽화에 그려진 모습과 상당이 다른데, 홍타이지의 화상과 비슷하게 그리다 보니 실제의 모습과 많이 다르게 묘사된 것으로 보인다. 고궁 박물관의 화상은 누가 그린 것인지도 모른다. 《만주실록》, 신충일의 《건주기정도기》(建州紀程圖記) 등 각종 사서 및 기록에 따르면 공통적으로 체구는 크지 않지만[28] 다부진 편이었으며, 턱수염은 없고, 봉황의 눈[29]과 큰 귀를 지녔고, 얼굴이 길고 야무지며, 코가 크고 곧은 편이었다고 한다.

  • 야사에 따르면 아버지가 수달이었다고 한다. 수달이 누르하치의 어머니를 사모해서 밤에 찾아와 누르하치가 태어났다는 것이다. 덕분에 누르하치는 수영을 매우 잘했다고 한다. 이 소문을 들은 한 도인이 찾아와 천자가 될 명당 자리를 알고 있는데, 물속 깊은 곳이라 자신이 들어갈 수가 없으니 누르하치에게 묻어달라고 부탁하고 부탁을 들어주면 누르하치에겐 왕이 될 명당 자리를 알려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누르하치는 천자의 자리에 자기 조상의 유골을 묻어 결국 누르하치가 천자가 되었다는 이야기. 하지만 이런 전설은 왕조의 시조를 신격화하기 위해 만들어지곤 하니 진지하게 받아들일 건 아니다. 수영을 잘 해서 별명이 수달이었다면 현실성이 있지만...

  • 누르하치는 유비오호대장군이나, 칭기즈 칸사준사구와 비슷하게 후금 개국오대신(后金 開国五大臣)이 있었다.[31] 이들은 누르하치와 의형제 사이였으며, 특히 누르하치 사후 후계구도에서 이들이 중심을 잡아주었기 때문에, 후금판 왕자의 난이 발발하지 않고 제8왕자인 홍타이지가 안정적으로 칸위를 계승할수 있었다고 한다. 이하는 목록.
    • 피옹돈(費英東, Fiongdon): 구왈기야 씨족의 족장 가문인 구왈갸 하라(瓜爾佳氏) 출신. 누르하치의 맏손녀사위이기도 하다. 진만인적(眞萬人敵)이라는 별명이 있었다고 한다.
    • 어이두(額亦都, Eidu): 니오후루 하라(鈕祜祿氏) 출신.
    • 후르한(扈爾漢, Hūrhan): 퉁기야 하라(佟佳氏) 출신. 누르하치의 양자이기도 하다.
    • 호호리(何和理, Hohori): 동고 하라(董鄂氏) 출신.
    • 안피양구(安費揚古, Anfiyanggū)[30] : 기오르차 가문 출신으로 누르하치의 호위병이기도 했다. 숑코로 바투루(송골매의 용사)라는 칭호가 있었다고 한다.

  • 개인의 전투력도 대단했다. 승마와 활쏘기는 당시 여진족 가운데에서도 최고라고 일컬어졌다. 전투에서도 항상 진두에 섰으며, 완안부의 전투에서는 선두에서 달려드는 적병 100여 명을 쓰러뜨리고 적진에 돌진했다고 한다. 저천부와의 대결에서는 누르하치와 부하 두 명이 800여 명에 포위되었으나, 순식간에 20명을 쓰러뜨리고 포위에서 빠져나왔다.

  • 약초상 노릇을 할 때, 홍삼을 개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32] 명나라 상인들이 조선 인삼의 값을 떨어뜨리려고 인삼이 썩을 때까지 사주지 않자, 이를 쪄서 말려 가공하는 방법을 개발, 명나라 상인들의 얄팍한 수를 무너뜨렸다고 한다.

  • 적에게 홀로 쫓길 때, 자신이 키우던 개가 적의 군마의 다리를 물어 쓰러뜨렸고, 이 때를 틈타 달아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이후부터 만주족이 개고기를 먹는 것을 금했다고 하여 만주족은 개를 먹지 않는 풍습이 있다.

  • 삼국지연의, 수호전 덕후였다. 여러 유목민족 출신 정복왕조 개창자와는 달리 누르하치는 문맹이 아니었고, 어렸을 때 한문을 배워 중국고전을 읽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삼국지에서 유비의 고사를 읽고 금나라를 부흥시키려는 포부를 가졌다고 한다. #

  • 명나라에 대해서는 굉장히 강경했지만 조선에 대해서는 상당히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했다. 조선은 여진족이 통일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전처럼 여진족을 무시했고, 누르하치가 국서를 보냈어도 조선은 이전처럼 상당히 무례한 답신을 보냈다. 이미 건주여진을 통일한 후부터 조선에 우호관계를 맺자고 졸랐으나, 조선은 여진을 역사적으로 얕잡아 보았기 때문에 대등한 관계를 맺자는 이야기에 호응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전에는 조선과 특별한 마찰은 벌어지지 않았다.

  •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주로 누르하치 추장 약자의 의미에 비하의 의미로 "누"의 공식 음차인 "힘쓸 노"()가 아니라 "종 노"()를 써서 노추(奴酋)라고 기록되었다.

  • 임진왜란 때 지원군 지원을 두 차례나 제안하기도 했다. 1592년 8월에 조상의 나라[33]인 조선에 원병을 보내겠다고 제안했다. 당시 명나라에서 원군 지원에 대해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던지라 조선에게는 가뭄의 단비와 같은 소식이었지만 명나라의 눈치를 보느라 거절했다. 그리고 당시 여진 부족간에는 명나라나 조선의 인정을 받기 위한 충성 경쟁이 있었는데 이는 명이나 조선에 인정을 받으면 다른 부족에 비해 정치적 우위를 점유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어 임진왜란이 거의 종료될 시점인 1598년 1월에도 "조상의 나라 원병"이라며 제안해서 조선 내부에서도 전투보다는 화친에 주력했던 명나라의 모습에 분개해 "원군 받아서 왜놈들 때려잡읍시다!!!"라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지만 결국은 거절했다. 당시 누르하치는 조선조상의 나라라는 존칭까지 써가며 원군 파병을 제안했다. 물론 누르하치가 순수한 뜻에서 조선을 도우려 했을 리는 없고, 임진왜란으로 조선이 전쟁 중인 틈을 타서 원군이란 명목으로 조선 영토에 영향력을 확대하려 한 의도일 가능성이 높다.[34]

  • 여진족을 통합해 후금을 세운 다음에도 누르하치는 조선과의 관계는 매우 조심스러웠고, 명나라에 대해서는 강경하게 7대 원한을 운운하며 선전포고했지만 조선은 딱히 건드리지 않았다. 누르하치는 사르후 전투에서 명나라를 물리치고 요동을 장악했는데, 조선이 명나라와 연합해 후금을 치려다가 참패한 사르후 전투 이후에 강홍립이 투항하자 이를 받아들이고 강홍립을 억류했다. 하지만 처음에는 강홍립이 누르하치 앞에서 삼배구고두를 거부하자 불같이 화를 내고 조선 포로를 모두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강홍립과 조선군의 항복을 협상한 둘째 아들 아이신기오로 다이샨이 "포로를 살려주기로 약속했다."고 말리자 조선군 포로를 학살하려던 계획을 단념했다고 한다. 하지만 조선군 포로가 탈출하여 그중 일부가 여진 부락을 습격하고 강간 사건을 저질렀고, 이 와중에 다수의 포로가 처형되었다. 어쨌든 여기에 연루되지 않은 포로는 살아서 조선에 돌아올 수 있었지만, 파병군 1만 3천 명 중 3천 명 미만만 돌아올 수 있었다. 강홍립은 누르하치에게 "우리 조선은 명나라의 의리 때문에 귀국과 별 원한이 없지만 어쩔 수 없이 참전하였습니다."라는 식으로 이야기했고, 누르하치는 이를 받아들여 강홍립 및 조선 장수 포로들을 비교적 후대했다.[35] 누르하치는 건국 이후 조선 조정에 계속 국서를 보냈고, 광해군은 이에 답서를 보내려고 했으나 광해군의 집권 기반인 대북파는 다른 당파보다도 오히려 더욱 극렬히 누르하치를 인정하는 것을 거부해 몇년간 광해군 명의의 답서는 누르하치에게 가지 못하고 다만 평안도 감사의 명의로 누르하치에게 조선 조정의 뜻이 전달되게 된다.

