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준(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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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준
金台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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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05년 11월
평안북도 운산군
사망
1949년 11월
서울시 수색 모래내

天台山人
학력
운산공립보통학교
영변공립농업학교[1]
이리농림학교
경성제국대학 예과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지나어문학전공/문학사)

1. 개요
2. 생애
2.1. 문학자
2.2. 공산주의자



1. 개요[편집]


일제강점기의 한문학자(漢文學者)이자 국문학자로 호는 천태산인(天台山人). 박진홍의 남편.

1930년 조선 최초의 비교문학적 국문학 연구인 《조선소설사》를 《동아일보》에 연재함으로써 두각을 나타냈다.《조선한문학사》를 발간, 한문학과 국문학을 접목시킴으로써 한국문학사를 정립시켰다. 저서에 《조선가요집성》외 다수가 있다.

연합아카이브 참조. <임경석의 역사극장> 주인공이 되었다: 개교 이래 제일가는 수재의 퇴학, 긴 독립 투쟁사의 첫 장면 / 의사로 위장한 부부…독립운동, 세 번의 사지를 넘다

2. 생애[편집]



2.1. 문학자[편집]


1905년 11월 평안북도 운산군의 한문학자 집안에서 태어나 영변농업학교와 이리농림학교를 졸업하고, 구제중학교/고등보통학교 출신이 아닌 자로서는 최초로 1926년 4월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입학했다. 대학예과 입학시부터 한문(漢文)의 대가로 이름 높았으며 1928년 예과를 수료하고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로 진학하여 지나어문학전공(중어중문학과)을 택하고 1931년 3월 문학사로 졸업했다. 경성제대 재학 시절 신라 향가와 이두를 연구한 오구라 신페이(小倉進平) 경성제대 교수 밑에서 국문학 연구에 힘썼으며 유진오의 ‘경제연구회’에 들어가 사회주의 이론을 공부하였다. 1930년에는 ‘조선소설사’를 「동아일보」에 68회에 걸쳐 연재하여 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31년 3월 대학을 졸업한 후, 조선총독부 소관 유교교육기관으로 기존 성균관을 개편한 경학원의 직원(直員) 겸 명륜학원의 강사로 임명되어 한문학(漢文學)를 가르쳤다. 그해 경성제대 법문학부 문학과 동창 조윤제·이희승·김재철 등과 함께 조선어문학회를 결성하고 <조선어문학보>와 ‘총서’를 펴내는데 참가했으며 우리나라 한문학과 소설의 역사를 다룬 <조선한문학사>(1931)와 <조선소설사>(1933)를 잇따라 펴냈다.

1934년 5월 한국의 역사·언어·문학을 연구하는 진단학회를 창립하고 상무위원이 되었으며 기관지 <진단학보> 편집인으로 활동했다. 같은해 역대 고전가요를 취사하여 편집한 <조선가요집성>을 출간했다. 이 책은 신라향가편, 백제고가편, 고려가사편, 이조가사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현재에도 우리나라 시가(詩歌) 연구의 기초자료로 중시되고 있다. 1938년에는 한국 고전문학에 대한 뛰어난 연구성과를 인정받아 손진태, 김두헌과 더불어 학술연구보조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제국 학사원(學士院)으로부터 거액의 연구보조금을 받았다.

1939년에는 정년퇴직하는 조선어문학 제2강좌(조선문학) 담임교수 다카하시 토오루(高橋亭)의 후임으로서 조선문학 강좌를 홀로 책임진 강사로 피임되어 1941년 경성콤그룹 사건으로 구속, 면직될 때까지 모교에서 강의하였다. 1939년에는 그간의 연구성과를 모아 학예사의 ‘조선문고’ 시리즈로 <증보 조선소설사>를 펴냈고 <원본 춘향전> <고려가사> <청구영언> 등을 교열하여 출판했다.

