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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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제2차 세계 대전은 1939년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에 의해 발발하여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 일본 제국 3국을 중심으로 한 추축국과, 이에 미국과 영국, 소련, 중화민국, 프랑스가 이끄는 연합국[4] 이 맞서면서 1945년 일본 제국이 항복할 때까지 총 6년 동안 이어진 전쟁이다.[5]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21년 만에 두 번째로 일어난 세계 대전으로, 현재까지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이자 최악의 전쟁으로 평가받는다.
2. 서론[편집]
제2차 세계 대전은 대체로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을 시발점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8]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의 집권 이후 베르사유 조약의 준수를 거부하고[9] 범게르만주의 이념에 기반한 팽창주의적 행보를 보이던 독일은 급격한 군 재무장을 시행하고 폴란드 침공 이전부터 안슐루스와 뮌헨 협정 등으로 주변국들을 흡수하는 등[10] 그 세를 불리며 영국, 프랑스와 지속적인 마찰을 빚고 있었다.[11]This morning the British Ambassador in Berlin handed the German Government a final Note stating that unless we heard from them by 11 0'clock that they were prepared at once to withdraw their troops from Poland a state of war would exist between us. I have to tell you now that no such undertaking has been received, and that consequently this country is at war with Germany.
오늘 아침 베를린 주재 영국 대사는 독일 정부에 11시까지 그들의 군대가 폴란드에서 후퇴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소식이 없을 시, 양국 간의 전시 상태가 있을 것임을 알리는 최후 통첩을 전달하였습니다. 저는 지금 이 통첩에 대한 아무런 답신이 없었으며, 그 결과 우리나라가 독일과의 전쟁에 돌입했음을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이 전쟁에서 공격 측이었던 추축국 진영은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 일본 제국 3국이 이끌었으며, 방어와 반격 측이었던 연합국 진영은 미국, 영국, 소련, 중화민국, 프랑스 5국이 이끌었다.[12] 애초부터 사실상 연합국에 비해 추축국은 상대적으로 국력이 부족했고[13] 제국주의 열강인 이탈리아 왕국이 생각보다 전쟁에서 크게 활약하지 못하면서 추축국은 전쟁 초반부[14] 의 빠른 승세 이후 정체되었으며, 특히 나치 독일의 성공적이지 못한 소련 침공과 미국의 제2차 세계 대전 개입이 결정타가 되면서 빠르게 몰락했다.
이탈리아 왕국은 종전보다 2년 앞서 베니토 무솔리니를 축출하고 연합국에 항복해 진영을 바꾸었으며[15] 나치 독일은 베를린 공방전 이후 아돌프 히틀러가 퓌러붕커에서 권총 자살을 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항복하였고, 일본 제국은 미국의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에 소련의 침공까지 겹치자 쇼와 덴노가 옥음방송을 통해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전쟁 이후 추축국의 전쟁 범죄자들을 처벌하기 위해 각각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과 극동국제군사재판이 실시되어 독일과 일본의 전범들을 재판했고 이들 중 핵심적인 범죄자들은 사형 선고를 받고 교수형을 당하였다.
약 7,300만여 명[16] 의 인명이 희생되고 가공할 재산 피해를 발생시킨 이 전쟁으로 인해 오랜 시간 세계를 지배한 제국주의와 유럽의 식민 제국들은 완전히 몰락했다.[17] 그 대신 미국과 소련이라는 새로운 초강대국들이 등장해 냉전과 현대 국제 정세의 발판을 마련하였으며, 역사상 최초로 사용된 핵무기는 전쟁사, 나아가 인류에게 완전히 새로운 국면을 가져다주었다. 오늘날의 국제정세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확립된 질서를 배경으로 움직이고 있으며, 구 유럽식 제국주의와 전체주의적 파시즘은 제2차 세계 대전을 기점으로 국제사회에서 대부분의 세를 잃어버린다.
3. 원인[편집]
자세한 내용은 제2차 세계 대전/원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발단[편집]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 원인은 제1차 세계 대전의 패배로 인한 독일 제국의 무기력한 붕괴와 대공황으로 인한 전세계적인 불안, 소련으로 대표되는 사회주의 세력의 확대에 대한 불안 등 명확하지 않고 복잡하다.
일반적으로 대공황에 따른 경제 위기로 부상한 파시즘과 이에 따른 베르사유 조약에 대한 바이마르 공화국의 반발 및 기존 세계 질서에서 만족할 만한 패권을 가지고 있지 않던 일본 제국과 이탈리아 왕국의 보상심리가 원인으로 알려져 있다.
결국 결론적으로 제1차 세계 대전의 수습과 전후 정리 과정에서 현실과 미래를 예단하지 못한 이해당사자들의 인지부조화가 쌓이면서 터진 제1차 세계 대전의 연장선상에 있는 전쟁으로 보는 의견이 학계의 주류로 올라섰다. 이 문단에서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까지 세계가 어떤 과정을 겪었는지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4.1. 혼란한 독일과 나치의 집권[편집]
독일에게 불필요한 굴욕을 주어 그들이 복수할 마음을 품게 해서는 안 된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 원정군 사령관 더글러스 헤이그
제1차 세계 대전에서의 패배는 독일에게 재앙과도 같은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 독일 제국이 멸망하고 탄생한 새로운 독일의 바이마르 공화국은 시작부터 숱한 수난을 겪어야 했다. 기존 독일의 영토 중 상당 부분이 뜯겨나가 폴란드라는 신생 국가가 갑자기 나타나 독일의 영토를 가르고, 알자스-로렌과 같은 민감한 영토 또한 프랑스에게 넘겨야만 했다.[19]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라인란트는 명백한 독일의 영토인데도 불구하고 프랑스에 위협이 된다는 이유로 강제로 비무장화 되었고, 독일의 군대는 공군의 보유가 일체 금지되며, 10만 명이라는 극도로 제한된 규모만이 허용되었다.[20]1921년은 괴벨스처럼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초년생에게는 최악의 시기였다. 전쟁 배상금 때문에 독일의 경제성장은 기대할 수도 없었다.
랄프 게오르크 로이트[18]
베르사유 조약은 또한 바이마르 공화국에게 금을 기준으로 1,320억 마르크를 20년 안에 전쟁 배상금으로 지불하라는 무리한 요구까지 포함하고 있었는데, 이는 전쟁으로 재정이 피폐해진 바이마르 공화국으로써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금액이었다. 영국 재무성을 대표하여 참가한 존 메이너드 케인스를 비롯한 협상에 참여했던 경제학자들이 산출한 바이마르 공화국의 지불 가능액은 약 20억 달러(약 100억 마르크) 정도로 실제 배상금은 이에 13배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배상금은 석탄과 목재와 같은 현물로도 배상이 가능했으나, 당시 산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던 이러한 주요 원자재들이 전쟁 배상금으로 빠져나가자 독일의 공장들은 제대로된 기능을 할 수 없었고, 독일의 경제는 어려움을 겪으며 배상금 지불 능력은 계속 악화되어 갔다. 결국 1922년 연말 독일은 디폴트 상태에 빠졌으며 국가 규모의 부도로 인해 전쟁 배상금의 지불이 불가능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과 전쟁을 벌였던 프랑스와 벨기에는 배상금을 감면해주지 않았다.[21]
이들은 독일이 부강한 강대국으로 부상하는 것을 막기 위해 독일의 경제를 압박해야 된다고 생각했으며, 같은 협상국이던 영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22] 프랑스와 벨기에는 어떻게든 독일에 군사적, 경제적 제재를 부과하고자 하였다. 프랑스는 대전 중에 발생한 높은 적자로 고통받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경제를 안정화 시키기 위해서 독일의 경제적 부담이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은채 배상금 지급을 받아내려 했다.
