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봉/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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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출생
3. 유년 및 청년 시절
4. 항일무장투쟁
4.1. 의열단 활동
4.1.1. 1925년 동아일보 신문 기사 전문
4.2. 황포군관학교 입교
4.3. 중국에서의 본격적인 공산주의 활동
4.5. 조선의용대 창설 및 분열
4.6. 대한민국 임시정부 합류와 갈등
5. 광복 후 한국에서 민주주의민족전선 지도자로서의 행적
6. 월북 후 북한에서의 행적
6.1. 북한 정권 수립 참여
6.2. 반대한민국 빨치산 양성
6.3. 6.25 전쟁 참여
6.4. 전쟁 후 활동 및 숙청
7. 참고 문헌 및 저자 소개


1. 개요[편집]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북한의 정치인 김원봉의 일생에 대해 서술한 문서이다.


2. 출생[편집]


1898년 9월 28일 경상남도 밀양군(현 밀양시) 부북면 감천리 57번지에서 아버지 김주익(金周益)과 어머니 경주 이씨 이경념 사이의 두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밀양군 부내면 노하리(현 밀양시 내이동 노하) 901번지로 이주하여 본적을 두었다.[1] 독립운동 활동 내내 함께했던 윤세주 생가는 바로 10m 거리에 있어 바로 옆 집 이웃사촌 관계였다. 그 외에도 의열단 창단멤버 중 5명이 같은 밀양 동화중학교 출신으로 태어날 적부터 바로 옆 집 친구였던 사람들끼리 합심해서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뛰었던 셈이다.

어머니 이경념은 김원봉이 4살 되던 해에 첫째 남동생 김경봉(金慶鳳)을 출산하다가 사망했다. 아버지 김주익은 영양 천씨(潁陽 千氏)와 재혼하여 3남 김춘봉(金春鳳), 4남 김삼봉(金三鳳), 5남 김용봉(金龍鳳), 6남 김봉철(金鳳澈), 7남 김봉기(金鳳琪), 장녀 김을득(金乙得), 8남 김구봉(金九鳳), 차녀 김학봉(金學鳳) 등 총 8남 2녀를 두었다. 일찍부터 개화 세례를 받은 중인 집안으로 부농이었다.


3. 유년 및 청년 시절[편집]


서당에서 한문을 배워 8살 때 통감을 읽었다. 11세 때 밀양공립보통학교(현 밀양초등학교)에 편입하여 다녔고, 13세 되던 1910년 민족주의자 을강(乙江) 전홍표(全鴻杓, 1870년 1월 3일 ~ 1929년 8월 11일, 2018년 건국포장 추서.)가 사재를 털어 세운 동화중학 2학년에 편입하였다. 전홍표[2]를 요시찰 대상으로 분류한 일제에 의해 동화중학이 폐쇄되자 50리쯤 떨어진 곳에 있는 표충사에 들어가 한 1년 동안 손자병법, 오자병법 등 중국병서를 읽었다.

1913년 경성부로 가서 중앙학교 2학년에 편입하여 다니다가 그만두고 중국으로 무전여행을 떠나니, 17~18세 때였다. 이때 자신의 스승이자 고모부였던 백민(白民) 황상규(黃尙奎, 1891년 4월 19일 ~ 1931년 9월 2일,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가 창설자 중에 하나였던 대한광복회의 항일무장투쟁을 지켜보며 큰 충격을 받았다. 대한광복회의 강령은 이후 의열단으로 이어지게 된다.

김원봉이 톈진으로 건너가 독일인이 운영하는 덕화학당(德華學堂)에 들어간 것은 19살 때인 1916년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진행 중이었는데 일본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있었다. 독일로 갈 생각을 하고 덕화학당에 들어갔던 것이니, 독일에 협력하면 독립을 할 수 있으리라는 대한광복회 회원들의 정세관에 따른 것이었다. 독일어를 배우기 전 우선 중국어를 배우다가 1917년 여름방학을 맞아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동안의 광복회 회원들의 희망과 다르게 중국이 일본 측에 가담하여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는 바람에 덕화학당은 폐쇄되고 김원봉은 1년여 고국에 머물게 되는데, 그때에 사귀게 되는 사람이 김두전과 이명건이었다. 황상규가 세 사람에게 의형제를 맺게 하고 각각의 호를 지어주었는데, 그렇게 김원봉은 '약산(若山)', 김두전은 '약수(若水)', 이명건은 '여성(如星)'이라는 호를 갖게 되었다.

1918년 9월, 이 세 사람은 중국으로 건너가 남경에 있는 금릉대학(金陵大學)[3]에 입학하였다. 미국인이 운영하는 기독계 계통 학교로, 세 사람이 함께 들어간 곳도 영어과였다. 1919년이 되자 김원봉은 여운형이 파리 강화 회의김규식을 한국 대표로 보내어 한국의 독립을 세상에 호소하기로 했다는 말을 들었는데, 서양 제국주의 열강들이 한국 같은 약소민족을 위해 자신들과 다를 바 없는 일본 제국주의와 싸워주지 않으리라 생각하여 김약수, 이여성과 만나 독립군 양성을 상의하고자 길림으로 갔다.


4. 항일무장투쟁[편집]



4.1. 의열단 활동[편집]


길림을 거쳐 봉천에서 김약수, 이여성과 만나 3.1 운동 소식을 들었고, 국내에서 사람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하겠다며 국내로 돌아간 이들과 다르게 무장력을 갖추었을 때만이 독립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 김원봉은 1919년 2월 22세의 나이에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학 및 폭탄제조법 등을 수료하였다. 신흥무관학교는 체계적인 지휘관을 양성하여 조직화된 광복군을 양성하고자 했는데, 그렇게 준비되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이 요구된다고 판단한 김원봉은 9월 학교에서 자퇴했고 새로운 개념의 부대를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그렇게 밀양, 대구 일원에서 3.1 운동을 하다가 만주로 망명해온 사람들이 만나 1919년 11월 9일 길림성 파호문 밖 중국인 반 씨 집에 김원봉과 뜻을 같이하는 이들이 모였다. 양건호, 한봉근, 곽재기, 김옥 등과 회합하여 일본의 침략본거를 파괴할 것을 결의하였고 의열단을 조직하여 황상규가 단장 의백(義伯)에 취임하였다. 단원은 김원봉, 윤세주, 이성우, 곽경, 강세우, 이종암, 한봉근, 한봉인, 김상윤, 신철휴, 배동선, 서상락, 권준으로 모두 13명이었다.(자세한 내용은 의열단 문서 참고.) 의열단의 이름은 공약 제1조에 '천하의 정의의 사를 맹렬히 실행하기로 함'에서 '정의'의 '의'와 '맹렬'의 '열'을 따온 것이었다.

암살 대상으로 정한 것이 7가지 부류였으니, 이른바 칠가살(七可殺)로 다음과 같다.

① 조선총독 이하 고관
② 주조선 일본군 주둔군 수뇌
대만 총독[4]


④ 매국적(賣國賊)
친일파 거두
⑥ 적의 밀정
⑦ 반민족적 토호열신(土豪劣紳)[5]

다음은 파괴 대상이다.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매일신보
④ 각 경찰서
⑤ 기타 왜적 주요 기관


만주 길림에서 창단된 의열단은 본부를 북경으로 옮긴다. 1920년 늦봄에서 초여름쯤이다. 중국의 중심지인 북경에는 한인들이 많이 모여 있었고, 당시 이승만이 주도했던 상해 임시정부의 외교독립 노선을 반대하는 한인들한테서도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파일:의열단장 김원봉.jpg
의열단과 의백(義伯) 김원봉을 다룬 신문기사이다. 단장으로 추대되었을 때 당시 나이가 23세였다.
의열단이 거행한 제1차 거사는 조선총독부를 폭파하려는 일명 '밀양 폭파 사건'이다. 하지만 곽재기, 이성우, 신철휴, 김수득, 한봉근, 윤세주 6명이 서울 인사동 어떤 중국 요릿집에 모여 있다가 독립운동자 검거로 악명을 떨치던 김태석 경부와 그 부하들에게 체포됨으로써 실패로 끝나게 된다. 1920년 6월 16일 모두 16명이 검거되어 황상규, 이성우 같은 선배들이 붙잡혀 들어감으로써 김원봉이 단장을 맡게 된다. 이후 김원봉은 박재혁, 최수봉, 김익상을 지휘하며 각각 부산경찰서, 밀양경찰서,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투척하도록 했다. 그 이후에도 김익상, 오성륜, 이종암으로 하여금 일본군 대장을 저격하도록 했다.

이후 단재 신채호가 지어준 『조선혁명선언』을 의열단 근본철학으로 한 김원봉은 최종덕, 이종암을 국내에 들여보내어 사회주의자 김한과 암살, 파괴공작을 하려다 김한이 검거된다. 다시 모스크바 극동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하고 돌아온 김시현과 김시현이 포섭한 경기도 경찰부 경부 황옥에게 폭탄과 조선혁명선언문과 단원들을 보낸다. 서울을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서 대규모 봉기가 일어날 것을 기대하고 있는데 의열단 안으로 파고든 밀정 김재진의 밀고로 좌절되고 만다. 압수된 물품만 건물 파괴용 폭탄 6개, 방화용 17개, 암살용 13개 등 36개, 뇌관 6개, 도화선 6개, 도화선과 연결되는 시계 6개, 권총 6자루, 실탄 155발, 조선혁명선언 361부, '조선총독부 소속 관공리에게'라는 협박문 548장이었다. 이것이 황옥 경부 폭탄사건이다.

1923년 1월 5일, 김지섭도쿄로 갔다. 황궁 정문 앞에 있는 이중교 다리에 폭탄을 던져 소란을 일으키고 그 틈을 타 황궁으로 들어가 왜왕을 죽이려고 이중교에 폭탄을 던지기는 하였으나 곧 붙잡히고 말았다. 무기징역에서 20년으로 감형되었으나 일본 경찰한테 당한 살인적 고문과 단식투쟁으로 몸이 약해져 한 달 보름 만에 옥사하고 말았다. 김지섭의 동경 거사 뒤에도 여러 차례 의열단원에 의한 암살, 파괴 사건이 일어났다. 의열단의 활동으로 단원들이 처형될수록 김원봉의 명성은 높아졌다. 님 웨일즈에 따르면 의열단이 해체되던 1927년까지 체포돼 처형당한 의열단원이 무려 700명에 달한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의열단은 동경 거사 실패와 일제의 강경한 탄압으로 활동하기 어려워졌으며, 1924년 사회주의 운동과 노동대중 운동이 급격히 성장하는 추세에 편승하여 상하이에서 '청년동맹회'를 결성한 윤자영[6]에게 많은 젊은이들이 찾아갔고, 이들은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의 투쟁 노선을 비판하기까지 했다. 그리하여 의열단원의 이탈과 함께 자금이 부족해져 생활마저 궁핍한 지경에 다다라 의열단의 무장투쟁은 사실상 막을 내린다.

파일:합치되는 두 운동 - 민족운동과 사회운동.jpg
김원봉이 동아일보를 통해 기고한 '합치되는 두 운동' 신문기사이다.

그래서 1925년 김원봉은 2월 20일과 21일 동아일보를 통해 "민족운동이 곧 사회운동이 되어야 할 것이며 사회운동자가 곧 민족운동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우파 계열의 민족주의 운동과 좌파 계열의 사회주의 운동이 합치되어야 함을 역설하였다.


