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츠 자우켈

덤프버전 :

[[독일의 전쟁범죄|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의 전쟁범죄
]]

[ 펼치기 · 접기 ]
전범과 재판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루돌프 헤스 | 마르틴 보어만궐석재판 | 발두어 폰 시라흐 | 발터 풍크 | 빌헬름 카이텔 | 빌헬름 프리크 |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 | 알베르트 슈페어 |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 알프레트 요들 | 에른스트 칼텐브루너 | 에리히 레더 |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 율리우스 슈트라이허 | 카를 되니츠 |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 | 프리츠 자우켈 | 한스 프랑크 | 헤르만 괴링자살

카를 브란트 | 카를 게프하르트 | 볼프람 지퍼스 | 루돌프 브란트 | 발데마르 호펜 | 카를 겐츠켄

에르하르트 밀히

오스발트 포흘

빌헬름 리스트 | 로타르 렌둘릭 | 발터 쿤체

울리히 그라이펠트 | 베르너 로렌츠

오토 올렌도르프 | 에리히 나우만 | 파울 블로벨 | 베르너 브라우네 | 에두아르트 슈트라우흐 | 마르틴 잔트베르거 | 오이겐 슈타이믈레 | 발데마르 클링겔회퍼 | 하인츠 요스트 | 구스타프 아돌프 노스케 | 프란츠 직스

헤르만 호트 | 빌헬름 리터 폰 레프 | 게오르크 폰 퀴힐러 | 게오르크-한스 라인하르트
학살 사건
홀로코스트 | 바비야르 학살 | 벨라루스 초토화 | 오라두르쉬르글란 학살 | 말메디 학살 | 바르샤바 봉기 진압
생체 실험
T4 작전
강제수용소
틀:나치의 주요 절멸수용소 | 다하우 강제수용소
기타
라이헤나우 강조 명령 | 국방군 무오설
※ 문서가 있는 경우에 한해서 서술. 기소 여부 및 판결에 대해서는 각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문서를 참고
※ 둘러보기 : 틀:파시즘, 틀:나치즘, 틀:뉘른베르크 군사법정 전범재판



파일:슈츠슈타펠 문장.svg 친위대의 장성급 지휘관

[ 펼치기 · 접기 ]
[[친위대(나치 독일)/국가지도자|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00px-Reichsf%C3%BChrer-SS_Collar_Rank.svg.png파일:투명.png

친위대 국가지도자
Reichsführer-SS
]]
일반
친위대

율리우스 쉬렉 | 에어하르트 하이덴 | 하인리히 힘러 | 카를 항케
[[친위대(나치 독일)/최상급집단지도자|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00px-SS-Oberstgruppenf%C3%BChrer_Collar_Rank.svg.png파일:투명.png

친위대 상급대장
Oberstgruppenführer
]]
일반
친위대

쿠르트 달루게질서경찰 총수 | 프란츠 슈바르츠
무장
친위대

파울 하우서 | 요제프 디트리히기갑
[[친위대(나치 독일)/상급집단지도자|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00px-SS-Obergruppenf%C3%BChrer_Collar_Rank.svg.png파일:투명.png

친위대 대장
Obergruppenführer
]]
일반
친위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P |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 루돌프 헤스 | 오토 디트리히 | 발터 부흐 | 볼프 하인리히 그라프 폰 헬도르프P | 리하르트 발터 다레 | 마르틴 보어만 | 막스 아만 | 구스타프 아돌프 셸P | 에른스트 빌헬름 볼레 |아르투어 그라이저 |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 | 아우구스트 아이그루버 | 알베르트 포르스터 | 울리히 그라이펠트P | 율리우스 샤우브 | 빌헬름 슈투카르트 | 빌헬름 케플러 | 프리츠 자우켈 | 필리프 보울러 | 카를 피흘러 |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 | 한스 라머스 | 헤르베르트 바케
무장
친위대

에른스트 칼텐브루너P | 고틀로프 베르거 | 아르투어 플렙스 | 요시아스 추 발데크피르몬트P | 커르트 폰 고트베르크P | 마티아스 클라인하이스터캄프 | 베르너 로렌츠P | 막시밀리안 폰 헤르프 | 발터 슈미트 | 발터 크뤼거 | 프리드리히 크뤼거P | 아우구스트 프랑크P | 아우구스트 하이스마이어P | 알프레트 뷔넨베르크질서경찰 총수 | 에르빈 뢰제너P | 에른스트 로베르트 그라비츠 | 에른스트 하인리히 슈마우저P | 에리히 폰 뎀 바흐-첼레프스키P | 오스발트 폴 | 리하르트 힐데브란트P | 테오도어 아이케 | 파울 샤르페 | 페케테헐미-체이드네르 페렌츠 | 루스커이 예뇌 | 펠릭스 슈타이너 | 프리드리히 예켈른P | 빌헬름 레디스P | 빌헬름 비트리히 | 빌헬름 코페P | 카를 구텐베르거P
카를 볼프 | 카를 오베르크P | 카를 폰 에버슈타인P | 카를 헤르만 프랑크P | 한스 라우터P | 한스-아돌프 프뤼츠만P | 한스 위트너 | 헤르베르트 오토 길레
특수
작전집단

우도 폰 보이르슈P
[[슈츠슈타펠/계급#집단지도자|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00px-SS-Gruppenf%C3%BChrer_Collar_Rank.svg.png파일:투명.png