1922년 말, 독일이 배상금으로 지급할 예정이었던 석탄과 목재가 6개월 가까이 연체되자, 배상 위원회는 독일에 채무 불이행을 선언했고 1923년 1월 프랑스와 벨기에는 배상금을 직접 받아내겠다는 명목으로 엄연한 독일의 주권 하에 있던 루르 공업 지대를 군대로 무력 점령하기에 이른다.
프랑스군과 벨기에군이 루르를 점령하자 현지 독일인들은 상당히 반발했고 이들은 비폭력 저항과 시민 불복종 운동을 통해 프랑스와 벨기에에게 항의 의사를 나타냈다. 헌데 이에 대한 프랑스의 대응이 전세계적인 비난을 불러일으키게 되는데, 프랑스군이 독일 민간인들을 사보타주 혐의로 처형시켜 버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희생된 독일인들은 2년 동안 130명 가량으로 추정되고 있다.
유럽 한복판에서 평시에 외국의 민간인들을 처형한 이 사건이 일파만파 알려지자, 프랑스 정부는 맹렬한 국제적 비난에 직면하게 되었다. 세계적으로 독일을 동정하는 여론이 커지기 시작했으며, 협상국이던 영국과 미국도 프랑스를 비난하기에 이른다. 프랑스의 동맹국인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는 독일과 경제적으로 연계된 점과 프랑스의 이런 행동이 독일이 소련과 더 긴밀한 관계를 맺게 만들 것[24] 이라는 우려 때문에 점령에 반대했다. 이러한 국제적 외교문제와 경제적 문제를 가지고 있던 프랑스는 막대한 부채를 지고 있던 미국과 영국의 비난에 민감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독일의 배상금 부담을 완화시켜주는 도스 안에 찬성한 채 1925년 7월과 8월에 걸쳐 점령지에서 철수했다.
그러나 프랑스와 벨기에의 철수에도 불구하고 이미 독일 경제는 배상금과 점령으로 인해 많은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도스 안의 채택 전부터 무리한 배상금을 지불하기 위한 외화를 사기 위해 당시 독일의 화폐였던 파피어마르크를 무식하게 찍어내었고, 이는 곧 독일에 초인플레이션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루르 점령 당시 독일인들에게 프랑스와 벨기에를 향해 총파업을 통해 대항하라고 지시한 독일 정부의 방침 또한 인플레이션을 악화시키는 데에 일조 했다. 1922년 말, 약 160 마르크였던 베를린의 빵 한 덩이는 1923년 말에 이르러선 200,000,000,000[25] 마르크가 되어 있었다.
나라는 초인플레이션에 허덕이고 공산당이 허구언 날 폭동을 일으키며, 국가 안에서는 배후중상설이 돌아 시민들 간에 불신을 만들고, 외국의 군대가 전쟁 배상금 갚으라고 강도처럼 처들어와 자국 시민들을 처형하는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하던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에 많은 독일 국민들은 큰 실망과 분노를 느꼈다.[26] 이 사건은 독일 정치에서 기존 중도 좌파 성향의 독일 사회민주당과 중도 우파 성향의 독일 중앙당 양쪽에게 불신을 안겨주었으며, 우익~극우 정당의 형성을 가속화했다. 특히 이 과정에서 아돌프 히틀러라는 뮌헨의 한 지역 정치인이 뮌헨 폭동을 통해 독일 전국 수준의 네임드 정치인으로 크게 부상하게 된다.
뮌헨 폭동에서의 실패로 체포 당한 히틀러는 1924년 2월 26일, 반역죄로 기소되어 특별 법정에 섰고 히틀러는 자진하여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 전복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짊어지고 나서 그의 뛰어난 언변을 통해 바이마르 정부를 격렬하게 비난했다. 이러한 히틀러의 열변은 처음으로 독일 전국의 관심을 끌었고 전 세계 신문의 첫 페이지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히틀러의 재판은 24일간 이어졌으며 이 재판이 널리 알려짐에 따라 국가에 대한 그의 사상과 감정을 전국에 표명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재판을 담당한 주심판사 게오르크 나이트하르트는 극우 민족주의 사상에 공감하는 인물이었고, 재판이 그의 정치적 텃밭이던 뮌헨에서 열린 덕에 방청객은 히틀러에 우호적인 사람들로 가득 찼다. 결국 이러한 점들이 겹쳐 히틀러는 금고 5년형을 선고받고, 편안한 옥중 생활을 즐기며 나의 투쟁을 옥중 집필하다가 8개월이 조금 지난 뒤 바이에른 주 정부에 의해 가석방 되었다.[28]
석방된 히틀러는 정치 노선을 바꾼다. 기존의 폭력적 쿠데타를 통한 정권 탈취라는 베니토 무솔리니식 방법론을 버리고 선거 등을 통해 합법적으로 권력을 거머쥐는 의회주의 노선을 채택하게 되었다. 즉, 독일 유권자에게 투표 받아서 집권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의외로 1929년까지 나치당은 전국적으로 큰 힘을 쓰지 못했는데, 독일의 경제가 차츰 회복되고 서방과의 관계가 안정화되가면서 어려운 경제와 외부의 적에 맞서지 못하는 무능한 정부라는 나치당의 캐치프레이즈가 힘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와중, 미국발 대공황이라는 거대한 경제 위기가 터지고 온 유럽의 경제가 아수라장이 되자 독일의 경제도 난장판이 되기 시작했다. 일자리를 잃은 이들로 실업률이 치솟았으며, 사회 전반에 정치극단주의가 팽배해지며 다시금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에 대한 의심과 분노가 쌓이기 시작했다. 이때 나치당은 혜성처럼 등장해 정국을 집어삼키기 시작했으며, 1928년 총선의 고작 2.6%에 그치던 득표율이 대공황 시기이던 1930년 총선에서는 18.3%로 수직 상승하며 독일 사회민주당에 이어 원내 제2당으로 도약하기에 이르었다.
이어진 1932년 독일 대통령 선거에서 히틀러는 당시 전쟁 영웅 출신의 거물 정치인이던 파울 폰 힌덴부르크를 상대로 36.7%의 득표율을 얻으며, 튼튼한 정치적 입지를 다지게 되었다. 뒤 이은 1932년 7월 총선에서 나치당은 37.4%로 230석으로 마침내 원내 1당으로 등극했으며, 의회 해산으로 치러진 1933년 총선에서 44%라는 득표율을 얻은 뒤 의회 내 비나치 우파와 협력해 아돌프 히틀러에게 전권을 부여하는 수권법을 통과시키며 바이마르 공화국의 민주주의에 죽음을 알렸다.