  • 당시 조선에서는 칸에 오른 누르하치를 금국한(金國汗) 대신 건주위마법(建州衛馬法)으로 칭했다. 광해군 또한 누르하치에게 서찰을 보낼 때 건주위마법족하(建州衛馬法足下)라고 써놔서 누르하치가 노발대발했다고 하는데, 이유는 위 칭호를 쓴다는 건 동등한 군주의 위치로 보는 게 아니라 일개 장수 및 지방관으로 하대하는 의미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르하치는 이렇게 자신을 무시하는 조선에 상당한 불쾌감을 가졌지만 주적이 명나라이며, 조선과의 마찰은 명나라에 어부지리를 안겨줄 것이라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대응을 자제했다.

  • 사르후 전투 이후 명나라의 장수인 모문룡은 요동에서 게릴라전을 펼치다가 조선으로 도망쳤는데, 이를 추격하던 후금군[36]은 압록강을 건너[37] 모문룡군을 추격했다. 모문룡은 후금의 기병대에 참패하고, 이후 바다에 약한 후금군을 피하려 철산 가도에 주둔하게 된다.[38] 광해군 시기에는 누르하치가 이렇게 조선과는 충돌을 피했고, 광해군명나라 - 후금 사이에서의 중립을 지켜 조선과 후금 간의 충돌은 없었다. 다만 이후 인조 정권이 노골적인 반청(反淸) 정책을 시행하면서 양국의 사이는 악화된다.


5. 평가[편집]


조부와 부친의 원수를 갚고 분열된 부족을 통일해서 중화제국을 공격하고 새로운 제국을 세웠다는 점에서는 칭기즈 칸과 비슷한 점이 많다. 또한 요나라의 창업자인 야율아보기금나라의 창업자인 완안아골타와도 비슷하다.

하지만 누르하치가 이들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적극적인 포용력이었다. 누르하치는 만주족이 대륙을 경영하기에는 아무래도 실력이 모자라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고, 자신들보다 선진적인 한족의 인재나 문화를 적극적으로 흡수하거나 포용하여 270여 년 사직의 기틀을 이루었다. 이런 방침은 누르하치를 이은 태종 홍타이지도 그대로 계승하여, 그는 적극적으로 명나라 항장들을 청나라의 신하로 받아들이고, 명나라의 지배기구를 그대로 접수하여, 이자성군에게 멸망한 명나라를 이어 빠르게 대륙을 장악했다. 이후 청나라는 통일왕조로서 100년 동안 번영을 누렸다. 이런 전성기는 다른 한족 왕조의 전성기[39]보다 훨씬 더 길며 청나라는 다른 유목제국의 왕조보다 훨씬 더 큰 영향력을 중국 역사에 남겼다. 이에 반해 야율아보기 및 완안아골타와 보르지긴 테무진과 같은 유목민족 출신 왕조의 시조들은 중국을 통일하지도 못했고[40], 통일했다고 해도 전성기는 매우 짧았으며[41], 통치구조나 지배구조가 매우 불안하여 중국 역사에 큰 영향력을 펼치지도 못하고, 결과적으로 한족 왕조에 비해 비교적 단명했다.

여러 가지로 긍정적으로 평가받을 만한 면이 많은 창업자이지만, 현대 중국에서는 한족의 흑역사라고 볼 수 있는 만주족 지배에 대한 반감 때문에 언급이 잘 안되는 듯하다. 게다가 후대 황제들인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로 이어지는 강건성세의 업적이 너무나 커서 누르하치는 묻히는 측면이 많다.


6. 가족[편집]



6.1. 조상[편집]




6.2. 형제자매[편집]


누르하치의 아버지인 탁시는 여러 처첩으로부터 5남 2녀의 자녀를 두었다. 이들 중 누르하치는 탁시의 장남이었고, 네 형제는 차례로 무르하치(이복형제), 슈르하치, 야르하치, 바라야(이복형제)이고, 두 자매는 차례로 장녀(시호, 이름 미상), 점하고 가 있다. 이 형제들은 장남인 형을 도와 후금의 개국에 공헌을 했고, 슈르하치는 그 중에서 가장 큰 공을 세웠으나, 대명 온건파였기 때문에[42] 점점 형이랑 사이가 벌어졌다. 특히 1607년, 해서여진 우라부와의 대결에서 누르하치는 공세를 명령했으나, 슈르하치는 자신의 부대를 빼내 구경만 하여 이 갈등은 극에 달했다. 누르하치는 이후 슈르하치의 역모를 발견했다고 주장하며, 슈르하치의 부하들과 아들 일부를 참하고[43] 슈르하치를 옥에 가두었다. 슈르하치는 1611년 48세 나이로 옥에서 사망했다.

6.3. 비 및 후궁[편집]


일부다처제를 시행하는 만주족의 풍습에서 부인과 첩은 엄격한 구분이 없었으며, 태어난 아들에 대한 적서 차별은 없었다. 다만 여러 부인들 사이의 서열은 있었다. 서열은 복진, 소복진, 서(庶)복진 등으로 구분된다. 이외에도 아무 직함을 받지 않았지만 잠자리 시중을 드는 여자 노비도 많아서, 사서에 기록된 것만 28명의 여인이 있었고 이후에 후금이 청으로 바뀌면서 황제국이 된 이후 "효자고황후"로 추존된 여인은 1586년 결혼한 셋째부인 예허나라씨였다. 이 사람이 홍타이지 (황8자)의 생모였다.

천명제가 두었던 비와 후궁의 목록은 아래와 같다.

