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룡(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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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군인. 국군기무사령부의 전신인 특무대의 대장을 맡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 육군 관동군의 헌병 소속으로서 항일 무장세력을 토벌하다가 광복 이후에도 출세해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는 점에서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하고 고문하는 데 앞장섰던 악질 친일 경찰 노덕술의 군인 버전으로 취급되기도 한다.
2. 일생[편집]
2.1. 일제강점기 및 광복 직후[편집]
김창룡은 1916년 7월 18일[6] 함경남도 영흥군 요덕면 인상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은 그리 풍족하지 않았다. 10살이 되던 해 덕성사립보통학교(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영흥공립농잠실습학교에서 누에를 키우고 실을 뽑는 기술을 배우고 일본인이 운영하는 직물회사에 취직했다. 그러나 2년 만에 회사를 나와서 만주철도 신경역 직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다시 2년 만에 철도 직원을 그만두고 일본인의 추천을 받아 만주 주둔 일본 육군 헌병 군속으로 일하게 된다. 3년 동안 군속으로 온갖 노력을 기울인 끝에 1941년 4월 일본 관동군 소속 헌병 교습소에 입소했고, 교습소를 수료한 후 1941년 10월 육군 헌병보조원이 됐다.
그의 업무는 소련과 만주국 국경지역에서 항일 인사를 감시하는 일을 맡았다. 사복을 입고 주요 인물들을 탐색하고 접근하는 것이 주로 그가 한 일이었다. 당시 그는 자신의 임무 수행을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예를 들면 중국공산당의 거물 왕진리(王近禮)를 체포할 때 그는 중국인 거지로 위장해 왕진리의 가게 종업원으로 일하게 된다. 그는 왕진리의 신임을 사기 위해 경찰서 유치장을 7번이나 드나들었다. 덕분에 왕진리와 주변 중국인들조차 그를 '진짜 중국 사람'으로 인식했다.
일제는 그의 활약으로 왕진리를 검거했을 뿐만 아니라 왕진리와 관련된 9개 항일 지하조직을 색출하고 50여 명을 검거했다. 이때가 1943년이었다. 그의 활약에 탄복한 일제는 바로 육군 헌병 오장으로 특진시켰다. 그 이후에도 그는 1943년 9월부터 1945년 8월 15일 일제 패망까지 불과 2년 사이에 무려 50여 개의 항일 조직을 적발했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자 사복으로 갈아입고 바로 고향인 영흥으로 돌아왔다. 이때 영흥에서 소련군에게 친일부역 혐의로 체포당해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탈출했고, 이후 다른 지역을 전전하다 다시 친일 혐의로 체포돼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거듭 탈출에 성공했다고 한다. 2차례 친일파로 체포됐기에 그는 한반도 이북지역에서는 도저히 살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38선을 넘어 월남해 서울로 왔다. 도시전설에 의하면 하도 얻어터져서 폐인이 된 모습으로 넘어와 미군 경비병들이 놀랐다고 한다.
서울에서도 그는 마땅한 일을 찾지 못해 전전하던 중 마침 만주군에서 안면이 있던 박기병을 만나게 된다. 당시 3연대에서 소대장으로 복무하던 박기병은 그를 국방경비대 5연대 일반 사병으로 입대시켜주었다.
그러나 그는 사병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다시 박기병을 찾아간 그는 3연대에서 정보하사관으로 복무했다. 그러던 중 만주군 대위 출신인 김백일의 추천으로 1947년 1월 조선경비사관학교[7] 3기로 입교해 그해 4월 소위로 임관했다.
