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폰 만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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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국방군 육군 원수
에리히 폰 만슈타인
FM Erich von Manstein

파일:에리히 폰 만슈타인.png

이름
Fritz Erich Georg Eduard von Lewinski-Manstein
(프리츠 에리히 게오르크 에두아르트 폰 레빈스키만슈타인)[1]
출생
1887년 11월 24일
프로이센 왕국 베를린
사망
1973년 6월 10일 (85세)
서독 바이에른 주 이르센하우젠
안장
독일 니더작센 주 도르프마르크
신장
181cm (5ft 11in)
복무
독일 제국군 (1905년 ~ 1918년)
독일 국가방위군 (1918년 ~ 1935년)
독일 국방군 (1935년 ~ 1944년)
최종 계급
원수 (Generalfeldmarschall)
주요 보직
남부집단군 참모장
11군 사령관
돈 집단군 총사령관
남부집단군 총사령관
주요 참전
폴란드 침공
프랑스 침공
바르바로사 작전
세바스토폴 공방전
겨울폭풍 작전
쿠르스크 전투
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
카메네츠-포돌츠크 포위전
주요 서훈
백엽검 기사십자 철십자장
서명
파일:vonmansteinsignature.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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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친부 에두아르트 폰 레빈스키
친모 헬레네 폰 슈페를링
양부 게오르크 폰 만슈타인
양모 헤트비히 폰 슈페를링
배우자
유타 시빌레 폰 로에슈
(1900 - 1966)
자녀
장녀 기젤라 폰 만슈타인
(1921 - 2013)
장남 게로 에리히 폰 만슈타인
(1922 - 1942)[1]
차남 뤼디거 폰 만슈타인
(1929 ~ 2019)
친인척
이모부 파울 폰 힌덴부르크
학력
Strasburg Catholic Gymnasium
(1894~1899)
Plön Kadettenanstalt
(1900~1906)
Preußische Kriegsakademie
(1913~1914)[2]


1. 개요
2. 생애
2.2. 제1차 세계 대전과 그 이후
2.3. 프랑스 침공과 낫질 작전
2.4. 독소전쟁에서의 활약
2.5. 전범재판
2.6. 전후 생활
3. 평가
3.1. 쿠르스크 전투는 정말로 잃어버린 승리인가?
4. 전범
5. 유대인 혈통 논란
6. 보직 내역
6.1. 장성
7. 진급 내역
8. 주요 서훈 내역
9. 매체에서



1. 개요[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ndesarchiv_Bild_183-H01758,_Erich_v._Manstein.jpg
파일:external/de.academic.ru/Bundesarchiv_Bild_101I-231-0718-12A,_Erich_v._Manstein.jpg
파일:external/1.bp.blogspot.com/Manstein,+Erich+von+-+Generalfeldmarschall01.jpg

전쟁은 졌다고 생각할 때까지 지는 것이 아니다.

Ein Krieg ist nicht verloren, bis Sie ihn für Verlorenes[2]

halten.


성격의 강인함과 내면의 강인함은 결정적인 요소다. 대열에 있는 사람의 신뢰는 사람의 인격의 힘에 달려 있다.

Charakterstärke und innere Stärke sind jedoch entscheidende Faktoren. Das Vertrauen des Mannes in den Reihen beruht auf der Charakterstärke eines Mannes.


프로이센 원수는 반역하지 않는다.[3]

Preußische Feldmarschälle meutern nicht.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의 독일 국방군 육군 지휘관. 최종 계급은 원수. 마지노선을 무너뜨린, 제2차 세계 대전 초 독일군의 승리를 이끈 프랑스 침공의 주역이며, 독소전쟁에서도 대활약한 장성이자 명장이다.

독일 장군들을 서부 전구에서의 작전별 교환비를 보고 비교했을 때, 평균 우세 교환비가 2등으로 높은 장군은 보크(스당 돌파 및 아라스 진격 시에 1:3, 브로디 전투, 라세이냐이 전투에서(에리히 회프너와 합동 작전) 1:4.3)였고, 1등이 만슈타인(하르코프 전투에서 1:5, 쿠르스크 전투에서 1:3, 탈린 포위전에서 1:3)이었다. 이 덕분에 군사학계에서는 독일 국방군 최종병기라고 불린다(공수 전환점 적용, RAM 모델에서 대칭 전력만 포함, 동부전선 내 작전들을 모집단으로 정의하였을 때 전장 공심별 +1/-1.3의 오차 포함, 대칭 상수 미적용(대칭 상수를 적용하게 될 경우 모든 전장이 똑같은 상황과 환경에서 진행되었다고 정의내리게 된다. 교환비는 표면적으로 보자).

동부전선 전구 부분에서 브로디전투~네피리탈취전까지 평균 1:4의 교환비율을 보여줬는데, 이게 얼마나 대단한 거냐면 서부전선에서 팔레즈 포위전에서는 연합군:추축군의 비율로 고려하였을 경우 미군의 우월한 물자보급과 장비 및 력이 투입되어도 팔레즈 포위전에서 1:3, 튀니지 전투에서도 1:2.7 정도였다. 더욱이 서부전선은 연합군이 항공 우세를 가져갔었고, 동부전선의 경우 소련군이 독일군보다 배속된 물자가 더욱 많았다. 즉, 최소한의 병력으로 최대한의 성과를 올린 것이다. 다만 쿠르스크 전투에서는 1:1.3이라는 저조한 비율을 보였는데, 이는 이미 기갑부대, 기계화부대, 기동부대, 특작부대 등을 통한 비선형동시통합침투를 통한 전과확대를 목표로 하는 독일군의 전격전을 카운터한 방사형 내선구 및 전중방종심으로 구축된 소련군의 방어선 때문이었다.

1944년 4월 이전까지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주요 전투들, 특히 전격전으로 불리는 초기 전투들의 승리를 이끈 전략을 구상해낸 명장이다.[4] 전쟁 역사에서 포위전의 대가, 기동전의 대가로 명성이 높다.

하지만 이런 능력과는 별개로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의 전쟁 범죄에 동참 내지는 방조하였기에 도덕적으로 비판받는다. 다만 당시 대부분의 나치 전범과 마찬가지로, 만슈타인은 냉전이라는 커다란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제대로 처벌받지 않았고 오히려 새로이 조직된 독일 연방군 내에서 전설로 취급받았다.[5] 이후 서독 국방과 관련한 업무를 맡았으며, 서독 육군 창설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2. 생애[편집]



2.1. 제1차 세계 대전 이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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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의 만슈타인

파일:eduard_von_Lewinski.jpg
만슈타인의 친부 에두아르드 폰 레빈스키

1887년 11월 24일, 대대로 군인을 배출한 프로이센의 귀족 가문인 레빈스키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친부, 에두아르트 폰 레빈스키는 프로이센의 포병대장이었다. 원래 이름은 프리츠 에리히 폰 레빈스키였으나 어머니 헬레네 폰 슈베린크의 누이 헤트비히 폰 슈베린크[6]가 육군 중장 게오르크 폰 만슈타인 장군과 결혼했으나 슬하에 자식이 없어 그녀에게 에리히 폰 레빈스키가 태어나면 양자로 달라고 해서 양자로 보내지게 되었다. 그래서 에리히 폰 만슈타인은 폰 레빈스키만슈타인이라는 양쪽의 성을 갖게 되었다.

만슈타인은 당시 독일 제국령이었던 프랑스의 슈트라스부르크[7]김나지움1894년에 입학했고, 1900년 프로엔과 그로스 리히터펠데(베를린)의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해 1906년 3월 제3근위보병연대사관후보생으로 입대하여 1907년 1월 소위에 임명되었다.

여기서 만슈타인은 프리츠 폰 로스베르크 장군의 참모로 일하다가 1913년에 육군 대학에 입학해 훗날 함께 낫질 작전을 입안하게 되는 하인츠 구데리안을 만난다. 다음해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고, 그는 중위로 진급했다.


2.2. 제1차 세계 대전과 그 이후[편집]


만슈타인은 제1차 세계 대전 기간 중 동부전선에서 종군하였다. 폴란드에서 부상을 입고 회복 후 세르비아 침공, 베르됭 전투, 솜 전투 등 1차 대전의 굵직굵직한 전투들에 참여하며 경험을 쌓았다. 1915년 대위로 진급했다. 잠깐 후방에서 참모 노릇도 하다가 전방 부대의 참모직을 맡으며 여름 공세에 참여하다 종전을 맞았다.

대위 시절 1925년소련과의 라팔로 조약에 의거한 군사 협력으로 소련군 장교들과 교환 훈련을 가게 되는데 이때 소련에서 만슈타인과 교환 훈련을 간 인물이 다름 아닌 게오르기 주코프였다. 이후 1928년 드디어 소령으로 진급하고 1931년, 1933년 중령, 대령으로 진급했다.

나치당의 집권 후, 1935년 7월 육군참모본부 제1과장에 임명되어 작전 부분의 책임자가 되었다. 만슈타인은 이곳에서 능력을 발휘해 서서히 두각을 나타냈다. 1936년 보병 소장으로 승진해 육군참모본부 제1참모차장이 되고 당시 육군참모총장 루트비히 베크 장군의 총애를 받으며 참모본부 내에서 승승장구하며 사실상 차기 육군참모총장으로 내정되었다. 1938년 중장 진급.

하지만 나치가 군부 장악 목적으로 일으킨 블롬베르크-프리치 사건이 일어남으로써 육군 상급대장 베르너 폰 프리치 장군의 스캔들 사건의 여파로 베크 장군이 사임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자 덤터기를 쓰고 제18보병사단장으로 좌천되었다. 좌천 직전에 히틀러의 오스트리아 연방국 침공 명령에 따라 베크와 함께 5시간 만에 오스트리아 침공 작전을 수립했다. 히틀러가 육군참모본부에 덜컥 내린 침공 기한에 맞춰 작전을 수립하려면 정말 5시간밖에 없었다.[8]

여담으로 베크가 물러난 후 본의 아니게 육군참모총장 자리에 오른 프란츠 할더를 만슈타인은 자신의 자리를 빼앗았다고 생각하며 원수 보듯 했으며, 할더 또한 그런 만슈타인을 곱게 보지 않았다.

