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전쟁범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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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1. 개요
3.2. 친위대의 전쟁 범죄
3.3. 국방군의 전쟁범죄
3.3.1. 민간인 및 포로 학살
3.3.2. 무차별 강간
3.3.3. 초토화 전술
3.3.4. 해군과 공군의 전쟁범죄
3.4. 강제 노동


1. 개요[편집]


독일의 전쟁 범죄에 대해 서술하는 문서이다.


2. 독일 제국[편집]



2.1. 헤레로족과 나마족 학살[편집]


나미비아(당시 독일령 남서아프리카)에서 저질러진 원주민 집단 학살 사건. 제국군이 저지른 식민지 관련 중죄 중 하나이다. 최악의 제노사이드 중 하나였고 20세기 최초의 제노사이드로 인정받는다. 그러나 독일은 홀로코스트와 달리 2004년까지 공식적인 사과도 하지 않았고, 보상도 2021년에야 했다.[4]


2.2. 제1차 세계 대전[편집]


사실 독일 국방군의 선배인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의 독일 제국군도 국방군처럼 악질은 아닐 뿐, 전쟁범죄에 관해서 100퍼센트 자유로울 수는 없다. 1914년 8월 4일 당시, 독일 제국 육군은 슐리펜 계획에 의거하여 프랑스를 치기 위해, 중립국인 벨기에를 불법적으로 침략했는데, 독일 육군이 약체 초콜릿 군대라고 얕본 벨기에 육군에 뜻밖의 봉변을 당하여 생각보다 큰 피해를 입었다.[5] 여하튼 리에주 요새를 함락한 이후, 독일 육군은 벨기에인에 대한 증오와 짜증을 품었고, 벨기에 빨치산에 의해 독일의 한 육군 병사가 사망하는 일이 벌어지자, 그에 대한 보복으로 무고한 벨기에 민간인들을 죄다 게릴라 세력으로 몰아 총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물론 여기에는 누가 봐도 파르티잔이라고 볼 수 없는 여자, 아이들이 다수 포함되었으며 심지어 교회 종탑에서 총탄이 날아왔다며 사제를 총살하는 경우도 있었다.

약 400명이었던 벨기에 민간인들이 루뱅에서 죽었다고 알려졌으며 제국 육군이 빨치산 잡는답시고 여기저기 불을 놓는 바람에 불에 타서 없어진 가옥도 수 십채였다. 루뱅 시의 유서깊은 대학인 루뱅대학교과 루뱅도서관도 이 때 제국 육군이 놓은 불로 인해 훼손되었다. "루뱅 독일 병사 사망 사건"으로 잔뜩 예민해진 제국 육군은 벨기에 전역에서 빨치산 토벌에 열을 올리는데 빨치산 토벌 명목으로 민간인들이 가장 많이 죽은 곳이 바로 디낭 시, 무려 674명의 민간인이 무고하게 사살되었으며, 희생자 중에는 아이아기도 있었다. 이 사건은 영어권에서 'The Rape of Belgium'(벨기에의 강간)이란 별칭으로도 유명하다. 독일 육군은 벨기에의 여러 도시들을 불태우고 파괴하고 학살을 저지르고 강간을 서슴치 않았는데 결과적으로 벨기에의 강간으로 인해 루뱅(Louvain) 시에 살던 사람들 370여 명이 사망했다. 또한 디낭(Dinant)에서는 674명의 무고한 민간인들이 고의적으로 학살당했다. 이로 인해 독일 제국에 대한 대외적인 이미지는 매우 좋지 않았으며, 벨기에와 같은 민족이었던 프랑스는 복수를 천명하였으며, 영국은 이것을 선전 프로파간다로 아주 잘 활용했고, 훗날 미국의 1차 대전 참전에도 영향을 미쳤다.

황당한 건 당시 제국 육군이 저렇게 해서 진짜 빨치산을 한 명이라고 잡았는지도 의심스럽지만, 과연 루뱅에서 제국 육군 병사를 쏜 사람의 정체가 벨기에 빨치산인지도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 사건이 밤에 일어난 것으로 미루어볼 때, 피아식별이 잘 되지 않는 상태에서 자기들끼리 총을 쏜 것이었다는 설도 존재한다. 이 때문에 루뱅에서는 백년이 지난 지금도 독일 국기를 게양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또한 제국 육군과 해군 항공대는 세계 최초로 민간인을 상대로 폭격을 가한 군대였다. 파리와 런던에 하루가 멀다하고 폭격을 가했는데 당시 독일 제국 육군 폭격기와 해군 체펠린 비행선의 조종사와 승조원들 가운데 프랑스와 영국 민간인들에 대하여 양심의 가책을 느꼈던 인간은 거의 없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독일연방공화국의 국방부 차관이었던 발터 콜보(Walter Kolbow)는 2001년, 디낭 학살 피해자 유족들을 찾아가 직접 사죄를 표하였다.

그리고 조목조목 따지고 보면 세계 최초로 민간인을 상대로 무차별 폭격을 가한 나라가 독일인데, 독일 제국 해군은 1915년부터 1918년 4월까지 꾸준히 그라프 체펠린 비행선고타 폭격기파리런던을 폭격했다. 그리고 이는 뻔히 민간인이 다치고 죽을 것을 알면서도 저지른 전쟁범죄 행위였다. 그리고 무제한 잠수함 작전 때에도 민간 상선임을 뻔히 알면서도 그것을 격침했으며, 이는 수많은 나라를 분노케 하였다. 그리고 독일 제국의 이 어리석은 행위는 분노한 미국의 코털을 건드려 자신들의 제국을 파멸로 이끈 원인이 되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최초로 1915년, 제 2차 이프르 전투 때에 헤이그 협약을 어기고 살상용 가스를 먼저 살포한 것도 독일 육군이었다. 1915년 제2차 이프르 전투에서 독일 제국 육군은 포스겐을 살포하는데, 살상용 가스의 살포는 이미 1899년 헤이그 협약에 의해 엄연히 금지된 사항이었다. 물론 가스 자체로만 보면 1914년 국경 전투 도중 프랑스 육군이 먼저 살포하긴 했는데 그것은 살상용이 아닌 엄연한 최루탄에 지나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1914년 프랑스가 살포한 최루탄은 제국 육군의 진격을 늦추는 효과는 있었어도 그로 인한 제국 육군 사망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반면 1915년 이프르 전투에서 제국 육군이 뿌린 포스겐에 의한 연합군 사망자는 무려 1시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15,000명이나 되었다. 그후 연합군도 리벤스 투사기 등으로 독가스를 뿌리긴 했으니 연합군도 잘못을 하였지만 독가스를 먼저 뿌린 독일 제국에 가장 큰 책임이 있다.

