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공산당 자금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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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1차 자금사건
3. 2차 자금사건
4. 사건 이후
5. 사건의 평가


1. 개요[편집]


한인사회당이 코민테른(국제공산당)에게 받은 운동자금을 이르쿠츠크의 전러한인공산당(全露韓人共産黨)이 탈취하여 일어난 1차 자금사건과 이동휘의 측근인 한형권·김립이 국제 공산당에서 받은 자금을 사회주의 운동가들에게 나눠주기 위해 유용한 2차 자금사건으로 나눌 수 있다.


2. 1차 자금사건[편집]


한인사회당은 1919년 4월 25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대회를 열어 코민테른 가입을 결정하고 박진순 등 대표 3명을 모스크바의 코민테른에 파견하여 선전비로 400만 루블[1]을 받아오게 했다. 그런데 이들이 모스크바를 떠나 이르쿠츠크에 머무르는 사이 문제가 일어났다.

대표들이 머물기 몇 년 전 볼셰비키당 이르쿠츠크 지부인 "이르쿠츠크 공산당"의 한인들이 "전러한인공산당"을 조직했는데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당시 볼셰비키당에서 파견한 보리스 스미야스키의 지원 아래 자신들만이 유일한 시베리아 한인들의 정통적인 당이라고 선언한 바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9월 10일 한인사회당 일행이 이르쿠츠크에 오자 정통성을 지닌 우리 당이 마땅히 코민테른 자금을 가져야 한다며 자금을 탈취했다.

당시 임시정부 국무총리이자 고려공산당원이었던 이동휘는 그 해 11월에 이 소식을 듣자 다시 박진순을 모스크바에 파견하여 이르쿠츠크파의 자금탈취 횡포를 규탄했고 "한인사회당을 끝까지 지원해 달라"는 내용의 탄원서, "상해 임시정부는 실질적으로 한인사회당의 정부이며 한인사회당은 공산주의 운동을 위하여 심신을 바치겠다"는 내용의 서약서를 보냈으며 한인사회당은 유일한 조선사회주의 정당으로 인정받아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3. 2차 자금사건[편집]


이어서 이동휘는 1920년 1월 하순에 자신의 측근 한형권을 모스크바에 파견하였고 한형권은 1922년 겨울까지 모스크바에 머물러 레닌과 비밀협정을 성취시켜 볼셰비키 정부에서 금화 200만 루블을 새로 지원받았다. 1920년 10월 그는 이중 60만 루블을 우선 받았지만 60만 루블을 상하이까지 나르기 힘든 탓에 20만 루블은 모스크바에 맡기고 40만 루블만 상해로 가져왔다.[2]

상해로 가던 사이 그는 치타에서 한인사회당 대표로 코민테른이 파견해서 가는 김립과 만나 이 자금을 임시정부에 안 보내고 한인사회당의 운동자금으로 쓸 것을 협의하였다. 12월에 많은 운동가가 김립이 상해로 가져온 코민테른 자금을 독립자금으로 썼지만 이 자금의 소재를 둘러싸고 상해 임시정부와 한인사회당 사이에 알력이 일어났다.

임시정부 관계자는 이동휘에게 자금관계의 경과보고를 요구했지만 이동휘는 이에 불응했다. 그리고 김립이 코민테른의 일부 자금을 개인적으로 쓴다는 소문이 퍼졌다. 1921년 1월 이동휘·김립·한형권 등은 한인사회당 대표회를 소집하여 자금분쟁과 관련한 최종적 태도를 확정하고 마침내 이동휘는 국무총리직을 사임했다.


4. 사건 이후[편집]


1차 자금사건은 사회주의 운동 세력 안의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의 내부노선 투쟁을, 2차 자금사건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안에서 한인사회당의 사회주의 노선과 민족주의 노선의 분열을 불렀다. 특히 2차 사건으로 민족주의 세력이 사회주의 세력인 한인사회당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내쫓았고 임정 주류세력이 사회주의 계열을 크게 적대했다. 또 국제적으로 임시정부의 국제적 신용을 떨어뜨려 외교적 고립과 자금난에 봉착하게 되었다. 수많은 세력들이 임정 해체 혹은 전면적인 개조를 주장하면서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했던 것도 이 사건을 일부 배경으로 한 것이다.