  • 정후
    • 정실
    • 황후(추존)
      • 시호: 효자고황후(孝慈高皇后), 봉호: 대비(大妃), 이름: 예허나라 멍고저저(엽혁나랍 맹고저저, 葉赫那拉 孟固姐姐) - 후금이 건국되기 전에 사망하였다. 슬하 자녀: 8황자
      • 시호: 효열무황후(孝烈武皇后), 봉호: 대비(大妃), 이름: 울라나라 아바하이(오랍나랍 아파해, 烏喇那拉 阿巴亥) - 천명제의 정실이지만, 천명제의 사망 이후 순장을 강요받아 순장되었다. 슬하 자녀: 12황자, 14황자, 15황자
  • 측실(후궁)
    • 측복진(側福晉)/측비(側妃)
      • 시호: 황증조수강태비(皇曾祖壽康太妃), 봉호: 태비(太妃), 성씨: 보르지기트(보르지긴) 씨(박이제길특 씨 ,博尔濟吉特氏)
      • 시호: 측비 이르건기오르씨(측비 이이근각라씨, 側妃 伊爾根覺羅氏), 봉호: 측비(側妃), 성씨: 이르건기오로 씨(이이근각라 씨, 伊爾根覺羅氏). 슬하 자녀: 2황녀, 7황자
      • 시호: 측비 예허나라씨(측비 엽혁납라씨, 側妃 葉赫納喇氏), 봉호: 측비(側妃), 이름: 예허나라 나나쿤(엽혁납라 납납곤, 葉赫納喇 納納昆) - 효자고황후의 동생이다. 슬하 자녀: 8황녀
      • 시호: 측비 보르지기트씨(측비 박이제길특씨, 側妃 博尔濟吉特氏), 봉호: 측비(側妃), 성씨: 보르지기트(보르지긴) 씨(박이제길특 씨 ,博尔濟吉特氏)
      • 시호: 측비 합달납라씨(측비 합달납라씨, 側妃 哈達納喇氏), 봉호: 측비(側妃), 이름: 하다나라 아민저저(합달납라 아민철철, 哈達納喇 阿敏哲哲)
    • 서복진(庶福晉)/서비(庶妃)
      • 시호: 서비 주기야씨(서비 조가씨, 庶妃 兆佳氏), 봉호: 서비(庶妃), 성씨: 주기야 씨(조가 씨,兆佳氏). 슬하 자녀: 3황자
      • 시호: 서비 니오후루씨(서비 뉴호록씨, 庶妃 紐祜祿氏), 봉호: 서비(庶妃), 성씨: 니오후루 씨(뉴호록 씨, 紐祜祿氏). 슬하 자녀: 4황자, 6황자
      • 시호: 서비 기야무후트기오로씨(서비 가목호각라씨, 庶妃 嘉穆瑚覺羅氏), 봉호: 서비(庶妃), 이름: 기야무후트기오로 증허(가목호각라 진가, 嘉穆瑚覺羅 眞哥). 슬하 자녀: 9황자, 황4녀, 11황자, 5황녀, 6황녀
      • 시호: 서비 시린기오로씨(서비 서림각라씨 庶妃 西林覺羅氏), 봉호: 서비(庶妃), 성씨: 시린기오로 씨(서림각라 씨, 西林覺羅氏). 슬하 자녀: 13황자
      • 시호: 서비 이르건기오로씨(서비 이이근각라씨, 庶妃 伊爾根覺羅氏), 봉호: 서비(庶妃), 성씨: 이르건기오로 씨(이이근각라 씨, 伊爾根覺羅氏). 슬하 자녀: 7황녀
      • 시호:서비 아제근(서비 아지건, 庶妃阿濟根), 봉호: 서비(庶妃), 성씨: 아제근(아지건, 阿濟根), 천명제 사망 이후 순장되었다.
      • 시호: 낙비 이씨(樂妃 李氏), 봉호: 낙비(樂妃), 이름: 이혜하(李惠霞), 화족 출신이다.
      • 시호: 서비 더인저(서비 덕인택, 庶妃 德因澤), 봉호: 서비(庶妃), 이름: 더인저(덕인택, 德因澤), 천명제의 사망 이후 순장되었다. 슬하 자녀: 16황자

6.4. 자녀[편집]


사서에 기록된 것만 16남 8녀를 낳았는데, 적장자인 추연은 후계자로 지정되어 여러 중책을 맡았고, 여러 군공을 쌓았으나, 다른 형제와 아버지의 부하들과 사이가 나빴다. 그리하여 권력을 잃었는데, 자신이 보위를 계승하기 위해 무속으로 아버지를 저주한 것이 발각되어 2년간 유폐되었다가 1615년 처형되었다.

둘째아들 다이샨은 추연과 동복형제로 역시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군공을 세웠다. 추연이 몰락한 후, 유력한 후계자가 될 뻔 했으나, 아버지의 부인과 간통을 했다는 의심을 받았고 역시 아버지의 신임을 잃었다.[44] 그리하여 후계자가 되는 데는 실패했지만, 친형처럼 처형되지는 않고, 이후 홍타이지의 후계 등극을 도와 지위를 잃지 않는다.

8황자는 홍타이지, 14황자는 도르곤이다. 두 명은 청 조의 수립에 큰 역할을 했다.

천명제의 자녀 목록은 아래와 같다.

  • 황자
    • 황장자 - 시호: 다라광략패륵(多羅廣略貝勒), 이름: 아이신기오로 추연(애신각라 저영, 愛新覺羅 褚英) - 초봉은 태자였지만, 후에 패륵으로 강등되었다. 형제와 개국오대신 등과의 마찰로 실각한 뒤, 부황 누르하치를 저주한 것이 발각되어, 1615년 처형됐다.
    • 2황자 - 시호: 화석예열친왕(和碩禮烈親王), 이름: 아이신기오로 다이샨(애신각라 대선, 愛新覺羅 代善)
    • 3황자 - 시호: 진국근민공(鎭國勤敏公), 이름: 아이신기오로 아바이(애신각라 아배, 愛新覺羅 阿拜)
    • 4황자 - 시호: 삼등진국극결장군(三等鎭國克潔將軍), 이름: 아이신기오로 탕구다이(애신각라 탕고대, 愛新覺羅 湯古代) - 역모죄를 지어 종실에서 축출되었으나, 사후에 복윈되었다.
    • 5황자 - 시호: 이혁패륵(已革貝勒), 이름: 아이신기오로 망구르타이(애신각라 망고이태, 愛新覺羅 莽古爾泰)
    • 6황자 - 시호: 보국각후공(輔國愨厚公), 이름: 아이신기오로 타바이(애신각라 탑배, 愛新覺羅 塔拜)
    • 7황자 - 시호: 화석요여민친왕(和碩饒餘敏親王), 이름: 아이신기오로 아바타이(애신각라 아파태, 愛新覺羅 阿巴泰)
    • 8황자 - 시호: 태종 숭덕제(太宗 崇德帝), 이름: 아이신기오로 홍타이지(애신각라 황태극, 愛新覺羅 皇太極)
    • 9황자 - 시호: 진국각희공(鎭國恪僖公), 이름: 아이신기오로 바부타이(애신각라 파포태, 愛新覺羅 巴布泰)
    • 10황자 - 시호: 이혁패륵(已革貝勒), 이름: 아이신기오로 더거러이(애신각라 덕격류, 愛新覺羅 德格類)
    • 11황자 - 시호: 이혁진국장군(已革鎭國將軍), 이름: 아이신기오로 바부하이(애신각라 파포해, 愛新覺羅 巴布海)
    • 12황자 - 시호: 이혁영친왕(已革英親王), 이름: 아이신기오로 아지거(애신각라 아제격, 愛新覺羅 阿濟格)
    • 13황자 - 시호: 보국개직공(輔國介直公), 이름: 아이신기오로 라이무부(애신각라 뇌모포, 愛新覺羅 賴慕布)
    • 14황자 - 시호: 화석예충친왕(和碩睿忠親王), 이름: 아이신기오로 도르곤(애신각라 다이곤, 愛新覺羅 多尔衮) - 숭덕제 사후에 순치제의 섭정왕이 되며, 사후 황제로 추존되었으나 역모로 인하여 추탈되었다. 후에 예친왕으로 복원되었다.
    • 15황자 - 시호: 화석예통친왕(和碩豫通親王), 이름: 아이신기오로 도도(애신각라 다탁, 愛新覺羅 多鐸)
    • 16황자 - 시호: 홍대자(紅帶子), 이름: 아이신기오로 피양구(애신각라 비양과, 愛新覺羅 費揚果)
  • 황녀
    • 황장녀 - 봉호: 단장고륜공주(端莊固倫公主), 이름: 아이신기오로 눈철(애신각라 눈철, 愛新覺羅 嫩哲)
    • 2황녀 - 봉호: 화석공주(和碩公主), 이름: 아이신기오로 안철(애신각라 안철, 愛新覺羅 顔哲)
    • 3황녀 - 봉호: 공주(公主), 이름: 아이신기오로 망고제(애신각라 망고제, 愛新覺羅 莽古濟)
    • 4황녀 - 봉호: 화석공주(和碩公主), 이름: 아이신기오로 목고십(애신각라 목고십, 愛新覺羅 穆庫什)
    • 5황녀 - 봉호: 화석공주(和碩公主), 이름 미상
    • 6황녀 - 봉호: 화석공주(和碩公主), 이름 미상
    • 7황녀 - 봉호: 향군품급(鄕君品級), 이름 미상
    • 8황녀 - 봉호: 화석공주(和碩公主), 이름: 아이신기오로 송고도(애신각라 송고도, 愛新覺羅 松古圖)

7. 《청태조실록》[편집]


원제는 《大淸太祖高皇帝實錄》(대청태조고황제실록).
원문은 여기서 볼 수 있다.
이미지는 여기서 볼 수 있다.


