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공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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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925년 4월 17일 창건된 한반도의 공산주의 정당이자 독립운동 단체. 1928년 일제의 탄압으로 해산되었지만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으로 1930 - 1940년대 독립운동을 지속했다.자세한 정보 조선공산당원 및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활동가들은 6.10 만세 운동, 광주학생항일운동과 그 연장선인 경성 여학생 운동 등의 독립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국내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광복 후 1945년 8월 16일과 8월 20일 각각 장안파와 재건파가 출범하였다. 9월 8일 열성자대회를 열어 통합문제를 논의하여 9월 11일 조선공산당이 정식 재건되었다. 독립운동 공로를 대중에게 인정받은 조선공산당은 최대 정당이 되었다. 그러나 미군정이 조작한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이미지가 악화되어 1946년 11월 23일 해산되었다.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은 수십 년간 조선공산당에 대한 이미지 조작에 이용되었으나 임성욱이 박사학위 논문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로 조작된 사건임을 밝혔다.
대한민국은 일제강점기 조선공산당 활동 및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독립운동으로 인정하여 조선공산당원에게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수여하고 독립유공자로 지정하고 있다.
<경성트로이카>를 쓰기 위해 일제 중반기 이후 국내의 항일운동을 공부하면서 여러 측면에서 놀랐다. 첫째는 1920년대 후반 이후 해방까지 민족주의 진영의 항일운동이 한심할 정도로 지리멸렬했다는 점이요. 둘째는 일제하 사회주의 운동이 예상보다 훨씬 깊고 넓은 반경을 가졌다는 점이다. 그러나 가장 놀라운 것은 이 시기 사회주의운동사에 대한 은폐와 외면이 경악할 수준이라는 점이었다. 역사박물관에 가보면 1920년대 이후 국내의 항일운동은 전무한 것처럼 보인다.[14]
1930년대 검거된 치안유지법 위반자가 해마다 수천 명임에도 그 대다수가 사회주의자라는 이유로 철저히 제외된 것이다.
2. 1920년대 공산주의 배경[편집]
한국 사회주의 운동의 기원에 대해 1980년대까지의 학계 연구는 사회주의와 민족주의를 대립하는 운동으로 봤지만, 1990년대 이후 학계 연구로 식민지의 특수성으로 인해 한국 사회주의는 민족주의의 한 분파에서 출발했음이 밝혀졌음을 이준식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가 말하는 한국 사회주의의 기원에 대해 밝힌 "역사 연구자들의 노력"은 임경석 교수의 연구가 대표적이다.
정부가 뒤늦게 사회주의자를 독립유공자로 지정하게 된 데에는(중략)사회주의자로 분류되는 혁명가 대부분이 계급 혁명에 앞서 민족 혁명을 주장하고 그것의 실현을 위해 온몸을 바쳐 싸웠다는 사실이 역사 연구자들의 노력에 의해 하나둘 밝혀지면서 포상의 근거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중략) 사회주의 계열의 운동조차 그 출발점은 사실상 민족주의였다.
1980년대 중반까지 사회주의운동사 연구를 주도해 온 몇몇 연구자들은 사회주의 운동이 코민테른과 소련의 지도 아래 계급 혁명을 추구한 것으로 보았다.(대표적인 보기가 서대숙, 《한국공산주의운동사 연구》, 김준엽•김창순, 《한국공산주의운동사》, 로버트 스칼라피노•이정식, 《한국공산주의운동사》 등이다.) (중략) 그러나 일제강점기 사회주의자들이 꿈꾼 것은 계급 차별이 없는 사회만은 아니었다. 그것보다 더 강력하게 당시 사회주의자들을 혁명 운동으로 이끈 것은 민족 해방에의 열정이었다. 기본적으로 일제강점기 사회주의자들은 민족 문제 해결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인식하고 있었다. 사회주의자에게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민족 해방이었다. 민족 해방을 이룬 뒤 계급 해방을 이루자는 일종의 2단계 혁명론이 대세를 이루었다.
흥미로운 것은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자들이 이전부터 존재하던 독립 운동의 한 분파에서 갈라져 나온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제1차 세계 대전을 전후해 고양되고 있는 국제 혁명 운동의 분위기를 적극 활용하려고 한 일부 혁명적 민족주의자들이 사회주의를 새로운 독립운동의 이념으로 받아들임으로써 한국 사회주의 운동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민족의 독립을 위한 활동을 벌이다가 사회주의를 수용하게 된 사회주의자들에게 운동의 일차적인 과제는 독립이었다. 민족 해방을 위한 새로운 이념으로 사회주의를 받아들였다는 것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사회주의 운동에서 활약한 인물들의 출신 배경을 살펴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찾아볼 수 있다. 상당수가 사회주의를 수용하기 이전에 이미 독립 운동에 종사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준식, 독립운동가 김한 학술회의 기조발제
독립운동가 중 급진적 분파가 공산주의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인다. 1920년대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연구하고 공부하는 모임과 독서회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여기에 힘 입어 공산주의 운동가들은 공산주의 단체를 세우기 시작했다. 국내에서는 서울청년회', '신사상연구회' 등이 세워졌고, 일본에서는 유학생을 중심으로 '북성회'가 만들어졌다. '서울청년회'는 서울파, '신사상연구회'는 화요파, '북성회'는 북풍파의 기원이 된다. 이런 단체들은 국내외 공산주의 운동의 전파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해주었고, 국외에 있던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와도 관계를 맺으며 성장했다.[15] 1924년에는 러시아 한인 2세들을 주축으로 조선노동당이 결성되었다.
박찬승 교수에 따르면 독립운동가들이 사회주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다음 이유 때문이다. 우선 제국주의 열강들이 조선 독립의 열망을 철저히 외면하고 있었던 반면, 소련 정부는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했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식민지 조선 대중들의 처지가 사회주의 이념 확산의 토양이 되었다. 농민 · 노동자 등 절대 다수의 대중은 민족적 · 계급적 억압을 받고 있었다. 그들의 비참한 처지를 개선할 길은 해방과 혁명의 길 외에는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피지배계급 중심의 혁명철학인 사회주의 이념은 그 성격상 식민지 조선의 대중들에게 효과적인 무기를 제공하며 그들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안재성은 독립운동가들을 영웅이라 칭하며 그들이 공산주의를 받아들인 것에 대해《잃어버린 한국 현대사》에서 다음과 같이 평한다. 다음 중 '자본주의의 야만성'이란 사회주의와 경쟁하며 사회주의적 요소를 받아들이고 노동운동가들의 노력으로 복지 제도를 만든 2020년대의 자본주의가 아니라 노동착취로 노동자들이 대량 죽어나가던 시절의 자본주의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한 날 것 그대로의 자본주의가 있던 시절이 바로 조선공산당의 활동기이다. 실제로 아래 경성트로이카 부분에서 이재유는 여공들이 높은 비율로 열악한 노동환경 때문에 죽었다고 말한다.
이 책은 죽은 영웅들의 이야기다. 사람들은 영웅에게서 자신들과 같은 평범하고 이기적인 모습을 찾으려 애쓴다. 그러나 영웅들의 삶은 평범한 이들의 그것과 다른 게 분명하다. 영웅을 부정하고 싶은 우리네 보통사람들의 심정대로 어떤 위대한 인간도, 완벽한 이념도, 불변의 도덕이나 진리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역사의 경험이다. 공산주의 이론과 실천이 가진 맹점들, 치명적인 오류와 잘못들에 대해서는 더 많은 아픈 지적을 나열할 수 있다. 다만 어느 누구보다 열심히 일제에 맞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운 그들의 생애를 기록해두고 싶은 마음이다. 민족의 자유를 위해 젊음을 바친 헌신성을 본받자는 뜻만은 아니다. 4천년 역사상 처음으로 평등의 가치를 체계화하여 자본주의의 야만성과 투쟁했던 이들이기에 더욱 소중하다. 비록 오류와 잘못도 많지만 우리 역사에 평등의 가치를 본격적으로 도입한 이들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고 본다. 이 책을 인류보편의 가치인 자유와 평등을 위해 싸운, 그러나 시대의 한계에 갇혀 비극적으로 죽어간 영령들에게 바친다.
안재성,《잃어버린 한국 현대사》머리말
공산주의의 견제로 자본주의가 반강제로나마 도덕성을 갖추어 오늘날의 민중이 민권을 확보하게 되었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일제강점기 이관술을 포함한 공산주의자들이 주장했던 내용이 오늘날 상당 부분 수용되고 있는 현실이 이를 말해준다.
안재성,《이관술 1902-1950》
3. 1925년 창당[편집]
사회주의사 위주로 연구하는 역사학자들은 1, 2, 3, 4차 조선공산당을 나누는 것은 일본 경찰 관점이라며 나누지 않는 것이 조선공산당원 당사자 입장이라 학술적으로 더 엄밀하다고 지적하나, 박찬승 등 역사학자(사회주의사 위주 연구자는 아님)가 쓴 <한국독립운동사> 등 대중이 많이 보는 책은 아직 나눠 쓰고 결정적으로 목차를 나누는 것이 가독성이 훨씬 좋기 때문에 일단 계속 나눠 쓴다.
3.1. 1차 조선공산당[편집]
코민테른은 1922년 12월 블라디보스토크에 코민테른 산하 꼬르뷰로(고려국)를 설치했다. 꼬르뷰로의 지시에 따라 김재봉 · 김찬 · 신철 등이 국내에 파견되어, 1923년 6월경 조선공산당의 준비기관으로서 꼬르뷰로 국내부 청년회를 조직했다. 주로 화요회계와 북풍회계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청년회와 노농단체 내부에 조직 기반을 넓혀, 1925년 조선공산당이 조직될 즈음에는 서울에 8개, 지방에 10개의 당 야체이카(3~5명으로 이루어진 세포 조직)와 130명의 당원을 확보하고 있었다.출처: 박찬승
한편 서울청년회계는 별도로 공산당 결성을 추진했다. 서울청년회계도 청년회와 노농단체를 중심으로 조직 기반을 넓혀, 이를 토대로 1924년 5월 고려공산동맹을 조직했다. 꼬르뷰로 국내부와 서울청년회계는 경쟁적으로 전위당을 준비하고 있었다.출처: 박찬승 참고로 서울파 연구는 전명혁 교수의 연구가 대표적이다.
꼬르뷰로 국내부는 4단체(화요회, 북풍회, 조선노동당, 무산자동맹회) 합동을 추진하고,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와 조선기자대회를 추진했다. 서울에서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와 전조선기자대회가 열려 경찰의 눈이 그쪽으로 쏠려 있는 가운데, 1925년 4월 17일 오후 중국음식점 아서원에서 조선공산당 창당대회가 비밀리에 열렸다. 김재봉을 책임비서로 선출하고, 김찬 · 조동호 · 김약수 · 정운해 · 주종건 · 유진희 등 7명으로 중앙집행위원회를 구성했다.출처: 박찬승 다음 날인 4월 18일에는 박헌영의 집에서 공산주의자 20명이 모여 조선공산당 산하 청년조직인 고려공산청년회를 조직했다.[16] 4월 18일 김찬의 집에서 제1차 중앙집행위원회를 열어 각 부문에 야체이카를 조직할 사람들을 뽑았다.