파일:external/img.welt.de/Adolf-Hitler-Politiker-NSDAP-D-Lagebesprechung-im-Hauptquartier-des-Heeresg.jpg
▲ 작전 회의 중인 만슈타인과 히틀러.[9]


2.3. 프랑스 침공과 낫질 작전[편집]


1939년 후반, 독일군의 작전 입안자들이 프랑스 침략과 점령 계획을 모의하기 위해 모였다. 그들이 찾아낸 최선의 답은 '슐리펜 계획'의 현대화된 형태였다. 1914년과 마찬가지로 독일군은 북해에서 룩셈부르크 남단까지 뻗은 광활한 전선에서 저지대 국가 벨기에네덜란드를 침공할 준비를 했다. 벨기에를 점령함으로써, 독일군은 마지노 선과 프랑스군과 영국 원정군 사이에 위치한 중부 혹은 동부 프랑스의 어디쯤에서 프랑스군영국군을 포위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황색 작전'이라 명명된 이 계획은 이미 알려진 슐리펜 계획의 단순한 복사판이었기 때문에 특별한 것은 없었고, 잠재적으로 오히려 재앙에 가까웠다. 다큐멘터리 ‘10대 사건으로 보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이러한 재앙과 같은 작전은 의도적인 것이었다고 설명한다.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보수파 장교들이 히틀러의 프랑스 침공 의지를 단념시키기 위해 의도적인 태업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한편 육군 상급대장 룬트슈테트참모장으로 자리를 옮긴 만슈타인은 그의 명성을 드높이게 되는 낫질 작전을 입안하게 된다. 당시 독일 육군 최고사령부(OKH)는 프랑스를 침공하기 위해 '황색 작전'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황색 작전은 1차 대전 때의 슐리펜 계획과 거의 다를 것이 없는 작전으로 실행했다가는 예상하고 있던 프랑스의 방어 계획(딜 계획)에 죄다 막혀 버릴 수 있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슐리펜 계획의 복사판에 가까운 이 계획이 그대로 실행되었다면 그것은 독일군에게 완전한 재난으로, 1차 대전 때 경험했던 참호전을 연상케 하는 교착 상태를 그대로 재현되면서 2차 대전이 조기에 끝났을지도 모른다.

이런 문제를 간파한 만슈타인은 하인츠 구데리안과 함께 머리를 굴리다가 당시 A집단군을 맡고 있던 룬트슈테트에게 '낫질 작전'(지헬슈니트 계획), 일명 '만슈타인 계획'을 설명한다. 낫질 작전은 프랑스 영토 내의 프랑스군과 영국 원정군을 분리시키기 위해서 주공을 북부의 B집단군이 아닌 룬트슈테트의 A집단군으로 변경하고, 모든 기갑 전력을 아르덴 숲 쪽으로 집중시켜 스당 지방을 급속 돌파함으로써 벨기에에 있는 연합군의 반격을 저지하고 적의 주력을 역으로 포위 섬멸하자는 획기적인 작전 내용으로 고도로 훈련된 근접 지원 항공기(슈투카)와 차량화 보병, 기갑 부대가 강력히 필요한 계획안이었다.

룬트슈테트는 비록 만슈타인의 계획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OKH에 낫질 작전을 실행할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이런 기발한 작전을 반기기는 커녕 분노한 다른 육군 장군들은 만슈타인이 자신들의 권위를 무시한 채 독자적인 계획을 세우고 있다며 그의 무례함을 질타했다.

육군 최고사령관 발터 폰 브라우히치육군참모총장 프란츠 할더는 당시 무모해 보였던 낫질 작전에 크게 반대하며 황색 작전을 원안대로 실행할 것을 고수했다. 사실 그때까지는 기갑 부대의 기동을 통한 공격의 중요성이 아직 제대로 인식되지 못한 시기였고 아르덴 숲은 전차가 통과하기에 좋은 지형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룬트슈테트는 만슈타인이 짤리고 게오르크 폰 조덴슈테른 보병대장이 참모장으로 들어오자마자 작전 반대를 시작했다.[10]

만슈타인은 기갑 부대가 충분히 아르덴 숲을 통과할 수 있다는 구데리안의 주장과 함께 줄기차게 낫질 작전의 실행을 주장하다가 그 '보답'으로 뿔난 할더에 의해 폴란드 전선에 배치된 제38군단장에 임명된다. 사실상의 좌천이었다. 덕분에 1940년 1월 10일까지는 군부에서 완전히 잊힌 인물로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만슈타인은 생각하지도 못한 기회를 얻게 되는데 바로 아돌프 히틀러와의 만남이었다. 만슈타인의 보좌관 중에 히틀러 비서실장 루돌프 슈문트 육군 대령과 친한 육군 소령이 한 명 있었는데, 그 연줄을 이용해 슈문트 대령에게 만슈타인의 계획을 설명하게 된다. 이를 들은 슈문트는 신임 장군들과의 조찬식이 끝난 후 만슈타인을 히틀러의 집무실로 불렀는데, 만슈타인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낫질 작전을 설명해 히틀러를 감복시킨다. 1차 대전 동안 참호에서 고생했던 히틀러로서는 슐리펜 계획을 조금 손본 것에 불과한 황색 작전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지만 다른 방법을 찾지를 못해 고심하던 차에 만슈타인을 만난 것이다.

하지만 아직 작전 성공에 의구심이 있던 히틀러는 결심을 내리지 못했는데, 마침 운명의 장난인지 1940년 1월 10일 독일군의 기존 황색 작전이 설명된 비밀 문서를 휴대한 루프트바페 소속 참모장교였던 헬무트 라인베르거 소령이 탑승하고 있던 슈토르히 경비행기가 벨기에에 불시착하고 생존한 조종사가 포로로 잡혀 문서가 노획되는 사태가 발생하면서 히틀러는 결정적으로 낫질 작전을 지지하게 된다. 그때 할더도 마지못해 다른 방도가 없었으므로 낫질 작전의 필요성을 깨닫고 자신의 의견을 접고 만슈타인을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뒤 OKH는 낫질 작전을 전격적으로 채택하게 된다.[11]

이런 곡절 끝에 1940년 여름 낫질 작전을 실행한 결과, 프랑스는 6주 만에 독일에게 백기 들고 히틀러는 에펠탑 앞에서 기념 사진을 찍었다!! 칼 프리저는 저서 '전격전의 전설'에서 전격전은 낫질 작전에서 비롯됐다고 설명하고 있다. 정확히 말해서 전격전이라는 이름의 환상이라고 할 수 있다. 프리저는 '전격전의 전설'에서 한 챕터를 할당해 애초에 독일이 프랑스 전역을 개전하기 전까지 '고속 기동을 이용한 적의 심리적 격파'라는 전격전의 개념이, 심지어 전격전이라는 용어조차도 '헛소리'라고 평가되었음을 설명한다. 실제로 독일 수뇌부는 폴란드 침공 직후 영, 프의 선전포고에 극도로 혼란한 모습을 보여줬는데 이는 독일군이 프랑스를 노리고 전격전을 갈고 닦았다면 있을 수가 없는 모습이다[12] 더군다나 독일 군사학계에서 '전격전'이라는 용어가 최초로 등장하는 35년도의 문서 자체가 '전격전은 헛소리'라고 비판하는 내용이다.

폰 라베나우 중령전격전은 바로 과거의 기동전으로의 회귀라고 밝혔다가 히틀러의 측근들에게서 발표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기도 했다.

낫질 작전 시행 중 만슈타인은 제38군단을 이끌고 참전, 센 강을 도하하여 제일 먼저 파리에 입성해 실전 지휘에도 능한 모습을 보여줬다.[13]


2.4. 독소전쟁에서의 활약[편집]



2.4.1. 바르바로사 작전[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ndesarchiv_Bild_101I-209-0086-12,_Russland-Nord,_Erich_von_Manstein,_Brandenberger.jpg

▲ 1941년 6월, 제8기갑사단장 에리히 브란덴베르거(왼쪽)와 작전을 논의하는 만슈타인.

1941년 독일군이 바르바로사 작전을 개시하고 소련으로 쳐들어 갈 때 만슈타인은 북부집단군 소속인 에리히 회프너의 제4기갑집단 휘하에서 제56 차량화보병 군단장을 맡아 선두에서 진격하며 4일 만에 무려 320km를 전진하는 놀라운 기동력을 과시했다.[14] 특히 진격 중에 이리메니 강변에서는 KV-1을 앞세워 공격하는 소련군대전차포 화망으로 유인한 후에 기갑 부대를 좌우로 재빨리 우회시키는 전형적인 기동 포위진으로 독소전 초기 독일군에게 공포를 안겨 준 KV-1 29대를 포함해 200대가 넘는 전차를 파괴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이후 레닌그라드 공방전에 가담한 만슈타인은 레닌그라드로 진격 중에 전선 정리를 해야 한다는 히틀러에 명령에 6일 간 그대로 정지해 있어야 했다. 모스크바로의 쾌속 진군 도중에 무리하게 중부집단군을 키예프 방면 포위전에 투입한 것과 함께 히틀러가 개입하여 독소전쟁의 향방을 바꾼 최대의 전략적 실수 중 하나로 평가된다.[15]


2.4.2. 세바스토폴 공방전[편집]


그해 9월, 제 11군 사령관 오이겐 리터 폰 쇼베르트가 사망한 이후, 만슈타인은 남부집단군 소속인 제11군 사령관에 임명되어 청색 작전의 일환으로 크림 반도의 중심지이자 소련 흑해 함대의 본거지인 세바스토폴을 공략하라는 명령을 받게 되었다.

세바스토폴은 러시아 제국 시절부터 오스만 제국과 싸우기 위해 만든 유서 깊은 요새로 소련군은 세바스토폴에 3겹의 방어선을 쌓고 300mm 해안포를 배치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어 공격하는 입장에선 큰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이에 만슈타인은 구스타프 열차포88mm를 비롯한 1,300문에 이르는 포병 전력을 대규모로 동원해서 5일 동안 쉬지 않고 포격해서 소련군의 방어망을 가루로 만들어 버리는 걸로 맞대응했다.

독일군은 포격의 결과 소련군의 방어망을 분쇄하는 데 성공했지만, 아직 남아서 끈질기게 저항하는 소련 해군 육전대 때문에 예상보다 더 많은 피해를 당해 전투 종료 이후에 제11군은 더 이상 기동이 불가능할 정도로 지치게 된다. 만슈타인은 다시 세바스토폴에 포격을 퍼부어 소련군이 요새를 포기하게 만들어 버리고 소련군을 케르치 반도로 밀어붙여 30여 개 사단을 소멸시킨다.

세바스토폴 공방전은 여러 모로 주목할 만한 전투인데 주로 기동전에 능한 걸로 알려진 만슈타인이 요새 공략과 포병의 대규모 운용이라는 장기와는 전혀 다른 전투에도 능하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었다. 여기에 공격자 입장에서는 힘든 요새 공략전을 2차 공세에서 3.14:1의 우월한 교환비로 끝내 버렸다는 것에서 극찬받는다.[16]

히틀러는 승전보를 듣자 입이 떡 벌어졌고, 만슈타인을 극찬하며 원수로 승진시켰다. 상급대장이 된 지 4개월 만이었다.

만슈타인 본인은 저서에서 이 공략이 자신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공략이라고 밝힌 바 있다.