4.1.1. 1925년 동아일보 신문 기사 전문[편집]


합치合致되는 두 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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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조선 내에 동포에게 향하야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고 물으십니까. 하고 싶은 말이야 물론 많지마는 어떠한 일간 신문을 통하여서는 그것이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진정의 나의 말이라면 발표될 수 없을 것이오, 만일 발표된다 하면 그것은 진정한 나의 말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 형을 어떤 신문 기자라 보고 책임 있는 말을 한다는 것은 고만두겠습니다. 다만 형과 나의 친한 사이의 사담으로야 말 못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② 우리 의열단의 주의 주장과 실행 방략은 이미 선언서에도 표명하였거니와 지금까지의 우리의 행동이 그것을 명백하게 말한 줄 믿습니다. ……(기자 략)

③ 우리 운동 선상에 민족 운동과 사회 운동의 두 가지 사조가 나뉘어 있는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근일에 민족 운동과 사회 운동의 관계에 대하여 토론한 문자도 종종 보게 됩니다. 이에 대하야 나의 의견을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 조선 사람의 처지로는 민족 운동자와 사회 운동자의 연락과 합동이 있어야 한다기보다는 민족 운동이 곧 사회 운동이 되어야 할 것이며 사회 운동자가 곧 민족 운동자가 되어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조선 민중의 생존 번영 자유 평등을 위하야 분투노력한다는 그 실질 문제에서 두 가지 운동이 다른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다만 하나는 형식이 종족의 투쟁으로 나타나고 하나는 계급투쟁으로 나타난다 하야 두 가지 운동의 차이점을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이 두 가지가 또 조선에서는 합치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종족의 투쟁이 구경은 계급의 투쟁이 되겠고 계급의 투쟁이 곧 종족의 투쟁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마르크스공산당 선언에서 말하기를 "과거 일절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계급투쟁이 있기 전에 종족적 투쟁이 있었으며 또 금일까지도 의연히 종족의 투쟁이 계속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일본의 민중이 조선의 민중을 침탈하였고 일본 무산자가 조선의 무산자를 침탈하는 것이 사실이 아닙니까. 조선 내 연년히 이주하는 이민이 일본에서는 무산자가 아니었던 것이 없지마는 조선에 와서는 이삼 년만 지나면 유산 계급이 되기 쉽습니다.

⑤ 실지에 나가서 현재 조선 민중의 생활을 절실히 체험 혹 관찰하고 그 생활 문제를 직재하게 해결하여 보자는 성의가 있는 사람이라면 구구한 논이 없다고 생각하는 바외다.

⑥ 달리 한 가지 말씀할 것은 작년 소절봉직 전쟁이 났을 때 ㅇㅇ에서는 의열단이 오패부를 돕는다는 것과 의열단 본부를 남상에 두었다는 풍설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통신원의 통신인지 혹은 뜬 소식을 기재한 것인지는 모르나 그런 기사는 삼가지 않으면 안 될 줄 압니다. 참으로 우리 본부가 남상에 있었다 하면 남상은 전혀 중국의 일 지방으로 치외 법권이 없는 중국인의 보호를 받는 데이니 우리에게 위험을 끼쳐주는 것이 되고 오패부를 돕는다는 말은 오패부의 적인 국민당장작림의 적의를 사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로 당시에 동삼성에 있는 우리 사람으로 조선인이 오패부를 돕는다는 일본의 중상으로 무수한 곤란을 겪었으며 남방에 있는 우리 사람으로 국민당의 오해를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남의 내쟁에 가담할 여가도 없었거니와 국민당의 손중산직예파의 오패부를 비교하더라도 어찌 중국의 혁명당인 국민당에 이해 없는 반향을 위하야 조선 단체로서 오패부를 돕는 그런 경솔한 일이야 할 리가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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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황포군관학교 입교[편집]


당시 상황은 3.1 운동과 함께 들불처럼 번져나가던 국내외 독립운동이 하강기로 접어들고 있을 때였다. 무장투쟁 노선을 추구하며 일본군과 맞붙었던 만주 독립군홍범도봉오동 전투김좌진청산리 전투을 마지막으로 자유시 참변을 겪고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고,[7] 외교독립 노선을 추구하던 상해 임정은 서양 열강들의 외면과 함께 위임통치 청원 사건과 계파 갈등으로 인한 지도자들의 내분으로 간판만 남았으며, 국내 지역에 있는 이광수 등이 벌이던 실력 양성 운동은 민족해방을 포기하는 이른바 민족개량주의 운동으로 변질되고 있었다.

김원봉은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고 더욱 활발한 독립운동을 위해 1926년 1월 '최림'이라는 가명으로 중국 국민당 정부가 설립한 광저우 황포군관학교 제4기생으로 들어갔다.[8] 신악, 이영준, 김종, 이인홍, 왕자량, 양검, 이병희 같은 의열단 동지들과 함께 한 투쟁 노선 변경에 따른 것이니, 결사적인 항일 군대를 만들자는 생각이었다. 김원봉은 그곳에서보병과에 배치된다. 의열단 단장 대신 일개 사관생도를 자청한 데에는 보다 효과적인 항일운동의 방법을 찾겠다는 굳은 결심이 있었고, 중국 측도 이를 환영했다.

그곳에서 김원봉은 삼민주의를 주창한 설립자 쑨원의 영향으로 중국의 혁명사상을 학습했고, 장제스가 북벌에 출정한 당시에는 좌파 계열의 교관과 학생들을 통해 공산주의도 접하게 된다. 당시 중국은 국공합작 중이었기 때문에 황포군관학교에도 일부 공산당 출신의 교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원봉이 다닐 당시 저우언라이도 황포군관학교의 교관으로 있었다.

폭력과 암살을 포함한 적극적인 무장투쟁을 추구했던 김원봉은 중국에서 장제스의 중국 국민당이나 상해의 민족주의 우파들의 온건하고 소극적인 항일 노선에 실망했던 것 같으며, 폭력에 의한 혁명투쟁에 매료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황포군관학교에서 얻은 군사 지식 및 진보 성향을 바탕으로 후일 조선공산당재건동맹, 조선민족혁명당을 조직하여 활동하는데 바탕이 되었다.

김원봉은 이후 황포군관학교를 4기로 졸업하고, 국민혁명군 장교로 임관하여 군관학교의 교관으로 근무했다.


4.3. 중국에서의 본격적인 공산주의 활동[편집]


김원봉은 1927년 8월에 일어난 난창 폭동 당시 하룡의 공산군에 가담했다가[9] 포로가 된 뒤, 그해 말 상하이로 탈출했다고 전해진다.[10] 김원봉과 그를 따르던 의열단원들은 난창 폭동에 깊이 관여했다. 황포군관학교에서 전문적인 군사교육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의열단 활동을 통해 실전 경험까지 가지고 있었던 베테랑들이었던 만큼 이들은 난창 폭동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김원봉과 윤세주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전멸하는 참담한 결과를 맞았다. 이로써 의열단은 완전히 와해되었다. 김원봉은 중국공산당이 자신과 의열단을 이용해 먹었다고 생각하여 깊은 배신감을 느꼈던 듯 하다. 이후 김원봉은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이 중국공산당과 연계할 것을 요구할 때마다 번번히 이를 거절했고, 중국공산당 역시 한인 사회주의 단체에게 김원봉을 배제할 것을 종용하게 된다.

상하이로 탈출한 김원봉은 제3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였던 안광천과 연계하여 와해된 의열단을 재정비하면서 《조선의열단 제3차 전국대의대회선언》을 발표하여 사회주의 정책을 중심으로 의회주의 민주국 건설을 구상하였다. 또한 조선의 절대독립을 위해서는 이념간의 대립, 붕당에 의한 분열을 극복한 협동통일이 절실하다고 주장하면서 각 세력에 손을 내밀었다.

이후 김원봉은 1929년 소련공산당과 접촉하여 코민테른으로부터 지원을 받으면서 '레닌주의' 창간호를 발간한다. 그러나 얼마 후 곧 김원봉은 일방적으로 지시하는 코민테른과의 협력 관계를 청산했다. 이후 김원봉은 중국공산당이나 소련과 거리를 두고 그들과 절대로 연계하지 않으면서 독립적인 조직 운영을 추구했다. 하지만 김원봉의 이러한 독자적인 사회주의-민족주의 노선추구는 코른테른에 의해 통제를 받거나, 아니면 중국 공산당과 연계하던 당시 국제적인 공산주의 조직 운영 형태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김원봉이 코민테른 및 중국 공산당과의 협력을 거부하며 독자 노선을 추구했던 점은 김원봉과 주도권 싸움을 벌이던 다른 사회주의자 혹은 공산주의자들이 그를 공격하는 좋은 빌미가 되었고 결국 나중에 김원봉이 공산주의 주류인 연안파에서 배제된 주원인이 된다.

김원봉은 1929년 봄 상해를 떠나 북경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북경에서 김원봉은 1929년 10월 조선공산당재건동맹 창설에 참여했다. 좌파협동전선의 대표적인 인사인 안광천의 주도로 창설된 이 조직은 이름 그대로 조선공산당의 재건을 목표로 창설된 조직이었다. 이 조직에서 김원봉은 중앙부 의원이 되어 안광천과 더불어 핵심 인사가 될 수 있었다.

1930년 4월 안광천과 김원봉은 조선공산당재건동맹 중앙부 직속으로 레닌주의정치학교[11]를 세워 운영에 개입했는데, 여기서 교육생을 대상으로 6개월 기한으로 공산주의 이론', '조직 및 투쟁', '조선혁명사' 등의 교육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1930년 8월 의열단을 무산자전위동맹으로 개편하고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계속하였다. 김원봉은 레닌주의정치학교 졸업생을 국내로 들여보내어 노동자, 농민, 학생과 대중운동을 벌이게 하였다.

조선공산당재건동맹 및 레닌주의정치학교는 소련의 코민테른과는 전혀 관련 없는 독자적인 좌익 계열의 단체였다. 앞서 서술되었듯이 김원봉은 1927년과 1929년 중국 공산당 및 소련 코민테른과 각각 연계했다가 쓴 잔을 마신 후 다시는 이들과 절대 합작하지 않았다. 대신 김원봉은 1931년 9월 만주사변 이후 황포군관학교 시절 은사였던 중국 국민당의 총수 장제스에게 접촉하여 이듬해 국민당의 정보기구 삼민주의역행사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아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12]를 창립하여 한인 군사장교들을 양성했다. 김원봉에게 장제스의 국민당은 일방적으로 지시하고 간섭하던 코민테른이나 중국 공산당과는 달랐다. 김원봉과 장제스와의 협력 작업은 모두 김원봉이 스스로 기획한 것들이었다. 김원봉이 장제스를 직접 찾아가 자신의 구상을 이야기하면, 장제스는 마음에 들면 OK하고 지원해 줬고, 마음에 안들면 지원을 거절했을 뿐이다. 장제스는 일단 OK하면 구체적인 내용은 대체로 김원봉 마음대로 하도록 놔뒀고 본인은 세세한 것은 거의 간섭하지 않았다. 심지어 장제스는 조선의용대가 좌익 스펙트럼의 단체라는 것을 진작부터 파악했지만 지도부가 사회주의 성향의 표어를 자제하기도 했고 딱히 태클을 걸지는 않았다. 다만 김원봉은 장제스와 합작을 추진하였으나 장제스의 소극적 항일 노선으로 인하여 좌절되었다.

일본 제국·만주국 요인 암살, 중요 기관 파괴
② 장래의 혁명조직 준비 공작
③ 만주국 내 반일단체와 제휴, 일본 제국 타도
④ 위조지폐 남발, 만주국 경제 혼란



4.4. 민족혁명당 결성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폐지 운동[편집]


1932년 11월 중국 상하이에서 독립운동 세력의 통일을 목적으로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한국혁명당, 한국광복단동지회 등이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하자, 김원봉은 의열단원들과 함께 여기에 참여하기도 했다.

