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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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5-8대 대통령 배우자
육영수
陸英修 | Yuk Young-soo


파일:external/www.pa.go.kr/L_YYS_02.jpg

출생
1925년 11월 29일 (98세)[이나이는]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면 교동리
(현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향수길 119)
사망
1974년 8월 15일 (향년 49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박정희대통령묘소
활동기간
제5대 대통령 배우자
1963년 12월 17일 ~ 1967년 6월 30일
제6대 대통령 배우자
1967년 7월 1일 ~ 1971년 6월 30일
제7대 대통령 배우자
1971년 7월 1일 ~ 1972년 12월 26일
제8대 대통령 배우자
1972년 12월 27일 ~ 1974년 8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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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옥천 육씨
부모
아버지 육종관, 어머니 이경령
형제자매
언니 육인순, 오빠 육인수
여동생 육예수
배우자
박정희
자녀
아들 박지만
박근혜[1], 박근령
의붓딸 박재옥[2]
학력
옥천공립보통학교 (졸업)
배화고등여학교 (졸업)
종교
불교 (법명: 대덕화)[3][4]
신체
170cm[5], AB형



파일:yuk_young_soo.jpg

대통령 배우자 시절의 사진


파일:육영수 여사 무궁화대훈장.jpg

무궁화대훈장을 패용한 사진
1. 개요
2. 생애
2.1. 교동 작은아씨
2.2. 박정희와의 만남과 결혼
2.3. 결혼 이후
3.1. 사망하지 않고 대통령 배우자로 계속 있었다면?
4. 대중매체에서
5.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의 재발견
5.1. 최태민을 조심하라는 발언
5.2. 김종필 발언에 의한 논란 진위
6. 여담
7. 관련 단체
8. 관련 링크
9.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박정희 대통령의 두 번째 배우자이자 대한민국의 제5-8대 대통령 배우자.

박정희 대통령의 배우자라 하면 일반적으로 육영수만을 떠올리는 편이지만 박정희의 첫 배우자는 김호남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김호남 외에 이현란과 결혼을 전제로 동거(사실혼)하기도 했다. 박정희가 이현란, 김호남과 이별한 이후 육군 장교 시절에 만난 여인이 육영수다.

박근혜 대통령·박근령·박지만 남매어머니이기도 하다. 언니인 육인순과 여동생 육예수 소생의 자녀들에게는 이모가 된다.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에서 재일교포 간첩 문세광의 총탄에 시해됐으며 대한민국 헌정 사상 유일하게 피살된 대통령 배우자로 기록되고 있다.


2. 생애[편집]



2.1. 교동 작은아씨[편집]



파일:학생 육영수.png

학창시절 육영수
1925년 충청북도 옥천군에서 대지주 육종관과 본처 이경령 사이의 1남 3녀 중 셋째이자 차녀로 태어났다. 위로는 언니 육인순과 오빠 육인수, 아래로 여동생 육예수가 있다. 박정희에게는 각각 처형, 손위처남, 처제다.


파일:AB3A5BE7-C90F-45D1-9A99-810809C68E9B.jpg

충북 옥천군의 육영수 생가
친정은 충청북도 옥천에서 알아주던 지역유지 겸 전형적인 대지주 집안이었으며, 옥천의 2대 부호이자 친일파였던 육영수의 아버지 육종관은 주로 소작농을 착취해 거둬들인 소작료를 통해 부를 쌓아 미곡도매상, 금광, 인삼가공업을 해서 벌어들인 돈으로 뒷뜰 역할을 하는 과수원을 합치면 8천 평, 순수 대지가 3천평이나 되는 99칸의 대저택에서 수십명의 하인을 거느리고 살았다.

이 저택을 구경한 시인 박목월조선 상류계급의 건축을 대표하는 비원의 연경당과 맞먹는 건물이라고 평했으며, 육영수가 태어나던 1920년대에 이미 전화기자동차까지 있을 정도로 굉장한 부잣집이였다고 한다.

육종관은 본처 이경령 외에도 3명의 들을 두었는데, 그 중에는 경기도 개성시 출신의 친자매도 있어서 각각 '큰 개성댁', '작은 개성댁'으로 구분해야 했다. 을 들이는 것은 1950년대까지 볼 수 있었던 현상이다. 어느 사회학자의 조사에 의하면 당시 부유한 기혼 남성의 5%는 첩을 거느렸다고 한다. 한국 사회에서 일부일처제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축첩 공무원들을 공직에서 추방하고 나서부터야 조금씩 확립되었다.

이렇게 복잡한 여자 관계 때문에 육종관은 적자서자를 모두 합해 총 12남 10녀를 두었다. 의친왕, 윤영렬과 더불어 동시대에[1] 가장 자녀를 많이 둔 인물로 손꼽힌다. 물론 밝혀진 인물만. 육영수는 적녀로서 아버지의 축첩과 그를 보며 가슴앓이하던 어머니의 설움을 생생히 목격했기 때문에, 결혼 후 남편 박정희의 여성편력에 분노를 표출했다.

육영수는 옥천공립보통학교(現 죽향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상경하여, 경성부 배화고등여학교로 진학했다. 청와대에서 매우 가까워 교문을 통과해 언덕을 올라 학교 건물까지 가다 보면 청와대가 보인다. 배화고녀[2]는 1898년 미국인 선교사 조세핀 캠벨이 설립한 개신교(감리회) 미션스쿨로, 전통 깊은 명문 여학교였다.

