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석(친일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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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귀족
朝鮮貴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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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12년 도박죄로 구속되어 일시적으로 예우 정지.[2] 1872년생 이완용(李完鎔)으로 1858년생 이완용(李完用)과 동명이인임. [3] 1927년 파산자로 선고되어 조선귀족령 제8조 1항에 따라 1928년 2월 29일부로 자작의 예우가 정지되었지만 자식이었던 조중수에게 자작 작위가 승작됨.[4] 1919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독립 운동에 협조해 습작 불능 처리됨.[5] 재산 분쟁으로 일시적으로 예우 정지.※ 오등작일제강점기 조선귀족에 공작은 없었으며, 그에 준하는 작위와 관련한 정보는 왕공족 문서 참고.※ 취소선 표시는 작위를 박탈당한 인물을 뜻함.
작위 박탈 사유 [ 펼치기 · 접기 ]
  • 윤치호 : 1913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됨에 따라 작위 박탈
  • 김사준 : 1915년, 조선보안법 위반 사건에 연루되어 작위 박탈. 신한혁명당의 간부 중 하나인 성낙형이 고종을 망명시키고자 했는데, 김사준이 이를 수락하고 실행에 옮기려다 일제에 발각되어 김사준을 비롯한 고종 망명 사건 관련자들 다수가 검거
  • 김윤식 : 1919년, 독립 청원서 제출로 인해 작위 박탈
  • 이용직 : 1919년, 독립 청원서 제출로 인해 작위 박탈
  • 민영린 : 1919년, 아편 흡입죄로 구속되어 작위 박탈
  • 김병익 : 1919년, 아편 흡입죄로 구속되어 작위 박탈
  • 민태곤 : 1941년 12월, 도쿄에서 조선민족독립운동 사건으로 구속되어 작위 박탈




민병석 閔丙奭
파일:민병석111.jpg

여흥 민씨

경소

시남
생몰년
1858년 ∼ 1940년
직업
관리
작위
조선 귀족 자작
비고
친일인명사전 등재, 경술국적

1. 개요
2. 생애
2.1. 민씨 척족의 거두
2.2. 이토 히로부미를 초빙하다.
2.3. 순종 납치 기도
2.4. 이토 조문 사절단
2.5. 말년
3. 트리비아


1. 개요[편집]


대한 제국의 친일 각료이자 민족 반역자 겸 매국노로써 여흥 민씨 가문으로 충남 회덕(懷德)[1]에서 태어났다.

좌찬성 민영위(閔泳緯)의 손자이며 민경식(閔敬植)의 아들이다. 1879년(고종 16년) 문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예문관 검열을 시작으로 벼슬길을 달리기 시작하였는데 특히 1882년 임오군란 때 위험을 무릅쓰고 민비를 호위한 공로로 척족 세력 중에서도 핵심에 끼기 시작했다.

을사 조약 후인 1906년에 표훈원 총재, 시종원경 겸 내대신에 관직에 올랐으며 이후 1909년에는 이토 히로부미의 조문 사절, 1910년 한일 합방 뒤에는 일본으로 부터 자작의 직위와 이왕직 장관에 임명되었고 1939년에는 중추원 부의장을 지냈다.


2. 생애[편집]



2.1. 민씨 척족의 거두[편집]


한말 민씨 척족을 대표하여 탐학을 자행하였으며 1884년에는 성균관 대사성, 승정원 도승지를 겸임하면서 갑신정변 이후에는 민응식(閔應植)과 상의하여 장은규(張殷奎)를 일본에 밀파, 망명 중인 김옥균을 암살하려 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그런데 당시 러시아 전권 공사 웨베르가 경성에 있으면서 그 세력을 궁중에 부식시키려 하자, 청국은 보정부(保定府)에 구금하고 있던 대원군을 돌려보내 러시아 진출에 대비하려 하였고, 대원군은 또 청의 지원을 받아 민씨에 대항하려 하였다. 민병석은 교묘히 그 정쟁의 와중을 피하여 약 2년 동안 칩거하다가 1888년 10월 다시 출현하여 예조 참판에 임명되었고, 11월에는 규장각 직제학, 12월에 동지돈녕, 1889년 3월에 강화 유수 겸 육영 공원 판리)를 거쳐 11월에는 평안 감사로 임명되어 1894년까지 평양에 머물렀다. 이 때 악화인 당오전을 무수히 발행하여 조병세(趙秉世)의 탄핵을 받았다.