김태준은 1930년부터 1939년까지 한국 고전문학사의 기념비적 저작인 <조선한문학사>, <조선소설사>, <조선가요집성>을 집필했을 뿐 아니라 각종 신문 잡지 학술지에 「별곡(別曲)의 연구」 「조선가요개설」 「시조기원에 대한 재고」 「조선민요의 개념」 「춘향전의 현대적 해석」 「조선소설발달사」 「홍길동전 연구」 「구운몽의 연구」 등 다양한 분야의 논문과 평론을 무수히 발표했다. 이러한 그의 연구성과는 현재까지도 국문학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특히 <조선한문학사>와 <조선소설사>는 비록 제한된 자료와 실증적 방법상의 한계가 있으나, 각 분야에서는 최초의 통사적 기술로서 국문학 연구사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평가받고 있다.


2.2. 공산주의자[편집]


명륜전문학교 조교수 및 경성제국대학 강사로 재직 중이던 1940년부터 경성콤그룹에 참여했다가 검거되어 1941~43년 옥고를 치렀다.

경성콤그룹 멤버가 다시 활발한 활동을 시작하였다. 최고지도자인 박헌영 동무는 어대 있는지 모르나 이관술 동무는 울산서 도망해서 대전으로 오고, 이현상·이주상 두 동무는 경남으로 갔다가 적에게 발견되어 다시 대전으로 오고, 인천 최, 하동의 윤과 조, 조의 친구인 이채래, 채래의 친구인 신설정 황 그룹이 직접간접으로 연계되었다.

김태준, 연안행


항일 무력운동의 가능성을 탐색하기 위해 1944년 11월부터 1945년 4월까지 일제의 경계망을 뚫고 국외로 탈출해 중국 연안으로 갔다가 1945년 8월 일제의 패망 소식을 듣고 11월 귀국했다.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중앙인민위원
이승만, 여운형, 허헌, 김규식, 이관술, 김구, 김성수, 김원봉, 이용설, 홍남표, 김병로, 신익희, 안재홍, 이주상, 조만식, 김기갑, 최용달, 리강국, 김용암, 강진, 이주하, 하필원, 김계림, 박낙종, 김태준, 이만규, 이여성, 김일성, 정백, 김형선, 이정윤, 김점권, 한명찬, 유축운, 리승엽, 강기덕, 조두원, 리기석, 김철수, 김상혁, 정태식, 정종근, 조동우, 서중석, 박문규, 박광희, 김세용, 강병도, 이순근, 김무정, 장기욱, 정진태, 이순금, 이상훈
후보위원
최창익, 황태성, 홍덕유, 이청원, 최근우, 김준연, 한빈, 양명, 최원택, 안기성, 정재달, 김오성, 권오직, 김두수, 장순명, 이광, 최성환, 이림수, 현준혁, 김덕영
고문
오세창, 권동진, 김창숙, 정운영, 이시영, 홍명희, 김상은, 장도빈, 김용기, 김관식, 리영출처

1945년 12월에는 총장 선출을 놓고 의견이 합치되지 않던 경성대학에서 합동 교수회가 아닌, 직원들까지 모두 포함한 대학 총회에서 총장 선출을 부르짖는 좌익 계열 조교들의 일방적인 전학대의원회 소집이 있었다.그리고 유진오, 이숭녕 등의 회고에 따르면, 김태준은 박문규, 이강국과 함께 구두투표에서 총장 후보로 공선되었고, 그가 총장에 선출됐으나 당연히 미군정청의 인정을 받지 못해 해리 앤스테드가 이후 미군정에 의해 경성대학 총장으로 임명되었다.동아일보 1974년 5월 16일자

1946년 11월 남조선노동당의 문화부장에 임명됐고, 1947년 ‘8·15폭동 음모사건’ 연루자로 연행되어 일시 투옥됐다가 석방됐다. 이후 이현상이 이끌었던 지리산 조선인민유격대의 사상교육을 맡았다. 남조선노동당 간부로 문화공작과 특수정보 분야의 지하활동을 하다가 1949년 7월 체포되어 이적간첩죄로 재판을 받고 11월 7일 총살로 처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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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학년 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