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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閔泳翊
(1860~1914)

1. 개요
2. 생애
2.1. 잘 나가는 젊은 세도가
2.2. 급진 개화파에서 온건 개화파로
2.3. 권력의 정점에서 밀려난 말년
3. 기타
4. 대중매체에서



1. 개요[편집]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1], 자는 우홍(遇鴻)·자상(子相), 호는 운미(芸楣)·죽미(竹楣)·원정(園丁)·천심죽재(千尋竹齋).

개화기 시절 친청 온건 개화파를 대표하던 인물이었다. 민겸호의 양자로 명성황후와 12촌 지간이 되며 순종의 첫 부인인 순명효황후의 이복오빠이다.

젊은 세도가로 개화 정책을 주도했으나 개화기 격동 와중에 부침을 겪었고, 결국 일제강점기 시절 망명길에서 생을 마쳤다. 민씨 척족 상당수[2] 및 그의 동료였던 온건 개화파들이 나중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변절하여 권세를 누렸던 것과는 달리, 조선을 멸망시킨 일제에 동조하기를 거부하고 모든 특권을 포기했던 그나마 양심을 지킨 몇 안 되는 인물이다.[3]


2. 생애[편집]



2.1. 잘 나가는 젊은 세도가[편집]


1860년(철종 11) 아버지 민태호와 어머니 파평 윤씨 윤직의(尹稷儀)의 딸[4]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민영익은 안동 김씨세도정치에 반발해 몰락하던 여흥 민씨 삼방파 집안의 독자로 태어났는데 민영익이 태어났을 때 집안은 거의 제 구실을 하지 못할 정도로 몰락해 있었다.

그러다가 1863년 흥선대원군이 집권하고 같은 민씨 가문 출신인 민치록의 딸이 왕비로 간택되자 민영익의 집안에 서광이 비추기 시작했으며 명성황후가 권력을 쥐면서 일가 친척이라는 것에 힘입어 아버지 민태호도 1870년 벼슬길에 올랐다. 민영익이 본격적으로 정치인의 길에 들어가게 된 계기는 1874년 명성황후의 양오빠였던 민승호 암살 사건이었다. 명성황후의 친정아버지 민치록에게는 뒤를 이을 아들이 없어 고종의 외삼촌이었던 민승호가 양자로 들어갔었는데 민승호마저 친아들을 두지 못하고 사망한 것이다. 이에 명성황후는 민영익을 죽은 양오빠 민승호[5]의 대를 이을 양자로 들이고자 했다. 아버지 민태호는 당시 민영익이 외아들이라서 다른 집에 양자로 보낼 수 없다고 난색을 표했지만 명성황후의 뜻이 강경하고 형제들마저 민영익이 명성황후의 조카가 되면 집안 사람 모두가 부귀영화를 누릴 거라고 강권해서 결국 일이 성사됐다. 이 때부터 민영익은 명성황후의 조카이자 고종의 외사촌 동생이 되어 순식간에 민씨 척족 세력의 중심 인물로 떠올랐다.[6]

1877년(고종 14) 정시(庭試) 문과에 병과 12위로 급제하였다.# 문과 급제 후에는 벼슬에 출세가도를 달렸는데 처음으로 받은 관직이 홍문관 전한으로 벌써부터 종3품의 벼슬이었고 1878년 좌승지가 되었으며 홍문관 부제학과 도승지를 겸하고 곧바로 규장각 직제학, 이조참의,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 1878년에 받았던 직책 모두 정3품의 당상관 직책인데 그의 나이가 불과 20살도 채 되지 않았던 시점인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출세가도다. 1880년 이조참판이 되어 종2품으로 올랐으며 1881년 협판통리아문사무에 오른다. 그야말로 젊은 세도가가 따로 없었으며 주변에 개화파를 끌어모았는데 김옥균(金玉均), 홍영식(洪英植), 이중칠(李重七), 조동희(趙同熙), 김흥균(金興均)[7], 홍순형(洪淳馨)[8], 심상훈(沈相薰)[9], 어윤중(魚允中) 등이 민영익의 사저였던 죽동궁[10]에서 자주 회합하면서 이 사람들을 '죽동 8학사'라 불렸고 개화 정책을 선도하는 젊은 정치인들로 자리 잡았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숙부 민겸호가 사망하고 민영익의 집도 공격당했으나 살아남았고 이후 사죄 사절로 박영효와 일본에 다녀와서 3개월간 머물렀으며 권지협판교섭통상사무가 되어 톈진에 머무르면서 해관 사무를 교섭했다.[11]


2.2. 급진 개화파에서 온건 개화파로[편집]


1883년 보빙사의 정사·전권 대신이 되어 미국을 방문해 미국 대통령 체스터 A. 아서를 예방했고 각종 시설을 시찰했으며 돌아올 때는 유럽에서 아시아를 경유해 돌아와 한국사 인물로는 세계를 최초로 일주한 사례가 됐다.[12]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귀국 후 그간 들렀던 곳 중 어디가 명승지인지 묻는 고종에게 "양인들은 다들 파리가 좋다던데 제가 본 바로는 파리는 뉴욕만 못한 거 같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본문 유람 당시 서광범변수는 포크 소위가 번역해 주는 세계의 정치사 및 문화사 관련 자료를 기록하느라 분주했지만 민영익은 묵묵히 유교 경서를 읽을 뿐이었다고 한다. 엄청난 문화적 충격에서 나온 회의에 대한 답을 애써 공자의 가르침 속에서 찾으려 했던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미국에서 돌아온 민영익은 귀국 후 주조선 미국 공사 푸트를 만나 이렇게 소감을 이야기했다고 한다.