1920년대는 문화 통치기라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 같은 시위가 가능했다. 일제의 폭압적 통치는 1930년대 이후부터 심해져 1940년대 전시체제 하 극에 달한다(민족 말살 통치기).
조선공산당은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청의 창립 인준을 받기 위해 조동호를 정식 대표로, 조봉암을 부대표로 지명하여 모스크바에 파견했다. 1926년 3월 코민테른은 조선공산당을 코민테른 지부로서 인정하고, 여타 그룹들을 공산단체로 인정하면서 통일된 당을 만들 것을 촉구했다.출처: 박찬승
1차 조선공산당은 수차례 집행위원회를 열어 기관지 발행, 만주총국 설립, 고려공청 지원, 노농총동맹 분립 등을 논의했다. 고려공청은 조선청년총동맹에 들어가 27개의 군 동맹과 9개의 도 연맹을 조직하고 모스크바 공산대학에 21명의 학생을 파견했다.출처: 박찬승
조선총독부는 1925년 5월 치안유지법을 실시한다고 공포했다. 치안유지법 제1조는 “국체를 변혁 또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할 목적으로 결사를 조직한다든가 또는 그 사정을 알고 이에 가입하는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에 처한다”라고 규정했다. 공산주의운동가들을 탄압하기 위한 법령이었다. 이후 조선의 사회주의운동가들은 대부분 치안유지법 위반의 사상범으로 투옥되었다.출처: 박찬승
1925년 11월 신의주 고려공청 회원의 부주의한 경찰 폭행 사건으로 조선공산당에서 코민테른에 보내는 문서가 경찰에 발각되어 조선공산당의 실체와 조직이 드러나 대대적인 검거선풍이 불었다. 그 결과 당 책임비서 김재봉, 고려공청 책임비서 박헌영 등 모두 220명이 검거되었다. 이 가운데 치안유지법과 정치범처벌령, 출판법 위반 등으로 101명이 재판에 회부되어 83명이 유죄판결을 받고 2명은 옥중에서 사망했다.출처: 박찬승
3.2. 2차 조선공산당[편집]
제1차 조선공산당의 김재봉, 김찬, 주종건 등은 검거되기 전에 후계당 조직을 준비했다. 그리하여 1925년 12월 말부터 1926년 1월 초 사이에 강달영(강달룡)을 책임비서로, 이준태 · 이봉수 · 김철수 · 홍남표 · 권오설 등을 중앙집행위원으로 하는 제2차 조선공산당이 구성되었다. 고려공청은 1차당의 중앙집행위원이던 권오설을 책임비서로 하여 6인으로 구성된 중앙집행위를 새로 조직했다. 이후 2차당은 조직을 확장해 146명의 당원과 119명의 후보당원을 확보했다. 또 해외에도 조직을 만들어 만주에 만주부, 도쿄와 상하이에 임시연락부를 설치했다. 2차당은 민족주의자들과의 연대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출처: 박찬승
2차당이 조직한 6.10 만세운동은 조선공산당의 가장 성공적인 대중투쟁이었다. 6.10 만세운동 투쟁지도특별위원회는 상하이로 피신한 김찬 · 김단야, 그리고 조봉암 등의 1차당 지도부의 지도를 받고, 권동진 등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의 지원을 받으면서 여러 종의 삐라를 만드는 등 전국적 규모의 대중시위를 준비했다.출처: 박찬승
조선공산당은 천도교 구파, 조선노농총동맹과 연대하여 6.10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했다. 그에 따라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인 권오설이 운동의 총책임을 맡게 되었다. 권오설은 지방에서는 천도교나 조선노농총동맹 조직에 의지하고, 서울에서는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조직을 이용한다는 계획을 세웠다.출처: 박찬승
고려공산청년회의 지도를 받는 조선학생과학연구회와 경성의 각 학교 대표 40여 명은 5월 20일 모임을 갖고 투쟁 방법 및 자금 조달 등에 대해 의논했다. 학생들은 박두종(YMCA 영어과), 이천진(경성제국대학), 박하균(연희전문학교), 이병립(연희전문), 이선호(중앙고등보통학교) 등이 선임되었다. 이들은 박용규(중앙고보), 곽대형(중동학교) 등이 따로 운동을 준비하는 것을 알고, 서로 역할을 분담했다. 그런데 천도교에서 준비하던 전단이 일본 경찰에 의해 우연히 발각되고, 이어서 조선공산당 조직이 6월 6일 발각되는 바람에 준비해둔 전단은 모두 압수되었다. 이에 조선학생과학연구회 측은 급히 격문과 전단을 다시 인쇄했다. 또 6월 8일과 9일, 태극기와 조선독립만세기, 격문 약 1만 매를 제작했다. 중앙고보의 이선호는 10일 아침 학교에서 류면희, 임종업, 이현상 등에게 이것을 나누어주고 시위현장에서 뿌리도록 지시했다.출처: 박찬승
10일 오전 8시 반 순종황제의 장례 행렬이 종로 3가 단성사 앞을 막 통과할 즈음, 이선호가 길로 튀어나와 격문을 뿌리고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류면희 · 임종업 · 이현상 등은 격문을 뿌리고 만세를 선도했다. 연도에 도열해 있던 중앙고등보통학교 학생들도 만세를 불렀다.출처: 박찬승
현재 세계 정세는 식민지 민중 대 제국주의 군벌의 투쟁과 무산자 계급 대 자본가 계급의 투쟁으로 전개되고 있다. 제국주의 군벌에 대한 식민지 민중의 투쟁은 민족적 정치적 해방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며, 자본가 계급에 대한 무산자 계급의 투쟁은 계급적 경제적 해방을 목적으로 한 것이다.
그러므로 식민지에 있어서는 민족 해방이 곧 계급 해방이고 정치적 해방이 곧 경제적 해방이라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식민지 민족이 총체적으로 무산자 계급이며 제국주의가 곧 자본주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는 당면한 적인 침략국 일본으로부터 정치적 경제적인 모든 권리를 탈환하지 않으면 죽음의 땅을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형제여! 자매여! 눈물을 그치고 규탄하라! 전 세계의 피압박 민족과 무산자 대중은 모두 함께 정의의 깃발을 들고 우리와 함께 보조를 맞춰나갈 것이며, 붕괴하고 있는 제국주의의 하나인 일본 지배 계급도 운명이 다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에게도 명백하다.(중략)
형제여! 자매여! 최후까지 싸워 완전 독립을 쟁쥐하자! 혁명적 민족운동자 단체 만세! 조선독립만세!
자세한 내용은 6.10 만세 운동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소설 삼대의 배경이다.
3.3. 3차 조선공산당[편집]
강달영을 포함한 100여명이 6.10 만세 운동 준비과정에서 체포되어 2차당은 와해됐다. 따라서 1926년 9월경 제2차 조선공산당의 중앙위원이던 김철수를 중심으로 제3차 조선공산당이 결성되었다. 3차 고려공청도 제2차 고려공청 회원이던 고광수를 중심으로 재조직되었다. 김철수와 고광수는 조직을 확대할 필요성을 느끼고 서울청년회계와 통일을 추진한다. 김철수는 상해계였으며 파벌 관념이 적었고, 전선 통일에 적극적이었다. 그에 따라 서울청년회계 신파(조기승 · 이인수 · 김병일 · 신철호 · 한명찬 등)는 제3차 조선공산당에 참여하게 되었다.또 1926년 여름 안광천 등 일본 유학생 출신의 일월회가 대거 귀국하여 국내 운동에 가세함으로써, 제3차 조선공산당은 이들로부터 인력을 충원 받았다.출처: 박찬승
1926년 12월에 열린 제2차 당대회에서 김철수가 책임비서직을 사임하고, 안광천을 책임비서로 한 중앙간부진이 새로이 선출되었다. 김철수는 당재건을 보고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갔다. 이후에도 제3차 조선공산당은 일제의 주시를 피하고 당내 기밀을 유지하기 위해 간부진을 자주 교체했다. 책임비서직은 김준연, 김세연 등으로 바뀌었다. 고려공청의 책임비서직도 고광수, 양명, 하필원, 김철 등의 순으로 바뀌었다. 그 밖에 3차당의 주요 간부진은 한위건 · 최익한 · 권태석 · 조기승 · 김월성 등이었다. 이들은 대체로 서울계 신파, 일월회계, 그리고 만주 고려공청파가 합세한 형태를 취했다. 이와 같이 3파가 연합한 이들 그룹을 세간에서는 이른바 ‘ML파’라고 불렀으며, 제3차 조선공산당도 흔히 ‘ML당’이라 불리게 되었다.출처: 박찬승
3차당은 강원도를 제외한 각도에 도 간부를 두었으며, 국내 야체이카도 약 40개에 달했다. 당원도 200명 정도를 확보했다. 3차당은 만주총국과 상해부를 재건하고 일본부도 설치했다. 특히 일본부의 활동이 활발하여 『대중신문』, 『이론투쟁』, 『현계단』 등 기관지를 발행하기도 했다.출처: 박찬승
3차당의 가장 두드러진 활동은 민족주의 세력과 함께 신간회와 근우회를 조직한 것이다. 1926년 4월 화요회 · 북풍회 · 조선노동당 · 무산자동맹의 4단체는 발전적 해체를 결의하고 정우회를 조직했다. 정우회는 11월 15일 「정우회선언」을 발표하여 사회주의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의 제휴가 필요하다고 선언했다. 이는 이후 사회주의자들이 신간회 결성에 참여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제3차 조선공산당 역시 1928년 초 경찰에 발각되어 30여 명의 주요 간부가 검거됨으로써 조직이 무너졌다.출처: 박찬승
3.4. 서상파 조선공산당(12월 당)[편집]
제3차 조선공산당에 참여하지 않은 서울청년회계 구파의 이영 · 이운혁 등은 1927년 12월 서울의 요리점 춘경원에서 독자적인 조선공산당을 조직했다. 이를 흔히 ‘춘경원 공산당’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 조직은 코민테른의 승인을 얻지 못했으며, 1928년 4월~6월 간부 대부분이 경찰에 검거됨으로써 종막을 고했다.출처: 박찬승
3.5. 4차 조선공산당[편집]
1928년 2월에 제4차 조선공산당이 조직되었다. 3월에는 노동자 출신 차금봉이 책임비서로, 정치부장 안광천, 정치부 위원 양명·한명찬(韓明燦), 조직부장 김한경(金漢卿), 조직부 위원 한해(韓海)·이성태(李星泰)·윤택근(尹澤根) 등 대부분 새로운 세대의 활동가들로 교체되었다. 1920년대 1~3차 조선공산당의 주요 핵심멤버들이 양반, 지식인 계층 출신들이었던 것과 달리 차금봉은 철도 노동자 출신으로 '노동자 출신으로 최초로 정당의 책임비서가 된 인물'이다. 고려공청도 김재명을 책임비서로 하는 새 간부진을 구성했다.
