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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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였던 1915년 5월 1일부터 미군정기인 1946년 7월 31일까지 제주도(섬)와 그 부속도서, 추자군도에 존재했던 식민지 조선 전라남도 산하 행정구역이다.
1914년 3월 1일에 조선총독부가 부군면 통폐합을 단행하면서 정의군, 대정군 및 완도군 일부(추자도, 횡간도)가 제주군으로 통폐합되었고, 같은 해 4월 1일에 구 제주군 중면, 구 정의군 좌면, 구 대정군 우면을 각각 제주면, 정의면, 대정면으로 개칭하였다.
1년 뒤인 1915년에 일제는 경상북도 울도군과 같이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이라는 특수성을 반영하여 육지처럼 효율적으로 통치하고 수탈하기 위해 도제(島制)를 실시하면서 기존 제주군을 폐지하고 제주도를 설치하고 섬 전체의 행정을 통솔하는 도사(島司)를 파견했다.
도사는 경찰서장을 겸직하여 치안 사무도 함께 처리했고, 섬에 적용되는 법령인 도령(島令)을 내릴 권한을 가지고 있어, 행정, 치안, 입법을 모두 장악한, 식민지 안의 작은 총독이나 다름 없었다. 뿐만 아니라 농업조합장, 산림조합장, 수산조합장은 물론 해녀조합장까지 겸직하며 제주도내 모든 산업 분야에서 전권을 행사했다. 이로 인해 일제강점기 내내 제주는 다른 지역보다 더 혹독하게 수탈을 당했다. 같은 섬 지역인데도 대만처럼 발전이 가능한 기간시설을 깔아놓지 않았다. 특히 제주도사가 해녀조합장을 겸직하면서 해녀조합이 어용조합으로 변질되는 바람에 혹독하게 수탈에 시달리던 해녀들이 들고 일어나기도 했다.
1920년에 제주면(2006년 이전 구 제주시 지역)을 지정면으로 정하였고, 1931년 4월 1일에 제주면이 제주읍으로 승격되었다.
1935년 4월 1일에 구좌면, 대정면을 제외한 면 명칭이 (주로) 면소재지 이름으로 개칭되었다. 면명 개칭 전까지 제주도 안에 방위를 기준으로 작명된 면이 구좌·좌·신좌·동중·중·서중·구우·우·신우면 9개 면이나 되는 혼란이 일어났으며, 구좌면·신좌면은 동쪽에, 구우면·신우면은 서쪽에 있는데 좌면은 서쪽에, 우면은 동쪽에 있는 등 완전히 행정구역 방위와 이름이 뒤죽박죽된 상태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제주도 사람들이 일본과 매우 긴밀히 연결된 편이었다. 제주도 인구의 1/4 정도 되는 인구가 일본 오사카 쪽으로 일하러 갔다 왔을 정도다. 8.15 광복 시점의 제주 인구가 30만 명 정도인데 이 가운데 10만 명 가까이가 오사카 등 공장지역에서 일하다가 광복과 함께 귀향한 인원이라 한다. 하지만 3년 후인 1948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각하면... 물론 당시 조선총독부와 일본인 지주에 대한 감정이 좋았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고, 제주도에서 소규모였지만 의병이 일어나고 3.1 운동 이전의 법정사항일운동이나 3.1 운동의 일환인 조천만세운동, 일제의 경제수탈에 맞선 해녀항일운동 등 일본 제국에 저항하는 일이 이어졌다.
지금도 재일교포 중에서 조상이 제주도 출신인 경우가 많다. 재일교포 100만명 중에서 제주도가 본적이거나 고향인 사람이 20만에 달한다고 한다.[1] 제주도 인구가 대한민국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 정도라는 걸 생각한다면 굉장히 큰 비중을 차지한다. 다큐멘터리로도 소개된 모리오카 냉면 체인인 뿅뿅사의 창업자인 변용웅의 부모도 제주도 출신이었으며, 북한 김정은의 어머니 고영희 또한 제주도 출신 교포 부부의 자녀로 조총련 소속이었다가 북한에 들어간 후 김정일과 만났다고 한다. 일본 최대의 도시락 체인 혼께 가마도야사의 오너인 김홍주씨도 제주도가 고향. 혼께 가마도야사의 국내 협력사가 한솥도시락으로 일본에서의 운영 방식을 한국에도 그대로 도입했다고 한다. 한국에서도 잘 알려진 재일 음악가 양방언 역시 아버지가 제주시 한림읍 협재리 출신이다.
다만 인구 대비 재일교포가 많은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시대부터 이루어진 식자층의 유배였기 때문이다. 사실상 제주도에서의 유배는 다시는 육지를 밟지 못하는 경우가 가장 많았고 이 때문에 제주도에서 아예 살림을 차리는 경우가 많았는데, 유배의 특성상 식자층들이 많이 찾아왔다. 거기다 유교 문화로 인해 배움을 중시하는 특성상 그 좁은 제주도 곳곳에 사당이 세워지고 식자들이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조선시대는 물론이고 해방 이후 초·중등교육이 의무화 되기 전까지 문맹률이 가장 낮은 지역 또한 제주도였다. 이 때문에 신식문물에 대한 반감이 덜하고 같은 한자문화권이다 보니 글로 어느정도 통해서 많은 이들이 일본으로 넘어갔다.
