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원봉/일생 (문단 편집) === [[민족혁명당]] 결성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폐지 운동 === 1932년 11월 중국 상하이에서 독립운동 세력의 통일을 목적으로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한국혁명당]], 한국광복단동지회 등이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하자, 김원봉은 의열단원들과 함께 여기에 참여하기도 했다. 1934년 3월,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제2차 대표대회에서 "종래와 같은 중앙간부만의 기관에 국한시키지 않고, 가맹단체 소속 '다수투사'를 집결시켜 적극적인 공작을 전개한다. 가맹단체를 포함한 모든 혁명단체를 해산하고 그 단원을 통일동맹에 귀속시켜 일원화한다.[* 단일대당(單一大黨) 조직을 설명한 부분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임시정부도 해체'''한다."라는 의견이 제안되었고, '''김원봉과 의열단은 이 주장에 대해 찬성'''하였다. 그 결과, 1935년 7월 4일 김원봉은 독립운동 단체 9개를 묶어 출현한 [[민족혁명당]]의 총서기가 됐다. 김원봉을 중심으로 민족혁명당이 결성되자, 거기에서 [[조소앙]]은 정강, 정책 기초 위원으로 참가하여 [[삼균주의]]를 민족혁명당의 지도 이념으로 채택하도록 하였다. 김원봉이 조소앙의 삼균주의에 공감했던 것과는 별개로, 김원봉 본인이 삼균주의자였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조소앙은 3개월 뒤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계가 민족혁명당의 중심이 된 데 불만을 품고 당을 탈당하여 다시 한국독립당으로 입당했으며,[* 그래서 한국독립당에도 조소앙의 흔적이 있다.] '''삼균주의가 [[공산주의]]나 [[아나키즘|무정부주의]]와는 다르다'''는 점을 강조해왔기 때문이다. 이처럼 민족혁명당에는 사회주의 계열뿐만 아니라 초기에는 민족주의 계열도 일부 참여했다. 민족혁명당 창당 멤버 중에는 [[조소앙]], [[신익희]], [[김규식]], [[지청천]] 등도 우파 민족주의 계열도 상당수 있었다.하지만 제정된 당의 강령은 사회주의적인 성향이 짙었는데, 독립 이후 토지와 중요 산업의 국유화를 내걸었다. 아울러 인민이 무장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기도 했다. 여러 계열이 모인 민족혁명당은 창당 초기부터 내부에서 치열한 주도권 경쟁이 벌어졌는데 특히 고려 공산당 출신의 상해파와 시베리아파, 중국 공산당 출신, 의열단 내 민족주의파들이 치열한 다툼을 벌였다. 결국 민족혁명당은 김원봉과 [[김두봉]]을 중심한 의열단계, 사회주의/공산주의 계열이 중심이 되었다. 김원봉과 김두봉은 각각 서기장과 조직부장이 되어 당의 1,2인자가 되었다. 민족혁명당은 단일과 통합을 기치로 창당되었지만 결국 의열단계와 사회주의 계열 중심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심지어 새로 제정된 당기 대신 의열단기가 게재되기도 했다. [[지청천]]이 이를 지적하자 김원봉의 의열단계와 지청천계가 반목하게 되었다. 이어 사회주의계와 지청천계간에 이념 논쟁과 갈등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에 주류인 의열단계와 사회주의계는 지청천을 강제 제명했다. 그러자 조소앙을 비롯한 우파 계열은 이에 반발하여 창단 두 달만인 9월 민족혁명당을 집단 탈당했다. 민혁당에 크게 실망한 조소앙은 탈당 후 한국독립당을 재건하였다. 지청천계와 조소앙계가 집단 탈당함으로써 민족혁명당은 사회주의 계열만 남게 되었고, 얼마 후 당명을 민족혁명당에서 '조선민족혁명당'으로 바꾸었다. 한편 이 당시 민족혁명당 결성을 구실로 '''임정폐지운동을 가장 극렬하게 벌인 사람이 [[김두봉]]과 김원봉이었다.''' 이미 김원봉은 1920년대초 박용만을 중심으로 한 창조파가 임시정부 해체를 주장할 때, 박용만의 행동대장 격으로 활동한 바 있었다. 당시 일제 고등경찰 기록에 따르면, 1921년 박용만이 북경파를 이끌고 상해를 방문하여 임시정부 재직자들의 총사퇴를 요구하는 연설회를 개최했는데, 이 때 비상수단으로 사용하기 위해 폭탄·권총까지 휴대했다는 설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세월이 흘러 거물이 된 김원봉은 김두봉과 더불어 1935년 창단된 민혁당의 주도권을 장악한 후, 민혁당을 제외한 모든 단체를 해산할 것을 주장하면서 임시정부에 그 총구를 겨누었다. 이때문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또다시 존폐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임정폐지를 둘러 싼 논전은 임정 여당 역할을 자임해 온 한국독립당 내부의 분열을 야기했다. [[송병조]], 차이석, 조완구 등 일부 세력을 제외한 대다수가 민족혁명당에 참여하였고, 임정도 국무위원 7인 중 [[양기탁]], [[김규식]], 조소앙, 최동오, [[유동열]]이 민족혁명당에 참여할 만큼 대세는 민족혁명당으로 기울고 있었다. 이에 따라 한인 독립운동 진영은 임정지지 세력과 임정폐지 세력으로 양분된 형세를 띠었다. 임정지지 세력은 [[송병조]], 차이석, 조완구만 남을 정도로 수세에 몰렸지만, 그들은 '''여기서 임시정부가 문을 닫으면, 1919년에 만들어진 대한민국이 다시 망하는 것'''이라며, 임시정부를 끝까지 사수할 것임을 천명했다. [[김구]]와 조소앙, [[이동녕]] 역시 임정 고수 결의를 표명했다. 이로써 임시정부는 해체 위기를 넘기며 점차 상황이 호전되어 갔다. [[http://db.history.go.kr/item/level.do?levelId=hdsr_011_0080_0030|#]]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