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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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조선로동당 정치위원회 위원
허헌
許憲


파일:허헌 사진.png

출생
1885년 7월 22일[1]
함경도 명천현 하우사 사향하리
(現 함경북도 명간군 하평리)[2]
사망
1951년 8월 17일 (향년 66세)
평안남도 안주군
묘소
애국열사릉
본관
양천 허씨[3]

긍인(兢人)
부모
아버지 허추
학력
보성전문학교 (졸업)
메이지대학 법학부 (법과 / 학사)


파일:허헌.jpg

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

1. 개요
2. 일생
2.2. 광복 이후
2.3. 장의위원회 구성
3. 가족
4. 어록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변호사, 정치인.

일제강점기 때 민족 변호사로 유명하였다. 가인 김병로, 애산 이인과 함께 많은 독립운동가들을 변호해 세간에서는 이들을 3대 변호사 3인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가 김병로, 긍 허헌, 애산 이으로 호나 이름에 모두 '인'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광복 이후 여차저차하다 북으로 넘어가 옛 동료들과 헤어지게 된다.[4]


2. 일생[편집]



2.1. 일제강점기[편집]


1885년 7월 22일 함경도 명천현 하우사 사향하리(현 함경북도 명간군 하평리)에서 한학자 허추(許抽)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1세 때인 1894년에 궁내부 경무관으로 부임한 부친을 따라 한성부로 이주하였고, 서부 보민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에 본적을 두었다. 이후 관철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철동)으로 이주하여 본적을 옮기기도 했다.# 부친이 동향인 이용익과 가까워서 어렸을 때부터 이용익의 손자 이종호와 가깝게 지냈다. 이용익은 당시에 벌써 대감이었고, 이용익의 손자 이종호는 허헌과 동갑이었다. 한성부에서 관립계동소학교(현 서울재동초등학교)를 다녔다.

1903년 관립한성덕어학교에 들어갔다. 이곳은 1898년에 설립된 근대식 외국어학교로서, 독일어를 전문적으로 가르친 곳이다. 1906년 2월 11일 훈련원 터에서 YMCA팀과 우리나라 최초의 야구 경기를 벌인 학교로도 유명하다. 개화기에 설립된 근대식 외국어학교로는 덕어학교 외에 일어학교, 영어학교, 한어(중국어)학교, 법어(프랑스어)학교와 아어(러시아어)학교 등을 들 수 있다.

1905년 이용익에 의해 보성전문학교가 개교했는데,[5] 허헌은 이 보성전문학교에 제1회로 입학했다. 궁내부 관리였던 허헌의 아버지 허추가 건강이 나빠져 관직을 그만두고 낙향하면서, 아들 허헌을 이용익에게 의탁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허헌은 이용익 집의 사랑채에 기거하면서 대한제국 규장각 등에서 말단 관리로 일하며 야간에 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그렇게 허헌은 1907년 보성전문 법과를 제1기로 졸업하였고, 이후 일본으로 유학하였다.

1908년 일본 메이지대학 법학부 법과를 졸업한 후 조선에 귀국했다. 그리고 1908년 7월에 시행된 제1회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다. 1908년 광무 변호사법에 의해 치러진 대한제국 1회 변호사 시험에 합격, 대한제국 11호 변호사. 이후 일본 변호사 시험에도 합격. 그 후 보전 법과 동기인 옥동규와 함께 합동 법률 사무소를 개소하고 변호사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1909년 평리원 판사에 맞서서 소송을 진행하다가 상관을 모욕했다는 이유로 변호사 제명 처분을 받았다. 한국 법조사 최초의 변호사 징계 제명 사건이었다. 이에 대해 한인섭 서울대 교수는 <식민지 법정에서 독립을 변론하다>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허헌이 징계 받은 것은 불명예스러운 일이었던가. 전혀 그렇지 않다. (중략) 이 사건은 전근대적 관헌 횡포에 맞선, 근대적 법 지식을 갖춘 변호사의 기념비적 쟁투의 한 장면이라 할 만한 것이다.


