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원봉/일생 (문단 편집) === 6.25 전쟁 참여 === 전쟁에 반대하였다는 일부 주장이 있지만[* 오히려 전쟁에 누구보다도 찬성하며 당장 침공하자고 했다는 주장도 있다] 어쨌든 김원봉은 남침을 목숨 걸고 막지 않았고 결국 김일성의 남침 명령에 순응하였다. 김원봉은 6.25 전쟁 발발 이후에는 북한의 전쟁 수행 노력에 적극 협력하였다. 6·25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 위원회에서 공화국 남반부 해방 지역 군면리 인민위원회 선거 중앙 선거 지도부가 구성되었는데, 김원봉은 9명의 '''지도부 중 첫 번째'''로 이름을 올렸다. 이 '공화국 남반부 해방 지역 군면리 인민위원회 중앙 선거 지도부'가 하는 일은 북한이 점령한 남한 영토에서 '''대한민국 정부의 행정 기관을 철폐'''하고 '''북한 통치 체제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1948년 4월까지 남한에서 활동하면서 남한의 사정에 밝고, 한국 내 좌익 세력과 가장 깊게 연계되어 있던 김원봉이 이 자리에 오른 것은 당연했다.] 김원봉은 국가검열상의 지위로 '''6.25 전쟁 중에 남파 간첩을 훈련하고 파견하는 것을 직접 지휘'''했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4012600329202011&edtNo=1&printCount=1&publishDate=1954-01-26&officeId=00032&pageNo=2&printNo=2408&publishType=00020|1954년 1월 26일 경향신문]]은 "평양에 본적을 둔 간첩 김춘옥 외 4명을 체포해 이들을 취조한 결과, 김춘옥은 ''''6.25 전쟁 당시 김원봉의 직접 지휘하에 대한민국의 경제 혼란, 선거 방해, 모 정당 와해를 목적으로 남파되었다''''고 진술"한 내용의 기사를 보도했다. 기사에 따르면 6.25 전쟁 발발 이전부터 김원봉으로부터 간첩 훈련을 받았다고 진술되어 있다. 또 전쟁 기간 동안 김원봉은 ''''군사위원회 평안북도 전권 대표''''로서 평안북도에서 '''북한군의 군량미를 생산'''하는 일을 책임졌다. 1952년 3월 19일 김원봉은 북한이 '''6.25전쟁 공훈자'''에게 수여하기 위해 만든 훈장인 ''''[[훈장(상훈)/북한#s-2.4.2|로력훈장]]'의 첫 번째 수상자'''가 되었다. 당시 [[로동신문]]은 "조국의 통일 독립과 자유를 위하여 미제의 약탈자들과 그 주구들을 반대하는 정의의 '''조국 해방 전쟁에서 공훈'''을 세운 정권 기관 및 당 단체 지도일군들에게 공화국 훈장을 다음과 같이 수여한다"고 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4/03/2019040303608.html|#]] 1952년 5월 11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국가검열상에서 해임, 최창익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로동상에 임명되었다. 전시(戰時) 로동상으로서 김원봉은 노동력의 전시 동원과 무기 생산 등을 관장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