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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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임한 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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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참정대신
박제순
朴齊純 | Park Che-soon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5px-Park_Che-soon.jpg

출생
1858년 (철종 9) 12월 7일
경기도 용인군 수여면
(현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사망
1916년 6월 20일 (향년 57세)
경성부
(현 서울특별시)
노화로 인한 사망 / 병사
직업
정치가, 외교관, 법조인
본관
반남 박씨 (潘南)

평재 (平齋)
재임 기간
의정부 참정대신
1905년 11월 28일 - 1907년 5월 22일
임시서리 내각총리대신 사무[1]
1910년 5월 20일 - 1910년 6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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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유교 (성리학)
작위
조선귀족 자작
부모
부 : 박홍수
모 : 대구 서씨
배우자
고씨
자녀
슬하 2남
장남 : 박부양 (朴富陽)
차남 : 박이양(朴彝陽)
주요 경력
외부대신
농상공부대신
전라도관찰사
충청도관찰사
조선귀족 자작
비고
을사오적, 경술국적
친일인명사전 등재


1. 개요
2. 약력
4. 평가
5. 기타
6. 가족 관계
7. 어록
8. 대중매체
9. 둘러보기



1. 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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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순종이 순행을 마치고 돌아와 창덕궁 인정전 앞에서 친일 관료들과 기념촬영한 사진.[2]

"할아버지는 대체 왜 자결하지 않으셨는가. 왜 후손들을 이다지도 욕되게 하는가."

박제순의 친손자 박승유[3]

대한제국의 참정대신. 조선과 대한제국의 정치가, 유학자, 외교관, 친일반민족행위자.

조선 후기의 친청 개화파로 활동하다가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했고 1905년 을사조약 체결 당시에는 외부대신(현재의 외교부장관)으로서 대한제국의 외교를 담당하고 있었으나 "나는 모르겠오, 마음대로 하시오."라는 등의 자포자기한 태도를 보여주며 을사오적 중 1명이 되었고[4] 이후 1910년 경술국치내부대신(현재의 행정안전부장관)으로서 또다시 한일병합조약에 동의하며 경술국적이 되었다.


2. 약력[편집]




3. 생애[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박제순/생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평가[편집]


강직하고 명예롭고 좋은 사람이다. 아이디어가 많다. 의지가 강하고 용기가 있다. 뛰어난 주청 공사였고, 중국어를 할 줄 안다. 다소 보수적이다.

호러스 뉴턴 알렌


을사오적경술국적에 속하는 친일반민족행위자을사조약에 찬성한 이후로 한일병합조약에 찬성하는 등 친일 행보를 보여 사후 오랫동안 지탄을 받았고 을사조약 당시의 무책임한 태도는 비난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일설로는 을사조약 체결에 상당히 부정적이거나 반대하였던 입장으로도 알려졌다. 분명 처음에는 대세를 안다고 말하면서도 반대한건 맞으나 이토 히로부미가 약간의 겁을 주자 "마음대로 하라"라는 식으로 선회해서 결국 체결 도장을 찍어버렸다. 외교 담당인 외부대신이라는걸 생각하면[5] "마음대로 하라"라는 태도는 변명도 되지 못한다.[6] 이는 경술국치 때도 마찬가지인데 그는 계속 무책임으로 일관했고 그의 무책임은 그를 추악한 매국노로 만들었다.

"아, 4천 년의 강토와 5백 년의 사직을 남에게 들어 바치고 2천만 생령들로 하여금 남의 노예 되게 하였으니, 저 개돼지보다 못한 외무 대신 박제순과 각 대신들이야 깊이 꾸짖을 것도 없다."

장지연


"할아버지는 대체 왜 자결하지 않으셨는가. 왜 후손들을 이다지도 욕되게 하는가."