2.4.3. 겨울폭풍 작전[편집]


세바스토폴 이후 다시 북쪽으로 돌아가 레닌그라드에서 병력을 지휘하던 만슈타인[17]에게 히틀러는 스탈린그라드 전투 도중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게오르기 주코프, 니콜라이 바투틴의 '천왕성 작전'에 의해 스탈린그라드에 포위된 프리드리히 파울루스의 제6군을 구출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만슈타인은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 '돈 집단군'을 급조하고 헤르만 호트가 이끄는 제4기갑군을 앞세워 6군 구출 작전인 '겨울폭풍 작전'을 실행한다. 만슈타인은 능력을 발휘해 스탈린그라드 30km 지점까지 접근하는 데 성공하나, 병력과 보급의 부족으로 더 이상 진격할 수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히틀러의 명령을 금과옥조처럼 받든 파울루스의 현지 사수 결정 때문에 겨울폭풍 작전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평소의 자세가 화근이 되었는지 애당초 구할 마음 따윈 없었다는 주장이 존재하며[18] 이 때문에 히틀러와 함께 파울루스 옹호파의 원망을 받고 있는 모양이다.[19] 자세한 내용은 스탈린그라드 전투 참고.


2.4.4.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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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3년 6월 동부전선을 시찰하는 만슈타인

스탈린그라드 전투로 승기를 잡은 소련군은 독일군이 약해졌다고 오판하게 되고 하르코프를 탈환할 계획을 세우고 하르코프를 향해 대규모 공세를 가해 독일 A집단군을 포위 섬멸하려 했다. 일단 하르코프와 로스토프까지의 공격은 그럭저럭 성공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소련군은 여기서 공세를 확대하게 되지만 소련의 공세 역량은 이미 한계에 가까운 상태였다.

1943년 2월 6일 만슈타인은 미우스 강을 연결하는 선까지 돈 집단군의 우익을 회복하라는 지시를 받고 남부집단군(B집단군 해체 후 돈 집단군의 명칭 변경)은 2월 20일부로 베르너 켐프의 켐프 분견군을 투입하여 도네츠 분지를 확보하였다. 소련군의 공세가 캠프군과 제1기갑군 간의 간격으로 돌진하는 동안 2월 17일 만슈타인은 4기갑군 사령부를 로스토프에서 드네프르페트로브스크로 이전하였다.

2월 15일 프랑스에서 증원된 파울 하우서의 제2SS기갑군단은 히틀러의 사수 명령을 어기고 포위 격멸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르코프에서 철수하였다. 그 무렵 하르코프 공세를 주도하던 니콜라이 바투틴이 지휘하는 소련 남서전선군의 기동 전력인 마르키얀 포포프의 포포프 기갑군이 캠프 분견군과 제1기갑군 사이에 생긴 160㎞에 달하는 간격을 이용하여 드네프르 강까지 도달함에 따라 남부집단군이 포위될 위험에 직면하였다. 그러나 이 시점에 소련군의 공세 역량은 한계에 달한 상황이어서 전력이 극도로 감소한 상황, 즉 공세종말점에 도달한 상태였다.

이에 만슈타인은 남부집단군에게 소련군 남서전선군을 격파하라는 역공격을 지시했다. 이 명령에 따라 제1기갑군 예하 제40 기갑군단은 북서쪽으로, 제2SS기갑군단은 동쪽으로, 제4기갑군 예하 제48기갑군단은 북쪽으로 진격함으로써 완벽하게 소련군을 기습적으로 포위 공격하여 대성공을 거뒀다. 그 결과 포포프 기갑군을 포함해 소련군 52개 사단은 전멸[20]당하고 독일군은 시가전 끝에 하르코프를 재점령했다.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은 만슈타인의 천재성이 가장 잘 드러난 전투로 기동 방어의 모범으로는 첫째 손가락에 꼽힌다. 만슈타인의 야전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은 대부분이 이 하르코프 전역에서 검증되었다.

알파캣이 그리는 월드 오브 탱크 역사웹툰에선 이 전투를 다루며 명장 만슈타인의 대승이라고 평하였다. 링크[21]


2.4.5. 성채 작전, 그리고 공격의 좌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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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3년 6월경 쿠르스크 전투 직전 실시한 대규모 기동 훈련에 초대한 튀르키예군 장성과의 만찬[22][23] 에서 시가를 피우는 만슈타인. 골초였던 그는 격전 중에도 시가를 꼭 피웠다고 한다.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의 결과 쿠르스크 지역이 돌출부로 남게 되었다. 하르코프의 대승을 얻어낸 만슈타인은 소련군이 이전의 패배로 비틀거리고 있다고 보았고 이 기회에 북쪽으로 공세를 펼쳐야 하며 동시에 중부집단군이 남쪽으로 공세를 펼쳐서 쿠르스크의 돌출부를 제거하는 '성채 작전(Operation Zitadelle)'의 원형이 될 작전을 제안하며 즉시 공격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오랜만에 현역에 복귀한 하인츠 구데리안알베르트 슈페어와 함께 '더 이상의 동부전선에서의 대규모 공세는 불가능'하다며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다.

4월 말, 라스텐부르크에서 개최된 회의에서 북방 공세를 담당한 9군 사령관 발터 모델은 엄청난 양의 항공 사진을 제시하며 이미 쿠르스크 지역은 소련군의 방어가 겹겹이 완성되어 있음을 증명하였고 따라서 전술적 증원이 없는 한 이 작전은 성공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으며 작전의 제안자인 쿠르트 차이츨러에게 '성채 작전은 잃는 것만 클 뿐 성공 가능성은 없다.'고 말하였다.

히틀러는 이에 중부집단군 사령관인 클루게에게 의견을 물었으나 클루게는 총통에 적극적으로 찬성하였다. 초기 작전일은 5월 12일이었으나 멜렌틴의 회고록에 따르면 이미 만슈타인은 성채 작전의 성공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었고 히틀러마저도 흔들렸으나 차이츨러가 다시금 신형 전차가 갖추어지는 6월 이후로 공세일을 미루자 제안하였고, 히틀러는 다시금 카이텔과 차이츨러의 설득에 넘어가고 만다. 6월 중순이 왔을 때에는 중부집단군도 남부집단군도 작전의 성공 가능성에 지극히 회의적인 상태였으나, 더 이상 작전을 취소할 수 없게 되자 휘하 부대를 공세 위주로 훈련시켜 재편성한다. 이후 만슈타인은 남부집단군 사령관에 임명되어 헤르만 호트가 이끄는 제4기갑군을 앞세워 쿠르스크 돌출부 남쪽으로 파고들어갔고 이로써 쿠르스크 전투가 개시되었다.

그러나 중부집단군의 공세는 소련군의 거센 반격에 둔화되었고 이를 지휘하던 명장 발터 모델은 소련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리고 공세를 시작한 지 5일 만에 북부에서의 공세는 한계에 달하게 된다. 반면에 남부집단군은 프로호로프카에서 소련군에게 막대한 손실을 입히는 등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그러나 소련군의 쿠투조프 작전으로 인하여 돌출부가 남부집단군 전력만으로 돌출부를 끊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신장되었으며 그런 와중에 이탈리아 왕국에 연합군이 상륙하게 되자 히틀러는 이탈리아 쪽으로 전력을 투입하고 이탈리아 전선이 개막했다. 비록 만슈타인은 계속 공격하기를 원했으나 그렇게 한다고 하더라도 독일이 승리할 가능성은 없었다. 비록 만슈타인의 독일군이 선전했다고는 하지만 제48기갑군단과 SS 2기갑군단은 이미 지속적인 전투로 인해 만신창이와 전투 피로가 쌓일 대로 쌓인 반면에 스텝 예비군은 전투에 참가를 안 해서 전력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대로 공세를 유지했다가는 군단 자체가 와해되는 결말밖에 없었다.

여담이지만 만슈타인은 자신의 회고록 '잃어버린 승리'에서 히틀러만 아니었어도 이길 수 있었다고 주장했는데 제목인 '잃어버린 승리'가 다름 아닌 쿠르스크 전역을 이야기한 것이다. 물론 만슈타인 생전엔 소련의 2차대전 당시 기밀문서들이 해금되지 않은 상태였고 만슈타인은 자신이 꺾으려 들었던 보로네시 전선군 뒤에 스텝 전선군이라는 무지막지한 병력의 소련군이 예비대로 대기하고 있다는 사실은 몰랐기 때문에 이런 주장은 의미가 없다.


2.4.6. 우크라이나 우안에서의 패배[편집]


쿠르스크 전투가 끝나자 소련군은 쿠르스크 남부에서의 반격 작전인 '류만체프 작전'을 실시했다. 그러나 만슈타인은 소련군이 쿠르스크 남부에서는 대규모 공세에 나설 여력이 없을 거라는 낙관적인 판단과 미우스 강에서 전개되는 소련군의 기만 공세에 넘어가 버려 제4기갑군을 남쪽으로 이동시켜 돈바스 지역을 목표로 드네프르 강과 미우스 강을 넘으려는 소련군을 막아 내도록 했다.

이를 통해 미우스 강 축선에서 시행된 로디온 말리놉스키가 이끄는 남서 전선군의 공세를 막아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기갑 예비대의 분산으로 인해 벨고로드-하르코프 축선에서 니콜라이 바투틴의 보로네시 전선군이 주축인 소련군의 공세를 막아 내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만슈타인은 불과 몇 달 전에 일으킨 하르코프의 기적을 다시 만들기 위해 벨고로드 일대에 소련군이 뚫어 놓은 돌파구를 막으려는 국지적 반격에 힘입어 보병사단 4개와 기갑 및 차량화보병사단 7개를 집결시켜 하르코프를 다시 역포위해 보려 했으나 상황은 당시와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결국 돌파구를 봉쇄하지 못한 독일군은 8월 13일에서 17일 사이에 후퇴 작전을 위해 철수를 감행해야 하는 처지로 몰렸다. 마침내 제4차 하르코프 공방전 끝에 소련군은 하르코프를 해방시켰다. 하지만 제4차 하르코프 공방전에서 소련군은 전차 500여대와 기타 사단 몇 개를 손실했다.

그 해 9월부터 10월까지 독-소 양군은 드네프르 강을 사이에 두고 공방전을 벌였다. 마침내 교두보를 확보하고 밀고 들어오는 보로네시 전선군을 상대로 만슈타인은 소련군이 만든 벨리키 부크린 돌출부를 차단하기 위해 제4기갑군을 투입했다. 이 기동으로 소련군의 공세를 저지하기는 했으나 원하는 작전 목표에는 닿지 못하고 말았다. 실망한 만슈타인은 제4기갑군 소속 제48기갑군단을 보로네시 전선군의 우익인 지토미르로 돌려 공세를 가했다. 기갑군단은 지토미르를 손쉽게 점령했지만 결국 브루실로프 일대에서 계속된 공세가 좌절되어 역시 결정적인 공세가 되지 못했다. 이후 10월과 11월에 만슈타인은 두 번 더 기술적으로 바투틴의 우익을 위협했지만 역시 결정적인 성과는 나오지 않았다.

결국 12월 19일에 만슈타인은 위협적인 교두보를 제거하기 위한 마지막 시도를 감행했다. 코로스텐-키예프 간 철도선에서 만슈타인은 4개 군단으로 믿고 있던 일련의 소련군을 포위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 군대는 주공을 숨기기 위한 미끼였고 정작 주공은 브루실로프 지역에서 감행되고 있었다.[24] 바로 그 다음 날 크리스마스에 브루실로프에서 소련군의 공세가 시작되었고 남부집단군의 방어선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리고 말았다. 한없이 무의미하긴 하지만, 교환비는 아직은 독일군이 조금 유리했다.


