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호(친일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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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호의 역임지위
「펼치기 • 접기」
갑오개혁
김홍집 내각
[ 펼치기 • 접기 ]

차수제1차제2차제3차제4차
내무대신군국기무처를 통한 개혁박영효박정양유길준
농상·공무대신엄세영김가진정병하
신기선이범진
군무대신조희연안경수조희연
법무대신서광범서광범장석주
탁지대신어윤중심상훈어윤중
외무대신김윤식김윤식김윤식
학무대신박정양이완용서광범
※ 2차 내각은 출범당시 3차 내각은 특정기간을 기준으로 함.
을미사변 이후 친일성향으로 조각되어 을미개혁을 추진하였으나 아관파천 이후 고종에게 을미사적으로 불리고 처형 명령이 떨어지면서 실각한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1931년~1935년
「펼치기 / 접기」
의장
조선총독부 정무총감1
고문
민병석윤덕영이윤용
참의
칙임 참의
김관현김명준김서규김윤정남궁영
민상호박영철박용구어담엄준원
염중모유정수유진순이진호장헌식
조성근최린한규복한진창
주임 참의
고일청김도현김두찬김병규김사연
김상설김상형김영택김정호김종흡
김한규김한승박기석박종렬박철희
박희옥석명선선우순송지헌신희련
오태환유승흠유태설이경식이교식
이근우이기승이동우이명구이방협
이병렬이선호이충건이택규이희덕
장대익정관조정란교정대현정석모
최양호최윤주최연국최창조한영원
현헌현준호
참의
강필성김병원김성규김제하박상준
어윤적유성준진희규홍종철
1 중추원 의장은 조선 총독부 정무총감이 맡았다.
† 재직 중 사망.
조선총독부 중추원
1910년, 1911년~1915년, 1916년~1920년, 1921년~1925년, 1926년~1930년, 1931년~1935년, 1936년~1940년, 1941년~1945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1936년~1940년
「펼치기 / 접기」
의장
조선총독부 정무총감1
고문
민병석윤덕영
참의
칙임 참의
고원훈김관현김명준김영진남궁영
박두영박상준박영철박용구박중양
서상훈신석린어담엄준원유정수
유혁로윤갑병이겸제이범익이진호
장헌근정교원조경하조성근조희문
주영환한규복한상룡홍종국
주임 참의
강동희강번김경진김기수김기홍
김상회김신석김정석김진수김창수
김한목남백우노영환문종구민병덕
박보양박봉진박철희박희옥방의석
방태영서병조서병주석명선성원경
손재하손조봉안종철오세호원덕상
유태설이경식이근수이기찬이승우
이은우이종섭이진호이희적인창환
장석원장직상장헌근정란교정석용
정대현정해붕조병상주영환지희열
최윤최남선최준집최지환하준석
현헌현준호홍치업황종국
참의
유만겸
1 중추원 의장은 조선 총독부 정무총감이 맡았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1910년, 1911년~1915년, 1916년~1920년, 1921년~1925년, 1926년~1930년, 1931년~1935년, 1936년~1940년, 1941년~1945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1941년∼1945년
「펼치기 / 접기」
의장
조선총독부 정무총감1
부의장
박중양이진호
고문
김윤정박중양윤치호이범익이진호한상룡
참의
칙임 참의
고원훈김관현김명준김사연김연수
김영배김영진김우영김윤정김태석
김화준박두영박상준서상훈신석린
안종철원덕상유만겸유진순이겸제
이경식이계한이병길이원보장직상
장헌식정교원정란교정연기진학문
최린한규복
주임 참의
강이황권중식김경진김동준김병욱
김부원김사연김신석김원근김재환
김태집노준영민재기박지근박창하
박필병방의석서병조손창식송문화
신현구양재창원병희위정학이경식
이기찬이승우이신용이영찬이익화
이종덕임창수장용관장윤식장준영
장직상전덕룡조병상조상옥차남진
최윤최승렬최정묵최준집한익교
한정석현준호황종국
참의
김하섭문명기이승구
1 중추원 의장은 조선 총독부 정무총감이 맡았다.
† 재직 중 사망.
조선총독부 중추원
1910년, 1911년~1915년, 1916년~1920년, 1921년~1925년, 1926년~1930년, 1931년~1935년, 1936년~1940년, 1941년~1945년



조선군 훈련대 간부[1][여담]
제1대대장
이두황
제2대대장
우범선
제3대대장
이진호

경상북도 도장관
초대제1대 이진호[2]제2대 스즈키 타카시

전라북도 도장관
제2대 유혁로제3대 이진호[3]제4대 유혁로

전라북도 도지사
유혁로[4]제1대 이진호[5]제2대 이스미 나카조
[1] 대한제국으로 개칭되기 전에 없어졌기에 정확히는 대한제국군이 아니다. 후에 대한제국군 친위대로 개편되었다.[여담] 참고로 을미사변 때 일본군과 연합해서 조선군 시위대와 교전했다.[2] 1910년 10월 1일 ~ 1916년 3월 28일[3] 1916년 3월 28일 ~ 1919년 3월 2일[4] 도장관에서 도지사로 이름 변경[5] 1919년 3월 30일 ~ 1921년 8월 5일


