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공산당 (문단 편집) === 1차 조선공산당 === [[코민테른]]은 1922년 12월 블라디보스토크에 코민테른 산하 꼬르뷰로(고려국)를 설치했다. 꼬르뷰로의 지시에 따라 김재봉 · 김찬 · 신철 등이 국내에 파견되어, 1923년 6월경 조선공산당의 준비기관으로서 꼬르뷰로 국내부 청년회를 조직했다. 주로 화요회계와 북풍회계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청년회와 노농단체 내부에 조직 기반을 넓혀, 1925년 조선공산당이 조직될 즈음에는 서울에 8개, 지방에 10개의 당 야체이카(3~5명으로 이루어진 세포 조직)와 130명의 당원을 확보하고 있었다.[[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2829615&cid=62049&categoryId=62049|출처: 박찬승]] 한편 서울청년회계는 별도로 공산당 결성을 추진했다. 서울청년회계도 청년회와 노농단체를 중심으로 조직 기반을 넓혀, 이를 토대로 1924년 5월 고려공산동맹을 조직했다. 꼬르뷰로 국내부와 서울청년회계는 경쟁적으로 전위당을 준비하고 있었다.[[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2829615&cid=62049&categoryId=62049|출처: 박찬승]] 참고로 서울파 연구는 전명혁 교수의 연구가 대표적이다. 꼬르뷰로 국내부는 4단체(화요회, 북풍회, 조선노동당, 무산자동맹회) 합동을 추진하고,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와 조선기자대회를 추진했다. 서울에서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와 전조선기자대회가 열려 경찰의 눈이 그쪽으로 쏠려 있는 가운데, 1925년 4월 17일 오후 중국음식점 아서원에서 조선공산당 창당대회가 비밀리에 열렸다. 김재봉을 책임비서로 선출하고, 김찬 · 조동호 · 김약수 · 정운해 · 주종건 · 유진희 등 7명으로 중앙집행위원회를 구성했다.[[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2829615&cid=62049&categoryId=62049|출처: 박찬승]] 다음 날인 4월 18일에는 박헌영의 집에서 공산주의자 20명이 모여 조선공산당 산하 청년조직인 고려공산청년회를 조직했다.[* 조선노동당은 1924년 11월의 공안사건에 연루되어 함부로 나다니기에는 어려운 탓에 그 쪽 인사들은 별로 참석하지 못했다. 조선노동당은 아서원에서의 회동 이후에 조선공산당에 참여한다.] 4월 18일 김찬의 집에서 제1차 중앙집행위원회를 열어 각 부문에 야체이카를 조직할 사람들을 뽑았다. 1920년대는 [[문화 통치기]]라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 같은 시위가 가능했다. 일제의 폭압적 통치는 1930년대 이후부터 심해져 1940년대 전시체제 하 극에 달한다([[민족 말살 통치기]]). 조선공산당은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청의 창립 인준을 받기 위해 조동호를 정식 대표로, 조봉암을 부대표로 지명하여 모스크바에 파견했다. 1926년 3월 코민테른은 조선공산당을 코민테른 지부로서 인정하고, 여타 그룹들을 공산단체로 인정하면서 통일된 당을 만들 것을 촉구했다.[[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2829615&cid=62049&categoryId=62049|출처: 박찬승]] 1차 조선공산당은 수차례 집행위원회를 열어 기관지 발행, 만주총국 설립, 고려공청 지원, 노농총동맹 분립 등을 논의했다. 고려공청은 조선청년총동맹에 들어가 27개의 군 동맹과 9개의 도 연맹을 조직하고 모스크바 공산대학에 21명의 학생을 파견했다.[[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2829615&cid=62049&categoryId=62049|출처: 박찬승]] 조선총독부는 1925년 5월 [[치안유지법]]을 실시한다고 공포했다. 치안유지법 제1조는 “국체를 변혁 또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할 목적으로 결사를 조직한다든가 또는 그 사정을 알고 이에 가입하는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에 처한다”라고 규정했다. 공산주의운동가들을 탄압하기 위한 법령이었다. 이후 조선의 사회주의운동가들은 대부분 치안유지법 위반의 사상범으로 투옥되었다.[[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2829615&cid=62049&categoryId=62049|출처: 박찬승]] 1925년 11월 신의주 고려공청 회원의 부주의한 경찰 폭행 사건으로 조선공산당에서 코민테른에 보내는 문서가 경찰에 발각되어 조선공산당의 실체와 조직이 드러나 대대적인 검거선풍이 불었다. 그 결과 당 책임비서 김재봉, 고려공청 책임비서 박헌영 등 모두 220명이 검거되었다. 이 가운데 치안유지법과 정치범처벌령, 출판법 위반 등으로 101명이 재판에 회부되어 83명이 유죄판결을 받고 2명은 옥중에서 사망했다.[[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2829615&cid=62049&categoryId=62049|출처: 박찬승]]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