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순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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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귀족 공작[1]

대한제국 제7·9·13·15대 의정
심순택
沈舜澤|Shim Soon-taek


파일:Shim Soon-taek.jpg

출생
1824년(순조 24)
사망
1906년(고종 9) 2월 25일
작위
청녕공(靑寧公)
시호
문충(文忠)
본관
청송 심씨

치화(穉華)
종교
유교
직업
정치가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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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문관 검열(한림)
옥당(홍문관 부수찬 ~ 홍문관 직제학)
안변군 군수
예방승지
이조참판
충청도 관찰사
형조판서
예조판서
세자시강원 좌빈객
세자시강원 우빈객
이조판서
성균관 대사성
한성부 판윤
경리통리기무아문사(經理統理機務衙門事)
종묘제조(宗廟提調)
판의금부사
의정부 좌참찬
예문관 제학
홍문관 제학
판돈녕부사
우의정 겸 총리군국사무
좌의정
영의정
영의정 겸 내의원 도제조
영의정 겸 총리내무부사(총리대신)
영의정 겸 총리대신
영돈녕부사
영의정 겸 친군영 도제조(親軍營都提調)로서, 병조판서와 통위사(統衛使)를 특별히 겸직
영중추원사
궁내부 특진관
대한제국 초대 의정
궁내부 특진관 겸 태의원 도제조
총호사
대훈위에 책록되고, 이화대수장을 수여받음
기로소 · 사궤장
영돈녕원사
대한제국 귀족 공작
청녕공(靑寧公)

부모
부친 - 심의린(沈宜麟)
모친 - 의령 남씨
부인
정부인 - 한산 이씨
계부인 - 능성 구씨
자녀
(양자) - 심상진(沈相璡)[2]
장녀 - 안동 김씨 김병식(金炳軾)의 처
차녀 - 전주 이씨 이중철(李重轍)의 처
3녀 - 한산 이씨 이상규(李尙珪)의 처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조선, 대한제국의 문신이다. 고려말 위위시(衛尉寺)의 승(丞:종 6품) 심홍부로부터 22세손이다. 1906년 양반 사대부 중 유일무이하게 대한제국 공작(청녕공, 靑寧公)에 봉작되었다. 대한(大韓)이라는 국호를 주창한 최초의 인물이다.


2. 생애[편집]


1850년 문과에 급제, 1852년 한림초시에 합격하여 1853년 홍문관 교리, 1857년 안변군 군수, 1861년 부제학으로 이조참의가 되었으며, 1862년(철종 13) 예방승지, 1874년(고종 11) 충청도 관찰사를 거쳐, 1878년 예조·형조·이조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에 도봉소 당상으로 있었고 군란의 책임을 지고 파면되었다.

이후 1884년 우의정, 그 뒤 좌의정을 역임하였고,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난 뒤 새롭게 조직된 민씨 정권에서 영의정에 올랐다. 영의정으로 병조판서와 친군영 도제조를 겸하였다. 심순택은 조선에 대한 이권을 둘러싼 청일 양국의 분쟁 사이에서 정치적 고충을 겪었고, 1894년 갑오농민전쟁 발발을 계기로 조선침략의 명분을 찾기 위해 조선 주재 공사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가 강압적으로 내정개혁을 요구하자 사표를 제출했다.

"고종 34년 정유년(1897년) 9월에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심순택(沈舜澤)이 문무의 관리들을 거느리고 황제의 칭호를 올릴 것을 청한 결과 17일 계묘일(癸卯日)에는 천지에 제사를 지내어 고한 다음에 황제의 지위에 올랐다. 나라 이름을 대한(大韓)으로 정하고 광무(光武)라는 연호(年號)를 사용하였다."

- 고종실록


1896년 아관파천 직후 보수적 새 정부에 참여하여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고, 1897년 대한제국의 수립과 함께 새로이 의정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다가 공홍식 옥중살해사건이 계기가 되어 독립협회의 탄핵을 받기에 이르렀다.

벼슬을 그만둔 뒤 국정은 점차 일본의 주도권 하에 드는 망국에 들게 되었으며,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당시 원로대신들인 기사에 있던 대신들은 특진관 조병세를 위시하여 모두 울면서 조약반대를 하였다. 특히 조병세 등 수 명이 자결하고 각처에서 의병이 일어났으며, 특히 심순택은 매국노를 규탄하고 원로대신들의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한다고 상소하였다. 1906년 고종이 '나라의 큰 공로가 있는 원로로서, 심순택을 특별히 공작(公爵)에 봉하라' 는 조령(詔令)을 내려, 심순택을 청녕공(靑寧公)에 봉하였다. 공작에 봉작된 지 5일후에 사망하니, '문충(文忠)'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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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제가 내린 조선귀족이 아니라, 경술국치 이전에 순수 공적에 따라 받은 귀족 작위이다. 조선귀족은 매국의 보상 개념으로 받은 것이기에 대한제국 귀족과 반드시 구별해야 한다.[2] 동생 심이택(沈履澤)의 차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