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환(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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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환
金星煥 | Kim Sung-hwan


파일:김성환 화백.jpg

출생
1932년 10월 8일
경기도 개성부 (現 개성시)
사망
2019년 9월 8일 (향년 86세)
가족
부인 허금자
아들 김규정, 장녀 김규희, 차녀 김규연
학력
경복중학교[6년제] (졸업)
경희대학교 문리과대학 (국문학 / 수료)
중앙대학교 신문방송대학원 (수료)
서훈
보관문화훈장 수훈
금관문화훈장 추서

1. 개요
2. 생애
2.1. 사망
3. 작품
4. 수상



1. 개요[편집]


대한민국만화가. 만화 고바우 영감을 그린 화백이다.

1950년 12월 30일 전쟁 와중에 고바우 영감을 처음 그렸으며[1] 이후로 전쟁과 여러 문제로 연재와 휴재를 되풀이하다가 1955년 2월 1일부터 동아일보에서 첫 연재를 시작하여 문화일보로 옮겨가면서 2000년까지 4컷 만화를 연재한 이 기록은 기네스북에도 등록되어 있다.

시사만화를 그리다 보니 참으로 우여곡절이 많았다. 젊은 시절에는 6.25 전쟁에 참전했고, 사회풍자 만화가라는 신분이었기에 벌금형에서 금고형까지 질리게 겪었다. 경무대 똥통 사건이 대표적인 예. 그럼에도 결코 기죽지 않고 이승만과 자유당 시절, 박정희 및 전두환 권위주의 시절에도 날카로운 만화를 계속 그렸다. 다른 에피소드 내용은 고바우 영감을 참고할 것.


2. 생애[편집]


파일:멍텅구리씨.png

연합신문 1949년 4월 2일에 실린 멍텅구리씨 제1화[2]

일제강점기 시절 경기도 개성시 출생. 독립운동가였던 아버지를 따라 중국 만주에서 돈화국민우급학교[3]를 거쳐 길림6고(지금의 중학교) 다니다가 8.15 해방 이후 서울특별시로 내려와 경복중학교[6년제]에 진학하였는데 당시부터 학교의 미술부장을 지내는 들 그림에 소질에 보였던터라 '멍텅구리'라는 네 칸의 만화를 그려서 연합신문에 보냈다. 당시 외국신문에 있는 만화란이 한국의 신문에는 없는 것을 보고 "아무리 보아도 창문이 없는 집 같아 보였다"고 회고했다. 1949년 열일곱에 만화계에 데뷔하여 만화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게 됐다. 이후 경희대학교를 다녔고 중앙대학교 대학원을 다녔다. 시사만화가로서 거의 평생에 걸쳐 고바우 영감을 연재했다.

한국전쟁 당시 주한미군 부대 바로 곁에 주둔한 부대에서 군복무를 했다고 한다. 이 때 미군들의 행패 등 문제를 많이 보았다고. 한국군들이 죽어라 훈련할 때 미군들은 느긋하게 노는 걸 보면서 "저들도 어디까지나 외국인이구나", "하긴 다른 나라 전쟁와서 미쳤다고 기꺼이 죽어 줄까"는 생각이 들었다고. 그래서인지 그의 만화에서 주한미군에 대하여 좀 회의적인 시각을 보이고, 그들의 범죄를 비판하는 것도 그려 논란을 빚기도 했다.

거듭된 시사만화로 정부를 까다보니 벌금이니 일시적인 투옥이 아니라 아예 박정희 군부 정권시절에는 중앙정보부로 끌고와 정말로 호되게 된통 먹일까 논의가 되었는데 우습게도 6.25 당시 미군이던(당시 미군은 징병제) 신문사 간부가 김성환과 그나마 어찌 알던 사이라서 한국이 시사만화가까지 부조리를 비난한다고 쓴소리를 하여 이게 미국에 보도된 탓에 미국에게 찍히는 거 아닌가? 해서 없던 일로 되었다고 한다. 김성환 화백은 웃으면서 이 때 내가 끌려가서 호되게 고문당했더라면 미국 쪽에서 보도하여 정권은 어찌되었을지도 모르지라는 말을 한 일화가 있다고 한다.