그런데 배화고등여학교 재학 당시 육영수의 거처는 다름 아닌 '큰 개성댁'의 집이었다. 물론 집주인은 아버지 육종관이었지만, 실세는 서울에 왔을 때나 가끔 머무는 육종관이 아니라 큰 개성댁이었고, 상경과 동시에 육영수는 신데렐라 처지에 놓이게 된다. 아버지가 없는 상황에서 서모(庶母)와 적녀(嫡女)의 사이는 좋을래야 좋을 수가 없었고, 실제로 큰 개성댁은 친어머니 이경령이 서울에서 기숙 중인 육영수에게 보낸 물자를 중간에 가로채기도 했다. 하지만 육영수는 배화고녀 재학 4년간 부모에게 불만 한 마디 꺼내지 않았다.

육영수가 재학하던 당시 배화고등여학교에서는 일본으로 수학여행을 갔는데, 육영수는 무척 가고 싶어했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가지 못했다고 한다. 또한 육영수는 배화고녀 졸업 후 대학에도 가고 싶어했지만, 아버지는 딸들의 대학 진학을 반대했고 아들들만 대학에 보내겠다고 했다. 육종관은 매우 부자로서 한국에 유일하게, 일본에도 2대가 겨우 남아있는 95식 4륜 자동차가 육종관 본가에 있었다. 일제 후반기에 군용차를 민간이 보유하고 있었다는 점에 대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때문에 그가 딸의 수학여행과 대학 진학에 반대한 것은 돈 때문이 아니었다. 워낙 보수적이고 남존여비가 심하던 시절이라, 여자가 집을 떠나 멀리 여행하거나 공부를 많이 하는 것을 몹시 부정적으로 보던 당대 분위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고등여학교까지 졸업한 것만 해도 당시로서는, 특히 여성으로서는 상당한 고학력이었다.

배화고등여학교 졸업 후 육영수는 고향 충청북도 옥천군으로 내려와, 옥천여자전수학교(현 옥천여자중학교)에서 1년 3개월간 교사 생활을 했다. 과목은 가사.

2.2. 박정희와의 만남과 결혼[편집]


1950년 8월 이종사촌인 송재천[3]의 소개로 당시 소령이었던 박정희를 만났다. 박정희는 집안 어른들이 정해주는 대로 1936년 김호남과 결혼하여 이듬해 박재옥이라는 딸을 낳았다.

본래 박정희는 좀 더 나이를 먹은 후 자신이 좋아하는 여성을 만나 결혼하길 원했으나, 집안 어른들, 특히 아버지인 박성빈이 죽기전에 막내아들이 결혼하는 것을 봐야한다며 강권하여 당시 16세의 처녀였던 김호남과 억지로 결혼시켰다. 본인이 원하지도 않았던 결혼생활인지라 김호남에게는 그다지 정이 없었다. 박정희는 김호남을 두고 이현란이라는 여대생과 1948년부터 1950년까지 동거하였으나, 박정희가 남로당 소속인 것에 실망한 이현란이 떠나버려 한동안 큰 충격을 받아 방황을 하였다.

시간이 흘러 6.25 전쟁이 터져 군대에 복귀한 이후 육군본부를 따라 대구와 부산을 왔다 갔다 하며 근무하고 있던 짝 없는 33살 박정희를 보고 후배들은 "이현란을 잊으라"고 성화를 하였는데, 휘하 장교들 중 하나가 대구사범 1기 후배인 송재천이다. 옥천 출신이던 그가 퍼뜩 떠올린 것은 자기 고향의 큰 부자인 육종관의 딸이었다. 마침 그 영감이 아내와 딸을 거느리고 부산 영도로 피난차 내려와 있다는 소식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육영수와 박정희는 짬을 내 만났다. 정식 맞선은 아니었으나 본인의 표현대로 ‘목이 길고 고상하게 생긴 처녀’에게 박정희는 대번 호감을 느꼈다.


파일:external/ojsfile.ohmynews.com/IE001306499_STD.jpg

육영수와 박정희의 결혼식 사진
1950년 12월 12일, 천주교 대구대교구 주교좌 계산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나이는 박정희가 33세, 육영수가 25세. 결혼 사진을 보면 육영수의 얼굴이 부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전날 육영수가 위경련을 겪어서 생긴 일시적인 후유증이라고 한다.

결혼식 때 주례를 섰던 허억 초대 대구시장이 두 사람의 이름 때문에 "신랑 육영수 군과 신부 박정희 양"이라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일화가 있다. 실제로 '정희'는 여자 이름, '영수'는 남자 이름에 쓰이다보니 일어난 웃지 못 할 해프닝이었다.[4]

비슷한 예로 방송에서 "육영수 여사"라고 해야 할 것을 "육영사 여수"라고 방송사고를 낸 일도 있었다고 한다. 참고로 이 방송사고가 난 건, 방송에서 원체 수없이 육영수 여사, 육영수 여사 하다 보니 순간 실수한 거라고 하는데 방송에서 수없이 육영수 여사라는 단어를 부를 시기, 바로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이 일어나고 난 뒤에 벌어진 방송사고였다.[5]

또 결혼식에 쓸 예물 반지를 가지고 있던 육영수의 사촌오빠가 결혼식 날 반지를 잃어버려 부랴부랴 반지를 사 왔다. 아버지 육종관은 당시 군인이었던 박정희가 육영수와 결혼하는 것을 “이 난리판에 군인에게 시집간다는 게 될 법한 소리야?” 하며 결사반대하였는데, 반대의 근거는 다음과 같았다.