Unsere letzte Hoffnung: HITLER
우리의 마지막 희망, 히틀러
1932년 독일 대통령 선거의 포스터 문구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사망 이후 그의 대통령직까지 겸하게 된 히틀러는 퓌러(Führer, 지도자) 자리에 올랐고, 모든 야당들은 철저히 탄압되었다. 이렇게 전 유럽을 전쟁의 공포로 몰아 넣을 나치 독일이 탄생했다. 독일에 대한 승전국의 무리한 징벌 의식과 대공황으로 무너져 내린 세계 경제가 그 배경이었다. 나치 독일은 중공업과 군수산업의 집중 육성을 통한 경기 회복을 이끌어 내었고 실업률은 점차 낮아지기 시작했다. 1935년 베르사유 조약의 파기와 군 재무장을 선언하며 팽창주의적 외교 정책을 추구한 나치 독일은 루르 점령으로 상처 입었던 라인란트에 독일군을 진군시켰다.
4.2. 일본 제국과 중일전쟁[편집]
일본 제국은 메이지 유신 이후 성공적인 근대화를 이룩하며 많은 발전을 이루어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타이완섬을 얻고 러일전쟁에서의 승리를 통해 남사할린과 대한제국을 병합하기에 이르렀다. 제1차 세계 대전 시기에는 전쟁으로 바쁘던 유럽 국가들을 상대로 많은 수출을 하여 경제적으로도 아시아의 신흥 공업국으로 떠오르며 경제적 부와 다이쇼 데모크라시로 대표되는 짧은 민주주의를 맞이하며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대전의 종전 이후 유럽 국가들이 숨을 고르며 다시 생산력을 되찾자 유럽, 미국 등 서방에 비해 열등한 품질을 가진[29] 일본의 산업은 경쟁력을 잃고 수출이 축소되기 시작했고, 서구 열강들은 아시아의 새로운 열강으로 올라선 일본 제국을 서서히 견제하기 시작했다. 20년간 이어져오던 영일동맹은 깨져버렸고 열강들의 압박으로 조인한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에 의해 해군 규모를 제한받게 되었다. 이와중에 닥친 관동 대지진은 일본의 주요 인구밀집지역이자 경제권인 수도권을 초토화시켜 일본 경제에 엄청난 타격을 주었다. 설상가상으로 1927년의 쇼와공황과 1929년 미국발 대공황이 덮치자 일본 경제는 더욱 수렁에 빠지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에 군부의 입김이 점차 짙어지기 시작했다.
극우 보수 세력과 청년 장교층은 국민들의 불만 감정을 앞세워 정부에 대한 암살 및 쿠테타를 일으켰으며, 관동군은 민간 정부의 통제를 무시한 채 멋대로 날뛰며 만주를 침공하고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선통제를 꼭두각시로 세워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웠다.(만주사변) 일본은 산업은 크게 성장했으나 자체적으로 자원은 매우 부족해 해외의 수입으로부터 크게 의존하였고 그런 상황에서 천연자원이 넘치는 만주의 점령은 일본의 생명줄로서 크게 지지 받았다,
그러나 만주국에 대한 세계의 여론이 부정적으로 흐르자 군부는 국제연맹을 탈퇴하도록 정부를 압박하였고, 일본은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사실상 고립주의 외교로 나아가게 되었다. 이누카이 쓰요시 내각이 만주에서 일본군을 철수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가 급진파 장교들에게 암살당하고 후임으로 군인 출신의 사이토 마코토가 총리가 되어 정당정치를 단절시키자 군부가 본격적으로 정치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일본 정치를 장악해가던 군부는 크게 두가지 파벌로 나뉘어 있었다. 하나는 황도파로 이들은 일본의 모든 재벌, 기득권 등을 타파하고 쇼와 덴노에게 전권으로 주어 국가적인 개조를 실시하자는 일명 "쇼와 유신"을 주장하는 세력이었고, 다른 하나는 통제파로 이들은 황도파의 주장에 크게 반대하며 자본주의와 입헌군주제의 유지-강화를 주장했었다.
황도파가 주장하던 쇼와 유신은 1930년대 극우 사상가들의 목표로, 일본의 부패한 기득권층을 처단하고 천황에게 모든 권력을 집중시키자는 매우 국가주의적 사상이지만, 한편으로는 당시 일본에 만연하던 빈부격차와 사회불안을 내면에 담고 있다. 1920년대 후반부터 일본은 대공황으로 말미암은 경제 악화, 미국의 1924년 이민법과 동북역치로 인해 만주에서의 영향력을 대폭 상실하는 등 대외상 불안전화로 말미암아 군부 급진 세력이나 우익 단체를 중심으로 한때 좋았던 시절 메이지 유신의 정신 부흥과 천황의 친정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급속도로 높아졌다. 대외적으로는 서방과의 관계를 중시하고 소련에 대한 공격을 주장했다.