태평양 전쟁 말기 일본군은 "결호작전"에 따라 미군의 상륙작전에 대비하고자 했고 전 일본영토에 요새화를 지시했는데, 제주도는 중국과 일본 사이에 있는 전략적 거점이었기 때문에 "결7호 작전"에 따라 요새화가 시작되었다. 섬 곳곳에 토치카와 지하땅굴이 파여졌으며 항공대가 주둔했다. 해안 절벽엔 가이텐이나 신요와 같은 자폭병기들이 배치되었고 이 과정에서 제주도민들이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고 강제공출로 주민들의 생활은 피폐해졌다. 이때 흔적들이 아직도 남아있으며 땅굴은 제주도에 수학여행가는 학교들이 많이 거쳐가는 곳이기도 하다. 168cm 정도 키인 사람도 정신줄 놓고 똑바로 서서 다니다가는 머리를 부딪치는 적이 있는 땅굴이다.
이 시기 제주도의 요새화에 관해서는 결7호 작전 문서를 참고할 것.
제주 해안을 둘러보다 보면 많이 볼 수 있는데, 자연동굴도 있겠지만 인공 동굴의 숫자도 무시못할 수준이다.
소규모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제주도가 미군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 #
올림픽 작전과 몰락 작전이 실제로 실행되었다면 제주도는 오키나와 전투 못지 않은 치열한 전쟁터가 되었을 것이다. 지리적 특성상 한반도와 일본 본토, 중국 대륙을 연결하는 지점인 만큼 큰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점령하려고 시도했을 것이다.
미군정 시기에 전라남도에서 제주도(濟州道)를 분리하고 산하에 북제주군과 남제주군을 설치하면서 폐지되었다. 마지막 제주도사는 미군정이 임명한 박경훈이었는데, 제주도가 분리 신설된 후 초대 제주도지사를 역임하였다.
북제주군과 남제주군으로 분리되어 폐지될 때 행정구역도
1. 개요[편집]
일제강점기였던 1915년 5월 1일부터 미군정기인 1946년 7월 31일까지 제주도(섬)와 그 부속도서, 추자군도에 존재했던 식민지 조선 전라남도 산하 행정구역이다.
2. 역사[편집]
1914년 3월 1일에 조선총독부가 부군면 통폐합을 단행하면서 정의군, 대정군 및 완도군 일부(추자도, 횡간도)가 제주군으로 통폐합되었고, 같은 해 4월 1일에 구 제주군 중면, 구 정의군 좌면, 구 대정군 우면을 각각 제주면, 정의면, 대정면으로 개칭하였다.
1년 뒤인 1915년에 일제는 경상북도 울도군과 같이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이라는 특수성을 반영하여 육지처럼 효율적으로 통치하고 수탈하기 위해 도제(島制)를 실시하면서 기존 제주군을 폐지하고 제주도를 설치하고 섬 전체의 행정을 통솔하는 도사(島司)를 파견했다.
도사는 경찰서장을 겸직하여 치안 사무도 함께 처리했고, 섬에 적용되는 법령인 도령(島令)을 내릴 권한을 가지고 있어, 행정, 치안, 입법을 모두 장악한, 식민지 안의 작은 총독이나 다름 없었다. 뿐만 아니라 농업조합장, 산림조합장, 수산조합장은 물론 해녀조합장까지 겸직하며 제주도내 모든 산업 분야에서 전권을 행사했다. 이로 인해 일제강점기 내내 제주는 다른 지역보다 더 혹독하게 수탈을 당했다. 같은 섬 지역인데도 대만처럼 발전이 가능한 기간시설을 깔아놓지 않았다. 특히 제주도사가 해녀조합장을 겸직하면서 해녀조합이 어용조합으로 변질되는 바람에 혹독하게 수탈에 시달리던 해녀들이 들고 일어나기도 했다.
1920년에 제주면(2006년 이전 구 제주시 지역)을 지정면으로 정하였고, 1931년 4월 1일에 제주면이 제주읍으로 승격되었다.
1935년 4월 1일에 구좌면, 대정면을 제외한 면 명칭이 (주로) 면소재지 이름으로 개칭되었다. 면명 개칭 전까지 제주도 안에 방위를 기준으로 작명된 면이 구좌·좌·신좌·동중·중·서중·구우·우·신우면 9개 면이나 되는 혼란이 일어났으며, 구좌면·신좌면은 동쪽에, 구우면·신우면은 서쪽에 있는데 좌면은 서쪽에, 우면은 동쪽에 있는 등 완전히 행정구역 방위와 이름이 뒤죽박죽된 상태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제주도 사람들이 일본과 매우 긴밀히 연결된 편이었다. 제주도 인구의 1/4 정도 되는 인구가 일본 오사카 쪽으로 일하러 갔다 왔을 정도다. 8.15 광복 시점의 제주 인구가 30만 명 정도인데 이 가운데 10만 명 가까이가 오사카 등 공장지역에서 일하다가 광복과 함께 귀향한 인원이라 한다. 하지만 3년 후인 1948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각하면... 물론 당시 조선총독부와 일본인 지주에 대한 감정이 좋았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고, 제주도에서 소규모였지만 의병이 일어나고 3.1 운동 이전의 법정사항일운동이나 3.1 운동의 일환인 조천만세운동, 일제의 경제수탈에 맞선 해녀항일운동 등 일본 제국에 저항하는 일이 이어졌다.