그 외에도 독일 제국군도 1917년 3월 22일, 러시아 제국 포로들을 대상으로 생체 실험을 자행했다. 쾨니히스베르크(現 칼리닌그라드)에 위치한 뮌스터 포로수용소에서 이루어졌는데 이곳은 환경은 매우 열악했고 하루가 멀다하고 제국군들의 구타가혹행위가 이어졌다. 제국군들은 인종별로 분명히 목소리 발성하는 방법이 다르며, 당연히 독일인들이 가장 우월한 발성 능력을 가졌을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논리를 내세우며, 러시아 포로들에게 인종별로 나누어 노래를 부르게 하였고 그것을 녹음하였다.[6]

이렇게 제국군들은 포로들에게 강제로 노래를 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의사랑 상관없이 그들의 얼굴을 강제로 석고로 본을 뜨기까지 했다. 매일 같이 강제 노동에 시달린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1차 대전이 끝난 이후, 러시아군 포로들과 고려인들의 행방은 묘연하였고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단, 추측되는 바로는 열악한 수용소 생활로 인해 병사하였거나, 제국군의 생체 실험에 이용당해 죽었을 것이라는 의견이 압도적이다. 현재 독일 동부 지역에는 당시 러시아군 포로들의 넋을 기리는 추모비가 세워져 있는데, 상당수가 이름 없는 정확히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 포로들이다.

게다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맺고 동부전선의 독일 제국군이 죄다 서부전선으로 재배치되기 전, 우크라이나 민간인들로부터 온갖 생필품을 강제로 빼앗았으며, 사람들을 잡아가서 강제 노역을 시켰던 전적도 있다.


3. 나치 독일[편집]



3.1. 홀로코스트[편집]




3.2. 친위대의 전쟁 범죄[편집]


국방군과 공모한 범죄(☆)


3.3. 국방군의 전쟁범죄[편집]


"한 마을에서 고의적인 파괴 및 방해 행위가 발생했다면, 해당 마을에 사는 유대인 전체를 몰살해야 한다. 이를 통해 그 사태를 일으킨 이들, 아니 적어도 그들의 배후 세력만큼은 확실히 척결할 수 있다."

- 독일 육군 구스타프 폰 마우헨하임 게난트 베흐톨샤임 소장이 밝힌 대파르티잔 작전 방침. 베흐톨샤임 소장은 1941년에 중부집단군 후방사령부에 소속된 제707보병사단의 사단장이었다. 그는 707사단 외에도 질서경찰 부대 및 리투아니아인 보조부대까지 거느렸으며, 1943년까지 벨라루스의 대파르티잔 작전을 수행하면서 대량 학살과 파괴 행위를 자행했다.[8]


유대-볼셰비즘에 대항하는 이 전역에서 최고로 중요한 목표는 유대-볼셰비즘의 힘의 원천을 완전히 파괴하고 유럽 문명에서 아시아적 요소를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다. 동부전선에서 한 명의 장병은 전통적인 전쟁 방식에 따라 싸우는 사람뿐만이 아닌, 국가적 구상을 가혹할 정도로 대표할 만한 사람이기도 하다. 고로 우리 장병은 유대인이라는 하등 인종에게 가해져야 하는, 가혹하지만 정당한 심판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 라이헤나우 원수의 강조 명령


"...도덕적으로 부패한 열등 민족인 적을 제거하는 것만이 국방군이 유럽과, 특히 독일을 유대-볼셰비즘으로 무장한 아시아의 야만행위로부터 구하는 것이다."

--

- 독일 육군 헤르만 호트 상급대장이 1941년 11월 17일 내린 '동부에서의 독일군의 행동 강령'. 호트 상급대장은 당시 남부집단군 소속의 17군 사령관으로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작전 중이었다. 《히틀러의 장군들 1: 만슈타인 평전》 338p에서 재인용


"우리는 해독한 기생충을 제거하듯 세계 유대인들을 제거한다. 우리가 그들을 친다면, 그것은 우리 민족의 적을 격퇴하는 것일 뿐 아니라 모든 민족의 적을 무찌르는 것이다. 유대인을 제거하는 투쟁은 신이 원하는 종족의 순수함과 건강함을 위한 도덕적 투쟁이다. 그리고 새롭고 좀 더 정의로운 세상을 위한 투쟁이다."

--

1939년의 국방군 정훈교육 교재(Schulungshefte) 제5권에 실린 C.A. 호베르크 박사의 논문, '독일사 속의 유대인'의 마지막 문단.[9]



3.3.1. 민간인 및 포로 학살[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독일 국방군의 홀로코스트 관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국방군 무오설이 반박되는 사례이다. 게다가 악명높은 일본군보다 더 죄질이 나빴는데 일본군은 개판 조직과 똥군기, 광기어린 일선 지휘관들의 월권 행위에 기인한 통제불능이 전쟁범죄의 주 원인이었던 반면 국방군은 상명하달 방식으로 주체적이고 조직적으로 전쟁범죄를 수행했다.

