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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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담



1. 여담[편집]


  • 1980년 9월, 대통령 취임이후 전두환은 광주를 방문하였는데 광주를 방문한 자리에서 그는 지난번 광주의 시끄러운 일(?!)은 역사흐름의 불가피한 진통이므로 (전남)도민들이 80년대 새역사창조에 선도적인 역할을 하면 나도 용기를 갖고 국민들께 충성을 다할 것이다라는 망언을 하여 논란을 빚었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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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명한 골초였다. 공식 석상에서 담배를 피워대는 모습은 당시 사진이나 방송영상에서 꽤 많이 보여왔고, 심지어 본인의 퇴임식에서도 연단에서 줄담배를 피웠다. 당시 전매청(현 KT&G)에서 전두환이 피는 담배는 최고급 연초[3]만을 엄선해서 납품했다고 한다.[4] 청와대 정례회의 때 본인은 한두 가치 정도만 피우고 늘 놔두고 갔는데, 관료들이 서로 나눠 가지려 했었다고 한다. 1997년에 출소한 이후 나이도 많고 해서 건강을 위해 담배를 끊었다.

  • 식성은 육회, 갈비찜, 수육, 편육육식을 즐기는 편이고[5] 도 매우 좋아한다고 알려졌다. 전반적으로 맵고 자극적인 음식을 선호했다고 하며 중국 요리도 좋아했다.# 건강이 빨리 망가지기 쉬운 식습관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전두환은 구순이 넘은 2020년까지도 건강한 체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친구인 노태우가 칠순이 갓 넘은 2002년부터 전립선암과 소뇌 위축증을 앓아 19년 넘게 투병하다 사망한 것과 후임자들인 김대중이명박이 당뇨병 및 고혈압으로 고생한 것과 비교된다. 다만 전두환의 장수 비결이라고 꼽힐만한 게 하나 있긴 한데 바로 꾸준한 운동. 임기 중에 했던 육성 인터뷰에서도 인도어에서 골프를 400개씩 친다고 발언할 정도로 꾸준히 테니스와 골프 등 운동을 즐겼고 젊은 시절 축구 선수로 활동할 정도로 기초 체력이 워낙 튼튼했던 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듯 하다. 전두환은 육식주의자라서 비만에 각종 질병을 앓고 있다고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만[6] 전두환은 그 어떠한 질병에도 시달린 적이 없으며 비만은커녕 몸무게도 70kg대를 넘긴 적이 없고 사망할 때까지 60kg대의 정상 체중을 유지했다.[7] 이는 전두환 본인이 살이 찌지 않는 체질인 것도 있고 무엇보다 신체 활동을 많이 해야 되는 직업인 군인으로 25년 가까이 복무했기 때문인 것도 있다. 전두환 본인이 매일 운동을 열심히 하는 스타일인 만큼 건강 관리를 철저히 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이며 구순의 나이에 다발성 골수종에 걸려 사망했으나 그 전에는 약물 치료만으로 병세가 상당히 호전될 정도로 초 강골의 신체를 타고난 듯 보인다.

  • 연설을 할때 스스로를 항상 본인이라고 칭했다.[8] 여기에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도 자주 써서 전두환 성대모사를 할 때 항상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본인은"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 군시절 권력과 엄청난 인맥 아래 거침이 없었다. 대령 때 주요 지휘관 회의에 참모로서 참여하였는데 주요 장성들의 담화 발표 시 맨 앞줄에서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꼰 상태로 듣는 등 당시 서슬퍼런 군부 사회에서도 아랑곳없이 행동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자기가 육사 11기생인데 그 위의 선배들은 전시 상황이라 약식으로 교육받았고, 자기 기수부터 정식 교육 과정을 이수하였으니 실질적인 육사 1기생은 자신들이다 하는 그런 자부심이 있었다. 때문에 그는 자신의 육사 선배들을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거기에다 군내에서 무시 못할 사조직의 수장으로 인망도 높았으니 상식의 선을 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선배들을 잡아먹을 수 있었다. 12·12 사건 주동자 가운데에는 자신보다 계급이 높은 사람도 있었지만 아무도 전두환 위에 서려고 하지 않았다. 그가 장군으로 진급했을 때는 박정희 대통령이 친히 금일봉과 선물을 하사하기도 했다. 이는 드라마 제4공화국에서도 묘사한 바가 있다.

  • 대한민국 대통령 중 처음으로 대한민국이 설립한 교육기관인 육군사관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경험이 있는 대통령이다. 이승만조선~대한제국 시절에, 윤보선, 박정희, 최규하는 모두 일제강점기 시절에 학창시절을 보냈다. 당시 미국 관료는 박정희 시기의 군장성 및 관료들이 미국에 대한 심한 열등감에 짓눌려 거의 말을 못하며 수줍어하는 분위기였는데, 전두환은 자신만만해한다며 다른 시대가 시작된 세대 교체가 진행되었다고 평가했다. 광복 이후 우리 손으로 설립된 교육기관에서 처음으로 교육받은 대통령은 1946년 조선경비사관학교에 입교한 박정희이다.