4차 조선공산당의 1928년 3월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는 「조선민족해방운동 관한 테제(정치논강)」에서 당시 조선혁명의 성격을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으로 파악하면서, “조선의 장래 권력형태는 조선사회의 정세에 기초한 혁명적 인민공화국이어야 한다. 조선에 소비에트공화국을 건설하는 것은 좌익소아병적 견해이고 부르조아공화국을 건설하는 것은 우경적 견해”라고 하였다.[18]
4차당은 일본부를 일본총국으로 개칭하고 만주총국과 북경지부 간부진도 재정비했다. 국내에서는 신간회 32개 지회에서 당원들이 활동 중이었다. 근우회 내에도 조원숙을 책임자로 하는 야체이카(세포조직)가 조직되어 있었다. 기관지도 더 확보하여 일본에서 『청년조선』, 만주에서 『혁명』, 『불꽃』을 추가로 간행했다.출처: 박찬승
그러나 1928년 7월~10월 사이에 170명이 검거되며, 4차당도 사실상 해체 상태에 들어갔다. 특히 그해 12월에 나온 코민테른의 「12월테제」는 조선공산당의 해체를 사실상 기정사실화했다.출처: 박찬승
4. 초기 당재건운동[편집]
4.1. 조선공산당 재건설준비위원회[편집]
이동휘와 김규열은 1929년 3월 중국 상하이에서 김철수 · 윤자영 · 오산세 · 김일수 · 최동욱, 김영만, 김영식, 안상훈 등과 당재건 방침을 협의했다. 그 결과 당재건을 위한 조직으로 ‘조선공산당 재건설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중국 길림성에 당재건운동의 근거지를 두기로 했다(책임자 김철수). 기관지로 비밀잡지 『볼셰비키』와 대중기관지 『노력자신문』을 발간했다. 이후 그들은 흥남의 공장 등지에 세포 조직을 만드는 데 열중했다. 그러나 코민테른은 1930년 6월 ‘조선공산당 재건설준비위원회’를 해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코민테른 측은 조선공산당 재건에 관한 모든 책임을 중국공산당(당내 조선국내공작위원회)에 맡겼다고 통보해왔다. 결국 1931년 3월 재건설준비위원회를 해산하고 대신 ‘좌익노동조합전국평의회준비회’를 만들었다. ‘전국평의회준비회’는 1931년 2월~3월 2개의 세포조직과 25명 남짓의 노동자 · 지식인을 획득했다. 이를 바탕으로 오성세 등은 4월 25일경 메이데이 투쟁을 준비했다. 4월 30일이 되자 신설동 종연방직공장, 서대문 대창직물공장, 철도국 용산공장 등에서 전단을 뿌렸다. 이 때문에 발각되어 6월까지 45명이 구속 기소되었다.출처: 박찬승
4.2. 조선공산당재조직중앙간부/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편집]
1929년 5월 길림에서 한해 · 한빈 · 고광수 등이 ‘조선공산당재조직중앙간부’를 만들어 당재건운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한해는 그해 9월에 병으로 사망했다. 한빈은 부산에 들어와 공장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조직운동을 하다가 1930년 3월 체포되었다.출처: 박찬승
고경흠은 상하이에서 양명, 한위건과 협의하여 1931년 2월 국내에 들어와 권대형 · 이종림 · 서인식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을 만들었다. 이 조직은 1931년 4월 ‘공산주의자협의회’[19] , 두 달 뒤 다시 ‘조선공산주의자재건협의회’로 바뀌었다.『콤뮤니스트』라는 기관지를 발행했는데 이것이 경찰의 수사망에 걸려 1932년 18명이 구속되면서 와해됐다.출처: 박찬승
4.3. 조선공산당재건동맹[편집]
안광천은 상하이에서 『레닌주의』라는 정치신문을 만들면서 당재건운동을 시작했다. 그는 1929년 가을에 김원봉과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을 만들고 베이징에 레닌주의정치학교를 세우고 6개월 과정으로 활동가를 양성했다. 레닌주의정치학교를 졸업한 활동가들은 국내에 들어와 당재건운동에 나섰다. 그 대표적인 조직이 ‘조선공산당 강릉공작위원회’였다. 위원회는 강릉에서 적색노조, 적색농조, 소년부(독서회) 등의 조직을 만들어 활동하면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경찰은 1933년 종연방직 파업을 수사하던 중 레닌주의 그룹을 알아내고 130명을 검거했다.출처: 박찬승
4.4. 조선공산당조직준비위원회[편집]
코민테른은 1928년 「12월테제」 발표 이후 국제레닌대학이나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마친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을 통해 당재건운동에 개입했다. 모스크바에서는 1929년 김단야 · 조두원 · 김정하를 조선에 파견했다.# 김단야·권오직 등은 1929년 서울에서 조선공산당조직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서울·평양·부산을 ‘트로이카’ 지역으로 설정하고 전국 8개 지역에 조직가를 확보하는 조직사업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조직의 모든 내용을 알고 있는 연락원이 체포되자, 1929년 12월 김단야는 국내를 벗어나 1930년 2월 모스크바로 돌아갔다. 김단야의 망명 이후 준비위원회는 권오직·채규항(蔡奎恒)·박민영(朴珉英)이 맡았다. 준비위원회는 1930년 1월 조선공산당 경성구 조직위원회를 조직하는 등 활동을 벌이다 1930년 3·1 운동 11주년 기념 격문으로 인해 대부분 체포되었다.출처
한편 모스크바로 간 김단야는 9월에 다시 상하이로 가서 『콤뮤니스트』를 발행했고, 박헌영도 여기 참여했다.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산하 조선위원회는 이를 지원했다. 박헌영과 김단야는 신의주를 통해 『콤뮤니스트』를 국내로 반입했으며, 국내에서 김형선이 일부 인쇄하기도 했다. 콤뮤니스트 그룹은 국내에 9개의 공장 세포 조직을 갖고 있었으며, 이들에게 『콤뮤니스트』를 배포했다. 또 각 지역에서 따로 『볼셰비키』, 『노동자』 등의 기관지를 만들기도 했다. 이 그룹의 조직은 1932년 경찰의 수사망에 걸려들어 체포되기 시작했다. 국내 연결자인 김형선이 먼저 체포되었고, 상하이에서 박헌영까지 붙잡히자 활동이 어려워졌다.출처: 박찬승 김단야는 모스크바로 돌아갔다. 아래 경성트로이카(이재유 그룹) 부분에서 이재유와 충돌하는 '국제선'이 이들이다.
5. 대중운동[편집]
조선공산당 해산 후 공산주의자들은 대중 속으로 들어가 혁명적 노동조합, 농민운동을 하여 대중투쟁을 촉발시켰다.
1929년 이후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혁명 열기는 다음 글에서 엿볼 수 있다. 참고로 이재유를 발굴한 김경일 교수는 1930년대의 운동 열기를 1980년대 운동 열기와 비슷하다고 본다. 실제로 1980년대의 제헌의회그룹, NLPDR, PD(정파) 등 민주화운동가(소위 운동권)와 1930년대 국내파 독립운동가는 똑같이 사회주의를 이용해 운동을 했다.
대중투쟁의 고양은 1929년 11월에 일어난 광주학생운동에서 시작되었다. 광주라는 한 지역에서 일어난 학생운동은 곧 전국 각지로 확산되었다. 학생들은 일제타도와 민족해방이라는 구호 아래 적극적인 투쟁을 전개했다. 광주학생운동에서 촉발된 대중 투쟁의 열기는 급속하게 공장으로 농촌으로 광산으로 확대되었다. 광주학생운동 이후, 몇 년 동안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노동자와 농민의 대규모 투쟁이 계속 일어났다. 그 대표적인 보기로 1930년 1월의 부산 조선방직 파업, 1930년 5월과 6월의 신흥 장풍탄광 파업, 1930년 8월의 평양 고무공장 동맹 파업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파업 투쟁, 1929년 가을부터 다음 해 7월까지 계속된 용천 불이농장 소작쟁의, 1930년 3월의 정평농민동맹 집회 해금 투쟁, 1930년 7월의 단천 삼림조합 반대 투쟁, 1931년 5월의 홍원 호세(戶稅) 연납 진정 시위 투쟁, 1931년 11월의 삼척 도로공사비 불납 시위 투쟁, 1932년 3월의 양산농민조합 폭동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농민 폭동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대중 투쟁은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사회주의자들의 노력에 의해 촉발된 것이었음과 동시에 사회주의자들로 하여금 조선 혁명의 가능성이 더욱 성숙해진 것으로 인식하게 만들었고, 따라서 운동 방침의 전환을 모색하게 되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했다. 일제 타도와 민족 해방 전취(戰取)라는 대중의 요구가 폭발하는 상황을 사회주의자들은 혁명의 시기가 임박한 것으로 규정하게 된 것이다.
이준식,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근우회의 허정숙 등은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연장선인 경성 여학생 운동을 지도했다. 그리고 박진홍과 이효정을 비롯한 많은 경성 여학생 운동의 참여자가 이후 이재유 그룹의 핵심 활동가가 된다.
자세한 내용은 이효정(독립운동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반제동맹과 독서회[편집]
1927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국제반제동맹이 창립된 이후 반제동맹이라는 반제국주의 운동 단체가 전 세계적으로 만들어졌다. 반제동맹 자체는 공산주의 조직이라고는 볼 수 없고 반제국주의 조직인데 조직원이 이재유 그룹과 겹친다.
조선에서 반제동맹은 1930-1933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만들어졌다. 이는 반제동맹이 광주학생항일운동과 같은 국내 대중운동의 폭발과 일본의 만주침략에 따른 반전투쟁의 긴급한 시대적 요구에 의해 만들어졌음을 보여준다.[20]
반제동맹은 주로 학생층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비밀 독서회를 만들어 활동가를 양성해 학교 단위로 반제동맹을 만든다. 학교 단위를 기초로 지역 단위를 만들고 마지막으로 '반제동맹 조선지부 학생부'를 완성하려고 했다. 학생 반제동맹은 혁명적 노동조합과 혁명적 농민조합 활동가를 양성하는 훈련장이기도 했다.[21]
당대에 유명했던 반제동맹은 경성제대반제동맹(성대반제동맹) 조선반제동맹 경성지방조직준비위원회(경성반제동맹)이 대표적이다.
김도엽과 조정래는 일제의 고문 끝에 얻은 병으로 사망했다.(중략) 이관술과 사제지간에서 혁명적 동지로 탄생한 동덕여고보 출신들은 이관술과 뗄 수 없는 관계로 이어졌다. 1930년대 초 한국 근현대사상 가장 이론적 수준이 높고 ‘혁명적인 학생세대’이자 ‘노농 현장투신 제1세대’로서, 동덕여고보를 거점으로 한 일련의 여성혁명가들이 탄생하고 있었다. 이들은 서울지역에서 학생운동의 높아진 열기를 발빠르게 조직화하는데 커다란 성과를 보인 사회주의 그룹 중 하나인 이평산(李平山)의 RS협의회로 결집하였다. 그리고 RS협의회가 와해된 이후 동덕여고보 독서회 회원 전원의 조직 역량은 스승이자 동지인 이관술의 지도에 의해 보존·성장하면서, 경성반제동맹지방조직준비위원회에 합류했다. 그리고 이관술과 함께 이재유 그룹으로 합류하면서, 이 혁명적 흐름은 세류(細流)에서 강하(江河)로 불어났다.