대전 초기인 폴란드 침공 당시만 놓고 보더라도 국방군은 폴란드 포로와 민간인을 학살하거나 인간방패로 삼는 등 수많은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폴란드 침공 당시 벌어진 전체 민간인 학살 행위의 60%가 국방군에 의해 벌어졌다.[10][11]

일례로 독일군이 자행한 '100 polakow za 1 niemca'(독일인 1명당 폴란드인 100명) 학살은 폴란드 국내군이 SS장교 1명과 독일 경찰을 암살한 것을 복수하기 위해 폴란드인을 100명을 죽인 것으로 말도 안되는 행보였다. 더 자세한 상항은 폴란드 침공 항목 참고할 것. 반대로 육군상급대장 요하네스 블라스코비츠 장군블라스코비츠??처럼 친위대의 학살, 약탈 만행을 히틀러에게 보고하며 이를 금지할 것을 호소했다가 이후 진급에 실패하고 힘러에게 낙인이 찍혀서 한직만 떠돌게 된 경우도 있다.

특히 독일 국방군의 전쟁 범죄 대부분이 발생한 독소전쟁의 남부집단군 전역의 경우, 당시 제6군 사령관이었던 발터 폰 라이헤나우 장군은 "독소전쟁에서 독일군은 유대인-볼셰비즘을 말살하는 전사로 싸워야 하며, 이는 통상적인 전쟁방식을 벗어나도 무방하다." 즉, 학살을 저질러도 무방하다는 소위 "라이헤나우 강조 명령"을 예하부대에 내렸다. 또 그의 상관인 남부집단군 사령관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장군이나 제11군 사령관 에리히 폰 만슈타인 장군은 이 강조명령에 별도의 지지성명까지 발표했다. 중부집단군 사령관 페도어 폰 보크 장군 같은 일부 지휘관들은 여기에 반대를 표명했으나, 남부집단군엔 이런 지휘관이 없었고 결과적으로 대규모 학살이 발생했다. 통계에 따르면 독소전쟁 민간인 학살은 대부분 중북부전선이 아닌 남부전선에서 벌어졌는데 물론 스탈린그라드 전투부터 쿠르스크 전투 패배까지 1942~43년의 격전지였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남부집단군이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무장친위대와 함께 각종 학살과 전쟁범죄를 일삼았기 때문이다. 악명높은 벨라루스 초토화 역시 남부집단군과 무장친위대의 합작품이며 바비야르 학살 또한 라이헤나우의 6군이 저질렀다. 이 명령을 당시 남부집단군 일선부대의 고급 장교들은 그리 좋아하지 않았는데 안 그래도 바쁜데 병사들이 무장친위대와 학살에 나서면서 진격속도가 느려졌기 때문이다. 이후 라이헤나우는 룬트슈테트의 뒤를 이어 남부집단군 사령관으로 진급하게 되는데 후임 6군 사령관이 된 육군상급대장 프리드리히 파울루스는 아예 대놓고 강조명령을 폐기하고 불태워 버렸다. 라이헤나우는 진급 이후 얼마 안 되어 뇌출혈과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또한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에서는 엄청난 규모의 민간인 및 포로 학살이 벌어졌다. 1941년 키예프 포위전 후 53만 명의 소련군 포로가 잡혔다. 그 중 유대인이나 공산당원으로 판명된 자들은 재판 없이 그 자리에서 쏴 죽였다. 살아남은 포로들도 캠프에 가두고 굶겨 죽였다. 살아서 소련으로 귀환한 사람들은 2만 명도 되지 않았다. 홀로코스트 명단이 정확하지 않은 게, 소련에서 사살된 유대인을 홀로코스트 피해자로 보느냐, 그냥 학살 피해자로 보느냐에 따라 평가가 갈라지기 때문이다. 키예프 외곽의 바비야르 골짜기에서는 수십만의 민간인들을 쏴죽이고 사체를 불태워 증거 인멸을 시도한 바비야르 학살이 일어났다. 또한 벨라루스에서 유대인을 절멸하고 파르티잔을 쳐부순답시고 학살을 저지른 것도 육군이었다.

여기에 국방군이 직접 학살을 저지르지 않았더라도 국방군 점령지 하에서 벌어진 무장친위대 소속의 아인자츠그루펜의 학살을 모른체 하거나 구경만 한 것도, 엄밀히 말하면 살인방관행위에 해당하는 전쟁범죄이다. 게다가 국방군이 아인자츠그루펜의 활동을 지원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독소전쟁 초중반의 북부집단군 사령관인 빌헬름 리터 폰 레프 원수는 국방군이 수행하는 직접적인 학살에는 반대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예하 국방군 부대의 학살을 금했다. 하지만 그는 예하 무장친위대가 학살을 수행하는 것은 알면서도 묵인하고 방조하여 발트 3국 지역에서 수십만 명의 유대인과 민간인이 학살당하도록 방치했다. 또 그는 레닌그라드 공방전 당시 아사 작전을 기획해 100만이 넘는 소련 민간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3.3.2. 무차별 강간[편집]


잘못 알려진 상식을 있는 그대로 믿는 자들은 슬라브인에 대한 나치의 인종적 편견 때문에 독일 국방군은 민간인 학살은 했지만 강간은 빈도가 드물었다고 주장한다. 독일 국내의 유대인으로 한정하면 이건 말이 된다. 나치는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독일 국내의 유대인을 대상으로 여러 번 집단 박해(pogrom이라고 하며, 원래는 제정 러시아의 유대인 집단 박해를 말하는 단어다)하였는데, 유대인을 죽인 나치 당원은 무죄로 방면되었지만 강간한 나치 당원은 출당되었다.

살인과 성범죄의 죄중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슬라브인은 짐승이나 다름없는 존재라는 나치의 세뇌 때문에 장병들에겐 타인종과의 성접촉이 수간으로 인식되어 강간을 피했을 거라는 논리인데,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다. 국방군은 슬라브인을 인간으로 안 본 것이 아니고 단지 위대한 아리아인인 자신들보다 '열등한' 인간으로 봤을 뿐이다. 그리고 애초에 타인종과의 성접촉을 수간으로 인식하는 것도 지극히 인종차별적인 사고방식이라서 결코 좋게 보기 힘들며, 그에 따라 결코 나치 독일을 옹호하기 위한 근거가 될 수도 없다.