1934년 3월,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제2차 대표대회에서 "종래와 같은 중앙간부만의 기관에 국한시키지 않고, 가맹단체 소속 '다수투사'를 집결시켜 적극적인 공작을 전개한다. 가맹단체를 포함한 모든 혁명단체를 해산하고 그 단원을 통일동맹에 귀속시켜 일원화한다.[13] 그리고 이를 위해 임시정부도 해체한다."라는 의견이 제안되었고, 김원봉과 의열단은 이 주장에 대해 찬성하였다.

그 결과, 1935년 7월 4일 김원봉은 독립운동 단체 9개를 묶어 출현한 민족혁명당의 총서기가 됐다. 김원봉을 중심으로 민족혁명당이 결성되자, 거기에서 조소앙은 정강, 정책 기초 위원으로 참가하여 삼균주의를 민족혁명당의 지도 이념으로 채택하도록 하였다. 김원봉이 조소앙의 삼균주의에 공감했던 것과는 별개로, 김원봉 본인이 삼균주의자였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조소앙은 3개월 뒤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계가 민족혁명당의 중심이 된 데 불만을 품고 당을 탈당하여 다시 한국독립당으로 입당했으며,[14] 삼균주의가 공산주의무정부주의와는 다르다는 점을 강조해왔기 때문이다. 이처럼 민족혁명당에는 사회주의 계열뿐만 아니라 초기에는 민족주의 계열도 일부 참여했다. 민족혁명당 창당 멤버 중에는 조소앙, 신익희, 김규식, 지청천 등도 우파 민족주의 계열도 상당수 있었다.하지만 제정된 당의 강령은 사회주의적인 성향이 짙었는데, 독립 이후 토지와 중요 산업의 국유화를 내걸었다. 아울러 인민이 무장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기도 했다.

여러 계열이 모인 민족혁명당은 창당 초기부터 내부에서 치열한 주도권 경쟁이 벌어졌는데 특히 고려 공산당 출신의 상해파와 시베리아파, 중국 공산당 출신, 의열단 내 민족주의파들이 치열한 다툼을 벌였다. 결국 민족혁명당은 김원봉과 김두봉을 중심한 의열단계, 사회주의/공산주의 계열이 중심이 되었다. 김원봉과 김두봉은 각각 서기장과 조직부장이 되어 당의 1,2인자가 되었다. 민족혁명당은 단일과 통합을 기치로 창당되었지만 결국 의열단계와 사회주의 계열 중심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심지어 새로 제정된 당기 대신 의열단기가 게재되기도 했다. 지청천이 이를 지적하자 김원봉의 의열단계와 지청천계가 반목하게 되었다. 이어 사회주의계와 지청천계간에 이념 논쟁과 갈등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에 주류인 의열단계와 사회주의계는 지청천을 강제 제명했다. 그러자 조소앙을 비롯한 우파 계열은 이에 반발하여 창단 두 달만인 9월 민족혁명당을 집단 탈당했다. 민혁당에 크게 실망한 조소앙은 탈당 후 한국독립당을 재건하였다. 지청천계와 조소앙계가 집단 탈당함으로써 민족혁명당은 사회주의 계열만 남게 되었고, 얼마 후 당명을 민족혁명당에서 '조선민족혁명당'으로 바꾸었다.

한편 이 당시 민족혁명당 결성을 구실로 임정폐지운동을 가장 극렬하게 벌인 사람이 김두봉과 김원봉이었다. 이미 김원봉은 1920년대초 박용만을 중심으로 한 창조파가 임시정부 해체를 주장할 때, 박용만의 행동대장 격으로 활동한 바 있었다. 당시 일제 고등경찰 기록에 따르면, 1921년 박용만이 북경파를 이끌고 상해를 방문하여 임시정부 재직자들의 총사퇴를 요구하는 연설회를 개최했는데, 이 때 비상수단으로 사용하기 위해 폭탄·권총까지 휴대했다는 설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세월이 흘러 거물이 된 김원봉은 김두봉과 더불어 1935년 창단된 민혁당의 주도권을 장악한 후, 민혁당을 제외한 모든 단체를 해산할 것을 주장하면서 임시정부에 그 총구를 겨누었다. 이때문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또다시 존폐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임정폐지를 둘러 싼 논전은 임정 여당 역할을 자임해 온 한국독립당 내부의 분열을 야기했다. 송병조, 차이석, 조완구 등 일부 세력을 제외한 대다수가 민족혁명당에 참여하였고, 임정도 국무위원 7인 중 양기탁, 김규식, 조소앙, 최동오, 유동열이 민족혁명당에 참여할 만큼 대세는 민족혁명당으로 기울고 있었다. 이에 따라 한인 독립운동 진영은 임정지지 세력과 임정폐지 세력으로 양분된 형세를 띠었다. 임정지지 세력은 송병조, 차이석, 조완구만 남을 정도로 수세에 몰렸지만, 그들은 여기서 임시정부가 문을 닫으면, 1919년에 만들어진 대한민국이 다시 망하는 것이라며, 임시정부를 끝까지 사수할 것임을 천명했다. 김구와 조소앙, 이동녕 역시 임정 고수 결의를 표명했다. 이로써 임시정부는 해체 위기를 넘기며 점차 상황이 호전되어 갔다. #

4.5. 조선의용대 창설 및 분열[편집]


파일:김원봉과 조선의용대.jpg
파일:김원봉 확대사진.jpg
1938년 10월 10일에 찍은 조선의용대 성립기념 사진. 깃발 가운데가 김원봉.
왼쪽 사진을 확대한 김원봉.

1938년 10월 1일, 김원봉은 83명의 한인을 모집하여 장제스중국국민당의 지원 하에 중국 후베이성(湖北省) 우한(武漢)에서 무장부대인 '조선의용대'를 결성하고 본인이 조선의용대 대장이 되었다. 장제스는 김원봉과 그가 모집한 청년들이 사회주의-민족주의 성향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당시 국공합작 중이었고, 친분이 있었던 김원봉의 요청을 받아들여 이번에도 조선의용대를 지원했다.

조선의용대가 창설된 중국 우한은 우창, 한양, 한커우 3개 지구를 아우르는 지명으로, 화중 지방과 장강 중류 일대의 중요한 교통요지에 위치하여 상업이 발달했으며, 중경(충칭)에 수도를 둔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를 방어하는 핵심 군사 요충지였다. 조선의용대의 기간요원들은 장제스의 도움으로 중국육군군관학교에 입소하여 6개월간 특별 훈련을 받았다. 조선의용대는 대원들이 일본어와 중국어, 한국어에 모두 능하다는 특성을 살려 국민당으로부터 후방의 교란 임무 및 포로 취조 등의 업무가 주로 주어졌다. 하지만 조선의용대 대원들, 특히 기간(간부)들이 주로 사회주의 계열이었기 때문에 자신들을 지원해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당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다.

일부 사회주의자들은 진보적 민족주의 성향을 띄는 김원봉이 국민당 장제스와 연계한 것을 빌미로 김원봉을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원봉은 자신이 장제스과 연개하는 것은 그를 이용하는 것일 뿐이라고 반문했으며, 장제스 또한 조선의용대를 이용하는 것이므로, 자신이 장제스를 이용하는 것이 하등 문제될 것은 없다고 말했다. 일부 사회주의 요인들은 김원봉에게 장제스를 암살하라고 요구했지만, 김원봉은 장제스를 이용함으로써 얻는 것이 더 많다는 이유를 이를 거절했다. 실제로 조선의용대는 장제스의 국민당의 지원금이 조직 운영의 원천이 되었다.

1938년 우한이 일본군에게 포위 공격당하여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조선의용대는 국민당과 함께 퇴각하였다. 하지만 일본군의 포위를 뚫고 퇴각하는 과정에서 조선의용대 4개 지대(구대)는 각기 분산되어 사실상 각 지대 지휘관들이 독자적으로 지휘권을 행사하면서 부대를 전개하게 되었다. 김원봉은 우한에서 퇴각한 후 자신이 이끌던 조선의용대 본대 94명 병력과 함께 국민당의 수도 충칭에서 머물고 있었다. 나머지 3개 지대는 국민당의 수도인 충칭으로 퇴각하지 않고 중간지대에 머물렀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서 김원봉 자신이 직접 이끄는 본대를 제외한 나머지 3개 지대에 대한 통제권이 크게 약화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1939년 제2지대가 허베이성 제5전구에서 활동한 것을 계기로 조선청년전위동맹을 필두로 한 제2지대 안에 중국공산당 신스군(新四軍)의 지하조직이 세워진 뒤부터 일부 대원들이 중국공산당원이 되었고, 조선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 내에서 김원봉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던 조선청년전위동맹의 위원장 최창익은 중국공산당과 결탁하여 김원봉과 국민당의 허가없이 병력을 이끌고 무단으로 이탈하여 중국공산당의 본거지인 화북의 연안(옌안)으로 가서 중국공산당과 그 휘하의 팔로군과 연계했다. 최창익은 김두봉, 김무정, 한빈 등 연안에 있던 한인 공산-사회주의들과 규합한 후, 이들과 함께 다른 조선의용대 지대도 중국공산당의 근거지인 연안으로 합류할 것을 설득, 종용했다. 이에 다른 병력도 동요, 이탈하여 화북으로 합류하기 시작했다. 연안 합류 여부를 놓고 1940년 11월 조선의용대 확대간부회의가 열렸고 여기서 김원봉의 의견에 반(反)하여 조선의용대의 연안 합류가 의결되었다. 김원봉의 본대 병력 90여 명은 충칭에 잔류하였으나, 나머지 지대는 모두 화북으로 떠나 1941년초까지 연안 합류를 완료했다.[15]

김원봉이 연안에 있는 중국공산당과의 합작을 거부한 것은 상기되어 있듯이 난창 폭동 때 중국공산당에 토사구팽당한 후 중국이나 소련 공산당과 절대 연계하지 않고, 좌우 독립운동가들과 합작하며 독자적인 조직을 유지하겠다는 그의 강한 신조 때문이었다. 또한 누구에게도 지시받는 것을 싫어하고 조직의 우두머리가 되어 스스로 명령할 수 있어야 직성이 풀리는 김원봉의 성격 때문이기도 했다. 장제스는 돈만 대줄 뿐 크게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지 않았고, 장제스와는 뜻이 맞지 않으면 더이상 돈 안받는 대신 서로 헤어질 수 있었지만, 공산당은 전혀 다른 차원의 조직이었다. 당시 전세계 공산당 조직은 모두 각지의 독립혁명을 위해 코민테른에 종속되어 그 지시를 받아 움직이는 것이 원칙이었다. 때문에 코민테른 그 자체나 다름없는 소련 공산당이나 그에 못지 않은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중국공산당과 연계한다면 공산당 조직의 특성상 철저하게 종속될 것이 뻔했다. 김원봉은 이러한 상황은 원치 않았던 것이다.