이런 그에게 날개를 달아준 인물이 광복군 출신의 이성가 제1연대장(당시 소령)이었다. 우익 성향의 이성가는 중국에서 국민혁명군 소속일 때도 남의사에서 활동하며 곳곳에 암약하는 공산주의자를 발본색원해야 한다는 생각이 뚜렷했다. 그는 제1연대 내의 공산주의자를 솎아내기 위해 김창룡을 연대 정보주임 보좌관으로 발탁하고 정보소대 지휘를 맡긴다. 여기서 김창룡은 그의 재능을 십분 발휘하여 이병주 소령[8] 을 비롯한 연대 내 좌익 장병들을 대거 색출해냈다. 이후 여순 반란 사건을 계기로 숙군 작업이 본격화되고, 반공 이데올로기가 맹위를 떨치면서 김창룡에게는 출세의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투철한 반공 이미지를 보이기 위한 오버스러운 행동에 대한 일화도 많다. 1947년 5월, 당시 서울에는 미소공동위원회 소련측 대표 경비병력으로 소수의 소련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그때 김창룡은 한 소련 군인이 사진을 찍는 모습을 발견했다. 김창룡은 격투 끝에 소련 군인을 제압하고 필름을 압수했다. 미소공동위원회에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소련은 난처해졌다. 미국은 소련 측에게 '정탐을 하러 왔느냐'고 따졌고, 김창룡의 이 행동은 군 수뇌부의 주목을 받아서 1948년 1월 중위로 진급하게 된다.
2.2.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편집]
2.2.1. 여수·순천 10.19 사건 당시 숙군 및 김구 암살 관여[편집]
이후 김창룡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더불어 대위로 진급했다. 8월 말 대한민국 육군본부 정보국에 배속됐다. 그러던 중 1948년 10월 여수·순천 10.19 사건이 일어났다. 여순사건 직후 이승만은 대대적인 숙군[9] 을 지시했다. 1946년 국군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사실 군대의 '진입장벽'이 낮았다. 영어 한 마디만 할 줄 알면 장교가 될 수 있었고, 추천서 한 장이면 요직에도 손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 당장 군대를 육성하는 것이 시급했기 때문이다. 일본군 출신들도 쉽게 군에 들어갈 수 있었고, 마찬가지로 좌익 계열도 어렵지 않게 군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짧은 시간 안에 실적 쌓기식 숙청이 됐기 때문에 문제가 많았다. 대부분의 경우 증거보다 자백을 받아내는 식으로 심문을 했고, 고문이 혹독하게 가해졌다. 자백을 한 뒤에는 연루된 좌익 인물을 대라고 또다시 고문이 이어졌다. 이 같은 방식으로 애매하게 숙청되는 인물이 많았다. 대표적인 예로 최남근 중령은 남한 정부를 전복할 목적으로 동지들을 규합했다는 죄명이 씌워졌다. 최남근은 처형당할 때 애국가를 부르고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 자신이 억울하다는 것을 마지막까지 항변한 것이다.
당시 숙군 작업으로 처형된 사람 가운데서는 이처럼 애국가를 부르거나,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거나, 심지어 '이승만 대통령 만세'를 외치면서 죽어간 사람도 있었다. 이후에도 숙군은 이어져 1949년 7월까지 4,749명이 처벌받았다. 숙군 과정에서 짧은 시간 안에 뛰어난 실적을 올린 김창룡은 1949년 초 소령으로 승진하고, 6월 육군 방첩대(CIC) 대장으로 임명되고, 7월 중령으로 승진했다. 불과 2년 3개월 만에 소위에서 중령까지 올라간 것이다.
김창룡은 애먼 사람만 빨갱이 딱지를 붙여 때려잡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권력을 개인적인 원한을 갚기 위해 남용한 치졸하기 그지없는 자였다. 1946년 김창룡이 이리 소재 3연대에서 하사관으로 복무할 당시 소대장은 일본군 하사관 출신 김도영이었는데, 어느 날 김창룡에게 야간 순찰 후 보고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김창룡이 이를 어기자 김도영 소대장은 김창룡을 꾸짖으며 지휘봉으로 몇 차례 때렸다. 이 일로 김도영에 대한 앙심을 품은 김창룡은 육사 3기로 임관한 후 특무대 소속 장교로 근무하던 중 1949년 제주 4.3 사건 토벌 시 6연대 1대대장으로 출전한 김도영이 제주도 내 좌익 세력과 내통하여 토벌을 소홀히 했다는 누명을 씌우고 특무대에 무려 6개월 간 구금시킨 채 혹독하게 취조했지만 혐의가 없다는 것이 밝혀지며 간신히 풀려났다. 이후 6.25 전쟁 도중에 부산지구 합동수사본부 본부장이던 김창룡이 부산 제2훈련소 부소장 김도영과 마주친 자리에서 "당신은 왜 이북으로 안가고 아직 여기 있느냐?" 라며 조롱하자 격분한 김도영은 권총을 뽑아들고 저 놈을 죽이겠다며 달려들어 한바탕 소동을 일으키면서 둘의 사이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전쟁이 끝난 후인 1954년, 김창룡은 또다시 논산훈련소 소장이던 김도영이 야당 인사인 신익희의 사주를 받아 훈련병들을 규합하여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다고 모함하면서 그를 4개월 동안 구속수사 했고, 또 다시 무혐의로 석방되기는 했지만 이로 인해 장성 진급에서 미끄러진 김도영은 김창룡이 죽을 때까지 약 2년간 무보직으로 군생활을 하는 고역을 겪어야 했다.