1. 일단 둘의 교제 시기가 1950년 8월이었는데, 당시엔 인민군경상도를 제외한 한반도를 석권하고 있었고 낙동강에서 결사항전 중이었는데 국군이 승리한다는 것은 당시 상황으로는 요행에 가까웠을 것이다. 낙동강 방어선이 뚫려 적화통일이 달성되면 국군은 제거대상 1호인데, 내 딸이 과부가 될지도 모르는 군인이랑 사귀냐는 점.

2. 신식 교육을 받은 부잣집 아가씨가 자식도 있고 첫 아내와 이혼까지 한[6]

8살 연상의 남자에게 시집을 간다는 점.

3. 육종관이 사윗감으로 미리 점 찍어둔 조건 좋은 남자가 있었고 혼담까지 오고 갔는데, 자신이 정한 남자를 엎어버리고 생판 모르는 남자에게 시집 간다는 점.


육종관은 자기 자신과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해서, 박정희가 정권을 잡고 나서도 사위로 인정하지 않았다. 박정희가 집권한 뒤에도 청와대에 그림자도 드리우지 않았다. 일설에는 "박정희랑 결혼하면 육영수가 비명횡사한다"는 예언을 들었다고 한다.

하여튼 이렇게 친정에서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어머니 이경령과 육영수 자신의 고집 덕분에 결혼을 밀어붙였다. 이경령이 육영수의 사주를 무속인들에게 보이니, 다들 "재취(후처) 자리로 시집가야 잘 산다"고 풀이했다고도 한다. 육종관이 들었던 예언은 저기서 더 살이 붙는다. 바로 "재취(후처) 자리로 시집가야 잘 살기는 하지만 마지막에는 두 사람 다 비극적인 결말을 맞을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경우는 김종필의 회고록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1961년 어느 날, 식당에 국회의원 당락과 장차관 하마평을 잘 맞히는 것으로 유명했던 백운학이라 불리는 역술인을 초청하였다. 백운학은 "각하, 한 20년 가겠습니다. 소신껏 하십시오."라는 말을 하고, 자리가 파하는 자리에 "이상한 점괘인데요. 끝에 험하게 돌아가실 것 같아요."라며 말했다고. 그런데 이것이 그대로 실현되어 놀랐다고 한다. 결국 육종관은 육영수의 결혼식에도 찾아오지 않고, 이경령·육영수 모녀와도 완전히 갈라섰으며, 경제적 지원도 일절 해주지 않았다.

육종관이 사위에게 사과한 건 죽음이 임박할 때였다. 죽기 직전 병문안을 온 박정희에게 "내가 부덕하여 큰 인물을 못 알아봤다."라고 사과했다. 그리고 육종관은 1965년 12월 26일 아들 육인수 의원의 창성동(종로구) 자택에서 숨졌다. 그러나 아버지가 들었던 예언은 끝내 현실이 되고 말았다. 딸은 물론 사위마저 정말로 비극적인 결말을 맞아버렸기 때문.

2.3. 결혼 이후[편집]



파일:박정희대통령가족.jpg

박정희 대통령 가족[7]
결혼 직후에는 노량진에서 신접 살림을 차렸다. 군인 남편이 박봉이라 구멍가게도 잠시 운영했다. 부잣집에서 자란 사람이 스스로 어렵게 사는 길을 택한 것이다.

전인권박정희 평전에서는 그런 점에서 육영수를 고평가한다. 식구가 늘다보니 6년 만에 신당동으로 이사했는데, 대문이 작아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던 박정희를 보고, "남자가 고개를 숙이면 기개가 꺾인다"며 대문을 고쳤다고 한다. 혹자는 "이 집에 오시는 분은 다 귀하신 분인데, 어떻게 들어오시면서부터 고개를 숙이게 할 수 있는가"하며 대문을 개조했다는 얘기도 있다.

1952년 박근혜가 태어날 즈음 아직 노량진에 살던 시절, 당시 김종필, 박영옥(박재옥에게는 사촌언니)의 신혼집에 얹혀살며 동덕여고를 다니던 전처의 딸 박재옥을 데려와 뒷바라지를 한다. 훗날 박재옥을 중매한 것도 육영수였다. 박재옥은 박정희의 부관이었던 한병기결혼한다.

박정희와 육영수 사이에서는 1남 2녀(첫째 박근혜, 둘째 박근령, 셋째 박지만)가 태어났다.

2.3.1. 대한민국 대통령 배우자로서[편집]



파일:1972 전국체전 박정희.jpg

박정희 대통령과 영부인 육영수를 찬양하는
제3공화국 서울 전국체전의 모습

정부에 비교적 비판적 논조이던 'TBC 석간'의 진행자 봉두완의 회고가 있다. 봉두완은 TBC의 간판 뉴스 앵커였는데 전두환 신군부 이후 보수 정치인으로 전향해 전두환 정권 때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제11대, 제12대 국회의원을 지냈지만 노태우의 6공 때 눈밖에 난다.

봉두완은 40년 이상 소록도 한센 환자를 도와왔고, 육영수가 나환자들의 복지와 치료에 큰 역할을 했기 때문에 인연이 있다. 2013년 모방송 뉴스에서 육영수가 대중탕에 갈 수 없는 나환자들을 위해 공중 목욕탕을 지어줬다고 증언한 바도 있었다.

