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영(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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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중추원 의장
大韓帝國中樞院議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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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장 · 국회부의장



역임한 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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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귀족 자작
대한제국 중추원 의장
이하영
李夏榮 | Lee Ha-young


파일:091406459000.jpg

본관
경주 이씨[1]
출생
1858년 8월 15일
경상도 기장현 동면 이천리
(現 부산광역시 기장군 일광읍 이천리)[2]
사망
1929년 2월 27일 (향년 70세)
경기도 경성부
(現 서울특별시)
직업
통역관, 외교관, 정치가, 기업인

치행 (致行)

금산 (琹山)
종교
무종교 (무신론)
작위
조선귀족 자작
비고
을사삼흉[3]
친일인명사전 등재

1. 개요
3. 평가
4. 기타
5. 같은 가문의 일원인 인물 목록
6. 같이보기



1. 개요[편집]


구한말의 외교관이자 정치가, 관료이다. 또한 일제강점기 시절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을사삼흉[4]이라 부르기도 한다. 1858년 음력 8월 15일 생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관이다.

을사조약 당시에 표면상으로는 반대를 했으나 찬성으로 입장을 바꾸었고 이후 조선귀족 자작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에서 고문으로 지내는 등 친일 행보를 이어갔다.


2. 생애[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이하영(1858)/생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 평가[편집]


이하영이 미국 정부로부터 백만불(현재 원화로만 계산해도 11억 원)을 당겼다는 것 자체가 불가사의한 일이다. 김옥균은 그로부터 불과 3년 ~ 4년 전 일본에 무상 차관을 빌리러 갔다가 실패했고, 차선책으로 국채 발행을 시도했지만 모두 허사였다. 게다가 그 돈을 써서 미군을 빌려온다?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다.

어쨌든 이하영이 미국에 돌려주지 않은 16만 불 중 얼마를 비상금으로 놔뒀는지는 몰라도, 당시 조선으로서는 막대한 돈이었을 텐데 그 행방이 투명하지 않다. 하여간 고종이 목돈을 만들라고 사람을 보내면 곱게 오는 경우가 없었다. 원래부터 부패 집단인 수구파들은 고사하고, 갑신정변을 말아먹은 김옥균 역시 1882년 제물포 조약 직후 일본에 가서 받은 17만 엔을 귀국해서는 수중에 한 푼도 안 남았다고 하는 걸 보면, 용처가 개혁을 위한 군자금이었다고 해도 불투명하다는 지적을 면할 수 없고(한성순보를 창간하는데 썼다고도 한다), 결과적으로 개혁에 독이 됐다. 당시 아직 입장을 정하지 않았던 많은 중도적 정부 인사들마저 등 돌리게 만들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1884년 무상 차관을 준대서 김옥균이 일본에 갔건만 수구파들이 뒤에서 방해(비자금 루머 퍼뜨림)했고 결국 일본 정부한테 찬바람을 맞았었다. 1882년 임오군란 역시 불량미라는 불투명한 재정 집행이 도화선이 된 참사였다. 리더라는 사람들이 이 모양이었던 구한 말을 돌이켜볼 때 고종 옆에 있었던 인간들에게 근대화를 믿고 맡기기에는 경제적 식견이나 정치적 리더로서의 도덕성, 정치력 그 어떤 것도 부족하게만 보인다.

이하영은 2002년 친일파 708인 명단에, 2007년 대한민국 친일 반민족 행위 진상 규명 위원회의 친일 반민족 행위 195인 명단에 올랐다. 2008년 민족 문제 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 인명 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에도 선정됐다.

4. 기타[편집]


  • 영화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에서 최형배(하정우) 시골집 벽사진의 주인공이다. 찢어지게 없는 집에 태어나서 온갖 우연의 연속으로 출세 후, 가족들에게 벼슬을 안겨주었고, 게다가 자기 회사에 정계 거물들을 주주로 앉혀놓고 빽으로 성공한다는 방식도 영화 내용과 비슷하다. 윤종빈 감독이 알고 사진을 썼는지는 미지수.

  • 미스터 션샤인의 빌런, 이완익의 모티브 중 하나이기도 하다.[5]

  • 하지만 이하영은 1988년에 발간된 경주 이씨 대종보나 1999년에 편찬된 경주 이씨 상서공파세보에는 이름이 지워져 있다. 즉, 경주 이씨 대종보에서는 그의 증조부인 이흥혁(李興赫) 아래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며, 상서공파세보에서는 증조부 이름조차도 보이지 않는다.

  • 일뽕들 사이에서 최근 들어 추종하고 있는 인물이기도한데, 밑바닥에서 시작해 고위직 친일파로 출세해서 성공했다는 점 때문에 자기들도 밑바닥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과 함께 일뽕/비판 문서에도 나와있다시피 식민지 시대에 대한 환상과 식민지 수혜론에 대한 정당한 비판의 반발로 추종하고 있다.

5. 같은 가문의 일원인 인물 목록[편집]


  • 이항복
  • 이회영[6]
  • 이시영[7]
  • 이하영[8]
  • 이종찬(손자)
  • 이종걸[9]


6. 같이보기[편집]



경술국치
庚戌國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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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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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7조약
관련자

이완용 · 임선준 · 조중응 · 고영희 · 송병준 · 이재곤 · 이병무 · 이토 히로부미
경술국치
관련자

이완용 · 윤덕영 · 민병석 · 박제순 · 고영희 · 조중응 · 이병무 · 조민희 · 데라우치 마사타케
기타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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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문서
식민지 · 강점기 · 병합
[a] 박영효 등이 고종의 퇴위에 협조한 대신들을 암살하려다 처벌된 사건은 이완용이 고종 퇴위를 반대하던 대신들을 제거하기 위해 조작된 사건이라는 주장도 있음.



  • 윤치호[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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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백사공파 11세손. 35세손 '榮'자 항렬이다.[2] 경주 이씨 집성촌이다.#[3] 을사조약 당시에는 중립을 지키거나 반대하였지만 후에 친일로 전향한 민영기, 이하영과 함께 고종을 압박한 이재극 이렇게 3인을 통틀어 말하는 용어로 정식 학술 용어는 아니다.[4] 이하영, 민영기, 이재극[5] 다만 이완익은 1870년대에 친일파로 전향했으며, 을사늑약이 체결되기도 전인 1904년에 죽었다.[6] 오성 이항복의 후손으로 항렬의 돌림자가 '榮'이다.[7] 오성 이항복의 후손으로 항렬의 돌림자가 '榮'이다.[8] 오성 이항복의 후손으로 항렬의 돌림자가 '榮'이다.[9] 이회영의 손자 이다.[10] 역시 구한말에 영어를 습득한 인물이며 둘 다 친일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