"나는 어둠 속에서 태어났다가 광명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다시 어둠 속으로 돌아왔습니다. 아직 나는 내가 갈 길을 분명하게 내다볼 수가 없으나, 머지않아 찾아낼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때부터 서광범은 포크 소위에게 민영익이 보수 세력에 가담할 우려가 크다고 토로했다고 한다.

1884년 귀국 후 이조참판으로 승진하고 금위대장과 신군좌군영관을 겸임해 인사권과 군사권을 다시 장악했으나 이때부터 김옥균을 위시한 급진 개화파와 처지를 달리한다. 급진 개화파는 마침내 갑신정변을 일으켰는데 생부였던 민태호는 보수파 거두라서 암살당했고 민영익도 당시 자객이었던 먼 왕족 출신 이규완에게 공격당해 크게 다쳤다.[13] 갑신정변을 주동한 홍영식에게 구조받아 독일인 묄렌도르프에게 구출돼 미국인 의사 호러스 뉴턴 알렌에게 치료받고 구사일생했다.[14] 아버지가 죽고 자신도 죽을뻔한 일로 민영익은 앙심을 품고 급진 개화파를 제거하고자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의 암살을 시도했다.


2.3. 권력의 정점에서 밀려난 말년[편집]


갑신정변 후 민영익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게 된다. 일단 그렇게 자주 나오던 그의 이름이 1884년 갑신정변을 기점으로 확연히 줄어들게 된다. 이는 그가 이후 행동했던 정치적 입장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우선 그는 갑신정변 직후 흥선 대원군의 귀국과 관련한 문제를 가지고 톈진으로 가서 이홍장과 환담 하였고 이후에 홍콩과 상하이를 오가며 홍삼 전매사업으로 마련했던 고종의 비자금을 홍콩 프랑스 은행에 예치시킨다. 그리고 귀국하여 우영사와 상리국 총판을 거쳐 병조판서에 임명된다. 하지만 1886년 조정 일각에서 펼쳐지던 친러정책에 반발하여 조선에 머물고 있던 위안스카이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가 거기서 고종 폐위 계획을 듣게 되면서 다시금 이 사실을 조선 조정에 알리게 된다.

물론 이러한 것으로 인해 결국 정치적 위기를 맞게 되고 이게 그가 권력의 일선에서 물러나게 되는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 결국 1886년 8월 그는 홍콩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물론 고종은 그를 여전히 신임하여 그는 고종의 비자금으로 생활하게 된다. 그리고 곧바로 귀국하여 1889년에는 판의금부사와 이조판서에 오르게 되는데 이 시기에 그는 반청활동을 펼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당시 청에서 파견된 위안스카이가 조선에서 상당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의 반청운동은 당연히 청나라의 미움을 사게 되면서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나게 되었고 곧바로 명예직을 전전하다가 1891년 판돈녕부사로 물러나게 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 때 홍콩으로 거처를 옮긴다. 그의 나이 불과 30대 초반이었던 때였다.

그리고 그 후에는 귀국하지 않고 상하이로 거처를 옮겨 지속적으로 머문다. 그러다가 1895년 그의 정치적 후원자였던 명성황후가 암살되자 국내에서 그의 정치적 기반은 사라지게 된다. 물론 1897년에 특명전권공사로 1899년에는 표훈원 총재를 제수받는 등 여전히 고종에게서 신임을 받았으나 사실상 그가 정계 복귀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버리게 되면서 이는 쓸모 없는 일이 되어버렸고, 고종도 종국에는 그에 대한 신임을 저버리게 되었다. 그리고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그는 귀국에 대한 생각을 버리게 되고 상하이로 영구 망명하게 된다.

이후 1914년에 망명지인 상하이에서 사망하게 되는데 그의 말년에 대한 기록은 여러 가지로 갈리는 편이다. 그가 고종으로부터 받은 비자금을 활용해 독립운동 자금으로 쓰고자 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한편 그냥 고종의 비자금을 유용하며 유유자적하게 외국에서 생활했다는 기록도 있다. 어느 기록이 사실이던간에 젊은 세도가이자 개화기의 한복판에서 보낸 그의 화려한 20대와 비교해보면 확실히 쓸쓸한 말년임에는 틀림 없겠다.