2.4.7. 체르카시카메네츠 구출, 그리고 퇴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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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4년, 티거 부대를 점검하는 만슈타인.

1944년이 되자 소련군의 바투틴의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과 이반 코네프의 제2우크라이나 전선군의 협동 포위로 코르순과 체르카시에 제11군단과 제48군단이 포위되었다(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 만슈타인은 재빠른 기동 집단 형성과 대담한 돌파, 무엇보다 히틀러의 현지 사수 명령을 무시하고 포위망 안에 갇힌 '슈팀머만 집단'에 돌파에 호응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결정으로 아직 온전하지 못한 소련군의 포위망을 뚫어버리는 데 성공하고 두 군단을 모두 구출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체르카시에의 기동 예비 투입 때문에 다른 곳에서의 소련군 공세를 막아내기는 더욱 힘들게 되었다.

한편 2월에는 카메네츠-포돌츠크에 있던 한스발렌틴 후베의 제1기갑군을 노린 소련군의 공세로 제1기갑군이 포위당하게 되었다(카메네츠-포돌츠크 포위전). 그러나 후베의 적절한 대처와 제1기갑군의 탈출을 거부하는 히틀러와의 논쟁 끝에 만슈타인이 이김으로써 만슈타인은 제1기갑군을 탈출시키는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마침내 거듭된 패배로 전선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만슈타인은 폴란드 국경까지 교묘한 후퇴 작전을 명령하다 현지 사수만을 원하는 히틀러와 크게 갈등하게 되었다.

만슈타인은 히틀러에게 서서히 후퇴하기보다는 일단 크게 후퇴하여 소련군의 추격을 뿌리치고, 전선을 축소한 뒤 병력을 재편성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했으나 정치가 히틀러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1944년 3월 30일 만슈타인과 클라이스트를 불러 곡엽검 기사 철십자 훈장을 수여한 뒤 두 사람을 예비역에 편입시킨다.[25] 후임으로는 페르디난트 쇠르너, 발터 모델, 한스발렌틴 후베 등을 진급시킬 예정이었는데 실제로 같은 날에 모델은 원수로, 쇠르너는 상급대장으로 진급하여 만슈타인과 클라이스트의 후임으로 임명된다.[26] 결국 9월 요하네스 프리스너 상급대장이 만슈타인의 후임으로 남부집단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이로써 만슈타인은 전사에서 모습을 감추게 되었다. 하지만 만슈타인은 직후 병원에 입원하여 백내장으로 수술을 받고 입원하여 장기간 치료를 받았고, 실명 위기를 아슬아슬하게 벗어났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 히틀러의 해임이 없었더라도 병가로 현역에서 물러났을 거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1943년부터 만슈타인은 히틀러에게 꾸준히 동부전선 전체의 지휘권과 재량권을 한 사람의 동부전선 총사령관을 임명하여 그에게 결정권을 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육군 총사령관의 자리에서 대포 1문의 배치마저 간섭하던 히틀러는 무시로 일관했다.

실제로 동부전선 총사령관을 따로 임명할 것은 동부전선의 지휘관들 대부분이 염원했던 바이고, 이들이 총사령관 자리에 만슈타인을 염두에 두고 생각했다는 사실으로도, 만슈타인이 실력적으로는 얼마나 큰 신뢰를 받았는지 알 수 있는 부분. 독소전쟁 자체의 승패를 바꿀 수는 없었더라도 만슈타인의 본래 생각(그리고 하인츠 구데리안, 발터 모델을 위시한 독일군 지휘관들의 생각)대로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동부전선에서의 대규모 공세는 처음부터 염두에 두지 말고 전략적 요충지로 전선을 축소시켜 재편성된 기갑 부대를 활용하여 방어에 치중하였더라면 어이없기 짝이 없는 후퇴 불가 현지 사수에 따른 1944년의 엄청난 희생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2.4.8. 퇴역 후 종전 전까지[편집]


퇴역한 이후 히틀러 암살 계획에 참여할 것을 권유받았으나 "프로이센 원수는 반역하지 않는다"는 말을 남기며 참여를 거부했다.[27] 그러나 적극적으로 막거나 히틀러에게 알리지도 않았으며, 본인도 일단 음모를 알게는 된 이상 알리바이를 위해 사건 당시에는 전화도 안 되는 별장에 피신해 있었다고 한다.[28] 그리고 그 덕분에 그의 수명은 수십 년 연장되었다.

히틀러 사후 후계자가 된 독일 대통령 카를 되니츠 제독이 재기용하려 했으나 연락이 되지 않아 만슈타인의 복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되니츠 제독의 회고록에 의하면 군을 수습하여 연합국과 항복 협상을 추진하게 하려고 했으나 거취를 알 수가 없어서 연락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되니츠 제독은 회고록에서 이 점을 매우 아쉬워하였다.


2.5. 전범재판[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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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범 재판에 출두한 만슈타인.


▲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의 만슈타인. 무성 영상이며 약 45초부터 등장한다.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만슈타인의 인종 범죄에 대한 증언과 증거가 속속 제출되었다. 여기엔 소련 측 검사뿐만이 아니라 과거 만슈타인 부하들의 증언도 포함되었다. 다음은 그의 전쟁범죄 동조에 관한 일화.

만슈타인의 사령부로 가던 한 대위아인자츠그루펜(Einsatzgruppen)의 만행을 목격했다. 이는 범죄 행위였다.

이미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상태였어요. 포로들을 향해 일제 사격을 가해서 그들을 뒤로 넘어뜨렸고, 그래도 살아 있는 사람들은 머리에 권총을 쏴서 죽이는 걸 보았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그건 집단 학살이었어요.

-울리히 군체르트(Ulrich Gunzert) 대위[29]


다음은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만슈타인이 변호사에게 답하는 장면이다.

변호사: 유대인 총살 보고를 받은 적이 있습니까?

만슈타인: 받은 적이 없습니다.


제가 직접 그에게 유대인의 죽음에 관한 보고서를 올리고, 그걸 막을 방법에 관해 물었다면 더 빨리 깨달았을지 모르죠. 하지만 그렇지 못했어요. 만슈타인이 보고받는 일을 교묘히 피했기 때문이죠. 자신의 군대 내에서 부하들이 유대인을 총살해도 못 본 척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리고 우리가 후방의 점령 지역에서 유대인을 총살하고 있다는 얘기를 할 때마다 자신의 군대가 점령한 지역이 아니라고 잡아뗐어요. 그의 관심은 온통 다른 데 가 있었거든요.

- 울리히 군체르트 대위


더욱이 실제 만슈타인은 1941년 11월 20일, 남부집단군 예하 11군의 지휘권을 인계받으면서 "유대인-볼셰비키 체제는 완전히 근절되어야 한다."며 "유대인에 대한 가혹한 조치의 필요성"을 정당화하는 명령을 하달하였다.[30] 만슈타인이 인종 학살 범죄의 동조자였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는 나치는 아니었지만, 히틀러의 총애를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한 기회주의자였음은 분명하다.[31] 한직으로 좌천된 직후 지인을 통해 히틀러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해서 프랑스 침공의 기본 계획을 제출하기도 했다.

그리고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 라스텐부르크에서, 베른하르트 클람로트 중령과 슈티프 장군이 프리드리히 파울루스의 명령을 받고 포위망을 탈출한 빈리히 베어 대위에게 히틀러를 축출하려는 세력에 가담할지 권유했을 때, 히틀러의 리더십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그 실상을 막 깨달은 베어는 아직까지는 태도를 완전히 바꾸기 힘들 것 같다고 말하자 클람로트는 이해하면서도 만슈타인을 조심하라고 충고했다고 한다. “그는 테이블에서 히틀러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지만, 그건 그냥 지껄여 대는 것뿐일세. 히틀러가 오른쪽으로 가라고 하거나 왼쪽으로 가라고 하면, 그는 정확히 시키는 대로 한다네. 그는 그런 사람이야. 이러한 만슈타인의 면모가 국방군 사이에 상당히 널리 유명했던 듯, 전우이자 친구인 또 한 명의 천재 하인츠 구데리안도 만슈타인은 히틀러 앞에서는 최선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며 자신의 회고록에서 아쉬움을 표현한 바 있다.

유의해야 할 점은, 인종 범죄에 적극 동조했으나 히틀러를 맹목적으로 따르지는 않았다는 것. 히틀러는 애시당초 군부의 주류 세력이라 할 수 있는 귀족 출신의 장성들을 대단히 싫어했고, 낫질 작전이 입안되었을 때 히틀러의 반응은 저 녀석은 마음에 안 들지만 작전 하나는 탁월하다니까였다. 만슈타인 본인도 히틀러를 천박하다고 많이 싫어했다. 게다가 히틀러가 1944년의 후퇴를 빌미로 삼아 만슈타인을 해임할 때 "그는 능력은 뛰어나지만 나치가 아니므로 해임되어야 한다"라고 발언했다.' 즉, 그가 보인 기회주의자적 행동은 어디까지나 그의 야망 - 그가 히틀러를 싫어함에도 전쟁을 지지한 것은 그의 내면에 깊이 숨어 있던 거대한 야망 때문이었다 - 을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사적으로는 히틀러를 싫어했다고 하지만, 1939년 4월 20일 히틀러의 50번째 생일 기념 연설에서 만슈타인은 '히틀러는 신이 독일을 구원하기 위해 내려보낸 지도자'라고 칭송하는 연설을 하였다. 그는 이 연설에서 '독일 민족이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것을 막는 적대적인 세계를 경계하면서 또 한 번의 세계 대전이 필요하다'는 언급을 하였다.[32] 이스라엘 역사가 오메르 바르토브(Omer Bartov)는 만슈타인 같은 장교들의 발흥은 대개 열렬한 국가사회주의자인 기술관료적 장교들이 전면에 나서게 된 경향을 반영한다고 주장했다.

이렇듯 그가 정말 히틀러를 싫어했고 히틀러가 그를 싫어했다고 하더라도, 만슈타인의 인종 범죄 혐의가 사라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1930년대 중반에는 유대인의 군 퇴출에 대해서 소극적으로라도 반발한 얼마 안 되는 고급 장교였다는 주장이 있으나, 만슈타인처럼 유대인에 대한 가혹한 조치를 직접 명령한 고급 장교는 더욱 극소수이다. 전후 논란이 된 카를 되니츠의 해군 대제독 연설도 유대인에 대한 혐오주의를 조장하는 정도였다면 만슈타인은 자신의 명령서에서 'the soldier should understand the necessity of punishment of Jewry'라고 직접적으로 명시했다. 국내에서는 라이헤나우강조 명령에 대한 비난만이 유달리 강했지만, 전사학자들은 1941년 10월 10일의 라이헤나우 명령서와 1941년 11월 20일의 만슈타인 명령서를 같은 선상에 놓는다.