그 후 1910년 경술국치를 맞이하자 '변호사 따위 일해봤자 아무런 의미 없다'면서 시국을 개탄, 고향에 은둔하였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일약 유명 인사가 되었다. 운동에 참여한 민족 지도자들을 무료로 변호하기 위해 다시 변호사 일을 시작했고, 해박한 법 지식으로 일제를 당황하게 만들었기 때문. 그리고 이 무렵에 사회활동이나 문화활동 등 광범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변호사협회 단체를 조직해 회장으로 활동하였고, 1920년 10월 경성조선인 변호사회 회장으로 재직 중에 북경에서 개최된 국제변호사대회에 참석했다.

허헌은 노동자, 빈민층을 위한 변호활동에 관심을 두고 나섰으며, 노동자들의 단체행위에 대한 부당해고 문제나 임금투쟁에 대한 문제, 그리고 그 밖의 사회문제로 인한 재판에 변호사로 활동하여 이 분야에서 상당한 신망을 얻었다.

1920년 11월 동아일보 주주로서 감사가 되었고 1921년 3월 함흥 영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했다. 1923년 3월 민립대학 기성회 결성에 참여하고 중앙 집행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3년 11월 보성전문학교 제7대 교장에 취임했다. 그리고 당시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가 정치깡패 박춘금에게 테러를 당해 송진우가 사임하여 1924년 4월 동아일보사 사장 직무 대행을 맡는다. 이어 1925년 조선변호사회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1925년 조선공산당 창당에 참여하면서부터 중도좌파적인 사회주의 성향을 띠게 됐다. 그리고 이때 제3인터내셔널에 조선공산당의 승인을 얻으러 간 조동호, 조봉암상하이 일본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자 이들을 위해 무료 변론을 해주었다.

1926년, 뭔가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 싶다면서 딸 허정숙과 함께 세계 일주를 하였다. 딸 허정숙은 부친인 허헌과 미국까지 같이 여행을 갔었으나, 허정숙은 미국에 그대로 남아 1년간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유학 생활을 하였고, 허헌은 미국에서 그대로 유럽으로 가는 여행을 떠났다.

당시에 세계일주를 하는 사람이 손에 꼽힐 정도로 흔치 않아서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다른 세계일주 여행자는 김성수, 최린, 그리고 화가 나혜석이 있었다. 허정숙이 미국에 머물렀기에 한국 여성 최초의 세계 일주는 나혜석이라고 할 수 있다.

허헌의 여행기는 <삼천리> 잡지에 3회에 걸쳐 연재되었다. 이때 미주 지역을 여행하면서 캘빈 쿨리지 대통령을 만나보기도 했다.#

6개월가량 세계일주를 갔다 온 뒤에 1927년 신간회 창립에도 관여했다. 좌우합작의 독립운동 단체였던 신간회의 조직에 좌파를 대표하여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 결과 1927년 2월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었다.

허헌이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된 때로부터 4달 정도 지나 전라도에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났다. 1929년 허헌은 광주 학생들의 항일정신을 전 국민에게 알리고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기 위해 서울 안국동 네거리에서 신간회가 중심이 되어 조선인대회를 열기로 계획했다. 그러나 사전에 발각되어 일본제국 경찰에게 체포되었고, 소위 다이쇼 8년(1919) 칙령 위반 및 보안법 위반, 치안유지법 위반 등의 혐의로 그해 12월 24일 수감되어# 1932년 1월까지 옥고를 치러야 했다. 허헌이 옥중에 있을 때 그의 부인이 사망하였다.

허헌이 가출옥했을 때 신간회는 이미 해체된 뒤였고, 일제에 의해 변호사 자격도 박탈된 그는 잠시 사업계에 몸담았다가 모든 일을 그만두고 칩거 생활에 들어갔다. 그렇게 서울 자택에서 은신하며 일제와의 타협을 거부했다. 북한은 1937년 보천보 전투에 감명을 받은 허헌이 김일성 선전사업을 열심히 했다고 이빨을 까고 있다. 이 무렵 딸 허정숙이 중국으로 망명을 떠나겠다고 하자 허락했다. 허정숙은 그 뒤 중국공산당과 제휴한 조선 독립운동가들의 항일조직인 조선독립동맹에 참여해 싸우다 광복 이후 북한 지역으로 돌아간다.