통제파는 이러한 황도파의 주장에 반대했다. 이들은 군의 문민통제가 존중되고 입헌군주제가 유지되어야 한다고 여긴 것은 물론 소련과 중국에 대한 외교적 입장도 정반대로 대립했다. 암살 당한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 이후 집권한 사이토 마코토 내각에서 황도파는 통제파에 밀려 서서히 중앙 정계에서 밀려났으며, 이로 인한 불만이 쌓이자 결국 1936년 2월 26일, 20대 청년 황도파 장교들이 주축이 되어 쿠데타를 일으키게 된다(2.26 사건)
下士官兵ニ吿グ
하사관·병에게 고함
一、今カラデモ遲クナイカラ原隊ヘ歸レ
1.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자대로 복귀하라
二、抵抗スル者ハ全部逆賊デアルカラ射殺スル
2. 항거하는 자는 전부 역적이므로 사살한다
三、オ前達ノ父母兄弟ハ國賊トナルノデ皆泣イテオルゾ
3. 너희들의 부모형제는 역적이 되어 모두 울고 있다
二月二十九日 戒嚴司令部
2월 29일 계엄 사령부
황도파 군인들의 투항을 독려하는 삐라
2.26 사건을 일어난 당시는 이미 황도파가 육군성 중앙을 장악한 통제파에 상당히 밀려난 때로, 항거한 황도파 장교들은 대게 20대의 소위부터 대위가 중심이 된 청년 장교들이었다. 이들은 초기 도쿄의 주요 정부 기관을 점거하고 사이토 마코토[30] , 다카하시 고레키요[31] , 스즈키 간타로[32] 등 일본 최고위층 인사들을 대거 습격해 대다수를 살해했다. 황도파의 최우선 목표였던 당시 현직 일본 총리인 오카다 게이스케는 겨우 이들을 피해 차량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33]
그러나 가장 중요했던 쇼와 덴노가 황도파가 항거에 매우 격노하면서 상황은 급반전되었다. 처음에는 스스로의 부덕을 탓하며 당황하던 천황이였지만 스즈키 간타로를 비롯한 쇼와 덴노가 신임하는 주요 중신들이 쿠데타 군에 의해 살해당하거나 중상을 입은 것이 결정적으로 쇼와 덴노의 노여움을 초래하였다.[34] 2월 27일 천황 명의의 원대복귀 명령이 떨어졌고, 쇼와 유신을 외치던 황도파는 순식간에 명분을 잃고 혼란에 빠져 일부는 자결을 시도했다. 다음날 군부는 병력 23,841명을 투입하여 본격적인 무력 진압 태세에 돌입하였으며 육군 뿐만 아니라 해군 또한 해군 대장 출신의 사이토 마코토가 살해 당한 것에 분노해 함대를 끌고와 진압에 참여했다.[35]
결국 황도파는 투항하기 시작했다. 2월 29일 오후 2시 무렵 병사들과 하사관들이 먼저 투항했고 오후 5시에는 장교들 중 노나카 시로 대위와 고노 히사시 대위가 자결했다. 나머지 현역 장교 17명과 예비역 장교 3명은 체포되어 파면과 동시에 재판에 회부되었다. 현역 총리 암살 사건이었던 5.15 사건을 일으킨 이들이 가벼운 처벌을 받은 전례가 있으므로 이들도 그와 비슷한 처분을 기대했으나 앞서와 달리 천황의 이름을 팔아먹은 데다 단순 테러 수준을 넘긴 본격적인 쿠데타였기에 중형이 선고됐다. 그 해 7월 쿠데타에 가담한 현역 육군 장교 16명은 사형 판결을 받고 "천황 폐하 만세!(
이렇게 2·26 사건으로 황도파가 완전히 자멸해버리자 일본 군부 내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한 통제파는 세계의 열강 각국에서의 집산주의 대두, 대공황에 대해 효용성을 나타낸 블록 경제에 대한 선망이 나타나면서 당초의 결성 목적・본분으로부터 천천히 빗나가 합법적으로 정부에 압력을 가하거나 자신들과 맞지 않는 정부의 외교 정책에 대해 "통수권 침범"을 방패로 공공연히 비협력적인 태도・행동을 취하는 군 파벌로 변해갔다. 이들을 근대적인 군비나 생산 기구의 정비에 근거하는 총력전에 대응한 고도국방국가를 구상했다.
루거우차오 사건을 통해 중일전쟁을 일으키며 본격적으로 폭주하기 시작한 일본 제국은 아시아를 서구 열강의 영향력으로부터 해방시킨다는 대동아공영권 정책에 기반하여 팽창주의, 군국주의적 행보를 이어갔고 이 과정에서 미국과의 관계는 급속도로 냉각되었다. 이후 1940년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왕국과의 삼국 동맹 조약 체결로 추축국의 일원이 된다.
5. 전쟁 당시 전황[편집]
6. 연표[편집]
자세한 내용은 제2차 세계 대전/연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 주요 전선[편집]
자세한 내용은 제2차 세계 대전/전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8. 참전국[편집]
자세한 내용은 제2차 세계 대전/참전국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9. 피해와 전쟁 범죄[편집]
자세한 내용은 제2차 세계 대전/피해와 전쟁 범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0. 전후 연합국[편집]
연합국의 수는 매우 많지만 우선 이 문단에서는 추축국들과 가장 적극적으로 교전하고 이후 상임이사국에 자리에 오른 영국, 소련, 미국, 프랑스, 중화민국 국민정부를 중심으로 서술한다.
이 시기 영국은 더 이상 식민제국을 유지할 수 없다는 판단으로[41] 식민지들을 차례로 독립시켜 대영제국을 점진적으로 해체하고, 이를 영연방이라는 국제 기구로 재편했다. 이 영연방을 통해 영국은 영연방 왕국 구성국들은 물론, 자국에 우호적인 과거 피식민 국가들과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영국의 전후 복구는 이 영연방 각국의 지원과 협력, 영연방 경제 연합을 통해 이뤄졌다. 이 시기 영연방 각국 사람들이 영국으로 건너가 부족한 일손을 채우기도 했는데, 이는 1972년 전까지 영연방 각국 사이에 자유 무역과 자유 이주가 보장되었기 때문이다.
영연방이라는 기구와, 세계 초강대국인 미국의 배려, 그리고 영국 문화의 소프트 파워 덕분에 영국은 초강대국에서 물러난 오늘날까지 어느 정도 세계적 영향력을 유지한다.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을 패망시킨 덕에 미국은 태평양 전역과 서유럽의 패권을 차지할 수 있었고 기존 유럽의 열강들을 포함해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압도적인 경제력과 군사력, 핵무기까지 얻은 미국의 절대적인 영향력 하에 놓였다. 해리 트루먼 행정부 시기 미국은 전세계적인 전후 복구와 경제 부흥에 힘쓰며 서방 세계의 정치적 지도자로 떠올랐으며, 군사는 물론 경제와 문화적으로도 헤게모니를 가지게 된다.
이때를 기점으로 국제 사회에 대한 미국의 입김은 기존 제국주의 열강들을 제치고 남을 수준으로 막강해졌으며 사실상 유엔을 비롯한 현재의 국제 질서가 정립되었다. 그러나 동유럽의 또 다른 초강대국인 소련하고 정치적으로 대립하기 시작해 곧 냉전이 이어졌다.
이 중에는 제정 시절에는 타국의 영토였던 지역들도 있었다. 동부 갈리치아나 체코슬로바키아를 해방하면서 얻은 카르파티아 루테니아, 그리고 베사라비아를 반환받을 때 얻은 북부 부코비나는 모두 옛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였다. 그리고 한때 독일 제국의 영토였던 클라이페다(메멜)와 독일이 제1차 세계 대전 패전 후에도 건사하는 데 성공했던 동프로이센 북부까지 차지했으며 나아가 극동 전선에서도 비교적 짧은 참전치고 남사할린의 재수복과 전 쿠릴 열도의 점령이라는 상당한 수확을 얻을 수 있었다.
소련은 나치 독일과의 전쟁에서 2,000 ~ 2,700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지만 동구권과 초기 중공, 북한, 북베트남 등 유라시아 각지에 다수의 위성국을 세워 상당한 국제적 영향력을 확보하고 미국과 함께 초강대국이라는 타이틀을 차지하는 등 승리의 열매는 달콤했다. 이 당시 유럽에는 소련을 견제할 수 있는 국가가 없었다. 프랑스는 나치 독일에 점령 당해 나라 자체가 너무 약해졌고, 전통적으로 강력했던 군사력도 크게 꺾였다. 영국은 사정이 그나마 나았으나 섬나라 특성상 육군이 소련군에 크게 밀렸는데, 소련군은 이에 반해 종전 시점에 13전선군이라는 어마어마한 군사력을 보유했다. 당시 서유럽은 미국의 도움 없이는 소련군을 상대로 자국 방어조차 거의 불가능했다.