특히 만슈타인은 악명 높은 SS-아인자츠그루펜 D 지휘관 오토 올렌도르프(9만 명의 학살[33] 혐의로 기소되어 사형된 장본인)에게 자신과 11군 참모장 오토 뵐러가 직접 서명을 한 1942년 2월 2일자 편지를 두 통 주고 받았는데 여기엔 '유대인에 대한 조치 이후 그들에게 징발한 손목 시계를 배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만슈타인은 금장, 은장 시계들이 전부 베를린으로 전해지는 것에 불만을 가졌으며, 자신의 부하들에게도 손목 시계가 필요하다고 요구했다. 이후 올렌도르프는 11군에게 손목 시계와 동절기 옷을 보냈다. 이는 모두 학살당한 유대인들의 소지품이었다.

올렌도르프는 만슈타인에게 특별 행위(special action)에 사용할 트럭과 탄약을 요청했고, 실제로 만슈타인과 참모장 오토 뵐러는 여가 시간에 올렌도르프와 함께 콘트랙트 브리지 게임을 즐겨할 정도로 친밀했다.[34] 이에 대해 만슈타인은 재판정에서 '편지를 제대로 읽지 않았다, 죽인 게 아니라 그저 시계를 강제로 빼앗은 걸로만 알았다' 등등으로 변명했다. 여담이지만 기타 명령서에 관해서도 눈이 안 좋아서 제대로 읽지 못하고 서명했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올렌도르프와 편지로 전화로 수없이 연락을 주고받은 오토 뵐러조차 히틀러에게 '국가사회주의자로서 부족하다'며 상급대장 승진에 실패했다. 즉, 히틀러 기준에 나치가 아니더라도 이들은 나치의 홀로코스트 정책에 동조했다는 것은 지극히 별개의 기준이었다는 것.

만슈타인은 끝까지 아인자츠그루펜의 활동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다고 하였으며 자신의 부하들은 유대인 살해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올렌도르프는 만슈타인이 이를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11군이 직접 개입했다고 자백했고 혐의를 인정받아 사형에 처해졌다.

위에 서술된 명령서는 뉘른베르크 재판 당시 이미 발견되었지만, 그 외에도 파르티잔에 대한 처형, 청야전술로 인한 민간인 피해에 대한 책임 등의 혐의가 더해져 결국 1949년, 만슈타인은 17가지 전쟁 범죄 혐의로 함부르크 군사법정에 기소된다.


2.6. 전후 생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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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중반의 만슈타인

패전 후 영국군에 체포되어 1949년에 금고 18년을 선고받고 베른의 전범 감옥에 수감된다. 이때 여러모로 특별 대우를 받아 꽤 편안하게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냉전의 시작과 함께 이유 불문하고 독일군을 재건해야 할 상황이 되자 정치인들과 지지자들의 청원으로 풀려난다. 표면적으로는 건강상의 이유로 4년 뒤[35]에 석방되었다. 이 과정에서 소련이 만슈타인을 넘겨받으려고 온갖 수를 다 썼다 한다. 그러나 영국과 미국은 소련의 각종 압력과 공작을 무시하고 영국에서 재판을 진행시켰다.

석방된 만슈타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 독일 국방군독일 연방군(서독군)으로 재건되면서 육군 중장 대우의 문관으로 기용되어 내각의 군사 관련 고문으로 기용, 서독 육군의 창설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1955년에 회고록 《잃어버린 승리(Verlorene Siege)》가 서독에서 처음 발매되었고 1958년 영문판이 출간되면서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이 회고록은 국내에 번역되지는 않았지만, 육군본부에서 비공식적으로 번역했다고 하며, 2016년 10월에 좋은땅 출판사에서 영문판 중역본을 새로이 출간하였다. 국내에 만슈타인이 알려진 바가 넓지 않다보니 출판한 양은 많지 않은 듯.

1958년에 회고록에서 얻은 수익으로 뮌헨 근교 이르센하우젠에 새 저택을 짓고 그곳에 정착해서 살았다. 재판 과정에서 유명세를 얻고 여러 회고록과 저서에서 높은 평가를 받은 덕택에 오히려 전후에 더욱 사회적으로 명성을 누렸다. 석방된 직후 잠시 한 지방 도시에 머물렀는데, 당시 그 마을 사람들이 환영식을 해 줄 정도였다고. 생일엔 옛 독일군 장성들과 나토군 사령관들이 함께 모여 축하 파티를 했다고 한다.

맏아들 게로는 전사했지만, 딸인 기젤라는 참모장교였던 폰 린젠탈(후에 서독군 준장으로 예편)과 결혼했고, 차남 뤼디거는 집안의 전통과 달리 군인이 되지 않고 지멘스 사에서 일했다.

동료들과 왕래하며 독서와 저술 활동으로 노후를 보내다 1973년 85세에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카를 되니츠룬트슈테트의 경우와 달리 장례식은 육군 원수의 명예에 걸맞게 성대하게 치러졌으며, 수백 명의 서독연방군 군인들이 군복을 입고 참석했다.

만슈타인의 정치성향은 주변사람들의 증언을 보면 전형적인 프로이센 귀족이라고 답변하였다. 그는 프로이센 군인의 전통처럼 정치참여 자체를 거부하였고, 충성할 대상이 있다면 그에게 충성을 다하면서 직무를 수행하는 전형적인 프로이센 육군원수 타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만슈타인 본인은 기사도 정신을 강조하며 잔혹행위, 이기주의, 나태 등을 금지했다고 주장하지만, 정작 자신의 관할지에서 아인자츠그루펜이 소련의 정치장교를 처형할 때, 유대인을 대규모 학살할 때 방조를 넘어서 탄약과 트럭을 제공했으며, 관련 서류에 서명을 하고도 끝까지 자신은 잘 몰랐다고 위증을 했다는 점에서 그에 대한 비판이 더욱 커져가고 있다.


3. 평가[편집]


눈앞에 있는 전선을 안정화시키는 능력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손꼽을 만했다. 일선 지휘관으로서도 우수할 뿐만 아니라 참모로서의 역량도 탁월했다. 아예 독일 국방군에서 가장 큰 전과를 올린 장군 중 하나이다. 전체 전황을 체스판처럼 보고 치밀하게 말을 움직이는 듯한 능력으로 찬사를 받는다. 또한 세계 전쟁사에서 군사적 열세를 순수 전략전술로 극복해낸 마지막 장군으로 꼽히기도 한다.

서유럽 최강의 육군을 자랑했던 프랑스군을 4주 만에 끝장내고 이후 독소전쟁에서도 소련군은 만슈타인을 상대로 고전했다. 이에 대해 만슈타인이 주로 소련군을 상대해 왔기 때문에 미군이나 서방 측, 또 그들의 입장에서 주로 제2차 세계대전사를 접하는 국내에서는 동부전선에서 활약했던 만슈타인의 활약이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다는 의견도 있으나 잘못된 것이다.

국내에서도 낫질 작전의 기획자로 프랑스 침공의 대전략을 세운 인물로 다큐멘터리 등에 자주 나와 생각보다 많이 알려져 있다. 오히려 엄청난 전과와 귀신 같은 활약에 비해 한국에 덜 알려진 인물은 발터 모델 쪽이 훨씬 더 그렇다. 게다가 겨울폭풍 작전에서 게오르기 주코프에게 결과적으로 패했던 만슈타인과 달리, 제2차 세계 대전 최고의 방어전 지휘관 발터 모델은 르제프 전투에서 주코프에게 완승을 거두고 동부전선의 수호자, 방어전의 1인자로 찬사를 받았던 걸 생각하면 아이러니하다.

리델 하트는 "연합군에게 가장 두려운 천재"라며 극찬한 적이 있고[36] 하인츠 구데리안을 비롯한 독일군 장성들도 '독일군 최고의 두뇌'라고 인정한 바 있다.

전사학계에서는 만슈타인을 2차 대전 시기 독일 국방군에서 가장 유능했던 인물로 본다. 아마존닷컴에서 검색해도 그를 다룬 영문 서적이 여러 권 검색된다. 독일군 명장으로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에르빈 롬멜은 전술적 역량에선 가히 천재적이지만, 전략적 시야는 명성에 비해 부족하다는 평이 많고, "야전 지휘관"에 최적이지만 사령관에는 다소 부족한 현장 지휘관으로 보는 게 더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에르빈 롬멜과 버나드 로 몽고메리만큼까지는 아니라도 주코프와 자주 라이벌 플래그가 서는데 애시당초 라이벌 관계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주코프는 소련군의 총사령관 대리로 실질적인 소련군의 총사령관 역할이었고 만슈타인은 육군 총사령부의 명령을 듣는 1개 집단군의 사령관이라 동일선상에 놓기가 힘들다.[37]

그러나 최신 연구성과를 반영한 만슈타인 전기(Manstein: Hitler's Greatest General, 2011)를 쓴 Mungo Melvin은 만슈타인을 독일군에서 최고의 능력자라고 평가하면서도, 작전술 면에서 만슈타인과 비교할 만한 지휘관은 서방 연합국에는 없는 것 같고(즉 조지 S. 패튼, 버나드 로 몽고메리,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의 능력이 만슈타인보다 처진다고 디스한 셈이다), 소련의 주코프 정도는 되어야 비교 가능하다고 한 걸로 봐서는 이런 가상적인 라이벌 관계는 서방 전사학계에 널리 퍼져 있는 떡밥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책 한권만 놓고 그런 비교가 서방 학계에 널리 퍼져있다고 보긴 어렵다. 전문 군사사학자들은 그런 비교를 잘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에게도 한계는 있었다. 만슈타인 역시 다른 독일 장군들처럼 단기전, 기동전 범주에서 벗어나 산업화된 시대의 전쟁, 총력전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해결책을 내놓지 못했다.[38] 만슈타인도 결국 훨씬 거대한 적을 전술적 우월함으로 단기간에 제압할 수 있다고 믿고 사방에 적을 만든 프로이센의 군인이었다. 그가 할 수 있었던건 그저 눈앞의 소련군에게 거대한 손실을 입히고 자기가 있는 전선을 안정시키는 것까지였다.

반면 적수였던 소련군은 로마노프 왕조의 성립기부터 러시아 제국과 소련으로 이어지는 그 역사속에 늘 안보위협(몽골, 무슬림 토후, 오스만, 폴란드, 독일, 나폴레옹 등 끝도 없이 나온다)이 산재했고 드넓은 국토탓에 군사력으로 이것들을 일일이 커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런쪽에 감각이 굉장히 잘 발달해 있었다. 무엇보다 그 넓은 러시아 땅에서 양쪽으로 공격받으며, 전세계 강국들이 모두 뛰어들어 군사적인 부분보다도 정치적, 전략적 부분이 아주 중요했던 러시아 내전의 경험이 정계와 군부에 스며들어 있었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군사적으론 많은 실책을 저질렀을지언정 정치적으론 최대한 유리한 판을 조성하고 많은 걸 얻어냈고, 소련 장군들은 만슈타인이 자신들의 눈앞에서 얼마의 피해를 주든 미국의 지원과 자국의 역량으로 빚어낸 방대한 전력을 어디에 어떤 식으로 투입시켜야 하는지 정확하게 꿰고 있었다. 결국 다른 전선에 구멍이 뚫리고 종국에는 전선 전체가 무너져 내렸다.