1943년 3월 국제동향을 알기 위해 단파방송을 몰래 듣다가 발각되어(단파방송 밀청사건) 다시 일본제국 경찰에 체포되어 연행되었다. 딸 허정숙이 망명한 혐의도 죄명에 포함되어 당시 58세의 나이임에도 심한 고문을 받았다. 그는 2년 정도 옥고를 치르다가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어 1945년 4월 병보석으로 출감했다. 그 뒤 허헌은 황해도 신천군 문화면의 처가로 내려가 달천 온천에서 휴양을 하면서 광복을 맞이했다.

일각에서는 "허헌은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으로 지내면서 친일 단체에 협력했다."라고 친일 의혹 떡밥을 제기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 허헌은 철저한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로 1943년 단파방송 밀청사건 때 연루되어 2년간 옥고를 치르고 1945년 일제 패망 직전에 풀려난 것 등을 감안하면 논리상 맞지 않는다. 더구나, 일제 말기에는 사회적으로 유명한 인사들을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각종 친일단체에 무단 명의도용해서 넣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였다.


2.2. 광복 이후[편집]


파일:단선 단정 반대투쟁 대책 보고하는 허헌.jpg
남북연석회의에서 단선 단정(단독선거 및 단독정부 수립) 반대투쟁 대책을 보고하는 허헌 남조선로동당 위원장.

1945년 8.15 광복여운형이 주도하던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가담하여 부위원장을 맡았다. 조선인민공화국 내각의 국무총리에 선임되었다. 허헌은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6]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중앙인민위원
이승만, 여운형, 허헌, 김규식, 이관술, 김구, 김성수, 김원봉, 이용설, 홍남표, 김병로, 신익희, 안재홍, 이주상, 조만식, 김기갑, 최용달, 리강국, 김용암, 강진, 이주하, 하필원, 김계림, 박낙종, 김태준, 이만규, 이여성, 김일성, 정백, 김형선, 이정윤, 김점권, 한명찬, 유축운, 리승엽, 강기덕, 조두원, 리기석, 김철수, 김상혁, 정태식, 정종근, 조동우, 서중석, 박문규, 박광희, 김세용, 강병도, 이순근, 김무정, 장기욱, 정진태, 이순금, 이상훈
후보위원
최창익, 황태성, 홍덕유, 이청원, 최근우, 김준연, 한빈, 양명, 최원택, 안기성, 정재달, 김오성, 권오직, 김두수, 장순명, 이광, 최성환, 이림수, 현준혁, 김덕영
고문
오세창, 권동진, 김창숙, 정운영, 이시영, 홍명희, 김상은, 장도빈, 김용기, 김관식, 리영출처

이때 여운형, 박헌영과 손을 잡고 진보적 정권을 수립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여운형이 수차례 테러를 당했고, 미군정청이 조선인민공화국의 존재를 부인한 데다, 허헌 본인도 미군정과 제휴하였던 한국민주당우익세력들의 공격 등으로 난항을 겪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김구가 조선인민공화국에서 아래 자리인 내무부장을 배정 받은 것에 대해 이의가 제기되자, 김구가 주장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성을 비판하였다. 그는 "법통이라는 유행어가 있는데 이는 옳지 못하다. 무엇이 법통이며 법통을 주장하는 자가 누구인가? 김구 일파가 법통을 주장하는 것은 부당한 것이다."라고 말하였고, 덧붙여서 "임시정부가 국제 사회에서 승인받지 못하였으며, 더구나 임정 간부들이 개인 자격으로 귀국했다. 이들이 국제 사회 승인을 받았다면 미국이 무기를 제공했을 것이다. 임정이 법통을 내세우는 것은 국민을 기만하는 일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허헌이 김구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졌던 것은 1922년의 김립 피살 사건 때부터라고 볼 수 있다. 허헌과 친분이 깊었던 김립이 이때 김구에 의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암살을 당했던 것.

