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수/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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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나무위키+상위문서.png   상위 문서: 최동수

1.1. 긴 무명 시절
1.2. 김성근에 의해 발굴된 거포
1.3. LG의 4번타자로 발돋움하다
1.4. 2009 시즌
1.5. 2010 시즌
2.1. 2010 시즌
2.2. 2011 시즌
2.2.1. 포스트시즌
3.1. 2012 시즌
3.2. 2013 시즌


1. LG 트윈스 1기[편집]



1.1. 긴 무명 시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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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수 시절.

전형적인 노력형, 대기만성형 선수로서 처음으로 1억원 대 연봉을 넘긴 해가 프로 15년차인 2008년일 정도로 그의 야구 인생은 고난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무려 입단 동기가 94년 신인 3총사로 생각보다 오래된 선수다. 동기들이 일찍부터 치고나간 반면 최동수는 대타 정도로나 쓰이다가 서른이 넘어서야 비로소 빛을 봤다. 하지만 그만큼 빨리 졌던 동기들과 대조될 정도로 가장 롱런한 선수가 되었다.[1]

원래 포지션은 포수로 입단 직후 방위로 복무했으며, 1996년 이후부터 김동수-김정민에 이은 제 3의 포수로 기용되었다. 완전 2군 선수였다는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생각보다는 1군 경기를 많이 뛰었고, 1997년 플레이오프와 한국시리즈 엔트리에도 포수로 이름을 올렸던 바 있다.[2] 그러나 수비보다는 타격능력에서 점수를 더 받아 대타로 많이 나왔던 선수였다. 특히 1997년은 대타로 7홈런을 쏘아올리며 쏠쏠하게 활약했다.

그러나 1998년 조인성이 입단하며 그의 입지는 완벽하게 줄어들었고, 1군에 가끔씩만 올라오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로 인해 1루수로도 서보기 시작했지만 역부족이었다.[3]

여담으로 2000년 7월 7일, 대 삼성전에서 인사이드 파크 홈런을 기록한 바 있다.


1.2. 김성근에 의해 발굴된 거포[편집]


그래도 꾸준히 노력하였던 그는 당시 2군 감독이던 김성근의 눈에 띄게 되고, 김성근이 1군 수석코치로 승격된 후 이광은을 전격 경질하면서 감독 대행을 맡은 2001년부터 프로 세계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 당시 LG에 수비로는 정평이 난 포수 자원이 넘쳐났고, 타격 재능을 살리기 위해 김성근은 1루수 전향을 권유, 2002년부터 1루수로 완전히 전업해 타격으로서는 꽤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2000년 들어 인사이드 파크 홈런을 찍고 타율도 2할 5푼 후반까지 찍어내며 공을 배트에 맞추는 능력이 비약적으로 향상되었다 여겨진 최동수는 이광은 감독에게도 눈에 들어왔지만, 포수로써는 이미 타격에서 밀리지도 않으면서도 수비가 뛰어난 데다 결정적으로 젊은 조인성이 있었고, 백업으로 김정민이 있었기에 최동수에게까지 기회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노고를 알아본 김성근은 감독대행을 맡고나서부터 조금씩 기회를 주기 시작했고, 수비는 영 성에 안 찼지만[4] 합격점을 받으며 포지션 전향까지 권유해가며 최동수를 쭉 쓰려는 모습을 보였다.

2002년에는 주전급 백업으로 쏠쏠히 활약하다가 서용빈이 시즌 중 입대한 이후부터 1루 주전으로 나서자마자 빈타에 시달리며 팬들의 욕받이가 되기도 했다. 그나마 현대와의 준플레이오프에서 특히 2차전 결승 2타점 적시타로 MVP가 됐고 기아와의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멀티홈런 4타점을 기록하며 LG의 마지막 한국시리즈를 이끌었다. 2002년 포스트시즌에서의 성적이 WAR 0.59로 팀내 1위에 타출장 0.378/0.429/0.676 OPS 1.104, 3홈런 13타점으로 그야말로 4위였던 팀을 한국시리즈에서의 아까운 준우승으로 하드캐리했다. 페넌트레이스에서 음수 WAR을 찍은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한국시리즈 6차전 대구구장에서 삼성을 상대로 선제 스리런을 쳐내며 LG의 마지막 한국시리즈 홈런타자로 남아있다가 21년 후인 2023년 한국시리즈에서 오지환이 홈런을 기록하면서 이 기록이 끊어졌다.