8. 대중매체[편집]


1986년 중국 드라마 《누르하치》에서는 삼국연의(1994)에서 조운역을 맡았던 후영생[45]이 누르하치 역을 맡았다. 이 드라마에서 누르하치는 여진족을 탄압하는 명나라의 압제에 분노해 궐기하는 것으로 나온다.

1986년 한국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회천문남한산성에서는 백인철이 담당했다. 그런데 실제 인물과의 외모 차이가 크다보니 오히려 홍타이지 역이 더 어울려 보일 정도였다.

2004년 중국 드라마 《태조비사》에서는 대만배우 마경도가 누르하치역을 맡았다. 이 드라마는 이성량군에서 복무하고 있던 누르하치가 명나라 군에게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죽음을 당하는 것을 보고 각성하는 것으로 나온다.

파일:칼부림_누르하치.jpg

나는 에 의해 조부부친을 잃었다.

그 이후, 젊은 날의 나는 오직 복수를 위해 절치부심할 뿐이었다.

허나 난 복수를 위해 명의 도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 힘으로 제압하고 부족을 통합하였다.

결국 나를 두려워한 명의 10만 대군을 궤멸시키고 요동을 석권했지.

이제 곧 산해관을 넘는 일만 남았을 뿐이다.

나의 복수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허나 그때가 되면 내게 복수란 무엇일까?

산해관을 넘으면..... 그때도 나의 전부일까?

나는 그 너머로 가려한다.

곁에서 그것을 지켜보아라.

나의 칼이 되어서!

네이버 웹툰칼부림》 중

네이버 웹툰칼부림》에서 후금의 통치자로 등장. 사르후 전투요동을 석권하고 심양으로 천도한 이후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후금에 저항하는 요동 주민들과 여전히 견고한 명의 세력을 마주하며 조급해하기도 한다. 후금으로 망명한 주인공 함을 친위대로 기용하며 극의 주요 인물로 올라섰다. 작중 한창 국운을 떨치는 자신의 후금과 수비에 급급한 조선, 명을 비교하며 우월감에 도취된 모습을 보인다.[46] 산해관을 넘어 중원을 손에 넣기를 꿈꾸었지만 영원성의 벽을 넘지 못했고, 4부 63화에서 원숭환이 쏜 홍이포에 맞아 경상을 입고 결국 후퇴하면서 그의 꿈은 좌절된다. 이후 할하 5부를 정벌하는 등 건재함을 과시하는 듯 했지만 사실은 시름시름 앓고 있었고, 결국 마음의 상처로 등창이 악화되며 평정심마저 잃다가, 4부 82화에서 4패륵들과 슈무루 양구리, 후처 아바하이, 도르곤이 보는 앞에서 회한 어린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둔다.

뇨허..

녀석.. 에게 그랬지. 자책은 하되.. 후회는.. 없다고..

그런.. 데.. 그런데 왜... 꼭.. 지금이냐..? 어찌하여..

이리.. 떠나면.. 이리.. 가면.. 후회.. 스러울 것.. 같은데..

다시.. 다... 시...

다... 시... 그... 너머... 로...


2015년 KBS 드라마 징비록에서는 직접 등장하지는 않지만, 이름이 언급된다. 히데요시와 마에다의 대화에서 그가 이끄는 여진족의 군사력이 강하다고 언급이 되며, 누르하치가 선조에게 파병 의사를 밝히는 서신을 보내자, 선조가 이에 응하려다가 신하들의 반대로 파병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으로 나온다.

인디아나 존스와 마궁의 사원》의 초반부에서 인디아나 존스가 중국 상해의 한 호화식당에서 누르하치의 유골을 커다란 다이아몬드(공작의 눈)와 교환하는 장면이 나온다.

킹덤: 아신전》에서 파저위의 수장인 아이다간이 모티브로 삼은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데 아이다간은 야만족의 추장정도로 나오지만, 누르하치군은 통일된 갑주를 갖춘 정규군이었다.

시리즈 퓨전무협소설《시한부 천재가 살아남는 법》의 등장인물 남제(南帝)의 정체가 천명제 누르하치이다.

9. 둘러보기[편집]


청사고(淸史稿)

