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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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임 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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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귀족 남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민상호
閔商鎬 | Min Sang-ho


파일:민상호-1.jpg

이름
민상호 (閔商鎬)
초명
민주호 (閔周鎬, Min Chou-ho[1])
본관
여흥 민씨 (驪興)
출생
1870년 6월 3일(고종 7년)
한성부
(현 서울특별시)
사망
1933년 9월 5일(향년 63세)
직업
관료, 정치가
종교
유교 (성리학)
-> 불교
국적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제강점기 조선
소속 단체

[[독립협회|
파일:독립협회 글씨.png
]]

작위
조선귀족 남작
묘소
경기도 이천시 마장면 장암리
주요 경력
독립협회 위원
경기도 관찰사
궁내부 특진관
조선귀족 남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찬의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1. 개요
2. 상세
3. 생애
4. 둘러보기


파일:민상호-2.jpg

민상호 초상화[2]


1. 개요[편집]


閔商鎬
(1870-1933)

구한말 시기의 관료로 홍영식 이후 우정사업의 발전에 이바지했지만, 조선귀족 남작의 작위를 받고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전락한다.

본관은 여흥 민씨. 친부는 민치억이나 민치덕에게 입양되었다.


2. 상세[편집]



파일:민상호-3.jpg

친미 성향의 온건개화파 관료로 1870년 한성부 출신이다. 외교관으로 활동하다 정동구락부의 일원으로 합류했고 윤치호, 민영환 등과 교류했다.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했고, 김홍집, 유길준, 정병하 등을 중심으로 한 친일 내각을 성립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친미/친러 세력과 춘생문 사건을 일으켰다. 하지만 춘생문 사건이 이진호 등의 밀고로 실패로 끝나자 다시 아관파천을 일으켜 정동파, 친미/친러 세력이 주도권을 잡는데 기여했다. 1900년대에는 친일파로 전향해 일제조선 강제 병합에 협조했고 이후 조선귀족 남작, 중추원 고문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3. 생애[편집]


1870년, 한성에서 출생하였다. 5세 무렵인 1875년부터 가정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다. 1883년 13세 때 영어 통역관을 양성하기 위해서 통리기무아문에 부설된 동문학에서 잠시 수학하였다. 이후 1885년경 상하이 중서학원으로 유학하였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1887년 메릴랜드 농과대학에 입학[3]하였다. 1888년 박정양의 권유로 귀국하여 내무부 주사에 임명되었다.

1891년 증광시에 급제한 뒤 1894년 외무 참의, 1895년 궁내부 참서관 겸 외사과장, 1896년 외부 교섭국장 등을 역임하였다. 1896년 학부 협판과 농상공부 협판을 지냈다. 이듬해부터 1년 7개월 동안 영국·독일·러시아·이탈리아·프랑스·오스트리아 등의 주차 공사관 1등 참서관으로 근무하였다. 이 시기에 친미 개화파의 사교모임인 정동구락부의 일원으로 민영환, 윤치호, 이상재 등과 정치적 목적을 공유하며 교류하였다.

1895년 11월 28일 친미·친러 세력이 친일정권을 타도하기 위해서 일으킨 '춘생문 사건'에 연루되었다. 거사 실패 후 잠시 밀려났으나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을 성사시킨 뒤 정동파 세력이 주도권을 잡는 데 기여하였다. 이어서 친미파 중심의 상승 분위기를 타고 결성된 독립협회 운동에 참여하였다. 1896년 7월 독립협회 결성을 주도하고 위원으로 선출된 뒤 근대 개혁을 위한 세력 결집과 계몽운동에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1897년 2월 영공회 2등 전권위원을 지냈고, 1898년 10월 외부 협판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농상공부 협판, 농상공부대신 사무서리를 겸직하였고, 1899년 한성부 판윤과 경무사 서리를 역임하였다. 1900년 1월 학부 협판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11월에 통신원 총판에 임명되어 통신기관의 정비와 우정사업의 확장에 기여하였다. 1901년 2월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훈3등 태극장을 받았다.

1902년 9월부터 1907년 9월까지 육군 참장을 지냈다. 1904년 3월 이토 히로부미가 일본의 특파대사로 한국에 오자 영접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훈2등 서보장을 수여하였다. 1905년 7월부터 2개월 동안 일본 시찰 사무원 자격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1906년 5월 제도국 총재, 8월에 경기도 관찰사, 11월 궁내부 특진관에 각각 임명되었다. 1907년에는 규장각 지후관과 수학원장을 지냈다.

1908년 9월에는 대만과 조선의 식민화를 보조하고 촉진하기 위해 일본에서 조직된 동양협회에 가입하여 50원을 기부하였다. 1910년 일제의 강제 병합조약 체결로 국권이 넘어간 뒤,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1915년 9월 조선 지배 5주년을 기념하여 개최된 조선물산공진회 경성협찬회의 발기인 및 특별회원으로 참여하고 50원을 출연하였다. 1917년 친일 불교단체인 불교옹호회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1918년 12월부터 1921년 4월까지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고문을 지냈다. 1921년 4월 28일부터 1933년 9월 5일 사망할 때까지 중추원 참의로 재임하면서 일제의 식민지배에 적극 협력하였다.


4.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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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메릴랜드 농과대학 입학 당시 학적부 영문명[2] 휘베르트 보스, 1898년[3] 이 때 민상호와 함께 입학한 사람은 한국인 최초로 미국 대학을 졸업하게 되는 변수(1861)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