  • 80년대 초반, 하마터면 아군이 훈련 중에 쏜 대공 미사일에 격추당할 뻔하기도 했다. 대공 미사일을 운용하는 방공포대에서 표적 겨냥 훈련을 할 때는, 실제로 움직이는 항공기를 대상으로 미사일 기체를 이리저리 움직여 보는데, 그날은 남쪽으로 이동중인 대한항공 기종을 대상으로 겨냥 훈련을 했다고 한다. 문제는 제주도를 방문할 예정이었던 전두환이 탄 공군 1호기가 비슷한 위치에서 이동하고 있었고 + 원래 표적 겨냥 훈련 시 실수로 발사되는 일이 없도록 해당 코드를 빼놓는데, 그날 따라 코드가 제대로 빠지지 않은 상태였던 것. 훈련을 위해 발사 버튼을 누른 순간 정말로 발사된 걸 확인한 포대 관계자들이, 서둘러 자폭장치를 작동시키지 않았다면 → 민항기에 탑승하신 승객분들이나, 옆의 공군 1호기에 탑승한 대통령 이하 정부 관계자들이 참변을 당하는 초대형 사고로 이어졌을 수도 있었다.[9]

  • 삼성가와 인연이 많다. 이맹희와는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고, 아버지 전상우씨는 삼성상회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 심지어 이맹희에 따르면 학도의용군에 차출된 전두환을 후방으로 빼주기 위해 이맹희가 이병철에게 돈을 빌렸다고 한다. 다만, 이맹희에 따르면 전두환, 동생 전경환과 워낙 막역하게 지낸 것이 자신에게 독이 되었다고 한다.#

  • 그래서인지 삼성은 전두환 시절, 이병철의 도쿄 선언 이후 반도체 투자에 따른 각종 난제들을 전두환을 통해 쉽게 풀 수 있었다.#

  • 전두환은 고등학교 재학 시절에 축구선수로서 체육특기생이었으며 포지션은 골키퍼였다. 학창 시절엔 운동하는 건강한 소년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여성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하며, 여자 관계가 꽤 복잡한 것으로도 유명했다. 축구 외에 권투도 꽤 잘 했다고 한다. 때문에 박정희가 청와대에서 축구 경기 또는 권투 매치를 시청할 때 전두환을 불러 같이 보았다는데, 이는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도 그려지는 장면.[10] 축구와 권투를 잘 했다는 대목에서 알 수 있듯 싸움 실력이 매우 뛰어났다.

  • 전두환 정부 시절 외래어를 순우리말로 바꾸는 작업을 했는데, '골키퍼'는 끝내 바꾸지 못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골키퍼'를 '문지기'로 쓰려고 했는데, 그렇게 되면 전두환의 과거 경력이었던 육사 골키퍼가 육사 문지기가 되기 때문이다.

  • 공부는 잘 못했지만 리더십은 대단히 뛰어났다고 전해진다.[11] 유학성처럼 계급이 높거나 노태우처럼 공부를 훨씬 더 잘 하는 사람들을 전두환이 손수 이끌었던 것을 보면 떠벌이라고 할 정도로 말이 많았는데도 화술이 좋았다고 하며, 충고를 할 때도 기분 나쁘게 하지 않는 등 사람에게 다가가는 능력이 탁월했다는 증언이 많다. 또한 장인 이규동의 재력도 주변에 사람을 모이는데 큰 역할을 했다. 공부는 하위권을 멤돌았다고 하는데, 같이 일을 해본 샤람들의 증언으론 두뇌 회전이 빠르고 핵심을 파악하는 능력은 뛰어났다고 한다.

  • 학창 시절의 전두환을 시기하는 학생이 대판 싸움을 걸어왔고 이 싸움에 승리한 덕에 학교에서 유명했다고 한다. 어찌됐든 입시에는 나름 노력한 덕분인지 육군사관학교를 들어갔는데, 사실 추가합격으로 들어갔다. 1차 합격자들이 육군사관학교 지원을 대거 포기하자[12] 보충 인원으로 들어갔는데 행운도 상당히 받쳐줬던 셈이다.[13]

  • 전두환이 박정희의 눈에 들어온 계기는 5.16 군사정변. 당시 전두환은 대위 계급으로 서울대학교 학군단 훈육장교였는데, 박정희가 군사정변을 일으키자 모교로 찾아가서 자신의 후배에 해당하는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을 빼다가 예복을 입히고 박정희 지지 퍼레이드를 벌였다.[14] 이후로 전두환은 박정희에게 정계 진출을 권유받지만 전두환은 거절하고 군에 남는 쪽을 택했다. 이때 박정희는 차지철에게도 같은 권유를 했고, 차지철은 이에 응해 정계에 진출한다.

