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선(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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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이경선(1914)-1936년.png

1936년 1월 6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창씨명
노무라 케이센(乃村景仙)
이명
이연순(李蓮順)
본관
고부 이씨[1]
출생
1914년[2] 5월 14일
경기도 시흥군 서이면 안양리
(現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안양동)[3]
원적
전라남도 제주군 대정면 가파리 342번지
(現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가파리)
사망
몰년 미상
북한
학력
대정공립보통학교 (졸업)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
이화여자전문학교 (제적)
나가노의학전문학교 (제적)
고베약학전문학교 (졸업)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 개요
2. 생애
3. 여담



1. 개요[편집]


대한민국독립유공자. 이관술의 제자로 반제동맹 독서회의 핵심 활동가였으며 경성트로이카에 참여했다. 광복 후 제주 4.3 사건에 휘말렸다. 2021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으면서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었다.


2. 생애[편집]


1914년 5월 14일 경기도 시흥군 서이면 안양리(現 안양시 만안구 안양동)에서 가파도 출신의 항일인사였던 아버지 이도일(李道一, 1897. 5. 20 ~ 1971. 5. 29)[4]과 어머니 경주 김씨 김응주(金應珠, 1896. 2. 16 ~ 1972. 1. 7)[5] 사이에서 1남 1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도일이 경기도 시흥군에서 수산물 도매상을 하던 때에 태어났으나 어릴 때 부친의 고향 가파도로 가 성장해서 보통 이경선도 제주 출신 독립운동가로 여겨진다.

그녀의 장래희망은 의사가 되는 것이었다.


파일:1932졸업앨범동덕여고.jpg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1932년 졸업앨범 속 학교 전경

대정공립보통학교를 거쳐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평소 교사 이관술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었는데, 특히 3학년 때이던 1931년 10월에는 이관술의 지도하에 교내에 항일 독서회를 조직하고 사회주의 서적을 읽고 토론했다. 이경선은 이관술이 만든 경성반제동맹의 핵심 활동가였다.


파일:반제동맹활동개요.jpg

파일:반제동맹조직책동.jpg
파일:반제송국.jpg
반제동맹을 보도한 기사 중 일부. 반제동맹은 대대적으로 보도된다.

그 뒤 이재유로부터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및 다른 여학교 학생 중에 동지를 확보하라는 지시를 받고, 1932년 12월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에 다니던 제주도 친구인 김주원(金周援)의 집에서 같은 학교 방순랑(方奉嫏)·신진순(申進順) 등과 함께 독서회를 조직하고 활동했다. 그러나 1933년 1월 경성부 종로경찰서에 검거되었다가 훈방되었고, 그해 2월 독서회 활동 혐의로 다시 경성부 서대문경찰서 고등계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으나 2월 21일 재차 훈방되었다.[출처]


파일:이경선(1914)-1934년.png

1934년 5월 25일, 경기도경찰부 형사과에서 촬영된 사진.

1933년 3월에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이화여자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한 학기 만에 퇴학당했다. 그해 6월부터 이재유가 이끄는 경성트로이카에 가담해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등 여자중등학교 책임자에 선임된 뒤 독서회 활동을 지도하여 동맹휴학을 이끌어 내었다. 이후 경성트로이카 김삼룡의 지도하에 경기도 시흥군 소재 조선직물주식회사(朝鮮織物株式會社) 인견공장에 여공으로 위장 취업하여 여공들을 동지로 포섭해 적색노동조합을 조직하려고 시도했고,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힘썼다. 그러나 1934년 2월 21일 경기도경찰부에 생애 세 번째로 체포되었고 1935년 12월 2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 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미결 구류일수 중 100일 통산),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아 곧 석방되었다.[출처]

출옥 후 일본으로 건너가 고베시의 나가노의학전문학교에 진학했으나 1941년 12월 9일 효고현 무코군(武庫郡) 모토야마촌(本山村) 나카노(中野)[6]에서 네 번째로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당했다. 이후 석방되었으나 퇴학 처분을 받았고, 1942년 10월 고베약학전문학교에 진학했으나 다시 체포되어 1942년 12월 24일[7] 고베구지방재판소에서 이른 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형을 선고받아 복역하였다.[출처] 1944년 2월 29일 출옥했고, 고베약학전문학교에 복학해 졸업한 뒤 8.15 광복을 맞아 귀국했다.

귀국 후에는 오영조(吳榮造)[8]와 결혼하여 제주도에 살았다. 1946년 12월에 조선부녀총동맹 중앙집행위원회 산하 선전부에 참여하기도 하였다.[출처]

1947년 부친 이도일이 초대 대정중학교 교장으로 부임하면서 이경선도 대정중학교 교사로서 물리화학을 담당했다. 이때 김달삼도 대정중학교에서 교사로 재직 중이었는데, 김달삼이 학생들에게 사회주의 사상을 주입하자, 이경선은 학생들이 피해를 볼까봐 사회주의를 선동하지 말라며 김달삼을 야단치고 부친에게 말해 해고시켰다.

이후 김달삼은 4.3 사건의 주동자가 되고 이경선은 제주 4.3 사건에 휘말려 연행되었다가 극적으로 탈출했다. 이후 일본으로 피신해 그곳에서 약국을 경영했으며, 재일교포 북송북한으로 간 뒤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2021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3. 여담[편집]


  • 특이하게도 유족이 독립유공자 서훈 신청을 하지 않았는데도 독립유공자에 서훈되었다.

  • 이경선의 남동생 이경암(李景岩, 1945. 5. 12 ~ )은 "아버지는 대정 지역에서 주정공장을 운영해서 남부럽지 않게 잘 살았지만 누나는 기득권을 버리고 항일운동에 전념했다"며 "4·3의 회오리 속에 아버지와 함께 일본으로 간 누나는 결국 고향 땅을 밟지 못하고 이북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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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벽동공파(碧潼公派) 33세 경(景) 항렬.[2] 1934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1915년생으로 기재돼 있다.[3] #[4] 고부이씨 벽동공파 종친회 부회장을 역임했다.[5] 김명환(金明煥)의 딸이다.[출처] A B C D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6]고베시 히가시나다구 모토야마초(本山町) 나카노(中野).[7] 수형인명부에는 1942년 10월 23일로 기재돼 있다.[8] 고부이씨대동보 권4 867쪽에는 오철영(吳鐵榮)으로 등재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