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석(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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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임한 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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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귀족 자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제4대 부의장
민병석
閔丙奭 | Min Byung-suk


파일:Min_Byeong-seok.jpg

이름
민병석 (閔丙奭)
출생
1858년(철종 9) 12월 12일
충청도 회덕군
(현 대전광역시 대덕구 회덕동)
사망
1940년 8월 6일 (향년 81세)
도쿄부 도쿄시
직업
관료, 정치가
종교
유교 (성리학)

경소 (景召)

시남 (詩南), 의재 (毅齊)
본관
여흥 민씨
작위
조선귀족 자작
주요 경력
표훈원 총재
시종원경 겸 내대신
조선귀족 자작
이왕직 장관
제4대 중추원 부의장
비고
경술국적
친일인명사전 등재

파일:e2b9c4c1-cef1-4b6b-a406-3d6b004c4328.jpg
1909년, 순종이 순행을 마치고 돌아와 창덕궁 인정전 앞에서
친일 관료들과 기념촬영한 사진.
중앙에는 순종이 앉아있고 그 오른쪽에는 이재각, 민병석, 조중응, 김윤식, 이지용,
조민희, 고희성이 서 있으며 어진 뒤에는 이병무, 윤덕영이 서 있다.
순종황제의 왼쪽에는 이토 히로부미, 이완용, 임선준, 고영희, 송병준, 박제순이 서 있다.

1. 개요
2. 생애
2.1. 민씨 척족의 거두
2.2. 이토 히로부미를 초빙하다
2.3. 순종 납치 기도
2.4. 이토 조문 사절단
2.5. 말년
3. 자녀
4. 여담
5.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조선대한제국의 각료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


2. 생애[편집]



2.1. 민씨 척족의 거두[편집]


여흥 민씨 가문으로 1858년 12월 12일 충남 회덕(懷德)[1]에서 태어났는데 원래는 감찰공파 공조참의 민관식의 아들이지만 삼방파 민경식(閔敬植)[2]의 양자로 들어갔다.[3] 1879년 문과에 급제하여 1880년 예문관 검열을 시작으로 벼슬길을 시작하였다. 특히 1882년 임오군란 때 위험을 무릅쓰고 명성황후를 호위한 공로로 민씨 척족 중에서도 핵심에 끼기 시작했으며 이후 민씨 척족을 대표하여 탐학을 자행하였다. 1884년 성균관 대사성, 승정원 도승지를 겸임하면서 갑신정변 이후에는 민응식(閔應植)과 상의하여 장은규(張殷奎)를 일본에 밀파해 망명 중인 김옥균을 암살하려 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그런데 당시 러시아 전권 공사 웨베르가 경성에 있으면서 세력을 궁중에 부식시키려 하자 청나라는 보정부(保定府)에 구금하고 있던 흥선대원군을 돌려보내 러시아 진출에 대비하려 하였고 흥선대원군은 또 청나라의 지원을 받아 명성황후에 대항하려 하였다. 민병석은 교묘히 정쟁의 와중을 피하여 약 2년 동안 칩거하다가 1888년 10월 다시 출현하여 예조참판에 임명되었고 11월에 규장각 직제학, 12월에 동지돈녕, 1889년 3월에 강화유수 겸 육영공원 판리를 거쳐 11월에 평안감사로 임명되어 1894년까지 평양부에 머물렀는데 이 때 악화인 당오전을 무수히 발행하여 조병세(趙秉世)의 탄핵을 받았다. 재직하는 수 년 동안 순량한 백성을 죄주고 재산을 박탈하여 서민들에게는 악귀처럼 공포의 대상이었다.

1894년 청일전쟁 중에는 흥선대원군의 밀서를 받아 청나라의 장군[4]과 내통해 일본 세력을 축출하려 했으나 실패하였고[5] 1895년 초 원주에 유배되었다. 삼국간섭 이후 다시 명성황후 세력이 살아나면서 사면되었고 민씨 척족들은 특히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비명횡사한 이후로는 급격히 세력이 쇠퇴하였다. 아관파천 이후 친러 세력이 정권을 잡자 이완용이 자기와 내외종 남매간이 되는지라 군부대신, 궁내부대신, 학부대신, 철도원 총재 등 요직에 기용되었다. 자신의 척족이 점차 쇠퇴하여 권력을 떨치지 못하던 당시에도 민병석은 궁내부대신의 위치에 앉아서 과거 자신이 압박하던 일본당과 악수하여 러일전쟁 이후에도 능히 시류를 타게 된다. 대한제국기에는 탁지부대신, 표훈원 부총재, 원수부 검사국 총장, 헌병대 사령관 등의 요직 외에도 대한천일은행, 종로직조사(鍾路織造社) 등의 회사 경영에도 참여한 대표적인 관료 자본가였다. 주마등같이 동요하는 파란중첩의 조선 정계에서 민병석은 한걸음도 위험하지 않게 시종일관 권세간에 처한 인물로서 처세술에 비범한 재간이 있었다.[6]


2.2. 이토 히로부미를 초빙하다[편집]


