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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용(친일반민족행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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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조선 후기 ~ 일제강점기 시기의 대신, 정치가, 친일반민족행위자이자 민족반역자이다.
가족으로는 유명한 이완용이 있다.
2. 생애[편집]
1855년 7월 24일 이호준의 아들으로 서울[2] 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우봉, 자는 경중이다.
1868년 돈령부 참봉, 1870년 별군직, 1885년 전라도 병마절도사, 1888년 6월 한성판윤, 같은 해 12월 영변부사, 1889년 7월 봉산군수와 홍주목사를 역임했고 1894년 형조판서를 거쳐 경무사를 역임했다.
1896년 2월 동생 이완용과 이범진 등과 아관파천을 일으켰다. 친일 내각은 붕괴했고 중심인 김홍집, 어윤중, 정병하는 살해당하고 유길준, 장박, 우범선, 이진호, 등은 도주했다.[3] 그리고 고종은 아관파천의 핵심 인물들을 신임하게 된다.
하지만 러일전쟁이 일어나고 이완용과 함께 친일로 전향한다. 여러 벼슬을 지내며 승승장구를 거듭했다. 군대 해산 직후 10여년간 했던 육군 부장에서 해임되었다. 여러 친일 단체에 가입하고 이토 히로부미의 송덕비를 세우려 했다. 한국 황태자가 일본으로 유학갈 때 함께 갔다가 1908년에 돌아왔다.
경술국치 이후 조선귀족 남작 작위를 받았고 여러 친일 단체에서 활동했다. 영친왕의 결혼식에도 참석했다. 조선총독부에서도 일하며 매년 3000원씩 수당을 받았다. 그 후 1937년 4월 도쿄 중의원 선거에 나가는 박춘금과 이선홍을 후원하기 위해 당선후원회를 조직하고 회장을 맡았다.
1938년 9월 8일 사망했다. 향년 83세. 작위는 손자 이병옥이 이어받았다.
조선총독부 정무 총감은 그의 죽음을 애석해 하며 매일일보에 이런 글을 남겼다.
이윤용 남작은 구정시대에 궁내부대신, 농상공부대신, 군부대신 등의 현관을 역임하신 분으로 일한병합 당시는 공중 고문으로 영제 이완용 후작과 함께 당시 한정 내외에서 일한병합에 관하여 중외 소란했으나, 씨는 그 사이에 있어서 시대의 대세와 내외의 객관 정세를 통찰하여 황실과 각실 간의 절충을 맡아 노력한 바 크며, 합병의 대업은 평화롭게 완성되었다. 그 공로에 의하여 남작이 수여되고 자래로 조선귀족의 중견으로 그 신망이 두터워져 소화3년(1928)에 중추원 고문에 취임하여, 탁월한 식견으로 항상 총독의 시정을 익찬하며 85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자진하여 내선일체 사상 선도에 노력을 다했는데, 이같이 급작히 서거한 것은 조선 통치상 실로 애석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3. 가족 관계[편집]
- 아버지: 이호준[6]
4. 둘러보기[편집]
[1] 현 대한민국 서울특별시[2] 당시 한양[3] 또 다른 케이스로 김윤식은 은신해 있다가 붙잡혀 유배된다. 김종한은 자리를 지킨다.[4] 첫번째 줄 왼쪽에서부터 두번째에 있는 인물이 이윤용이다.[5] 잘 보면 이병무도 보인다.[6] 당시의 실력자인 인물. 실력자 조성하를 사위로 두고 있다.[7] 이호준의 아들로 입양된다. 생부는 이호석이다.[8] 원래는 흥선군의 딸과 결혼했는데 이혼하고 김기태의 딸과 재혼했다.[9] 김기태의 딸 역시 여러 친일 행각으로 일제에게 상을 받는 등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