박제순의 친손자 박승유


1905년 10월 이전까지는 친일 인사보다는 반일 인사에 가까운 인물으로 수구파, 친청파로 분류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을사조약 당시 강압에 못 이겨 찬성표를 내면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비판받기 시작했으며 1905년 11월 22일 나라외교권을 박탈당하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참정대신으로 승진하며 백성들이 강하게 반발하게 된다. 장지연"아, 4천 년의 강토와 5백 년의 사직을 남에게 들어 바치고 2천만 생령들로 하여금 남의 노예 되게 하였으니, 저 개돼지보다 못한 외무 대신 박제순과 각 대신들이야 깊이 꾸짖을 것도 없다"라며 박제순을 비롯한 을사오적들을 강하게 규탄하였다. 오병서 전 주사는 "모든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 오적을 죽여야 한다고 말하며 성토하는 상소를 연명으로 계속 올리고 충성스럽고 절의가 있는 많은 선비들은 자살까지 함으로써 노복이 될 수 없다는 뜻을 보였으니 저 무리들은 마땅히 사형에 처해야 함은 변론할 필요도 없이 알 수 있습니다"라며 크게 비판했다. 거기다 이완용 당시 학부대신의 견제와 일진회를 필두로 한 탄핵 요구까지 이어지며 불명예스럽게 참정대신 직에서 사임하게 된다.

다만 경술국치 이전까지는 완전한 친일파라고 보긴 어려운 것이, 고종이 이완용송병준 등 강성 친일파 세력에게 몰릴 때 그나마 고종의 편이 되어준 인물이다. 헤이그 특사 사건 전 박제순과 상의를 거쳤다는 증언이 있고, 이완용이 "고종을 그대로 두면 정부 대신을 빈번하게 경질해서 친일 내각이 붕괴할 수 있다"면서 "앞으로는 내각이 일치협력해 황제에게 대항해야 한다"라고 주장할 때 응하지 않았으며, 송병준을 필두로 한 일진회 세력은 '박제순 내각이 덜 친일적이다'며 박제순 내각에 대한 탄핵을 추진하기도 했다. 이 시기 시마네현 고시 제40호에 대해 "독도는 일본 땅과는 무관하니 철저히 조사 후 보고하라"라고 하기도 했다. 본인의 무책임으로 인해 체결된 을사조약으로 인해 어떤 항의도 할 수 없었긴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민심에게는 을사오적 방조로 인해, 일본과 친일파 세력에게는 고종 편을 들었다는 것 때문에 사회 전반에서 압박을 받게 된다. 그 결과 박제순이 사임하고 그 자리를 완전한 친일 내각이 채워지게 되며 대한제국은 완전히 끝나버리게 된다.

이 시기부터는 박제순 본인도 완전히 희망을 내려놓았는지 집에 들어박혀 은둔하다 경술국치 시기 내부대신으로써 무력하게 찬성표를 던졌고, 이후에는 빼도 박도 할 수 없는 친일파가 되어버린다.


5. 기타[편집]