회고에 따르면, TBC나 DBS 동아방송이 정부를 비판해 관련자들이 고생할 때마다 대통령 배우자가 옆에서 뜯어말리고 중재했다고 한다. 봉두완, 박정희, 육영수가 3자대면한 적도 있다고. 이런 부분은 연합통신/동아일보 출신 이만섭국회의장의 회고록에서도 교차 검증된다.

이렇게 남편을 다독이다 보니, 그녀에게는 청와대 안의 야당이라는 별명도 붙었다. #

항상 한복 차림과 매우 꼼꼼하고 소박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청와대로 들어오는 많은 민원 진정서나 편지들을 처리하면서 통치의 한 축을 맡았다고 볼 수 있다. 수는 많지 않지만 청와대 제2부속실의 스태프를 거느리며 민원 접수 등 고유 업무를 챙겼으며, 일부 고위직을 견제하는 등 눈에 안 보이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리고 아이들에 대한 관심이 많아 고아원과 보육원 등에서 봉사활동을 하였으며,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많이 신경써 준 인물이다.


파일:전북 익산의 나환자 정착촌을 방문한 육영수.jpg

전북 익산 나환자 정착촌을 방문한 육영수
1973년 한센인들을 청와대로 불러 다과회를 열고 구호물자를 보냈다고 한다. 또한 1971년 전남 나주시의 한센인촌, 1972년 전라북도 익산시의 한센인촌을 방문하는 등 한센인들의 인권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다.

당시의 박정희 대통령의 권위, 그리고 의사간호사조차 꺼릴 정도로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매우 좋지 않았던 인식을 생각해보았을 때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육영수의 행보는 대중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고, 실제로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인식 개선에 큰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후 1974년 소록도 양로원 준공식에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그 해 8월 15일 광복절 29주년 기념식 날 박정희 대통령의 암살을 기도한 조총련계 재일교포 문세광의 저격으로 사망하면서 무산되었다. 이후 육영수를 대신하여 2000년대에 김대중 대통령의 아내인 이희호가 대통령 배우자로서 소록도를 방문하게 된다.

환자들에게 따뜻한 마음으로 대한 점은 지금도 소록도에서 잊혀지지 않으며 덕분에 지난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전통적으로 전라도 텃밭이라는 말이 붙을정도로 넘어 항상 민주당 우세지역인 만큼 1,839개의 투표소 중에 1,838개의 투표소가 문재인 후보의 압도적인 지지를 보였으나, 유일하게 소록도에 있는 도양읍 제7투표소에서는 박근혜 후보가 62.65%의 지지(득표수는 박근혜 270표, 문재인 158표)를 받는 등 지금까지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물론 전라도 뿐만 아니라 경상도 등 전국 각지에서 온 환자들이 많은 것도 있다.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 때도 민주정의당 노태우김대중보다 표를 많이 얻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박정희에게 맞서 싸웠던 반체제, 민주화 운동가들도 육영수에 대한 비판은 자중하는 모양새다. 장녀인 박근혜가 정계에 들어온 후 박정희에 저항한 정치인이나 관련 단체들은 박정희와 관련하여 정치를 하는 부분에 비판을 쏟아냈지만 육영수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이 없었다.

과거 민주당에서 영남권 인사들을 영입할 적에 박근혜도 영입 대상에 있었다.1999년 5월 13일 김대중 전 대통령은 "박 전 대통령이 이제는 역사 속에서 존경받는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박 전 대통령이 잘한 점을 높이 평가하고 역사 속에서 재평가 받게 해야 할 것. 형식은 민간주도로 하고 예산은 민간 모금과 정부 재정 지원으로 해야 할 것. 기부금 모금을 허가하는 등 정부와 대통령이 앞장서면 국민 호응도 클 것이고 꼭 성공할 것"이라 말한 적도 있었다.

박근혜는 1998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되면서 정치권에 입문하였다. 앞의 김대중의 발언은 이미 박근혜가 정치권에 입문한 직후의 이야기. 김대중은 1994년 아태평화재단 이사장 시절 온건보수 성향의 인사들을 대거 영입하면서 박정희에 대해서 과거와는 다르게 긍정적인 측면도 많다는 식의 평가를 내리기 시작했고, DJP연합으로 집권한 이후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을 국가예산으로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또한 1973년 육영수는 청계피복 노동자들의 실태에 대해 듣고, 노동자들이 전태일의 뜻을 받들어 노동교실을 설립하자 이를 적극 챙겨 지원하는 등, 노동자들의 권익에도 신경을 썼다. 성균관대학교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 천정환 교수는 2014년 경향신문에 올린 본인의 글에서 한국행정학회가 조사한 한 자료에 따르면 대한민국 대통령 배우자에 대한 국민들의 평가는 육영수만 긍정적으로 나타났다고 언급하였다.[8]

불우 청소년들의 직업 보도를 위해 정수직업훈련원을 설치하고 만화잡지 보물섬을 발간한 것으로 유명한 육영재단이나 어린이회관을 짓는 등 아동복지와 사회에서 소외된 계층들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들을 보여주었다. #

육영재단은 손기정 선수의 메달을 기증받아 보관하고 있다. # 그러나 정작 손기정 선수의 장례식 당시, 장례식을 위해 메달과 상장을 대여해달라는 유족들의 요구를 단칼에 거부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 밖에 청와대에 보관되어 있던 다양한 문화재들이 박정희 저격 이후 사라졌는데, 육영재단에서 보관하고 있다는 의혹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안중근 의사의 유묵.