만슈타인이 명장의 영역을 넘어선 전략-정치 분야를 건드린 사례는 거의 없다. 원수씩이나 되어서도 전략에 정치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었는데, 1944년 퇴각과 현지 사수를 놓고 벌인 히틀러와의 논쟁만 해도 군인으로선 합리적이지만 정치인 입장에선 받아들이기 힘든 주장만을 고집했다. 1943년 연합군이 이탈리아에 상륙하자 히틀러는 동부전선에 전력 약화를 감수하고 20개 사단이 종전때까지 주둔하게 했다. 단순히 군사적인 부분만 본다면 동부전선이 이탈리아보다 훨씬 중요하지만 정치적인 부분, 추축국의 안정화에서 바라볼 경우 이탈리아는 어떻게든 지켜내야 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략적으로 보자면 이탈리아 전선이 뚫리면 연합군은 단기간에 독일 본토로 프리패스할 수 있게 되므로 히틀러는 국가의 최고 정책입안자로써 매우 정상적인 결정을 한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만슈타인은 전세가 기울기 시작한 시점에서조차 이러한 조치를 이해하려고 시도조차 안한 셈이다.

게다가 비굴한 처세로 1인자 히틀러와는 사이가 안좋았고 충성심을 의심받았다. 그 무시무시한 스탈린과 손발을 맞춘 주코프가 아슬아슬하긴 해도 충성심을 인정받고 직언을 할 수 있었던 반면 앞에서 비굴하고, 뒤에서 욕하는 만슈타인에 대한 히틀러의 정치적, 인간적 신뢰는 제로에 가까워서 그의 발언을 더욱 받아들여지기 힘들게 만들었다. 이는 또다른 명장 발터 모델이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히틀러와 언쟁하거나 직설을 하는 것도 망설이지 않아서[39] 역으로 신뢰를 얻고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킬 수 있었던 것과도 대비된다. 구데리안 역시 회고록에서 만슈타인은 히틀러 앞에서는 무조건 굽히고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고 평했다.

결국 독일군은 눈앞의 전장을 승리로 이끌고도 다른 전선에서 생기는 구멍을 막지 못했고 끝내 지속적으로 소모된 끝에 무너져 버렸다.


3.1. 쿠르스크 전투는 정말로 잃어버린 승리인가?[편집]


폰 만슈타인 원수는 자신의 회고록 <잃어버린 승리>에서 쿠르스크 전투의 유일한 패전의 이유로 히틀러 총통의 잦은 간섭과 군사 작전 개입을 거론하였다. 헌데 따지고 보면 이 때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남부집단군의 최정예 6군이 통째로 삭제되며 남부집단군의 전투력은 크게 약화되었고 고질적인 보급문제와 소련군의 역습으로 남부집단군의 전투력은 대규모 공세를 개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리고 만슈타인은 독일군의 일시적인 반격으로 확보한 돌출부를 제거하기 위해 히틀러가 추진하던 치타델 작전 추진에 단초를 제공했다.[40] 즉, 쿠르스크 대전차전의 개전에는 만슈타인의 지분 역시 있음에도 그는 이 전투를 이길 수밖에 없었지만 그럼에도 (총통 때문에) 패배한 전투라고 왜곡하며 패전의 책임을 전적으로 히틀러에게 떠넘긴 것이다.[41] 만슈타인이 비판 받는 더 큰 이유는 더 뒤에 있다. 쿠르스크 전투는 거의 시작과 동시에 실패한 싸움이었다. 성채 작전 개시로부터 불과 일주일도 안 되는 43년 7월 11일 즈음이면 이미 거의 모든 방향에서의 공세가 돈좌 된 상황이었고 공식적으로 모든 공격은 15일에 끝났다. 그리고 7월 12일부터 작전이 종료 되는 8월 23일까지는 소련군의 공격으로 전투가 이루어졌다. 독일군은 이 싸움에 모든 것을 끌어다 싸웠음에도 소련군은 후방에 예비대로 대기하던 스텝 전선군을 끌어낼 수도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련군이 반격에 나서자 독일이 감당해야 할 전선은 지나치게 길어졌고 만약 쿠르스크에 묶여 있었으면 역으로 포위 당할 위기에 처했고 이것과 연합국의 시칠리아 상륙이 겹치면서 독일군은 후퇴를 결정했다. 만슈타인이 잃어버린 승리라고 책임을 떠넘긴 부분은 이 시점에서 공격을 계속 했으면 쿠르스크 돌출부를 끊어낼 수 있었을 거라고 한 부분이었지만 만슈타인은 스텝 전선군[42]의 존재를 몰랐는지 일부러 빼먹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상황에서 독일이 이길 가능성은 매우 낮다는 게 중론이다.

4. 전범[편집]


테일러가 개정진술에서 독일 국방군과 친위대가 전쟁범죄가 유죄라고 언급한 일은 얼마 안가 부정되거나 망각되었다. 이 일은 역사가들이 30년 후에나 역사가들이 다시 밝혀내었고 1990년대와 그 이후에나 대중에게 전달되었다. 하지만 국방군과 친위대가 유죄라는 선언은 동부전선을 낭만화하는 자들에게 억압되었다.

테일러는 자신의 기소를 증명할 증인들을 출석시켰다. 첫 번째 증인은 아인자츠그루펜 D의 지휘관이었던 오토 올렌도르프(Otto Ohlendorf)였다. 올렌도로프의 허가 아래 1941년 6월과 1942년 6월 사이에 90,000명이 아인자츠그루펜 D에 의해 학살되었다. 올렌도르프는 유대인을 비롯한 남녀와 어린이를 학살하고 사체 및 유류품을 처리한 일을 고통스러울 정도로 자세히 증언했다. 올렌도르프는 질문을 받자 독일 국방군이 학살 과정을 적극적으로 도와줬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힘러가 제게 러시아 전역 초기에 히틀러가 이 임무[유대인과 공산당 관련자들을 절멸하는 임무]를 집단군 회의에서 지휘관들에게 발언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중략) 그리고 지휘관들이 이 임무에 필요한 지원을 해야 한다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독일 국방군은 학살을 도와주었을 뿐만 아니라 대량학살의 정신도 가지고 있었다. 올렌도르프는 한 가지 사례를 들었다. "심페로폴에서 육군 사령부는 이 지역의 아인자츠코만도 부대들에게 절멸 작업을 서둘러 달라고 요청했는데 왜냐하면 그 지역 여성들이 위협이 되고 육군이 사용할 가옥이 부족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심페로폴 근처에서 활동하던 제11군의 사령관이었던 에리히 폰 만슈타인 원수가 이후의 증언에서 그가 유대인 학살에 대해 듣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 것은 거짓말이었다. 당시에 그가 친위대 장교들과 충돌하긴 했지만, 그 일은 학살 희생자들의 손목시계들을 누가 가질 것이냐를 두고 다툰 일이었다. 만슈타인은 그 다툼에서 이겼다. 올렌도로프는 이렇게 증언했다. "육군의 요청으로 시계들을 전선에 있는 병력에게 보내야 했습니다."

동부전선의 신화: 미국 대중문화의 독소전쟁 아카이브 (번역가: РККА☭ )


유대인은 유럽에서보다도 강력하게 소련의 정치 지도부와 행정부의 모든 핵심 요직을 움켜쥐고 상업과 교역을 관리하며, 게다가 모든 소요와 일어날지 모를 봉기의 핵을 이룬다. 유대인-볼셰비키 체제는 단번에 영원히 절멸돼야 한다. 그 체제가 다시 유럽의 생존공간을 침번해선 안된다. 독일 군인은 볼셰비키 테러의 정신적 보균자인 유대인을 가혹하게 응징할 필요성을 인식해야 한다. 또한 이 가혹안 응징은 거의 다 유대인이 불러일으킨다고 할 수 있는 모든 봉기의 싹을 잘라내기 위해서라도 필요하다.

1941년 11월 20일 11군에 내린 지령. “결백한 독일국방군” 신화의 산파 바실 리델 하트: 한 군사학 구루의 명예와 제2차 세계대전의 진실


그 엄청난 능력과는 달리 인성은 야비한 기회주의자라고 비판받고 있다. 특히 친나치 문제와 홀로코스트 문제를 다루는 연구에서 이런 평가가 강하게 제기된다. 딱히 적극적으로 족치지는 않았기에 교수대로 가지는 않았지만, 옆에서 족치는 걸 보고 히틀러가 좋아한답시고 딱히 말리지 않거나, 모르쇠로 일관하거나, 잘한다며 히틀러에게 기었던 기록은 수두룩빽빽했다고.

그렇게 알아서 기는데도 히틀러가 만슈타인을 싫어한 것도 사실 이러한 연유에서 비롯되었다. 히틀러의 신임을 받았던 알베르트 슈페어"히틀러 앞에서 단호한 태도를 보이면 원하는 바를 더욱 크게 얻을 수 있다."는 기록을 남긴 적이 있다. 또 만슈타인과 같은 프로이센 귀족 출신이었음에도 히틀러의 절대적인 신뢰를 얻은 만토이펠 또한 "히틀러는 국방군 장성이 자신 앞에서 주눅 들거나 위선적으로 굽히는 모습 없이 고참 병사처럼 당당한 태도로 거짓 없이 말하면 만족스러워한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만토이펠은 실제로 히틀러 앞에서도 이를 항상 실천했고, 때문에 거의 항상 그의 말에 반대 의견을 따박따박 냈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더욱 더 신뢰를 받을 수 있었다. 즉, 만슈타인이 아무리 히틀러 앞에서 기는 척 해봤자 그런 태도를 싫어했던 히틀러 입장에선 저 모습이 절대 진심이 아니라는 생각에 확신을 준 셈.

때문에 만슈타인은 1943년 겨울의 동프로이센에 육군 고위 장성들이 소집된 한가운데서 '총통 각하께 충성을 바칩니다!'라며 일어서서 외쳤다가 차디찬 히틀러의 시선은 물론, 이후 따로 히틀러에게 불려가서 엄청난 질책을 받아야 했다.[43] 이 장면을 기술한 <히틀러 북>을 보면 히틀러의 측근들조차 이러한 만슈타인의 이중적인 모습을 비웃듯이 언급하였고, 전술한 대로 국방군 동료 장성들조차 만슈타인을 비판하였다.

그리고 아무래도 판을 크게 보고 대규모 작전을 특기로 하다 보니 상급 제대 사령관들에게는 높게 평가받지만 하급 제대 지휘관들이나 사병들에게는 평판이 안 좋았다. 우리의 주적은 간부 남부집단군의 한 장교는 리델 하트에게 만슈타인이 해임되고 발터 모델이 사령관이 되었다는 것은 별 의미가 없으며 그냥 집단군 사령관이 교체되는 것에 불과하다고 대답한 바가 있다. 당시 만슈타인은 후임인 모델에게 인수인계를 위해 한동안 함께 근무했는데 이때 모델의 휘하로 함께 남부집단군에 부임해 온 젊은 참모장교는 자신에게도 예의 바르게 대해 준 만슈타인의 모습이 인상적이었지만, 정작 만슈타인의 휘하 장병들은 사령관이 교체되는 것에 별다른 아쉬움을 표하지 않아서 의아했다고 한다.