3. 기타[편집]


  • 그가 글을 써서 남긴 기록이 거의 없고, 1890년대 이후에는 외국에서 망명을 했기 때문에 그의 말년에 대해서는 기록 자체가 너무나 적다. 그리고 그에 대한 연구도 적어서 역사학계에서는 거의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개화기 인물 중 교과서에 그리 많이 나오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 행서에 능했고 많은 묵화 중 묵죽도(墨竹圖)·석죽도(石竹圖)가 전하며 필세와 화품이 뛰어나서 당시 상하이에서 가장 유명한 우창숴(吴昌硕 Wú Chāngshuò 1844~1927)와 자주 교유했다. 이러한 점들로 인해서 그에 대한 연구는 역사학자보다도 미술사학자들 사이에서 더 많은 편에 속한다.

  • 유명인들의 닮은꼴 사진들이 유행할 때 민영익이 에릭과 닮았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SNL 코리아에 신화가 출연할 당시 '신화 생명' 꽁트에서 실제로 써먹었다. 에릭이 옷까지 민영익과 닮게 맞춰 입어 확인사살.


4. 대중매체에서[편집]




  • 이두호가 만화로 그린 <객주>에서는 돈을 밝히지만 그렇다고 돈에 미친 것도 아니며 학문에 뛰어나지만 아이들과 제기차기를 대낮에 한다든지 괴짜인 모습을 보인다. 임오군란이 터져 구식 군대가 집으로 쇄도하자 분노해 칼을 달라면서 저항하려고 하지만 충직한 부하로 나오는 이용익(1854~1907/실존)이 민영익을 기절하게 해 데려가 겨우 생존한 뒤로 행방을 감추고자 머리를 밀고 승려로 위장해 잠적해 지낸다. 나중에 주인공 천봉삼에게 강제로 수만 냥을 바치게 하라는 등 악역 같은 이미지로 나오지만 천봉삼을 사모하던 무녀 매월의 활약으로 그를 풀어줘야 했다.

  • 1995년 KBS 드라마 <찬란한 여명>에서는 성우 김용준[15]이 연기했다.





  • 카카오페이지 연재 웹툰 <요괴난전>에서 등장했으며 명성황후의 오빠인 민승호가 죽자 대를 잇기 위해 먼 친척인 민영익을 명성황후의 가문에 입양시킨다. 뒷배경 덕분에 빠른 진급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명석하고 책임감이 강해 모든 일에 두각을 나타낸다. 신채율과는 입양 전부터 절친이었고 그의 능력을 높이 사 항상 곁에 두려 한다. 별기군의 실무적인 직책을 맡고 있으며 명성황후를 보필한다. 그러나 올곧은 성품으로 부패한 척족을 지킬 것인지 나라를 위할 것인지를 두고 고민한다.
[1] 삼방파 28세 영(泳) 항렬.[2] 대표적인 인물이 민영휘, 민병석, 민영소.[3] 반면 비판하는 측에서는 개화기가 단지 친청, 친러, 친일파의 각축장이었을 뿐이며, 민영익은 단지 친청파로서 권력 다툼에 밀렸던 것에 불과하다고 평가절하한다.[4] 중종의 장인인 윤여필의 직계 후손이며 민태호의 첫 번째 아내로 민영익을 낳고 1866년 사망했다. 이후 민태호는 진천 송씨(송재화의 딸)와 재혼했는데 이 사람이 순명효황후의 생모다.[5] 민영익에게는 13촌 아저씨뻘이 된다.[6] 다른 자료들에서는 이 때 민영익을 양자로 보내 정작 자신의 후사가 없게 된 민태호가 민영환입양했다고 잘못 적혀 있는 경우가 많은데 민태호가 동명이인이다. 민영환의 양아버지 민태호(閔泰鎬)는 민승호, 민겸호, 여흥부대부인과 친형제로서 인현왕후의 아버지 민유중의 3남 민진영의 5대손이다. 순명효황후와 민영익의 친아버지 민태호(閔台鎬)는 민유중의 차남 민진원의 5대손이며 후사는 먼 친척 입암공파 민술호(민사용의 6남 민여검의 9대손이다.)의 아들 민영린이 입양되어 있었다. 둘은 12촌 형제인 동명이인으로 관계를 헷갈리면 가계도가 개판이 되어 버린다.[7] 철인왕후의 조카. 갑신정변 이후 항렬자를 바꾸면서 김흥(金興)로 개명했다.[8] 효정왕후의 조카[9] 대원군의 조카. 부대부인 민씨가 이모가 된다.[10] 명온공주김현근이 살던 곳이다.[11] 이해에 친여동생이 왕세자빈이 되면서 더욱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다[12] 1896년 제정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 축하 사절단으로 파견된 민영환이 일본 요코하마 - 캐나다 벤쿠버 - 미국 뉴욕 - 영국 런던 - 독일 베를린 - 대관식 참석 후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블라디보스토크를 통해 국내로 귀국한 것을 한국사 최초 세계 일주로 치기도 한다. 여행 후 민영환이 쓴 여행기가 해천추범(海天秋帆).[13] 한국사 강사인 강민성에 따르면 이때 칼 15방을 맞고도 살아남았다고 한다.[14] 이를 계기로 알렌은 왕실의 신임을 얻어 조정에 근대식 병원 설립안을 올렸다. 이 제안이 수용돼 1885년 4월 10일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 제중원이 개원한다.[15] 당시에는 탤런트였다. 성우로 전향한 것은 그 이후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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