사건 이후 김구가 보낸 오면직노종균김립을 추격해 상하이 거리 한복판에서 암살했다.

자금의 일부가 장덕수를 거쳐 동아일보로 갔다는 설이 있지만 심증만 있다. 그리고 이 심증을 확증이라고 믿은 박열 등 아나키스트들은 도쿄에서 장덕수를 붙잡아 돈 내놓으라고 두들겨패며 린치했다. 하지만 당연히 돈은 나오지 않았다.


5. 사건의 평가[편집]


김구는 자신이 쓴 《백범일지》에 김립이 사사로이 유용한 돈을 써서 호의호식해서 정당하게 응징했다고 서술했지만 애초에 자금 출처가 국제공산당이었고 김립은 이 돈을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에게 나눠주었다. 사사로이 유용했다는 말은 뜬소문이었고 김립의 입장에서는 아무 잘못이 없었다. 김립 문서 참조.

공산당을 좋게 생각하는 편이 아니었던 안창호마저 국제공산당 자금을 왜 임시정부에서 써야 하느냐고 이견을 제시했으나 김구는 한 발 더 나아가 국제공산당 자금을 임시정부 주류 세력에 주지 않았다면서 김립을 숙청한 데 이어 이동휘를 내쫓기까지 했다.

이렇게 된 이유를 생각해 보면 안창호는 임시정부와 공산주의는 별개라고 보았지만 김구는 임시정부가 공산주의까지 대표한다고 생각한 듯싶다. 다만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 세력이 임시정부에 그리 큰 소속감을 느끼지 않았고 임시정부를 전체에 걸친 조율자나 중재자 역할로 인식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김구가 오히려 임시정부의 대표성을 과대평가하였고 과잉대응한 게 맞다.[3] 어쨌든 앞서 말했듯 이 사건 이후 임시정부는 신용이 깎였고 국민대표회의라는 독립운동 세력의 대거 이탈 등 대격변을 맞이해야 했으며 심각한 재정난을 겪어야 했다(...).

반면 반공주의 우파들은 어느 정도 필요악이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당시 소련코민테른반제국주의 투쟁자금 지원은 결코 순수한 선의가 아니었고 장기적으로는 서구 제국주의 열강들의 식민지를 명목상으로 독립시킨 뒤 궁극적으로는 자국의 영향력 하에 넣으려는 면이 컸다.[4] 실제로 코민테른은 휘하 공산당들에게 반제투쟁을 위한 초당적 협력을 허용하면서도 공산주의 선전·선동을 최우선으로 두고 궁극적으로는 내부의 우파 사상가와 중도주의자들을 제거하라는 행동 강령을 내렸고 이는 국공합작 당시 중국공산당의 행태에서도 잘 드러났다. 코민테른의 막대한 지원을 받는 공산주의자들을 놔두면 상대적으로 가난한 나머지 진영에게서 독립운동의 주도권을 빼앗아 갈 가능성이 높았고 민족주의자인 김구 입장에서는 독립운동이 아니라 일제에게서 기껏 도망쳐 나와서 다른 외세에게 또 다시 팔아넘기자는 의도로 해석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스페인 내전에서 공화파소련이 보낸 공산주의자들이 내분을 일으키는 바람에 비슷한 식으로 망했고[5] 40년대 중국의 혼란기에 중국공산당이 이런 식으로 어그로를 끌며 세력을 팽창시켰으며 독소전쟁 당시 폴란드를 위시한 동유럽에서도 진짜 반독 파르티잔들은 전후에 죄다 숙청당하고 친소 공산주의계 인사들이 그 자리를 차지[6]했던 것을 보면 이러한 해석이 반드시 극우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한국 독립운동사에서도 친소 노선을 택한 온건 좌파 독립운동가들의 상당수는 자유시 참변 등으로 피해를 보았고 후기 코민테른의 지원은 자기 말을 충실히 듣는 조선공산당에 집중되었다. 이렇게 보면 국제공산당 자금사건은 단순히 돈 때문이라기보다는 독립운동의 노선을 둘러싼 타협할 수 없는 차이 때문에 발생했던 것에 가깝다.