또한 안두희에게 김구 암살을 지시한 배후로 가장 유력한 인물이다.# 안두희는 김구를 살해한 직후 경교장 주위에 있던 대한민국 육군 헌병들에게 체포됐다. 체포된 안두희가 끌려간 곳이 김창룡 앞이었다. 이때 김창룡은 안두희에게 "안 의사, 수고하셨소"라고 말했다고 한다. 김창룡은 이후 안두희를 끊임없이 챙겼다. 감옥에 있을 때 좋은 음식을 대접했고, 책 쓰는 것을 도와줬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김창룡은 안두희를 형무소에서 빼내 주었다. 안두희가 소위로 다시 임관할 때부터 대령으로 제대할 때까지 김창룡은 살뜰하게 챙겨주었다. 그래서 김구 암살의 배후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2.2.2. 양민학살 및 간첩 조작[편집]
1950년 9월 28일, 이승만은 북한군에 점령당했던 서울을 수복하자마자 김창룡을 군·검·경 합동수사본부 본부장으로 임명했다. 합동수사본부는 북한군이 수도권 지역을 점령하고 있을 당시 북한군에 협조한 '부역자'를 찾아내고 처벌하는 무시무시한 권한을 가졌다. 그뿐이 아니라 합동수사본부장은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했다. 정치적으로도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이에 따라 실적을 중시한 김창룡의 부역자 처벌은 여론과 정치권의 거센 비판을 받아왔다. 특히 합동수사본부는 어느 법에도 설치 근거가 없었다. 결국 합동수사본부는 1951년 5월 23일 해체됐지만, 김창룡은 이 시기 이승만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얻었다. 김창룡은 1950년 10월 말에 대령으로 다시 승진했으며, 1951년 5월 15일 육군 특무부대[10] 대장으로 임명됐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35세였다.
1951년 한 무리의 청년들이 상복을 입은 채 관을 메고 지리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당시 특무부 대장 김창룡은 이들이 관 속에 총기를 숨겨 놓고 지리산 빨치산에게 가는 것을 붙잡았다고 이승만에게 보고했다. 기분이 좋아진 이승만은 국무회의에서 "여러분들, 김창룡 대령을 자식처럼 사랑해 주세요"라고 공개적으로 칭찬했다. 그런 뒤 이승만은 국무회의장으로 김창룡을 불러들인 뒤 노획한 총기를 전시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는 김창룡이 벌인 숱한 조작 사건 중 아주 사소한 것에 불과했다. 최초의 '빨갱이 만들기 작전'은 1950년 10월 그가 군·검·경합동수사본부 본부장으로 취임한 직후 일어났다. 인민군 패잔병으로부터 빼앗은 무기를 삼각산 뒤편에 있던 주민들에게 쥐여주고 이들을 공산분자로 몰았고, 이들이 서울을 습격하려 한다고 꾸며 모두 죽인 사건이다. 이것이 소위 '삼각산 사건'이라 한다.
1952년 5월 24일 무장 북한군으로 보이는 일당이 임시수도 부산 금정산에 나타나 총격을 가한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국군과 미군 병력이 밀집해 있는 임시수도 부산에 북한군이 나타나는 것은 사실상 말이 안 되었는데, 사실 이 또한 김창룡이 조작한 사건이었다. 당시 김창룡은 대구형무소에 있는 무기수, 중형수들을 상대로 '큰 일을 치르고 나면 석방해 주겠다'라고 제안했다. 김창룡은 이 제안에 따른 형무소 재소자 7명을 북한군으로 꾸민 다음 부산 금정산에서 총격을 하도록 한 것이다. 물론 이들 7명은 순식간에 사살당했다.