<이관술과 그의 시대> 박한용 발표문 발췌
7. 경성트로이카와 1930년대 노동운동[편집]
경성트로이카 활동 시기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은 코민테른이나 프로핀테른의 지시를 받는 국제선과 코민테른 등과 직접적 연계가 없고 국내파인 비국제선으로 나눌 수 있다. 박헌영, 김형선, 김명시, 권영태, 김희성 등이 국제선이었고 이재유 그룹이 비국제선이었다. 김형선은 이재유에게 국제선에 대한 협력을 요구했는데, 이재유는 해외에서 어떻게 국내를 지도하냐고 답했다.
이재유가 국제선 사람들과 불화를 빚은 것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는 이미 1933년에 재상해 '콤무니스트' 그룹의 국내 전권위원인 김형선과 미묘한 알력 관계를 보였다. 1934년에는 프로핀테른에서 파견된 권영태와 불화를 빚었다. 1935년에는 김승훈(金承塤), 1936년에는 김희성(金熙星) 등과 같은 국제선 사회주의자들과도 긴장관계에 있었다. 이 때문에 이재유는 국제선에 속하는 사람들에 의해 종파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중략)
이재유는 엠엘파의 정체성을 갖고 있다고 간주된 듯하다. (중략) 국제선 기관지 '콤무니스트'에 따르면 당재건운동 대열 속에는 과거의 종파적 전통을 부활시키려 노력하는 그룹들이 존재한다고 한다. 4개 그룹이 거론되었다. 계급투쟁 그룹(엠엘파), 볼셰비키(서상파), 불살(재만주 화요파), 레닌주의(재북경 안광천․김원봉 그룹)가 그들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그룹들을 ‘노골적인 종파’와 ‘복면적인 종파’로 구분한 데에 있다. 노골적인 종파라고 낙인찍힌 세력은 엠엘파 하나였다.
임경석, 국제선 공산주의 그룹과 박헌영#
코민테른 상해지부의 김단야의 명에 의해 파견되었던 김형선에 대하여도 그(이재유)는 국제선에서 파견되었다는 사실 자체를 의심하고 있었다고 진술하였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들 조직과의 제휴는 끝내 이루어지지 못하고 좌절되었다.
김경일,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
이재유 그룹은 코민테른을 맹목적으로 따르기를 거부하며 국제주의와 국내주의를 균형있게 추구하여 조선의 현실에 맞게 공산주의를 적절히 독립운동에 활용하였다. 이재유 그룹은 전위당 이론을 거부하고 즉각적인 당 건설에 반대하였으며 '트로이카 운동'이라는 독창적인 조직론을 만들어서 대중운동에 기반한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이끌었다.
이재유를 중심으로 한 ‘경성트로이카’(1933. 8.)-‘경성재건그룹’(1934. 11.)-‘조선공산당재건 경성준비그룹’(1936. 10.)은 국제공산당과 그 산하의 국제적 지도기관에서 파견된 공작원들이 국내의 다른 그룹들에 대해 배타적 권위를 주장하는 것은 오히려 갈등과 대립을 야기할 수 있다고 비판했다. 이재유는 당을 즉각적으로 건설하려는 방식을 반대하고, 생산현장에서의 대중 활동과 대중투쟁의 확대 · 강화를 통해 당재건의 인적 · 물적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재유는 김삼룡 · 이성출 · 김형선 · 이순금 · 이현상 · 정태식 · 미야케(三宅鹿之助) 교수 등을 차례로 만나서 경성을 중심으로 한 ‘트로이카운동’을 제안했다. 즉 몇몇 지도부가 당을 먼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세 마리 말이 자유롭게 마차를 이끌듯이 회원 모두 저마다 자유롭게 활동하여 널리 동지를 획득하고, 때가 되면 조직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안병춘 · 이현상 · 변홍대는 노동운동, 최소복은 학생운동 조직을 나누어 맡았고, 이재유는 이를 총괄하기로 했다.
박찬승, 한국독립운동사, 2014
한편 이재유가 다음과 같이 당시 열악한 노동환경을 묘사한 바 있다.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은 대중 속에서 대중과 함께하는 독립운동일 뿐 아니라 노동자, 농민, 빈민운동이기도 했다.
처음 1~2년은 식사만 제공받을 뿐 무보수로 18~19시간 혹사당하며 (중략) 기숙사에 기거하면서 한달에 한번밖에 외출할 수 없고 외출할 때는 감독자가 따라 나간다. (중략) 그녀들은 언제나 80도 이상의 더운 곳에서 일하며 바람이 통할 구멍조차도 없는 곳에서 혹사되기 때문에 정확한 내용은 알기 힘들지만 나의 경험만으로도 쉽게 알 수 있다. 내가 알고 있었던 5년 이상의 직공 8명 중에서 지금은 단지 2명밖에 있지 않고 6명은 모두 죽었던 것이다! 내가 일찍이 죽어야 할 사람만을 알았던가?
이재유가 묘사한 일제강점기 여성 노동자의 노동환경
복지 이론이 아직 받아들여지지 않은 1930년대에는 사회주의, 공산주의가 이 시기 자본주의 병폐(대공황, 노동착취 등)를 비판하는 거의 유일한 대안이었다. 또 해외 독립운동은 식민지 조선 대중과는 분리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데 반제동맹, 이재유 그룹, 경성콤그룹의 활동과 같은 국내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은 독립운동 갈래 중 대중 속에서 대중과 함께 운동하는 거의 유일한 갈래였다.
이재유 그룹은 트로이카 운동을 통해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공장에서 파업을 일으키고 학교의 동맹휴학과 친일교사 배척 등의 운동을 배후조종 하는 등 경성에 항일운동의 바람을 일으켰다. 수많은 조직원이 활동했으나 검거로 한 차례 와해된다.
이후 탈출한 이재유는 이순금과 박진홍의 중재로 이관술을 만났다.
재유 동무와 나와의 평생 잊을 수 없는 전우의 생활이 시작되었는데 (중략) 나는 재유 동무로부터 그의 독특한 여러 가지 자세한 변장법과 생활구실(生活口實) 즉 여관에 들어가서는 어떻게 자고 주막에 가서는 무슨 핑계를 하고 자고 밥집에 가서는 무엇이라 하고 사먹고 하는 등 지하생활에 필요한 각종의 기술을 배웠다.
이관술,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 1946
이재유는 이관술, 박영출과 2기 경성트로이카라고 불리는 '경성재건그룹'을 만들었다. 경성재건그룹에서는 이재유는 출판, 이관술은 학생운동, 박영출은 노동운동 분야에서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이인행, 이석면, 공성회 등 1기 경성트로이카에 관련된 인물과 접촉하는 책임은 이관술이 주로 맡았는데 그 결과 상당한 정도로 조직이 재건되었다. 이관술이 접촉해서 조직에 가입시키는 등 책임을 맡았던 사람들은 전체 조직원의 30%가 넘는 높은 비율이었다.[22]
박영출과 박진홍을 포함한 주요 조직원이 체포되자 이재유와 이관술은 피신하여 위장 형제로 같이 살며 3기 경성트로이카라고 불리는 '조선공산당 경성준비그룹'을 만들어 트로이카 방식의 운동을 지속했다.
이재유는 경성에 드나들며 조직 재건을 담당하고 이관술은 각종 팸플릿과 기관지의 제작을 책임진다. 기관지 <적기>가 조선공산당재건 경성준비그룹 명의로 발행되었다. 오늘날까지도 다 이루지 못한 선진적인 구호들을 담고 있다.
① 민족적 계급적 정치적 투쟁의 자유
② 파업 농민의 행동에 대한 경찰 군대의 탄압 반대, 파업 농민투쟁의 자유, 노조 농조 기타 모든 근로자 조직에 대한 무제한의 자유, 부르조아지주에 대한 노동자 농민 투쟁에 조정제도를 적용하는 것과 관헌 재판소 경찰 등이 간섭하는 것 반대.
③ 모든 사형제도의 철폐.
특히 정치범에 대한 사형 절대반대.
경찰횡포에 의한 모든 희생자와 정치범의 즉각 석방.
치안유지법, 출판법, 제령 제7호, 폭력행위취체법 철폐.
④ 근로자의 출판집회언론 등의 무제한의 자유.
정치적 대중집회와 데모의 완전자유, 모든 경영내에서 경영위원회를 창립할 자유, 경영위원회의 승인.
프롤레타리아 자위단의 창설.
⑤ 소작료 지불의 거절, 지주 부르조아에 의한 농민수탈반대.
지주 고리대금업자 은행 크러스트 금융조합에 대한 농민의 모든 차금의 전멸.
잡세 지불거부, 수리조합비 지불거부.
⑥ 노동자 농민을 탄압하는 모든 법령의 철폐.
형평사에 대한 진정한 동정, 부인의 완전한 평등권, 모든 민족적 차별의 철폐.
⑦ 반노예적 농노조건 반대.
기숙사제적 속박 반대[23]
.노동자 및 청년에 대한 노예제도의 낡은 형태인 년기계약제의 반대[24]
.부인, 청년의 이중착취반대.
동일노동에 대한 동일임금
부인아동의 공연 은묵의 매매제에 대한 형벌
⑧ 부르조아적 산업합리화 반대
성인에 대한 하루 7시간 노동제
16세 미만의 소년에 대한 4시간 노동제
18세 미만의 청년에 대한 6시간 노동제
유년노동금지
1주 40시간제
1주 1회의 임금 전액 지불의 휴일과 1년 1회의 임금 지불의 2주간 휴가
⑨ 임금의 전반적 인상
아내가 있는 노동자의 최저생활비 기준에 의한 최저임금 확립
임금에서 공제 선취의 금지
임금지불의 지체에 대한 형벌
⑩ 부르조아 부담의 실업 질병 재해 노약 사망의 국가보험의 즉각 실시.
이재유와 이관술이 만든 《적기》의 슬로건[25]
8. 이관술 그룹 형성[편집]
이재유가 검거된 이후 당시의 한 신문은 이관술이 "원래부터 실천투사는 아니고 이재유의 심파(sympathizer의 약칭, 동조자, 동정자를 뜻함-인용자)적 존재로서 끌려들어간 것으로 이재유가 없는 이후에는 전혀 자멸할 수밖에 없고 종래와 같은 투쟁은 상상할 수 없으며 ... 이로써 반도 공산당 운동은 사실상 완전히 궤멸, 종식하기에 이르렀다"(경성일보 1937년 4월 30일자 호외)고 보도하였다. 그러나 경성콩그룹에서의 운동까지 포함하여 이후 그의 활동은 이러한 평가와 예상을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었다.
김경일,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
1936년 12월 25일에 이재유가 검거되고 이어서 김희성이 주도한 조직도 검거되어 경성의 양대 조직이 모두 와해되었다. 그 후 1937년에 이관술, 박진홍, 공성회, 김순진, 이순금, 안병춘, 김재선, 이성학, 남남덕, 조병목이 그룹을 형성했는데, 이 그룹은 2년 후인 1939년에 경성콤그룹이 만들어지는 단초를 제공한 조직이다.[26]
(이관술 혼자만 지하운동하는 수배자이고 다른 사람은 겉으로는 합법 생활을 하면서 이면에서 운동을 모색하는 중이며, 비밀결사 특성상 같은 조직이라도 한데 모인 일은 없다는 걸 염두에 두고 봐야 아래가 이해된다. 그래서 박진홍 등 다른 사람들은 겉으로는 합법 생활 중이니까 자주 접촉에 성공하는 것이고, 이관술은 따로 행동하는 것이다.)
