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희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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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가계
3. 활동 사항
4. 상훈과 추모
5. 참고 자료



1. 개요[편집]


진희규(秦喜葵, 1878년 9월 3일 ~ 1959년 11월 25일)는 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친일 관료, 경제인으로 본적은 경상북도 대구부 상동이며 경상북도 달성군(현재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출신이다. 자는 성일(性日)이고, 호는 양원(陽園)이다.


2. 가계[편집]


배우자 농서 이씨 이준수(李俊秀)의 딸[1] 사이에 슬하 5남 3녀를 두었으며, 그 중 셋째 딸 진말홍(秦末洪)이 서울은행장, 제일은행장을 지낸 금융인 이보형(李寶衡)과 결혼하여 슬하에 3남을 두었고, 또 그 중 안흥상호신용금고 이사장을 지낸 금융인인 셋째 아들 이재응(李在應)이 이윤자(李倫子)와 결혼하여 슬하에 2남을 두었고, 또또 그 중 배우인 둘째 아들 이서진(李瑞鎭)을 두었으므로 진희규의 사위는 이보형이며, 외손자는 이재응이며, 진외증손자는 이서진이다.


3. 활동 사항[편집]


진희규는 한일 병합 이전인 1902년 내부 주사에 임명되었으며, 한일 병합 이후인 1911년부터 1920년까지 경상북도 참사(參事)로 복무하였다. 그 사이 1915년 10월 일본 적십자사 특별 사원으로 활동하였다. 1915년 10월 28일 대구부에 자신의 토지를 도로 부지로 기부하여 목배 1개를 받았다. 1918년 대구 은행에 자본을 투자하고 감사역이 되었다. 1919년 계림 농림 주식회사(鷄林農林株式會社) 이사(취체역), 1920년 주식회사 대동사(大東社) 이사(취체역), 1920년 경일 은행(慶一銀行) 이사, 1920년 대구 주조 주식회사(大邱酒造株式會社) 이사(취체역), 1928년 경상 합동 은행(慶尙合同銀行)에 자본을 투자하고 경영에 참여하여 대주주를 역임했으며, 1935년부터 1939년까지 대구 상공 은행(大邱商工銀行)이라는 회사에 자본을 투자하고 경영에 참여하면서 이사라는 직위를 가지고 그 직위를 역임했다. 1924년에는 수성 공립 보통학교 학부형 장학회 회장이 되어 그 직위를 역임했다. 또한 동년에 달성군수성 수리 조합 조합장이 되어 그 직위를 역임했으며, 1927년 1월 20일부터 1938년 6월까지 달성 동부 금융 조합 조합장 등을 역임하였다. 진희규는 경상북도 고령(高靈)·달성(達城)·경산(慶山)·칠곡(漆谷) 등지에 토지를 소유한 지주였다.

진희규는 1924년 4월 1일과 1927년 4월 1일 경상북도 관선 도 평의회 의원이 되었다. 이때 그는 ‘당선사례’를 통해 "금반(今般) 경상북도 평의원에 임명되었음은 도민(道民) 첨위(僉位)의 애원해 온 바 금후 일층 도치(道治)에 전력코자 자(玆)에 감히 감사의 뜻을 표하옵니다."라고 하는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1932년 조선 유교회 명리원(明理院) 의정(議正)이 되었다. 1930년 6월 3일부터 1933년 6월 2일까지 조선총독부의 자문 기관인 중추원 참의를 역임하여 그 직위로 활동하면서 연수당 600원을 받았다. 8·15 광복 후인 1949년 3월 18일 박창수 참의와 함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 특위]에 자수하여 체포되었다. 진희규는 1959년 11월 25일 사망하였다.

친일파 708인 명단의 중추원 부문,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중추원 부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4. 상훈과 추모[편집]


진희규는 1938년 8월 4일 대구 공립 여자 고등 보통학교에 설립비 1000원을 기부하여 표창과 포장을 받았다. 1928년 11월 16일 칙령 188호에 의거하여 일본 정부로부터 쇼와 대례 기념장을 받았다. 1937년 7월 1일 조선총독부 시정 25년 기념 박물관 건설비로 1000원을 기부하여 조선총독부로부터 표창과 포장을 받았다.


5. 참고 자료[편집]


한국어 위키백과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풍기진씨세보
고성이씨세보

[1] 1878년 10월 20일에 태어나서 1945년 1월 1일에 죽었다. 묘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행정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