종전 이후 반공적인 영미 언론에 의해 널리 선전된 베를린 강간의 임펙트에 묻힌 감이 없잖아 있지만 동부전선의 국방군 역시 그보다 훨씬 더한 전방위적이고 잔혹한 강간을 자행했다. 동부전선에서는 독소전쟁이 벌어졌을 때 수많은 소련 민간인 여성들과 소련군 간호사와 간호병, 그리고 기타 여군들이 포로로 사로잡힌 채 강간의 희생양이 되었고, 그 뒤에는 대부분 살해당한 채 길거리에 버려졌다. 국방군에 저항하던 여성 파르티잔은 아예 강간 후에 고문을 가한 후 죽이는 일도 비일비재였다.

  • 스몰렌스크, 러시아 : 독일군 사령부가 장교들을 위한 매음굴을 개설하였다. 수백명의 여성들이 팔이나 머리채가 잡혀 끌려가 강제로 매춘부가 되었다.
  • 르비우, 우크라이나: 독일군이 공공 공원에서 옷 공장에서 일하는 32명의 여성들을 집단으로 강간하고 살해했다. 이를 막으려 하던 사제 또한 살해했다. 독일군은 리비우에서 유대인 여성들 또한 강간했으며, 임신하면 쏴 죽였다.
  • 바리사우, 벨라루스: 독일군을 피해 달아나던 75명의 여성들이 사로잡히자 독일군은 그 자리에서 36명을 죽여버렸다. 그 후 독일군은 16살 L.I.멜츠코바를 숲으로 끌고 들어가 집단으로 강간했다. 다음으로 끌려간 여성이 발견한 것은 표지판에 못박혀 죽어가는 멜츠코바였다. 독일군은 그 여성 앞에서 멜츠코바의 가슴을 잘라냈다.
  • 케르치, 크림 반도: 사로잡힌 여성들은 강간당하고 고문을 받았다. 그다음엔 잔혹하게 죽였는데 가슴을 잘라내고, 배를 가르고, 사지를 자르고, 안구를 파냈다.[12] 나중에 1941년 12월 케르치를 탈환한 소련군은 주위를 둘러보다 알아볼 수도 없게 훼손된 젊은 여성들의 몸뚱아리가 교도소 뜰에 쌓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경악을 금치못했다. 1942년 1월, 집단 매장터가 다시 조사됐는데, 바게로보 마을 외곽의 길이 1km, 너비 4m, 깊이 2m의 대전차호에 여성, 아이, 노인, 청소년 7000명의 시체가 가득 메워져 있는 매장터를 발굴하였다.

무엇보다 국방군 지도부는 전쟁이 시작되기 전부터 '소련 민간인에게 범죄를 저지른 장병들을 적극 적발 및 처벌할 필요가 없다'는 방침을 세웠고 그런 마당에 군인은 물론 민간인이라고 성폭행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을 리는 없었다. 물론 처벌이 있기도 했으나 가벼웠다. 따라서 독일 장병들은 마치 가로수의 열매를 따먹듯 점령지의 여성들을 겁탈했으며 그것을 마치 자랑거리인 양 떠들고 다녔다. [13]

윌루스: "바르샤바에서 우리 장병들은 여자들이 있는 한 건물 앞에서 길게 늘어서 기다려야 했다. 무작위로 첫 번째 방이 가득 찼고 그 사이 밖에서는 트럭 하나를 다 채울 정도의 사람들이 줄서 기다렸다. 여자 한 사람마다 시간당 14명에서 15명의 남자를 상대해야 했다. 그들은 이틀마다 여자들을 교체했다.


뮐러: 제가 하르코프[14]

에 있었을 때, 시가지를 제외하고는 모든 게 부서져 있었습니다. 정말 멋진 도시였고, 멋진 추억들도 많았죠. 거기 사람들은 학교에서 배운 독일어를 약간 구사할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타간로크[15]에는 멋진 극장들과 멋진 해안 카페들이 있었죠. 전 트럭을 타고 여기저기를 돌아다녔습니다. 어딜 보든 여성들이 강제 노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파우스트: "오, 세상에!"

뮐러: "정말 쭉 빠진 환상적인 소녀들이 도로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옆으로 차를 몰고 가서, 강제로 트럭에 태우고 마구 겁탈한 뒤 밖으로 내던졌죠. 이야, 정말 엄청나게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출처


영문 위키피디아에 인용된 1942년 독일 국방군 기록에 따르면 소련 한 국가에서만 1천만 건이 넘는 집단 강간과 간살(강간 후 살해)이 발생했다. 해당 보고서에서는 독일 군인과 소비에트 연방 국가의 여성 사이에 생긴 신생아 75만 명 가량을 독일인 혈통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고 서술한다. 이러한 혼혈아들의 출생 증명서에 프레드리히, 루이즈 등의 독일식 이름을 중간에 끼워넣는 정책을 계획되었던 적도 있다. 슬라브인들을 아리아인으로 교체하기 위한 인종 청소가 목적이었다. 그나마 요식 행위로 한 얘기지만 뒤늦게 '독일인에 대한 보복 금지'를 공표한 스탈린과 기강 해이가 조직력 붕괴로 이어지기 전에 보복 행위자들을 즉결 처형하고 효수한 NKVD정치장교들 덕택에 동독인 전원이 소련인 부친을 가지진 않았다.