[ 본기(本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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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6·7·8권 「성조기(聖祖紀)」 ||<-2> 9권 세종기(世宗紀)」 ||<-2> 10·11·12·13·14·15권 「고종기(高宗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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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6권 「인종기(仁宗紀)」 ||<-2> 17·18·19권 선종기(宣宗紀)」 ||<-2> 20권 「문종기(文宗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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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1·22권 「목종기(穆宗紀)」 ||<-2> 23·24권 덕종기(德宗紀)」 ||<-2> 20권 「선통제기(宣統帝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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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권 ~ 160권은 志에 해당. 161권 ~ 213권은 表에 해당. 청사고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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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육영 · 합점 · 항애 · 화선 · 동위국 · 동국정 · 주유덕 · 장덕지 · 윤벽 · 왕계문
257권 「조국조등전(趙國祚等傳)」
조국조 · 허정 · 주구 · 서치도 · 호세영 · 당희순 · 이린 · 조응규 · 조뢰 · 이방술 · 진세개 · 허점수
261권 「양첩등전(楊捷等傳)」
양첩 · 석조성 · 만정색 · 오영 · 감리 · 황오 · 방태 · 목혁림 · 단응거
262권 「위예개전(魏裔介等傳)」
263권 「왕홍조전(王弘祚等傳)」
위예개 · 웅사리 · 이광지
왕홍조 · 요문연 · 위상추 · 주지필 · 조신교
264권 「학유눌등전(郝維訥等傳)」
265권 「탕빈등전(湯斌等傳)」
학유눌 · 임극부 · 유홍유 · 유건 · 주배 · 장정추
탕빈 · 손지욱 · 육롱기 · 장백행
266권 「엽방애전(葉方藹等傳)」
267권 「장옥서등전(張玉書等傳)」
엽방애 · 심전 · 여두눌 · 서원공 · 허삼례 · 왕사정 · 한담 · 탕우증
장옥서 · 이천복 · 오전 · 장영 · 진정경 · 온달 · 소영조 · 숭축 · 왕서령
268권 「미사한등전(米思翰等傳)」
269권 「장옥서등전(張玉書等傳)」
미사한 · 고팔대 · 마이한 · 전육선 · 두진 · 살목하
삭액도 · 명주 ,여국주 불륜,
270권 「학욕등전(郝浴等傳)」
271권 「서건학등전(徐乾學等傳)」
272권 「탕약망등전(湯若望等傳)」
학욕 · 양소온 · 곽수
서건학 ,옹숙원, · 왕홍서 · 고사기
탕약망 · 양광선 · 남회인
106권 「두이최고곽조최양노이유이유손형전(杜二崔高郭趙崔楊盧二劉李劉孫邢傳)」
두정륜 · 최지온 · 고지주 · 곽정일 · 조홍지 · 최돈례 · 양홍례 · 노승경 · 유상도 · 이경현 · 유덕위 · 손처약 · 형문위
107권 「부여진전(傅呂陳傳)」
108권 「유배루전(劉裴婁傳)」
부혁 · 여재 · 진자앙
유인궤 · 배행검 · 누사덕
109권 「최양두종축왕전(崔楊竇宗祝王傳)」
최의현 · 양재사 · 두회정 · 종초객 · 축흠명 · 산운 · 왕여(王璵)
110권 「제이번장전(諸夷蕃將傳)」
사대내 · 풍앙 · 아사나사이 · 아사나충 · 집실사력 · 글필하력 · 흑치상지 · 이근행 · 천남생 · 이다조 · 논궁인 · 손유정 · 울지승 · 상가고 · 배분
111권 「곽이장삼왕소설정당전(郭二張三王蘇薛程唐傳)」
곽효각 · 장검 · 왕방익 · 소열 · 설인귀 · 정무정 · 왕효걸 · 당예 · 장인원 · 왕준
112권 「왕한소설왕류풍장전(王韓蘇薛王柳馮蔣傳)」
왕의방 · 한사언 · 소안항 · 설등 · 왕구례 · 유택 · 풍원상 · 장흠서
116권 「이왕위육이이두전(二王韋陸二李杜傳)」
117권 「배유위이길전(裴劉魏李吉傳)」
왕침 · 위사겸 · 육원방 · 왕급선 · 이일지 · 두경전 · 이회원
배염 · 유의지 · 위현동 · 이소덕 · 길욱
118권 「장위한송신이이배전(張韋韓宋辛二李裴傳)」
119권 「무이가백전(武李賈白傳)」
장정규 · 위주 · 한사복 · 송무광 · 신체부 · 이발 · 배린 · 이중민 · 이감
무평일 · 이예(李乂) · 가증 · 백거이
304권 「장조등전(張照等傳)」
장조 · 감여래 · 진덕화 · 왕안국 · 유오룡 · 양여곡 · 장태개 · 양석불 · 팽계풍 · 손희렴 · 몽린
305권 「전진군등전(錢陳群等傳)」
전진군 · 심덕잠 · 김덕영 · 전재 · 제소남 · 진조윤 · 동방달 · 전유성 · 추일계 · 사용 · 왕창
306권 「조사일등전(曹一士等傳)」
307권 「위위곽전(魏韋郭傳)」
조사일 · 이신수 · 호정 · 중영단 · 시조생 · 저인지
윤계선 · 유우의 · 진대수 · 장윤수 · 진굉모
308권 「나소도등전(那蘇圖等傳)」
나소도 · 왕초증 · 서사림 · 윤회일 · 왕서 · 방현 · 풍광유 · 양석불 · 반사구 · 호보전 · 왕창
123권 「이소로위조화전(李蕭盧韋趙和傳)」
124권 「요송전(姚宋傳)」
이교 · 소지충 · 노장용 · 위거원 · 조언소 · 화봉요
요숭 · 송경
318권 「아계전(阿桂傳)」
319권 「우민중등전(于敏中等傳)」
장가아계
우민중 · 뉴호록 화신 · 소릉아
322권 「두광내등전(竇光鼐等傳)」
323권 「황정계등전(黃廷桂等傳)」
두광내 · 이수방 · 범의빈 · 조석보 · 사진정 · 전풍 · 윤장도
황정계 · 악미달 · 양정장 · 장유공 · 이시요 · 오미태 · 관보
324권 「방관승등전(方觀承等傳)」
방관승 · 부찰부명안 · 주원리 · 이한 · 이세걸 · 원수동 · 정대진 · 유아 · 육요 · 관간정 · 장조규 · 호계당
325권 「이청시등전(李淸時等傳)」
326권 「개태등전(開泰等傳)」
이청시 · 요입덕 · 이굉 · 하위 · 오사작 · 살재 · 난제석 · 한횡
개태 · 아이태 · 계림 · 원푸
131권 「종실재상전(宗室宰相傳)」
132권 「유오위장류침전(劉吳韋蔣柳沈傳)」
이적지 · 이현(李峴) · 이면 · 이이간 · 이정(李程) · 이석 · 이회
유자현 · 오긍 · 위술 · 장예 · 유방 · 심기제
133권 「이곽양왕장우전(二郭兩王張牛傳)」
134권 「우문위양왕전(宇文韋楊王傳)」
곽건관 · 곽지운 · 왕군착 · 장수규 · 왕충사 · 우선객
우문융 · 위견 · 양신긍 · 왕홍
135권 「가서고봉전(哥舒高封傳)」
136권 「이광필전(李光弼傳)」
137권 「곽자의전(郭子儀傳)」
가서한 · 고선지 · 봉상청
이광필
곽자의
138권 「이이마로전(二李馬路傳)」
139권 「방장이전(房張李傳)」
140권 「최묘이배려전(崔苗李裴呂傳)」
이사업 · 마린 · 이포옥 · 노사공