1946년 2월에는 조선공산당과 그 밖의 중요한 좌익 단체들이 모두 참여하여 조직된 이른바 남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약칭 민전)의 수석 의장이 되었다. 그리고 1946년 11월 남조선로동당이 결성되자 12월 9일, 중앙위원회-중앙감찰위원회 연합회의에서 남로당 중앙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미군정이 공산당 활동을 불법으로 선언하고 허헌에 대한 체포령을 내리면서 활동이 어려워졌다. 결국 1948년에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1947년 리승엽과 함께 북한 지역으로 가서 내려오지 않았다. 그리고 북한의 요직을 두루 거치고 김두봉에 이어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이 되기도 했다. 1949년 6월, 남로당과 북로당의 합당 이후 정치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다가 6.25 전쟁 중이던 1951년 8월 17일, 평안북도로 피난갔던 김일성종합대학 개교식에 참석하기 위해 위험하다는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청천강을 건너다 배가 뒤집히는 바람에 급류에 휩쓸려 익사하였다. 당시 폭격으로 부상당해서 감정제대하고 대학으로 가기 위해서 이동하던 김현식이 현장에 있었는데, 그의 증언에 따르면 허헌은 보트에 실린 자동차 안에 있다가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었다고 한다. 김일성은 병사들을 시켜 허헌의 시신을 찾으라고 지시하였는데, 허정숙의 회고에 따르면 서해 바다까지 떠내려가서 팅팅 불은 허헌의 시신을 겨우 수습했으나 시신조차 결국 못 찾아서 가매장을 해야 했다는 증언도 있다. 전쟁 중임에도 국장이 거행되었고, 1951년 11월 전원회의에서 허헌의 몫이었던 정치위원 자리는 박정애가 승계했다.

파일:/image/001/2011/05/13/PYH2011051311240001300_P2.jpg
김일성이 직접 관도 들었다. 사진 출처는 이곳.

만약 사고사하지 않고 살아 있었다면 남로당계의 거물이었던만큼 6.25 전쟁 휴전 이후 남로당 숙청 때 숙청당했을 수도 있지만, 허헌은 일제강점기 민족 변호사로서의 명성도 갖고 있었던 인물이므로 숙청당하지 않고 남겨뒀을 가능성이 더 높다. 실제로 홍명희 외에 백남운, 이극로, 박문규 등 월북한 인사들 중 숙청당하지 않은 인물들이 몇명 있기도 하고 사후에 북한에서 평가가 괜찮았다는건 김일성과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기도 하기 때문.[7] 또한 일제강점기 때 김일성의 최측근 김책을 변호해준적이 있기 때문에 만주파와도 약간의 인연이 있었다. 허헌은 박헌영 계열의 남로당 주류였다기보다는 자신이 가진 명망 때문에 남로당 위원장 직을 맡았던 측면이 크다.[8]

애국렬사릉 조성 이후 시신이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으며 1990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조국통일상을 추서받았다. 애국열사릉에 묻히고 자녀들도 북한에서 고위 관료를 지내는 등, 남로당계 인사 중 드물게 북한에서도 평가가 괜찮은 편이다.

2.3. 장의위원회 구성[편집]



3. 가족[편집]


본처 정경자(鄭競慈)와의 사이에 딸이 둘이었으나 첫째는 어려서 죽고 둘째 딸 허정숙(본명 허정자)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 유학 중 사회주의를 공부하고 조선에서 박헌영, 주세죽 부부, 조봉암, 김조이 부부와 함께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였다. 그녀는 광복 후에 소련군정 지역에서 활동하였고, 연안파 간부 활동을 하다가 김일성 계열로 넘어가 북한 고위 정치인이 되었다.

허정숙은 주로 문화, 선전 쪽의 업무를 맡았는데, 문화 선전상으로 재임하던 시절 최승희와 마찰이 심했다고 한다. 그리고 결국 최승희를 없애버리는데 성공했다. 물론 최승희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최승희는 허정숙뿐만 아니라 다른 당 간부들, 심지어는 김일성과도 툭하면 싸워댔고, 많은 사람들의 공적이 되었기 때문에 최승희의 숙청이 허정숙의 공로(?)만은 아니다.