사실 고바우 영감 단 하나만 그린 것은 아니고, 소케트 군, 꺼꾸리군 장다리꾼 등 어린이 만화도 그렸지만 고바우 영감이 워낙 오래 연재된 작품인데다가 소케트 군이 그리 유명한 만화는 아니다보니 잘 알려지지는 않았다. 그래도 꺼꾸리군 장다리군은 고교얄개를 연출한 석래명 감독에 의해 1977년 고교 꺼꾸리군 장다리군이란 영화로 제작되었고 동양방송 드라마로도 만들어졌으며, 소케트 군은 만화일기 시리즈로 나오긴 했다.

만화 창작 외적으로 1996년에 원화 등 소장품 376점을 국립중앙도서관에 기증했고,[4] 1997년 이후 한국만화가협회 고문과 한국시사만화가회 명예회장에 위촉되었다. 5.16 이전에는 현대만화가협회라는 단체에서 회장직을 지냈는데 현대 만화가 협회가 5.16 이후 강제해산당하고 1968년 한국만화가협회가 창설된 다음에 소속되었고 거기서도 회장을 하게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김성환에게 2002년 보관문화훈장을 수훈하였고, 2019년 사후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참고로 국립중앙도서관엔 김성환의 양초탑이라는 물건이 전시되어 있는데, 전기가 안 들어올때 빈 깡통에 양초를 켜두고 작업을 했었다고 한다. 근데 그게 초를 다 쓰면 다시 그 위에 초를 올려서 켜놓는 식으로 계속 촛농이 쌓이고 쌓여서 높아진 것. 어느 날 여름 너무 더워서 촛농이 녹는 바람에 3등분으로 쪼개졌는데 그걸 보관하고 있다가 기념품으로 기증했다고 한다.


2.1. 사망[편집]


2019년 9월 8일에 향년 86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 장례식은 만화인장으로 치러졌다.


3. 작품[편집]


  • 멍텅구리씨 (1949년)
  • 고바우 영감 (1955년~2000년)
  • 꽁생원
  • 미스 꾀꼬리
  • 맹랑선생
  • 만난이의 모험
  • 도토리용사
  • 역사 만화
  • 빅토리조절구
  • 만화로 보는 역사
  • 소케트군
  • 콩이와 들개
  • 차돌이 - 작품의 시대 배경이 5.16 군사정변 초기로 추정된다. 작중 대사 중 "사이공에선 내란이 일어나선 안 되지..."
  • 무언극 고바우
  • 고바우 세계 방랑기
  • 고바우와 함께 산 반생
  • 꺼꾸리군 장다리군
  • 세모돌이 네모돌이


4. 수상[편집]


  • 동아대상 (1973년)
  • 소파상 (1974년) - (소케트군) (소년동아일보)
  • 서울언론인클럽 신문만화상 (1988년)
  • 언론학회 언론상 (1990년)
  • 한국만화문화상 (1997년)
  • 보관문화훈장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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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제] A B 당시 학제는 고등학교가 없고 6년제 구제중학교였다. 1953년 5월 25일 경복중학교(3년제)와 경복고등학교(3년제)로 분리됐고 이후 경복중학교는 폐교됐다.[1] 고바우 영감의 첫 연재 매체에 대해서는 사료마다 다르게 나와 있으며 해당 문서 참조.[2] 맨 아래 '경복중학 2년생'이라고 적혀 있는데 이는 착오다. 동년 4월 16일 제9화에 '경복중학 4년생'으로 정정되었다.[3] 당시 만주국 신학제에 따르면 국민학교는 4년제, 국민우급학교(國民優級學校)는 6년제였다.[4] 개인문고명은 '고바우 문고'이며, 장서 십진분류번호 앞에 '고바우'가 붙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