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공동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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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2.1.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의 결정
2.2. 1차 미소공동위원회(1946년 1~5월)
2.3. 2차 미소공동위원회(1947년 5~10월)
3. 결렬 이후



1. 개요[편집]



미소공동위원회 | 美蘇共同委員會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파일:소련 국기(1936-1955).svg
미국
소련
영어
US-Soviet Joint Commission
러시아어
Совместная американо-советская комиссия
미소공동위원회란 한반도를 점령한 미국, 소련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개최한 회의다.

1946년 3월 20일부터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으며 1947년 5월 21일에는 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으나 같은 해 10월 21일 결렬되었다.


2. 상세[편집]



2.1.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의 결정[편집]


1. 한국을 독립국가로 만들기 위하여, 한반도에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한다.

2. 민주주의 임시정부의 수립을 돕기 위하여, 미소군정의 대표자들이 모여 미소공동위원회를 개최한다.

3. 미국, 영국, 소련, 중국 4개국이 공동으로 관리하며 최대 5개년 동안 신탁통치를 실시한다.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의 결정

1945년 12월 26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는 한국에서의 민주정부 수립, 한국을 미국, 영국, 중국, 소련이 최대 5년간 신탁통치,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한다는 내용을 발표했다.


2.2. 1차 미소공동위원회(1946년 1~5월)[편집]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의 결정에 따라 1946년 1월 16일 예비회담을 거치고 3월 20일 덕수궁 석조전에서 개최했는데 미소공동위원회는 처음 개최하자마자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협의할 정당 및 사회단체를 선택하는 문제로 난관에 부딪혔다.

소련군정 측은 미소공동위원회가 함께 협의할 정당 및 사회단체들은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의 결정사항을 수락하는 이들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헌 반면 미군정 측은 신탁통치를 반대한다고 협의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맞섰다. 좌파는 임시정부 구성을 위해 미소공동위원회에 협조했으나 우파 진영은 신탁통치 문제에 반발해 미소공동위원회를 반대했다. 결국 임시정부 구성에 참여할 정당 및 사회단체에 대한 의견대립으로 1차 미소공동위원회는 무기한 휴회 상태에 빠졌다.[1]


2.3. 2차 미소공동위원회(1947년 5~10월)[편집]


1947년 5월 21일에 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다시 개최되었지만 1차와 마찬가지로 정당 및 사회단체 문제로 미소가 이견을 보였고 점차 미소간의 냉전이 진행되어감에 따라 미소 양국 사이에 불신이 생기면서 7월 소련측이 미국측의 지지기반인 신탁통치 반대투쟁 단체를 제외하자고 주장하자 미국측은 미소공동위원회 활동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결렬되었다.

미소 양국의 본격적인 냉전 분위기도 회담에 영향을 끼쳤다. 터키 해협을 둘러싼 미소간 대립, 그리스 내전국공 내전의 발발로 각지에서 공산주의 도미노 현상이 일어날 것을 우려한 미국은 1947년 3월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했는데 이에 따라 미군정도 좌우합작운동을 비롯한 중도세력 지원에 소극적으로 정책을 선회했다.(Reverse Course)

결국 10월 18일 개최된 미소공동위원회 제62차 본회의에서 미국측 수석대표 브라운소장은 국제연합에서 한국문제 토론이 끝날 때까지 공동위원회 업무를 중단하자고 제의하였다. 1947년 10월 21일 스티코프가 이끄는 소련 대표단 일행이 평양으로 철수함으로써 5개월간의 회담은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하고 끝나고 말았다.


3. 결렬 이후[편집]


미소공동위원회가 아무런 성과도 없이 끝나면서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국제연합에 상정한다. 소련이 불참한 가운데 국제연합은 1947년 총회에서 한국임시위원단을 구성하며 UN한국위원단의 감시 하에 한반도에 총선거를 실시할 것을 결의하였고, UN한국임시위원단이 1948년 한반도에 파견되었다.

하지만 소련이 위원단의 38선 이북 입국을 거부하면서 이후 열린 UN 소총회에서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서라도 총선거를 실시하자는 결정이 내려졌다. 그렇게 남한에서는 1948년 5월 10일 제헌 국회의원 선거가 열리고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북한에서는 9월 9일 정부가 수립되면서 남북분단이 고착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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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차 회담 결렬 후 미군정은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결정에 의해 남북 통합 좌우합작정부 수립을 지지하는 중도 세력을 지원하는 쪽으로 정책을 선회했고 그 결과 탄생한 것이 1946년 7월 좌우합작위원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