한편 최창익이 연안으로 이탈한데 이어 다른 지대도 최창익을 따라 연안으로 이탈하자 다급해진 김원봉은 이탈한 조선의용대의 통제권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 직접 연안으로 가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의 통제권을 장악한 최창익과 김두봉, 김무정 등이 이를 필사적으로 반대했고, 난창 폭동 이래 김원봉과 관계가 틀어진 중국공산당 역시 김원봉의 합류를 반대했다. 결국 신변 안전 및 지휘권 회복이 어렵다고 판단한 김원봉은 연안 방문을 포기했고,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아래에 나와 있는 김원봉의 유명한 영상물은 조선의용대의 주력이 그를 배신하고 화북으로 이탈하고 있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 촬영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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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에 촬영된 조선의용대 선무공작 영상조선의용대장 김원봉

1941년 4월, 윤세주와 박효삼이 끝내 김원봉과 결별하고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떠났다. 윤세주와 박효삼은 김원봉의 최측근이었다. 윤세주는 김원봉과 같은 밀양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동네에서 함께 자랐고, 이후 의열단, 황포군관학교, 난창 폭동, 조선혁명간부학교, 조선의용대에 이르기까지 이때까지 평생에 걸쳐 김원봉과 생사를 함께 해왔던 아우이자 동지였다. 황포군관학교 시절 알게 된 박효삼은 김원봉의 최측근이 되었고, 김원봉은 그에게 조선의용대 제1지대(본대)의 지대장을 맡겼었다. 이 둘의 이탈은 김원봉에게 커다란 충격과 상처를 주기에 충분했다.

한편 김원봉의 통제를 떠나 연안에 모인 조선의용대 3개 지대 병력[16]은 합류가 완료된 1941년 봄 의용대원 전체가 참여하는 대토론을 거쳐 스스로를 '조선의용대 화북지대(華北支隊)'라 칭했다. 연안에서 최창익, 김두봉, 김무정 등은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의 무력을 바탕으로 1941년 1월 ‘화북조선청년연합회’를 조직했고 얼마 후 이를 확대하여 '조선독립동맹'을 창설했다. 이는 해방 후 북한 연안파의 모체가 된다. 1942년 7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조선 독립 동맹 예하 '조선의용군'으로 개편되었고, 중국공산당의 절대 신임을 받던 조선인 중공당원 김무정이 지휘관이 되었다. 얼마 후인 1943년 1월에는 아예 중국공산당산하의 팔로군 소속으로 편입되었다. 매체나 교과서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의 업적으로 소개되는 내용의 상당부분은 사실은 팔로군 시절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팔로군 시절에도 기본적으로 이들은 전투부대는 아니었고, 국민당 시절과 거의 동일한 업무를 했다. 대부분의 대원들이 일본어, 중국어, 한국어에 모두 능통했기 때문에 국민당이나 공산당이나 모두 이들을 전투 병력보다 비전투 병력으로 쓰는 것이 더 요긴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직접 전투에도 참여했고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 이들은 해방 직전인 1945년 8월 공식적으로 전투부대로 전환되었다. 이후 해방되자 압록강을 건너 북한으로 이동하여 북한 '조선인민군'의 주력이 된다.


4.6. 대한민국 임시정부 합류와 갈등[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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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제34회 임시의정원 일동. 앉은 줄 맨 오른쪽이 김원봉, 앉은 줄 다섯 번째가 김구.
김원봉이 조선의용대의 화북 이탈로 인해 좌절하고 있던 시기인 194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장제스국민당의 지원을 받으며 충칭으로 이전해 왔다. 이로써 싫던좋던 간에 김원봉은 30년대에도 종종 협력했던 임시정부 요인들을 대면하게 되었다. 곧이어 1940년 9월 17일, 충칭에서 중국국민당의 지원 하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한국광복군을 창설한다. 한국광복군의 창설과 중일전쟁의 전선 변화 그리고 일제의 동남아시아 진출의 시도 등 국제정세의 급박한 변화, 제2차 국공합작 속에서 내부 갈등 등 여러 복합적 상황은 김원봉과 조선의용대를 압박했다. 사실 김원봉과 조선의용대는 1939년 가을부터 내부에서 기존의 최창익을 비롯한 조선청년전위동맹원들이 주장했던 동북진출노선이 다시금 드러나기 시작했다. 선전활동에만 치우친 현재의 조선의용대 활동에 한계가 분명했고 이대로 계속 국민당 정부와 관내지역에 남아있다간 조선의용대는 국민당 정부의 선전대 이상의 역할을 하기 힘들게 뻔했기 때문이다. 1941년 김원봉과 조선의용대는 확대간부회의를 통해 내부 노선을 정리하고 대외적 활동과 계획을 세운 뒤 화북진출을 하기로 결정했다. 화북진출을 한 조선의용대는 당초 국민당 정부에 알린 목적지와 달리 팔로군 활동지인 태행산 일대로 움직였다. 이에 임시정부와 국민당정부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장제스의 불같은 화와 함께 진상 조사에 들어갔지만 김원봉과 공산당 간의 내통은 없었음이 드러났다. 하지만 김원봉과 잔류 조선의용대는 그 세력이 약해져 있는 상황인데 한국광복군의 존재와 조선의용대의 화북진출 사건 등 여러 요인들로 인해 국민당 정부는 조선의용대 잔여 병력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예하 한국광복군에 합류하도록 요구했다.

장제스는 이미 1930년대부터 자신이 지원해 주고 있던 한인 독립운동가들에게 단체 통합을 주문해 왔다. 장제스의 이런 요구와 별개로 사실 관내지역 독립운동가들은 1935년부터 줄기차게 하나된 세력으로 합치려고 노력해오고 있던 상황이었다. 좌우 통합노선의 줄기는 192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니 생각보다 오래 논의된 이야기였던 셈이다. 그러나 1939년 기강에서 열렸던 7당 통일회의에서 좌우익계열 세력들이 각자 통합 방식과 절차를 놓고 의견차이를 좁히지 못했다. 이에 조선민족해방동맹과 조선청년전위동맹은 탈퇴했고 이어 5당만이라도 통일하자 했으나 이 또한 결렬 되어 민족전선 측이 탈퇴를 선언하며 단일당 조직은 실패로 돌아갔다. 194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김원봉의 조선의용대 잔여 병력이 충칭에 모이게 되자 장제스는 이번에도 임시정부와 각 당들에게 통합된 창구를 만들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김원봉은 당시 관내지역 최대 세력인 민족전선 연맹을 이끌고 있었고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당인 민족혁명당의 수장이었으며 전선연맹의 당군이자 관내지역 최대 항일무장세력인 조선의용대의 수장이었기에 임시정부 세력과 비교할 수 없는 영향을 행사하고 있었다. 또한 그가 민혁당 창당하는 과정과 운영하는 과정에서 의열단계 인사들이 당 조직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다면서 대립각을 세운 지청천파와 갈등을 겪었고 이들과 동조하는 우익계 인사들과 껄끄러운 관계였기에 김원봉의 입장에서 임시정부를 인정하고 이에 합류하는 것은 당시로선 논의될 순번이 아니었던 것이다.[17] 임시정부는 한국광복군을 창설하고 국민당의 지원을 꼭 받기를 바라고 있던 상황이었는데 성과도 이루어지고 있고 국민당 정부의 관심을 얻고 있던 차였다. 그러나 김원봉의 합류는 논의가 될 상황도 여유도 있지 않았다. 오히려 김원봉의 영향력으로 인해 임정 내 위치가 흔들릴까 염려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18][19] 화북진출과 함께 관내 지역의 세력 약화 그리고 임시정부의 광복군 창설과 성과 그리고 대외 정세의 급박한 변화는 김원봉으로 하여금 임시정부에 참여하지 않으면 안되게끔 하였다. 1941년 경 임시정부와 김원봉 세력은 5차에 걸친 회의를 통해 중국 군사위원회의 통합 권면 명령이 있기 전부터 서로 하나로 합칠 계획을 진행했다. 임정과 김원봉 모두 앞으로 나갈 독립운동의 방향을 위해서라도 합치해야한다고 의견을 모았던 것이다. 1942년 4월 김원봉과 잔류한 조선의용대는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하고 민족혁명당 또한 임정에 합류하게 되면서 좌우세력이 공존하는 하나된 임시정부가 됐다.

파일:대한민국 임시정부 3·1절 22주년 기념식.jpg
1941년 3월 1일, 충칭에서 열린 3.1절 22주년 기념식. 왼쪽부터 김구, 조소앙, 신익희, 김원봉.

김원봉은 결국 필연에 따라 임시정부에 들어가 한국광복군에 합류하였지만, 예전부터 반목하던 사이였던 임시정부 요인들과 갈등을 계속 이어나갔다. 예전부터 자신이 속한 조직에서 주도권 싸움에서 진적이 없었던 김원봉은 임시정부에 들어가서도 주도권 싸움을 벌이며 임시정부 요인들과 반목했다. 김원봉의 조선의용대 출신 병력은 광복군 내에서 적지 않은 인원이었고 이를 바탕으로 김원봉은 자신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임정 요인들 사이에서 자기 입지를 강화하려 했다. 김원봉은 과거부터 껄끄러웠던 사이였던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의 지휘를 받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의 예하 부대에 독자적으로 지휘권을 행사하려 하며 광복군 내에서 주도권 싸움을 벌였다. 결국 지청천은 김원봉 예하 부대에 대한 통제를 포기하고 김원봉이 자기 마음대로 부대를 운용하도록 놔둘 수 밖에 없었다. 김원봉의 이러한 항명 행위로 인해 지청천은 광복군을 온전히 운용할 수 없었고, 지청천과 광복군이 수행한 대부분의 작전은 김원봉의 예하 병력이 제외된 채 전개되었다. 지청천과 한국광복군이 세운 업적의 대부분은 김원봉 예하 병력이 제외된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김원봉은 한국광복군 내에서 독자 세력화하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지청천과 함께 한국광복군 조직과 운영에 관여하고 있던 조소앙, 신익희의 존재 등으로 인해 결국 광복군 전체의 주도권을 가져오는 데는 실패했다.

김원봉은 총사령관 지청천하고만 갈등을 일으킨 것이 아니었다. 민필호는 '김원봉은 사사건건 김구에게 대들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또한 임시정부 외무부장 조소앙, 내무부장 신익희와도 진작부터 불편한 관계였다.[20] 장준하는 김원봉이 일본군 출신 한인들에게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광복군에 대한 불신을 조장한다고 비판했다. 한편 김원봉은 자신에게서 이탈한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와 연안파들과 껄끄러운 사이가 되었지만 그들과 접촉을 끊지는 않았다. 한국광복군 참모장 이범석은 '김원봉 일파는 자기세력 확충에만 혈안이 되어 연안파와 내통을 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김원봉이 임정에서 자신의 세력을 강화하기 위해 연안파를 끌어들이거나, 반대로 여차하면 임정을 떠나 연안파에 합류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원봉이 연안파에 합류하는 것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연안파의 핵심 인물 중 다수가 김원봉의 합류를 반대했고, 그들의 배후에 있던 중국공산당 역시 김원봉을 반대했다. 결국 김원봉은 임시정부에서 트러블 메이커로 계속 남아 있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김원봉은 광복 때까지 임시정부에 남아 있게 되었다. 여러 일이 있었지만 1944년 4월 22일에는 임시정부 군무부장이 되었다.

김원봉은 임시정부 합류 후 거의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상기된 바와 같이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의 배신으로 인해 불과 90여 명의 병력만 남게 되어 낙동강 오리알 처지가 되었고, 결국 장제스의 압박으로 어쩔 수 없이 임시정부에 합류했기 때문이다. 임시정부에서 김원봉은 핵심 인사들과 계속 갈등했고, 명목상 부사령관이었지만 지청천이 이끄는 광복군의 주요 작전을 보이콧하면서 자신의 병력을 거의 참여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을 배신한 정적 최창익과 김두봉이 주도하고 있던 연안파로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임시정부를 떠나지도 못하고 그렇게 머물러 있었다.