그러나 김구가 소련의 원조가 거짓이었다는 명백한 증거를 가졌다고 해도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한 국가는 극소수였고 임시정부를 광범위하게 지원한 국가는 소련 외에는 없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20년대 초에 소련에 사절단을 파견해 임시정부에 대한 승인과 지원을 요청하고 소련으로부터 실제 지원을 받은 바 있다. 그리고 우파 세력도 영국이나 미국, 중국의 지원을 받으면서 활동하기도 했다.

때문에 국제공산당 자금사건은 당장 한 푼이 아쉬운 시점에서 같은 목표를 공유하는 동지를 섣부르게 암살한 것을 두고 비판하는 평가와 결과적으로 소련이나 중화민국이나 외세인 것은 같은데 항일 운동을 하고자 소련에 나라를 팔아넘기는 것을 막고자 했다는 우호적인 평가가 갈리는 편이다.[7] 더 나아가 소련의 반제국주의 · 반식민 운동 지원이 선의가 아니라고 보았다면 더더욱 임시정부에서 소련의 자금을 인수해서는 안 되었다. 소련이 공산주의 독립운동에 보낸 돈을 임시정부의 것이라고 선언하는 행위야말로 임시정부를 소련의 제휴 조직으로 만드는 행위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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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40만 루블 이하라는 설도 있다.[2] 한형권의 회상에 의하면 금화 40만 루블은 20푸드의 금이였고 러시아의 단위인 1푸드는 대략 16.38 kg다. 20푸드면 327.6 kg로, 당시 금이 1온스에 20.67달러 가량이었다. 금화 40만 루블은 24만 달러에 가까운 거금이다.[3] 김구의 임정 간판에 대한 집착은 1930년대 좌우 독립운동가들이 대동단결하자던 민족유일당 운동을 파탄내는 등 이후에도 독립운동 그룹간의 통합에 큰 걸림돌로 작용했다. 확실한 자금줄도, 조직도, 실적도 없으면서 무조건 임정의 지시만을 따르라는 고압적인 자세를 유지했기 때문에 오히려 별 영향력이 없는 소수파로 전락하고 말았다. 결국 김구의 임정은 1940년대 후반에는 사실상 장제스중국국민당에 의존하는 조직이 되면서 "한국광복군 9개 준승 사항"이라는 조건을 수용해야만 했다.[4]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들과 소련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된다. 이들은 분명 소련의 식민지는 아니었고 나름 자주적인 주권을 행사했지만 소련은 이들 국가들에 필요하면 까지 동원하면서 엄청나게 내정간섭을 해 댔다.[5] 공화파가 보통 좌파라고 인식되지만 한국의 민족주의 우파 독립운동가들 중 다수는 민주주의 체제의 확고한 지지자였음을 감안하면 공화파 내 온건파의 스탠스가 독립운동세력의 우파에서 그리 멀다고는 보기 어렵다. 반면 공화파가 투쟁했던 반대편의 국민파는 민주적 가치 자체를 부정하는, 굳이 비유하자면 일제에 해당하는 파시스트 집단이었다.[6] 유고슬라비아의 요시프 브로즈 티토 정도는 제외된다. 그나마 티토는 일단은 사회주의계 인사였으며 좌우 가리지 않고 엄청나게 명망이 높은 인사였기 때문에 살아남았다.[7] 이승만의 위임 통치 청원을 두고도 미국이라는 강대국을 끌여들여 일본에 맞서고자 하는 전략적 선택이라는 입장과 반일을 빌미 삼아 미국이라는 또 다른 외세에 나라를 팔아넘기는 것이 아니냐는 입장으로 나뉘는 것과도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