저 포스트시즌이 엄청난 임팩트를 남겼는지 이후 김성근 경질 이후에도 이광환, 금지어 등에게 타격 재능과 괜찮은 수비를 인정받아 더 많은 기회를 받게 되고, 2004년에 풀타임 1루수로 .257에 98안타라는 미적지근한 성적을 기록했지만 15홈런을 때려내 그렇게 LG가 목말라하던 거포를 찾게 된다. 이때 그의 나이 34세. 그 이후 2005년에는 본인 생 최초의 3할 타율을 때려내나 부상으로 시즌의 1/3을 날려먹었고 2006년에는 마해영의 영입과 함께 2군에서 홈런왕에 올랐던 최길성에게 밀려 백업으로 밀려나 별 다른 타격 성적을 내지 못했다. 그나마 마해영의 2군 강등 이후 나머지 시즌을 주전으로 뛰기는 했지만 작년의 기대치에는 심히 못 미치는 1할대의 타격으로 시즌을 마쳐 LG가 꼴지로 떨어지는데 기여했다. 당시 36세로 나이도 많아 이대로 은퇴를 예상하는 팬들도 있었고 최동수를 응원하는 팬들도 최동수가 다음 해에 부진을 털어내고 반등할 수 있을까에 대해 의문을 표했다. 투고타저를 감안해도 22년 김헌곤이나 박경수마냥 아예 컨택이 되질 않았다. 나이도 많아서 반등 가능성은 제로에, 방출 가능성도 있었지만 마해영의 하락세도 크게 두드러졌던지라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한 건지 잔류. 이 때부터 그의 야구인생은 제대로 꽃을 피우기 시작하는데...


1.3. LG의 4번타자로 발돋움하다[편집]


그러나 2007년 김재박이 신임 감독으로 선임됨과 동시에 마해영이 .072(...)라는 형편없는 타격으로 팀에 구멍을 낸 덕에 다시 풀타임 기회를 받았다. 이 해 3할 6리에 12홈런-58타점을 올리면서 4번 타자로서 활약했다. 데뷔 첫 100안타도 이때 기록했다.[5] 재박존 설치 전이었고 나이 때문인지 완만하게 장타력이 하향곡선을 그리는 느낌이었으나 2007년은 투고타저 시즌이었고 .306의 타율은 .308의 이대형 다음가는 팀내 2위의 기록이었다. 2008년에는 부상으로 고생했지만 62타점을 올리면서 활약했다. 쿨가이는 찬물 같은 걸 끼얹고, 페땅볼발만 빠른 애가 스탯 관리에 여념이 없을 때 난세영웅과 더불어 그나마 좀 쳐 주던 그 당시 선수 생활의 황혼기에 접어들어 관심을 받기 시작한다. 선수 생활 전체 커리어를 보더라도 1990년대와 2000년대의 성적이 확연하게 다르며, 1990년대의 성적이 일천한 관계로 통산 타율은 .270이 안 되고, 통산 홈런 개수도 2012 시즌까지 합쳐서 90개에 불과하다.[6]

2007년 성적을 보면 타율은 높지만 타점은 중심타선이라기엔 적고 홈런도 더 많은 선수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최동수가 4번이었던 것은 박용택은 주로 5번 타자로 들어서고, 조인성은 포수다 보니 클린업보다는 6번 타자로써가 적절하다 여겨졌으며[7] 발데스는 3번 타자로 주로 나왔기 때문이다. 적은 타점도 생각보다 최동수 앞에 득점권 상황이 많이 나오질 않았다. 나름 당대 최고의 리드오프인 이대형이 있었고, 그 뒤를 받쳐줄 이종열도 리그 상위권 타자였으며, 발데스도 발이 느리고 장타력이 아쉬웠지만, 4할 근처의 출루율은 찍어줬기 때문. 타점 수에서 보이듯 대충 이대형이 나가기만 하면 이종열이나 발데스가 주자를 불러들이거나 드물게 발데스가 병살타로 찬물을 끼얹었기 때문에 최동수 앞의 주자는 비어있을 때가 많았다.