김준엽의 자서전 <장정>에는 군무부장 시절의 김원봉이 어땠는지 어느정도 자세히 기술되어있는데 임정에 새로 합류한 학병들에게 살갑게 대해주던 김구, 조소앙 등과 달리 시종일관 내내 한숨만 푹푹 쉬면서 어딘가 많이 불편해보이는듯한 인상이었다고 한다. 김준엽 본인은 사상을 떠나서 나름 그래도 의열단을 이끈 항일 영웅이라고 생각하고 김원봉에 집에도 먼저 찾아가보는가 하면 충칭 시내 한복판에서 김원봉을 우연히 만나 먼저 다가가서 인사를 해보았으나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않으려고 하면서 반갑지 않다는 식으로 대꾸하다가 먼저 자리를 떠버렸다고 한다. 그러면서 저우언라이와 만나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고.

1945년 1월 최동선과 세번째로 결혼을 했다.[21][22]


5. 광복 후 한국에서 민주주의민족전선 지도자로서의 행적[편집]


1945년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 인민위원에 선임되었다.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중앙인민위원
이승만, 여운형, 허헌, 김규식, 이관술, 김구, 김성수, 김원봉, 이용설, 홍남표, 김병로, 신익희, 안재홍, 이주상, 조만식, 김기갑, 최용달, 리강국, 김용암, 강진, 이주하, 하필원, 김계림, 박낙종, 김태준, 이만규, 이여성, 김일성, 정백, 김형선, 이정윤, 김점권, 한명찬, 유축운, 리승엽, 강기덕, 조두원, 리기석, 김철수, 김상혁, 정태식, 정종근, 조동우, 서중석, 박문규, 박광희, 김세용, 강병도, 이순근, 김무정, 장기욱, 정진태, 이순금, 이상훈
후보위원
최창익, 황태성, 홍덕유, 이청원, 최근우, 김준연, 한빈, 양명, 최원택, 안기성, 정재달, 김오성, 권오직, 김두수, 장순명, 이광, 최성환, 이림수, 현준혁, 김덕영
고문
오세창, 권동진, 김창숙, 정운영, 이시영, 홍명희, 김상은, 장도빈, 김용기, 김관식, 리영출처

1945년 10월 10일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충칭에서 제9차 전당대회를 거행하고, 국내외 각 민주당파와 민주영수를 단합하여 전국 통일적 임시연합정부건립을 주장하는 당면 강령 및 정책을 제정하였다. 그 해 12월 김규식, 김원봉, 성주식,[23] 김상덕은 중앙대표단의 명의로 환국하는 동시에 당 중앙부도 서울로 옮기게 되었다.

파일:임시정부 요인들과 김원봉.jpg
1945년 12월 3일에 찍은 임시정부 요인 귀국기념 사진. 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에 서있는 사람이 김원봉.

1945년 12월 중순, 소련모스크바에서는 패망한 일제의 점령지역에 대한 관리 문제를 결정하기 위해 미국, 영국, 소련 3개국의 외무장관들이 모여 회의를 열었다. 이것이 이른바 모스크바 3상회의이다. 열흘간의 회의 끝에 모스크바 3상회의 합의문이 발표되었는데, 일제의 통치를 결산하고 한국의 본토를 독립국가로 재건하는 데 있어 한반도의 남쪽은 미국이, 북쪽은 소련이 임시로 신탁통치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모스크바 3상회의 직후 신탁통치 오보사건[24]으로 인해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우익과 찬성하는 좌익의 거센 충돌이 지속되었다. 김구 중심의 임시정부 계열 우익 민족주의자들은 12월 30일에 포고령을 내려 전 국민 파업을 지시하는 등 대대적인 반탁운동을 벌였다.[25][26]
반면 좌익 계열이 중심이 된 신탁통치 찬성파들은 1946년 1월 3일 서울에서 ‘조선자주독립 민족통일전선결성촉성 시민대회’를 열었고, 이 자리에서 신탁통치를 결정한 3상 회의의 합의문에 대한 절대적인 지지를 표명했다. 여기에 참여한 김원봉도 신탁통치에 적극적인 찬성을 표명했다. 김원봉은 신탁을 반대하는 것을 흥선대원군쇄국정책에 비유(...)하면서까지 비판했다. 김원봉은 임시정부를 탈퇴하였다.

1946년 1월 7일 민족합작을 위한 '4당. 코뮤니케'가 등장하였다. 김원봉도 옵저버 자격으로 참석하였으나, 이승만의 견제와 한민당, 국민당의 입장 번복으로 결렬되었다. 1946년 1월 20일 임정이 소집한 비상주치회의주비회는 비상국민회의의 결성을 결정하는 등 미국정 자문행정기구의 성격으로 성격을 바꿔나갔다. 1943년 1월 23일 김원봉, 성주식, 김성숙은 비상국민회의주비회를 탈회하였다.

김원봉은 '중간파'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였다.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과 다른 정체성을 유지하고자 하였으며[27], 홍진과의 대담에서 "김구와 김규식은 아무런 원칙도 없는 사람들이며, 그들이 적의 편에 붙어 배신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파일:민주주의민족전선 회의장에서 연설하는 김원봉.jpg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회의장에서 연설하는 김원봉

1946년 2월 14일 남한 내의 사회주의 계열 단체들이 연합하여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을 결성했다. 김원봉은 민전의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이어 김원봉은 박헌영, 백남운, 여운형, 허헌과 함께 민전의 공동의장으로 추대되었다.

김원봉 자신이 창설하여 이끌던 좌익 계열의 단체인 조선민족혁명당은 1946년 6월말, 인민공화당으로 개칭했고, 김원봉이 위원장[28]에 올랐다. 인민공화당은 신탁통치 지지, 각지 인민위원회 조직을 통한 임시정부 수립, 토지의 무상몰수·무상분배, 노동자·농민에 대한 선전활동 강화, 민전에 대한 지지 표명을 정치노선으로 삼았다. (연도표기 오류)

민전과 인민공화당의 지도자가 된 김원봉은 민전의 공동의장이자 조선인민당 당수로 좌우합작을 주장하던 여운형과 연계하기도 했다. 1946년 6월 27일 김원봉은 김규식과 만나 좌우합작에 관해 이야기하기도 했으며, 7월 중순 인민공화당에서 '좌우합작에 관한 4원칙'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원봉은 좌우합작에 열성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다. 민전과 인민공화당 내부에서 좌우합작에 대한 반대가 컸기 때문이다. 원래부터 깊은 친분이 있었던 여운형[29]과의 인간 관계가 크게 작용했고, 좌우합작 그 자체보다는 여운형, 김규식 등 중도파 거물들과 연계하려는 의도가 크지 않았나 하는 시각이 있다.

김원봉은 좌우가 합작하고 민족이 단합한 위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강한 정치적 신념을 견지하였다. 1946년 7월 23일 김규식, 원세훈 등의 민주의원에 참가한 사람들과 민전 소속인 여운형, 허헌, 김원봉 등이 좌우합작위원회를 출범하였다. 김원봉은 극단적 좌익, 우익 모두에게 방해를 받았으나 1946년 9월 13일에 3당합동과 좌우합작문제를 결론짓기 위해 허헌, 성주식, 홍남표 등과 화합하였고 16일, 18일에 연이어 민전 의장단 회의에 참석하였다.

1946년 대구 10.1 사건이 발발하자, 김원봉은 민전 조사단 단장 자격으로 대구, 부산 등 경상도를 방문했다. 이로 인해 사건의 배후로 몰려 10월 21일 성주식과 함께 성북경찰서에 연행 구금되기도 했다. # 함께 체포되었던 허헌, 성주식과 함께 바로 풀려났으며 경무경감 장택상이 사과하며 김원봉 검거 운운은 낭설이라 해명하였다. 하지만 김원봉에 대한 테러 위협은 계속 커져갔다. 미국 시카고선 동경 특파원 게인과의 면답에서 자신을 직업적 혁명가로 소개하며, “자기의 은신처를 떠난 사람은 누구나 발각되는 대로 체포되는” 미군정의 탄압을 비판하였다.

민전은 정비 강화를 위해 1947년 1월 29~30일애 개최한 민전 확대 중앙 위원회에서 종교계로부터 김창준 등의 인물을 받아들였다. 새로운 의장단은 1947년 2월 17일 '북조선 도시군 인민위원회 대회'에 "북조선 도시군 인민위원회 대회 만세! 우리 민족의 영명한 지도자 김일성장군 만세!"를 담은 메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30]

1947년 3월 22일 김원봉은 미군정청 경찰이었던 노덕술[31]에게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의 총파업 배후인물로 지목되어 체포되었다.[32] 그렇게 김원봉은 중부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게 되었다.[33][34] 김원봉이 체포되자 좌익 및 좌우합장을 주창하던 일부 중도 단체들에서 애국지사에 대한 모독이라는 여론을 형성했다. 4월 5일 조선건민회의 이극로는 자유신문에 '혁명 애국투사 천대는 우려사(憂慮事)'라는 제목의 글을 실기도 했다.#

민족자주연맹 대표였던 송남헌[35]이 쓴 『해방 3년사』에 그때 상황이 나온다.

김원봉을 붙잡아 간 사람은 노덕술이었다. 일제 때 종로경찰서 형사로 있으면서 독립운동가들을 잡아들여 악랄한 고문을 하던 악질 친일경찰로, 김원봉 장군이 거느리던 항일결사 의열단 칠가살 명단에 올라 있던 자였다. ''김원봉이를 반드시 잡아오라"고 특명을 내린 사람은 수도경찰청장인 장택상이었다. 장택상의 아버지 장승원이 군자금을 모집하던 광복회원에게 불응하다 살해됐는데 장택상은 이 원한 때문에 '진보적 해외 지도자' 김원봉을 수도청에 구금하였다는 설이 있다.

노덕술이 김원봉을 묶어 장택상 앞으로 끌고 갔을 때였다. 두둑한 포상금을 받고 일계급 특진까지 할 꿈에 부풀어 있던 노덕술은 "하이!" 하고 입에 밴 왜말을 뱉으며 차렷 자세를 취하였다. 하늘 같은 청장님이 꽥 소리를 질렀던 것이다. "이 바보 같은 자야! 정중히 모셔오랬지 이렇게 불경스럽게 하라고 했나?" 그러면서 짐짓 송구스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손수 묶인 것을 풀어주는 것이었다.


정정화[36]는 자신의 책 『장강일기』에 아래와 같이 기록했다. 이 증언의 신빙성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언젠가 약산이 중부경찰서에 잡혀 들어가 왜정 때부터 악명이 높았던 노덕술로부터 모욕적인 처우를 받았다는 말을 듣고 몹시 분개했던 일이 기억난다. 평생을 조국 광복에 헌신했으며 의열단의 의백이었고 민혁당의 서기장을 거쳐 임시정부의 국무위원 겸 군무부장을 지낸 사람이 악질 왜경 출신자로부터 조사를 받고 모욕을 당했다는 소리를 듣자 세상이 아무래도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4월 9일 미군정은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십여 일만에 김원봉을 석방했다.[37] 김원봉은 의열단 활동을 같이 했던 유석현의 집에 찾아가 꼬박 사흘 동안 울며 다음과 같이 한탄했다고 한다.

"여기서는 왜놈 등쌀에 언제 죽을지 몰라." 그의 독백은 울분으로 이어진다. "내가 조국 해방을 위해 중국에서 일본 놈과 싸울 때도 한 번도 이런 수모를 당한 일이 없는데, 해방된 조국에서 악질 친일파 경찰 손에 의해 수갑을 차다니, 이럴 수가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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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에 다시 묻는다』 (길진현, 삼민사, 1984)


김원봉 자신이 창설하여 이끌던 좌익 계열의 단체인 조선민족혁명당은 1947년 6월 1~2일에 열린 조선민족혁명당 제10차 전당대표회의에서, 조선인민공화당으로 개칭했고, 김원봉이 위원장[38]에 올랐다. 인민공화당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 지지, 각지 인민위원회 조직을 통한 임시정부 수립, 토지의 무상몰수·무상분배, 노동자·농민에 대한 선전활동 강화, 민전에 대한 지지 표명을 정치노선으로 삼았다.