이것은 두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가른 선택이었다. 만약 차지철이 정계에 진출하지 않고 묵묵히 군인으로 남았으면 오히려 전두환이 쿠데타를 일으키지 못하고 대통령의 더 큰 신임을 받던 차지철이 일으켰을 수도 있다. 차지철은 정계에 진출하면서 박정희에게 엄청난 충성을 맹세했고 승승장구했으나, 그 원한의 결과는 차지철의 죽음이었다. 박정희, 차지철의 죽음과 김재규의 잘못된 육본행 판단으로 구속된 상황에서 그 누구도 수사권을 가진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을 막을 자가 없었다.[15][16]

  • 친구 노태우와 걸어온 인생(군 장성 → 대통령)이 거의 판박이다.

  • 강력범죄에 대통령이 이례적으로 직접 수사에 관여한 적도 있는데, 그것이 주영형 유괴 살인 사건이다. 1981년에 이윤상이라는 중학생이 모교 체육 교사인 주영형(30)에게 유괴당하자, 전두환이 직접 방송에 출연해 다음과 같이 선언하기까지 했다. 1981년은 전두환이 제12대 대통령 선거로 집권한 후 민심 수습책을 고민하던 시기였다.[17]

범인은 듣거라. 윤상이를 데리고 파출소로 와서 자수하면 최대한의 선처를 베풀겠다. 윤상이가 살면 네놈도 살 것이고, 윤상이가 죽으면 네놈도 죽을 것이다!
그러나 이윤상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애초에 주영형은 이윤상을 납치하자마자 죽여버렸고, 사전에 녹음된 목소리를 들려주며 몸값을 요구했기에 전두환의 요구를 따를수가 없었던 것이다. 약속대로 전두환은 범인 주영형을 체포하자 직권으로 형법을 개정해버리고 주영형을 사형 판결 확정 후 단 열흘만에 사형을 집행했다. 또한 이에 그치지 않고 주영형을 체포한 경찰관을 고속승진시킨 끝에 청와대 대통령 경호실에 속하게 하였다. 이 사건이 해결된 후 전두환은 다시 방송에 출연해서 대국민선언을 했다.


국민 여러분, 아동유괴살인에 대해서는 앞으로 무조건 이렇게 조치할 것입니다.

여담으로 대만의 故 리덩후이 前 총통도 바이샤오옌 사건 때 이를 따라하였다.

  • 전두환과 로널드 레이건미국 대통령의 한미 정상회담 당시, 전두환과의 네 번째 만남이었음에도 레이건이 집권 말년 치매[18]로 인해 기억력이 떨어져 전두환에 대해 기억을 못 했다. 그러자 측근들이 전두환에 대해 설명했고, 처음에 알아듣지 못하다가 나중에 결국 알아들었는데 아, '학생들은 전부 공산당'이라고 했던 그 친구라며 기억해냈다고 한다. 한-미 정상회담 통역관이 말하는 '그때 그 대통령'

  • 레이건미국 대통령이 "한국의 전두환이 정말 부럽다"고 한 적이 있었다. 기자들이 그 이유를 묻자, "전두환은 국민들이 반대하면 어린 대학생이라도 자기 뜻대로 모조리 감옥에 처넣을 수 있는데, 미국은 그게 안 되지 않느냐"고 대답하여 기자들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다.

  • 이규동 라인을 이용하려고, 이규동의 차녀 이순자와 결혼했다. 결혼한 이후에도 여자 관계가 정말 복잡했다는 등, 온갖 이야기가 다 있었다. '모 여배우가 전두환과 친밀한 관계를 맺자 이를 마음에 안들어하던 이순자가 드라마 촬영하고 있던 그녀를 납치해 자궁 적출수술을 받게 하고는[19], 알몸 상태로 5일 동안 남자 흉악범들이 들어가 있는 감방에 처넣었다'는 루머가 대표적이다.


  • 국민들에게는 권위주의로 정치적 억압을 가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유머 감각과 재치, 언변이 좋은 사람이라고 한다.기사 전두환, 캐디에 1만원 주면서 '이제 전 재산은 26만원'이라 농담 등. 실제로 언론인 고종석은 이에 대해 '코믹함의 인두겁을 쓰고 있다'며 '내면의 잔인함과는 어울리지 않는', '타고난 복'이라고 디스하기도 했다.[20] 이 때문인지 어록도 상당히 많은 편이고 백담사 시절에는 아예 행락객들을 대웅전 앞에 모아놓고 강연을 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어록들이 몇가지 있는데 일본에 가서 지하철 공사현장을 시찰하면서 "공사담당자들이 이북김일성이한테 땅파는 기술을 배워왔더라면 훨씬 더 빨리 지하철이 개통됐을 것"이라는 연설을 한 적이 있고, K리그 출범 당시에는 선경의 최종현 회장과 신동아의 최순영 회장을 불러다가 "최종현 회장님 이쪽할렐루야 축구단이래요 어떻게 나무아미타불 팀을 한번 만들어가지고 잘 해보시면 좋을것 같은데..."라며 K리그 출범을 지시했다고 한다.[21] 이외에도 술자리에서 서빙하는 종업원에게 농담을 건내기도 하고 문민정부의 특별사면으로 사면복권되어 나온 날에 안양교도소 앞에서 인터뷰를 했는데, 마지막 한 마디가 “여러분들은 교도소 가지 마쇼”

  • 전사모[22], 일베저장소 등 우익 커뮤니티에서는 여전히 매우 좋아한다. 전두환 재임 시절이 경제 호황기였다면서 진정한 서민 대통령이라고 찬양한다. 엔두(엔젤두환), 전땅크, 프로야구의 아버지인 야버지라 부르면서 띄워준다. 이전에는 국내 야구 갤러리도 포함되어 있었으나 진심으로 띄어주는건 아니고 반쯤 조롱조로 위의 별명을 부르는게 대다수이며 모두까기의 특성상 까이는 경우도 있다.