1.4. 2009 시즌[편집]


이 해 팀의 전략적 FA 신청의 일환으로 FA를 신청했는데, 다른 노장 선수들과 달리 나름대로 활약상이 있었던지라 돈을 더 받았다는 후문이 있다.[8] 한편 길고 긴 투고타저가 끝나가기 시작하고 페타지니의 우산효과와 X-존 어드밴티지를 얻은 덕에 타격은 작년보다 좋아졌지만 원체 느린 발이 더 느려져 팀 내 병살타 1위를 기록하는 수모를 뒤집어쓰기도 했다. 참고로 2위는 같은 팀의 투땅카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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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 와이번스와의 512 대첩에서, 연장 12회초에만 6실점하며 제대로 불지르던 우규민이 2사 3루 1볼 상황에서 던진 공이 타자 모창민의 등을 맞아서 우규민이 퇴장당했다.[9] 그런데 이날 LG는 불펜 투수들을 총동원한 터라 남은 투수가 선발 요원인 심수창밖에 없었고, 결국 최동수가 마운드에 올라왔다!!![10] 포수를 보아야 할 김정민이 이미 좌익수로 서 있었을 정도였는데, 최동수마저 투수가 됨으로써 LG는 수비 포지션이 제대로 파괴되었다.

최동수가 던진 초구는 시속 130km/h짜리 스트라이크!!! 그리고 상대 타자 박경완의 자비(?)로 2구만에 2루수 뜬공으로 잡아내며 통산 평균자책점 0.00의 투수가 됐다. 이로써 한국프로야구에서 김재박에 이어 2번째로 내야수투수, 포수 포지션을 경험한 선수가 됐다.[11] 당시 박경완은 “차마 제대로 칠 수가 없었다. 그냥 가만히 서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대충 휘둘러서 아웃됐다”며 웃었다. 그 경기에서 이진영은 최동수를 보고 “오승환인 줄 알았다. 돌직구를 던지더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리고 2009년 12월, 39세[12]의 나이에 드디어 결혼했다. 그런데 방출되었던 동갑내기 미혼 투수2012년에 플레잉코치가 되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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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신랑이고 누가 인지 구분이 안가지만, 최동수 옹 결혼식 사진 맞다. 봉중근은 일부러 센터에 올렸다고 한다.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고 라뱅을 부르려고 했으나 봉중근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한다.


1.5. 2010 시즌[편집]


외야가 기존 박용택-이대형-이진영 조합에서 큰 이병규가 복귀하고, 이택근마저 합류하는 바람에 LG는 주전감 5명을 전부 로스터에 채우기 위해 박용택을 벌크업시켜 지명타자로 보내고, 큰 이병규를 우익수에, 이대형을 중견수로 보내고 이택근을 좌익수로 보냈다. 자연스레 이진영은 1루수로 갔고 그로 인해 최동수는 주전에서 밀려났다. 작년 대비 갑작스레 줄어든 장타력과 생산력, 나이는 속일 수 없는지 부상에 의한 회복 속도도 더뎌져 LG에서 그의 입지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13] 그로 인해 LG는 팀 레전드이기도 한 최동수를 SK로 트레이드하는데...


2. SK 와이번스 시절[편집]



2.1. 2010 시즌[편집]


2010년 7월 28일 자로 SK 와이번스트레이드되었다. LG와 SK의 4:3 트레이드.[14]

권용관, 최동수, 안치용, 이재영윤상균[15], 박현준[16], 김선규

16년 동안 LG에 있었던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최동수가 SK로 간다는 점이 팬들을 아쉽게 하지만, 본인은 새로운 기회가 있고 무엇보다 그가 존경하는 김성근 감독이 이끌고 있었던 SK 와이번스로 가는 것을 굉장히 반겼다. LG 수석코치 및 감독 시절에 가장 훈련을 열심히 하던 노력파 최동수를 아꼈던 김성근 감독이 최동수를 트레이드 카드로 특별히 원해서 챙겼다고 한다. 그 성실함은 대단해서, 2001년 당시 엄청난 양의 훈련으로 유명한 김성근 감독이 "너 이제 연습 그만하고 좀 쉬어라" 라고 말한 유일한 선수가 최동수였다. 당시 오죽했으면 특타로 인해 굽어 버린 최동수의 손을 김성근 감독이 손수 펴 줬다고 할 정도라고 한다.[17]

최동수의 노력에 관한 일화로, 과거 팀이 부진한 행보를 거듭하고 있을 때 후배들을 세워놓고 "요즘 팀 분위기가 많이 안 좋으니까, 내일은 일찍 나와서 특타를 한 번 하자" 라고 말했지만 정작 그 다음 날에는 딱 한 명만 나왔다(…). 그 이름은 박경수였다. 근데 나름대로 한다고 하시는 이 두 분은 항상 멘도사 라인 근처에서 노시는 분이라 혼자 나온 것보다 더 슬프다.[18]