지금도 재일교포 중에서 조상이 제주도 출신인 경우가 많다. 재일교포 100만명 중에서 제주도가 본적이거나 고향인 사람이 20만에 달한다고 한다.[1] 제주도 인구가 대한민국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 정도라는 걸 생각한다면 굉장히 큰 비중을 차지한다. 다큐멘터리로도 소개된 모리오카 냉면 체인인 뿅뿅사의 창업자인 변용웅의 부모도 제주도 출신이었으며, 북한 김정은의 어머니 고영희 또한 제주도 출신 교포 부부의 자녀로 조총련 소속이었다가 북한에 들어간 후 김정일과 만났다고 한다. 일본 최대의 도시락 체인 혼께 가마도야사의 오너인 김홍주씨도 제주도가 고향. 혼께 가마도야사의 국내 협력사가 한솥도시락으로 일본에서의 운영 방식을 한국에도 그대로 도입했다고 한다. 한국에서도 잘 알려진 재일 음악가 양방언 역시 아버지가 제주시 한림읍 협재리 출신이다.
다만 인구 대비 재일교포가 많은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시대부터 이루어진 식자층의 유배였기 때문이다. 사실상 제주도에서의 유배는 다시는 육지를 밟지 못하는 경우가 가장 많았고 이 때문에 제주도에서 아예 살림을 차리는 경우가 많았는데, 유배의 특성상 식자층들이 많이 찾아왔다. 거기다 유교 문화로 인해 배움을 중시하는 특성상 그 좁은 제주도 곳곳에 사당이 세워지고 식자들이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조선시대는 물론이고 해방 이후 초·중등교육이 의무화 되기 전까지 문맹률이 가장 낮은 지역 또한 제주도였다. 이 때문에 신식문물에 대한 반감이 덜하고 같은 한자문화권이다 보니 글로 어느정도 통해서 많은 이들이 일본으로 넘어갔다.
태평양 전쟁 말기 일본군은 "결호작전"에 따라 미군의 상륙작전에 대비하고자 했고 전 일본영토에 요새화를 지시했는데, 제주도는 중국과 일본 사이에 있는 전략적 거점이었기 때문에 "결7호 작전"에 따라 요새화가 시작되었다. 섬 곳곳에 토치카와 지하땅굴이 파여졌으며 항공대가 주둔했다. 해안 절벽엔 가이텐이나 신요와 같은 자폭병기들이 배치되었고 이 과정에서 제주도민들이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고 강제공출로 주민들의 생활은 피폐해졌다. 이때 흔적들이 아직도 남아있으며 땅굴은 제주도에 수학여행가는 학교들이 많이 거쳐가는 곳이기도 하다. 168cm 정도 키인 사람도 정신줄 놓고 똑바로 서서 다니다가는 머리를 부딪치는 적이 있는 땅굴이다.
이 시기 제주도의 요새화에 관해서는 결7호 작전 문서를 참고할 것.
제주 해안을 둘러보다 보면 많이 볼 수 있는데, 자연동굴도 있겠지만 인공 동굴의 숫자도 무시못할 수준이다.
소규모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제주도가 미군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 #
올림픽 작전과 몰락 작전이 실제로 실행되었다면 제주도는 오키나와 전투 못지 않은 치열한 전쟁터가 되었을 것이다. 지리적 특성상 한반도와 일본 본토, 중국 대륙을 연결하는 지점인 만큼 큰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점령하려고 시도했을 것이다.
미군정 시기에 전라남도에서 제주도(濟州道)를 분리하고 산하에 북제주군과 남제주군을 설치하면서 폐지되었다. 마지막 제주도사는 미군정이 임명한 박경훈이었는데, 제주도가 분리 신설된 후 초대 제주도지사를 역임하였다.
3. 행정구역[편집]
북제주군과 남제주군으로 분리되어 폐지될 때 행정구역도
4. 역대 제주도사[편집]
[1] 나머지 80%에서 각각 과반수 이상은 영호남,소수는 강원도,충청도,경기도 그리고 이북 지역 출신[2] 전 조선총독부 경찰관.[겸직] A B C D 제주도 경찰서장.[3] 조선총독부 최후의 제주도 도사(島司)[4] 오노 도사의 후임으로 추천되어 임명됐으나 임지에 부임하지 않았음.[5] 최초이자 마지막 서양인 제주도 도사. 현역 미국 육군 소령이자 미군정 제59군정 중대 사령관 겸임.[6] 마지막 제주도 도사. 제주도(濟州道) 설치후 초대 도지사 승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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