친위대 중장
Gruppenführer
]]
일반
친위대

하인리히 뮐러P | 아우구스트 폰 마이츠너P | 야코프 슈폴렌베르크P | 오딜로 글로보츠닉P | 요한 라텐후버P | 빌헬름 그림P | 카를 클라우베르크
무장
친위대

그러시 요제프 | 게오르크 뢰르너 | 루돌프스 방게르스키스 | 헤르만 페겔라인 | 헤르만 프리스 | 카를 겐츠켄 | 카를 게프하르트 | 카를 브란트 | 카를 프리드리히 그라프 폰 퓌클러-부르크하우스P |리하르트 글뤽스 | 베르너 오스텐도르프 | 위르겐 슈트로프P | 하인츠 라인파르트P | 하인츠 레머딩 | 헬무트 폰 판비츠
특수
작전집단

아르투어 네베P | 오토 올렌도르프P
[[슈츠슈타펠/계급#여단지도자|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00px-SS-Brigadef%C3%BChrer_Collar_Rank.svg.png파일:투명.png

친위대 소장
Brigadeführer
]]
일반
친위대

에른스트 폰 바이츠제커 | 율리우스 쉬렉 | 발터 셸렌베르크P | 울리히 그라프 | 프란츠 요제프 후버P | 페르디난트 폰 잠메른 프랑케네크P | 카를 마리아 빌리구트
무장
친위대

구스타프 롬바르트 | 레옹 드그렐 | 브로니슬라프 카민스키 | 실베스터 슈타들러 | 오토 쿰 | 이반 코노노프 | 쿠르트 마이어 | 빌헬름 몽케 | 프리츠 비트 | 하인츠 하르멜
특수
작전집단

에리히 나우만P | 오토 라슈P | 카를 에버하르트 쇤가르트P | 프란츠 발터 슈타흘레커P | 프란츠 직스 | 하인츠 요스트P
※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 윗 첨자P : 질서경찰 계급 겸임

※ 둘러보기
파일:나치 독일 국장(화이트).svg 독일 국방군의 장성급 장교






제국 전권 노동 감독관
친위대 명예 상급집단지도자
프리츠 자우켈
Fritz Sauckel

본명
Ernst Friedrich Christoph "Fritz" Sauckel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크리스토프 "프리츠" 자우켈
출생
1894년 10월 27일
독일국 바이에른 왕국 하스푸르트
사망
1946년 10월 16일
연합군 점령하 독일 뉘른베르크
정당


계급
슈투름압타일룽 대장 (상급집단지도자)
슈츠슈타펠 대장 (상급집단지도자)
시민권
독일인
1. 개요
2. 초기 행적
3. 나치당 입당
5. 전후 재판과 최후



1. 개요[편집]


파일:자우켈2.jpg
프리츠 자우켈 (Fritz Sauckel)
나치 독일의 정치인이자 국가 전권 노동 감독관이었다.


2. 초기 행적[편집]


하스푸르트에서 태어나 어머니의 병으로 인해 학업을 중단한 뒤 15세 때부터 선원으로 일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오스트레일리아로 항해 도중 배가 연합군에 의해 배가 나포되어서 프랑스에 억류되기도 했다. 전후인 1919년 풀려난 뒤 독일로 귀국해 공장 노동자로 일했다.


3. 나치당 입당[편집]


1923년에는 나치당에 입당했으며, 1927년에는 튀링엔 대관구의 관구장(Gauleiter)에 선임되었다. 1933년 히틀러가 수상이 된 뒤에는 제국의회 의원과 튀링엔 대관구의 제국 지도자로 승격되었으며 돌격대와 친위대의 명예 상급집단지도자 계급도 부여받았다.


4. 제2차 세계 대전[편집]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카셀의 제국 국방위원을 역임했고, 1942년 3월 알베르트 슈페어의 추천으로 제국 전권 노동 감독관이 되었다. 독일 내의 많은 노동 가능 인원들이 징집되어 노동 인력이 부족해지자, 점령지에서 약 500만 명에 달하는 인력을 독일로 보내 노동에 종사하도록 하는 것이 주요 업무였다. 노동자들 중에는 자원해서 독일로 간 이들도 있었으나 대부분 강제로 징용되어서 기본적인 생활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대우를 받거나 탄압을 받았다.


5. 전후 재판과 최후[편집]


종전 후에는 연합군에 의해 체포되었고,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재판 중에 자우켈은 자신이 노동력 동원을 주도한 점은 인정했지만, 그들이 당한 가혹 행위나 부당한 처우, 살해 등에 대해서는 끝까지 책임이 없다고 주장했다. 사실 재판관들 사이에서도 사형 선고에 대해서도 이견이 많았고, 특히 자우켈의 상관이었던 슈페어가 훨씬 가벼운 20년형을 선고받은 것에 대해 논란이 많았다. 일부 방청객들은 슈페어가 살아남기 위해서 자우켈에게 교묘하게 책임을 떠넘겼다고 비판하기도 했고 현재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다.

사형 집행은 다른 사형수들과 마찬가지로 교수형이었고, 교수형이 집행 직전 최후 진술에서 "나는 무고하게 죽는다. 내 형량은 불공평하다. 신이여, 독일을 보호하소서!" 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또한 그는 사형대에 올라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교수대를 바라보며 "난 죄 없이 죽는거요."라고 애처롭게 중얼거렸다고 한다. 사망 후 시체는 자살한 헤르만 괴링을 포함한 사형수 11명의 유해와 함께 뮌헨 근교의 화장장에서 화장된 후 유골은 미 육군에 의해 공개되지 않은 채 강에 뿌려졌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24 12:34:46에 나무위키 프리츠 자우켈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