이진호
李軫鎬
리노이에 신코(李家軫鎬)
[1]
파일:이진호.jpg
본관전의 이씨
성재(星齋)
출생1867년
조선 한성[2]
사망1946년(향년 79세)
직업군인, 고위 관료, 정치가
성향친미 ~ 친일
과거 급제무과 급제 (1882년)
1. 개요
2. 생애
3. 평가
4. 여담
5. 둘러보기




1. 개요[편집]


파일:어느 콧수염 난 추악한 친일반민족행위자의 모습.jpg
△ 이진호의 모습

"신교육 제도가 점차 정비되고 또한 학교가 보급되며"

"시대 밑 민도에 적합하게 조직적으로 교육의 진보와 보급을 이룬 것은 1910년 일한병합 후의 일이다"

이진호


"1906년에 우리 조선반도는 일한 양국 간의 조약에 의해 일본의 보호장치로 되고 여기에 통감부가 설치되었으며, 이등박문 공이[3]

처음 통감의 직임에 취임하자마자 예의 조선 정치의 개혁을 꾀하여 민중의 행복을 위해 전력하였다."

이진호


구한말 개화파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867년생. 본관은 전의이고, 호는 성재이다.


2. 생애[편집]


1867년 한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한문을 배웠고 통역관 양성소에서 영어도 배웠다.

1882년 무과에 급제했다. 미국인 군사교관 다이의 신임을 받아 계속해서 승진했다.

1894년 10월 정부가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일본군과 동학농민운동 진압에 앞장섰다.

1년 후 훈련대 제1연대 제2대대장을 맡다가 훈련대가 해산된 이후 친위대 제2대대장을 맡았다.

을미사변 직후 미국인 훈련대 교관 다이(William McEntyre Dye)와 임최수, 이도철, 이윤용, 이완용, 윤치호, 청안군 이재순 등과 춘생문 사건을 계획했다. 그는 성문을 열어주기로 했으나 문을 열어주지 않고 김홍집 내각의 중심 어윤중에게 계획을 밀고했다. 이때 친미 성향을 버렸다고.
하지만 아관파천이 일어나며 일본공사관으로 몸을 피했다가 일본으로 망명했다.

일본에서 망명하고 있을 때 유길준의 반역 계획에 협력했다.

1904년 한일의정서 때 망명자 처리 문제가 논의될 때 고종이 박영효 등의 망명자 14인의 귀국을 허가할 수 없다고 했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통감부가 세워지자 사면을 받고 대한제국 군대해산 후 귀국했다.

이후 여러 관직을 맡았다. 계속해서 친일 세력으로 활동했다.

경술국치로 대한제국이 사라지자 경상북도 장관을 지냈다. 한국병합기념장을 받고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에 참여해 여러 관직을 맡았다.

1919년 3.1 운동을 저지하려 관료와 지주 등을 모아 전북자성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여러 친일 단체에서 활동했다.

그 뒤 그는 조선 총독부의 학무국장에 취임하는데 조선총독부의 국장 급의 지위에 오른 최초의 조선인이다.

"천은의 망극은 물론이어니와 이것은 다만 자기 1인의 광영이 아니라 일반 조선인의 광영이라"

조선 총독부 학무국장에 취임할 때 이진호.


그는 식민지 교육을 강화하는데 앞장섰다.

몇년 뒤인 1929년 조선 총독부 학무국장에서 물러났다.

그는 양근환에 인해 암살된 민원식의 추도회를 열었고 그 후 조선에도 징병제를 실시 해달라고 했다.

나치 독일의 몰락 이후 일제는 모든 국민을 국민의용전투대로 편성했다. 이때 그도 박중양, 한창룡 등과 함께 활동했다.

광복 이후인 1946년 향년 79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자신이 버리고 갈아탄 미국이 일본 제국을 쳐바르고 해방자로 환영을 받으며 조선에 진주해 군정을 세우는 것까지 보고 간 것이다. 다만 해방 직후였던 1946년은 좌우익의 대립이 격심했던 혼란기였기 때문에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못하고 [4] 생을 마감했다.

사후에는 친일파로 낙인이 찍혔다.
  •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선정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는 2008년에 이진호 소유의 토지에 대해 국가귀속 결정을 내렸다.

3. 평가[편집]


"일찍부터 동양의 사정을 우려하여 일본에 의뢰해야 함을 꿰뚫어 보아 조선의 영원한 행복과 안녕을 위하여 분기한 사람."

「조선공로자명감」(1935)


여기서 그가 일제의 근대화 논리에 함몰되어 힘에 굴복함으로써 일제가 선전하는 대로 식민통치에 앞장선 전형적인 친일파였음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그가 기회주의자였고 일제의 식민통치에 앞장선 친일반민족행위자임은 틀림없다.

4. 여담[편집]



5. 둘러보기[편집]


춘생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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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최수±이도철이재순이범진이윤용
이완용윤웅렬윤치호김홍륙헐버트
다이베베르안경수이진호
취소선 표시는 거사 때 배신한 인물
※ ±표시는 거사 실패 후 사형당한 인물



[1] 창씨개명한 이름. 뜻은 이씨네 집안 진호이다.[2] 현 서울. 당시 수도.[3] 이토 히로부미의 다른 이름.[4] 알다시피 반민특위는 정부 수립 이후인 1948년 창설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