서부전선인 프랑스, 네덜란드, 노르웨이, 덴마크 등지에서는 독일군 수뇌부가 독일군의 이미지를 관리하고 레지스탕스 활동을 억제하기 위해 강간 등의 대민 범죄를 단속하였기에 독일군의 강간과 학살로 아비규환이 된 동부전선에 비해 강간 피해가 상대적으로 매우 적었으나[16][17][18] 전쟁 말기, 1944~5년경에 독일군의 패색이 짙어지며 군기강이 해이해지고 병사들의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자 서부전선에서도 강간율이 치솟았으며 이에 수뇌부도 사실상 손을 놓고 처벌을 하지 않았다. 특히 프랑스에서의 피해가 극심했으며 강간과 동시에 민간인 및 포로 학살, 약탈 및 방화가 무자비하게 자행되었고 전례 없던 대민 범죄에 반발한 서부 전선의 네덜란드와 프랑스 등지의 민간인의 레지스탕스 활동이 급증하는 계기를 불러왔다. 독일군의 강간은 전후에도 여파를 남겼는데 독일에게서 해방된 서부 유럽 국가에서는 강간 피해 여성들이 독일군과 잔 여성으로 매도되어 지역 주민들에게 린치당하는 2차 가해가 벌어지면서 그 폐해가 매우 심각했다. [19][20]

무차별적인 강간 뿐만 아니라 점령지의 여성들을 반강제로 동원하여[21] 일본군의 위안부와 상당히 유사한 시스템의 위안소(또는 매음굴)을 운용하기도 했다.관련 기사 피해 여성은 대부분은 소련,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 출신이었으나 나치 독일이 '비교적' 관대하게 대우한 서북유럽 출신 여성들도 예외는 아니었다.[22]. 독일군 수뇌부는 장병들간의 동성애를 막고 성병을 예방하기 위한 차원으로 위안소를 도입했으며 위안소를 이용하는 장병들에게 콘돔이나 성병 예방 키트, 설문지를 보급하고 장병들에게 위안소 이용을 '권장'하는 등 매우 시스템적으로 위안소 체계를 운용하였으며 독일군 장병들이 남긴 수기에도 해당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성노예로 희생된 여성들은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았다. 급료는 거의 지급되지 않았고 하루에 한 명의 여성이 수십 명의 남성을 상대해야 했으며, 가슴이나 팔뚝에 훤히 보이는 '야전 매춘부'(Feldhure) 문신을 새겼으며 임신을 방지하기 위해 마취 없이 강제로 불임 수술을 시켰다. 성병이나 임신이 발생했을 경우 대부분 즉각 살해되었다. 전후 독일군 위안소에서 살아돌아온 소수의 여성들마저도 '독일군과 몸을 섞은 불결한 여성' 취급을 받아 사회에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고 이는 사회의 멸시와 냉대를 두려워한 피해 여성들이 전후에도 피해 사실을 극력 함구하는 계기가 되었다.[23]

동부전선에서 독일군이 자행한 성 범죄에 관해서 무려 400쪽 분량으로 다룬 권위적인 논문으로 Victims, Heroes, Survivors: Sexual Violence on the Eastern Front During World War II가 있다.미네소타 대학의 Wendy Jo Gertjejanssen이 쓴 것으로 인터넷에 무료로 공개되어 있다(최하단의 full text 클릭). 단순히 강간만을 다룬 것이 아니라 매음굴 같은 주제도 다루었다. 내용이 매우 어려우나 전문적으로 알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읽어 보면 좋은 논문이다.


3.3.3. 초토화 전술[편집]


점령지를 포기하거나 점령지의 원주민들이 게릴라전으로 저항할 경우, 독일군은 그 지역의 모든 것을 파괴했다. 이러한 파괴와 학살은 폴란드,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발트 인근 등 독일군이 점령했던 모든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특히 독일군 점령지의 저항군이 게릴라전으로 괴롭힐 경우 이를 뿌리 뽑으려고 이러한 초토화 전술을 자주 사용했다.

물론 이 초토화 전술이 게릴라전을 상대하는데 좋은 효과가 있었다. 왜냐하면 민간인 학살을 너무나도 가혹하게 저지른 나머지 현지 게릴라들이 독일군에게 민간인이 당할 피해를 우려하여 작전을 자제하는 일도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독일군 점령지의 게릴라들은 연합군과의 전쟁이 없었다면 진즉에 전멸했다. 사실 게릴라 문서를 보면 알다시피 아무리 강대국이라도 게릴라전에 맞서는 것은 전면전보다 더 힘들기에 게릴라의 근원을 파괴하는 섬멸전을 수행하지 않는 한 포기할 수 밖에 없다. 베트남 전쟁아프간 전쟁, 이라크 전쟁도 공통점이 섬멸전과 초토화가 없었기에 강대국들이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가령 1943년 3월, 르제프 돌출부에서 후퇴하는 들소 작전에서 초토화 작전이 동반되었다. 대규모 사전 파르티잔 토벌 작전에서 다수의 민간인이 처형되었으며, 들소 작전을 지휘하던 발터 모델은 노동 적령기의 남성과 식량을 차출하고, 우물에 독을 풀고, 마을을 파괴하라고 지시했다.[24] 르제프를 탈환한 소련군의 보고서에 따르면 지역에 있던 대다수의 건물들이 파괴되었으며,[25] 이 세 도시에서만 15000명이 강제 노동을 위해 독일로 수송되었다.[26] 철도 거점과 1,000km에 달하는 철로, 전주와 1,300km의 전화선과 전선이 파괴되었다. 소련은 발터 모델을 전범으로 선포하고 법정에 세울 생각이 만반이었으나, 모델이 항복하지 않고 자살하면서 무산된다.


3.3.4. 해군과 공군의 전쟁범죄[편집]


이런 대다수의 범죄는 그 특성상 국방군 가운데서도 육군에 의해 주도적으로 저질러졌지만 해군과 공군 역시 전쟁범죄에서 자유롭진 못했다.