허정숙은 자유여성주의 운동을 부르짖으며 몸소 자유연애를 실천했는데, 첫 남편 임원근이 투옥되자, 송봉우와 동거하며 아이를 낳았고 1929년 그가 사회주의에서 사상 전향하자, 또 다른 남자 신일룡과도 외도, 출산한다. 이후 최창익과 3번째 결혼 및 출산한 뒤 1946년 이혼했고, 최창익이 숙청당할 때 그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다. 이 시점에서 허정숙은 이미 연안파가 아닌 김일성 쪽으로 넘어간 상황이었다. 허헌은 첫 사위 임원근이 투옥 중에 그 변호를 맡고 있었는데, 딸이 송봉우와 동거하며 아이까지 출산하자 정신적 충격이 아주 컸다고 한다.

본처 이외에 재혼을 하기 전까지 오(吳) 씨, 최(崔) 씨 등과의 사이에서 2남 1녀를 두었으며, 재혼한 후처 유문식(柳文植)과의 사이에서 4남 2녀가 더 있다. 그 중 맏딸이자 (허정숙에 이은) 둘째 딸인 허근욱(1930~2017)은 아버지를 따라 월북했으나 곧 북한 생활에 염증을 느껴 6.25 전쟁 와중 남편 박노문과 아들을 데리고 월남했다. 월남 초기에는 아버지와 이복언니 등 가족이 북한의 고위직이라는 이유로 종종 간첩 혐의로 수사를 받거나 수감되는 고초를 겪었으나 1959년 KBS에 입사하여 라디오 방송작가이자 소설가가 되었다. 1989년 KBS에서 정년 퇴직한 사회단체에서 활동하여 남북문학교류위원회, 민족평화통일자문위원회, 한국여성문학인회 이사 등으로 활동하다 2017년 3월 25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역시 후처 출생이자 총 6남 4녀 중 7번째인 허종욱(許琮旭)은 훗날 허종(許鍾)으로 개명했으며 북한의 UN 차석대사 및 외교부 순회 대사를 역임했다고 허근욱이 밝힌 바 있다.#


4. 어록[편집]



1949년 6월 25일, 평양에서 열린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제1차 결성 대회에서 남긴 육성 연설이 있다.

"나는 보성전문학교 교수, 변호사, 동아일보사 기자 등 3가지 명함을 들고 구미를 시찰했다. 어떤 명함이 가장 효과적이었느냐 하면 신문기자 명함이었다. 구미에서 신문기자처럼 권위 있고 자유스러운 것은 없을 것이다. 문자 그대로 무관의 제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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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4년 8월호 『신동아』 기고.


"3.1 운동은 우리 조선 민중의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반항을 가장 집중적으로 표시한 역사적인 전 민족적 투쟁이었다. 그러므로 3.1 운동의 정신을 이어받는다는 것은 우리 민족의 완전한 자주독립 국가 수립을 다짐하고 그 목표를 향해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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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6년 3월 3일 『해방일보』 기고.


"우리의 해방은 우리의 자력으로 된 것이 아니므로 국제적인 제약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그런 뜻에서 우리는 미소공동위원회를 거부할 것이 아니라 도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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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6년 7월호 『인물평론』 기고.


"테러에는 테러로 대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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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9년 6월 25일 연설.


"조선 인민은 38선을 국경으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지금도 인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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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6월 『인민』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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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력 6월 11일.[2] #[3] #[4] 참고로 김병로는 초대 대법원장, 이인은 초대 법무부장관이 되어 모두 신생 대한민국 사법계의 개국공신이 되었다.[5] 이용익은 원래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의 설립자다. 많은 사람들이 고려대의 설립자를 인촌 김성수로 알고 있는데, 인촌은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여 고려대학교를 창립했다. 그래서 보성전문학교를 기원으로 삼는 고려대학교는 이용익을 창립자로 여긴다.[6] 대한민국의 초대 대법원장인 김병로가 이 내각에서 법무부장관이었던 것을 보면, 광복 당시 허헌의 위상이 김병로의 위상보다 더 높았음을 알 수 있다.[7] 김일성이 허정숙을 고위직에 앉히면서 중용한 이유도 허헌을 존경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8] 또한 김일성 회고록에 따르면 허헌은 박헌영을 싫어해서 김일성에게 박헌영을 조심하라는 조언을 해줬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