방관 · 장호 · 이필
최원 · 묘진경 · 배면 · 배준경 · 여인
141권 「최등위위이한노고전(崔鄧魏衛李韓盧高傳)」
최광원 · 등경산 · 최관 · 위소유 · 위백옥 · 이징(李澄) · 한전의 · 노종사 · 고하우
142권 「이양최류위로전(李楊崔柳韋路傳)」
이린(李麟) · 양관 · 최우보 · 유혼 · 위처후 · 노수
143권 「고원이위설최대왕서치신전(高元李韋薛崔戴王徐郗辛傳)」
고적 · 원결 · 이승 · 위륜 · 설각 · 최한형 · 대숙륜 · 왕굉 · 서신 · 치사미 · 신비
144권 「내전후최엄전(來田侯崔嚴傳)」
내진 · 전신공 · 후희일 · 최녕 · 엄여
145권 「원반여양엄두전(元王黎楊嚴竇傳)」
146권 「이이전(二李傳)」
원재 · 왕진 · 여간 · 양염 · 엄정 · 두참
이서균 · 이용(李鄘)
147권 「삼왕노신풍삼이곡이로전(三王魯辛馮三李曲二盧傳)」
왕사례 · 노경 · 왕난득 · 신운경 · 풍하청 · 이봉(李芃) · 이숙명 · 곡환 · 왕건휴 · 노군 · 이원소 · 노사매
148권 「영호장강이유전왕우사전(令狐張康李劉田王牛史傳)」
영호창 · 장효충 · 강일지 · 이유(李洧) · 유옹 · 전홍정 · 왕승원 · 우원익 · 사효장
149권 「유제오반왕이전(劉第五班王李傳)」
150권 「이상조최제로전(李常趙崔齊盧傳)」
유안 · 제오기 · 반굉 · 왕소 · 이손(李巽)
이계 · 상곤 · 조경 · 최조 · 제앙 · 노매
151권 「관동원조두전(關董袁趙竇傳)」
152권 「장강무이송전(張姜武李宋傳)」
관파 · 동진 · 원자 · 조종유 · 두역직
장일 · 강공보 · 무원형 · 이강(李絳) · 송신창
153권 「단안전(段顏傳)」
154권 「이성전(李晟傳)」
155권 「마혼전(馬渾傳)」
단수실 · 안진경
이성
마수 · 혼감
156권 「양대양이이한두형전(楊戴陽二李韓杜邢傳)」
양조성 · 대휴안 · 양혜원 · 이원량 · 이관(李觀) · 한유괴 · 두희전 · 형군아
157권 「육지전(陸贄傳)」
158권 「위장엄한전(韋張嚴韓傳)」
육지
위고 · 장건봉 · 엄진 · 한홍
159권 「요독고고위단여허설이전(姚獨孤顧韋段呂許薛李傳)」
포방 · 이자량 · 소흔 · 설파 · 번택 · 왕위 · 오주 · 정권 · 육긍 · 노탄 · 유성 · 최융 · 장정보
160권 「서여맹유양반최위전(徐呂孟劉楊潘崔韋傳)」
161권 「장초이정서왕풍유전(張趙李鄭徐王馮庾傳)」
서호 · 여위 · 맹간 · 유백추 · 양풍 · 반맹양 · 최원략 · 위수
장천 · 조연 · 이서 · 정운달 · 서대 · 왕중서 · 풍항 · 유경휴
162권 「요독고고위단여허설이전(姚獨孤顧韋段呂許薛李傳)」
요남중 · 독고급 · 고소련 · 위하경 · 단평중 · 여원응 · 허맹용 · 설존성 · 이손
163권 「공목최유양마전(孟簡等傳)」
공소부 · 목녕 · 최빈 · 유공작 · 양어릉 · 마총
164권 「설해삼최노이설위호정이왕은전(歸奚三崔盧二薛衛胡丁二王殷傳)」
귀숭경 · 해척 · 최연 · 노경량 · 설빈 · 위차공 · 설융 · 호증 · 우공저 · 왕질 · 은유 · 왕언위
165권 「삼정고권최전(三鄭高權崔傳)」
166권 「가두영호전(賈杜令狐傳)」
정여경 · 정순유 · 고영 · 정인 · 권덕여 · 최군
가탐 · 두우 · 영호초
167권 「백배최위이이황보왕전(白裴崔韋二李皇甫王傳)」
백지정 · 배연령 · 최손 · 위거모 · 이제운 · 이실 · 황보박 · 왕파
168권 「위왕육유류정전(韋王陸劉柳程傳)」
169권 「두배이위전(杜裴李韋傳)」
위집의 · 왕숙문 · 육질 · 이우석 · 유종원 · 정이
두황상 · 배기 · 이번 · 위관지 · 풍숙 · 봉오
170권 「이고이주이유범이왕맹조이임장전(二高伊朱二劉范二王孟趙李任張傳)」
고숭문 · 이신(伊愼) · 주충량 · 유창예 · 범조희 · 왕악 · 맹원양 · 왕서요 · 유창 · 조창 · 이경략 · 임적간 · 장만복
171권 「이오왕양조고유석전(李烏王楊曹高劉石傳)」
이광진 · 오중윤 · 왕패 · 양원경 · 조화 · 고우 · 유면 · 석웅 · 고원유 · 봉오 · 정훈 · 경회 · 위박
172권 「우왕이두범전(于王二杜范傳)」
173권 「배도전(裵度傳)」
174권 「이이원우양전(二李元牛楊傳)」
우적 · 왕지흥 · 두겸 · 두아 · 범정전
배도
이봉길 · 원진 · 우승유 · 이종민 · 양사복
175권 「두유이장양웅백전(竇劉二張楊熊柏傳)」
176권 「한유전(韓愈傳)」
두군 · 유서초 · 장우신 · 양우경 · 장숙 · 웅망 · 백기
한유
340권 「왕걸등전(王傑等傳)」
341권 「경규등전(慶桂等傳)」
왕걸 · 동고 · 주규
경규 · 유관지 · 대구형 · 대균원 · 탁진 · 장후 · 노음부
342권 「보녕등전(保寧等傳)」
343권 「서린등전(書麟等傳)」
보녕 · 송균 · 배탄 · 박계특
서린 · 각라길경 · 각라장린 · 비순 · 장백령 · 백린
344권 「늑보등전(勒保等傳)」
345권 「서린등전(永保等傳)」
늑보 · 액륵등보 ,호시현, · 덕릉태
영보 · 혜령 · 의면 · 영선 · 복녕 · 경안 · 태승은
386권 「문경등전(文慶等傳)」
385권 「숙순등전(肅順等傳)」
386권 「계량등전(桂良等傳)」
문경 · 문상 · 보윤
숙순 · 목음 · 초우영
계량 · 서린 · 관문 · 문욱
389권 「백준등전(柏俊等傳)」
390권 「가정등전(賈楨等傳)」
391권 「왜인등전(倭仁等傳)」
백준 · 인괴 · 서상 · 전경
가정 · 주조배 · 주봉표 · 단무겸
왜인 · 이당계 · 오정동
392권 「새상아등전(賽尙阿等傳)」
393권 「이성원등전(李星沅等傳)」
394권 「서광진등전(徐廣縉等傳)」
새상아 · 눌이경액
이성원 · 주천작 · 노숭광
서광진 · 엽명침 · 황종한
395권 「상대순등전(常大淳等傳)」
상대순 ,쌍복 왕금수 왕수동, · 장문경 · 도은배 ,다산, · 길이항아 · 나준전 · 서유임 · 왕유령
396권 「오문용전(吳文鎔等傳)」
397권 「육건영등전(陸建瀛等傳)」
오문용 · 반탁 · 등이항
육건영 · 양정문 · 청린 · 숭륜 · 하계청
399권 「여현기등전(呂賢基等傳)」
여현기 · 추명학 · 대희 · 장비 · 황종 · 도정걸 · 풍배원 · 손명은 · 심병원 · 장석경
400권 「하계진등전(何桂珍等傳)」
401권 「상영등전(向榮等傳)」
하계진 · 서풍옥 · 온소원 · 김광저 · 이맹군 · 조경현
상영 · 화춘 · 장국량
402권 「오란태등전(烏蘭泰等傳)」
오란태 · 등소량 · 주천수 · 요문선 · 문서 · 팽사거 · 장옥량 · 노점오 · 유계삼 · 서쌍래 · 구등룡 · 왕국재 · 호곤원 · 대문영
403권 「승보등전(勝保等傳)」
404권 「승격림심등전(僧格林沁等傳)」
승보 · 탁명아 · 진금수 · 덕흥아
승격림심 · 서통액 · 항령 · 소극금 · 하건오 · 전순 · 사영춘 · 악선
405권 「증국번전(曾國籓傳)」
406권 「낙병장등전(駱秉章等傳)」
407권 「강충원등전(江忠源等傳)」
증국번
낙병장 · 호림익
강충원 · 나택남
408권 「이속빈등전(李續賓等傳)」
409권 「탑제포등전(塔齊布等傳)」
이속빈 · 정예의 · 증국화 · 이속의 · 왕진 · 유등홍 · 장익풍
탑제포 · 필금과 · 다융아 · 포초,송국영 누운경 담등달, · 당인겸 · 유송산
410권 「팽옥린등전(彭玉麟等傳)」
411권 「이홍장전(李鴻章傳)」
팽옥린 · 양악빈 · 왕명산 · 손창개 · 양명해 · 사준여
이홍장
412권 「좌종당전(左宗棠傳)」
413권 「증국전등전(曾國荃等傳)」
좌종당
증국전 · 심보정 · 유곤일
414권 「이신전등전(李臣典等傳)」
이신전 · 소부사 · 이원길 · 유연첩 · 팽육귤 · 장시일 · 오유수 · 주남계 · 나봉원 · 이상화 · 소경연 · 오종국