일반적인 경우 공군은 그 군종의 특성상 전쟁 범죄를 저지를 여지가 적은 편이기는 하다. 직접 적과 전투하는 인원은 비교적 소수인 전투조종사들이고 대부분의 지상 요원은 기지에서 벗어나지 않으므로 직접 교전할 일 자체가 적다. 그러나 헤르만 괴링의 욕심으로 공수부대 뿐 아니라 공군 야전사단 같은 비 정상적인 편제가 등장할 만큼 대규모의 지상전 병력을 보유한 데다, 이들이 육군의 집단군 등에 배속되어 지휘를 받았고, 항공기 승무원 및 조종사들 역시 비전투원에 대한 학살 임무(ex: 민간인 거주 구역의 폭격, 병원선 등 의료 시설 및 인원에 대한 공격 등)를 맡은 경우가 있기 때문에 무작정 깨끗한 군대라 보기 힘들다. 그러나 일단 괴링이 이런 잔혹 행위를 엄격히 금지하기도 했다.

유럽 동부 전선에서 육군이 아닌 공군의 경우, 소련 해, 공군 조종사나 항공기 승무원들인 경우 주적이 주적이었던지라 마찬가지로 학대받은 경향이 크다. 하지만 사로잡힌 지상군 포로들은 상대적으로 관대한 대우를 받은 편이었고, 민간인 학살 등에 대한 혐의는 육군에 비하면 확실히 적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독일 공군도 민간인 학살을 크게 저질렀다. 대표적으로 공군 원수였던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스페인 내전 당시 게르니카 폭격을 지휘했으며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 육군이 스탈린그라드에 진격하기 이전 스탈린그라드에 무차별 폭격을 퍼부어 1주일 만에 민간인 5만 명을 죽였다.

해군은 규모 자체가 미약했고 당시 해군들이 서로에게 상대적으로 신사적이었고 땅 밟을 일도 적었던지라 공군과는 다른 이유로 전쟁 범죄를 저지를 여지가 적다. 3군 가운데서 공격이 끝난 후 포로나 민간인 피해자 등을 구조하는데 그나마 적극적이었던 군종이 해군이었으며, 이는 독일 해군과 교전 혹은 일방적으로 공격당했음에도 많은 연합군 해군 장병이나 상선사관 등 참전자들이 크릭스마리네 출신자들에 대해 우호적인 시선을 보내거나 심지어 변호하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이는 크릭스마리네가 특별히 깨끗한 것이 아니라 2차 대전 기간 동안, 전반적으로 해상전 분야가 육상과 항공전 분야에 비해 좀 더 분위기가 인도적인 편이었던 이유가 크다. 태평양 전쟁의 경우 일부 일본 해군의 또라이짓과 이 때문에 열받은 미 해군이 교전이 끝난 일본 해군의 구조를 거부하는 등의 사례도 있었으나, 그래도 대부분 일단 익수자라면 피아 구분없이 적극적으로 구조하는 등 일단 교전이 종료되면 해상에서는 적 항공기나 잠수함의 위협 등(이는 적뿐 아니라 표류 중인 아군에 대한 구조까지 포기된 경우도 있다.)으로 인해 급히 철수하지 않는 이상 어느 국가든 최대한 적극적으로 구조에 임했으며, 이 때문에 육, 공군에 비해 보다 적성국 장병들에 대한 우호적인 분위기가 형성된 편이다.

또한 라코니아 사건과 같이 자함이 격침될 수도 있는 위기에서도 침몰시킨 선박의 승객과 승무원들을 적극적으로 구조한 사례도 있다. 대한민국 해군의 경우, 장보고급 잠수함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접한 유보트 전사 등을 통해 인수단원을 통해 꽤 긍정적인 이미지로 크릭스마리네가 국내에 소개된 점, 우방국 군대인 미합중국 해군 등도 크릭스마리네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하는 분위기가 대세인 점 등으로 인해, 3군 중 가장 우호적인 시선을 받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독일 해군은 국제법을 위반하고 중립국의 민간 상선 등에 대한 공격한 전적이 있다. 이건 국제법을 장식으로 아는 히틀러조차도 하지 말라고 했던 짓이다.[27] 또 라코니아 사건 이후 되니츠는 인도적 구조 활동을 금지하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물론 이 경우 구조 활동 중 공격을 받은 상황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고 공식적인 명령으로 구조 활동을 금지한게 잘한 것은 아니다. 다만 되니츠도 명령은 했으나 구조 활동을 하는 걸 묵인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아울러 포로에 대한 부당한 처우 역시 존재했다는 점에서 크릭스마리네도 마냥 깨끗하진 않았다.


3.3.5. 비밀 야전 경찰의 존재[편집]


국방군의 게슈타포라 불린 조직으로, 대중의 인지도는 떨어지지만 하는 짓은 게슈타포 못지 않았다.

이 외에도 국방군의 전쟁범죄를 상세히 조사하고자 한다면 이 영문위키 자료를 보면 된다. 자료에는 정치장교 즉결처분 명령 등 국방군의 반인륜적 범죄명령(Criminal Order)과 포로 및 민간인 학살(보면 알겠지만 소련, 폴란드, 벨기에, 프랑스, 그리스, 이탈리아 등등 각지에서 벌어졌다), 강간 등의 내용이 매우 상세하게 나온다.


3.4. 강제 노동[편집]


"이 인원들을 먹이고 재우는 것은 최소한의 지출로 최대한의 결과를 얻는 방향이어야 한다" - 프리츠 자우켈, 제국 전권 노동 감독관

자우캘은 이 혐의로 전범재판에서 사형에 처해진다.

