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 동문리 마애삼존불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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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국보 제307호
태안 동문리 마애삼존불입상
泰安 東門里 磨崖三尊佛立像


소재지
충청남도 태안군 태안읍 동문리 산 5
분류
유물 / 불교조각 / 석조 / 불상
수량/면적
1좌(3구)
지정연도
2004년 8월 31일
제작시기
삼국시대(6세기 말∼7세기 초)

파일:국보307호태안동문리마애삼존불입상.jpg

1. 개요
2. 내용
3. 외부 링크
4. 국보 제307호


1. 개요[편집]


泰安 東門里 磨崖三尊佛立像. 태안 동문리 마애삼존불입상은 충청남도 태안군 백화산에 위치한 바위에 새겨진 삼존불상(마애불)으로 백제불상 조각 작품으로 여겨진다.

태안 동문리 마애삼존불입상은 1966년에 보물 제432호 태안마애삼존불이라는 명칭으로 지정되었다가, 2004년에 국보 제307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2. 내용[편집]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과 함께 백제를 대표하는 불상으로 알려져 있으며 서산 마애여래삼존상보다도 더 이른 시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한반도에 존재하는 마애불 가운데서 가장 초기 작품 중 하나로 판단되며, 그 형식에서도 아주 특수한 모습을 보이는 작품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삼존불은 크게 묘사된 석가모니와 같은 본존불의 좌우로 보살이 보좌하고 있는 모습[1]인데, 본 마애삼존불입상은 중앙에 위치한 작은 보살의 좌우로 중앙 보살보다 큰 여래입상이 있는 대단히 특이한 형태이다. 이러한 형태는 현재까지 발견된 마애불 중에서 전세계적으로도 유일한 형태로 알려져 있다.

태안 마애삼존상을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으로 하여 좌우를 나눴을 때[2], 좌측의 여래입상의 크기는 2.5m, 가운데 보살은 1.8m, 우측 여래입상은 2.4m의 크기다. 불상들의 얼굴이나 상반신이나 모두 세월의 흐르는 동안 사람들의 손결[3]과 자연적인 침식 등에 의해 많이 손상 되었지만, 불상이 취한 자세나 대략적인 표정, 지니고 있는 장신구는 여전히 알아 볼 수 있다.

세 분의 불상 중 좌측은 뒤로 커다란 광배가 있고 시무외 여원인(施無畏 與願印 : 손바닥을 편 오른손을 들어 밖으로 향하는 자세)의 수인을 취하며 미소 짓고 있고, 가운데는 머리에는 보관을 쓰고는 보주를 양손으로 감싸 들고 있는 봉보주인(捧寶珠印)을 하고 있으며, 우측은 미소 지으며 약합 같은 둥근 단지를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왼쪽 불상은 아미타여래(또는 석가여래), 가운데 불상은 관세음보살, 우측 불상은 약사여래일 것으로 보고 있다.

파일:국보307호태안동문리마애삼존불입상발굴전.jpg
태안 동문리 마애삼존불입상의 보수 전 모습. 무릎 아래로 땅 속에 묻혀 있는 것이 보인다.
본 마애삼존상을 보수 및 정비하기 전까지는 불상의 무릎 아래가 땅 속에 묻혀 있었지만, 보수 과정에서 흙을 걷어내고 나니 선명한 연꽃모양의 대좌가 드러났다. 땅 속에 묻혀 있던 탓에 세월의 손길을 덜 타서 연꽃 대좌는 꽤 뚜렷하게 남아 있다. 이와 같이 불상들의 하단부가 드러남에 따라 불상들의 배치도 임의대로 한 것이 아니라 상당히 신경써서 만들었다는 것이 확인되는데, 작은 보살이 좌우의 큰 여래들 사이에 끼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뒤 편에 서있는 구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각 불상들 간의 크기 차이와 함께, 비록 보살을 중앙에 모셨음에도 불구하고 좌우 여래보다 더 강조 할 수는 없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된다.