  • 사주와 현실의 불일치가 가장 심한 인물이다. 사주대로라면 대위로 제대한 후 구멍가게를 차려 운영하다가 1996년에 사망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23][24]

  • 본인포함 아내와 자식들이 혈액형이 B형인 B형가족이다.

  • 합성 갤러리에서 주로 "○○는 ○○를 들고 일어난 하나의 폭동이야"나 "진압하지 않을 수 없잖아(요)?"라는 대사가 합성 소스로 쓰이며 그의 전차와 함께 등장한다. 전차를 타고 나타나서 짜라빠빠를 진압하러 갔다가 패배하거나, 인간 관악기로 바뀌기도 하며 설날에 심영에게 세배를 받고 전차를 심영에게 주기도 한다. 그 덕분에 전차를 보면 전두환이 떠오르는 인터넷 밈이 생기기도. 보통 동시대의 M48을 타고 나왔지만 최근에는 장태완 장군과 겹쳐서인지 은근 K2 흑표 전차와 많이 얽히는 편이다. 그런데 흑표는 국방 정책으로 유명한 노무현이나 박근혜와 엮이기도 한다.

  • 박정희에 대한 우상화가 워낙 심하게 되어 있고, 전두환의 악행이 널리 알려져 있는 탓에 박정희가 저지른 잘못도 전두환이 저지른 것처럼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예를 들면 대한민국 해병대를 부대 해체해서 대한민국 해군 보병 병과로 넣은 인물이 박정희이며, 전두환은 되려 박정희가 그렇게 해체해 버렸던 대한민국 해병대를 되살려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세간에는 전두환이 대한민국 해병대를 해체했다고 잘못 알려진 것 등이 있다. 실제로 대한민국 해병대의 부대 해체일은 대한민국 제4공화국 시기인 1973년 10월 10일이며, 재창설일은 대한민국 제5공화국 시기인 1987년 11월 1일이다.

  • 2010년 1월 SS501 멤버 김현중이 전두환 팔순잔치에 참석했다가 대중들에게 욕을 먹었다. 김현중 본인은 소속사인 DSP 이호연 사장 생일에 참석한 것이라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실제로 전두환과 이호연 사장 생일이 1월 18일로 같긴 하다. 이호연은 연예계에서 영향력이 큰 인물이었는데, 전두환과도 인연이 있던 것으로 보인다.[25]

  • 1990년대 후반에 조훈현을 바둑으로 이긴 적이 있다. #

  • 전두환의 독재는 박정희의 독재와 굉장히 다른데 전두환 정권 때부터 3s 정책으로 인해 사회의 자율화 및 다양한 문화컨텐츠가 성장했다. 프로야구와 프로축구가 시작된 것도 5공 시절이고 교복이 폐지되었으며[26], 통금 해제에 현재의 포맷과 같은 가요 프로와 영화, 드라마, 예능 산업이 태동한 시기였다.

  • 초대형 개신교회 중 하나인 김삼환 목사의 명성교회불자인 전두환을 초청한 적이 있다. 메인 예배인 3부 예배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을 맨 앞자리에 앉히고, "전두환 대통령"이 왔다고 소개했다. 물론 1회성 방문으로, 김삼환 목사와의 개인적인 친분차 방문했을 가능성이 크다. 당장 정치인들은 정치적인 이유로 자신이 믿는 종교와 다르거나 아예 무종교인인 사람조차도 교회성당, 을 방문하는 경우가 흔하디 흔하다. 전두환 역시 종교와는 별개로 한경직 목사, 김장환 목사, 조용기 목사 등 여러 대형교회의 목회자들과 친분이 두터웠고 특히 김장환 목사를 여러차례 초청해서 같이 식사를 하거나 예배를 드리기도 했다.

  • 싸이월드가 한창 유행했을 때 전두환의 손녀 전수현[27]이 해외 여행을 가서 찍은 사진을 사진첩에 올려 놓고는 우리나라는 아직도 발전하려면 멀었다라는 식의 글을 써서 구설수가 된 적이 있으며, 당시 네티즌들의 큰 공분을 샀다.