재직하는 수년 동안 순량한 백성을 죄 주고 재산을 박탈하여 서민들에게는 악귀처럼 공포의 대상이었다. 1894년 청일 전쟁 중에는 대원군의 밀서를 받아 청의 장군과 내통, 일본 세력을 축출하려 했으나 실패하였고, 1895년 초 원주에 유배되었다. 삼국 간섭 이후 다시 민비 세력이 살아나면서 사면되었고, 아관파천 이후 친러 세력이 정권을 잡자 이완용이 자기와 내외종 남매간이 되는지라 군부 대신, 궁내부 대신, 학부 대신, 철도원 총재 등 요직에 기용되었다. 대한 제국기에는 탁지부 대신, 표훈원 부총재, 원수부 검사국 총장, 헌병대 사령관 등의 요직 외에도 대한 천일 은행, 종로직조사(鍾路織造社) 등의 회사 경영에도 참여한 대표적인 관료 자본가였다.

민씨 척족들은 청일 전쟁 이후 특히 을미사변으로 민비가 비명횡사한 이후로는 급격히 세력이 쇠퇴하였다. 자신의 척족이 점차 쇠퇴하여 권력을 떨치지 못하던 당시에도 민병석은 궁내부 대신의 위치에 앉아서 과거 자신이 압박하던 일본당과 악수하여 러일 전쟁 이후에도 능히 시류를 타게 된다. 주마등같이 동요하는 파란중첩의 조선 정계에서 민병석은 한걸음도 위험하지 않게, 시종 일관 권세간에 처한 인물로서 처세술에 비범한 재간이 있었다. 일찍이 고종이 그를 평하기를 '민병석은 짐이 부르려고 할 때는 이미 와 있고, 내칠려고 할 때는 이미 떠나 있다'라고 그의 원숙한 수완을 꿰뚫어 보았다.


2.2. 이토 히로부미를 초빙하다.[편집]


민병석은 1905년 7월 일본국 시찰을 명령받고 일본에 가서 일본국 훈1등 욱일대수장(旭日大綬章)을 수여받는다. 그런데 시찰은 명목일 뿐 사실은 운동비 10만 원을 가지고 가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조선 왕실의 최고 고문으로 초빙하려 교섭에 나섰던 것이다. 그가 이토 초빙에 나선 내막은 이러하다. 표훈원 총재 민병석, 법부 대신 민영기(閔泳綺), 시종 원무관장 조동윤(趙東潤) 등 20여 명은 장차 그들의 세력을 공고히 하고자 일본 제도 시찰을 도모하였다.

이 때 병석이 황제에게 비밀히 아뢰기를 '지금 일본 관리로서 한국에 와 있는 자들은 세력을 믿고 전횡하는 방자함이 극심하니 일본 원로 중 유명 인사인 이토를 초빙하여 경성에 있게 하면 가히 그런 일본 관리들의 사사로운 행동을 꺾을 수 있다'고 하였다. 황제가 이를 받아들여 몰래 일화 10만 원을 민병석에게 주어 운동비로 삼게 하고, 민영기, 조동윤 및 중추원 찬의 민상호(閔商鎬), 외부협판 윤치호(尹致昊)* 등과 함께 제도 시찰이라는 명목으로 도쿄로 가게 했다. 민병석은 스스로 뜻을 얻었다 생각하고 일본을 향해 출발하였다.

일단 보호 조약이 맺어지자 민병석은 1905년 12월 육군 부장에 올랐고 1906년에는 표훈원 총재, 시종원경 겸 내대신, 제도국 총재, 제실 재정 회의 의원 등을 역임하였으며, 1907년 10월 대훈 이화대수장(大勳李花大綬章)을 수여받기에 이른다. 또 정미사변을 피해 영친왕, 이토 통감과 함께 일본으로 갔다가 1908년 그 공로로 서성대수장(瑞星大綬章)을 수여받았고, 1909년 2월에는 친서를 봉정키 위해 특사로 일본에 가서 일본국 욱일동화대수장(旭日桐花大綬章)을 받는다. 결국 이토를 초빙한 공로가 이 세 개의 훈장 수여로 집약되어 나타난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훈장 수여는 이토 초빙 외에도 아직 정확히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다음과 같은 공로로 인한 것일 수도 있다.


