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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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조희연

제2대

신기선

제3대

안경수

제4대

조희연

제5대

이도재

제6대

조희연

제7대

이윤용

제8대

민영환

제9대

이종건

제10대

민영기

제11대

심상훈

제12대

민영환

제13대

심상훈

제14대

민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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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웅렬

제16대

민병석

제17대

민영철

제18대

신기선

제19대

이근택

제20대

이봉의

제21대

윤웅렬

제22대

민영철

제23대

이용익

제24대

윤웅렬

제25대

민영기

제26대

이윤용

제27대

이종건

제28대

권중현

제29대

이용익

제30대

심상훈

제31대

권중현

제27대

이근택

제28대

권중현

제29대

이병무



파일:독립협회 검은색 글자.svg

지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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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
초대
안경수
제2대
이완용
제3대
서재필
제4대
윤치호
간부
위원장
이완용
고문
서재필
위원
김가진
남궁억
박정양
송헌빈
안창호
오세창
유길준
윤치호
이상재
이승만


[1] 취소선 쳐진 인물은 독립협회에서 제명된 인물을 의미한다.




조선국 군부대신
안경수
安駉壽 | Ahn Kyung-soo


파일:안경수.jpg

이름
안경수 (安駉壽)
본관
구 죽산 안씨 (竹山)

성재 (聖哉)
시호
의민 (毅愍)
출생
1853년 8월 3일[1]
경기도 안성군
(現 경기도 안성시)
사망
1900년 5월 28일[2] (향년 46세)
한성부
(現 서울특별시)
직업
정치가, 관료, 무신, 통역사
소속 단체

[[독립협회|
파일:독립협회 글씨.png
]]

종교
유교(성리학) → 흑주교?
주요 경력
독립협회 초대 회장
탁지부협판
군부대신
중추원 의관

1. 개요
2. 생애
3. 여담
4.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본관은 죽산(竹山)으로 자(字)는 성재(聖哉)이다. 조선 말의 개화파 정치인이며, 친일 성향 개화파이자[3] 독립협회의 초대 회장이다. 금수회의록의 저자 안국선의 숙부이자 무용가 최승희의 남편 안막의 종조부이기도 하다.


2. 생애[편집]


1853년 음력 6월 29일 안광묵(安光默, 1832 ~ 1887)의 서자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개화에 눈을 떠 일본을 왕래하던 인물. 그러다 1887년에 최초의 주일공사 민영준통역사가 되었다. 그러나 민영준이 갑작스럽게 사임하며 3개월 만에 귀국해 별군직·장위영 영관·전환국방판 등을 지냈다. 안경수는 이 시기에 일본의 문물을 받아들이며 화약 생산을 위한 제약소 설립과 신식 화폐를 발행하는데 힘썼다.

1894년 청일전쟁이 발생하자 친일 성향의 개화파 관료로서 개혁을 추진하였다. 제1차 김홍집 내각에서는 우포도대장 겸 군국기무처회의원을, 제2차 김홍집내각에서는 탁지부협판을 지내면서 갑오개혁을 주도하였다.

그러다 1895년삼국간섭 이후에는 근왕파이자 친러파로 전향해 명성황후의 신임을 받아 경무사와 군부대신을 지냈다. 을미사변 직전 군부대신으로서 미우라 고로에게 훈련대 해산 통고를 미리 알렸고 이후 군부대신에서 해임되었고 춘생문 사건에 가담하다 실패해 징역 3년을 선고 받았다.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사면되었고 경무사와 중추원 일등의관직에 임명되었다.

서재필독립협회를 창설해 초대 회장을 맡았고 윤치호, 이상재 등과 활동하였다. 대한제국 정부의 식산흥업정책에 따라 설립된 대조선저마제사회사의 사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1898년 7월, 김재풍, 이충구 등과 함께 황제 양위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되어 주동자들이 체포되면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 뒤 박영효 등과 독립협회를 통한 복귀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당시 고종은 안경수를 용서할 것 같은 모습을 보이며 주한일본공사 하야시의 주선으로 1900년 1월에 귀국하여 공정한 재판을 받는다는 조건으로 자수하였다. 그러나 심한 고문을 받은 뒤 영선군 역모사건을 고하지 않은 죄 및 황제양위 미수사건에 관련된 죄로 교수형에 처해져 사망했다. 이후 대한제국은 안경수에게 안전을 보장했던 일본과 상당한 외교적 마찰을 빚었다. 교수형 당한 지 7년이 지나 1907년에 신원되었고 시호는 의민(毅愍)이다.


3. 여담[편집]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1883-84년 즈음, 일본에 유학하여 방직을 배우는 과정에서 흑주교와 상당히 깊은 연을 맺었다. 흑주교회에 머물며 교리도 배웠고, 장차 흑주교가 조선에도 포교되기를 희망하였다. 1890년 일본인 흑주교 포교사가 한양에 '흑주교 경성대교회' 건축 착공행사를 할 적에 그 자리에 참석할 정도였다. 이를 보도한 당시 요미우리 신문은 안경수가 흑주교 신자였다고 보도했지만, 흑주교단의 내부 자료에서 안경수가 정식으로 입교했다는 내용은 없다고 한다. 안경수가 정말로 신자가 되었는데 기록이 없을 뿐인지, 아니면 교리도 배우고 관계도 깊이 맺었지만 입교는 하지 않았을 뿐인지는 아직은 알 수 없다. 그가 정식 흑주교 신자였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정신적으로 상당히 깊게 일본화되었음을 알 수 있는 한 가지 증거라고 하겠다.


4. 둘러보기[편집]


김홍집 내각
(갑오개혁을미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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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수
제1차
제2차
제3차
제4차
내부대신
군국기무처를 통한 개혁
박영효
박정양
유길준
농상공부대신
엄세영
김가진
정병하
신기선
이범진
군부대신
조희연
안경수
조희연
법부대신
서광범
서광범
장석주
탁지부대신
어윤중
심상훈
어윤중
외부대신
김윤식
김윤식
김윤식
학부대신
박정양
이완용
서광범
※ 2차 내각은 출범당시 3차 내각은 특정기간을 기준으로 함.
을미사변 이후 친일성향으로 조각되어 을미개혁을 추진하였으나 아관파천 이후 고종에게 을미사적으로 불리고 처형 명령이 떨어지면서 실각한다.




고종의 경복궁 탈출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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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을미사변 · 삼국간섭 · 을미개혁
전개
1차 시도 (춘생문 사건) · 2차 시도 (아관파천)
관련 인물
정동파
이범진 · 이완용 · 이재순 · 이윤용 · 안경수 · 윤웅렬 · 윤치호 · 이하영 · 민상호 · 김홍륙 · 임최수 · 이도철 · 남만리 · 이규홍
친일 내각
김홍집 · 유길준 · 어윤중 · 김윤식 · 조희연 · 장석주 · 정병하 · 서광범 · 김종한
기타 인물
카를 이바노비치 베베르 ·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 이진호
관련 장소
아라사 공사관 (서울 구 러시아 공사관) · 미국 공사관 (서울 구 미국 공사관) · 경복궁
기타
한러관계 · 조선 · 대한제국 · 러시아 제국 · 미국 · 일본 제국 · 독립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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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력 6월 29일 [2] 음력 5월 1일 [3] 여기서의 친일은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일본과 친하다는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