  •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는데 그중 장남인 전재국은 5공화국 시절부터 전두환의 참모 역할을 했으며 퇴임 이후에도 전두환 일가의 재산을 관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전두환 퇴임 직후인 노태우 정권 시절부터 국내 네임드 출판사인 시공사의 대표이사 회장을 맡은 것을 시작으로 여러 사업에 뛰어들었으며 수완도 괜찮은 편인지 상속받은 재산 외에도 상당한 규모의 재산을 소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9년에 전두환 재산 환수조치 등의 이유로 시공사 지분은 전량 매각하였으나 과거 시공사 산하 계열사였던 여러 회사들의 지분을 상당 부분 소유하고 있으며 시공사 매각 이후에는 '나르는 돼지'라는 무한리필 삼겹살 프랜차이즈를 런칭하기도 했다.[28]

  • 출판사인 시공사와 대형 서점인 리브로의 실질적인 소유주였었다. 1989년에 자신의 비자금을 털어서 아들인 전재국에게 출판사를 세워주는데, 이 회사가 바로 시공사이다. 지금은 전재국이 시공사를 매각해 전씨 일가와는 관계가 없다.

  • 전현직 대통령 중 유일하게 대머리라 그런지 전두환 정권 시절에는 '대머리'가 금지어였다. 추가로 아내인 이순자주걱턱이었기에 '주걱턱'도 금지어였다. 그래서 유머 1번지일요일밤의 대행진, 웃으면 복이 와요 같은 당대의 개그 프로그램에서는 전두환 정권이 끝날 때까지 대머리와 주걱턱을 개그 소재로 삼는 것이 암묵적으로 금지되었으며, 당시 방송사 PD들이 대본에 혹시 대머리나 주걱턱 같은 개그나 정치 풍자 유머가 들어가서 전두환이나 이순자 그 외 방송사 임원진들을 자극하는 장면이 있을까 봐 미리 대본을 검열했다.[29] 아기공룡 둘리로 유명한 김수정이나 고바우 영감으로 유명한 김성환도 대머리를 그렸다는 이유로 만화연재가 짤리는 곤욕을 당해야 했다. 그나마 고바우 영감은 위낙 네임드급 만화였기 때문에 얼마 못 가서 연재가 재개되었지만, 김수정의 만화는 그대로 연재가 짤리고 다른 작품을 연재해야 했다.

  • 배우 박상아가 전두환의 둘째 며느리다. 전재용과 불륜 관계였지만, 결국 전재용이 이혼하고 결혼했다.

  • 추징금 약 1000억 원,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세금 고액체납자 명단 1위에 올라와 있다. 2020년 기준으로 5년 연속 체납하여 총 체납액은 약 10억 원이다. 연합뉴스 기사 하지만 전두환이 사망하면서 이 미납추징금은 현행법상 집행중지로 전액 환수가 어렵게 됐다. 다만 검찰은 사망한 전씨의 추징금 환수에 대한 법률적 재검토에 들어감과 동시에 전씨가 제삼자의 명의로 놔둔 재산에 관해서도 추가집행이 가능한지 여부도 살펴볼 예정이라고 한다.

  • 현재 4선 국회의원인 윤상현이 전두환의 고명딸인 전효선과 결혼하였으나, 2005년에 이혼했다. 윤상현과 전효선 슬하에는 2녀가 있으며, 윤상현은 재혼 이후인 2010년, 늦둥이 딸을 하나 얻었다.

  • 유명 코미디언인 이주일은 전두환 정권 초기에 방송 출연 금지 연예인으로 찍혔다. 공식적으로는 시청자들에게 혐오감을 준다는 게 이유이지만, 실제로는 전두환 정권이 사회 분위기를 휘어 잡기 위해 평소 마음에 들지 않던 연예인들을 탄압하였다는 게 정설이다. 하지만 막상 전두환 본인은 언론 탄압과는 별개로 이주일의 개그를 꽤 재미나게 보았다고 하며[30] 오히려 이후 박종환 감독의 주선으로 만나서 사적으로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출연금지 조치가 풀린 건 덤. 이주일의 후배 코미디언인 최병서의 회고에 따르면, 이주일이 최병서와 함께 술을 마시다가 뜬금없이 한밤중에 전두환의 집에 찾아갔는데[31], 전두환은 내쫓기는커녕 오히려 반갑게 맞이하며 술상을 차려왔더라는 이야기도 있다.최병서 일화.


  • 퇴임 직후 백담사에서 생활한다고 이야기가 굳어지기 전, 퇴임일 오전에 청와대에서 차를 타고 나오며 비우는 시간의 TV 생중계에서 차량 출발이 잠시 지체되는 중간에 헬기에서 찍은 청와대 시설을 하나씩 소개하면서 청와대에 엄청 규모가 큰 수영장을 두고 나온다며 공중에서 찍은 수영장이라는 큰 건물을 TV로 보여준 적이 있었다.

  • 일제강점기 때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뜻이 잘 맞았던 박정희와 대조되는 대목이다. 전두환이 결정했을 확률은 적고 전두환의 부친이 일제 순사를 공격한 영향이 이에 한몫한 듯하다.