하지만 김창룡의 공작에 힘입어 이승만은 다음날 부산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5월 26일 야당 국회의원들이 탄 버스를 통째로 납치한 '부산 정치 파동'을 일으켰다. 이를 토대로 이승만은 재집권에 성공한다. 그런데 김창룡은 자신이 이 사건을 직접 마무리하고 싶었지만, 김창룡의 직속상관 김종평(육군 정보국장)이 그가 부산으로 이동하는 것을 막았다. 결국 공은 원용덕 헌병사령관 등 다른 사람에게 돌아갔다. 공을 빼앗긴 김창룡은 김종평에 원한을 품고 있었고 이는 또 다른 조작사건으로 만들어진다.
1953년 김창룡은 '동해안 반란 사건'을 적발했다고 발표했다. 동해안 속초에 있는 1군단에 이승만이 방문하면, 이승만을 저격하고 김종평 육군 정보국장이 군 병력 1000명을 동원해 부산을 장악해 정부 요인을 처단한 다음 조봉암 국회부의장을 대통령으로 추대한다는 엄청난 내용이었다. 나중에 군법회의에서 여러 증인들이 김창룡의 조작임을 증언하면서 사건은 커지지 않았지만, 김종평은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1953년 5월 김창룡은 육군 준장이 됐고, 이때부터 김창룡은 간첩 조작과 함께 권력 투쟁에 직접 개입하게 된다.
족청을 제거한 김창룡은 다음 타깃으로 반공검사로 유명한 오제도[12] 를 삼았다. 김창룡은 이승만에게 '오제도는 빨갱이입니다.'라고 보고했다. 이 사실을 듣자 오제도 또한 '아닙니다. 김창룡이 빨갱입니다.'라고 보고했다. 그래서 김창룡의 오제도 검사 제거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박정희 역시 견제의 대상이었다. 1953년 박정희가 미국 유학을 떠나려 할 때 김창룡이 막았다. 당시 미국 유학을 다녀오면 그 이력이 쌓여 군대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박정희가 남로당에 있을 때 그를 잡아내고 심문한 사람이 바로 김창룡이었다. 김창룡으로서는 박정희의 출세를 막아야만 했다. 이렇듯 김창룡이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자 육군참모총장인 정일권과 상관인 강문봉 중장조차 그를 감당하지 못했다.
1954년 김창룡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논산훈련소장 김도영이 야당 국회의원 신익희의 사주를 받아 훈련병들을 이끌고 쿠데타를 기도했다는 혐의로 구속하기도 했다. 김도영은 4개월 뒤 풀려났지만, 김창룡 때문에 번번이 승진의 기회에서 누락됐고, 변변찮은 보직도 맡지 못했다.
1955년 1월 심지어 김창룡은 육군 소장으로 진급했다. 이 당시 김창룡을 사람들은 '이승만의 오른팔', '이승만의 양자'라고 불렸다.
1955년 '이승만 암살 음모 사건' 역시 김창룡의 작품이었다. 김창룡은 1955년 과거 독립운동을 했던 나재하, 김병호, 민영수[13] , 김재호, 김익중, 이범륜, 유성연, 김동혁, 김동훈에게 '이종태'라는 청년을 접근시켰다. 그는 이승만을 비판하면서 나재하 등에게 '이대로는 안 된다. 도탄에 빠진 국민을 구하기 위해서는 이승만을 제거해야 한다'라고 목소리를 높였고, 이에 그들은 이종태에게 1955년 10월 3일 개천절 행사 때 수류탄을 터뜨려 이승만을 죽여달라고 부탁했으며 수류탄 등을 지원했다. 결국 당연하게도 이 음모는 거사 직전 특무대에 발각됐다.[14]
그리고 이 사건을 납북된 조소앙이 암살 지령을 내렸다는 식으로 엮어서 한때 조소앙이 몸 담았던 한국독립당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는 정치인들도 제거하려 했다.[15] 이 외에도 김수임 간첩사건 등 숱한 사건이 그의 손에 의해 조작돼 많은 사람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1955년 10월 김창룡의 횡포를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던 정일권과 강문봉은 이승만 대통령의 별장이 있는 진해에 직접 찾아갔다. 그들은 "김창룡을 다른 부대로 보내거나 차라리 미국 유학을 보내 달라"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들의 요청을 거부한다. 이 소식을 들은 김창룡은 발 빠르게 대응했다. 김창룡은 때마침 터진 원면[16] 비리를 활용하려 했다. 당시 알려진 바에 따르면 원면을 받은 장성들이 이를 시장에 되팔아 1억 원 이상의 부당이익을 취해 자유당 고위층에 상납했다고 한다. 김창룡은 이를 가지고 자신을 탄핵한 정일권, 강문봉 등 군 장성을 제거하려고 시도했다. 이기붕조차 김창룡에게 '그만 들춰라'고 경고했지만 김창룡은 멈추지 않았다.