2.3. 순종 납치 기도[편집]


1909년 1월 17일 이토와 친일 대신들은 남방 순행이라는 명목으로 순종을 부산까지 데리고 갔다. 이완용이 이토의 지시를 받고 비밀히 의논하여 고영희(高永喜), 이재곤(李載崑)을 유도 대신으로 삼고 민병석으로 하여금 상주케 하여 즉시 조칙을 만들었다. 다른 대신들도 전혀 모르고 있다가 조칙이 선포되자 모두들 깜짝 놀랐다. 이에 일본인들이 장차 순종을 협박하여 일본으로 데려간다는 잘못 전해진 말이 전국에 퍼졌다. 순종이 부산항에 닿자 부산에 사는 일반인들이나 상인들 수만 명은 항구에 열을 지어 늘어서서 어가를 저지하려 하였다.

순종이 부산 앞바다에서 일본 함대를 타려고 할 때 항민들은 모두 5척, 6척의 배를 몰아 군함을 둘러싸고 폐하께서 만약 일본에 건너가신다고 할 것 같으면 신 등은 일제히 물 속에 뛰어들어 죽으면 죽었지 차마 우리 황제께서 잡혀 가시는 것은 볼 수 없다 하면서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이에 순종을 모시고 왔던 여러 대신들이 애써 타일러 겨우 그치게 되었고 1월 23일 순종은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당시 일본인들의 음모가 정말로 순종을 납치하려 했던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명목뿐인 순종 황제라도 장차 '합방'에 짐이 될까봐 일본에 데려다 놓으려는 계책은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방략이다. 그리고 이 계획에 이완용과 함께 민병석은 깊숙히 개입되어 있었던 것이다.


2.4. 이토 조문 사절단[편집]


민병석이 이토 초빙 운동에 헌신한 대가로 출세가도를 달린 만큼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에 의해 이토가 저격·살해되자 가장 놀란 것도 그였으리라. 정부는 이토의 장례식 조문 사절로 박제빈, 김윤식과 함께 궁내부 대신 민병석을 특파했다. 일본의 조정과 국민들은 크게 놀라고 슬퍼하며 국장으로 이토의 장례를 치렀는데, 민병석 등 조문 사절 일행이 도쿄에 도착했을 때, 일본인들은 노한 것이 아직 풀리지 않아서 살기를 띤 험악한 분위기로 이들을 대했다.

한 일본인은 경찰의 엄중한 경호망을 뚫고 이들 일행에게 협박장을 보내어 이토가 이미 암살되었는데 무슨 놈의 조문 사절이냐고 으르대었다. 이리하여 명색이 조문 사절인 민병석 일행은 일본 국왕 면회도 못 하고 가지고 간 국서는 일본 궁내 대신에게 맡긴 채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쫓기듯이 조선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한편, 고종은 이토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웃었다는데, 일본 경시 呼子友一郞은 그 소문을 듣고 그 말의 근원과 진위를 조사한다고 대궐의 나인들을 심문하기에 이르렀다. 어떤 이들은 말하기를 시종 이용한(李容漢)이 고자질하여 일본인들에게 아첨하려 하였다고 전했다. 민병석은 이토의 죽음이 청천벽력 같았을 것이고 고종으로서는 보호 조약을 강요하고 자신을 양위토록 한 이토의 죽음이 너무도 통쾌하였지만 한 사람의 죽음을 두고 이렇게 다른 반응를 보였던 것이다.


2.5. 말년[편집]


1910년에 한일 합병이 되자 민병석은 54세의 나이에 일제로부터 자작의 작위와 은사금을 받고 이왕직(李王職) 장관과 중추원 고문을 지냈다. 일제 때에는 대표적인 조선인 대지주의 한 사람으로 꼽히었고 자본을 투자하여 모 회사 사장이니 고문이니 하는 직함을 가졌으나 현대 경제에 대한 지식 부족으로 수만금의 손해를 입어, 토지 문서가 자기 집 문갑 속에 있지 않고 식산 은행의 신세를 지게 되었다고 전한다. 1912년에는 메이지(明治) 일본 국왕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였다. 1925년부터 1939년까지 15년간 중추원 고문을 하였으며, 1939년에는 중추원 부의장이 되었다가 이듬해 8월에 사망했다.


3. 트리비아[편집]



  • 그의 아들인 민복기 역시 반민족 친일 행위자 였는데 해방 후에는 박정희 군사 독재 정권에 부역을 하면서 민청학련 사건, 인민 혁명당 사건등 사법 살인을 저지르는 무자비한 악행도 일삼았다.
[1] 現 대전 광역시 대덕구 회덕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