  • 한주호 준위의 영결식에 참석했었다. #

  • 정적인 김영삼 부부와 함께, 아내 이순자와는 금슬이 좋은 애처가이다.[32] 전두환이 이순자의 친정아버지 이규동의 부관으로 근무할 시절부터 알게 되었는데,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이순자는 전두환을 "아저씨"라고 불렀다고. 전두환이 본격적으로 출세가도를 달리기 전, 가난한 군인인 상태에서 병원에 입원 중이던 이순자에게 선물(과일바구니)을 사 주기 위해 경기도 북부에 주둔 중인 지인의 부대로 돈을 꾸러 갔다가 실패하고[33] 울면서 서울까지 걸어왔다는 사례가 있을 정도로 비록 이규동 라인을 이용하려고 이순자를 만났지만 연애 시절부터 서로에게 나름 호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로도 측근들에게 "가정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선 아내에게 잘 해주라"는 말을 하기도 하였으며, 이후에도 공식 석상에서는 나름 화목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 가장 남성적인 직업인 군인 출신이고 옛날 사람이지만 의외로 사적으로 여성에게 호의적이었다. 상당한 애처가이기도 했고 고명딸 전효선을 상당히 아꼈으며(전우원에 증언에 따르면 전효선이 이혼하자 전효선의 두딸을 전씨 성으로 바꾸라고 제의한것이 전두환이라고 한다.) 이순자 회고록에서 전두환은 손녀,손자들중에 손녀인 전수현을 가장 이뻐했다고 한다.독재자,상류층 치고 유흥이나 여색을 즐기지 않는것도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인듯


  • 필리핀 대통령이자 독재자인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와 친했다. 집권 당시 한국의 경제성장과 전두환 본인의 사교성 덕분에 전두환이 말라카냥궁에 방문했을 때 마르코스가 그를 극진히 대접해줬고, 전두환 또한 마르코스에게 무궁화대훈장을 수여했다.[34][35] 임기 말에는 서울과 마닐라에 각각 6.10 민주 항쟁과 에드사 혁명이 터졌을 때 서로 동일한 방식으로 민주화 운동가들을 탄압했다.


  • 전두환 사망 당일 5.18 유공자 이광영 씨의 시신이 저수지에서 발견됐다. 생존해 있는 유공자들도 있지만 특히 조명받는 이유는 민주화운동 당시 부상당한 시민군의 후송을 돕던 중 척추에 총상을 입고 하반신이 마비되었으며 1989년 광주특위 청문회와 각종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였고[36] 전두환의 사망 몇 시간 전 유서를 남긴 채 스스로 생을 마감하였는데 유서 내용 중 "오로지 통증에 시달리다 결국, 내가 지고 떠나감이다" 라는 문구가 있었으며 시신이 발견된 날이 전두환 사망과 같기 때문이다.

  • 군인시절 군번은 17136[37]이었다.

  • 홍준표의 이웃동네 아저씨였다고 한다.[38] 그래서 전두환이 사망했을 때 홍준표 측에서 화환을 보내려 했다가 지지자들의 만류로 결국 철회하기도 했다.

  • 전두환의 집권기는 짐바브웨의 대통령인 카난 바나나와 거의 겹친다. 둘 다 1980년 ~ 1987년이 사실상의 집권기이다.

  •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를 집필하여 전두환의 경제 업적을 정리하고 김재익을 조명한 이장규 전 중앙일보 기자는 회고록의 내용, 특히 최규하 대통령과의 관계 등이 사실과 너무 다르며 그의 가장 큰 실책이라 주장했다. 그럼에도 전두환 사후 그의 경제적 업적을 다시 한번 정리한 "그런 선거는 져도 좋다"를 집필했다.

  • 불시에 최전방부대나 관공서 등 공공기관 시찰을 가는 일이 잦았다. 새벽에 가는 일도 종종 있었다. 군 장성 출신답게 군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 전두환이 취임한 12대 대통령직부터는 2월 25일에 취임식을 가졌다. 이 기록은 민주화 후에도 계속되어 18대 박근혜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박근혜가 2017년 3월 대통령직에서 파면되어 대통령 보궐선거라는 희대의 선거를 치르게 되었고 그 결과 대통령 취임식은 5월 10일로 변경되었다.

  • 2023년 언론에서 연희동 저택을 방문했으나, 자택 주변은 한산했다. 주민들도 전씨 일가에 대해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