"1만명의 러시아 여자들이 대전차호를 파다가 지쳐서 죽는다면, 내 관심을 끄는 것은 어찌 됐든 독일에게 대전차호가 생겼다는 것 뿐이다." - 하인리히 힘러

나치는 노동력 착취를 위해 유럽 점령지에서 수많은 민간인들을 강제로 잡아왔다. 해외 노동자들은 계급제로 분류되었는데, 독일 계통 국가나 이탈리아 같은 동맹국은 방문 노동자(Gastarbeitnehmer)라고 불리며 동등한 대우를 받았다. 하지만 동원된 민간인, 폴란드인 포로 등은 강제 노동자(Zwangsarbeiter)라고 불리며, 더 오래 일해야 하면서도 적은 급료와 배급을 받았다. 또한 대중교통이나 식당, 교회 등의 공공시설 이용이 금지되었다. 그리고 동부 점령지, 특히 우크라이나 국가판무관부에서 끌려온 열등인종 슬라브인들은 동부 노동자(Ostarbeiter), 오스트아르바이터로 불리며 더욱 혹독한 취급을 받았다.

오스트아르바이터들은 대기업 소유나 사설 경비가 지키는 캠프에 갇혀 지냈으며 동쪽을 뜻하는 독일어 형용사 "OST"라고 새겨진 배지를 달고 다녀야 했다. 평균 하루에 12시간, 일주일에 6일을 일했고, 독일인 노동자의 30% 가량의 임금이 지급됐지만 이는 간신히 의식주를 해결해 굶어 죽지 않을 수준이었다. 게다가 진짜 돈이 아니라 캠프 내에서 제한된 물품만을 구매할 수 있는 표 형식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아, 과로, 폭격(오스트아르바이터는 방공호에 들여보내지 않는 경우가 잦았다), 학대, 처형으로 죽었다. 특히 "열등 인종"으로 분류된 슬라브인들은 작은 규정 위반으로도 무자비하게 구타당하거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오스트아르바이터의 절반이 여성이었지만, "열등 인자"를 남길 수 있는 허가되지 않은 성행위나 임신은 무자비하게 처벌되었으며 아이는 낙태되거나 출산 후 바로 처분되었다.

1944년 여름, 노동력이 될 수 있는 사람은 닥치는 대로 잡아오기 시작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신입 오스트아르바이터는 16세 이하로 매우 어렸다. 30% 가량이 12~14세에 불과했으며, 1943년 10살로 낮아진 연령 제한 때문에 그보다 더 어린 아이들도 얼마든지 있었다. 일정 이상 나이를 먹었다면 독일 국방군에서 노동력으로 쓰기 위해 차출되었다. 당시 나치 독일의 기록에 의하면 집계 가능한 외국인 노동자와 포로가 760만 명이었다. 확인 가능한 최소한의 수치인데도 강제 노동자들이 독일 노동력의 1/4를 차지한다는 것에서 그 규모를 알 수 있다. 그 중 강제 노동으로 인해 죽음에 이른 소련인의 수는 무려 216만 명에 달한다.

3.5. 전범기업[편집]



3.6. 왜곡: 국방군 무오설[편집]


항목 참고.