1955년 11월, 일제 경찰 출신으로 고문의 달인인 노덕술 헌병사령부 범죄수사단장(중령)이 파면됐다. 노덕술 또한 김창룡과 마찬가지로 이승만에게 신임을 받고 있었지만, 군수물자를 빼돌린 정황이 포착됐고, 언론에 대문짝만하게 실리면서 파면되고 말았다. 이 사건도 김창룡이 잠재적 경쟁자가 될 수 있는 노덕술을 제거했다는 설이 우세하다.
2.2.3. 권력투쟁 끝에 암살당하다[편집]
"김창룡은 평소 개인의 영달을 위해 무분별하게 사람들을 잡아들였으니 공산당 1명에 무고한 양민 10명의 비율로 무고한 사람들이 그의 손에 희생되었다. 김창룡이 취급한 사건들도 전부가 협박 공갈로 자백을 받은 것으로 대부분 허위 날조됐거나 침소봉대된 것들이었다. 한편 뒤켠에서는 살인, 약탈, 협박 등으로 군수품을 빼돌리고 밀수를 하는 식으로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 김창룡이 그간 모은 재산만 20억 원이다."
한편 이승만은 김창룡의 죽음을 보고 받은 그날로 중장으로 추서했다. 사건 발생 4일 후인 1956년 2월 3일, 국군 최초로 국군장이 열렸다. 그날 하루 육해공군 전 군부대는 조기를 게양했고 장병들의 음주와 가무도 금지됐다. 이승만은 김창룡 영전에 3번이나 조문하면서 진심으로 애통해했다. 이승만은 조사에서 "김 중장은 나라를 위해서 순국한 것이며 충령의 공을 세웠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항목#, 2016년 월간조선 <배진영의 기무사 비록> 2회에도 나오며, 2007년 국가기록원 측은 특무대 측의 김창룡 저격사건 관련 수사기록, 검찰 측 판결문, 법무부의 사형집행종료보고, 미국 국무부 측 본 사건 보고서 등 총 3천여쪽 분량의 문건들을 공개했다.#
3. 평가[편집]
한 번은 김창룡이 잡아들인 수백 명의 영등포 특별부대 장병들이 재판에 회부됐다. 사건을 담당한 이운기 법무관은 이들의 진술서가 판에 박은 듯이 똑같아 이상하다고 내게 문의해 왔다. 알아보니 김창룡이 부평을 순찰하는데 술집에서 조선인민군 노래가 울려 퍼져 즉각 술집을 포위해 잡아들이고 보니 특별부대 장병들이었다. 중대장이 무조건 한 곡씩 노래를 하라고 시켰는데 한 병사가 노래를 못한다고 극구 사양하면서 "아는 노래는 월남하기 전 이북에서 배운 노래밖에 없다"고 했더니 "그거라도 하라"고 해 생긴 소란이었다. 김창룡은 이들을 잡아들여 "친한 놈 이름을 대라"고 족쳤는데 그래서 수백 명이 검거됐다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책임질 테니 무조건 무죄로 상신하라"고 했는데, 이 일로 이운기 법무관은 김창룡으로부터 "너도 빨갱이다. 꼭 잡아넣겠다"는 위협을 받았고 나(백선엽)와도 몇 달간 신경전을 폈다.
- 『실록 지리산』 중에서.
"김창룡은 직속상관인 참모총장이나 국방부장관을 무시하고 직접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따위의 월권을 자행했다. 비위사실의 보고내용도 사적인 감정에서 나온 것이 많았다. 김창룡은 정보를 군사목적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세력 확장에 이용했다. 그는 또 지휘관 사이를 이간시켜 장성들을 분열시켰다. 특무대는 본래의 사명을 망각하고 군 지휘관들을 감시하는 데 열중했다. 특무대는 군의 암적 존재다."