여담이지만 트레이드 당일 최동수가 김성근 감독에게 전화하니까, 김성근 감독은 팀이 훈련 중인 고등학교 운동장으로 바로 나와서 특타하라고 지시하여 SK 선수단에 합류했다. 그리고서 그 날에 있었던 잠실 LG전에서 1군에 바로 등록되자마자 8번 타자 1루수로 선발 출장하였고 6회 초 김광수를 상대로 쫓아가는 3점 홈런을 날렸다. 그 날 최동수는 4타수 1안타 4타점을 올렸지만, 권용관이 끝내기 실책을 저지르면서 팀이 패하고 말았다. 그 날 경기에서는 트레이드 맞상대 투수들인 김선규, 박현준, 이재영을 제외하고 트레이드 맞상대 타자들이 모두 출장하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8월 8일 경기 8회말에 쐐기를 박는 솔로 홈런을 기록했으나 이후 부진으로 2군에 가 있는 기간이 늘어났고, 비슷하게 생긴 1호기와 함께 쌍로또로 까였다.

하지만 9월 26일 2010년 마지막 경기에 출장, 8회초에 3루수로, 9회초에는 2루수로 의도치 않은 멀티 플레이어가 되었으며 9회말 1사 1, 2루 상황에서 2010년 페넌트레이스를 끝내버리는 안타를 쳤다!

과연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를 한국시리즈 우승을 경험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결국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들지는 못했다. 다만 그 때와 달리 이번에는 당당히 1군 엔트리에 이름을 올렸다. 그가 데뷔한 1994년은 LG 트윈스가 한국시리즈에서 태평양 돌핀스를 꺾고 우승한 해이지만 2군에만 있었기 때문에 코시 우승을 함께하지 못했다.(2002년 한국시리즈가 유일한 출전 기록이다.) 1994년과 2010년 모두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들어가 활약한 김재현의 경우와는 정반대다. 그래도 대만전과 한일 클럽 챔피언십에는 나왔다. 국제전은 이번이 첫 경험. 대만전은 출전은 못했지만.


2.2. 2011 시즌[편집]


2011 시즌을 앞두고 나주환-모창민의 입대와 권용관의 수술로 내야 자원이 부족해지자 3루수 훈련을 하게 되었다. 김성근 감독의 뜻으로 보이며, SK로 온 안경현이 2루수 연습을 했던 것과 같이 주전은 무리일지라도 백업으로서의 역할을 기대했던 듯. 만약 최동수가 선발 3루로 나오는 일이 발생하면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가 스프링캠프 동안 지옥훈련으로 회춘했거나, 그게 아니라면 기존 3루수 자원인 최정, 김연훈의 상태가 몽땅 시망했던가.

그런데...3월 16일 한화 이글스와의 시범경기에서 10년 만에 포수 마스크를 썼다. 이유는 사람이 없어서 박경완, 정상호가 모두 부상으로 빠져 있었고 3rd였던 김정남은 그 전날 부진했다. 3회부터 최경철 대신 맡았는데 초반엔 많이 흔들렸지만 김경언을 홈에서 블로킹으로, 한상훈의 도루 저지도 잡아내는 등 10년간 포수를 쉬었던 선수 치고는 훌륭히 역할을 잘 수행했다.

참고로 LG 트윈스 갤러리의 반응은 "우리도 그런 짓은 안했는데..." # 하지만 본인은 장난으로 포수를 맡았던 건 아닌 듯하다.

2011년 4월 10일 삼성전에서 패전 처리조로 투입되어 비교적 안정적으로 포수로서 기능을 수행했다.

2011년 4월 13일 정상호가 부상당하고 박경완이 1군에 등록됐는데 박경완의 건강이 안 좋았던 탓에 5회부터 경기 끝까지 포수를 보게 되었다.

4월 20일 LG와의 김광현 선발 경기에서 정상호가 앉아서 중전 2루타를 상대에게 헌납하자 1회에 교체 투입 포수에 4번 타자로...경기를 치룬다. 이날 SK는 LG에게 도루 8개를 허용하면서...(물론 도루 저지도 하나 기록.) 지고 만다.