1947년 7월 좌우합작운동을 주도했던 여운형이 암살되자, 김원봉은 "정치적 주장이 다르다 하여 그것을 구실 삼아 자기 민족의 지도자를 학살하는 이런 죄악은 천추에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규탄했고, 그의 죽음을 "민족국가의 부흥 발전에 큰 상처를 남기는 것"으로 규정하며 여운형의 죽음에 대해 애통해 했다. 이어 김원봉은 '노력인민'과 '광명일보' 등 좌익 계열의 신문들에 '여운형의 유지를 받들어 미소공위를 성공시키자'는 호소문을 발표했다.

하지만 좌우 대립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급기야 8월 2일, 미군정은 제5호 행정명령을 발동, 민전의 8.15 기념 시민대회를 금지시키고, 8월 11일에는 민전을 비롯한 좌익 단체에 대한 폐쇄령과 좌익 인물에 대한 일제 검거를 단행했다. 이에 8월 12일에는 자택이 습격당하는 일도 벌어졌다. 민전과 인민공화당의 사무실도 폐쇄해야만 했다.

명목상으로는 중도파를 아우른다 하였으나 실상은 사회주의자들이 주도하였던 민주주의민족전선의 공동의장이자, 진보적 민족주의 단체인 인민공화당의 위원장이었던 김원봉은 미군정 하에서 더이상의 활동이 어려워졌다. 김원봉과 함께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공동의장이었던 박헌영, 백남운, 허헌은 1947년 말에 모두 월북했다. 하지만 김원봉은 남한에 더 머물렀다.

당시 극심한 좌우 대립으로 혼란하던 서울에서 사회주의 핵심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었던 김원봉은 다른 거물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공공연한 협박에 백색테러 위협을 받기도 했다. 남한에서 점차 공개적인 활동이 어려워지자 김원봉은 중국에서 그랬던처럼 거처를 수시로 옮기고 잠행을 했다. 강준만에 의하면 한곳에 2시간 이상 머무르지 않았다고 한다.

1948년 1월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한국을 방문하였을 때, 김원봉과 면담을 요청하기도 했다. 이는 당시 한국 내 좌익 세력의 최대 거물이었던 김원봉의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민전이 와해되면서 김원봉의 권력도 크게 약화되었다. 김원봉은 사마로(司馬路)[39]에게 월북 이전에 보낸 편지에서 '북조선은 그리 가고 싶지 않은 곳이지만 남쪽의 정세가 너무 나쁘고 심지어 나를 위협하여 살 수가 없다'고 쓰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이 기정사실화되자 월북을 결심한다.

북조선민전은 1948년 3월 25일에 남북연석회의에 대한 서한을 김원봉 을 포함한 김구, 김규식, 홍명희, 백남운, 박헌영, 허헌, 김창준 등에게 발송 하였다. 남조선민전 등에서도 남북협상 실현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김원봉도 조선인민공화당을 대표하여 남북협상 회의에 참가하겠다고 연락원 을 통해 답신을 보냈다. 남조선민전 발표에 따르면 조선인민공화당은 김원봉 외 7명이 1948년 4월 9일에 새로운 정치무대 평양으로 출발하였다. 김원봉은 김구와 김규식까지도 참가한 평양행-외국의 간섭 없이 민족 단합으로 단선·단정문제 해결― 이외의 다른 대안이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6. 월북 후 북한에서의 행적[편집]



6.1. 북한 정권 수립 참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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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서 단선 단정[40] 반대 대책에 관한 결정서 초안을 낭독하는 인민공화당 대표 김원봉

1948년 4월 김원봉은 김구, 김규식, 박헌영, 이극로 등과 함께 평양에서 열린 '전조선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남북연석회의)'에 남측 정치단체 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참가하였다. 이때 평양에 간 김원봉은 죽을 때까지 북한에서 머물며 활동했고 더이상 한국에 내려오지 않았다.[41] 이때 남북연석회의에서 김원봉은 주석단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어 인민공화당 대표 자격으로 축사를 하기도 하였고, 연석회의 전체의 사회를 맡기도 하였다. 월북 후 조선로동당에 입당했다고 잘못 알려지기도 했으나 마지막까지 조선인민공화당 중앙위원장으로 남았다. 이는 조선로동당 강원도당 위원장을 지낸 동명이인 김원봉과 혼동했기 때문이다.[42]

1948년 6월 29일부터 일주일 동안 진행된 '제2차 전조선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 참가했으며 1948년 8월 북조선인민위원회 최고인민회의에서 제1기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김원봉은 '남조선 출신’이라는 지분을 통해 북한 정권 수립에 핵심 인물 중 한 사람으로 참여할 수 있는 배려를 받았다. 김원봉은 헌법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했으며, 9월 9일, 초대 내각이 수립되면서 반일투쟁과 자주국가건설운동의 대표로 초대 내각 국가검열상에 임명되었다. 국가검열상은 국가 기관 각 부문들과 각 공장, 기업소 및 협동단체들에서 국가의 법령, 결정, 지시들을 정확히 실시하도록 방조하는 것을 임무로 하였다.[43]

파일:국가검열상 김원봉.jpg
북한 정권 요인 사진.
사진 가운데가 수상 김일성, 왼쪽에 선글라스 낀 인물이 국가검열상 김원봉

1948년 11월에는 김원봉은 "미군은 물러가라"는 규탄 성명에 참여하였다.

정권 수립 후 북한은 남침 준비에 들어간다. 당시 대한민국은 미군의 거부로 탱크가 한 대도 없었고 군사력도 부족했지만, 북한에는 중일전쟁국공내전에서 실전경험을 쌓은 팔로군 출신들이 수두룩했으며, 소련이 지원해준 T-34 탱크도 240여 대나 보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1949년 김일성은 한반도 전역을 공산화하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스탈린마오쩌둥을 찾아가서 전쟁승인을 수차례 요청했다.

1950년 4월 하순에 김일성은 소련을 방문하여 스탈린으로부터 남침전쟁에 대해 동의를 얻었고, 5월 13일에는 중국을 방문하여 마오쩌둥에게도 남침에 대해 동의를 얻었다. 김일성은 애치슨 라인을 근거로 미국이 전쟁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 보았고, 설령 미국이 전쟁에 개입한다 하더라도 미국이 참전하기 전 최대 2개월 안에 적화통일을 달성하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런 김일성에게 김원봉은 두 달의 짧은 기간 만에 남쪽을 점령할 병력이 충분치 않아 세력이 약한 대한민국을 도와 미국이 참전할 것이고, 그러고 나면 오랜 전쟁으로 남북이 서로 이득 없이 많은 희생자들이 나올 것이라며 전쟁을 반대하였다는 증언이 있다.[44][45]


6.2. 반대한민국 빨치산 양성[편집]


남로당 빨치산과 별개의 반대한민국 빨치산인 인민공화당 빨치산을 양성하였다.

약산은 이들에게 (1)당의 핵심이 될 것 (2)당 재건운동을 전개할 것 (3) 청년으로서 당 사업에 열렬히 투쟁할 것 (4)대한민국정부를 파괴 전복시키고 인민공화국을 수립하도록 투쟁할 것을 지시하였다.

당 활동이 활발하였던 경남지역에서는 무장운동까지 전개되었다. 1949년 7월 19일 인민공화당 중앙당에서 경상남도위원회에 하달한 지령문에서는 이만식을 유격대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있으며 1949년 7월 30일 C지구에서 경남도당에 보낸 보고서에는 35명으로 야산대원을 조직하고 있으며 야산대원에게 교양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있다. 또 당이 독자적으로 유격대 조직을 시도하고 있을 뿐 아니라 남로당이 전개하고 있던 무장운동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남한 내에서의 운동은 우당이었던 남로당과 상호 협조 속에서 이루어졌지만 그러는 가운데서도 인민공화당은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려 하였다. 예를 들면 진주의 당 간부는 당원들을 교양하면서 약산의 항일 투쟁을 담은 『약산과 의열단』을 매입하여 탐독할 것을 지시하였다.

염인호(1992). 김원봉 연구#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하여 적의 선거기관과 선거장소를 파괴 습격하며 선거를 거부함으로써 선거를 완전히 파탄시키라! 인민유격대의 무장투쟁을 백방으로 원호하며 광범한 농민봉기를 일층 맹렬히 전개하라! 이승만 매국역도들을 타도하고 조국의 평화적 통일방책을 우리들 자신의 손으로 실시하라! …… 조국의 영예와 당의 영예를 위하여 자기의 피와 생명을 아끼지 말고 원쑤들을 소탕하는 길에 용감히 전진하라!

1950년 5월 20일, 조선중앙방송국 라디오에서의 김원봉#



6.3. 6.25 전쟁 참여[편집]


전쟁에 반대하였다는 일부 주장이 있지만[46] 어쨌든 김원봉은 남침을 목숨 걸고 막지 않았고 결국 김일성의 남침 명령에 순응하였다.
김원봉은 6.25 전쟁 발발 이후에는 북한의 전쟁 수행 노력에 적극 협력하였다. 6·25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 위원회에서 공화국 남반부 해방 지역 군면리 인민위원회 선거 중앙 선거 지도부가 구성되었는데, 김원봉은 9명의 지도부 중 첫 번째로 이름을 올렸다. 이 '공화국 남반부 해방 지역 군면리 인민위원회 중앙 선거 지도부'가 하는 일은 북한이 점령한 남한 영토에서 대한민국 정부의 행정 기관을 철폐하고 북한 통치 체제를 구축하는 것이었다.[47]

김원봉은 국가검열상의 지위로 6.25 전쟁 중에 남파 간첩을 훈련하고 파견하는 것을 직접 지휘했다. 1954년 1월 26일 경향신문은 "평양에 본적을 둔 간첩 김춘옥 외 4명을 체포해 이들을 취조한 결과, 김춘옥은 '6.25 전쟁 당시 김원봉의 직접 지휘하에 대한민국의 경제 혼란, 선거 방해, 모 정당 와해를 목적으로 남파되었다'고 진술"한 내용의 기사를 보도했다. 기사에 따르면 6.25 전쟁 발발 이전부터 김원봉으로부터 간첩 훈련을 받았다고 진술되어 있다.

또 전쟁 기간 동안 김원봉은 '군사위원회 평안북도 전권 대표'로서 평안북도에서 북한군의 군량미를 생산하는 일을 책임졌다.

1952년 3월 19일 김원봉은 북한이 6.25전쟁 공훈자에게 수여하기 위해 만든 훈장인 '로력훈장'의 첫 번째 수상자가 되었다. 당시 로동신문은 "조국의 통일 독립과 자유를 위하여 미제의 약탈자들과 그 주구들을 반대하는 정의의 조국 해방 전쟁에서 공훈을 세운 정권 기관 및 당 단체 지도일군들에게 공화국 훈장을 다음과 같이 수여한다"고 했다. #

1952년 5월 11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국가검열상에서 해임, 최창익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로동상에 임명되었다. 전시(戰時) 로동상으로서 김원봉은 노동력의 전시 동원과 무기 생산 등을 관장했다.