태안 동문리 마애삼존불입상에 대해 전하는 변변한 기록이 없어 제작 연대를 정확히 알기는 어렵고, 만들어진지 천 년도 훨씬 넘어 세월의 풍파 속에서 삼존상이 여기저기 많이 훼손되기는 했다. 하지만 불상의 특징적인 표현 기법은 여전히 알아 볼 수 있기에 이를 통해서 제작 시기에 대한 대략적인 추정이 가능하다. 불상들의 의복 표현이 제작 연대를 가늠할 수 있게 해주는데, 좌측 여래상은 옷의 끝자락이 왼쪽 손목으로만 넘어간 북위식(北魏式) 착의법을 하고 있는데 반하여, 우측 여래상은 한쪽 끝이 손목과 왼쪽 어깨를 모두 감싸고 넘어간 북제식(北齊式) 착의법을 하고 있다. 한반도 불상의 경우 대개 북위식 착의법은 6세기 후반 무렵에, 북제식 착의법은 7세기 전반 무렵에 나타난다.[4] 따라서 본 마애삼존상을 7세기 초엽의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서산 마애여래삼존상도 이와 비슷한 시기의 작품으로 추정되지만, 태안 마애여래삼존상이 스타일 측면에서 서산 마애삼존상보다 더 투박하고 조형은 비교적 단순하며 정형화된 구도를 온전히 따르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보다 조금 더 선행하여 만들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5]

태안 동문리 마애삼존불입상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이미 1966년 2월 28일에 보물 제432호로 지정되었다가, 본 마애삼존상이 가지는 구도상의 특수성과 현존하는 백제의 가장 오래된 마애불상이자 한반도의 마애불상 가운데 가장 초기작 중 하나로 꼽힌다는 점 등의 역사적 중요성을 고려하여 2004년 8월 31일에 국보 제307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3. 외부 링크[편집]




4. 국보 제307호[편집]



우리나라 마애불상의 초기 예로 부채꼴 바위 면에 사각형 감실을 마련하여 중앙에 보살상을 두고 좌우에 불상을 배치해 놓음으로써, 1구의 불상과 2구의 보살상으로 이루어지는 일반적인 삼존불상과 달리 2구의 불입상과 1구의 보살입상이 한 조를 이루는 특이한 삼존불상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2구의 불입상은 양감 풍부한 얼굴에 크게 번지는 미소, 넓게 벌어진 당당한 어깨와 장대한 체구, U자형 주름과 y형 내의가 보이는 착의법, 도톰한 듯 날카로운 대좌의 연꽃무늬 등 세부적으로는 거의 동일한 양식 특징을 보인다.

좌우 두 불상 사이에 끼여 있는 듯 뒤로 물러나 작게 새겨진 보살입상은 높은 관에 아무런 무늬도 나타나 보이지 않지만 본래는 장식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타원형으로 길고 통통한 얼굴은 잔잔한 미소를 머금어 원만상이다. 어깨를 덮어 내린 천의는 길게 내려와 무릎 부분에서 X자형으로 교차하며 묵중하게 처리되었으며 배 앞에 모은 두 손은 오른손을 위로 하여 보주를 감싸 쥔 이른바 봉보주인(捧寶珠印)을 나타내고 있다.

불신의 하반부가 노출되어 백제시대의 연화대좌가 확인됨으로써 그 도상적 가치를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다. 중국과의 교류상 요충지에 자리함으로써 6세기 중반 경 중국 북제양식 불상과의 영향 관계 파악에 매우 중요한 작품이며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국보 제84호)에 선행하는 조형양식을 지닌 백제 최고(最古)의 마애불상이란 점에서 국보로서의 가치가 인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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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를 협시불이라고 한다.[2] 이하에서 말하는 좌우는 본 마애삼존상을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으로 한다.[3] 불상을 갈아서 나온 돌가루를 먹으면 아들을 낳거나 병이 낫는다는 민간신앙이 있었고 이 때문에 불상이 훼손 되었다고 한다.[4] 출처: 한국 미의 재발견 - 불교 조각, 2003. 12. 31., 강우방, 곽동석, 민병찬[5] 불상을 조성하는 정형화된 방식이 지방에까진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본 불상이 독자적인 형식을 보이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