1905년 7월 일본국 시찰을 명령받고 일본에 가서 일본국 훈1등 욱일대수장(旭日大綬章)을 수여받는다. 그런데 시찰은 명목일 뿐 사실은 운동비 10만원을 가지고 가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조선 왕실의 최고 고문으로 초빙하려 교섭에 나섰던 것이다. 그가 이토 초빙에 나선 내막은 이러한데 표훈원 총재 민병석, 법부대신 민영기(閔泳綺), 시종 원무관장 조동윤(趙東潤) 등 20여 명은 장차 그들의 세력을 공고히 하고자 일본 제도 시찰을 도모하였다. 이 때 민병석이 고종에게 비밀히 아뢰기를 "지금 일본 관리로서 한국에 와 있는 자들은 세력을 믿고 전횡하는 방자함이 극심하니 일본 원로 중 유명 인사인 이토를 초빙하여 경성에 있게 하면 가히 그런 일본 관리들의 사사로운 행동을 꺾을 수 있다"고 하였다. 고종이 이를 받아들여 몰래 일화 10만원을 민병석에게 주어 운동비로 삼게 하고 민영기, 조동윤, 중추원 찬의 민상호(閔商鎬), 외부협판 윤치호(尹致昊) 등과 함께 제도 시찰이라는 명목으로 도쿄로 가게 했으며 민병석은 스스로 뜻을 얻었다 생각하고 도쿄를 향해 출발하였다. 이후 을사조약이 맺어지자 민병석은 1905년 12월 육군 부장에 올랐고 1906년에 표훈원 총재, 시종원경 겸 내대신, 제도국 총재, 제실재정회의 의원 등을 역임하였으며 1907년 10월 대훈 이화대수장(大勳李花大綬章)을 수여받기에 이른다. 또 정미사변을 피해 영친왕, 이토 통감과 함께 일본으로 갔다가 1908년 그 공로로 서성대수장(瑞星大綬章)을 수여받았고 1909년 2월 친서를 봉정키 위해 특사로 일본에 가서 일본 욱일동화대수장(旭日桐花大綬章)을 받는다. 결국 이토를 초빙한 공로가 이 3개의 훈장 수여로 집약되어 나타난 것이었는데 그의 훈장 수여는 이토 초빙 외에도 정확히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다음과 같은 공로로 인한 것일 수도 있다.


2.3. 순종 납치 기도[편집]


1909년 1월 17일 이토와 친일 대신들은 남방 순행이라는 명목으로 순종부산까지 데리고 갔다. 이완용이 이토의 지시를 받고 비밀히 의논하여 고영희(高永喜), 이재곤(李載崑)을 유도 대신으로 삼고 민병석으로 하여금 상주케 하여 즉시 조칙을 만들었다. 다른 대신들도 전혀 모르고 있다가 조칙이 선포되자 모두들 깜짝 놀랐다. 이에 일본인들이 장차 순종을 협박하여 일본으로 데려간다는 잘못 전해진 말이 전국에 퍼졌는데 순종이 부산항에 닿자 부산에 사는 일반인들이나 상인들 수 만 명은 항구에 열을 지어 늘어서서 어가를 저지하려 하였다. 순종이 부산 앞바다에서 일본 함대를 타려고 할 때 항민들은 모두 5척~6척의 배를 몰아 군함을 둘러싸고 "폐하께서 만약 일본에 건너가신다고 할 것 같으면 신 등은 일제히 물 속에 뛰어들어 죽으면 죽었지 차마 우리 황제께서 잡혀 가시는 것은 볼 수 없다"하면서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이에 순종을 모시고 왔던 여러 대신들이 애써 타일러 겨우 그치게 되었고 1월 23일 순종은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당시 일본인들의 음모가 정말로 순종을 납치하려 했던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명목뿐인 순종 황제라도 장차 합방에 짐이 될까봐 일본에 데려다 놓으려는 계책은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방략이다. 이 계획에 이완용과 함께 민병석은 깊숙히 개입되어 있었던 것이다.

파일:민병석.jpg

1910년대의 모습


2.4. 이토 조문 사절단[편집]


민병석이 이토 초빙 운동에 헌신한 대가로 출세가도를 달린 만큼 1909년 10월 26일 만주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에 의해 이토가 저격·살해되자 가장 놀란 것도 그였다. 정부는 이토의 장례식 조문 사절로 박제빈, 김윤식과 함께 궁내부대신 민병석을 특파했다. 일본의 조정과 국민들은 크게 놀라고 슬퍼하며 국장으로 이토의 장례를 치렀는데 민병석 등 조문 사절 일행이 도쿄에 도착했을 때 일본인들은 노한 것이 아직 풀리지 않아서 살기를 띤 험악한 분위기로 이들을 대했다. 한 일본인은 경찰의 엄중한 경호망을 뚫고 이들 일행에게 협박장을 보내어 "이토가 이미 암살되었는데 무슨 놈의 조문 사절이냐"고 으르대었다. 이리하여 명색이 조문 사절인 민병석 일행은 천황 알현도 못 하고 가지고 간 국서는 일본 궁내 대신에게 맡긴채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쫓기듯이 조선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한편 고종은 이토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웃었다는데 일본 경시 呼子友一郞은 소문을 듣고 말의 근원과 진위를 조사한다고 대궐의 나인들을 심문하기에 이르렀다. 어떤 이들은 말하기를 시종 이용한(李容漢)이 고자질하여 일본인들에게 아첨하려 하였다고 전했다. 민병석은 이토의 죽음이 청천벽력 같았을 것이고 고종으로서는 을사조약을 강요하고 자신을 양위토록 한 이토의 죽음이 통쾌하였지만 한 사람의 죽음을 두고 이렇게 다른 반응를 보였던 것이다.