6.4. 전쟁 후 활동 및 숙청[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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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대에 촬영된 김원봉.
6.25 전쟁이 휴전된 후, 1953년 11월 김원봉은 납북된 안재홍, 엄항섭, 조소앙, 조완구 등 중도파 인사들을 만났다. 김원봉은 이들과 함께 외세의 간섭에서 벗어나 민족의 단결과 통일을 이루어내자'중립화 통일방안'을 주장했다.

1954년 6월 이들의 대표로서 조소앙은 김일성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중립화 통일방안은 우리 조선의 장구한 역사적 경험과 교훈, 그리고 오늘 우리 조선이 처해있는 상황으로 보아 외부세력의 침략과 간섭을 배제하고 잔정한 자주적 평화통일을 달성하기 위한 유일한 방안이 된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중립화만 보장되면 외부세계의 침략과 간섭은 없어지고 나라의 평화도 보장되며, 민족의 통일과 단결을 이룩하고 통일위업 달성을 더 앞당길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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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소앙.


1956년 8월부터 1958년 말까지 이루어진 대대적인 종파 숙청 작업에서 한동안은 생존하였고, 1957년 8월, 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는 한편 최고인민회의 2기 1차 회의에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선출되는 등 여전히 정권의 상징적인 요직을 맡았다. 1958년 3월 17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투쟁에서와 공화국의 민주기지를 강화하는 사업에서 공훈을 세웠다"는 이유로 환갑 기념 로력훈장도 받았다. 그러나 1958년 10월 2일, 최고인민회의 2기 4차 회의에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및 대의원에서 반국가적 및 반혁명적 책동의 죄를 추궁받아서 해임되었으며 그 직후 체포되었다. 10월 3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법무부장 최학룡은 소련대사관 1등 서기관 율린과 오코니슈니코프를 초청하여 김원봉의 숙청에 대해 통보하였다. 10월 24일, 외무상 남일은 소련 대사 알렉산드르 푸자노프를 초청하여 그에게 김원봉이 '미국인들과 연결'된 천도교청우당 중앙위원장 김달현과 교류하였으며, 김원봉이 남한으로 도주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사용'하였다고 알렸다.

이후 김일성은 1958년 10월 30일, 조선인민군 각급 군사학교교원대회에서 한 연설인 "군인들속에서 공산주의교양과 혁명전통교야을 강화할데 대하여"를 통해서 김원봉을 비난했다.

우리는 나쁜놈들이 말하는 <전통>을 알고있습니다. 리승만에게는 미국호텔에서 엎디여있던 <전통>이 있습니다. 최창익이나 김원봉에게는 장개석앞에서 앞잡이노릇을 해먹던 <전통>이 있습니다.


이후 김원봉은 숙청된 것은 확실한데, 정확한 운명은 알려져 있지 않다. 조선의용대 출신 김학철은 김원봉은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간 후 청산가리를 먹고 자결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하였다. 김원봉의 아내인 최동선과 두 아들 김중근, 김철근도 함께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김원봉의 최후에 대해 북한 정권은 극비에 붙이고 있어서 자세한 내막은 아직도 불투명하다.

북한에서는 김원봉이 나쁜놈 끝판왕으로 영화에 자주 등장했다는 북한 전문기자 주성하증언이 있다. 김일성이 꽤나 껄끄러워했던 상대라고 한다. 후술하지만 황용주의 말에 따르면 김일성을 부정적으로 보고 김일성이 한 활동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후반부에 김원봉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의외로 부정적인 얘기는 없이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 당시 중국관내에 있던 반일애국력량은 주의주장과 투쟁방식의 차이로 하여 서로 힘을 합치지 못하고 분렬되여있었습니다. 그들은 크게 두파로 갈라져있었는데 하나는 민족주의파라고 하는 김구파였고 다른 하나는 인민전선파라고 불리운 김원봉파였습니다. 김원봉파는 공산주의계렬에 가까운 독립운동좌파였습니다. (...) 국공합작의 실현은 중국인민의 구국항전에 새로운 국면을 열어놓았으며 중국혁명발전을 크게 추동하였습니다. 이런 배경을 타고 작은 당으로 서로 분립되여있던 김구계렬과 김원봉계렬이 1940년 9월에 지난날의 대치상태에 일단 종지부를 찍고 단일전선결성에 성공하여 공동선언까지 발표하였습니다. 그 공동선언에는 조국광복회 창립선언과 10대강령에서 제시한 사항들과 같은 내용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림시정부는 그후 김원봉계렬을 인입하여 좌우합작을 이루었습니다. (...) 최용건도 초기에는 김구와의 제휴를 그닥 달갑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림시정부에 대한 태도에서는 그가 김책보다 훨씬 더 회의적이였습니다. 파벌에 이골이 난 사람들과 손을 잡아서는 무엇하겠는가, 손을 잡았대야 덕을 보지 못한다, 합작을 하는바치고는 차라리 김원봉이네 계렬과 하는것이 좋지 않겠는가고 하였습니다. 물론 최용건도 나중에는 김책처럼 나의 주장에 리해를 표시하였습니다. 김원봉은 의렬단이라는 단체를 조직해가지고 관내와 동북지방은 물론, 국내를 무대로 암살과 습격파괴활동을 벌렸습니다. 그후 조선의용대라는것을 조직했는데 제1구 대장이 해방직후 중앙보안간부학교 교장을 잠간 한바있는 박효삼이였습니다. 박효삼은 휘하에 40명 정도의 대원들을 거느리고있었습니다. 후날 김원봉이 하는 말을 들으니 조선의용대는 규모도 작고 갖춤새도 빈약해서 독자적인 활동은 별로 하지 못하고 중국부대들에 섞여 돌아가면서 확성기를 가지고 반전선전과 적군와해공작 같은것을 했다고 합니다. (...) 따지고보면 김구네 림시정부인사들은 다 우리에게로 온셈입니다. 조선건국동맹의 주인공인 려운형도 평양에 와서 나를 만나고 돌아갔고 조선독립동맹의 지도자들도 동료들과 함께 평양으로 찾아왔으며 김원봉도 평양에 와서 초대국가검열상으로 사업하였습니다.

세기와 더불어 8권.


김일성은 세기와 더불어에서 김원봉과 함께 숙청된 김달현 역시 김일성이 긍정적으로 평가하였고 근래 북한에서 김달현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것을 봐서 렬사 수준으로 대우받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역적은 아닌 것으로 어느 정도 복권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북한 공식매체에서의 언급이 없고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지 못한 것을 봐서는 애국렬사릉에 안장된 최승희, 한설야, 무정 수준의 복권은 아니다.

7. 참고 문헌 및 저자 소개[편집]