3. 사망[편집]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파일:wn6k8WXd.jpg

문세광의 총탄에 피격되어 쓰러진 영부인 육영수
1974년 8월 15일 제4공화국,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기념일이자 광복절 29주년이었던 이 날, 박정희 대통령의 목숨을 노렸던 재일교포 간첩 문세광의 저격으로 광복절 기념식에 참석했던 영부인 육영수가 향년 48세의 나이로 목숨을 잃었다. 사인은 두부관통상이다.


파일:고 육영수 여사 장례식.jpg

대통령 영부인 고 육영수 여사 국민장
육영수의 기일이 된 이 날은 서울 수도권 전철 1호선이 개통된 날이기도 했다. 당시 육영수 뿐 아니라 합창단원으로 참가했던 성동여자실업고등학교 2학년 장봉화도 총에 맞아 사망했다. 육영수의 장례식은 국민장으로 치러졌으며, 조문객 수만 200만에 달하는 인파가 몰렸다.

육영수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한국 국민들의 분노는 엄청났고 문세광이 북한과 관련된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세간의 의혹 속에 반공주의도 더욱 강해졌다. 또한 문세광이 재일교포였다는 사실에 기초하여 곧 분노의 방향을 일본 쪽으로도 돌리게 되는데 국민적 여론은 물론 대한민국 정부도 문세광에게 일본인 명의 여권을 발급한 일본 측에도 책임이 있다는 이유로 해명을 요구했다.

다나카 가쿠에이 당시 일본 총리는 대한민국에 외교 특사를 파견하여 일본의 일부 책임을 인정하는 사과 표시와 사건 수사에 적극 협조한다는 내용이 담긴 친필을 전했고 한국의 여론이 심상치 않다고 여긴 미국도 한일관계가 파국으로 치닫는 것을 막기 위해 중재함으로써 사태는 일단락된다.


파일:육영수 장례 박정희.jpg

육영수의 영구차를 보낸 직후의 박정희 대통령
육영수 국민장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육영수의 시신이 담긴 영구차를 떠나보내고 홀로 남아 청와대 철문을 붙잡고 눈물을 훔쳤는데 당시의 모습은 사진 기록으로도 남아있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당시 현장에서 회수된 6발의 총알 중 육영수의 머리에 맞은 총알만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으로 넘겨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탄환이 우뇌 깊은 곳에 박혀서 탄을 꺼내려면 시신 훼손이 심각해지기에 탄을 꺼내지 않고 장례를 치렀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탄환과 함께 묻혀 있는 셈이다. 그러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의 육영수의 집도의에 따르면 사입구와 사출구가 있어 관통상으로 확인되었고 자신이 관통했음을 증언하였다고 인터뷰했다. 즉, 이 인터뷰에 따르면 1발은 증발된 상태다.

1975년, 제4공화국 박정희 정부에서는 육영수의 추모사진집을 만들어 학교에 배부하기도 했다.

육영수의 모교인 배화여자중학교·배화여자고등학교 교정에는 그녀를 기리기 위한 '육영수 여사 기념관'이 세워졌고, 이어 배화여자실업전문학교가 세워졌다. 이 학교는 2/3년제 전문대학배화여자대학교로 개편되었고, 기념관은 배화여대의 대학본부로 쓰이고 있다.

육영수가 사망한 후, 프랑스에 유학하던 22살의 장녀 박근혜가 한국으로 돌아와서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죽을 때까지 퍼스트레이디 대행 즉 대통령 배우자 역할을 대신했다. 이때부터 박근혜는 어머니처럼 올림머리를 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2016년 육영수가 암살된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추모공연인 <백목련>이 열렸다. 목련은 육영수가 생전에 좋아하던 이며, 한복을 입고 올림머리를 한 그녀의 모습을 당시 사람들이 목련에 비유했다고 한다. 배화여자대학교의 교화(校花)이기도 하며, 배화여대에는 목련관이라는 이름의 건물도 있다.


3.1. 사망하지 않고 대통령 배우자로 계속 있었다면?[편집]


일각에서는 육영수가 문세광의 총탄에 암살당하지 않고 1970년대 후반기까지 더 살아 있었다면 박정희와 박근혜, 박지만 등 박정희와 육영수 소생의 자녀들의 이후 행보가 극단적으로 변하거나 지금처럼 마약 범죄에 40여년 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박근혜는 어머니 육영수를 여의고 난 뒤 영세교 교주인 최태민최순실 부녀에게 극도로 헤어나올 수 없을 정도로 최태민과 최순실에게 빠지게 되었다. 다만 박지만의 마약 범죄가 수면 위로 떠오른 건 아버지 박정희가 암살된 지(1979년) 10년 뒤인 1989년부터였다. 1974년까지 청와대에 올라오는 민의수렴과 보고 및 정보 수집 채널은 정보부, 보안사, 대통령 배우자였다는 증언이 있다. 그만큼 박정희의 통치에 보이지 않지만 중요한 요소였다는 것이다.