  • 서예에 능했다고 한다.
  • 성균관 대사성직을 맡은 적이 있으며 이완용도 이 자리에 있었다. 이는 고종시대 고종과 왕비 민씨가 매관매직으로 한성부 판윤 부판윤, 성균관 대사성 같은 품급이 높은 직위들을 1년에 수십번씩 팔아먹었기 때문이다. 특히 삼정승 의정부 대신같은 직위는 실권이 없고 직제 개혁으로 6조판서직위도 유명무실해지나 내무 외무 협판 선혜청당상 포도대장직위는 민씨가 독점하고 외직인 지방수령직과 직위가 높으나 실권 없는 예조 공조판서는 평균 재임기간이 2~3주로 팔아먹었다.
  • 을사조약 체결 때 박제순의 딸과 이시영의 조카는 결혼이 예정되어 있었다. 당시 이시영은 박제순에게 을사조약을 거부하라고 했으나 박제순이 체결에 동의하자 결혼을 무산시키고 박제순 집안과도 절교를 선언했다.
  • 을사조약 체결 이후 다른 을사오적과 마찬가지로 독립운동가와 민중들로부터 표적이 되어서 습격을 받았지만 목숨을 건졌으며 이를 계기로 출퇴근 때 일본군을 대동하기도 하였다. 을사오적들도 그랬지만 일부 친일반민족행위자 관료들은 을사조약 체결 이후 조선의 의사들과 민중들의 습격을 우려하여 통감부의 위임으로 일본군 호위병 2명을 동행시켰던 사례가 있었다.
  • 1906년 일본의 독도 무단 점거 사건 때 "독도는 일본 땅과는 무관하니 철저히 조사 후 보고하라"라는 지령을 내렸다.[7] 하지만 이후 한일합병조약에 동의한 점을 보면 의아한 모습.
  • 1910년 한일병합조약 당시에는 이완용 내각의 내부대신으로써 찬성표를 던지며 끝내 경술국적에도 포함되었고 변명조차 불가능한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었다.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조선총독부로부터 자작 작위를 수여받았고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고문으로도 활동하면서 6년여 동안 매년 1600원, 자작 작위와 함께 10만 원의 은사공채를 받았다. 은사공채의 원금은 5년 거치 50년 이내 상환으로 연 5푼의 이자가 매년 3월과 9월에 지급되었다.[8]
  • 경술국치 이후 경학원 대제학이 되어 유교의 진흥을 내세웠고 조선의 유교는 '충'과 '실'이 덜 강조했다고 하며 이를 보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1915년 11월 다이쇼 덴노 즉위 대례식에 참석한 후 《경학원잡지》(1915.12)에 "하늘을 바라보고 성인을 우러르면서 머리를 조아리며 절을 올립니다."라는 즉위 대례식 헌송문을 천황에게 지어 바치기도 했다.
  • 이덕일은 박제순을 비롯한 이완용, 박영효, 민병석 등이 노론에 속해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이들이 실제로 노론에 속해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먼저 이완용의 예시를 들면 이완용은 노론에 속해있기는 커녕 노론의 정적이었던 김일경, 민암, 이광좌, 조태구 등을 복권시켰다. 조선 말기부터 세도 정치로 당파보다 특정 가문의 힘이 강해지자 붕당 정치는 완전히 종말을 고했고 일부 극소수를 제외하면 붕당을 따지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어졌다. 그마저도 혁파되고 어느 나라와 가까웠는지에 따라 당파의 이름이 정해지던 구한 말 시기였으니 결국 결론은 이들의 조상이 노론일지는 몰라도 그들 당사자들은 노론이 아니라고 보는게 적합하다. #
  • 친일 행적으로 친일파 708인 명단,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그의 작위를 습작한 박부양과 함께 선정되었으며 2006년 대통령직속기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을 적용, 조사하여 대한민국 정부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1006명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이러한 친일 행적은 그가 태어난지 165년, 사망한 지 107년이 되는 현재에도 강하게 비판받고 있다. 충청남도 공주시에서는 박제순이 충청관찰사로 재직할 당시 공주 우금치에서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한 공적으로 세워진 거사비 앞에 친일 행적이 빼곡히 적힌 죄상비를 2020년에 설치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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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순의 ‘거사비(去思碑)’[9]충남 공주시가 친일 행적을 알리기 위해 세운 죄상비(罪狀碑).[10]


6. 가족 관계[편집]



파일:박제순 일가.jpg

  • 박부양: 박제순의 아들로 박제순의 작위를 계승했다. 자세한 정보는 해당 문서 참고. 아들로 박승유가 있다.
  • 박승유(1924년 ~ 1990년): 할아버지의 이런 행적을 부끄러워하고 2차대전일본군에서 탈영하여 광복군에 들어가 주로 초모 활동[11]과 음악을 통한 심리전, 때때로 간첩 활동[12] 등으로 활약하였다. 8.15 광복 이후에는 성악가로 활동하며 강원대학교 교수로도 재직했지만 수십 년을 같이 활동한 동료 음악인들도 그의 내력을 몰랐을 정도로 본인이 개인사를 언급하지 않은데 이어 할아버지의 악명 때문에 친일파 일족이 잘된 사례로 잘못 알려져 있기도 했다. # 사후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7. 어록[편집]