한국 현대사 인물 상당수가 그러하듯이, 김창룡 또한 극과 극의 평가가 오고가는 인물이다. 뼛속 깊은 반공주의자로 온갖 무리수를 두어가며 공산주의자들을 솎아내려 했기 때문에 김창룡의 측근이나 반공우파 입장에서는 찬양의 대상이다. 반면 그에 반감을 가진 군인이나 그 과정에서 가혹한 탄압을 당한 좌파 및 직간접 희생자 입장에서는 증오의 대상이다.
후술할 1974년 8월 21일자 동아일보 연재물 <비화 제1공화국> 344회차에 따르면 1974년 기준으로 김창룡 본인과 암살 당사자 4명이 다 사망한 상태임에도 암살 사건조차 의견이 엇갈렸으며, 당시 생존해 있던 대다수 관계자들도 "20여년이 지난 뒤에 와서 굳이 서로 원한을 품어서 무얼 하겠는가"라는 식으로 말을 아꼈다고 한다. 김창룡의 후임 특무부대장이던 정인택 준장 등 측근들은 한결같이 "어수선했던 시기에 공산당 타도에 앞장선 인물"이란 식으로 높이 평가했으며 제1연대 때부터 그를 보좌했던 최열 중위도 "부대장은 오로지 국가를 위해 일하다 암살당했다"고 했다. 반면 강문봉, 이진용 등은 김창룡이 군 내부의 기강을 문란시키고 사기를 저하시킨 터라 전 군이 공분을 느껴오던 터라 제거됐던 것이라고 보았다.
21세기가 지난 지금도 반공우파 성향 사람들은 김창룡을 찬양해마지 않는다. 그의 무덤에 매 해 꽃도 바치고, 김창룡을 욕하는 건 종북 행위라고 우기며, 2011년에는 이대인(당시 한국정보문화연구원 원장)이 쓴 전기 <대한민국 특무부대장 김창룡#>, 2022년에는 비망록 <숙명의 하이라루>가 출간되었으며 군사학자 남정옥(현 국방부 국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이 엮었다. 당연히 내용 또한 서문에서부터 미화 일색이며, 독자들도 김창룡을 미화하는 후기(뉴데일리)를 남기고 있다.
반면 대다수 학계나 정치권에서의 평가는 당연히 부정적이다. 김창룡은 공산주의자 몰이만이 아니라, 군대 내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서 수많은 촌극을 벌였다는 점, 그리고 그 촌극의 내용이 상당히 가관이라는 점에서 인간이 아닌 짐승 이하로 취급하는 시각이 만연해 있다.
군 출신 인사들 사이에서는 김창룡에 대한 시각이 엇갈리고는 한다. 일단 분단 후 여수·순천 10.19 사건과 같은 반란이 일어날 정도로 혼란한 상황에서 숙군 자체는 불가피한 측면도 있었다. 어느 정도의 부작용을 감수하고 빨리 끝낼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선 김창룡이 필요악이라는 시선도 있다. 다만 이후 김창룡 개인의 권력욕이 개입해 억울한 피해자를 무수히 양산했다는 점은 빼도 박도 못하게 많은 이들의 지탄을 받는다. 권력을 남용하고 군의 지휘계통을 무시한데다, 숙군 과정에서는 지나친 무리수로 억울한 희생자를 많이 만들었다[17] 는 이유로 한국군 원로들 상당수가 그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한다.
특히나 자유당 독재 시절에는 우익 성향이더라도 반 이승만 세력이라고 판단되면 가차 없이 공산주의자로 모함해대어 더더욱 원성을 샀다. 이로 인해 많은 보수/우익 인사들조차 김창룡을 자신들을 빨갱이를 모함한 미친놈이라고 평가한다. 대표적으로 박정희와 그 주변의 인사들도 김창룡이라면 이를 갈았다. 박정희가 5.16 정변을 일으켜 친 이승만계 인사들을 혁명 후에 조리돌림시키고 숙청한 것을 보았을 때, 김창룡이 암살당하지 않고 살아 있었다면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당하여 반병신이 되거나 끔살당했을 것이란 이야기도 있다. 같은 이승만의 오른팔이자 자신보다 더 한 술 떠뜬 살인귀였던 김종원의 비참한 운명이 그에게도 재현되었을 가능성이 컸다.