육영수는 야당 인사들이나 반대자들에 대해 고문, 납치, 암살 등을 향한 정치 공작으로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던 박정희 정권에 대한 여론을 부드럽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또한, 박정희의 정치적 감각에는 육영수의 조언이 한 몫했다는 얘기도 있는 만큼 남편 내조를 잘 한 것을 보면, 2인자들의 상호견제를 통한 1인자의 권력을 유지한다는 벼랑 끝 체제를 장기간 유지해온 이면에는 육영수가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이상의 육영수의 역할은 최씨 일가와 마약, 아버지와 남편의 사망으로 인한 트라우마 때문에 딸과 아들이 막장이 되어 범법자로 전락하지 않는 것과 별개의 이야기다.

전인권의 <박정희 평전>에서는 박정희는 겉으로는 안 그래보였지만 속으로는 아내에게 내심 굉장히 의지해서 자신을 죽이려던 문세광의 테러로 부인이 사망한 충격 탓에 마음이 극도로 약해졌다. 인간이 받는 스트레스 중 가장 큰 것이 배우자나 자녀의 사망에 의한 트라우마라는 연구 결과도 있을 정도이다.

이는 박정희 경호를 명분으로 자신의 권한을 넘어서는 월권을 행사하여 주변의 원성을 사던 차지철 같은 사람에게 흔들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추측은 유신정권 후기 박정희의 행보를 설명하려는 가설에 불과할 뿐 실제로 당시 박정희의 심리가 어땠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육영수가 1974년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 당시 문세광의 총탄에 사망하지 않고 가벼운 총상만 입은 채 살아남았거나 혹은 1970년대 중, 후반기까지 생존하여 대통령 배우자 자리에 남아 있었다고 해도 이미 70년대 후반기에 정권의 기반이 흔들렸다는 것을 들어 별로 달라지지 않으리라는 의견도 있다. 2차 오일쇼크 등으로 경제성장이 둔화되고 YH 사건 등으로 박정희 정권에 대한 정치적 압박이 시작되고 있었고, 동시에 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나타나기 시작했기에 박정희 정권이 언젠가 무너질 가능성은 있었지만, 적어도 김재규의 총탄에 급격하게 붕괴될 정도로 막장스럽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부에서는 육영수가 이 사건에서 총탄에 맞아 사망하지 않고 남편 박정희가 암살당하던 1970년대 말까지 생존하여 청와대를 나갔다면 대한민국이 민주화된 이후에 딸 박근혜가 아니라 육영수가 남편 박정희의 후광을 앞세워 정치계에 입문해 정치를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박정희의 아내이던 육영수도 그 시기까지 살아있었다면 충분히 박정희의 후광을 업고 정계 진출이 가능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다만 민주화가 된 1987년 이후를 기준으로 나이가 꽤 많은 1925년생이었기 때문에 딸 박근혜와 달리 대권에는 도전하지 못하고 1990년대에서 2000년대 초중반 정도까지[9] 국회의원 정도만 몇 번 하고 정계에서 은퇴했을 확률이 높다.[10] 이희호와 권양숙의 위치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생각해보면 육영수가 생존해 있었다면 상징적인 존재로 존재했을 것이다.


4. 대중매체에서[편집]


  • 1988년 MBC 라디오드라마 <격동 30년>[11]에서는 배우 고두심이 연기했다.







  • 영화 <퍼스트레이디-그녀에게>가 제작될 예정이나 감감무소식이다.


5.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의 재발견[편집]



5.1. 최태민을 조심하라는 발언[편집]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라는 역대급 사건이 터지면서, 최태민 때문에 육영수도 재조명을 받고 있다. 박근혜의 여동생 박근령의 남편인 신동욱 공화당 총재가 TV조선과의 인터뷰에서, 육영수가 생전에 박근혜에게 "최태민과 가까이 하지 말라"고 충고했다고 밝힌 것 때문이다. #, #

이 인터뷰는 박근혜최태민이 처음 만난 시점과 관련해서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지금까지는 육영수가 비극적으로 사망한 일로 박근혜가 큰 충격을 받았을 때 최태민이 박근혜에게 위로의 편지를 보냈고, 그 일이 계기가 되어 두 사람이 만나게 되었다고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동욱의 이 말이 사실이라면, 육영수가 생존해 있던 시기부터 이미 박근혜와 최태민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었다는 말이 된다.

이 주제는 2016년 11월 26일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도 다루어졌다. 최태민의 아들의 증언에 의하면, 육영수 생전부터 최태민이 청와대 출입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주간지에서 1972년에 최태민이 청와대에 출입했다는 기사를 찾아내었다. 이 기사에는 육영수는 TV에서 본 최면술 시범을 보고 호기심이 생겨서 최태민에게 직접 시범을 보여봐 달라고 불렀단 내용이 적혀져 있다.


5.2. 김종필 발언에 의한 논란 진위[편집]


최순실 게이트가 한창이던 2016년 11월 14일, 주간지 시사저널은 동월 3일 자사 경영진이 김종필과 나눈 대화 내용을 녹취 공개하였다. 당시 크게 주목받은 내용은 "박근혜는 5천만 국민이 몰려가서 하야하라 해도 끝끝내 따르지 않을 성격의 소유자"라는 김종필의 분석이었으나, 그것과 별도로 육영수에 관한 흥밋거리 위주의 증언도 들어있었다.