[1] 사진 속 맨 앞의 소년은 '츠비 누스바움(Tsvi Nussbaum)'(당시 7세)으로 알려져있으며, 부모는 살해되었으나 본인은 살아남아 뉴욕에서 의사로 살다가 2012년 사망했다. 그러나 그가 아니라는 전문가들의 의견이 많으며 본인 역시 확실치 않다고 증언했다.[2] 이들을 연행하는 부대는 바로 나중에 36 SS 디를레방어 사단으로 승격하는 디를레방어 SS 특수연대. 항목에서 보면 알 수 있듯 이 부대는 동부전선에서 너나 할것 없이 학살, 강간을 묵인, 조장하던 국방군과 SS들마저도 경멸했을 정도로 나치 독일 상층부에서 찍힐 정도의 미친 범죄자 집단 그 자체인 부대이다. 그 SS가 '일원'이 아니라 '제 앞가림도 못하는 사회부적응자들을 밑에 두었을 뿐'이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애초에 사단장부터가 2차 대전 한참 전부터 아동 성폭행 및 강간 미수 전과로 수용소를 들락날락 거리고, 나치당에서도 여러 번 제명되었다가 유일한 친구인 고틀로프 베르거의 도움으로 여러차례 구제된 전과가 있다. 그리고 국방군은 좀 더 무거운 형벌로 형벌부대가 있었으며, 형을 유예하는 대신 형벌부대로 보냈다가 전공을 세우면 다시 원 부대로 돌려보내는 방식으로 운영하였는데, 이 형벌부대에서조차 구제불능인 미치광이 범법자들에게 무기를 쥐어줘 싸우다 죽으라고 만든 사단이 바로 이 36 SS 디를레방어사단이다.[3] 소년 옆에 총을 든 자는 요제프 블뢰체(Josef Blösche)출처라는 자로, 아인자츠그루펜에도 참여했다. 전후 소련의 포로가 되었다 동독으로 보내졌고, 이후 사고를 당해 얼굴이 심각하게 변형되었다. 그 와중에 결혼하고 아이를 둘 낳고 살다가, 1961년 함부르크에서 전직 SS 동료가 그의 범죄행각을 재판에서 폭로했고, 동독 경찰에 의해 신분이 발각되어 1967년 체포되었다. 1969년 동독 에르푸르트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라이프치히에서 총살형이 집행되었다.[4] 독일 출신 방송인인 다니엘 린데만 역시 이 점에 대해 크게 비판한 바 있다.[5] 자세한 내용은 벨기에 침공 문서의 리에주 요새에 대한 자료 참고.[6] 참고로 당시 러시아군 포로들 가운데에는 일본 제국의 압박을 피해 제정 러시아로 망명하여 러시아군에 입대한 고려인들도 있었다. 때문에 당시 고려인들이 한국말로 부른 아리랑이나 민요가 아직까지 남아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이 그레고리 김이 부른 아리랑이다.[7] 정확히는 게슈타포의 포로 학살이다.[8] 티머시 스나이더의 《피에 젖은 땅》421p에서 발췌.[9] 볼프람 베테의 《독일국방군》122p에서 발췌.[10] 참고로 폴란드 침공 당시 폴란드 민간인 사망자는 20만 명으로, 그 중 10만여 명은 공습으로, 2만여 명은 국방군과 무장친위대에 의해 조직적으로 학살당했다. 또한 적어도 3천여 명 이상의 폴란드 포로들이 학살당했으며, 적게는 수십여 명 규모에서, 많게는 쳉스토호바(Częstochowa) 학살처럼 1천여 명이 넘게 학살당하는 일도 잦았다.[11] 독일군은 폴란드군 포로를 소련군 포로 못지 않게 매우 잔인하게 대우하고 학살하였다. 폴란드 역사학자와 정부의 자료에 따르면 단순 총살이 자비로 보일 정도로 잔악한 학살이 이루어졌다. 무차별 구타를 가해 죽이거나, 총검 연습용으로 포로를 나무에 묶어놓고 난자하거나, 구덩이를 파고 폴란드군 포로들을 밀어 넣고 기름을 끼얹은 뒤 산채로 불태워 죽였고, 강가 구석에 포로들을 몰아놓고서는 무차별 기관총 사격을 가해 포로들을 익사하거나 사살당하게 만들었고, 작은 건물에 포로들을 집어넣고 수류탄을 내부로 던져넣어 죽이는 등 매우 비인간적인 방식으로 포로를 학살했다.[12] 구체적인 동기는 불명이나 독일군은 강간을 저지른 직후 피해 여성의 신체를 끔찍하게 훼손하여 죽이는 경향이 전쟁 내내 매우 두드러졌다. 독일군 참전 병사의 수기에 따르면 "길거리에 나뒹구는 벌거벗고 피투성이가 된 여자의 시체를 보는 건 다반사였다. 그들은 때로는 나무에 목이 매달려 있었고, 음부에 총검이나 막대기가 꼳혀 있었고, 고깃덩이처럼 토막이 나고 내장이 모두 드러나있었고, 건물이나 차량에서 내던져져 머리가 깨져 있었다. 동료 병사들은 그들에 대해 아주 조금의 연민이나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라고 묘사할만큼 당시의 참상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출처: https://junsv.nl/ostdeutsche-gerichtsentscheidungen[13] 영국군 포로 수용소에서 독일군 포로들의 대화를 비밀리에 감청했고 이를 이후에 독일의 역사학자 죈케 니첼 (Sönke Neitzel)이 해당 감청 기록을 집대성하여 정리했다. 해당 자료를 보면 독일군 포로들은 서로 낄낄대며 여성을 잔혹하게 강간하고 학살한 만행을 무용담처럼 떠들어댔으며 그들의 입으로 여러 끔찍한 사례가 언급된다.[14] 현재의 우크라이나 하르키우. 즉 당시의 소련 영토. 제2차 하르코프 공방전,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이 벌어진 곳이다.[15] 러시야 영토[16] 물론 전쟁 말기 이전에도 서부전선에서의 강간은 분명히 자행되었으며 독일군 수뇌부는 이에 대해 형식적인 처벌은 했다. 그러나 강간죄가 군법상 총살형까지 가능했던 것과는 달리 군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죄목만이 대부분 적용되어 처벌은 무겁지 않았고 범죄를 저지른 병사를 다른 지역이나 부대로 전출시키는 데에 그쳤다.[17] 폴란드 침공 당시에도 독일군은 폴란드인 여성을 상대로 수많은 강간을 저질렀으나 그 중 기소된 사례는 고작 1건이였는데 이는 부스코즈두루이(Busko-Zdrój)에서 유대인 여성 1명을 독일군 병사 3명이서 집단 강간한 사례였는데 이마저도 황당하게도 피해자가 유대인이였다는 이유에서 기소되었던 것이였으며 죄목 역시 강간이 아닌 인종 모독죄(Rassenschande)였다.[18] 물론 강간죄로 적발되어 즉결처형된 병사가 존재하기는 하나 극소수에 불과했으며 총살형을 선고받더라도 이후 감형되어 형벌 부대에 보내지거나 영창을 사는 것이 전부였다. 독일군 수뇌부가 자체적으로 처형한 병사들의 죄목은 대부분 탈영(적전 도주 포함)이나 명령 불복종이였으며 황당하게도 민간인이나 포로 학살 같은 전쟁 범죄 행위의 수행을 거부한 병사를 명령 불복종으로 간주하여 처형한 사례도 존재한다. 이와 매우 유사한 처형 사례는 일본군에게서도 다수 존재한다.[19] 프랑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덴마크 역시 나치 독일의 치하에서 해방된 직후 독일군과 잔 여성들을 색출하며 린치를 가하고 공개적으로 모욕을 주는 행위를 가하였는데 독일군에게 강간을 당한 여성들마저도 이러한 피해를 당하면서 사회적 병폐가 매우 심각했다. 관련 기사[20] 네덜란드로 국가가 다르긴하나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4화에서 매우 유사한 장면이 연출되었다.[21] 전쟁 이전부터 자발적인 매춘부였던 여성은 극소수였고 대부분은 일자리를 알아봐준다는 명목으로 여성들을 속여 매음굴에 가두었으나 그럼에도 인원이 충당되지 않았을 경우에는 마을이나 길거리에 들이닥쳐 눈에 띄는 여성을 닥치는대로 강제로 끌고가는 짓을 저지르기도 했다.[22] 프랑스, 노르웨이, 벨기에 ,네덜란드 등[23] 이로 인해 독일군의 위안소 운용은 일본군 위안부와는 다르게 현대에도 별로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다.[24] Вели́кая война́ (2013)[25] 뱌즈마: 5500채의 건물들 중 51채, 그차즈크: 1600채 중 300채, 르제프: 5400채 중 500채 생존.[26] 《Hitler's Commander: Field Marshal Walther Model》 스티븐 H. 뉴튼[27] 물론 히틀러의 의도는 인도적인 문제가 아니라 미국을 자극할 수 있다는 현실적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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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23 23:30:44에 나무위키 독일의 전쟁범죄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