이후 1948년부터 1991년 붕괴 전까지, 소련은 냉전 체제 하에서 공산주의 진영의 중심으로서 미국과 대립했다. 비록 2,000~2,700만의 인민들이 죽고 국토가 초토화되었지만, 그 대가로 얻은 것은 세계 양대 패권국의 지위였다.
프랑스는 다른 4개국에 비해서는 프랑스 침공에서 독일에게 6주만에 털리고 망명정부로 전락해버려 전쟁에서의 기여도가 낮다. 전후 전장이 된 국토를 수습하고 전후 복구 사업을 진행하였으며 비시 프랑스 부역자들에 대한 강도 높은 전범재판이 이루어졌다. 다행히 바르샤바와는 다르게 수도 파리를 나치 독일군이 후퇴하면서 초토화하는 것을 시민들이 저항하면서 막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수도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과거의 정치적인 영향력과 소련 견제를 의식한 미국, 영국의 도움 덕분에 유엔 상임이사국 자리는 확보했지만 크게 떨어진 위신과 정치적 영향력을 되찾겠다는 일념하에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핵무기 개발을 강행하고 식민지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여러 차례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알제리 전쟁)
결국 독립 전쟁들에서의 패배와 수에즈 전쟁에서 영국, 이스라엘과 함께 제대로 망신 당한 것으로 인해 프랑스는 식민지의 연쇄적인 독립 요구에 직면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사회적으로는 드골주의와 사민주의의 극렬한 좌우대립과 허무주의를 겪었다. 하지만 이런 대립 속에서도 프랑스 특유의 보편적 복지 체제를 형성하였다.
이 시기 프랑스는 전후 경제 복구와 유럽의 평화 체제 정착 및 또 다른 전쟁의 발발을 막기 위해 유럽 각국과의 협력 필요성을 느꼈고, 훗날 유럽 연합으로까지 이어지게 되는 최초의 유럽 공동체인 유럽석탄철강 공동체를 형성하여 오늘날 독일과 함께 유럽 공동체를 이끄는 두 주축이 된다.
중화민국은 1,500 ~ 2,000만의 사망자가 발생해 소련 다음으로 막대한 인명피해를 입었지만 연합국 가담과 중일전쟁의 최종 승전을 통해 몰락한 일본 제국을 대체하여 아시아의 주도 국가로 자리매김할 뻔했다. 그러나 간신히 봉합했던 국공내전이 재발발하고 끝내 중국공산당의 승리로 기존의 국민정부가 타이완 섬으로 국부천대하면서 철수하였다.
중국은 아직까지도 공산당 중심의 항일로 일본을 물리쳤다는 영화 등을 만들지만, 학계에는 중국공산당의 항일 운동은 보잘것 없었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주로 국민당 계열의 군대가 일본군과 박 터지게 싸우는 동안 뒤에서 세력이나 키웠다는 비판도 듣는다. 현재는 중국공산당이 얼마나 기여를 했든 어쨌든 국민당이 중일전쟁에서 중화민국의 주력이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1949년 대륙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었으나 공산 중국 역시 곧 미국과 소련 양쪽에 밉보여 1970년대까지 고립되었다. 그 동안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 제사해 운동을 통해 국력을 소모했으나 중화민국이 UN에서 쫓겨난 자리를 또 다시 채운 후 야심차게 등장한 덩샤오핑의 개혁, 개방으로 중국은 허울뿐인 공산주의 국가로 변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승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5개국이라 평가받은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의 후신인 러시아, 그리고 중화민국을 대체한 중국[43] 은 UN 상임이사국으로서 현재도 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10.1. 기타 주요국[편집]
폴란드는 이후 소련군과 그에 협력한 폴란드 공산당에 넘어가 공산화되어 폴란드 인민 공화국으로 소련의 위성국화 된다. 소련과 폴란드 공산당은 이 과정에서 파시스트들과 싸웠던 망명정부 및 폴란드 국내군 소속 장교들을 서방의 간첩으로 몰아 처형하는 희대의 만행을 저질렀다. 이후 소련의 간섭을 겪다가 이에 반발한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가 집권하고 후반기 경기 침체로 쫓겨나는 등 여러 우여곡절을 겪다가 레흐 바웬사의 자유 노조 운동으로 마침내 1989년 공산당 독재가 종식되었다. 폴란드는 냉전이 끝나자마자 바로 NATO와 유럽 연합에 가입하여 서방 세계에 복귀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뮌헨 협정 당시 독일에게 빼앗긴 국권과 수테텐란트 지방의 영유권을 나치의 패망으로 다시금 되찾았으며 체코슬로바키아 망명정부의 활약으로 연합국의 일원으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뒤이어 들어온 소련군과 소련이라는 외세를 등에 업은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에 의해 공산당의 지배하에 들어가 역시 소련의 위성국으로 전락했다. 그러다가 스탈린 사후 공산 체제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면서 알렉산데르 둡체크 등 개혁파 세력들이 집권하여 이후 체코 내부에서 정치 민주화를 요구하는 반정부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으나 소련이 체코에 대한 군사 개입을 일으켜 반정부 세력들을 진압하였고 둡체크의 개혁 정책에 반발하던 체코 공산당 내 보수파 세력들이 소련의 군사 개입을 등에 업고 둡체크를 몰아내면서 실패하였다. 그러나 소련군의 반정부 운동 진압 이후에도 바츨라프 하벨 등이 이끄는 반공 세력들의 반정부 투쟁이 이후에도 지속해서 이어졌고 1989년 동유럽 자유화 바람을 틈타 벨벳 혁명이 일어나게 되어 마침내 야케스 공산당 서기장과 후삭 대통령이 퇴진하고 이후 실시된 민주 다당제 대선에서 반공 운동 지도자였던 하벨이 당선되면서 마침내 공산당 독재 체제가 종식되었다. 그리고 1993년 벨벳 이혼으로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갈라졌고 양국 모두 EU와 NATO에 가입했다.
네덜란드는 추축국에서 해방된 이후 연합국 자격을 얻었지만,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가 네덜란드의 식민 지배에서 독립하려고 하자 인도네시아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한물간 식민주의를 거부하던[44] 미국의 경제지원 관련 압박으로 인도네시아에서 철수, 인도네시아에게 상당량의 돈만 받고 독립을 승인했다. 이후엔 수리남과 같은 해외 식민지가 모조리 독립하고 아루바 등 소수만 남긴 채 벨기에, 룩셈부르크와 함께 유럽연합에 가입하고 현재는 서유럽의 중견 선진국으로 남았다. 그래도 전범재판에 대한 발언권을 확보하여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의 전쟁 범죄자들을 처벌할 수 있었다.[45]
11. 전후 추축국[편집]
추축국에서도 제2차 세계 대전을 통해 엄청난 사상자와 피해가 발생했다.