[1] 전두환대통령 지방 나들이 1980.9.5 동아일보[2] 전두환대통령 지방나들이 이모저모 1980.9.5 경향신문[3] 시가 포함.[4] 1980년 이진희와의 대담에서는 태양을 피웠고, 1982년 이후로는 장미를 피운 것으로 보인다.[5] 어린 시절에 가난해서 고기를 많이 못 먹었기 때문에 나중에 매우 좋아했다는 말이 있다.[6] 사실 고기나 생선회 같은걸 자주 찾았을 뿐이지 기본적으로 음식을 잘 안가리기로 유명해서 백담사 은둔 시절에는 사찰음식도 곧잘 즐겼다고 한다.[7] 전두환이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들 중에서 가장 몸무게가 많이 나가는 사람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 틀렸다. 실제로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들 중에서 가장 키가 큰 사람은 최규하(182cm)이며 몸무게가 가장 많이 나가는 사람은 윤석열(90kg)이다.[8] 군인 특유의 언어습관이다.[9] 문제의 해프닝이 생긴 존제산 방공포대는, 마가 끼었다 싶을만큼 1년에 1 ~ 2번씩 크고 작은 사고가 발생하는 곳이었다고 한다. 해당 기지에서 문제 생기지 않도록 근무자들이 매우 성실하게 근무하고 신경을 썼는 데도, 이상할 정도로 사고가 이어졌으며, 심지어는 미사일을 운반하는 트레일러가 터널 안에서 화재가 발생해, 폭발하는 사고까지 발생한다. 존제산 방공포대가 폐쇄된 것이, 겉으로 내세우는 이유 외에 이런 지독한 불운요소도 무시 못했을 것으로 추정하는 이들도 있다고.[10] 헌데 박정희는 프로레슬링을 좋아했지만 전두환은 반대로 프로레슬링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루는 프로레슬링을 관람하고 있던 박정희에게 전두환이 "각하, 프로레슬링은 쇼인데 뭐하러 보십니까?"라고 했다가 분노한 박정희에게 한 대 맞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박정희가 팬이어서 그런지 박정희 정권 때는 한국에서 프로레슬링이 가장 인기 스포츠였다.[11] 즉, 흔히 오늘날 용어로 말하자면 전두환은 인싸였던 셈이다. 그렇다고 공부를 막 엄청나게 못한 것은 아니다. 육사 입학 이전엔 항상 성적이 우수했으며, 비록 추가 합격이긴 하지만 어쨌든 육사에 합격하기도 했고, 1980년대 초반에 김재익과 경제 공부를 할 당시 이해를 상당히 잘했다고 하니, 오히려 머리도 뛰어나다고 봐야 한다. 경제 이해를 잘했던 전두환과 대조적으로 노태우는 경제 공부에 흥미를 붙이지 못했지만 대신 외교에 대한 이해가 빨랐다. 그래서인지 전두환은 경제 호황을 이끌었고 노태우는 북방정책 등 외교 관계의 전성기를 이끌었다.[12] 입학년도가 1951년도였다. 그러니까 4년 후 소대장으로 전선에 투입된다는 소리인데 그래서 포기율이 높았다. 당시에는 그놈의 전쟁이 3년 만에 끝날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13] 운동을 통해 군인으로서 출세한 다른 유명인은 박정희의 경호실장이자 10.26 사건 때 같이 피살된 차지철이 있다. 이쪽은 태권도를 잘 했다고 하는데, 실력이 정말 좋았는지 미국에서 연수하던 시절 덩치 차이가 2배 정도 나는 거구의 미군 생도가 인종차별을 하자 때려눕혔다고 한다. 얼마나 심하게 때렸으면 무기로 때린 게 아니냐라는 반응이 있었을 정도였다. 전두환의 주장에 따르면, 연수 당시 차지철을 외국인들의 불만을 대표해서 때린 거라고 두둔한 게 전두환이었다고 한다.[14] 그 당시의 장교는 6.25 전쟁에서 나라를 구하고 지켜준다는 정의로운 이미지가 강했고, 육군사관학교 출신은 군에서나 사회에서나 엘리트였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육사 생도들의 퍼레이드는 5.16 군사정변에 대한 시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내는데 효과적이었다.[15] 다만 이 선택 덕분에 전두환보다 3살이나 어렸던 차지철의 승진이 더 빨랐던 것 역시 사실이다. 전두환이 육사 11기였는데, 차지철이 육사 12기를 지원했다가 떨어지고 광주포병학교를 졸업한 것은 유명한 일화. 그런 미묘한 열등감으로 차지철은 육사 출신들을 싫어했다고 한다. 전두환 역시 육사 12기 지원 건을 언급하면서 '차지철은 원래 자기 밑에 있던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점. 실제로 전두환이 1979년 3월 보안사령관이 되자마자 가장 먼저 알아본 것이 계엄 시에 차지철을 제어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보안사가 중심이 되어 합동수사본부를 설치하게 되면 다른 정보·수사기관까지 지휘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얻자마자 전두환은 매우 흡족해 했는데, 차지철은 10.26에 죽어버렸지만 이 합동수사본부로 정권을 장악하는 아이디어는 12.12에서 현실화된다.[16] 재미있는 건 윤필용 사건으로 전두환, 노태우와 하나회 인맥이 위기에 빠졌을 때 이를 모면하게 해준 것이 차지철이란 점이다. 1976년 6월부터 전두환이 차지철의 발탁으로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 겸 보안차장보로 임명되고 노태우가 청와대 경호실 행정차장보로 임명되면서 중앙에 복귀한 것. 