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종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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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중추원 의장
大韓帝國中樞院議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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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귀족 남작
대한제국 제22대 중추원 의장
민종묵
閔種默 | Min Jong-muk


파일:02142195020.png

이름
민종묵(閔種默)
출생
1835년 (헌종 1) 2월 14일
한성부 (現 서울특별시)
사망
1916년 7월 20일 (향년 81세)
직업
관료, 외교관, 정치가
종교
유교 (성리학)
본관
여흥 민씨(驪興)[1]

현경(玄卿)

한산(翰山)
작위
조선귀족 남작
약력
한성부윤, 병조판서
외부대신, 중추원 의장
형조판서, 탁지부대신
농상공부대신, 조선귀족 남작
비고
친일인명사전 등재

1. 개요
2. 생애
3. 둘러보기



1. 개요[편집]



파일:Min_Jong-muk.jpg
[2]


민종묵(1835 - 1916)은 구한말의 친러파 관료이자 정치가, 그리고 조선귀족 남작 작위를 받은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현경(玄卿)이고 호는 한산(翰山)이다.


2. 생애[편집]


1835년(헌종 1) 2월 14일, 한성부에서 아버지 민승세(閔承世, 1805 ~ 1853. 10. 15)[3]와 어머니 광주 이씨(1801 ~ 1860. 7. 17)[4] 사이에서 두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위로 형 지담(芝潭) 민종렬(閔種烈, 1831 ~ 1899. 6. 15)[5]이 있었다. 이후 작은아버지[6] 민명세(閔命世, 1818 ~ 1839. 2. 18)[7]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명성황후와 같은 여흥 민씨였으나, 족보상 촌수는 44촌 지간으로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었다.[8]

1874년(고종 11) 증광(增廣) 문과에 을과 2위로 급제해 성균관 대사성, 한성부 우윤, 병조참판, 이조참판, 사헌부 대사헌 등을 지냈다. 여흥 민씨 세력에 속해 있던 보수 성향 관료로 친러파에 속해 있었다. 갑신정변 이후로는 형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지냈다.

1889년 독판교섭통상사무가 되어 각국과의 통상사무 처리를 맡았고, 1896년에는 아관파천을 주도했다. 1898년에는 외부대신이 되었고, 이후 독립협회의 탄압을 받기도 하였다. 같은 해 만민공동회를 해체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1900년에는 탁지부대신, 농상공부대신, 예식원장 등에 임명되었다.


파일:91a64adebc12245f44c5f521b436626f.jpg

고종과 관료들의 모습 (1890년)
가운데가 고종, 왼쪽부터 이정로, 심상한, 김윤식, 김성근,
이용원, 김병익, 민종묵, 서정순, 이주영, 김영전

1905년에는 중추원 의장에 올랐다. 이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귀신도 사람도 다 분해하는 것이고 나라의 법이 용서할 수 없는 것"이라며 을사조약에 반대하였고 조약 체결에 찬성한 관료들을 처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1910년 경술국치 직후 일본 제국으로부터 조선귀족 남작 작위를 받았고, 2만 5천 원 정도의 은사 공채도 받았다.

1911년, 《매일신보》에 경술국치 1주년을 축하하는 글을 실었다. 1916년 7월, 81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남작 작위는 민철훈에게 이어졌다.


3. 둘러보기[편집]





[1] 공목공파(恭穆公派)-안성(安城) 문중 25세 종(種) 항렬.[2] 파일:1613039355045.png[3] 자는 극가(克家).[4] 이하빈(李夏彬)의 딸이다.[5] 자는 무경(懋卿).[6] 족보상으로는 7촌 재종숙(再從叔)이다.[7] 자는 현보(顯甫).[8] 같은 가문이라고 보기엔 너무나 먼 친척이었다. 여흥 민씨 세도가는 삼방파이고 민종묵은 공목공파(恭穆公派)인데, 이 두 파는 고려 중기에 갈라졌다. 따라서 두 사람은 무려 44촌이나 차이난다. 동시대 민씨들에게 보이는 항렬자(치(致)O·O호(鎬)·영(泳)O 등)와도 다른 항렬자를 따랐다. 따라서 가문의 후광을 입었다기보다는 자력으로 출세했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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