2010년 준플레이오프 5차전의 강민호 송구에러를 떠올리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경기 후 김성근 감독은 "정상호가 그 상황에서 그렇게 던지는 게 맞다, 그를 교체한 것은 볼배합의 문제때문이었다"고 했다. 실드 쳐 준 듯하지만 보는 이들은...

그리고 5월 5일, 10년만에 포수로 선발출장하게 되었다. 관련 기사 결과는 도루저지 하나에 쓰리런 하나! 이 활약으로 당일 MVP도 되었다. 원래 LG에서도 평판이 좋은 사람이었는데 SK로 이적한 뒤 3루수에 포수까지 보면서 분투하는 모습이 많은 사람들에게 호감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5월 13일 두산전에서는 대타로 출정하여 1타점을 기록했다. 5월 14일 두산전에선 매그레인 선발에 맞추어(…) 선발 포수로 나왔고 두산에게 2:0으로 패했다.

그 이후 큰 활약이 없었다가 정근우가 부상으로 빠지면서 1군에 복귀 8월 4일날 선발 출장, LG의 투수 이대환의 공을 받아쳐 SK의 2011시즌 첫 만루 홈런을 만드는 쾌거를 이룩했다. 4:1의 상황에서 쐐기포가 된 극적인 홈런.

그리고 만루포를 계기로 긁혔는지 8월 5일 KIA 타이거즈 전에서 2011시즌 최강의 포스를 뽐내고 있는 윤석민에게 만루상황에서 2타점 적시타까지 쳤다. 이 날 경기에서는 MLB 스카우터가 와서 경기를 봤다고 하던데….

만루포 이후로 타격감이 좋아서 8월 14일 기준으로 팀 타점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2군에 있었을 때 타격 폼을 수정을 했는데 최정의 타격폼을 참고했다고 한다. #

그런데 김성근 감독 경질 후 이만수가 감독이 되자 분명 잘 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대타로 나오거나 경기 초반 1루수로 나와서 잠깐 수비하고 한 타석 정도 나오고 나면 빠진다거나 하는 경우가 많았다. 안치용도 마찬가지로 플래툰을 돌았다…. SK팬뿐만 아니라 LG팬들도 안타까워하였다.

9월 21일 사직 롯데전에서 결승 2타점 적시타를 날리며 대타 타율 5할을 채웠다. 경기후 이만수 감독대행이 인터뷰에서 최동수를 선발로 쓰면 대타감이 없어서 선발로 쓰지 않고 대타로 쓴다고 했다.


2.2.1. 포스트시즌[편집]


어쨌든 간에 그는 포스트 시즌 엔트리에 등록되어 무려 9년 만에 포스트 시즌을 경험하게 됐다. 2011년 10월 8일 문학 야구장에서 열린 KIA 타이거즈와의 2011년 준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9회말 대타로 나와서 윤석민을 상대로 솔로 홈런을 쳤다. 이는 당시 포스트시즌 최고령 홈런이다. 참고로 이전까지의 최고령 홈런기록은 양준혁. 덕분에 팀은 윤석민의 완봉승을 막고 1:5로 완투패를 당하였다.

최동수는 2011년 준 플레이오프에서 8타수 2안타 1볼넷 1타점 1득점 타율 .250, 장타율 .625, 출루율 .333을 기록하였다.

최동수는 롯데 자이언츠와의 2011년 플레이오프에서 9타수 1안타 1도루 1타점 타율, 장타율, 출루율 모두 .111을 기록하였다.

팀이 시리즈 전적 2패로 지던 2011년 10월 28일 문학 야구장에서 열린 삼성 라이온즈와의 2011년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 팀이 0:1로 앞서고 있던 5회말에 저마노를 상대로 솔로 홈런을 날려서 자신이 갖고 있던 포스트시즌 최고령 홈런 기록을 20일만에 경신했다. 최동수는 이날 3타수 1안타 1홈런 1타점 1득점을 기록하였고, 팀은 스코어 1:2로 이겼다.

2011년 10월 29일 문학 야구장에서 열린 2011년 한국시리즈 4차전에서 팀이 스코어 5:1로 지던 7회말에 박재상의 뜬금 3점포로 5:4로 따라잡은 순간에 안지만을 상대로 1사 1, 3루 상황에서 통한의 병살타를 쳐 버렸다. 최동수는 이날 4타수 1안타를 기록하였고, 결국 7회 말에 추격의 동력을 잃은 SK 와이번스는 8회, 9회 박희수이승호가 연속으로 무너져 스코어 8:4로 패하고 말았다.

