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종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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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육군
제2작전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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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임한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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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대 제2야전군사령관
진종채
陳鍾埰 | Jin Jong-chae


파일:진종채 장군.jpg

본관
여양 진씨[1][2]
출생
1923년 11월 21일[3]
경상북도 영일군 기계면 인비리
(現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기계면 인비리)
사망
1998년 3월 27일 (향년 74세)
서울특별시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장군 1묘역-3호
학력
대구사범학교 (졸업)
경남대학교 (학사)
군사 경력
임관
육군사관학교 (8기)
복무
대한민국 육군[4]
1949년 ~ 1981년
최종 계급
대장 (대한민국 육군)
최종 보직
제2야전군사령관
주요 보직
제8보병사단 사단장
육군정보사령관
수도경비사령관
육군보안사령관
제2야전군사령관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전 군인. 예비역 대장. 본관은 여양(驪陽).


2. 생애[편집]


1923년 11월 21일 경상북도 영일군 기계면(현 포항시 북구 기계면) 인비리에서 아버지 진찬욱(陳燦旭, 1903 ~ 1986. 7. 9)[5]과 어머니 경주 최씨(1903 ~ 1977. 9. 23)[6] 사이의 5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다시 육군사관학교에 진학, 1949년 8기로 졸업해 대한민국 육군 장교로 임관했다.[7] 김종필, 김형욱5.16 군사정변의 주역이 동기이며, 군 복무 중에 경남대학교를 졸업했다. 서종철, 노재현, 윤필용 등과 함께 전두환하나회의 주요 후원자로 꼽힌다.[8]

제3보병사단 제23보병연대장, 제8보병사단장, 육군정보사령관 등을 맡다 1973년 윤필용 사건으로 윤필용이 물러나자 수도경비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이때 하나회를 뿌리뽑으려는 강창성 육군보안사령관을 견제하기 위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육군보안사령부가 휘발유를 불법으로 판매한다고 보고했다. 이로 인해 강창성은 3관구사령관으로 좌천됐다.

1975년 육군보안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이후 1977년 중장 진급과 동시에 육군보안사령부를 국군보안사령부로 확대 개편하였다. 그런데 1977년 대대장 월북 사건을 납북이라고 거짓 보고하였다가 박정희 대통령의 분노를 샀다. 그리고 중앙정보부에서 파견된 김기춘 검사에 의해 국군보안사령부의 정보처가 폐지되는 등의 국군보안사령부 축소안이 실행되었다. 또한 본인이 권력지향형 인물이 아니어서 보안사 권력 확장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대대장 월북 거짓 보고 사건의 여파로 1979년 제2야전군사령관으로 보직 이동했다. 보안사령관 후임자로 전두환을 적극 추천하였고, 갓 사단장[9]을 마친 전두환이 핵심 요직인 보안사령관에 임명되면서, 이 결정은 나비효과처럼 12.12 군사반란으로 이어지게 된다. 10.26 사태 후 규정에 의거하여 보안사령관이 대통령 시해 합동수사본부장이 됨으로써 전두환의 권력 장악 시나리오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전두환의 후원자여서 그런지 12.12 군사 반란 이후 세 명의 야전군 사령관 중 유일하게 유임되었고[10][11] 1980년 대장에 진급하였다. 제2야전군사령관 임기 중이던 1980년 5월, 5.18 민주화운동의 계엄군의 지휘계통상에 있었지만 발포 명령 여부에 대해서는 부인했다. 그러나 2019년에 이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증언이 나오면서 발포 명령이 실제로 내려졌다는 주장이 더 큰 힘을 받게 되었다. 1980년 5월 20일 당시 상무대에서 통신병으로 근무하였던 박수철[12]은 발포 명령이 담겨 있었던 암호로 된 통신문을 받았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고 증언하였다. 출처

폭도로 보이는 자들이 금일 20시 야음을 틈타 상무대를 습격하기로 돼 있는 바, 모든 장병들은 자기 구역에서 맞교대를 실시하고…(중략) 수상한 자가 접근할 시에는 복부 이하로 사격을 가하여 제압하라… 보낸 사람은 2군사령관 진종채

하지만 해당 문서가 직접적으로 발견되지는 않았다.

1981년 대장으로 예편하였다. 예편 이후 진해화학(1987년 한일합섬에 인수) 사장을 맡은 것 외에는 다른 직책을 맡지는 않았다. 1995년 김영삼 정부의 역사 바로 세우기에 의해 12.12 군사반란, 5.18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검찰 소환조사를 받고 고소되었으나 결국 불기소처분 되었다. 이때 첫째 사위인 조준웅 검사[13]가 해당 수사팀에 속하였다가 장인이 관련되었다는 이유로 수사팀에서 제외되었다.

그후 1998년 3월 27일 서울특별시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하였다.# 그의 유해는 1998년 3월 30일 국립대전현충원 장군 1묘역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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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어사공파(御史公派)-신광군파(神光君派)-현감공파(縣監公派) 30세 재(載) 항렬. 족보명은 진윤재(陳潤載).[2] 제8대 여양진씨대종회 회장을 역임했다.[3] 국립대전현충원 공훈록[4] 군번 13656[5] 초명 진성진(陳成鎭). 1951년 기계면장을 역임했다.[6] 최자진(崔子鎭)의 딸이다.[7] 진종채를 군내 요직에 중용했던 박정희도 대구사범학교와 육사를 함께 졸업했다.[8] 윤필용 사건으로 중간에 숙청된 윤필용과 달리 진종채, 서종철, 노재현은 10.26 사건 때까지 군에 영향력을 행사해 영남 군벌 3인방으로 불렸다.[9] 소장 진급은 1977년 대통령경호실 작전차장보 시절에 했으며, 1978년에 소장 2차 보직으로 알짜보직제1보병사단장을 거쳤고 당시 제3땅굴 발견에 힘입어 1979년에 소장 3차 보직을 국군보안사령관으로 받아 영전한 것이다.[10] 12.12 군사반란 당시 야전군 사령관은 김학원 제1야전군사령관(중장), 진종채 제2야전군사령관(대장), 이건영 제3야전군사령관(중장)이다. 이 중 반란군에게 호의적이었던 진종채 제2야전군사령관을 제외한 제1, 3군사령관은 반란 이후 보직 해임되었다. 그리고 제1군사령관에는 반란군의 회유에 넘어갔던 윤성민 당시 육군참모차장이, 제3군사령관에는 반란군의 핵심 멤버였던 유학성 당시 국방부 군수차관보가 임명되었다.[11] 당시 경질된 김학원 제1야전군사령관은 얼마 못 가 홧병으로 세상을 등졌다. 그리고 이건영 제3야전군사령관은 신군부 세력의 반대파 회유에 따라 한국마사회 회장으로 임명되어 10년간 재임하였다.[12] 당시 계급은 상병[13] 2007년 삼성그룹 특별검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