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북원 (문단 편집) == 역사 == {{{#!wiki style="margin:0 0 1em 1em;float:right;font-size:.95em;text-align:center;width:400px;max-width:100%;min-width:40%;" [[파일:북로(오이라트와 타타르)의 영역 지도.png|width=100%]]{{{#!wiki style="margin:0 0 5px 0;" {{{#a021cc ■}}} {{{-1 15세기경 [[오이라트]]의 판도}}}[br]{{{#0030a1 ■}}} {{{-1 '''16세기경 [[몽골]]의 판도'''}}}}}}}}} 1368년 [[원혜종|혜종]]은 강남에서부터 급격히 세를 불려가면서 북진을 해온 [[명나라]]의 맹공을 이겨내지 못했다. 결국 수도 [[베이징시|대도]]를 빼앗긴 채 [[만리장성]] 이북의 [[상도]][* 상도는 몽골이 전 중국을 완전히 차지하기 전에 원나라의 수도였고, 통일 후에는 여름 피서용 수도로 쓰이던 도시였다([[상도 유적]] 문서 참조).]로 도주했고, 곧 응창(應昌)에서 할거(割據)했다. 이로써 중원은 완전히 명나라의 손에 떨어지게 되었다. 혜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원소종|소종]] 아유시리다라 카안은 외몽골로 들어갔고, 이후 [[1372년]]에 명나라의 원정군을 격파하며 [[산서성]]을 되찾기도 했다. 하지만 소종과 명장 [[코케 테무르]]의 사후에 북원은 급격히 힘을 잃어갔고, 중국 진출을 단념해야 했다. 북원의 뒷배 역할을 착실히 해주던 만주의 군벌인 잘라이르 [[나하추]]마저 명군의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항복하자 북원의 세력은 더욱 쇠락할 수 밖에 없었고, 끝내 [[1388년]] 부이르 누르의 동북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명군에게 대패했다. 소종의 뒤를 이은 [[천원제]] 토구스 테무르 카안도 도주하던 중 툴 강 기슭에서 아리크부카의 후손인 [[예수데르]]에게 피살당하면서 북원은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다. 예수데르는 [[조리그투 칸]]으로 즉위해 대칸위를 이었으나 북원의 황제 지위는 본래 세조 [[쿠빌라이 칸]]이 선포한 것이었고, 예수데르 자신은 쿠빌라이 칸에 의해 권력 경쟁에서 밀려난 [[아리크부카]]의 후손이었으므로 중원 황제의 칭호를 포기하고, 몽골의 대칸 지위만 유지했다. 이후 몽골은 차하르족, 할하족, 우량카이족을 중심으로 한 부족 연맹으로 전락했다. 그리고 [[쿠빌라이 칸]] 황통과 [[아리크부카]] 황통이 대칸의 자리를 가지고 끊임없이 경쟁하다가 [[다얀 칸]]의 치세 이후 쿠빌라이 황통이 다시 대칸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명나라]]에서는 북원이 멸망해 몽골 부족 연맹으로 분리되자, '[[몽골]]'을 원래 호칭인 '몽고' 대신에 '달단'([[타타르]])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는 어디까지나 명나라에서 부르던 명칭으로, 여전히 몽골족 스스로는 '대원'이나 '몽골'이라고 불렀으며, 만주에 사는 [[여진족]](후의 [[만주족]]) 역시 북원을 '투메드 몽골' 내지는 "우브르 몽골"이라고 했다. 명나라에서 몽골을 타타르로 불렀던 것은 '''타타르'''가 '''야만인'''같은 멸칭으로 통용되었기 때문이다. 원래의 타타르족은 [[카마그 몽골]]족과 대대로 원수지간이었고, 결국 칭기즈 칸에 의해 멸족당하며 몽골족에 흡수되었는데 몽골에게 '타타르'란 용어는 바로 '야만인' 정도의 멸칭으로 사용되었다. 몽골이 중국을 정복하자 '야만인'이란 의미로 타타르라는 말이 중국에 퍼지기 시작했는데, 명나라가 성립된 이후, 몽골을 경멸하는 용어로 '타타르'를 호칭하기 시작하더니 아예 북방 유목민족 전체를 비하하는 용어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청나라를 건국한 만주족도 명나라에서는 타타르라고 불렀다. 비유하자면 우리나라에서 북방민족을 비하해서 불렀던 '''오랑캐'''란 말과 같다고 보면 된다. 당연히 [[청나라]]에서는 '달단'이라는 명칭이 폐기되었고, 한자 표기 역시 '달단'에서 '몽고'(몽골)로 되돌아갔다. 물론 여기서의 달단은 내몽골을 말하는 것으로 [[러시아]]의 타타르인과는 무관하며, 현재의 [[내몽골 자치구]]와 관련이 있고, [[칭기즈 칸]]의 동생인 [[카사르]]의 후손들이다. 줄곧 [[오이라트]]와 세력을 겨루었으며, 한 때 [[오이라트]] 출신이자 훗날 다이온타슨다이 칸이 되는 [[에센 타이시]]는 일시적으로 몽골의 제부족들을 제압하고, 명나라를 상대로 [[토목의 변]]을 일으켜 [[정통제|명나라 황제]]를 사로잡는 등 당대에 큰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이렇듯 분열하며, 오이라트에게 권력을 내주기도 하다가 몽골 부족을 재통일한 칸은 [[다얀 칸]]이었다. '다얀'이라는 이름도 한자인 '대원'(大元)을 몽골어로 음차한 것이었으며 그의 아내인 만투하이는 현명한 왕비로 유명해 몽골에서 존경받고 있다. 다얀 칸은 [[에센 타이시]] 때부터 정립되어가던 6대 부락을 6만호 체제로 재정비하고, 몽골 제국 부활의 토대를 닦아 나갔다. [[다얀 칸]]의 손자인 [[알탄 칸]]이 '''[[경술의 변]]'''을 일으키면서 명나라를 공격, 한때 [[허베이성]]과 [[산시성(산서성)|산시성]]을 수복하는 등 예전의 기세를 많이 회복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알탄 칸때문에 대칸의 권력이 쇠퇴해 몽골 6부족은 다시 분열되었고, 17세기경 수십 년의 시간차를 두고 [[만주족]]의 [[청나라]]에 귀부하며 운명이 갈라졌다. 어차피 [[몽골인]]은 청나라를 [[중국]]이 아닌 만주인으로 봐서 가능했던 일이었고, 훗날 청나라가 멸망하자 독립했다. 이후 만주족의 한(汗)이자 [[청나라]]의 황제가 대대로 몽골의 칸위에 올랐다. 그래서 청나라 황제는 [[한족]]에게는 중국식 황제호를 썼으나 [[만주족]]에게는 만주식 한호, [[몽골인]]에게는 몽골식 칸호를 썼다. 한 예로 태조 [[누르하치]]는 [[후금]]을 건국하면서 중국식 연호가 아니라 몽골식으로 "텡그린 술데투"라고 연호를 선포했으며. 태종 [[홍타이지]]부터는 정식으로 칸호로 스스로 호칭했다. [[청태종]]의 칸호는 "복다 카간"이다. 청나라는 공문서도 만주어, 몽골어, 중국어로 기록하는 등 3국을 모두 정복한 정복왕조로서의 정체성을 이어갔다. [include(틀:다른 뜻1, other1=이후 역사, rd1=청나라/역사, anchor1=몽골 복속)]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