최동수는 2011년 한국시리즈에서 14타수 4안타 1홈런 1타점 1득점 타율 .286, 장타율 .571, 출루율 .286을 기록하였고, 팀은 시리즈 전적 1승 4패로 준우승에 그쳤다.

최동수의 2011년 포스트시즌 성적은 31타수 7안타 2홈런 1볼넷 1도루 3타점 2득점 타율 .226, 장타율 .452, 출루율 .250.


3. LG 트윈스 2기[편집]



3.1. 2012 시즌[편집]


2011년 11월 22일 2차드래프트에서 친정 팀 LG 트윈스 도로 이적했다. 이로써 한 시즌 반 만에 친정 팀으로의 컴백이 확정되었다!!!

동계훈련 체력 테스트를 단번에 통과하며 큰 기대를 끌기도 했다.

2012년 시즌이 시작되기 직전 이종범의 은퇴로 동갑내기인 류택현과 함께 최고령 선수에 등극했다. 그런데 KIA 타이거즈에서 같은 1971년생인 최향남을 재영입하면서 그보다 생일이 비교적 빠른 최향남이 최고령 선수가 되어 최동수는 졸지에 뒤로 밀려났다(…). 그래도 2012년 시즌 기준 KBO 최고령 타자.

1루로 되돌아온 작은 이병규와 함께 상대팀 선발투수에 따른 1루 플래툰을 하였다. 주전으로 나오지 못하더라도 장타력이 있기 때문에 대타로서도 유용하게 기용되었다. 4월 20일 기준으로 타율이 무려 3할이다. 이는 박용택, 이대형보다 높은 수치. 다만, 나이가 많다보니 실수를 조금 하더라도 더 많이 까였다.

5월 13일 삼성전에서 7회초 1사 3루인 상황에 이승엽의 1루 땅볼 타구를 무릎을 꿇으며 잘 막고 3루에 있던 진갑용을 잡으러 홈으로 던졌는데, 포수가 주자와 등을 지고 있는 상황이라 잡을 수 없었다. 주자는 세이프해서 역전점도 허용하고 1루 찍는걸 깜빡해서 이승엽까지 살려줘 버렸다. 2사 주자 없음이, 1사 1루로 둔갑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5월 15일~16일 연달아서 뇌수비를 선보이면서 제대로 까였다. 16일 SK전에서는 1루 주자 조인성의 리드 폭이 큰 것을 간파한 투수 이동현견제구를 던졌고 조인성은 귀루하지 못했지만 태그할 생각도 않고 멍때리다가 주자를 살려주는 뇌수비를 보여줬다. 여기에 흔들린 이동현은 번트 타구를 더듬으면서 졸지에 무사 1,2루가 되었고 적시타를 맞으며 지고 있던 경기를 완전히 넘겨줬다. LG팬들 사이에서는 채태인이 빙의한 거 아니나며 욕을 날렸고 최동수의 실책이 패배로 직결되기도 해서 수비문제로 이래저래 까였다. 포구에서도 문제를 보이는 터라 내야진의 실책도 덩달아 늘었다.

결국 2012 시즌을 252타수 70안타 타율 .278 홈런 1개 타점 37점 출루율 .346 장타율 .321 OPS .667로 시즌을 마감했다. 나이가 나이다 보니 장타력이 눈에 띄게 준 모습도 보이고, 1루 수비도 많이 쇠퇴하였다.


3.2. 2013 시즌[편집]


출장 기록이 없다시피하다. 얘기에 의하면 선수로 뛰는 건 거의 접었고, 육성군에서 코치 수업을 받고 있다고 한다. 2013년 문학 야구장에서 열렸던 개막 2연전에서 2타석만 뛰었고, 2013년 막바지에 비선수로 선수들과 동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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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0월 5일 두산전을 마치고 은퇴식을 열었다. 그 날 LG 트윈스두산 베어스를 꺾고 비밀번호를 종료시키면서 플레이오프에 직행하여 의미 있는 경기가 되었다.