415권 「황익승등전(黃翼升等傳)」
황익승 · 정의방 · 왕길 · 오가방 · 이성모 · 이조빈 · 강복산 · 유배원
416권 「정학계등전(程學啟等傳)」
정학계 · 하안태 · 정국괴 · 유명전 · 장수산 · 주성파 · 주성전 · 반정신 · 오장경
418권 「원갑삼등전(袁甲三等傳)」
419권 「낙병장등전(左宗棠傳)」
420권 「한초등전(韓超等傳)」
원갑삼 · 모창희
유장우 · 유악소 · 잠육영
한초 · 전흥서 · 증벽광 · 석보전
421권 「심조림등전(沈兆霖等傳)」
심조림 · 조육영 · 허내보 · 조광 · 주준 · 이함 · 장상하 · 나돈연 · 정돈근 · 방종로
422권 「왕무음등전(王茂廕等傳)」
왕무음 · 송진 · 원희조 · 문서 · 육록 · 서계여 · 왕발규 · 염조윤 · 뇌이함 · 도양 · 오존의 · 은조용
423권 「종직진등전(宗稷辰等傳)」
424권 「오진역등전(吳振棫等傳)」
종직진 · 윤경운 · 왕증 · 목집향아 · 유백천
오진역 · 장량기 · 모홍빈 · 장개숭
425권 「이혜등전(李僡等傳)」
426권 「왕경운등전(王慶雲等傳)」
이혜 · 오당 · 영한 · 유용 · 교송년 · 전정명 · 오원병
왕경운 · 담정양 · 마신이 · 이종희 · 서종간 · 왕개태 · 곽백음
451권 「이조의등전(李朝儀等傳)」
이조의 · 단기 · 정수창 · 증기봉 · 저유립 · 서철산 · 계중행 · 유함방 · 진횡거 · 유지개 · 이용청 · 이금용 · 김복증 ,웅기영 사복가, · 동조용
452권 「홍여규등전(洪汝奎等傳)」
홍여규 · 양종렴 · 사박 · 사극관 · 심보정 · 주기앙 ,주기조, · 종원한 · 서경장 · 서진 · 괴광전 · 진휼성 · 반민표 · 엄작림 · 당석진 · 누춘번
457권 「장동재등전(蔣東才等傳)」
장동재 · 이남화 · 동리고 · 동전승 · 우사한 · 조덕경 · 마복진 · 정문병 · 방요 · 등안방
458권 「서연욱등전(徐延旭等傳)」
서연욱 · 당형 · 하경 · 장조동
459권 「풍자재등전(馮子材等傳)」
풍자재 · 왕효기 · 진가 · 장종한 · 소원춘 · 마성치 · 왕덕방 · 장춘발 · 소득룡 · 마유기 · 오영안 · 손개화 · 소득승 · 장고원 · 구양이견
460권 「좌보귀등전(左寶貴等傳)」
461권 「송경등전(宋慶等傳)」
좌보귀 · 원영산 · 등세창 · 유보첨 · 대종건
송경 · 여본원 · 서방도 · 마옥곤 · 의극당아 · 장순
462권 「정여창등전(丁汝昌等傳)」
463권 「당경숭등전(唐景崧等傳)」
정여창 · 위여귀 · 엽지초
당경숭 · 유영복
464권 「이단분등전(李端棻等傳)」
이단분 · 서치정 · 진보함 · 황준헌 · 증화 · 양심수 · 양예 · 유광제 · 담사동 · 임욱 · 강광인
465권 「서동등전(徐桐等傳)」
466권 「서용의등전(徐用儀等傳)」
서동 · 강의 · 조서교 · 고아랍계수 · 하영년 · 희탑랍유록 · 육현
서용의 · 허경징 · 원창 · 토묵특입산 · 최가연원
471권 「성선회등전(盛宣懷等傳)」
472권 「육윤상등전(陸潤庠等傳)」
성선회 · 서징
육윤상 · 세속 · 이극탄 · 양정분 · 서방 · 노내선 · 심증식
473권 「장훈등전(張勳等傳)」
474권 「오삼계등전(吳三桂等傳)」
475권 「홍수전전(洪秀全傳)」
장훈 · 강유위
오삼계 · 경정충 · 상지신 · 손연령
홍수전
476·477·478·479권 「순리전(循吏傳)」
백등명 ,탕가상 임진단 우종요, · 송필달 · 육재신 · 장목 ,장훈(張塤), · 진여함 · 목수 ,진시림, · 요문섭 ,황정린, · 낙종린 ,최종태 조진조, · 조길사 · 장근 · 강고 ,장극억 가박, · 소사요 ,위입정 고음작 근양, · 최화 · 주중횡 · 유계 · 도원순 · 요기형 · 동국롱 · 육사 · 공감 · 진덕영 · 예복전 · 장림 · 염요희 · 남정원 · 엽신 · 시초정 · 진경문 · 주인룡 · 동화 · 이위 · 사중훈 · 이대본 · 우운진 · 장견도 · 소대업 · 주극개 ,정기 강기연 언여사 주제화, · 왕휘조 ,여돈화 주휴도, · 유대신 · 오환채 · 기대규 · 소희증 · 장길안 ,이육창, · 공경한 · 개방필 · 사소등 · 이갱예 · 이병수 · 적상경 · 장돈인 · 정돈윤 · 이문경 · 유체중 ,유후, · 장기 ,석가소, · 유형 ,서동, · 요간지 · 오균 · 왕조겸 · 조근 · 계초만 · 장작남 · 운무기 · 서대영 · 우수매 · 하왈유 · 오응연 · 유병림 ,진숭지 하자령 소세본, · 이병도 ,유주 주근인 추종준 왕무훈, · 괴덕모 · 임달천 · 방대제 · 진호 · 양영서 · 임계 · 왕인복 · 주광제 · 냉정형 · 손보전 · 가소경 · 도관준 · 진문불 · 이소 · 장해 · 왕인감
480·481·482·483권 「유림전(儒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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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7·488·499·490·491·492·493·494·495·496권 「충의전(忠義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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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애신각라[2] 또는 을 뜻한다. 실제로도 생여진 완안부가 세운 금나라암바 아이신 구룬이라고 표기했다.[3] 국조 6조(六祖: 닝우타 버이러)의 부족들은 홍색 직물로 짠 허리띠를 맬 수 있었는데, 이를 교로(覺羅, 각라, 기오로)라고 불렀다.[4] 하필이면 이 여진어 발음을 음차할 때 쓰인 한자 愛新覺羅 때문에, 한때 국내에서는 《퇴마록》과 환빠의 영향으로 여진족 신라인설이 심도있게 논의된 적도 있었다. 당연히 여진어 발음 음차에 한자를 끌어다 쓴 것일뿐, 후금/청의 역사가 신라의 역사의 연장선인 것은 아니다. 물론 여진족/만주족에 신라인이나 고구려인이 개별적으로 참가했을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곧 만주족의 역사가 한민족에 포함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마치 프랑스 문화의 영향을 받은 노르만족이었던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를 정복해 잉글랜드 왕이 되었다고 해서 잉글랜드 역사를 프랑스 역사에 귀속시킬 수 없는 것과도 마찬가지이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5] 노이합적[6] 흔히 몽골식 이름인 몽케테무르 혹은 《조선왕조실록》에 실려있는 한국식 독음인 동맹가첩목아(童猛哥帖木兒)로 알려져 있다. 먼터무는 원래 조선 왕조의 영역인 함흥 주변에서부터 북쪽으로는 무단장송화강 유역까지 부족을 이끌고 다닌 여진족의 추장으로 결국 대륙의 동북부 지방 남부에 정착했다. 훗날 청나라에 의해 (肇祖) 원황제(原皇帝)로 추존되었다.[7] 사실 만주사를 언급할 때 이 점은 간과되고 있다. 한족이 만주를 복속시킨 것은 명나라가 거의 최초라고 할 수 있다.[8] 이는 후한때의 서량에 주둔하면서 강족 오랑캐를 막던 동탁의 행태와 비슷한데, 이런 이민족 방어를 맡은 장수가 군벌이 되는 현상은 한나라 시기부터 중국사 전반에 나타나는 현상이었고, 중앙 권력이 약화되면 바로 독립정권이 되었다. 