전두환을 발탁한 이유는 입이 무거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차지철와 전두환의 이런 역기수 관계는 전두환이 1978년 1월 육군 1사단장으로 전출되면서 1년 6개월 만에 끝나게 되지만, 후임 작전차장보는 노태우가 역임했다.[17] 다른 대표적인 사례로는 2008년 3월에 경기도 고양시에서 발생한 초등학생 납치미수 사건으로 당시 집권 극초기였던 이명박이 관할 일산경찰서까지 찾아가 관계자들을 강하게 문책했다. 이 두 사건 모두 집권 초기에 대통령이 아동청소년 대상 범죄에 직접 수사에 관여한 사례이다.[18] 당시 역대 미국 대통령들중 최고령이였다.[19] 모 여성 잡지의 표현에 따르자면, 구봉합수술(즉 여성할례)을 했다고 한다.[20] 한국일보 칼럼과 단행본 <정치의 무늬>에 실렸음.[21] 최순영 회장은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온누리교회의 하용조 목사와 동서지간이라 온누리교회의 설립에 깊이 관여한 인물이며 최종현 회장은 독실한 불자였다.[22] 드라마 제5공화국의 방영 후 유명해진 팬클럽이다.[23] 실제로 대위 시절까지는 다른 동기들에 비해 진급이 느렸다. 5.16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사주대로 살았을지도 모르는 일.[24] 만약 1심형량이 그대로 유지되고 김영삼이 사면을 하지 않았더라면 1996년이나 1997년에 사형 당했을수도 있다.[25] 이건 사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게 당시 언론이나 방송계가 정권과 친하지 않고는 먹고 살기 힘든 구조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기획사 대표나 실장 정도 되는 사람들이 방송 출연을 위해 정권과 언론사에 줄을 대는 경우가 많았고 이호연 사장도 이 케이스일 가능성이 높다.[26] 상기했듯이 재정적인 문제를 비롯 여러 문제가 있어 얼마 안 가 다시 부활했다.[27] 전수현은 전두환의 장남 전재국의 딸로, 1985년 12월 19일 생(현재 38살)이다. 2012년 서울신라호텔 다이너스티 홀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여담으로, 여기서 결혼식을 하려면 당시 돈으로 최소 1억 원이 든다고 한다. 이때 KBS 윤인구 아나운서가 사회를 맡았다.[28] 여담으로 일산에 1호점을 오픈했을 당시 일대에서 꽤나 맛집이였다고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전재국의 소유라는게 알려져 논란이 되었을 때도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었던 반면 전두환 일가 소유라는 유명세로 인해 찾아가는 사람도 많았었고 뉴스보고 갔다가 맛있어서 단골이 된 사람도 있었다고. 전재국의 자금력 덕분인지 무한리필임에도 상당한 고퀄리티를 자랑했으나 현재는 전주에 위치한 지점을 제외하면 폐업한 모양이다.[29] 최양락상상플러스에 출연했을 때 당시의 검열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유머러스하게 설명했다.[30] 박정희도 비슷한 일화가 있는데 전유성이 《윤형주의 0시의 다이얼》이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싸움을 하면 육박전이다"라는 식의 개그를 쳤다. 하지만 방송사 내 간부진들이 그 유머를 듣고 식겁해서 PD들을 혼내고 전유성에게 3개월 출연 정지령이라는 징계를 내렸는데, 막상 해당 유머를 들은 박정희는 박장대소하면서 껄껄 웃었다는 후문. 라디오로 직접 들은 것은 아니고 스튜어디스를 통해서 전해들었다고 한다.[31] 정확하게는 사기를 당해 금전적인 손해 때문에 실의에 빠져 포장마차에서 과음을 해 취중이었다. 최병서가 옆에서 자리를 지키던 중 "병서야, 누군가에게 위로를 좀 받고 싶다"라고 하고는 느닷없이 "혹시 너 전두환 대통령 댁이 어딘지 아냐?" 하기에 찾아가게 된 것이라고 한다.[32] 죽기 전까지도 항상 이순자 여사와 손을 잡고 같이 다녔다.[33] 지인이 돈을 안 빌려준 건 아니고, 이미 지인은 타부대로 전출을 간 지가 오래여서 아예 만나지도 못했다.[34] 필리핀인 최초로 무궁화대훈장 수여받았고 옆에서 이순자를 영접한 이멜다 마르코스도 같이 수여받았다.[35] 마르코스는 전두환과는 친했던 반면에 박정희와는 사이가 상당히 나빴다.[36] 계엄군의 헬기 사격을 직접 목격하고 증언했다.[37] 당시 육사 출신 장교들은 1번부터 순차적으로 군번이 부여되었고 갑종장교도 원래는 육사와 군번을 공유했었으나 박정희의 "갑종장교 군번에는 앞에 1을 한 개 더 추가하라"라는 명령으로 인해 갑종장교 군번은 1로 시작하는 6자리가 되고 말았다. 학군사관은 년도에 군번이 부여되는 형식이었으며 3사는 현재의 부사관처럼 6자리였다. 당시의 부사관은 군번을 병과 공유했다. 이 체계는 1991년부터 바뀌었다.[38] 실제로 홍준표의 고향인 창녕은 전두환의 고향인 합천의 바로 이웃동네이다. 또한 두 사람 모두 학창 시절을 대구에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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