그리고 몇 년 후, 포수 출신에 신고선수로 입단하고 몇 년간 2군에서 활동했으며 성씨도 ㅊ으로 시작하는 우타 4번타자가 그의 친정팀 LG에 생겼다. 최동수와 같이 현재는 평가가 최악이지만 당시에는 좋은 평가를 받은 감독들에게 발굴되어 팀의 핵심을 담당하는 1루수인것도 공통점.[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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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의 입단 동기로 류지현, 서용빈, 김재현(고졸), 인현배, 박철홍, 신윤호(고졸) 등이 있었고 이 중 최동수와 신윤호를 제외한 모두가 94년 우승에 공헌했다.[2] 다만 이는 김정민의 부상 때문이었다.[3] 1998~99년은 1군에서 1루수로만 출장했다.[4] 사실 이건 수비 면에서 SSS급 포수가 넘쳐나던 90년대 후빈~00년대 초의 LG 포수진 때문에 비교적 성에 안 찬 거지, 포수가 약한 팀이라면 만족할 만한 수비력을 가진 편이었다. 만약 최동수가 당시 최악의 포수난을 기록한 백인천 시기 삼성에 있었다면 단번에 주전포수 자리를 꿰찼을 것이다.[5] 여담으로 이 100안타의 순간이 굉장히 극적이었다. 8월 22일 현대와의 수원 원정에서 9회초 2사까지 팀은 3-5로 끌려가며 패배 직전에 있었으나 2사 만루에서 현대의 마무리 조용훈에게 풀카운트 끝에 역전 만루홈런을 쳐 극적인 승리를 이끌어냈다.[6] 통산 50홈런도 못치고 은퇴하는 선수들도 많은데 90개를 쳤다면 이 정도도 대단한 것이다.[7] 조인성이 5번에서 심각하게 못 친 탓도 있다.[8] 이 때 FA를 같이 신청한 다른 선수들은 계약금 포함해서 연봉이 동결되거나 오히려 줄기도 했다.[9] 사실 전일수 주심의 엄청난 편파판정 때문에 SK가 득점한 것이고 우규민은 실수로 모창민의 몸을 맞춘 것에다가 사실 모창민 전에 나왔던 나주환은 몸에 맞는 순간에 배트를 더 갖다 대는 동작을 취했다. 누가 봐도 명백한 스윙동작이었으나 전일수 주심이 사구 처리시키고서 모창민까지 몸에 맞자 우규민을 어거지로 퇴장시킨 것이다.[10] 참고로 이 경기에서 최동수는 지명타자로 선발 출장했다. 그래서 선택된 듯. 당시 3루수 정성훈과 우익수 이진영이 서로 던지겠다고 마운드로 걸어왔으나 김재박 감독이 최동수 자신을 지목했다고 밝힌 바 있다.[11] 참고로 3번째는 최정, 4번째는 강백호.[12] 만으로는 38살.[13] 참고로 1루수 자리는 이진영이 맡다가 부상 이탈 후 이택근이 1루수로 넘어갔다. 그 동안 공백이 생긴 외야는 작뱅이 갑작스레 나타나 활약했고 이진영 복귀 뒤에는 라뱅을 좌익수로 밀어내고 이진영이 우익수를 맡았다.[14] 트레이드 승자는 결론부터 얘기하면, 박현준의 승부조작으로 SK가 압승을 거둔 트레이드다.[15] 2012년 윤요섭으로 개명.[16] 승부조작으로 영구제명.[17] 김성근 자서전에 해당 내용이 나온다. 자기가 제시한 훈련 스케줄을 유일하게 전부 소화한 선수는 최동수였으며, 훈련 기간에 1일 5천번의 스윙을 실제로 해냈다고 한다. 5,000번을 휘두를 동안 방망이를 놓질 않아 스윙을 끝내면 배트를 잡은 손이 굳어서 펴지지 않아 누군가 대신 손가락을 펴 줘야 배트를 놓을 수 있었다고. 최동수 선수도 당시에는 훈련이 끝나면 토하는 것 외에는 할 게 없었다고 말했다. 그 노력은 뒤늦게나마 결실을 맺게 된다.[18] 이 둘의 노력은 둘 다 선수생활 후반기에가서야 빛을 보게 된다. 특히 박경수는 KT로 이적한 이후 KBO 탑클래스 2루수로 성장하게 되고, 2021년 한국시리즈에서는 시리즈 MVP를 수상하게 된다.[19] 채은성은 22년부터 1루수로 전업한다. 다만 한화 이글스 이적 이후에는 한화의 외야가 워낙 답이 없는 관계로 다시 우익수로 출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