1935년 1월 검거되어 1937년 5월 석방된 박진홍은 경찰 감시로 자유롭지 못한 와중에도 운동을 다시 하기 위해 공원회와 그의 동생 공성회, 김순진, 안병춘(안병춘은 경성트로이카 1기 최상부 트로이카. 이때는 딱히 수배자가 아니었고 합법 생활 중) 등과 만났다. 그런데 공원회는 이재유를 파벌이라고 진단하였으며, 안병춘은 이재유가 파벌일 뿐만 아니라 영웅주의에 빠져 있었다고 진단하였다. 이에 맞서 박진홍은 이재유를 옹호했다. 김경일 교수에 따르면 "그녀는 이 문제에 자신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정세 파악과 운동 방침의 수립을 위하여 그녀가 이관술을 만나기 위해 노력하였던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27]
한편 일제가 혈안이 되어 쫓는 수배자로 지하운동 중인 이관술은 1937년 6월 영등포에서 공장노동자 조직에 착수하였다. 1937년 7월 1일 박진홍은 이관술의 연락을 가지고 왔다는 한 운동자의 방문을 받았으며, 다음날 그의 안내로 상도동 부근에서 시장에 가는 상인풍으로 변장한 이관술을 만났다. 두 사람은 번대방동, 신길동을 거쳐 시흥군의 신림리와 봉천리 사이를 원형으로 돌면서 회담하였다. 이 회담에서 박진홍은 이관술의 지도를 받으면서 "이재유의 의발을 이어 조선공산당재건 경성준비그룹의 확대강화"를 위해 노력할 것을 합의하였다.[28]
1937년 7월 7일 박진홍의 중재로 이관술은 안병춘에게 이재유가 쓴 <자기비판문>과 운동자금을 주었다.[29] 그 뒤 이순금이 석방되자, 이관술은 이순금과 여의도 경성비행장 부근에서 접촉했는데 이 만남이 경찰에 발각되었다.
경찰은 이관술을 놓친 보복으로 뚜렷한 '범죄행위'도 없는 이순금을 9개월동안이나 가두었다. 이 때문에 박진홍 또한 다시 경찰에 취조받게 되었다. 이리하여 이관술과 공원회의 만남이 실현되지 못한 상태에서 공원회가 안병춘과 연결되며 1937년 그룹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공원회와 안병춘은 이재유 그룹의 운동을 파벌로 규정하고 자신들은 국제선과 연결된 정통 운동을 해야 한다고 여겼다.[30]
체포되었던 박진홍은 9월 6일 기소중지로 석방되었다. 박진홍은 직후 9월 7일에 공원회를 방문했다. 박진홍은 공원회를 지도자로 만들려고 노력했지만 공원회는 운동에 거리를 두고 있었으며 역량이 부족했다. 박진홍은 비합법 생활로 잠복할 것을 건의했지만 공원회가 만류했다. 그 후 박진홍은 인정식, 남남덕, 조병목 등 사람들과 제휴하며 운동을 모색하거나 운동자금을 마련을 위해 이순금의 결혼을 추진했다. 그러던 중 1937년 10월 13일 박진홍과 공원회는 삼청공원에서 만났다가, 일제의 스파이로 의심되는 양성호와 마주쳤다. 둘은 위협을 느끼고 지하로 잠적하기로 했는데, 직후 박진홍과 이순금이 경찰에 연행되어서, 이 운동이 중단되었다.[31]
한편 이관술은 1937년 7월 대전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대구로 내려가 반찬가게를 운영하며 반전반제적인 소그룹운동을 지도했다. 이관술은 1938년 이순금이 출옥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수원에서 접촉한 후 다시 대구로 갔다가, 1939년 1월 충주로 가서 김삼룡과 접촉한 뒤 경성으로 왔는데, 이때부터 유명한 경성콤그룹을 만든다.[32]
9. 경성콤그룹과 일제 말 비밀결사들[편집]
일본 경찰은 그를 ‘체포되지 않은 거물’이라고 불렀다. 이재유와 함께 비합법 혁명운동을 이끌던 이관술을 가리키는 말이었다.경찰은 수사의 초점을 한군데로 집중했다. 바로 이관술이었다. 그를 가리켜 “이재유에 못지않게 중요한 인물”이라고 지목했다. 혹시 수사망을 피해 국경 너머 만주로 도주한 것이 아닐까, 경찰 기록에는 그런 추측도 적혀 있었다. 하지만 그 추측은 잘못된 것이었다. 이관술의 소재가 포착됐다. 그는 국외로 도주한 게 아니라 조선 내지를 버젓이 활개 치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경성 시내 한가운데서 그러했다.
임경석, 임경석의 역사극장: 15년간 일본 수배망 뚫은 ‘신출귀몰’ 혁명가 이관술
1939년에는 이관술의 지도하에 만기출소한 이순금, 김삼룡, 이현상 등 이재유 그룹을 주축으로 경성콤그룹을 결성하여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이어갔다. 경성콤그룹에는 이후 화요파의 박헌영도 영입되었다.
경성트로이카(이재유 그룹)가 경성콤그룹의 기반이다.
경성콤그룹은 이재유 그룹의 이관술, 이순금, 김삼룡, 이현상, 정태식이 주축이 되어 조직한 것이다. 일제의 군국주의적 탄압 속에서 끝까지 타협하지 않고 투쟁을 벌인 국내 운동의 최후 조직이었다.
박헌영은 이관술이 지도하는 지하조직인 경성콤그룹과 연계를 맺었다. 이 시기 헌병경찰 체제는 한층 강화되어 민족해방운동의 많은 지도자들은 혁명운동을 포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관술이 지도했던 경성콤그룹은 박헌영의 말에 의하면 “공산주의 운동에 충실하고 혁명운동을 계속하고 있던 유일한 그룹이었다.”
소련군정 문서#
주요 활동가들이 이재유 그룹 활동을 하던 시절에는 동맹휴학과 파업으로 일제에 맞서 왔으나 경성콤그룹 활동 시기는 전시체제라 도저히 동맹휴학과 파업이 불가능하여 대신 경성콤그룹은 항일무장투쟁을 준비했다.
박헌영은 검거되지도 않았으면서 중간에 잠수타버렸지만 이관술, 이현상, 김태준 등 경성콤그룹 조직원들은 검거되어 고문당했음에도 경찰로부터 탈출한 뒤 광복 순간까지 항거를 계속했다. 경성콤그룹의 첫 지도자였던 이관술은 박헌영 영입 후 최고지도자 자리를 넘겼었으나 결국 끝까지 경성콤그룹을 이끈 지도자는 이관술이었다.
이관술은 ‘서대문서 사건’의 주역이었다. 서대문경찰서장 명의로 작성된 ‘검찰 송치서’에 따르면, 이관술은 관련 범죄자 42명 가운데 첫자리에 놓인 수괴였다. 범죄의 비중에 따라 나열된 피의자 명단의 첫자리에 그의 이름이 올랐다. 1. 이관술 2. 김삼룡 3. 이현상 등의 순서로 작성됐다. 경찰 취조도 이관술에게 집중됐다. 취조 결과를 담은 ‘피의자 이관술 신문조서’는 서대문경찰서에서 작성된 것만도 도합 27회에 이른다. 다른 피의자들보다 두세 배 더 많았다.
이관술은 내심 두 가지 진술 전략을 세웠던 것 같다. 첫째, 경찰이 인지하지 못하는 사안은 철저히 은폐한다는 전략이다. 아직 체포되지 않은 동지의 소재에 관한 문제나 아직 드러나지 않은 조직 내 비밀에는 그렇게 대응했다. 버티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을 것 같다. 뒷날 이관술이 만신창이가 되어 병보석으로 출감한 것도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일제의 야만적 살인적 고문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비밀을 지키고 동지 한 사람도 대지 않았”다. 그의 투쟁사를 빛나게 하는 영웅적 행위였다. 하지만 대가가 있었다. “감옥투쟁에서 거의 죽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자 “놈들도 송장 치르기 싫어 결국 보석”을 허용했다. 감옥 밖으로 나온 이관술의 모습은 처참했다.
단지 버티기만 했던 것 같지는 않다. 개연성 있는 허위 진술을 병행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국내에 존재하지 않는 제3자를 마치 있는 양 허위로 진술하는 방안을 택했다. 바로 김단야[33]
였다. 일본 경찰은 이 허위 진술을 날름 수용했다. 그리하여 사건 최종 보고서에 김단야가 마치 이관술의 상급자인 양 묘사했다. 경찰만이 아니었다. 경성콤그룹에 관한 초창기 연구[34] 성과도 이 허위 정보를 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이런 인식은 일본 고등경찰이 품은 그림일 뿐이지 실제 사실은 아니었다. 달리 말하면 이관술의 진술 투쟁이 승리를 거뒀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이관술은 1943년에 병보석으로 출옥하여 탈출한 뒤 다시 비합법운동을 했다. 이현상도 병보석 뒤 일제 경찰의 눈을 피해 운동을 계속했다.
경성콤그룹 멤버가 다시 활발한 활동을 시작하였다. 최고지도자인 박헌영 동무는 어대 있는지 모르나 이관술 동무는 울산서 도망해서 대전으로 오고, 이현상 이주상 두 동무는 경남으로 갔다가 적에게 발견되어 다시 대전으로 오고, 인천 최, 하동의 윤과 조, 조의 친구인 이채래, 채래의 친구인 신설정 황 그룹이 직접간접으로 연계되었다.
김태준, 연안행
(해방 직후) 우리는 박헌영 동지가 해외로부터 귀국하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권오직(조선공산당 중앙 및 도당 대표동지 연석회의 의사록)
위에서 볼 수 있듯 경성콤그룹 간부 김태준, 권오직이 박헌영이 잠수탔고 이관술, 이현상, 이주상 등은 경성콤그룹 활동을 이어갔다는 것을 증언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출판서적은 다른 독립운동가들이 고문당했음에도 항일운동을 계속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박헌영이 숨어있는 것에만 감동하여 박헌영의 일제 말기 항일운동을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
1944년 말~1945년 초에 이르러 조선건국동맹·공산주의자협의회·자유와독립그룹·경성콤그룹 세력 등이 무장투쟁을 위해 비밀연락·연대를 활발히 벌였다.
자세한 내용은 경성콤그룹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0. 원산 공산주의자 그룹[편집]
식민지 조선 남부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의 꽃[35] 이 경성트로이카-경성콤그룹이라면 식민지 조선 북부에는 이주하 중심의 원산 공산주의자 그룹이 있었다. 리강국, 최용달 등이 활동했다.
원산그룹사건은 혜산사건[36]
과 달리 코민테른·중국공산당·일본공산당 등과 전연 연락 없이 완전히 사상적 전과자에 의한 일군의 적색노동조합 조직운동을 기초로 했으며, 아래로부터 시작된 점에서 현저한 특색이 있다. 테러 행위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수뇌부의 높은 사회주의 의식 수준, 인민전선전술의 정확한 파악, 그 운동 전개의 교묘한 점, 특히 대중 획득을 위한 적극적인 문서 활동의 전개 등은 혜산사건에 비할 바 아니고, 그 대상이 국경 산악지대의 의식수준이 낮은 농민과 원산 같은 수준 높은 노동자와의 차이가 있다고 해도 현저히 운동이 첨예화되고 있는 것으로 이 점 주목된다. 만약에 원산의 이 운동이 1, 2년 더 지속되었더라면 원산철도 2천 수백여 명의 종업원은 물론이고 원산의 노동자 대부분을 조직원으로 포섭하여 어느 때고 무장봉기에 동원할 준비가 완료되었을 것이다.