2.5. 말년[편집]



파일:091053476000.jpg

1916년 8월 28일 모습.

1910년 한일합방에 찬성하여 경술국적으로 지탄을 받았고, 한일합병이 되자 54세의 나이에 일제로부터 자작의 작위와 은사금을 받고 이왕직(李王職) 장관과 중추원 고문을 지냈다. 1912년 메이지 덴노(明治)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였다. 일제강점기 때에는 대표적인 조선인 대지주의 1명으로 꼽히었고 자본을 투자하여 모 회사 사장이니 고문이니 하는 직함을 가졌으나 현대 경제에 대한 지식 부족으로 재산상의 큰 손해를 입었다.[7]

고종 독살설의 핵심 인물이라는 설이 있다. 일본 궁내성 제실회계심사국 장관이었던 구라토미 유자부로(倉富勇三郞)가 송병준에게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조선 총독인 하세가와 요시미치에게 어떤 뜻을 전했고, 하세가와는 '이태왕'(고종)을 찾아가 이를 전달했으나 고종이 수락하지 않자 이를 감추기 위해 윤덕영, 민병석 등을 시켜 독살했다고 한다. 다만 송병준은 이에 대해 '윤덕영, 민병석 등이 태왕을 독살했다는 풍설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라고 밝혀 이의 진상이 명확하지는 않다. #

1933년 2월 기준 30만 원 이상의 재산을 보유할 정도로 거부였는데는데, 당시 경성사범학교 출신 교사의 초임 봉급이 40~50원이던 시절이었다. 참고로 동시기 기준으로 윤덕영의 재산은 100만 원이었다고 한다.

1925년부터 1939년까지 15년간 중추원 고문을 하였으며 1939년 중추원 부의장이 되었다가 1940년 8월 6일 일본 도쿄의 병원에서 암으로 사망했다. 노년기에 차남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고 경성지방법원 판사로 임용되는 모습까지 보고 죽었다.


3. 자녀[편집]


  • 부인 4명으로부터 아들 2명, 딸 4명을 뒀다.
    • 장남 민홍기(閔弘基, 1883~1951)는 대한제국 시기에는 황실에서 일하다가 아버지의 사후인 1940년 11월 15일 자작 작위를 습작했고, 남동생 민복기와 무려 30세나 차이가 난다. 거의 아버지와 아들 수준의 나이차인 셈.
    • 차녀 민임원(閔壬媛, 1911~?)는 일본인들이 다니는 학교에 재학하며 글재주가 뛰어났다고 하고, 1929년 당대의 부유층들과 귀족들이 결혼식을 올리던 조선호텔에서 결혼했다고 한다. 이후 근황은 불명. #
    • 차남 민복기(閔復基, 1913~2007)는 일제강점기에 판사로 일하며 독립운동가에 대한 재판에 참여한 친일반민족행위자였으며, 광복 후에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관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불릴 정도로 법조계에서 출세가도를 달리다가 박정희 정권 하에서 대법원장으로 일하며 인민혁명당 사건이라는 사법살인 사건을 일으켰다.


4. 여담[편집]


  • 항렬이 매우 낮다. 1858년생인데 30세손 丙자 항렬을 쓴다. 102년 늦게 태어난 정치인 민영삼손자뻘, 129년 늦게 태어난 야구선수 민병헌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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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박영효 등이 고종의 퇴위에 협조한 대신들을 암살하려다 처벌된 사건은 이완용이 고종 퇴위를 반대하던 대신들을 제거하기 위해 조작된 사건이라는 주장도 있음.




[1] 오늘날 대전광역시 대덕구 회덕동.[2] 이 사람도 원래는 입암공파였다.[3] 민병석과 민경식은 실제로는 29촌 관계가 된다.[4] 이때 엽지초가 지휘관이었다.[5] 이 때 조선군도 일본군 소속에 있었는데, 특히 이두황이 이끄는 장위영의 군대는 일본군 소속이었다.[6] 일찍이 고종이 그를 평하기를 "민병석은 짐이 부르려고 할 때는 이미 와 있고 내칠려고 할 때는 이미 떠나 있다"라고 그의 원숙한 수완을 꿰뚫어 보았다.[7] 토지를 담보로 빌렸는지 저당잡힌 토지가 은행에 넘어갔다. 당시 언론은 이를 '토지 문서가 자기 집 문갑 속에 있지 않고 식산은행의 신세를 지게 되었다'고 익살맞게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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