김창룡을 옹호하는 측에서는 김창룡이 원한을 산 것은, 방첩활동 뿐 아니라 목적이 무엇이었든 간에 군 고위층의 비리를 캐낸 것도 큰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한다. 1950년대 당시 한국군은 전쟁 중 및 이후 극도로 어려운 상황에서 파벌싸움과 부정부패가 만연해 있었다. 군내에 평안도계, 함경도계, 구 일본군계 등이 고위직을 독식하고 많은 비리를 저지르고 있었다. 김창룡은 이승만에게 잘 보이고 싶은 권력욕은 있었을지언정, 의외로 금전비리에 대해서는 비교적 깨끗했다는 증언이 있다.[18] 이런 그가 군내 고위장성들의 비리를 파헤쳤기 때문에 큰 원한을 살 수밖에 없었다.[19] 당장 강문봉이 김창룡 암살을 사주한 것도, 김창룡이 그와 관련된 각종 비리를 깊이 캐들어갔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강문봉은 은 육군 최대 파벌이던 함경도계의 핵심 인물이었기에, 자칫하다가는 정일권을 정점으로 하는 함경도계 군맥 전체가 위기에 빠질 수 있었다. 이 때문에 김창룡 암살이 사실상 정일권의 지시였다는 주장까지 등장한다. 이처럼 김창룡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에는 부정부패를 저지르다 발각당한 인사들의 사적인 원한도 한몫을 했다는 것.
창군기 임관한 군 원로들의 증언에 따르면 대부분 김창룡이 권력을 남용하는 경우가 많고, 거리를 두고 지냈다고 한다. 숙군 당시 처형을 당한 최남근조차 인간성, 지휘능력을 긍정적으로 평하는데 비해 평가가 안 좋은 편이다.
대체적인 김창룡의 평가는 권력욕을 위하여 죄없는 사람들을 빨갱이로 모함한, 학살한 전적이 있으므로 죽어도 싸다는 평이다. 그랬기에 비교적 젊은 나이에 비명횡사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축구계 원로들 중에도 이 사람에 대하여 부정적인 이들이 많다.[20] 네이트 김현회 칼럼에 축구대회에서 횡포를 부린 일화들이 소개된 바 있다.#
4. 대중매체에서[편집]
- 1981년작 MBC 드라마 제1공화국에선 배우 김기일이, 1989년작 제2공화국에서는 백범 역 전문 배우 이영후가 김창룡으로 나왔다. 박정희를 전화기로 전기고문하는 장면 및 이후 박정희가 중요한 순간마다 그 광경을 떠올리는 장면이 묘사된다. 1993년작 제3공화국에서도 유사한 장면이 나오는데 이때 김창룡은 중견배우 김영인이 역할을 맡아 연기했다.
- 1995년작 KBS 광복 50주년 기획드라마 <김구>에선 배우 서상익이 연기했는데, 제1화 및 16화에서 안두희(정진각 분)를 만나 "백범 밑에는 빨갱이들이 많아요. 큰 나무를 쓰러뜨려야 그 밑에 숨어 있는 빨갱이들을 자연스럽게 없앨 수 있다"는 대사를 해서 백범 암살의 배후라는 설정으로 나왔다. 이에 장녀 김미원이 명예훼손이라 주장하며 KBS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걸었으나 1996년 1심, 1997년 2심, 1998년 대법원 상고심에서 각각 패소 판결을 받았다.(서울고법 96나36700, 대법원 97다19038)
- 1998년에 이인화 작가가 지은 박정희 미화 소설 <인간의 길>에서는 악마사촌 고문 기술자로 나온다.
- 2004년 EBS 문화사 시리즈 제1탄 명동백작에서는 배우 이계영이 연기했다.
- 2006년 KBS 대하드라마 서울 1945에 등장하는 박창주(박상면 분)는 이 인물에서 일부 설정을 따와서 만든 가상의 인물이다.
- 선우휘의 '추적의 피날레'에서는 다른 이름으로 등장하는 악역 장군이 김창룡을 모델로 하고 있다. 대북 첩보를 자신의 권력장악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인물인데. 이 인물도 출근하다가 암살당했다.