정작 회고록 "잃어버린 승리"에서는 독소전쟁 패배의 주요 원인을 히틀러에 돌리고 있는데, 특히 쿠르스크 전투에서 히틀러의 공세 중지 명령이 결국 전쟁 전체의 패전 원인이라는 식으로 강조하여 서술하였다.[44] 오랜 시간 전사학계에서는 이러한 내용이 지지를 받아왔고 국내에 출간된 서적들도 비슷한 내용들을 수록하고 있지만,[45] 쿠르스크 전투 당시 소련군은 중부집단군과 남부집단군 전선에 100만을 훨씬 상회하는 예비 부대를 집중시켜 놓고 있었던 상황이고 1943년 3월 말에 울트라 프로젝트 팀의 활약으로 에니그마 암호 통신문을 해독한 영국모스크바 주재 군사 사절단을 통해 쿠르스크 돌출부를 공격하려는 독일군의 의도를 전해 주었던 점, 4월에 이미 소련 스파이 루시(Lucy)에 의해 독일군 지휘관들보다 스탈린과 주코프가 성채 작전을 먼저 파악하고 있었던 사실을 고려하면 다른 결론이 나오게 된다.


5. 유대인 혈통 논란[편집]


만슈타인은 원래 유대인 혹은 유대인 가문 출신이라는 설이 있다. 실상 유럽 내 진짜 뿌리 깊은 명문 가문이 아니면 근대 이후 유럽 내 귀족은 거의 부르주아들이 출세해서 얻은 작위이다. 그렇기에 유대인 혈통이 있을 가능성은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정작 1918년 독일 제국이 패망할 때까지 프로이센 장교단에 유대인은 복무가 금지되었다. 물론 사병으로는 19세기 중반부터 복무가 가능했지만 보수적인 프로이센 장교단에서 장교 복무가 가능했다는 건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에 불과하다.[46] 프로이센 장교단에서 유대인도 아니고 일반 독일인 부르주아가 용인된 것도 19세기에 나폴레옹에게 박살이 난 뒤에나 개혁으로 가능했다.[47]

그럼에도 유대인이라는 설이 나오는 것은, 나치의 유대인 판별 기준은 인종인 데 반해 독일 제국 시절의 유대인 판별 기준은 종교였기 때문이다. 즉 제국 시절엔 기독교도가 아니면 장교는 물론, 교사공무원 자격조차도 없었다.[48][49] 'Stein'이라는 성이 유대인계 성씨라는 지식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국내에 퍼져 있는데[50] 1808년 프로이센이 나폴레옹에 패망하고 개혁을 맡았던 슈타인 남작[51]이나 슈츠슈타펠 중장 펠릭스 슈타이너[52]가 유대인이 아닌 것처럼 그냥 흔한 이름일 뿐이다. 유대인들이 Stein이란 이름을 많이 썼다 해도 독일 내 유대인 비율은 19세기에 1%를 조금 넘고, 20세기 이후엔 아예 독일 사회에 동화되어 바이마르 시대에도 후기에는 0.7%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에 Stein이란 성을 가지면 유대인이라고 단정 짓는 것은 무리한 생각이다.[53]

또한 19세기 이후 부르주아들이 족보 세탁[54]으로 귀족으로 신분 상승하는 테크트리가 일반화되면서 과거 유대인 출신 부르주아들이 귀족으로 자연스레 섞이게 되는데 앞서 서술했다시피 유대교를 믿으면 정관계로 진입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었기 때문에 많은 유대인 출신 귀족들이 기독교로 개종했다. 이들은 종교가 요건인 유대인 기준으론 유대인도 아니다.[55]

하지만 일반인의 편견이란 것이 있기 때문에 19세기부터 새로운 인종에 따른 반유대주의가 성행하고 기존에 사용되던 종교 기준 유대인 판별은 인종 과 혈통으로 변질되었고 마치 일본부락지명총람사건처럼 19세기나 20세기 초반 유명인들을 상대로 그 사람이 유대인 출신이었나 하고 캐고 다니는 서적[56]들이 불티나게 판매되었다. 물론 일부 맞는 것도 있지만 부정확한 것이 더 많았다. 애초에 ~는 유대인계 성이다라는 드립이 19세기, 20세기 초에 유행했던 유대인 음모론의 주된 떡밥이었다는 것[58].

결론은, 유대계 프로이센 장교 집안이란 것은 존재할 수가 없고 유대계라도 기독교로 개종하면 더 이상 유대인이 아니며[59] 피가 섞였다고 가정해도 과거 까마득한 조상의 영향으로 1/4 혹은 그 이하가 섞여도 유대인이네라는 편견으로 유대계라는 설이 나온 것이지, 만슈타인이나 원래 집안인 레빈스키 가문이 유대인인 것은 아니다.

한편 재미있는 이야기로는 레빈스키 가문의 자체는 일찌감치 개종한 신교도 가문이지만, 개종하지 않은 그 친척들은 상당수가 독실한 유대교도였다는 점.[60] 본인도 사석에서 증조부가 랍비였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만슈타인 스스로가 자신의 참모장교들과 대화하면서 별로 멀지 않은 친척 중에 랍비가 있다는 이야기를 한 적도 있을 정도다.

독일어 위키피디아에서는 만슈타인 가문의 유래에 대해 1308년과 1311년에 'Mansto, nobilis de Samethia'(Žemaičiai(리투아니아의 부족 이름)의 귀족 만스토)로서 처음 언급된다고 한다.

또한 원래 핏줄인 레빈스키라는 성도 척 보면 알 수 있듯이 폴란드이다. 정확하게는 동포메른과 서프로이센 일대에 거주하는 서슬라브계 민족인 카슈브인 혈통인데 독일 제국의 전신이었던 프로이센 왕국튜튼 기사단이 카슈브인이나 프루시인 같은 비게르만계 부족들을 정복 후 동화시켜 건설한 나라이기 때문에 히틀러의 "게르만 순혈주의"운운은 그 자체가 모순적인 것이다. 이렇듯 만슈타인 가문에는 폴란드의 영향이 강하게 드리워져 있다. 그리고 애초에 왕가나 귀족들은 외국과의 결혼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전통 귀족들은 순수 독일인 드립에 대해서 별로 공감하지 않았다.

1935년 최초로 뉘른베르크 인종법에 근거한 독일 국방군 내 유대인 및 혼혈인[61]의 강제 퇴역 조치가 시작되자 그 대상자들은 이에 항의하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여기에 군부 내 유대인 퇴출에 앞장섰던 장성들 다수가 엉뚱하게도 만슈타인의 후원자[62]이기도 했기 때문에, 만슈타인은 이 문제를 참모본부 내에서 제기하고서도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이것은 유대인이라기보다 다른 기독교인 귀족 장교들도 나치의 어처구니 없는 인종 정책에 공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프로이센 장교단 주류인 융커들은 엘베 강 동쪽 토지 귀족으로, 전통적으로 지주 노릇을 하면서 폴란드와 발트 해에서 토지를 가진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혼혈도 많았다. 러시아만 보더라도 독일계 귀족들이 대대로 왕실과 혼인하거나 친인척이 될 정도.

상술한 떡밥대로 만슈타인이 유대인의 혈통이 섞였다고 치더라도 독일 국방군 내에서는 1/2 또는 1/4의 유대인이라도 스스로 유대인임을 부정하고 후견인이 적극적으로 행동해 줄 경우 독일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실제로 독일군에는 1/4, 심지어 1/2 유대인 장성조차도 1945년까지 소수 남아 있었다.[63] 루프트바페 원수 에르하르트 밀히는 아버지가 확실한 유대인임이 사회에 알려져 있었기에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지만(후술하겠지만 실제로 밀히는 유대인이 아니다), 유능한 군인을 잃고 싶지 않았던 헤르만 괴링"누가 유대인인지는 내가 결정한다"[64]고 하여 밀히를 보호했고, 밀히의 어머니(아리아계)에게 "사실 밀히는 내가 다른 독일인과 바람 피워 낳은 애고 지금의 유대인 아버지는 양아버지임."이란 사실을 받아내 밀히는 유대인 혐의를 벗을 수 있었다. 대신 출생의 비밀(?)이 밝혀지면서 '사생아'라는 꼬리표가 평생 따라붙게 되었지만.[65]


6. 보직 내역[편집]



6.1. 장성[편집]


  • 1939.09.01 ~ 1939.10.26: 남부집단군 참모장
  • 1939.10.26 ~ 1940.02.01: A집단군 참모장
  • 1940.02.01 ~ 1941.02.28: 38기갑군단장
  • 1941.02.28 ~ 1941.09.12: 56기갑군단장
  • 1941.09.13 ~ 1942.11.22: 11군 사령관
  • 1942.11.22 ~ 1943.02.07: 돈 집단군 총사령관
  • 1943.02.08 ~ 1944.03.31: 남부집단군 총사령관
  • 1944.04.02 ~ 1945.05.08: 예비역


7. 진급 내역[편집]


  • 1906.03.06: 육군 사관후보생(Fähnrich)
  • 1907.01.27: 파일:Si_12c.jpg 소위(Leutnant)
  • 1914.06.19: 파일:Si_11c.jpg 중위(Oberleutnant)
  • 1915.07.24: 파일:Si_10c.jpg 대위(Hauptmann)
  • 1928.02: 파일:Si_9b.jpg 소령(Major)
  • 1931.04.01: 파일:Si_8b.jpg 중령(Oberstleutnant)
  • 1933.12.01: 파일:Si_7b.jpg 대령(Oberst)
  • 1936.10.01: 파일:Si_6a.png 소장(Generalmajor)
  • 1938.04.01: 파일:Si_5a.png 중장(Generalleutnant)
  • 1940.06.01: 파일:Si_4b.png 보병대장(General der Infantrie)
  • 1942.03.07: 파일:Si_4a.png 상급대장(Generaloberst)
  • 1942.07.01: 파일:Si_2c.png 원수(Generalfeldmarschall)


8. 주요 서훈 내역[편집]


  • 1914.10.05: 1914년 제정 2급 철십자 훈장
  • 1915.11.13: 1914년 제정 1급 철십자 훈장
  • 1918.04: 호엔촐레른 왕가 검 기사 십자 훈장
  • 시기 미상: 1918년 제정 전상장 흑장
  • 1939.09.16: 1939년 제정 2급 철십자 훈장 보장
  • 1939.09.21: 1939년 제정 1급 철십자 훈장 보장
  • 1940.07.19: 기사 철십자 훈장
  • 1942.07.16: 루마니아 미하이 용맹 전공 2급 훈장
  • 1943.03.14: 곡엽 기사 철십자 훈장(209번째 서훈)
  • 1943: 크림 방패(크리미아 전역 종군 기념장) 금장(전군 유일)
  • 1944.03.30: 곡엽 검 기사 철십자 훈장(59번째 서훈)


9. 매체에서[편집]


