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명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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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전 군인, 정치인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 고경명의 차남 고인후(高因厚)의 후손이다.[3]
2. 생애[편집]
1935년 7월 18일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 상림리 상석교마을에서 아버지 고재준(高在俊, 1903. 1. 18 ~ 1967. 6. 7)[4] 과 어머니 전주 최씨(1910. 6. 5 ~ 1994. 7. 8) 최만홍(崔萬洪)의 딸 사이의 5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장세동과 마찬가지로, 영남 출신들 위주의 신군부에서 호남 출신이었던 드문 케이스.[5] 전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에 15기로 입학했는데 동기인 민병돈, 이진삼, 김상구 등과 하나회에 가입하였다.
1979년 12.12 군사반란 때 청와대 대통령경호실 소속으로 반란에 직접 가담했다. 역시 하나회 멤버인 당시 경호실장 직무대리 정동호 준장과 함께 경호실 병력들을 이끌고 무단으로 출동하여 대한민국 육군본부 헌병 경호대장 구정길 중령[6] 예하의 헌병 병력을 강제로 제압하고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이 머물던 국무총리공관을 접수했다.
이 공로에 힘입어 전두환 정권 때 15기의 선두주자로서 승승장구했으며 군사 정권에서 요직 중에 요직인 수도경비사령관, 국군보안사령부 사령관을 모두 역임했다.[7] 5공화국 내내 승승장구한 전두환계 군맥에 속했으나, 같은 전두환계이자 육사 동기 민병돈 특전사령관과 함께 1987년 6월 항쟁 때 전두환이 내린 군 유혈 진압 명령을 반대하기도 하였다.
전두환은 퇴임 직전, 퇴임 이후 자신의 세 확보를 위한 조치 중 하나로 고명승을 대장 진급시키며 군사 정권의 요직인 제3야전군사령관에 임명했다.[8] 전두환은 그 외에도 군사정권의 핵심 요직들에 자신의 직계 군맥들(박희도 참모총장 유임, 최세창 합참의장 임명, 고명승 3군사령관 임명, 최평욱 기무사령관 임명, 김진영 수경사령관 임명)을 깔아놓고 노태우에게 이임했다.
상왕으로 군림하려는 전두환의 태도에 노태우가 분노했을 것은 당연지사였고 노태우는 취임 후 첫 정기인사에서 박희도를 경질하는 것을 시작으로 천천히 이들을 제거하고 자신의 군맥(9.9 군맥)으로 채워넣는다. 전두환의 직계 고명승은 경질되지 않고 3군사령관으로서 2년 임기를 채웠지만 이후 영전하지 못했고 3군사령관을 끝으로 전역하였다.[9] 5공 내내 선두주자였던 그가 전역한 후 6개월 뒤, 5공 내내 한직을 멤돌았으나 6공에서 승승장구한 노태우계 군맥의 직계인 육사 동기 이진삼이 육군참모총장이 되었다.[10]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전라북도 부안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 이희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신한국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새정치국민회의 김진배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허화평, 허삼수, 정호용, 권정달 등 다수의 쿠데타 가담자들이 6공화국에서도 최소 1번 국회의원에 당선된 반면 하나회에서도 몇 안되는 호남출신인 고명승은 신군부와 5공화국에 대한 반감이 컸던 고향의 분노를 이겨내지 못했다. 그러나 고위관료 출신도 아니고 하나회 출신이었던 사람이 40% 안팎의 표를 얻어 1992년, 1996년에 전북에서 보수정당 타이틀을 달고 당선되었던 황인성, 양창식, 강현욱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의 성과를 보인 점이 감안되었는지 오랫동안 한나라당 전북도당 위원장을 지냈다가 이명박 정권 시절 정운천에게 넘겼다.
12.12 군사반란에 가담했음에도 다른 가담자들과 달리 기소되지 않았다. 색깔론을 떨쳐버리기 위해 군 출신을 영입하려던 DJ측이 지연(호남 출신)을 연고로 그를 여러번 영입하려고 했으나 본인이 고사했다고 한다.
한편 아내가 척수경막증으로 장애를 갖게 되었고 병수발하면서 쓴 "휠체어에 사랑을 싣고"라는 수기가 1990년에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지만 안타깝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별했다.
2021년 11월 24일 전두환 장례식에 등장하여 조문을 하였다.
3. 여담[편집]
- 첫째 남동생 고진석(高鎭錫, 1936. 5. 1 ~ 2018. 07. 05)도 육군사관학교 16기 출신으로 대한민국 육군 제2보병사단장, 제2작전사령부 부사령관,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참모장 등을 지내고 소장으로 예편했으며 정규 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는 최초 형제 장군들이다. 형제 장군으로는 6.25전쟁때 백선엽과 백인엽, 이진삼(육사 15기)과 이진백(갑종 153기), 고명승(육사 15기), 고진석(육사 16기) 등이 있다.
4. 대중매체에서[편집]
5. 선거 이력[편집]
6.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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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흥백파-의열공파-유계공파 24세 석(錫) 항렬. 족보명은 고기석(高祺錫).[2] #[3] 엄밀히 말하면 고경명 차남 고인후(高因厚)-고인후 3남 유계(柳溪) 고부즙(高傅楫)-고부즙의 적장손 고세형(高世亨)-고세형 3남 고응익(高應翼)의 후손.#[4] 이명 고재국(高在國).[5] 장세동은 어렸을 때 일찌감치 서울로 올라가 성장했기에 실질적으로는 고명승이 호남 출신 하나회 대표에 가깝다.[6] 진압군 측 장성인 김진기 헌병감 직속 부하[7] 수경사령관과 기무사령관은 군사 정권에서 실세 자리이기 때문에 두 자리를 모두 역임하는 건 진정한 실세라는 뜻이다.[8] 3군사령관은 야전군사령군 중 수도권을 방위하며 군사정권의 기반이 되는 핵심 요직이다.[9] 사실 고명승도 바로 경질되고 육사 동기인 이진삼이 영전할 예정이었으나 이진삼 본인이 제4땅굴 발견에 미쳐있어서 일부러 1군사령관을 희망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진삼은 목적달성에 성공하고 참모총장 영전하게 된다.[10] 같은 하나회였지만 노태우계였기 때문에 전두환 정부 내내 소외되었던 이진삼은 동기인 고명승보다 중장은 1년, 대장은 1년 반이 늦었지만 마지막에 참모총장이 되며 역전한다.[11] 김영석은 제5공화국 드라마에서 김진영 대령 역할을 맡았다.[12] 차윤회는 제5공화국 드라마에서 이건영 중장 역할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