추축국들은 당시 기준으로도 심각한 만행을 자행했기 때문에 전후 추축국의 기존 정부는 대부분 해체되었는데 특히 추축국의 양대 주도 세력이었던 독일과 일본은 연합군에 영토 전체가 점령당하여 새로운 국가로 재탄생하였다. 또한 UN의 규칙 중 구 추축국이 다시 전쟁을 준비하는 등의 불온한 움직임이 보일 경우 '연합국이나 기타 국가가 선전 포고 없이 바로 기습적으로 전쟁을 개시해도 무방하다'는 조항이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생겼다.[46] 현재는 물론 사문화된 상태이다.
나치 독일은 1945년 4월 말 아돌프 히틀러가 자살한 후, 카를 되니츠가 후임자가 된 다음 연합국에 항복을 선언하고 소련군이 베를린을 점령하며 전쟁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되니츠 정부가 해산당하면서 국가가 일시적으로 소멸했고 전쟁을 주도하고 전쟁범죄를 저지른 나치의 수뇌부들은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을 통해 처벌되었다. 또한 1938년에 독일에 합병됐던 오스트리아와도 합병 이전으로 돌아가 독일에서 분리되었고 주데텐란트를 비롯한 나치 시기의 점령지는 물론 국토 중앙에 오데르-나이세 선이 그어지며 그 이동에 위치한 동방 영토[47] 를 일제히 상실했고 침략전쟁에 대한 반동으로 많은 동부 독일인들이 고향에서 추방당해 다수의 실향민들이 발생했다. 더군다나 그나마 남은 국토마저 동서로 분단되어 서쪽에는 독일연방공화국, 동쪽에는 독일민주공화국이라는 새로운 국가가 탄생하였다. 그나마 독일군은 원래 해체될 예정이었지만 냉전으로 인해 동서독의 군대로 재탄생했다.
서독 건국 초기에는 전범재판에서 처벌받은 나치군의 최고위 인사들을 제외하곤 1950, 60년대까지 나치의 잔존 세력들이 그대로 요직에 올라 있어 옛 나치 잔재 청산이 굉장히 미진했으나 68운동을 계기로 진정한 의미의 탈나치화가 시작되었다. 처벌받지 않은 전범급 인사들을 잇따라 체포하여 처벌하는 등 나치 잔재 청산에 총력을 기울였으며 전쟁 당시 독일로부터 피해를 입었던 유럽 이웃 국가들에게도 사과와 배상을 했다.[48] 이렇게 주변국과의 신뢰를 회복한 결과 전승국들로부터 동서 통일을 승인받을 수 있었으며 오늘날에는 제4의 경제대국이자 EU의 실질적인 리더로서 국제무대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이탈리아 왕국은 1943년 베니토 무솔리니 정권이 붕괴한 후에 신정부가 들어서서 연합국에 항복하여 가담하였고 행정을 연합군이 세운 군정부에 위탁하였다. 이탈리아의 신정부는 무솔리니가 북쪽으로 도망가서 세운 정부와 독일군을 상대로 1945년 5월까지 전투를 벌였다. 3대 추축국 가운데 전후 처벌과 영토 손실이 가장 경미했으나 그럼에도 일부 영토를 잃었는데 리비아, 에게해 도서 등 식민지는 물론, 이스트리아 반도와 달마티아의 자다르, 프랑스와의 접경지 등 본토의 일부를 상실했다. 1946년 국민투표를 통해 통일 이후 80년 이상 유지하던 입헌군주제를 폐지하고 입헌공화정으로 전환하며 추축국의 과거를 털어내고 이미지 전환에 성공하였다. 무솔리니 정권에 의해 1936년에 탈퇴했던 국제연맹의 후신 UN에 1955년에 공식 가입하여 국제정치에 복귀하였고 서독, 일본과 마찬가지로 이탈리아도 전후 빠른 경제성장을 달성해 현재 G7의 일원이자 강대국의 최소 정도의 국력을 보유하는 준강대국이 되었다.
일본 제국은 파시스트 이탈리아, 나치 독일이 각각 1943년과 1945년에 항복하며 추축국 세력들이 궤멸, 붕괴된 이후에도 1억 옥쇄를 결의하며 항복을 거부, 끝까지 연합국에게 저항했다. 그러나 1945년 8월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와 소련의 참전으로 감당할 수 없는 피해와 손실이 예상되자 쇼와 덴노의 명의로 항복을 선언하였다. 이후 군부 지도자들은 극동국제군사재판을 통해 처벌받았고 중국과 동남아 내 점령지, 만주국과 몽강국 등 괴뢰국, 남양 군도 등 위임통치령, 관동주 등 조차지, 톈진과 칭다오 등 조계지, 한반도와 대만섬 등 식민지(외지), 심지어 본토(내지)의 일부였던 남사할린(일본명 가라후토)과 쿠릴 열도(일본명 치시마 열도)까지 전부 영구히 상실했다.[49] 미국이 일본 민심을 고려한 덕택에 천황제는 유지할 수 있었으나 일본군이 해체되어 자위대로 개편되었고 평화헌법과 서구 민주주의를 채택했으며 화족제를 폐지해야 했다.
그러나 미국의 역코스 정책과 1950년에 발발한 6.25 전쟁으로 경제적 부흥의 계기를 마련한 일본은 급격한 경제 발전으로 인해 1960년대에는 서유럽 강국들을, 1980년대에는 공산권의 초강대국 소련마저 제치며 세계 제2의 경제대국으로 우뚝 설 수 있었다. 한편 이러한 경제성장을 기반으로 반세기 이상 자유민주당이 득세하면서 보수 세력이 민주적으로 정치 권력의 주류가 되었고, 과거사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채 사회가 우경화되었다. 따라서 한일기본조약 등으로 식민 지배에 대한 배상을 하고 호소카와, 무라야마 등 역대 일본 총리들의 담화를 통해 공식적인 사과도 했으나 이러한 노력이 무색하게도 정치인, 특히 우익 계열 정치인들의 과거 전쟁범죄에 반성하려 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이고 주변국과 영토 분쟁도 존재한다.[50] 그래도 전후 경제성장으로 인해 오랫동안 세계 제2의 경제대국으로 군림했으며 현재도 세계 3위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주요 강대국 중 하나로 인정받는다.
12. 영향[편집]
12.1. 인권 존중과 현대 윤리의 대두[편집]
민간인과 군인 사망자를 모두 합하여 약 5,000만~7,00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사망했다.[51] 이 전쟁의 여파로 서구권에서는 그동안 사회 주류였던 집단주의 사상이 쇠퇴하고 개인주의 사상이 대두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진다.[52][53]
2차 대전 이후 전쟁 기간 중 벌어졌던 끔찍한 대량학살과 전쟁 범죄 등에 대한 전 인류적 반성이 행해지면서 인권 경시 문제에 대한 심각성이 전 세계에서 본격적으로 인지되기 시작하며 인권 의식이 크게 향상되었으며, 개개인의 존엄성과 자유 의지 등을 존중하는 정책들이 적극적으로 대두하였고, 그와 동시에 개인 심리학 또한 크게 발전했다. 이 덕분에 인류는 냉전이 시작된 직후 얼마 지나지 않아 데탕트를 맞이했고 3차 대전의 위기에서 항상 벗어났다.