김종필은 육영수에 대해 "대통령 부인이라는 이름에 맞게 행동하는 것처럼 꾸민 것일 뿐, 실제로는 남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다"며, 육영수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는 발언을 했다. 그 일례로 박정희가 권력자가 되기 전이었던 시절, 자신의 아내 박영옥이 겪었던 일을 예로 들었다. 박영옥은 1946년 사망한 박정희의 셋째형 박상희[12]의 딸로 육영수는 고작 4살 위지만 숙모다.

1951년 전쟁통에 김종필이 미국에 가 있는 동안 박영옥이 첫 딸 예리를 낳고 이 없어서 쫄쫄 굶는데, 육영수가 자기 식구들만 밥을 먹이고 박영옥에게는 밥먹었냐 묻지도 않았다는 것. 그래서 김종필이 귀국했을 때 박영옥이 울면서 그 이야기를 했고, 분노한 김종필이 육영수에게 "남도 아니고 조카딸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따졌다는 내용의 녹취록.

그런데 정작 인터뷰를 했던 김종필은 "고향 사람이라고 찾아와서 시중에서 나도는 이야기를 농담 삼아 주고 받았을 뿐인데, 몰래 녹음까지 해서 왜곡·과장해 비열한 기사를 만들어 자기 신문에 냈다"며 법적으로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박영철 시사저널 편집국장은 "왜곡이나 과장이 아니라 이야기를 주고 받은 그대로 독자들에게 전달한 것"이라고 밝혔다.

김종필의 주장대로라면 김종필은 오랫동안 알고 지낸 고향 사람에게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것이지만, 일단 법적으로는 시사저널의 행동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김종필 정도의 군인과 정치인으로서 산전수전 다 겪은 인물이 한국 굴지의 주간지 편집인이 이런 탄핵 정국에 심심하니 박정희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겉치레를 그대로 믿고 ‘고향사람’이라고 불쑥 기분따라 다 꺼내보여준다는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는 2016년 11월 19일 '대통령의 시크릿' 편을 방송하면서 1951년에서 1952년 사이에 부산시대구시에서 거주하고 있었던 박정희와 육영수 부부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의 제보를 받는다고 공지하였는데, 이 내용에 따라 김종필의 인터뷰 내용의 진위 가능성을 판가름할 내용이 방송될 수도 있다. 하지만 1년이 넘도록 해당 내용이 방송되지 않은 걸 보면 별다른 증언이나 증거는 확보하지 못한 것 같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김종필의 발언으로 어수선한 와중, 2016년 11월 29일 충청북도 옥천군에 있는 육영수 생가[13]에서 소위 숭모제[14]라는 것이 거행되었는데, 보수 시민단체와 진보 시민단체가 부딪쳐서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서로 고성과 욕설이 난무하고, 보는 사람들까지도 어쩔 줄 몰라했다고 한다. 영상.

월간조선 2017년 1월호에 육영수의 조카 홍정자의 인터뷰가 실렸으며, 앞서 언급된 김종필의 이야기는 거짓말이라고 언급되어 있다. 링크. 그러나 해당 기사에서 박근혜는 잘못이 없고 최씨일가에게 순진하게 이용당했을 뿐이라고 쉴드치는 사람이라는 점을 감안하고 읽어야 한다.


6. 여담[편집]


  • 남편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제8대 대통령 임기 도중 저격사건으로 인해 숨지면서 제9대 대통령 배우자 자리는 공석이였으며 그 자리는 당시 유학 중이였던 장녀 박근혜가 대리하게됐다.

  • 키가 170cm로 대한민국 대통령 배우자 중 가장 키가 크다. 2018년 기준 한국 성인 여성의 평균 신장은 161.4cm로, 지금도 여성이 170cm이면 상당한 장신으로 취급받는다. 1970년대 한국 여성의 평균 신장이 155cm였던 점을 감안하면, 당시 170cm는 거인인 수준이었다. 이 당시 국가대표 여자 배구 선수가 거의 이 정도 체격이었다. 남편인 박정희보다도 키가 컸다, 참고로 박정희는 164cm로 역대 대통령들 중 두 번째로 키가 작다. 이들의 딸인 박근혜 전 대통령의 키는 162cm. 동년배 평균보다 조금 큰 편이다. 이때문에 부부가 같이 행사에 참석할 땐 행사 주최측에서 육영수 쪽이 키를 조금이라도 작게 보이게 하려고 신경 썼다는 말이 있다. 다만 박정희 본인은 굳이 키를 크게 보이려는 생각이 전혀 없어서 굽이 높은 구두나 깔창을 쓰지 않았고, 어떤 자리에서는 주최 측이 박정희의 의자에 올려 놓은 두툼한 방석을 던져버리기까지 하였다. 딱히 키에 대한 생각이 없었거나, 되려 단신인 쪽이 정치적 이미지 메이킹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을 것으로 보인다. 거기다 박정희는 키가 크고 얼굴형이 긴 여자가 이상형이었다고 한다. 근데 그걸 감안해도 당시 육영수는 여자로서 거인이나 다름없는 키를 가지고 있었다.