원산그룹에 대한 일제 경찰의 기록 [최용탁의 근대사 에세이 제38회] 역사에서 사라진 원산그룹
남조선에 박헌영, 이관술 두 동무와 북조선에 이주하 동무는 조선 지하운동의 레코드를 깨뜨리고 있던 것
김태준, 「李舟河論(이주하론)」
11. 1945년 재건[편집]
11.1. 조선인민공화국[편집]
조선공산당 정식 재건 전 좌익이 주도한 조선인민공화국이 먼저 선포된다.
공산당 재건운동가들이 대중 속에서 활동한 결과 대중에 뿌리내린 지도중심을 형성하고 점차 공산주의자들이 민족해방운동의 주도권을 획득해 갔다. 지역과 대중에 뿌리박은 운동을 전개함으로써 해방 후 각 지역에서 인민위원회나 전국노동조합평의회 등이 급속하게 결성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박한용, 일제강점기 조선 반제동맹 연구, p4
해방직후 한국에서는 일대 혁명적 고양이 일어났으며, 그 속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커다란 영향력을 갖고 있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8·15후 분출하는 대중운동을 지도할 수 있었던 사회주의자들의 정치적, 조직적 역량이 일제 말기에 어떻게 준비됐는지를 연구할 필요성이 제기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에 기초하여 일제 말기의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에 관한 연구가 최근에 와서야 비로소 이루어지고 있다. 치안유지법 위반사건은 중일전쟁 발발 후 점차 감소 경향을 띠며 1940년에 그 최저 상태를 기록했으나,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1941년부터 양상이 역전되어, 그 증가 추세는 일제의 패망 시기까지도 계속된다고 한다. 이 시기 사회주의자들은 서울지방에서만도 경성콤그룹을 비롯하여 공산주의자협의회, 스딸린단, 화요회그룹, ‘자유와 독립’ 그룹 등과 같은 비밀 단체를 결성해서 활동했다. 경성콤그룹은 1936년 12월에 검거된 이재유그룹의 잔존 성원들이 이관술의 지도하에 재결집되어 활동하다가 박헌영을 조직의 지도자로 맞아들여 결성된 것이었다. 이 단체는 기존의 각파 사회주의자를 망라하여 구성된 것으로서 서울지역의 노동자·학생층은 물론 함경도를 포함한 지방에까지 자신의 조직활동을 확장했다. 이 단체는 1940~41년에 몇 차례의 검거사건으로 약화되긴 했으나 해방직전까지 줄곧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사회주의자들이 참가한 비밀단체 가운데에는 건국동맹과 같은 통일전선 단체도 있었다.
韓國史硏究의 回顧와 展望#
조선인민공화국은 당대 대중에게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 아래 설문조사는 미군정이 통치한 지 2년이 되어가는 1947년 7월 6일 시행된 점, 이미 파괴된 인민위원회를 선호한다고 응답한 점을 볼 때 단순히 국호를 묻는 투표가 아니라 조선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신임투표이다. 즉 당대 대중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보다 조선공산당이 주도한 조선인민공화국에 대한 선호를 보여준다.
11.2. 중앙위원회 구성[편집]
8.15 광복 이후, 1945년 8월 16일과 8월 20일 각각 장안파와 재건파가 출범하였다.
장안파 조선공산당은 서울 YMCA 빌딩 바로 옆의 장안빌딩에서 결성했다해서 '장안파'라고 불렸다. 장안파는 강령이나 규약, 당면목표를 제대로 제시하지 못했을 뿐더러 조직력 면에서 매우 취약했다. 구성원 대부분이 1930년대 이후 공산주의 운동에서 떠나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결성 10여 일 만에 '재건파'의 해체 요구로 그 세력이 대부분 와해된다.
박헌영은 경성 콤그룹 조직원들을 만나 경성콤그룹을 중심으로 조선공산당 재건위원회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재건파이다.
박헌영이 장안파를 제압하고 8월 24일 장안파가 해산되었다.
다만 이영, 정백 등 일부는 한동안 독자세력을 유지했다.
그리고 장안파 잔여세력 외 또다른 박헌영 반대파로 영등포 지구당이 있었다.
지금은 재건파가 골수 빨갱이, 장안파가 전향 온건파 느낌인데 실제로는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재건파가 온건한 부르주아민주주의 이론, 장안파가 급진적 프롤레타리아 혁명 이론을 주장했었다. 장안파는 투쟁경력은 밀리면서 너무 급진적 주장을 했다.[37] 지금 이미지와는 달리 당대 사람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재건파가 세력이 큰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재건파의 골수 빨갱이 이미지와 달리 이후 좌우합작 운동을 하는 반박헌영파 김철수도 재건파에 합류했기에 재건파로 분류된다.
9월 8일 열성자대회를 열어 통합문제를 논의하였다. 박헌영이 권력을 장악하였다.
9월 11일 서울에서 발표된 중앙위원회 명단은 다음과 같다. 앞에 있는 숫자가 서열이다. 김일성은 일제강점기에도 조선공산당 활동을 한 적 없고(김일성은 중국공산당에서 활동) 광복 후 저 명단 발표 때도 외국에 있었고 앞으로도 조선공산당 중앙이 있는 서울에서 활동할 일 없고 평양에서도 아직 권력을 장악하기 전인데 박헌영 계열이 소련이 김일성을 밀어준다는 등의 정보를 갖고 있어서 서열 2위에 넣은 것.
중앙위원회 소속 중앙기구의 인선은 다음과 같다.
- 책임비서: 박헌영.
- 정치국: 박헌영, 김일성, 이주하, 김무정, 강진, 최창익, 리승엽, 권오직.
- 조직국: 박헌영, 이현상, 김삼룡, 김형선.
- 서기국: 이주하, 허성택, 김태준, 이구훈, 이순금, 강문석.
이관술 등 중앙검열위원을 중앙위원과 서열을 비교하면 어떨지 궁금한데 아래를 보면 적어도 중앙검열위원 서열 1위는 중앙위원 서열 2위에 밀리지 않았던 것 같다.
조공 중앙위의 구성은 시기별로 일부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김일성은 박헌영, 이관술에 이어 서열 3위로 올랐다.[38]
기광서, 해방 후 김일성의 정치적 부상과 집권과정, 역사와 현실 48호, 253쪽
신주백의 책 《1930년대 국내 민족 운동사》에 따르면 이관술은 본래 조직부장이라는 직책에 추천되었는데 본인이 사양했다. 그래서 조직은 이관술보다 서열이 낮았던 김삼룡, 이현상, 김형선 등이 맡게 되었다.
조선공산당을 만들어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20여 년간 노력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은 그들이 염원하던 조선공산당을 만들었다. 수십 년 뒤인 1980년대 김철수가 죽기 전 자신의 "비문 앞에는 <공산당원 김철수>라고 적으면 된다."라고 말해 주위 사람이 "'애국지사' 또는 '독립투사 '이런 것 앞에 붙이셔야지요" 라고 하니 "공산당원이란 이름보다 더 크고 좋은 것은 없다"라고 했다고 한다.[39] 반공이 대한민국 이념이 된 이후에 태어난 국민들에겐 낯선, 조선공산당이 얼마나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이 염원하던 독립운동 단체였는가를 알려주는 인상적인 말이다.
11.3. 북조선분국 설치[편집]
1달 후 북한에서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설치된다.[40] 서울의 조선공산당의 통제력이 삼팔선 이북에 미치지 못하는 상황에서 소련군정을 등에 업은 김일성이 주도했다. 북조선분국의 책임비서는 평양 지역에서 가장 거물급 공산주의자였던 김용범이 맡았지만 실제 주도권은 소련군의 지원을 받고 대중적인 인지도도 높았던 김일성이 갖고 있었다. 또한 김용범 본인이 박헌영보다는 김일성을 지지하는 쪽이어서 북조선분국에 대한 박헌영의 영향력은 갈수록 줄어들게 되었다. 박헌영은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감소시킬 수 있는 분국 설치에 부정적이었으나 소군정의 압박을 물리치지 못했다.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은 1946년 초쯤부터는 아예 이름을 북조선공산당으로 부르기 시작했으며 1946년 8월에는 김두봉의 조선신민당과의 합당을 통해 북조선로동당이 되었다. 오늘날 북한의 조선로동당은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만들어진 1945년 10월 10일을 공식적인 창당기념일로 하고 있다.[41]
11.4. 주요 활동과 몰락[편집]
1945년 8.15 광복 이후 미군정기 초기 조선공산당은 미군정 당국으로부터 합법적인 정당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에 온건하게 군정청에 협조했다. 조선공산당은 지금은 사회주의 혁명의 시기가 아니며 선거를 통해 평화적으로 국가를 수립해야 한다는 평화혁명론을 채택했다.
해방 후 조선공산당 중앙이 공식 채택한 8월 테제는 무엇보다 사회주의 세력의 전통적 혁명론을 수정하여 평화혁명론, 곧 평화적인 사회주의 이행전략을 구체화하였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일제시기 이래 사회주의 세력의 일반적인 혁명노선은 무장봉기 노선이나 폭력혁명론이었다. 일반적으로 사회주의세력의 전략전술에서 평화혁명론의 가능성은 극히 제한적이거나 부정되어 왔지만, 해방 후에는 조선공산당의 혁명이행 방식으로 발전하였다. 따라서 평화혁명론은 기존의 전통적인 무장봉기전략을 철회하고, 평화적인 방식의 국가건설 전망을 도출하는 근거가 되었다.
(중략)
평화혁명론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국가권력 장악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선거주의 이행노선에 가까웠다. 실제로 사회주의 세력은 정부수립의 방식으로 선거를 고려하고 있었다. 곧 인공수립이나 미소공위를 통한 정부수립의 마지막 절차도 총선거였다.
김무용,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노선과 국가건설 운동, 2005, p55~57
사회주의혁명의 과업과 성질을 운운하는 것과 같은 극좌적 경향과 싸워야 한다. (중략) 우리가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의 중요 과업(완전 독립과 토지 혁명)을 완전 해결은커녕 이제 시초의 첫걸음을 내디디고 있는 처지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후략)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8월 테제
조선공산당 계열 독립운동가들은 의료보험, 국민연금, 가족수당 등 세부사항까지 260가지에 이르는 청사진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항일투쟁 공로를 대중에게 인정받기도 했고 일제강점기 노동운동으로 전국에 노동자 조직을 만들어놓았던 조선공산당은 최대정당이 되었다. 조선공산당은 정예당원 3만 명의 항일운동 옥살이 햇수를 합치면 6만 년이라고 할 정도로 독립운동 경력이 독보적이었다. 같은 시기 반파시즘 투쟁 공로로 프랑스 공산당, 이탈리아 공산당이 잘 나간 것과 비슷한 현상이다.
