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공산당 (문단 편집) === 2차 조선공산당 === 제1차 조선공산당의 김재봉, 김찬, 주종건 등은 검거되기 전에 후계당 조직을 준비했다. 그리하여 1925년 12월 말부터 1926년 1월 초 사이에 강달영([[강달룡]])을 책임비서로, 이준태 · 이봉수 · [[김철수(독립운동가)|김철수]] · [[홍남표(1889)|홍남표]] · 권오설 등을 중앙집행위원으로 하는 제2차 조선공산당이 구성되었다. 고려공청은 1차당의 중앙집행위원이던 권오설을 책임비서로 하여 6인으로 구성된 중앙집행위를 새로 조직했다. 이후 2차당은 조직을 확장해 146명의 당원과 119명의 후보당원을 확보했다. 또 해외에도 조직을 만들어 [[만주]]에 만주부, [[도쿄]]와 [[상하이]]에 임시연락부를 설치했다. 2차당은 민족주의자들과의 연대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2829615&cid=62049&categoryId=62049|출처: 박찬승]] 2차당이 조직한 6.10 만세운동은 조선공산당의 가장 성공적인 대중투쟁이었다. [[6.10 만세운동]] 투쟁지도특별위원회는 상하이로 피신한 김찬 · 김단야, 그리고 조봉암 등의 1차당 지도부의 지도를 받고, 권동진 등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의 지원을 받으면서 여러 종의 삐라를 만드는 등 전국적 규모의 대중시위를 준비했다.[[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2829615&cid=62049&categoryId=62049|출처: 박찬승]] 조선공산당은 천도교 구파, 조선노농총동맹과 연대하여 [[6.10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했다. 그에 따라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인 권오설이 운동의 총책임을 맡게 되었다. 권오설은 지방에서는 천도교나 조선노농총동맹 조직에 의지하고, 서울에서는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조직을 이용한다는 계획을 세웠다.[[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2829616&cid=62049&categoryId=62049|출처: 박찬승]]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권오설.jpg|width=100%]]}}}||{{{#!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권오직.jpg|width=100%]]}}}|| ||'''[[6.10 만세 운동]]을 기획한 [[권오설]]'''||'''권오설의 동생 [[권오직(1906)|권오직]]은 이후 조선공산당 재건운동가로 활약한다.'''|| 고려공산청년회의 지도를 받는 조선학생과학연구회와 경성의 각 학교 대표 40여 명은 5월 20일 모임을 갖고 투쟁 방법 및 자금 조달 등에 대해 의논했다. 학생들은 박두종(YMCA 영어과), 이천진([[경성제국대학]]), 박하균([[연희전문학교]]), 이병립(연희전문), 이선호([[중앙고등보통학교]]) 등이 선임되었다. 이들은 박용규(중앙고보), 곽대형([[중동고등학교|중동학교]]) 등이 따로 운동을 준비하는 것을 알고, 서로 역할을 분담했다. 그런데 [[천도교]]에서 준비하던 전단이 [[일본 경찰]]에 의해 우연히 발각되고, 이어서 조선공산당 조직이 6월 6일 발각되는 바람에 준비해둔 전단은 모두 압수되었다. 이에 조선학생과학연구회 측은 급히 격문과 전단을 다시 인쇄했다. 또 6월 8일과 9일, [[태극기]]와 [[대한독립만세|조선독립만세]]기, 격문 약 1만 매를 제작했다. 중앙고보의 이선호는 10일 아침 학교에서 류면희, 임종업, [[이현상]] 등에게 이것을 나누어주고 시위현장에서 뿌리도록 지시했다.[[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2829616&cid=62049&categoryId=62049|출처: 박찬승]] 10일 오전 8시 반 [[순종황제]]의 장례 행렬이 종로 3가 [[단성사]] 앞을 막 통과할 즈음, 이선호가 길로 튀어나와 격문을 뿌리고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류면희 · 임종업 · 이현상 등은 격문을 뿌리고 만세를 선도했다. 연도에 도열해 있던 [[중앙고등보통학교]] 학생들도 만세를 불렀다.[[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2829616&cid=62049&categoryId=62049|출처: 박찬승]] >현재 세계 정세는 [[식민지]] 민중 대 [[제국주의]] 군벌의 투쟁과 [[무산자]] 계급 대 [[자본가]] 계급의 투쟁으로 전개되고 있다. 제국주의 군벌에 대한 식민지 민중의 투쟁은 민족적 정치적 해방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며, 자본가 계급에 대한 무산자 계급의 투쟁은 계급적 경제적 해방을 목적으로 한 것이다. > >그러므로 식민지에 있어서는 민족 해방이 곧 계급 해방이고 정치적 해방이 곧 경제적 해방이라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식민지 민족이 총체적으로 무산자 계급이며 제국주의가 곧 자본주의이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현재 우리는 당면한 적인 침략국 [[일본]]으로부터 정치적 경제적인 모든 권리를 탈환하지 않으면 죽음의 땅을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 >형제여! 자매여! 눈물을 그치고 규탄하라! 전 세계의 피압박 민족과 무산자 대중은 모두 함께 정의의 깃발을 들고 우리와 함께 보조를 맞춰나갈 것이며, 붕괴하고 있는 제국주의의 하나인 일본 지배 계급도 운명이 다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에게도 명백하다.(중략) > >형제여! 자매여! 최후까지 싸워 완전 독립을 쟁쥐하자! 혁명적 민족운동자 단체 만세! 조선독립만세! >---- >[[6.10 만세운동]] 전단[* 출처:안재성, 잃어버린 한국 현대사]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6.10 만세 운동)] 소설 [[삼대]]의 배경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