5. 기타[편집]
- 원래 일제강점기의 스파이 양성학교인 나카노 학교를 나왔다는 말이 있다.#
- 안양 관악산 묘역에 있던 그의 비석은 정일권이 세웠으며 비문은 이병도가 썼다. 이병도는 조문에 '그 사람됨이 총명하고 부지런하고 또 불타는 조국애와 책임감은 공사를 엄별하여 직무에 진수하더니 급기야 그 직무에 죽고 말았다'라고 적기도 했다. 1998년 국립대전현충원 이장 당시 규격화된 둘레석 및 묘비만 설치할 수 있다는 규정에 따라 장군묘역에서 300~400m 떨어진 연못이 있는 빈 터에 세웠지만 현충원 이장 반대 여론이 점차 형성된 2001년 3월에 유족 측이 인수해서 아무도 모르게 가져갔다. 이것을 정지환 <시민의신문>[23] 기자가 2003년에야 충남 금산군 추부면 승마장 구석에서 찾아내 특종으로 보도하였다.[24]
- 죽고 나서 경기도 안양시 석수1동 산33-1 관악산 기슭의 약 1천여 평짜리 땅에 묻혔는데 안두희 증언이 이슈화되던 1992년 <한겨레신문>을 통해 존재가 재조명되었고, 1998년 2월 13일 국군기무사령부의 지원으로 국립대전현충원 장군 1묘역에 이장된 후 2001년 <동아일보>를 통해 이장 사실이 처음 알려져 점차 여론화되면서 이에 대해 찬반논란이 계속되고 있으며 관련 집회가 있을 때마다 경찰이 출동할 정도로 현충원에서 비상이 걸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현행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 7조 1항에서 유족이 이장을 요청하지 않는 한은 불가능하며 대전현충원 이장을 찬성하는 사람들은 김창룡이 '반공투사'였다는 이유를 들어 극찬하고 칭송했다. 그의 유족들도 ''공산화를 막기 위해 제일 공헌을 많이 했다.' '민간인을 많이 죽였단 것은 헛소문이고 이승만 대통령을 도와 공산화를 막기 위해 제일 공헌한 분'이란 발언을 하기도 했다.# 심지어 뉴데일리에서는 김창룡의 행적을 확대 과장해서 선전하고 있다.
- 그가 죽자 아내 도상원은 홀로 슬하 1남 3녀를 키웠으며 세인의 지탄을 받다 못해 1971년 말 브라질 상파울루로 이민갔다가 아내는 1990년대 이후 귀국해 대전에 정착했다. 자식들 중 장녀 김미원은 아버지의 명예회복에 평생을 매진했으며 1995년 드라마 <김구> 제작진,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 등을 각각 고소하며 법적 투쟁을 벌이다 2006년 3월 사망했고, 외아들은 여전히 브라질에 거주 중이다. 반대로 그의 친일 행적에 비해 장인어른 도정호(1903~1930)는 독립유공자이며 항일투쟁을 하다 옥사하였다.#
- 한반도에서 최초로 축구 야간경기를 연 기록도 갖고 있다. 1954년 전국체전에서 있었던 일인데, 본인의 팀이 유리한 상황에서 경기종료 3분을 앞두고 그라운드가 어두워지자 스무 대의 지프차를 불러 라이트를 켜고 경기를 속행시킨게 시초였다. 그런데 이마저도 그라운드를 제대로 비추지 못했고 결국 심판이 도망가는 바람에 재경기를 치러야 했다. 윗 문단의 김현회 칼럼 참고.
6. 참고/관련 문헌[편집]
- 도서/연재물
- 동아일보 <비화 제1공화국> '김창룡 소장 저격사건' (1974.6.24. ~ 8.21.)#
- 대한민국 특무부대장 김창룡 - 이대인 저. 기파랑. 2011.
- 숙명의 하이라루: 육군 특무부대장 김창룡 장군 비망록 - 김창룡 저 / 남정욱 편. 청미디어. 2022.
- 영상물
- PD수첩 '친일파는 살아있다' 1탄 (2004.1.27. MBC)
- 인물현대사 '누가 권력의 심장을 쏘았나, 특무부대장 김창룡' (2004.12.3. KBS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