일제하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들과 그들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시대적 상황을 염두에 두고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상적인 민족주의자로 출발하였던 이관술이 민족주의자들의 냉담, 비겁한 것과 일제와의 타협 등을 보고 오직 공산주의만이 계급의 이익뿐만 아니라 민족해방에서 유일한 지침이요 정당한 노선이란 결론을 얻어 공산주의자가 되어버렸다고 술회한 것은 비단 그에게만 한정된 것은 아닐 것이다. 이 시기 공산주의자들의 대다수는 식민지하의 민족적 차별에서 출발하였으며 그 기저에는 기본적으로 민족주의 사상이 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략)
이 시기 공산주의 운동을 일방적으로 매도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이 운동은 식민지의 노동자, 농민에 대한 헌신이라는 대의를 표방한 거의 유일한 대안이었다. 수많은 공산주의자들이 일제에 의해 체포, 고문, 학살되었던 것도 이 사상이 일제에 얼마나 위협적이었는가를 증명하는 것이다.
(중략)
(이재유 조서에 따르면 이재유는)"처음에는 단지 민족의식에서 조선은 독립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는데 "조선 적화의 수단으로서 조선 독립을 희망한 것이 아니라 조선 독립이 근본 문제라고 생각하여 그 취지에서 활동"하였다.
김경일,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
다음은 신탁통치 오보사건 이후 존스턴 기자회견 오보사건 당시의 기자와 박헌영의 실제 문답이다. 박헌영은 비록 이후 월북하고 1948년쯤 되면 폭력 노선을 추구하지만, 1946년 박헌영의 대답을 보면 1946년까지는 온건 노선과 민주주의를 추구했음을 알 수 있다. 박헌영은 사회주의 조선이 언제 건설될지는 모르며 지금은 그 단계가 아니라며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라 민주주의 변혁에 나서겠다고 했었다.
기자: 조선은 소비에트화하지 않는가?
박헌영: 조선은 그런 단계에 이르지 않았다. 조선은 현재 민주주의 변혁 과정에서 봉건 잔재를 청소하는 과정에 있다.
기자: 조선에 소비에트국이 건설되면 소련에 편입되는가?
박헌영: 현 계단은 봉건적 잔재를 청소하는 민주주의 변혁 과정에 있으므로 사회주의 조선이 언제 건설될지 모르나 10년 혹은 20년 후에 건설된다 하더라도 조선은 언제나 독립한 나라로 자립한다.출처
한편 질문이 상당히 악의적이며 실제로 대답엔 그다지 문제가 없었는데도 질문 내용 자체가 존스턴 기자회견 오보사건의 오보 내용이 된다. 이에 기자회견에 참석했던 미국인 기자 로버트 콘월이 다음과 같이 존스턴에게 반박했었다.
나는 박헌영이 1월 5일 회견에서 조선인에 의해 조선인을 위해 통치되는 민주주의 조선 이외의 다른 어떠한 것을 원한다고 말하는 것도 듣지 못했다.출처
1946년 5월 미군정은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이라는 고문조작 사건을 만들어 공산당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이란, 미군정이 천만원의 위폐 사건을 조작하여 불과 6명의 노동자와 5명의 독립운동가에게 조선총독부와 미군정이 수백억원의 화폐를 찍으며 발생시킨 초인플레이션의 책임을 전가한 사건이다. 이재유 그룹 출신 조선공산당 지도자 이관술, 6.10만세 운동 지도자 권오설의 동생 권오직, 3차 조선공산당 출신이자 김철수의 동지 박낙종, 송언필이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에 연루되었다. 이관술은 여론조사에서 박헌영과 득표율 차이가 별로 없고 김일성보다 높은 득표를 받은 것에서 알 수 있듯 대중적으로나 좌익 내부에서나 조선공산당을 대표하는 정치인이었다.#
미군정은 일제 조선총독부의 불법적 화폐 남발을 인정‧계승함으로써 위폐로 의심될 정도로 품질이 좋지 않은 화폐를 대량 유통시켰다. 이는 위폐를 제조하여 유통시키기에 최적의 조건이 되었으며, 수많은 위조지폐 사건의 발생으로 이어졌다. 이로 인해 조선인들 사이에서는 위폐처럼 보이는 진폐와 진폐처럼 보이는 위폐가 뒤섞여 화폐 유통 체계에 혼란이 생기게 되었다. 이로 인해 식량 문제, 물가 문제, 실업 문제, 물자 부족 문제 등 여러 가지로 어려운 조선의 경제 상황은 더욱 더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대중들의 불만은 미군정을 향할 수밖에 없었다.
임성욱,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2015
이에 역사학자 김기협은 <해방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42]30억짜리 위폐단이 겨우 1천만 원짜리 위폐 사건을 짜 맞춰 '경제 교란' 책임을 따지다니 소가 웃을 일이다.
김기협, 해방일기
누명 쓴 독립운동가 중 특히 이관술은 해방의 날까지 항일 비밀결사를 만들던 투사 중의 투사이다. 독립운동가 이관술은 친일파 고문기술자 노덕술과 악연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내내 노덕술은 이관술을 고문하며 괴롭혔었는데 해방 후 노덕술은 정판사 사건 조작에 가담했다.
(반제동맹, 경성콤그룹 사건 때)노의 고문에 한번 걸려들면 전부다 고백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죽든지,두가지 길중 하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관술만은 고백하지도,죽지도 않았다. 이관술이 두번째 체포되어 또 노의 모진 고문을 받아야 했다. 노는 자기의 고문기술 기록을 이관술이 깼다고 두번째에는 바로 죽도록 고문했다. 그러나 이관술은 끝까지 버텨 기적적으로 깨어났다. 그래서 고문마 노덕술에게 이긴 이관술이라 하여 이관술의 이름은 독립운동자들 가운데는 불사조와 같이 전파됐었다.
(중략)
(정판사 사건 때)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이 일제때 고문왕으로 악명 높았던 노덕술이었다. 장택상의 진의는 어떠했는지 몰라도 노덕술이 필사적으로 이관술을 체포했다. 얼굴은 권오직이 더 노출되어 있었는데도 권오직은 체포되지 않았다. 이관술과 노덕술과의 만남은 이번이 세번째였다. 이관술과 노덕술은 다 같은 울산 사람이었다. 노는 해방되면서 일제고등계 경찰에서 미군정 경찰로 옮겼고 도리어 영전됐다. 그의 입장에서는 이관술이 살아있으면 자기의 전죄가 언젠가는 폭로될 것을 우려했을 것이다.
(중략)
그는 조국독립 이외에는 세속지사에는 아무 흥미가 없는 것 같은 사람이었다. 그는 이 세상에 나서 독립운동한다고 몇번 경찰에 잡혀 죽을 고문만 당하고 6ㆍ25때 교도소 안에서 죽은 사람이다.
박낙종, 송언필은 박헌영이 싫어서 김철수 중심으로 공산당을 재건하려 했던 사람들인데 아직까지도 누명을 못 벗고 "박헌영의 지령을 받은 간첩" 취급당하고 있다. 이관술, 박낙종, 송언필과 노동자들은 누명을 벗지도 못한 채 학살당하게 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고통엔 공감과 감정이입을 못하고 오직 박헌영 오로지 박헌영이 월북한 것만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조선공산당은 7월 22일 하지에게 장문의 서한을 보내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은 공산당에 대한 가장 악질적인 파괴공작이라고 비판하고, 8개 요구조건을 제시하고, 자위적 수단을 취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김무용,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노선과 국가건설 운동, p151
조선공산당은 정판사 사건의 공판기일을 너무 이르게 잡음으로써 변론 준비 기간을 주지 않으려는 것에 분노하여 7월 '신전술'이라는 방식을 채택해서 강경 노선으로 전환한다. 초창기 미군정에 온건한 노선을 취했던 조선공산당은 정판사 사건을 전후로 '대중적인 투쟁'을 결의하면서 9월 총파업으로 미군정에 맞섰다. 정판사 사건 이전까지만해도 조선공산당은 대중들로부터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일제강점기 항일 독립운동에 있어서 사회주의 계열이 주류였으니까. 하지만, 이 정판사 사건으로 대중들로부터 '공산당'에 대한 이미지가 급격히 매우 나빠지기 시작한다. 경남 하동군의 또 다른 농부는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나는 인민공화국과 공산당이 조선의 재건에 참여할 수 있도록 열심히 일해왔다. 하지만 나는 ‘위조지폐 사건’에 대해 듣고서 충격을 받았다. 당신들은 당신들의 행위에 대해서 할복으로 사죄해야 한다.”
그러나 조선공산당 간부들에 대한 체포령은 대중의 통념과 달리 정판사 사건 때문이 아니다. 박헌영의 경우 적대적 선전활동이 맥아더 포고령 위반이라며 체포령을 내렸다. 그런데 당시 이주하도 비슷한 혐의로 체포되어 6개월 형을 받았다. 이렇게 체포해도 몇 개월 못 가둬두면서 탄압하는 인상을 줘 정치적 부담만 되는 체포령을 내린 것은 현대사의 미스터리 중 하나라고 한다. 대표적으로 서중석의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가 의문을 제기한다.
위 이주하 수감에 얽힌 에피소드로, 이주하는 9월 초 <안녕, 질서에 관한 죄> 위반으로 수감 중이었는데 미군이 자백제로 추정되는 주사를 놓고 박헌영의 행방 등을 심문했다. 이주하는 이에 항의해 단식투쟁을 한다. 이 소식을 듣고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선고 공판만을 남겨 둔 이관술이 이주하를 "동정하여" 출정거부와 단식투쟁을 한다. 재판장은 구인장을 발부하여 이관술을 강제로 출두시킨다. 그런데 이주하와 이관술의 처지를 비교해보면 이주하는 상대적으로 가벼운 죄인데 반해 이관술의 죄명은 너무 끔찍하고 이관술은 직전에 "이 사건은 벌써 유죄로 인정되어 있어 어떤 기정 방침대로 진행되는 것 같은 바에야 나로서는 변호할 필요도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등 스스로 무기징역이 확정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이관술이 이주하를 "동정한다"고 표현한 것이 인상적으로 이관술 성격을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다.#
9월 총파업 도중 노동자에게 발포하자 대구 시민이 분노해서 대구 10.1 사건이 일어난다.
파냐 이삭꼬브나 샤브쉬나에 따르면, 대구 10.1 사건 이전에도 좌익에 대한 테러에 시민들이 분노하곤 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한 아가씨가 좌익 시위에 참여하라는 호소문을 벽에 붙였다는 이유로 그녀를 두들겨 팼다. 몇몇 여자들이 미국 경찰에게 달려가 이 구타를 중지시켜 달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것은 조선인들의 내부 문제다. 우리와 상관없다."라는 익히 알고 있는 대답을 들었다. 그때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깡패들의 손아귀에서 피범벅이 된 여학생을 구해내었다. "바로 이렇게 일본 압제자들이 우리를 구타했다.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모든 사람을 두들겨 팼었다. 심지어 아이들조차도 용서하지 않았다." 나이든 농촌 아낙네가 그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큰 소리로 말했다. 바로 그러한 광경이 1946년 서울의 일상적인 생활이었다.
파냐 이삭꼬브나 샤브쉬나, 1945년 남한에서
조선공산당은 대중적인 정당이 되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1946년 11월 23일, 남조선신민당, 조선인민당과 3당 합당을 추진했다.
