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공산당 (문단 편집) === 4차 조선공산당 === 1928년 2월에 제4차 조선공산당이 조직되었다. 3월에는 노동자 출신 차금봉이 책임비서로, 정치부장 안광천, 정치부 위원 양명·한명찬(韓明燦), 조직부장 김한경(金漢卿), 조직부 위원 한해(韓海)·이성태(李星泰)·윤택근(尹澤根) 등 대부분 새로운 세대의 활동가들로 교체되었다. 1920년대 1~3차 조선공산당의 주요 핵심멤버들이 양반, 지식인 계층 출신들이었던 것과 달리 차금봉은 철도 노동자 출신으로 '노동자 출신으로 최초로 정당의 책임비서가 된 인물'이다. 고려공청도 김재명을 책임비서로 하는 새 간부진을 구성했다. 4차 조선공산당의 1928년 3월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는 「조선민족해방운동 관한 테제(정치논강)」에서 당시 조선혁명의 성격을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으로 파악하면서, “조선의 장래 권력형태는 조선사회의 정세에 기초한 혁명적 인민공화국이어야 한다. 조선에 소비에트공화국을 건설하는 것은 좌익소아병적 견해이고 부르조아공화국을 건설하는 것은 우경적 견해”라고 하였다.[* 출처: 전명혁이 쓴 한국민족문화대백과] 4차당은 일본부를 일본총국으로 개칭하고 만주총국과 북경지부 간부진도 재정비했다. 국내에서는 [[신간회]] 32개 지회에서 당원들이 활동 중이었다. [[근우회]] 내에도 조원숙을 책임자로 하는 야체이카(세포조직)가 조직되어 있었다. 기관지도 더 확보하여 일본에서 『청년조선』, 만주에서 『혁명』, 『불꽃』을 추가로 간행했다.[[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2829615&cid=62049&categoryId=62049|출처: 박찬승]] 그러나 1928년 7월~10월 사이에 170명이 검거되며, 4차당도 사실상 해체 상태에 들어갔다. 특히 그해 12월에 나온 코민테른의 「12월테제」는 조선공산당의 해체를 사실상 기정사실화했다.[[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2829615&cid=62049&categoryId=62049|출처: 박찬승]]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