2차 대전은 참정권이 개선되는 데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자치령 또는 식민지들은 본국에 대한 희생의 대가로 자치권의 확대를 요구했으며, 이를 계기로 자치령에 본국과 동등한 입법활동이 보장되거나 많은 식민지가 독립하는 등 변화가 생겼다(후술할 국민국가 탄생 문단 참조). 대부분 국가의 여성 참정권 역시 이 시기를 기점으로 크게 향상되었는데, 총력전의 여파로 여군 병과가 연구되었고[54] , 특히 남성이 징병되면서 산업 공백을 충당하기 위해 여성 노동자가 증가하였으며[55][56] 여성이 경제활동을 담당하면서 여론을 형성하고 권리 확대를 요구하게 되었다[57] . 이러한 배경은 전후 페미니즘 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58] . 유색인종의 참정권 또한 비슷한 시기에 크게 확대되어, 미국에서는 1965년 연방 투표권법이 가결되어 유색인종의 참정권이 완전히 보장되었다.
12.2. 반전 의식의 강화와 민주적 전쟁 억제[편집]
총력전을 겪고 난 사람들은 더 이상 전쟁이 군인들뿐만 아니라 전 국민이 모두 겪는 것[59] 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세계를 전쟁으로 몰아넣은 전체주의와 제국주의는 과거의 위상을 잃고 몰락했다.[60] 또한 세계 대전은 다시는 일어나선 안 된다는 인식을 전 세계인들에게 각인했다.
2차 대전은 히로시마-나가사키로 대표되는 신무기 실험장의 각축전이었으며 이것들은 민간인이라고 전혀 피해가지 않았다[61] . 현대무기를 동원한 초토화작전이나 핵폭탄의 공포까지 목격한 국민들과 각국 정부는 이제는 확실하게 이긴다 해도 대충 배상금으로 뭉개버릴 수 없을 만큼 전쟁은 치를 대가가 큰 아주 비싼 수단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62][63]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2차 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의 냉전으로 인한 대립 구도가 전면전으로 발전하지 못하도록 막는 역할을 했다.[64] 물론 강대국들 간의 무력대결이 완전히 없어진 건 아니고, 약소국 사이의 대리전으로 대체되었다.
12.3. 현대 국제정세의 확립[편집]
모호하게 전쟁이 종결되어 불안정한 질서가 유지되던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의 전간기와는 달리 제2차 세계 대전은 비교적 선악 구도가 명확했고,[65][66] 결정적으로 확실하게 승패가 갈렸기 때문에[67] 전후의 역사와 세계 질서가 완전히 결정되었다.
특히 2차 대전으로 인한 가장 중요한 국제적 영향은 세계 패권의 중심이 기존의 서유럽에서 새롭게 초강대국으로 떠오른 미국과 소련으로 넘어갔다는 것이다. 이 무렵까지 세계의 중심이었던 대영제국은 바로 이 시기부터 본격적인 하락세에 접어들었다. 이는 전쟁 중 유럽 대륙 전역이 히틀러의 수하에 떨어지며 영국 본토 항공전이 시작하자, 영국의 경제가 피폐해지면서 식민지 관리에도 어려움을 겪은 것이 한 원인이었다. 1941년 미국이 참전한 이후 전장의 주도권마저 미군에 넘겨주었다.
특히 1941년 미국의 대추축국 선전 포고 전까지는 영국이 단독으로 대독일전을 수행했기 때문에 경제적 타격이 컸다. 특히 1940년에는 수도 런던이 대공습을 당하거나 영국의 생명줄인 해상 보급로에 중대한 위협이 가해지는 등 인도라는 거대 식민지가 아니었다면 생존조차 힘들었을 정도로 휘청였으며, 미국이 참전하면서 숨을 돌렸으나 미국이 주도권을 쥐고 전쟁을 이끌면서 영국은 미국의 보조 역할에 만족해야 했다. 당시 영국 총리였던 윈스턴 처칠은 미국이 전쟁에 참전하게끔 많은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 결국 미국이 참전을 결정했을 때 영국에 상당히 무리가 있는 요구를 했었음에도 처칠은 이를 수용했다. 루즈벨트 재선 후, 영국의 지원 요청에 대해 미국이 했던 제안(미국측의 영국 정부 회계 감사, 금괴 요구, 영국 국영기업 소유권을 헐값에 미국으로 이전)만 봐도 2차 대전 당시의 영국과 미국의 관계와 영국의 처참한 입장을 한눈에 보여준다. 결국 2차 대전을 끝으로 대영제국의 패권은 무너졌으며, 서유럽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미국과 소련의 냉전 체제가 본격화되었다.
미국과 소련 이 두 나라는 2차 대전을 주도한 양대 세력이었다. 소련은 독소전쟁 때문에 자국 국민 40%가 동원되어 나치 독일에 대항하여 14%의 인구가 희생되는 처참한 사투를 벌였다. 이로 인해 훗날 베를린 공방전의 주인공으로 떠올랐으며 서방 세계에 대해 자신들의 지분을 당당히 요구할 수 있었고 미국 역시 태평양 전쟁에서 홀로 일본 제국을 상대하며 제국을 패망시켰고 유럽의 서부전선에서도 노르망디 작전을 성공시키고 프랑스를 해방시키며 전쟁에서 거대한 지분을 가지게 된다. 다만 미국은 자신만이 핵무기를 가지고 압도적 초강대국이 될 거라 생각하고 소련을 만만히 봤지만, 소련은 얼마 안 가 핵무기를 개발해냄으로서 양대 초강대국으로 미국에게 뒤떨어지지 않음을 명백하게 드러내었다.
냉전 체제가 시작되면서 미국은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자유주의 진영에, 소련은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주의 진영에 각각 여러 국가들을 가담시키며 쌍방 간 세력 경쟁을 본격화했고, 이를 바탕으로 미국과 소련은 지구를 넘어 우주에서까지 체제 경쟁에서 승리하고 극초강대국으로 나아가기 위해 패권 다툼을 벌였다.
프랑스와 네덜란드, 벨기에 등의 다른 서유럽 제국주의 국가들도 막대한 전쟁 피해와 두 초강대국의 압박으로 인해 식민지를 청산하고 물러섰으며[68] 이에 따라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과거 유럽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였던 수많은 독립 국가들이 새로 탄생하였다. 한국의 경우에도 카이로 선언에서 명시된 대로 광복을 맞이했다. 즉, 이미 1차 대전 이후 쇠퇴하던 제국주의 풍조가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완전히 막을 내렸다.
간혹 대리전의 형태로 전쟁이 발생했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세계 각국은 과거 국제연맹의 문제점과 과오를 되새겨 이와 같은 참혹한 전쟁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세계적 통합과 협력 및 평화를 위해 유엔이라는 새로운 국제기구를 창설하였고 이는 지금도 국제 질서를 유지하는 데 많은 영향을 끼친다.