대감, 사무는 위기에 절박했으므로 우리들의 생사가 판가름나는 중요한 때가 왔습니다. 우리가 물러서는 것은 단지 죽음을 각오하는 것일 뿐입니다. 의정부의 여러 대신들의 의지와 기개를 살펴보고 지난 일들을 미루어보아 확신할 수 없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대감께서와 외부대신인 이 사람, 둘이서라도 고집해서 물러서지 않는다면 이토가 제 아무리 버틴들, 효과가 없으면 자연히 되돌아 쫓겨나갈 것이 아닙니까. 다만 걱정스러운 것은 외론이 어떠할지 모를 일입니다. (중략) 이미 이 사람의 뜻은 정해져 있습니다. 힘이 미치지 못하면 죽을 따름이지요. 가사에 대해서는 이미 유서를 족질에게 부탁했으므로 다른 걱정은 없습니다.


"이것은 명령이 아니라 바로 교섭(交涉)이니 찬성과 반대가 없을 수 없습니다. 내가 현재 외무대신의 직임을 맡고 있으면서 외교권(外交權)이 넘어가는 것을 어찌 감히 찬성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조약 체결에 대해서는 나는 모르겠소, 마음대로 하시오."



8. 대중매체[편집]




9. 둘러보기[편집]



경술국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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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박영효 등이 고종의 퇴위에 협조한 대신들을 암살하려다 처벌된 사건은 이완용이 고종 퇴위를 반대하던 대신들을 제거하기 위해 조작된 사건이라는 주장도 있음.






[1] 이완용이재명의 암살시도로 부상을 입자 내부대신 겸 내각총리대신 임시서리로 임명되었다.[2] 중앙에는 순종이 앉아있고 그 오른쪽에는 이재각, 민병석, 조중응, 김윤식, 이지용, 조민희, 고희성이 서 있으며, 어진 뒤에는 이병무, 윤덕영이 서 있다. 순종황제의 왼쪽에는 이토 히로부미, 이완용, 임선준, 고영희, 송병준, 박제순이 서 있다.[3] 일제강점기의 성악가로 집안의 친일 행적에 부끄러움을 느껴 일본군을 탈영하고 한국광복군에 입대해 심리 활동, 선전 활동 등을 맡았다. 광복 이후에는 교수로 활동하였다.[4] 박제순이 한규설과 조약문 수정에 참여하지 않았고 을사조약 체결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반면에 처음에는 반대 입장을 밝혔다가 입장을 바꿔 체결에 적극적으로 나선 이하영을 박제순 대신 을사오적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다만 박제순이 당시 대한제국의 외교를 담당하던 만큼 박제순을 포함시키는 경우가 많다.[5] 이건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대세는 알지만 내가 외부대신인데 어떻게 찬성하냐?"라는게 박제순의 요지. 을사조약의 일부 자구를 모양 좋게 바꾸는 작업에도 한규설과 함께 참여하지 않기는 했다. 반면 반대를 외친 민영기는 수정에 참여했고 작위도 받았다.[6] 이는 쇼와 덴노인도차이나 공격을 허가할 때 국제 신용상 문제는 있겠지만 "뭐 괜찮겠지"라고 말한 것을 생각해보면 간단하다.[7] 참정대신 박제순 지령 제3호(1906).[8] 1910년대 10만 원은 현재의 시가로는 15~20억에 달하는 거금이다. 당시 10만 원의 5% 이자는 5,000원, 현재의 시세로 따졌을 때 최대 1억 원의 이자를 매년 받은 것이다.[9] 뒤쪽의 비석.[10] 앞쪽의 철제 명판.[11] = 의병 모집[12]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매국노인데다 일본군 출신이라는 점으로 인해 침투가 용이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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