  • 『지도자군상(指導者群像)』[48], 대성출판사, 1946년, 김오성 - 한국의 공산주의 이론가, 문학평론가이다. 광복 이후 조선인민당 선전부장, 남조선로동당 중앙위원으로 활동하였고, 1947년 월북하였다. 김승학이 작성한 원고에 기재된 263명의 친일인사 명단에 수록된 인사이다.
  • 『약산과 의열단(若山과 義烈團)』[49], 백양당, 1947년, 박태원 - 한국의 작가, 시인, 소설가이다. 일제강점기 조선공산당 문화예술행정특임위원이었고, 광복 이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의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6.25 전쟁 기간에 월북하였다. 일제에 소극적으로 협력한 적이 있어서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예비 명단을 정리했을 때 포함되었으나, 최종 명단에서는 제외된 인물이다. 이 책은 김원봉이 지휘한 인민공화당계 반대한민국 빨치산이 보던 책이다.
  • 『북한인물록(北韓人物錄)』, 국회도서관, 1979년
  • 『항전별곡』, 거름, 1986년, 이정식, 한홍구 - 성공회대학교 교양학부 대학교수이며, 역사학자이다.
  • 金元鳳의 生涯와 抗日歷程, 국사편찬위원회, 1990년, 한상도 - 교육자, 대학 교수이다.
  • 『김원봉 연구』, 창작과비평사, 1992년, 염인호 - 서울시립대학교 인문대 국사학과 교수이며, 역사학자이다.
  • 『대륙에 남긴 꿈 김원봉의 항일역정과 삶』, 역사공간, 2006년, 한상도
  • 『약산 김원봉 평전』, 시대의창, 2008년, 김삼웅 - 성균관대학교 언론정보학과 교수, 언론인, 학자, 작가, 과거 독립기념관장이었다.
  •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무부위원장 김원봉의 숙청[50], 자유아시아방송, 2018년, 김주원 - 북한이탈주민 출신의 기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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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담으로 내이동에는 김원봉의 호를 딴 약산로가 있다. 다만 약산로와 생가터는 약간 떨어져 있다.[2] 전홍표는 동화중학의 교장이었다.[3] 현재 중국의 명문 대학 중 하나인 난징 대학의 전신이다.[4] 당시 대만도 일제 치하였다.[5] 친일행위로 귀족 및 대지주가 된 자. 여기서 신(紳)이란 한자는 '권세가'란 뜻이다.[6] 이전에 의열단 고위 간부 출신으로서 국내 서울청년회의 유력한 성원이었다.[7] 결국 이 사건으로 김구, 김좌진, 이범석, 장준하, 지청천 등의 우익 민족주의자들은 더욱 반공주의를 고수하게 되어서 소련 공산당과 협력하자는 입장을 보인 김원봉, 여운형 등과의 연대를 거부하게 된다. 이러한 공산당 자체의 분열과 민족 지도자의 반공 정서는 훗날 국제공산당 자금사건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8] 정규군을 양성하는 군사학교인 만큼, 체계적인 교육을 이수할 수 있었다. 당시 교장은 다름 아닌 장제스. 한때 중화민국과 (국민혁명군 출신의) 대한민국 군부 요인 가운데는 이 황포군관학교 동문들이 존재했다.[9] 공산권에 가담했다고 해서 공산주의자로 단정해서는 안될 것이다. 공산주의 내지 사회주의 자체는 광범위한 메세지를 던지며 공산주의자가 아니더라도 공산권에 가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독일 사회민주당원이라고 전부 사민주의자가 아니다[10] 난창 폭동을 주도한 이는 항포군관학교 때 스승이었던 저우언라이였다. 이 난창 폭동은 중국공산당이 최초로 무장하여 싸운 날로 나중에 중국 인민해방군의 창립기념일이 되었다.[11] 레닌주의정치학교의 명칭은 모스크바의 마르크스학원을 모방한 것이었다. 『한국 공산주의운동사』(스칼라피노, 이정식, 돌베개, 2015) p.238 참고.[12] 정식 명칭은 '중국국민정부 군사위원회 간부훈련반 제6대'로, 시인으로 유명한 이육사가 조선혁명간부학교 제1기 졸업생이다.[13] 단일대당(單一大黨) 조직을 설명한 부분이다.[14] 그래서 한국독립당에도 조소앙의 흔적이 있다.[15] 다만 이후에도 조선독립동맹과 의용군 화북지대 공산당원의 수는 50여 명에 불과했다.[16] 약 200여 명[17] 훗날 초대 주한중화민국대사를 지내고 중국 내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지원을 실질적으로 담당했던 중화민국의 외교관 사오위린(邵毓麟)의 회고록에 따르면 김원봉은 본인의 사무실에 직접 울며불면서까지 찾아오면서 임시정부에 합류를 죽어도 하지 못하겠다고 항의를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증언은 사오위린이 자신이 당시 독립운동가들에게 영향력을 지대하게 끼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음을 강조하는 회고 느낌이 강하며 학계에서도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부분이 있어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엔 위험이 따른다.[18] 이 뒷사정을 자세히 이해하려면 국민당 내부의 사정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이 당시 중국국민당은 당 내부에 중앙집행위원회 조사통계국(줄여서 '중통(中統)'이라 불린다),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줄여서 '군통(軍統)'이라 불린다)이라는 2개의 유명 정보기관이 존재했는데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민당 중통으로부터, 김원봉의 조선의용대는 군통으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같은 국민당 내부의 장제스가 수장으로 있는 정보기관이기는 해도 이 둘은 실질적으로 서로 견제를 하던 사이었고, 얼마 안가 중일전쟁까지 터지면서 당 내부 사정이 여러모로 복잡하게 돌아가게 됐다. 이런 국민당 내부의 상황도 당시 관내지역 독립운동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여담으로 군통(軍統)은 그 악명높던 다이리가 실질적으로 이끌던 첩보기관이기도 했고, 중국의 항일첩보드라마에서도 단골 소재로 자주 등장하는 걸로도 유명하다.[19] 중국 내 한국의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는 중국의 역사학자들은 중국의 복잡한 근현대사와 한국의 독립운동사는 서로 접점이 많다고 전제를 하는 편인데, 중국 측 연구에서는 국공간의 갈등과 국민당 내부의 복잡한 움직임때문에 한국의 독립운동도 똑같이 갈등과 반목이 심했다고 바라보는 편이다. 그러나 한국학계에서는 되도록 이런 중국 내 환경에 휘둘리지 않으려 하는 주체적인 모습에 주목하고 있으며 우리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중국의 영향력에 휘둘리지 않는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다.[20] 과거 민족혁명당이 창당되었을 때 김원봉이 서기장이 되어 사실상 당권을 독점한 후 지청천을 제명하는 등 우파 인사들을 탄압하자 조소앙을 필두로한 우파 인사들이 이에 반발하여 집단 탈당했다. 이후 조소앙, 신익희는 임시정부 해체를 주장하는 김원봉에 맞서 김구를 도와 임시정부의 재건 및 유지를 위해 노력했으며, 내부부장 및 외부부장 등 주요 직책을 두루 맡았다. 또 조소앙과 신익희는 지청천을 도와 한국광복군 창설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42년 김원봉이 합류한 후 지청천과 주도권 싸움을 벌였지만 김원봉이 광복군에서 주도권을 차지하지 못한 것은 조소앙과 신익희의 견제도 큰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21] 사사건건 갈등하던 사이였지만 임정 주석이었던 김구가 주례를 섰다. 김원봉은 최동선과의 사이에서 두 아들 김중근과 김철근을 얻었다. 그러나 최동선과 두 아들 모두 1958년 김원봉과 함께 처형당한 것으로 알려졌다.[22] 공교롭게도 김원봉과 결혼한 최동선은 김준엽장준하의 절친이었던 최기일의 먼 친척이라고 한다. 최기일의 자서전 <자존심을 지킨 한 조선인의 회상>에 따르면 최동선의 할아버지는 대한제국 시절부터 삭주군에서 지방관리 노릇을 해 온 6급 공무원인 주사(主事)였기때문에 주로 최주사라고 많이 불렸다고 한다. 양반이 거의 없다시피 한 평안도에서 몇 안되는 양반 행세를 하고다닌 사람이라 사람들로부터 ‘가짜 양반’이라고 많이 불렸다고 한다. 최주사에게는 아들이 6명 있었는데 이 중 장남은 일본제국 경찰에게 총살당하고 차남은 가출해서 만주에서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임시정부에 가담했다고 한다. 최동선은 이 최주사의 차남의 딸이며 그의 오빠 역시 독립운동가였는데 아버지와 여동생과 다르게 옌안조선독립동맹에 가담해버렸다고 한다. 최기일 본인은 어릴적 최주사 부부와 1945년까지 고향인 삭주에서 자주 만났는데 분단되고나서 소식이 끊겨버렸다고 한다. 그 밖에 최동선 부녀가 1945년쯤 개인자격으로 임정 제2진으로 귀국했을 때 서울에서 잠깐 만나기도 했다. 하지만 최동선 부녀 역시 김원봉과 같이 월북을 해버렸고 최기일은 이승만 밑에서 공보비서 일을 하다가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23] 아래 임시정부 요인 귀국기념 사진 속에 두 번째 줄 맨 오른쪽에 있는 인물이다.[24]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에 대한 동아일보의 오보사건으로, 동아일보는 한반도의 통일독립국가 건설을 보장한다는 3국의 합의 내용에 중심을 두지 않고 새로운 식민통치가 시작되는 것처럼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하고 미국이 즉시 독립을 주장했다'는 내용의 신문을 내놓는다. 하지만 오히려 미국이 '한반도 신탁통치 30년안'을 제안했고, 이와 반대로 소련은 '즉시 독립'을 주장하며 회의를 시작했다. 물론 소련이 정의로운 국가라거나 그래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보면 1945년 말 당시 한반도는 좌익세력이 우익세력보다 상대적으로 우세했고, 지리적으로 봐도 한반도로부터 바다 건너 있는 미국과 달리 소련은 대륙으로 맞닿아 있었기 때문에 한반도에 자국의 영향력을 최대화하는 데 딱히 조바심을 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사실 소련은 한반도보다 중국의 공산화에 더욱 신경쓰고 있었다.[25] 당시 김구를 비롯한 임정 요인들은 미군정에 의해 부정된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반탁운동을 명분으로 되찾고 싶어 했다.[26] 이 과정에서 미군정에 의해 기용된 친일파들은 신탁통치 찬성파들이 소련에 나라를 팔아먹는 세력이라고 주장하며 자신들이 '반공투사', '애국자'임을 자처하면서 우익세력의 뒤에 숨어들었다. 당시 미군정은 군정 고문 대부분을 친일파 출신이 많은 한국민주당에서 충원하였는데, 특히 일제 하에서 경찰로서 동족을 체포하고 고문하는 데 앞장섰던 자들 중 80% 이상이 미군정 경찰에 다시 기용되었다. 소련과 냉전 중인 미국에게는 효율적인 한반도 통치가 근본 목적이었고, 한국을 잘 알지 못하던 그들은 친일행위자들이 일제의 식민통치에 앞장서며 익힌 행정경험을 권력행위의 말단을 구성하는 데 동원한 것이었다.[27] 인민당을 공산당의 부속물로 간주하였기에 중도적 입장을 견지하는 새로운 정당을 조직하고자 하였다.[28] 부위원장은 성주식[29] 김원봉은 여운형과 친분이 깊었다. 여운형은 김원봉이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할 수 있도록 주선해주었으며, 김원봉은 광복 후 여운형의 환갑잔치에 참석하기도 했다.[30] 김일성은 1945년 10월 14일, 평양에서의 첫 대중 연설에서 전 민족이 굳게 단결하여 민주주의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해나가자”고 호소 하였고, 이러한 민족통일전선노선에 김원봉을 포함한 민족주의 성향의 백남운·허헌· 홍명희·리극로·김창준 등이 호응했던 것이다.[31] 1920년대 말 동래경찰서에서 근무하면서 당시 광주학생항일운동과 연관된 부산 학생들을 물고문하고 구타해서 '일경의 호랑이'라고 불리던 악질 친일 경찰이었다. 이후 평양경찰서 서장으로 근무하던 당시 해방을 맞았는데, 당시 평양을 점령한 소련군에 의해 구금되었다가 수개월만에 탈출하여 남한으로 내려왔다. 이후 반공주의자가 되었다. 1946년 1946년에 장택상에 의해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이 되었고, 서울에서 '좌익분자' 검거 등을 주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인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됐다. 그러나 이승만은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을 불러 노덕술을 풀어주라고 했으며, 심지어 노덕술을 체포한 반민특위 위원들을 의법조치하라고 명령하기도 했다.# 결국 반민특위를 주도하던 소장파 국회의원들은 프락치로 몰렸고, 반민특위는 해산되어 노덕술은 풀려났다. 이후 노덕술은 대한민국 육군본부 제1사단 헌병대장이 되어 6.25 전쟁 당시 서울지역 부역자 처벌 책임자가 되어 양민학살에 관여한다.[32] 언론인 송건호에 의하면 김원봉은 체포당했을 당시 화장실에서 용변을 다 마치기도 전에 끌려갔다고 한다.[33] 이 과정에서 노덕술이 김원봉을 '빨갱이 두목'이라고 부르며 모욕을 주고 그의 뺨을 때렸다고 하는 이 있으나, 이에 대해 2015년 동아일보의 송평인은 노덕술이 김원봉을 체포한 것은 사실이나 노덕술이 그의 뺨을 때리고 고문했다는 사료는 찾을 수 없었다는 칼럼을 내기도 했다.# 거기에 후술할 장강일기 속 정정화의 증언은 순전히 전해 들은 것이어서 신뢰성이 떨어진다고 말하기도 했다.[34] 본문: 노덕술이 고문 경찰관인 것은 분명하지만 설마 김원봉 같은 인물을 고문까지 했겠냐는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근거를 찾아봤으나 찾을 수 없었다. / 김원봉 연구서는 염인호 서울시립대 교수의 ‘김원봉 연구’(1993년)가 가장 상세하다. 어디에도 김원봉이 노덕술에게 뺨을 맞고 고문을 당했다는 말은 없다. 다만 여성 독립운동가 정정화의 회고록 중 “김원봉이 노덕술로부터 모욕적인 처우를 받았다는 말을 들었다”는 말을 인용하고 있다. 정정화의 회고록은 부정확한 데가 많은 데다 이 말은 전해 들었다는 것이어서 신뢰도에 문제가 있다. 그것을 믿는다 하더라도 모욕적인 처우가 고문이었다면 고문이라고 하지 모욕적인 처우라고 에둘러 말했겠느냐는 의문이 남는다.[35] 김규식의 비서실장으로, 일제강점기 때 단파방송 밀청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룬 적이 있다.[36] 임시정부 계열[37] 김원봉이 석방되던 당일' 둘째 아들이 태어났는데, 자신이 철창에 있을 때 태어났다 하여 이름을 '철근'이라고 지었다. 김철근은 1958년 김원봉이 숙청당했을 때 다른 일가족과 함께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다.[38] 부위원장은 성주식[39] 중경 시절 비서를 지냈다[40] 단독 선거 및 단독 정부 수립.[41] 주한 유엔 유격군이 작성한 1953년 3월 19일 자 보고서에 따르면 김원봉의 월북 경위에 대해 '스스로를 좌파(leftist)로 인식했고, 삼촌(uncle·실제론 인척)인 김두봉과의 관계 때문에 서울을 떠나 1946년(실제론 1948년) 월북했다'고 기록돼 있다. 이 보고서는 국회도서관에서 소장 중.[42] 이 김원봉도 1959년에 숙청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43] 현재도 국가검열위원회로 존재감은 거의 없지만 남아는 있다.[44] 『약산 김원봉 평전』 (김삼웅, 시대의창, 2008) p584와 북한이탈주민의 증언 참고.[45] 가족이 대한민국에 버젓이 있었던 김원봉으로서는 남침에 반대하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46] 오히려 전쟁에 누구보다도 찬성하며 당장 침공하자고 했다는 주장도 있다[47] 1948년 4월까지 남한에서 활동하면서 남한의 사정에 밝고, 한국 내 좌익 세력과 가장 깊게 연계되어 있던 김원봉이 이 자리에 오른 것은 당연했다.[48] 광복 직후 김오성이 좌익계 인물들의 생애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대해 서술한 평론집이다.[49] 광복 이후 박태원이 조선문학가동맹 집행위원, 조선문학건설본부 소설부 중앙위원회 조직 임원으로 선정되었을 때 서술한 책이다.[50] 월북 이후 내용은 기사를 참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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