결과적으로 공산당 대회파(=반박헌영파)는 사회노동당을 결성하였고 같은 시기에 공산당 간부파(=박헌영파)는 남로당을 결성하였다.자세한 정보
대회파의 요구는 박헌영 측근 위주로 밀실정치하지 말고 당대회를 열어서 당의 노선을 결정하자는 것이었다. (대회파에 우호적이었던) 고준석에 따르면 대회파는 공산당에서 40% 정도의 지지를 얻었다고 한다.
합당 이후의 조선공산당의 행보는 남조선로동당, 사회노동당 참고.
12. 대한민국 건국훈장 수여와 독립유공자 지정의 역사[편집]
박정희 정부 시절인 1968년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강달룡을 독립유공자로 지정하였다. 1977년 경성재건그룹 지도부였던 박영출을 독립유공자로 지정하였다.
전두환 정부 시절인 1983년 조선공산당 기관지를 만드는 활동을 했던 최창식을 독립유공자로 지정했다. 노태우 정부 시절 1991년 김준연 등을 독립유공자로 지정하였다.
김영삼 정부는 일제하 사회주의운동가에 대해서도 유공자로 인정하겠다고 발표하고 1993년 임원근 등 조선공산당원을 독립유공자로 지정했다.
노무현 정부는 조선공산당 활동 자체를 독립운동으로 인정하며 김재봉, 권오설, 김철수, 차금봉, 이재유, 이효정 등을 비롯한 수많은 조선공산당원을 대거 독립유공자로 지정했다. 이후 집권여당의 성향에 관계없이 계속 더 많은 조선공산당원을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로 지정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조선공산당의 대부분의 지도자와 수많은 당원이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가 되었다.
이명박 정부 시절 광복 후 좌우익이 폭력적 충돌하는 사건을 겪은 홍가륵(이미지 좋은 의열단 출신임)이 서훈을 받았다.
문재인 정부 시기 대한민국은 독립유공자 지정 기준을 완화하여 북한 정부 수립에 기여하지 않았으면 독립유공자로 지정할 수 있게 하여 많은 조선공산당, 남조선로동당 당원을 유공자로 지정하였다. 남파간첩 의혹이 있는 손용우가 서훈을 받아서 논란이 되었다.
빨치산 행적이 있는 이응렬(단, 이후 전향), 4.3 사건 당시 남로당원이었던 양병시, 월북한 이경선(단, 4.3 사건에 휘말려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다는 특수성이 있음), 9월 총파업에 참여한 염필수 등이 독립유공자로 지정되는 등 광복 후 좌익활동을 한 독립운동가라도 서훈을 받는 사례가 늘고 있다. 그렇다면 공정성과 형평성을 가지고 이들 정도로 빨치산, 월북, 다소 폭력적 활동한 사람들에겐 똑같이 서훈을 줘야 하는데 찾아보면 그런 것도 아니다. 보도연맹원으로 학살당하거나 월북 후 행방이 묘연하다며 서훈을 못 받은 항일운동가가 수두룩하다. 그러면서 북한 정권과 6.25 전쟁에 참여한 김원봉을 '특별취급해서 예외적으로' 서훈을 주겠다는 논의를 하는 건 형평성을 더 훼손시키는 것일 수도 있다. 물론 김원봉이 서훈을 받으면 다른 독립운동가 서훈 폭도 넓어지겠지만, 공정성과 형평성부터 추구할 필요가 있다. 물론 저 논의를 하는 사람이 대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서훈에 관심있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이 항상 하는 "김원봉은 사회주의자가 아니었다, 진보적 민족주의자였다" 이런 소리는 서훈을 못 받은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를 좋아하는 사람의 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발언이다. 김원봉도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참여했는데, 같은 좌익이면서 약간 더 왼쪽인지 약간 덜 왼쪽인지가 그리 중요한가? 사상의 자유를 인정하는 국가에서 독립운동가를 사상검열해서 소위 "진보적 민족주의자"라는 사상이면 북한 정권 수립과 6.25 전쟁에 참여해도 "예외적으로 특별취급"해주고 공산주의자면 북한이나 전쟁과 전혀 관계 없어도 불이익을 주는 것은 이상하다.
윤석열 정부에서 김명시 등이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독립유공자 지정 기준이 불명확하여, 이관술은 북한 정권 수립과 전혀 관계 없고 국가보안법을 위반하거나 대한민국 정부를 부정한 적도 없이 합법 정당 활동만 했는데 불명확한 이유로 독립유공자 지정을 받지 못하였다. 이관술은 광복 후에도 반곡초등학교 건물을 신축할 때 542평(1791.74㎡)의 땅을 기부하는 등 한국사회에 기여만 하다 죽은 사람이다.
좌우익을 막론하고 광복 후 폭력적인 정치활동을 한 많은 사람들이 서훈을 받고 있는데 얌전히 합법정당 활동만 한 정판사 사건 피고인(고문조작 사건 피해자)이 미서훈인 것과 대비된다. 박낙종이 서훈을 못 받는 건 100% 정판사 사건 때문이다. 정판사 사건이 걸린다면 국가는 조사를 해야 하고 임성욱 박사가 정판사 사건 자료를 다 찾아 놓은 상태라 그 자료 실존이 진실인지만 조사하면 바로 진실규명할 수 있는 사건이다. 그런데도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국민이자 학살 피해자가 위폐범 누명을 쓰고 이 시각에도 마녀사냥 당하고 있는 것을 외면하고 있다.
정판사 사건 조작에 가담하고 독립운동가들를 체포하고 고문한 악질 친일경찰 노덕술은 3차례나 무공훈장을 받은 것과 비교되는 부분이다.외면받는 울산의 독립운동가들.. 재조명 절실
"제가 7살인가? 평생에 우리 아버지를 딱 한 번 보았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하였다 해서 범서(면) 입암리 집에는 일본 순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해방이 되어 6·25가 터지자 그런 아버지에 대한 영광은 간 곳 없고… 저는 천하의 불쌍한 고아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관술의) 막내딸은 평생 아버지 부재의 삶을 살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위태로운 삶을 지탱해주던 후견자들도 난리를 겪으면서 스러져갔다. 엄마 박가야와 두 언니(성옥, 정성)는 6·25 전란 중 행방불명되고 말았다. 비명횡사했는지 아니면 월북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19살에 시집간 큰언니 이정환은 결혼 2년 만에 보도연맹 학살 탓에 남편을 잃었다. 갓난애 하나를 키우며 50 평생을 가난하고 외로운 과부로 살아야만 했다. 작은아버지 이학술도 보도연맹에 가입했다가 전쟁 초입에 학살당했다. 오직 막내딸 경환이만 남았다. 그는 청소년기에 접어들 즈음 ‘천하의 불쌍한 고아’ 신세가 되고 말았다.
13. 관련 인물[편집]
- 이재유 - 경성트로이카 지도자. '당대 최고의 혁명가', '30년대 사회주의 운동의 신화'로 불림. 대중 인지도는 낮지만 그래도 학계에서는 걸맞은 대우를 받기 때문에 바로 아래 독립운동가들처럼 연구 안 하는 학계가 너무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음.
- 이관술 - 경성트로이카와 경성콤그룹 핵심인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지도자. 이관술을 공부해보면 독립운동가를 존경하고 친일파를 미워한다는 사람들이 정작 가장 악질 친일파인 노덕술, 이구범, 최난수 등의 편을 들어 해방의 날까지 일제에 저항한 몇 안 되는 독립투사인 이관술의 명예를 짓밟는 부조리의 극치를 목격할 수 있으니 직접 공부해보길 추천한다. 한국의 어두운 면을 볼 수 있다. 이관술은 독립운동가를 대거 양성했을 뿐 아니라, 1936년 이재유 체포 뒤 1937, 1938, 1939년 이관술이 국내 사회주의 운동을 이끄는 지도자로 전국을 누비며 경성트로이카 성원을 재결합했고 또 박헌영이 연락두절된 1944-1945년에도 경성콤그룹 성원의 지도자로 공산주의자들을 이끌었는데 사람들이 이관술을 투명인간 취급하고 이재유와 박헌영만 공산주의 운동 지도자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 가장 국내 독립운동이 힘든 시기 국내 독립운동을 이끌고 투명인간 취급받다니 하여간 이관술은 정말 불쌍하다.
- 박진홍
- 이순금 - 당대 가장 유명한 여성 혁명가였던 이순금은 놀랍도록 활약했는데 진짜 연구 없는 상태가 너무한 수준이다.
- 이주하 - 원산 공산주의자 그룹 지도자.
- 박헌영
- 이동휘
- 김원봉
- 주세죽
- 조봉암
- 김조이
- 허정숙
- 임원근
- 김삼룡
- 김약수
- 김단야
- 성시백
- 이현상
- 김철수
- 권오설
- 권오직 - 권오설 동생. 경성콤그룹 활동가. 고문조작 사건인 정판사 사건에 휘말려서 월북했더니 북한에서도 숙청당한 사람. 남북이 모두 누명을 씌운 건데, 북한은 원래 그런 국가니까 북한 말은 국제적으로 믿는 사람이 별로 없겠지만 선진국이라는 한국이 진실규명을 미루고 있다는 것이 충격적.
- 리영
- 박갑동 - 광복 후 조선공산당의 해방일보 기자. 조선공산당 해산 후 남로당 활동. 이후 전향.
- 현준혁
- 김명시 - 국제선. 투철한 국제주의자였던 것으로 보임.
- 강달룡 - 6.10 만세 운동 준비
- 최경창 - '콩그룹' 활동. 경성 트로이카의 이관술이 '콩그룹'과 연계하려 한 적 있음. 콩그룹은 경성콤그룹이라고도 하는데 이 경성콤그룹은 유명한 1939년의 경성콤그룹이 생기기 이전에 있던 다른 경성콤그룹이다.
- 홍종례 - '콩그룹' 활동. 경성콤그룹이 생기기 전 있던 다른 조직으로 경성 트로이카의 이관술이 '콩그룹'과 연계하려 한 적 있음.
- 홍종갑
- 김태준 - 국문학자. 경성콤그룹 활동가. 광복 후에는 조선공산당 해산 후 남로당 활동.
- 홍가륵 - 의열단원인데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의 일환인 반제동맹 활동도 했다. 해방 후 근로인민당 활동, 우익 단체와 폭력적 충돌로 수감, 전쟁 시기 학살 피해자
- 안용봉 - 학살 피해자
- 남장 - 학살 피해자
- 김준연
- 문시환
- 태극
- 조규찬 - 반제동맹
- 박문규 - 반제동맹
- 리강국 - 원산공산주의자그룹
- 최용달 - 원산공산주의자그룹
- 박상희
- 김응빈
- 배치문
- 김계향 - 동맹휴학
- 조문환
- 배성룡
- 리승엽
- 서정희
- 신용기
- 신표성
- 안승락
- 정칠성
- 안창대
- 염필수
- 감상두
- 전인발
- 정남국
- 정영한
- 오기섭
- 조기수
- 진병기
- 황직연
- 한위건
- 권목용
- 홍남표
- 주녕하
- 최창익
- 박낙종
- 송언필
- 이경선
- 남상도
- 김시현
- 권태규
- 변기학
- 황태성
- 임순득
- 좌행옥
- 좌공림
- 이병희
- 고광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