  • 한때 "푸른 기와집에 정희와 영수가 사는데, 누가 남자고 누가 여자게?",[15] "대통령 부부가 싸우는 걸 3글자로 줄이면?" 같은 농담이 떠돌았다. 후자는 정답이 "육박전"이다. 이 농담을 맨 처음 고안해서 써먹은 전유성은 즉각 3개월 출연정지를 먹었고[16], 프로그램은 폐지되었으며, 담당 PD는 중정에 끌려가서 개박살이 났다고 한다. 박정희 & 육영수 내외는 이 농담을 대통령 전용기의 스튜어디스에게서 들었다고 하는데, 프로그램과 PD에게 내려진 처우와는 달리 당사자들은 이 개그를 듣고 박수를 치며 크게 웃었다고 한다. 박정희 본인 자체로만 놓고 보면 자기 앞에서만 농담을 하면 어지간히 심해도 잘 받아주는 성격이라고 한다. 근데 정작 TV에서는 별로... #
전유성이 가수 윤형주의 <0시의 다이얼>에 출연해 이 개그를 했었다. 근데 윤형주가 알던 누나인 최은자가 대통령 전용기의 스튜어디스여서 그걸 박정희에게 말해줬고, 그 후 상술한 대로 탄압을 받았다. 훗날 전유성 본인은 그 사건이 자신에게 "세상은 참으로 치열한 육박전이구나!"라는 걸 알게 해줬다고 자신의 저서 <조금만 비겁하면 인생이 즐겁다>에서 밝혔다. 당시 윤형주회고에 따르면 당시 방송사엔 중앙정보부에서 파견한 조정관이 있어서 방송 멘트까지 일일이 검열했는데, 흥부와 놀부 이야기를 하다가 "제비가 박씨를 물고 갔다"는 멘트가 나오자 "왜 박씨냐? 무슨 저의가 있는 것 아니냐?"라며 지적을 했다고. 그런 시절이었으니 전유성도 당연히 출연금지를 먹을 수밖에.



  •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배우자 중 가장 먼저 유명을 달리한 인물이다. 초대 대통령 배우자인 프란체스카 도너는 1992년 3월 19일, 공덕귀(윤보선)는 1997년 11월 24일, 홍기(최규하)는 2004년 7월 20일, 그리고 이희호(김대중)가 가장 최근인 2019년 6월 10일 사망. 또한 역대 대통령 배우자들 중 가장 단명했다. [17]

  • 이름이 남자 이름 같다. 철수와 마찬가지로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남자 어린이의 대표적인 이름이다. 여자 어린이는 영희. 그러다 보니 결혼식 때 사회자가 신랑과 신부의 이름을 바꿔 부르는 실수를 했다. 게다가 정희는 여자 이름에 많이 쓰인다.

  • 대통령 부인 집무실 및 접견실로 사용되던 청와대 본관 내 무궁화실 벽면에, 제5-8대 대통령 배우자로서 육영수 초상화가 걸려 있다.[18]

7. 관련 단체[편집]




8. 관련 링크[편집]




9. 둘러보기[편집]




[이나이는] 만약에 살아있는 나이.[1] 지금까지 이름이 알려진 인물들 중에서[2] 고등여학교(高等女學校)를 줄여서 고녀(高女)라고 했다. 오늘날의 여자중학교+여자고등학교 과정. 일제강점기 중등교육기관은 조선인 학교를 남녀 각각 고등보통학교/여자고등보통학교, 일본인 학교를 (구제)중학교/고등여학교로 구별했다가, 1938년부터 내선일체 정책 강화로 모두 중학교/고등여학교로 통일되었다.[3] 송재천은 박정희대구사범학교 후배이기도 했다.[4] 재밌는 점은 주례인 허억의 이름도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허억[5] 출처는 이계진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딸꾹.[6] 1990년대만 해도 이혼은 결격사유로 여겨졌으며, 현재도 정치인들에게도 해당이 된다. 하물며 이때는 산업화가 이루어지기도 이전인 1950년대였다.[7] 참고로 사진에 있는 호랑이 가죽은 행방불명 된 상태이다.[8] 그도 그럴 게 프란체스카 도너는 너무 예전 인물이고, 적극적인 사회운동에 나선 공덕귀와 소박하고 서민적이던 홍기는 부군의 재임기간이 너무 짧아서 존재감이 없었다. 이순자부터는 비교적 최근이라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영부인의 평가에도 영향을 줬기 때문에 과거 영부인 중에 뚜렷한 존재감과 확실한 업적을 남긴 사람이 육영수밖에 없었으므로 이러한 평가는 당연한 것.[9] 15대 총선 또는 16대 총선까지.[10] 지역구는 고향 옥천군이 포함된 보은군·옥천군·영동군이었을 것으로 예상되며 대체로 보수강세지역이라 당선은 쉬웠을듯 하다.[11] 1999년 3월~2009년 10월 MBC 라디오드라마 <격동 50년>의 전신.[12] 그래도 박상희의 아내 조귀분은 총탄에 사망한 남편 박상희나 시동생 박정희, 아랫동서 육영수와 다르게 1990년대 초까지 살다가 노환으로 죽었다.[13] 99칸 한옥이다. 오래되고 낡은 집을, 옥천군에서 2003년부터 2010년까지 약 37억 5,000만원을 들여 복원했다.[14] 육영수의 생일을 기념하는 제례. 헐.[15] 후술하겠지만 정희는 보통 여자 이름에, 영수는 보통 남자 이름에 쓰이는 것에서 착안한 드립이다.[16] 정확히는 박정희가 스튜어디스에게 드립을 듣고 나서 어찌저찌 내려와 출연정지가 풀렸다는 듯 하다.[17] 남편 박정희도 역대 대통령들 중 가장 단명했다.[18] 동아일보 (2022.5.26. 문화면 기사 하단) : 대통령 침실 앞엔 피아노, 욕실엔 사우나… 靑속살 32년만에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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