12.4. 현대 국가의 탄생[편집]
제국주의 식민지 확장을 주도하던 유럽의 각 열강들이 1차대전때 받은 큰 피해를 완전히 복구하기도 전에 다시 더 큰 전쟁으로 완전히 파괴되면서, 도저히 유지가 불가능한 가지고 있었던 식민지들이 독립하게 되면서 현재 존재하는 대부분의 국민국가들을 직간접적으로 만들어낸 전쟁이기도 했다. 예컨대 현재의 대한민국으로 직접적으로 이어지는 8.15 광복 또한 일본 제국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함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이 순탄치는 않아서 식민지를 평화적인 방식으로 독립시킨 국가들이[69] 있는가 하면, 자기들의 황폐해진 경제 재건을 식민지 빨대 꽂아서 할 생각을 포기하지 못한 프랑스, 네덜란드, 포르투갈 등 당시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를 포기 못해 2차 대전이 끝나고도 또다시 전쟁을[70] 치르기도 하였다. 또한 하나의 식민지로 묶여 있었던 다양한 사람들 사이에 민족, 종교, 이념 등에 따른 갈등이 일어나 독립 후에도 인위적으로 그은 국경선과 민족갈등 등 내부 갈등을 수습하지 못해 다시 많은 혼란이 생기기도 했다.[71] 무엇보다, 제국주의가 채 마감되기도 전에 실질적으로 시작한 미소 냉전 구도로 인해 전세계가 다시 미국편이나 소련편이냐 제3 세계냐를 가지고 선택의 길을 가느라 전후 혼란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나라들도 숱하다.
이 전쟁을 기점으로 수많은 국가의 정치 체제나 정책이 바뀌었고 국가나 정권이 멸망하거나 재탄생하기도 했다. 독일 제3제국, 이탈리아 왕국, 일본 제국은 전쟁에 패배하고 나라가 연합국에 점령당해 멸망한 뒤 새로운 정부가 탄생했다. 독일은 나라가 둘로 분단되어 자유 진영의 서독과 공산 진영의 동독으로 나뉘었으며, 일본은 GHQ를 통해 민주주의 시스템이 도입되었고, 이탈리아는 공화정으로 변모했다.
아프리카와 아시아는 서양 열강의 식민 통치에서 벗어나 독립하게 되었다. 다만 동유럽은 승전국의 하나로서 지역구 정리에 들어간 소련에 의해 공산화되거나 위성국으로 전락했다. 중국도 중일전쟁을 통해 국민정부가 혈투를 벌이는 동안 해방구를 건설하며 세력을 키운 마오쩌둥의 중국공산당에게 주도권이 넘어가게 되었다. 결국 국민정부는 뒤이어 이어진 국공내전에서 패배해 타이완 섬으로 쫓겨나는 신세가 되며 중국은 제2차 세계 대전이 종전된 지 겨우 4년 후인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으로서 공산화된다. 한국의 독립과 남북분단도 제2차 세계 대전의 흐름과 맥락을 같이한다. 남한에는 미군이, 북한에는 소련군이 주둔하면서 서서히 분단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결국 종전 5년 후 6.25 전쟁이 발발한다.[72]
13. 기타[편집]
- 워낙에 거대한 전쟁이다보니 세계 최대/세계 최초에 이름을 올린 것들이 많다.
- 세계 최대의 단일 전쟁
- 세계 최대의 상륙 작전
- 세계 최대의 전투[73]
- 세계 최대의 철수작전
- 세계 최대의 사상자를 낸 전투
- 이 부분은 논란이 있다. 일단 역사학계의 대세론 자체는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세계 최대의 사상자가 발생한 전투로 간주하지만, 당시 집계된 소련이나 독일의 사료가 매우 부족한 관계로[74] 역사학자들마다 견해가 다르다. 당장 인터넷에 검색만 해 봐도 웹사이트나 자료마다 레닌그라드 포위전, 대륙타통작전, 바르바로사 작전, 베를린 전투 등 세계 최대의 사상자를 낸 전투는 매번 달라진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전술했듯이 사료 부족의 문제도 있고,[75] 이 "사상자" 개념에 전투 도중 사망한 민간인을 포함시키느냐의 여부 때문이다. 상당히 물론 순위권에 드는 전투들이 거의 대부분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벌어진 전투라는 대에는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없다.
- 세계 최대의 공세
- 세계 최대의 전선
- 세계 최대의 해전[78]
- 세계 최대 규모의 사단이 동원된 단일 작전
- 세계 최초의 핵무기 실전 사용
- 사실상 근대 서구 문명이 만들어 놓은 모든 사조들이 복잡하게 얽혀 폭발한 전쟁이다. 쇠퇴한 왕정에서 막 파생된, 연약한 민주주의 사이에서 대공황을 딛고 자리잡아버린 극우 파시즘과 그에 결합한 우생학/극단민족주의, 그리고 러시아 혁명의 성공으로 공산주의와 그에 반작용으로 오는 반공의 기조, 자유민주주의, 제국주의와 상반되는 의미의 민족주의까지 섞여들어간, 그야말로 동시다발적으로 폭발해버린 전세계적 사조 충돌의 현장이다. 특히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독소전은 파시즘과 공산주의 간의 극렬한 이념 대립+인종/민족주의가 혼재되어 유례없이 많은 사상자를 낸 전쟁이다. 1차 대전만 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전근대의 패권/영토싸움(간단히 말해서 땅따먹기)의 연장선으로 비교적 대결 구도가 단순하지만 2차 대전은 어느 정도 신념전쟁의 형태를 띄었고 그것도 냉전과는 달리 다극적 형태였다. 서로에 대한 상상초월한 광기와 극렬한 증오가 파생되었던 건 이 때문이다. 한 나라에서도 여러 세력이 갈려서 외세를 끌어들이고 서로 대립하고 뒷통수치고 싸우고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 제2차 세계 대전은 유럽 일대로 국한된 제1차 세계 대전[81] 과 달리 전 세계가 전장이 되었는데[82] 유럽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아시아, 오세아니아의 국가까지 개입한 뒤 각자 북아프리카 전선과 아시아-태평양 전선으로 모두 직접적인 전장이 되었다. 아메리카 대륙 또한 진주만 공습을 당한 미국을 제외해도 해안가나 주요 항로가 추축국 잠수함들의 게릴라전에 시달렸으며[83] 남아메리카에서는 다수의 병력을 유럽으로 파병한 브라질이 있고, 칠레 역시 미국으로부터 수차례 전함을 빌려달라는 요구를 받았다.[84]
- 현재 공식적으로 생존한 2차 세계 대전 참전용사들은 세계에 100만 명 이상이다. 2020년 기준 미국에만 30만 명 이상 생존하고 있으며 밴드 오브 브라더스와 같은 전쟁 드라마도 이들 생존한 참전용사들 덕택에 실현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보다 약 25년 전에 벌어진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용사들이 2020년까지 살아있지 못한 것과는 대비된다.[85]
14. 관련 어록[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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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관련 인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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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대체역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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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창작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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