청나라의 성조 강희제는 이것을 경계하여 삼번을 폐지하려 했고, 결국 삼번의 난을 겪은 이후에야 폐지할 수 있었다.[9] 이런 분가는 유목민 특유의 말자 상속에 기반한 듯하다. 즉, 누르하치는 장자였지만, 말자 상속을 선호하는 여진족 관습상,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추장이 되지 못했을 수도 있다.[10] 요동의 명나라는 여진족을 모병해 외인부대, 즉 고대 로마 제국의 포에데라티 비슷하게 운용했다. 임진왜란 때 이여송이 거느린 요동병도 상당수가 이런 여진족 또는 몽골병 출신이었다.[11] 또는 얼떨결에 포로로 잡힌 탁시와 기오창가가 명군에게 반란군으로 오인되어 처형당했다고도 한다.[12] 명나라에서는 조선이나 몽골과 무역을 하려면 칙령이 필요했다. 칙령 30통은 누르하치가 30번 외국과 교역할 수 있는 허가서였다.[13] 참고로 이 이성량의 아들이 바로 임진왜란조선에 파견된 이여송이다.[14] 자택에는 기생이 2,000여 명이나 있었고, 정원의 너비가 10리에 달했다고 한다.[15] 사실 이런 행태는 중국 역사를 통틀어 자주 일어나던 일이다. 이렇게 하다가 중앙 권력이 약화되면 바로 이런 군벌들이 중앙 권력에서 독립하여 대륙 전역에서 할거하곤 했다. 《삼국지》가 바로 이런 행태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16] 본인의 뿌리가 한국계인 성주 이씨인 것을 어느 정도 의식은 했다고 볼 수 있다.[17] 예허부는 끝까지 누르하치에게 복속을 거부한 마지막 해서여진 부족이었다. 즉 명나라는 이간책을 써서 여진 통합을 방해한 것이다.[18] 웅정필이 이성량을 대체하기 위해 보낸 인물이었다.[19]광해군일기》 1618년 4월 16일[20] 아이러니하게도 이영방의 (전처의) 아들 이연경은 오히려 아버지를 혐오하고, 후금의 장수로 일하면서 명나라와 내통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되었다.[21] 한국에는 잘 안 알려졌지만 중국에서는 범문정제갈량, 강태공, 관중, 장량과 견줄 수 있는 모사로 보기도 한다. #[22] 이 황사바람을 운이라고 치부하는 사람이 있지만, 이 현상은 매년 봄마다 몽골 고원에서 만주 (및 한반도)로 부는 바람이며, 명나라나 후금이나 충분히 예측 가능한 일이었다. 이것을 유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는 것만 봐도 누르하치가 보통 지략을 가진게 아님을 알 수 있다.[23] 영원성 전투 항목에는 후금군 총병력이 16만 명이라고 되어 있으나, 산해관 입관 이전에 후금-청나라의 총 실전 병력은 10만 명을 넘긴 적이 없었다. 16만 명은 아마도 병사들에게 딸린 종이나 노비까지 합한 수일 것이다. 10년 후인 병자호란 때도 전투 병력은 6만 명이었고, 18년 후 도르곤오삼계의 인도로 산해관을 넘을 때도 마찬가지로 청군의 총병력은 6만 명 남짓했다.[24] 기록에 따르면 당시 명군의 화포에 맞아 사망한 사람은 누르하치가 아니라 그의 친족일 가능성이 보이기 때문이다. #[25] 다만 몽골의 칭기즈 칸이 낙마로 인해 머리를 다치는 큰 부상을 입었음에도 서하에 대한 공격을 계속 진행해 멸망시킨 경우가 있기 때문에 무작정 가능성을 부인하기도 어렵다.[26] 아직 공성 능력이 충분하지 않았던 후금 입장에서 영원성 전투 패배는 자신들의 약점을 그대로 노출한 것으로, 누르하치에게는 사실상 산해관 입성이 저지됐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27] 제1민족 바로 밑의 제2민족으로서, 원나라에서의 색목인, 고대 로마에서 이탈리아가 확실히 본국으로 자리매김하던 공화정 말기에서 군인황제시대까지의 그리스인과 비슷하다. 청나라 조정은 대외적으로는 만한(몽) 일체를 주장하면서 관리의 수도 만족+몽고족 대 한족의 동수로 맞추었지만, 한족과 만주족+몽고족 인구비는 거의 1:100에 가깝기 때문에 차별이 있었다.[28] 《만주실록》 삽화에 그려진 모습과 활과 화살의 길이에서 키가 크지 않음을 알 수가 있다. 게다가 머리도 크고 하체 또한 짧다. 물론 당시 만주족 평균 신장인 165 cm보단 큰 170 cm 정도로, 주변 장수들이 거구인 거지 단신은 아니었다.[29] 가늘고 길며 눈초리가 위로 째진 눈.[30] 본래 이름은 피양구이지만, 암바 알춘 구룬(대금국)에서도 알 수 있는 암바(대-, 크다)라는 접두어가 붙어 암피양구 > 안피양구가 되었다고 한다.[31] 만주어로는 순자암반(ᠰᡠᠨᡷᠠ ᠠᠮᠪᠠᠨ)이라고 불렸다.[32] 혹은 홍삼의 가공법을 조선으로부터 전수받았을 수도 있다.[33] 실제로 청나라 시절 편찬된 《만주원류고》에서는 백제와 신라 등 삼한이 만주의 원류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고, 이전 금나라의 역사를 편찬한 《금사》에서도 완안씨 황실의 조상이 고려에서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34] 실제로 몽골 제국이 이와 비슷하게 원군을 빌미로 고려와 접촉하고 영향력을 확대한 후 침략하여 굴복시켰던 예가 있다. 하물며 조선 중앙 정부에서 이걸 눈치 못 챌 리가 없다. 다만 최소한 첫 번째 원정 제안은 실제로 도우려 했을 가능성이 있는 게, 전쟁 초반에는 가토 기요마사의 군이 만주까지 넘어와서 누르하치의 거점과 매우 가까운 성을 잠시 점령했던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만약 당시 일본군이 전력으로 만주를 공격했다면 누르하치도 말려들게 될 것이었고, 당시 힘을 기르고 있었던 누르하치의 입장에서는 만주에 쳐들어오기 전 조선에서 미리 일본군을 제압하는 것이 최선이었기 때문이다.[35] 나중에 강홍립은 누르하치 앞에서 의자에 앉을 수 있었다고 한다.[36] 아이신기오로 아민 지휘[37] 광해군 13년(1621) 12월 21일[38] 중국의 사료에는 조선 조정의 허가를 받고 모문룡을 추격했다고 했으나, 《조선왕조실록》에는 후금이 무단으로 넘어왔고 후금군은 용천 관아를 털어갔으나 조선의 인명은 살상하지 않고 명군만 공격했다고 한다. 이때 명군 및 유민 500여 명이 후금군에게 피살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그다지 상세하게 나와았지 않으나, 후금측의 사료를 감안한다면 광해군이 조선군에게 대응하지 말라고 지시했기 때문에 조선과 후금의 교전은 없었던 듯하다.[39] 당나라와 명나라의 약 50여 년. 대체로 당나라는 당태종 시기와 당고종 시기를, 명나라는 성조 영락제 시기를 전성기로 본다.[40] 요나라금나라[41] 원나라 30~40년[42] 이성량의 아들에 딸을 시집보내서 사돈이 되었다.[43] 하지만 아민 같은 생존자도 있었다.[44] 이 간통의 대상이 도르곤의 생모인 울라나라씨라는 이야기가 있다. 울라나라씨는 그 후 복진의 지위를 잃어버린다.[45] 조운역은 계속 바뀐다.[46] 하지만 어떤 나라든 흥망성쇠를 겪고 훗날 자신이 창건한 나라가 당할 지 아는 독자들의 입장에선 그저 허망하기 그지없는 모습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