  • 세계정복자 시리즈에서는 현질로만 얻을 수 있다. 참고로 이 게임에서 현질로 얻을 수 있는 장수는 만슈타인, 아이젠하워, 주코프 뿐이다.[66]
현질로만 구할 수 있는 만큼 능력치도 좋지만, 구데리안 등 다른 장군들과 비교해보면 가성비가 좋은 편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구데리안은 현질 없이도 얻을 수 있다.
  • 세계정복자 4/정복/1980에서는 독일군 장교로 나와서 적을 전부 쓸어버리는 위용을 자랑한다. 독일이 ㅈ망하지 않았다는 가정 하에
  • 장군의 영광 3 에는 기갑5성, 행군3성으로 , 8500원으로 판다.
  • 하츠 오브 아이언 4에서는 독일군 장군 목록에 처음부터 등장한다. 군 지휘관으로 임명할 때 페널티가 전무한 장군이며 원역사의 대활약에 걸맞게 능력치도 출중하다. 마지노선을 뚫을때는 만슈타인의 공성포로 뚫는것이 국룰이다 천주제국 모드에서는 국방군이 내전을 일으킬 때 등장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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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대로는 '폰레빈스키만슈타인'으로 표기한다. 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 또한 붙임표로 이어진 인명 등의 경우, 여러 요소가 하나의 단어를 이루는 복합어로 보고, 한글로 표기할 때에는 붙여 적는 것이 규정 용례이다.[2] halten A¹ für A² 구문이다. Für 뒤에는 과거분사가 아니라 4격 목적어가 위치해야 한다. 다만 halten A 형용사의 형태로 쓸 수는 있다.[3]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당시 참여할 것을 권유받자 했던 말.[4] 말하자면 롬멜과 구데리안은 만슈타인이 짜놓은 전략대로 실행한 역할이었다고 할 수 있다.[5] 당시 소련은 만슈타인을 데려가려고 했으나, 종전 이후 냉전 분위기로 급격하게 바뀌면서 서구는 소련이 만슈타인을 연행하기 전에 먼저 데려갔다.[6] 셋째 누이인 게르트루드 폰 슈베린크는 바이마르 공화국 제 2대 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의 아내이다.[7] 프랑스식으로 읽으면 스트라스부르.[8] 이 시기 육군 최고사령부에서의 만슈타인의 역할을 알고 싶으면 <히틀러 최고사령부 1936~1945>를 참고.[9] 만슈타인과 히틀러 가운데에 있는 안경 쓴 장군은 만슈타인의 작전 참모였던 테오도어 부세다.[10] 낫질 작전 중에 정지 명령으로 독일군이 정지, '됭케르크의 기적'이 일어났던 것에는 이 사람 책임도 좀 있다.[11] 할더는 전후 낫질 작전은 자신의 작품이라고 은근슬쩍 주장하다가 빈축을 샀다.[12] 히틀러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외무장관에게 소리를 버럭 지르고, 괴링은 암울한 표정으로 '우리가 망하면 신은 우리에게 한번 더 기회를 줄까?'라는 소리를 중얼거렸다고 한다. 이 인용 부분은 프랑스 침공 항목에 서술되어 있다.[13] 프랑스 전역에서의 만슈타인의 역할을 더 알고 싶으면 <전격전의 전설>을 참고.[14] 오죽하면 자서전의 8번째이자 동부전선 회고 부분 첫 챕터 명이 Panzer Drive일 정도이다.[15] 오토 카리우스의 회고록을 읽어 보면 1944년에 레닌그라드 전선에서 전면적으로 반격을 당한 북부집단군은 일반 졸병조차도 1941년에 레닌그라드를 함락해야 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키예프 방면은 내륙지방인 반면에 레닌그라드 방면은 해안가랑 붙어있었으므로 당시 발트해를 장악중이던 독일 해군에 있어 레닌그라드 점령은 진격으로 인해 길어진 보급선을 해상 보급선으로 커버하는데 있어 큰 도움이 되었고, 레닌그라드를 점령하게 된다면 소련은 북해로 이어지는 도시가 아르항겔스크밖에 남지 않게 되는데 이는 결국 스칸디나비아 반도 전체를 포기하게 되는 것이나 다름없기에 양쪽에 있어 레닌그라드는 북해의 운명을 건 곳이었다.[16] 이전 버전에서 49대1의 교환비라고 하였으나 독일 2차 공세 피해와 소련군 1, 2차 피해의 합으로 비교해도 5.71:1이다. 물론 3.14:1도 충분히 대단한거다. 다만 바르바로사 작전기 평균교환비보다는 떨어진걸 보면 요새는 요새다.[17] 이때 소위로 참전하고 있었던 자신의 장남이 전사했다.[18] 반쯤 시체가 된 6군의 전력으로는 전선을 연결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고, 설령 연결한다 해도 돈 집단군이 완전히 시체가 되어 버린 6군을 챙겨서 빠져 나올 수 있을 가능성 역시 희박하다는 것을 만슈타인이 모를 리 없으며, A집단군을 구하기 위해 6군을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것이 요지다.[19] 일본에서 발간된 제이차세계대전명사록(第二次世界大戰紳士錄)에는 빌헬름 카이텔, 알프레트 요들, 에른스트 우데트 같은 마이너틱한 인물은 수록되었음에도 만슈타인은 없다. 작자가 파울루스 옹호파이며 독일 인사들 중에는 그가 가장 좋다고 한다. 아니나 다를까 파울루스의 서술 부분을 보면 만슈타인을 향한 작자의 원한이 느껴진다.[20] 그러나 소련군의 피해는 8만 명 정도로 당시 소련군 사단이 완전히 편제되었을 때 9,000명 정도의 규모인 것에 비하면 크지 않은 손실이다. 하르코프 공방전 당시 소련군 1개 사단의 인원은 3,000명 선으로 감소한 상태였다.[21] 구글 크롬이나 모질라 파이어폭스로 보아야 제대로 보인다.[22] 튀르키예는 당시 친독 성향을 보이던 중립국이었기에 터키를 끌어들이면 고착된 동부전선의 전세를 유리하게 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튀르키예는 자국의 전신인 오스만 제국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인수분해되었다가 전쟁으로 본토나마 건사한 경험 때문에 독일 편에 서는 것을 그다지 내켜하지 않았고, 독일의 패망이 확실시되던 1945년 2월 23일에야 숟가락 얹기 식으로 연합군에 참가하여 추축국에 선전포고했다.[23] 튀르키예에 인접한 캅카스 방면 전선은 소련에게는 아킬레스 건이라 할 수 있지만, 이 지역은 수비에 유리한 산지인데다 터키군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으니 튀르키예로서도 위험한 도박이라 할 만했다.[24] 그러나 양쪽 다 소련군의 주공이었다는 해석도 있다.[25] 사실 히틀러는 1943년 말에 이미 클루게와 만슈타인을 위시한 당시의 집단군 사령관들을 해임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26] 후베는 4월 20일에 제3제국 최고 영예인 다이아몬드 곡엽 검 기사 철십자 훈장을 받았으나 다음날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였다. 후베 또한 집단군사령관으로 영전할 예정이었다.[27] 만슈타인에 대한 히틀러 암살 계획 참여 권유는 그의 퇴역 이전부터 줄곧 있어 왔지만, 정작 그의 설득 역할을 맡아야 할 헬무트 그로스쿠르트(Helmuth Groscurth) 중령이 만슈타인의 참여 여부를 부정적으로 보아왔던 데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패배와 함께 소련군의 포로가 되면서 포섭 공작이 장기간 중단되었다. 또 군부의 붕괴를 초래할수 있기 때문이었다.[28] 구데리안 또한 암살 계획 참여를 권유받았고, 만슈타인과 거의 똑같이 처신했다. 덕분에 그 또한 편안히 천수를 누렸다.[29] 포로 학살은 제네바 협약을 위반하므로 당연히 국제법 위반이다. 확인사살은 말할 것도 없고.[30] 이는 총통 명령에 근거하여 전 독일군에 공통적으로 내려진 지시였지만, 당시 개념 있는 군단장급 지휘관들은 상당수가 이 지시를 하급 부대에 전파하기를 거부하거나 참모들에게 떠맡기고 자신은 한 발 물러서곤 했다. 만슈타인은 이런 소극적 반대자의 범주에 들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발터 폰 라이헤나우 주도 하의 남부집단군에서 유난히 대규모의 학살이 발생하게 된다.[31] 프로이센 장교들에게 공통적으로 나오는 특징이다. 프로이센 군인, 특히 융커들은 기본적으로 군국주의 사상을 신봉했으니 히틀러가 맘에 들진 않지만 군비증강책을 맘에 들어해 따른 장교들이 많았다. 다만 만슈타인은 유독 이런 행보가 심했다.[32] The Myth of the Eastern Front: The Nazi-Soviet War in American[33] 이것도 적게 잡은게 D부대 손에 죽은 것으로 추정되는 민간인만 68만 명이 넘는다. 다만 여기서 혐의는 자신이 직접 명령한 학살에 한해서이다.[34] Where the Iron Crosses Grow: The Crimea 1941–44[35] 정확히는 1950년 1월부터 수감되었고, 1952년 후반에 치료목적으로 병원에 나와 있었기에 실제 수형 기간은 2년 반 정도였다.[36] 이는 간접적으로 만슈타인의 명성을 이용해 자신의 군사 전문가로서의 명성을 같이 드높히기 위한 후빨이었다. 만슈타인 본인도 이걸 알고 불쾌해했다.[37] 주코프가 스타프카에서 맡던 지위에 해당하는 독일측 인물은 OKW 사령관 빌헬름 카이텔이지만, 카이텔이 그냥 히틀러의 명령을 육군에 단순히 전달하는 심부름꾼에 불과한 반면 주코프는 실제로 작전 전체를 입안하고 책임졌다. 물론 전쟁 초반에는 레닌그라드 수비사령관을 맡기도 했고, 후반기에는 다시 야전으로 돌아와 제2우크라이나 전선군 사령관을 맡아서 베를린 공략을 맡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카이텔은 '히틀러의 예스맨'이었던, 군사적인 능력이 전무한 인물이었다. 군사적 능력의 부재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카이텔의 대척점은 클리멘트 보로실로프가 아닐까 그런데 하다 못해 보로실로프는 KV 시리즈라도 만들어 독일군을 엿먹였다[38] 자질 문제를 떠나 한번도 중심국가가 되어보지 못하고 지역강국에 머무른 국가자체의 한계에서 비롯된 문제점이라서 독일, 특히 프로이센 귀족 출신 장군들은 극복할 방법이 없었다. T-34와 티거&판터, 만슈타인과 주코프를 비교해보면 왜 독일이 전쟁에 질 수 밖에 없었는지가 드러난다. 독일의 전차와 장군들은 눈앞의 전투에선 눈부셨지만 전쟁에선 마이너스 요소 투성이였다. 독일은 전술적으론 대전말까지 소련을 앞질렀지만 전략, 정치에서의 무지는 전술적 우위로 덮을 수 있는게 아니었다.[39] 일례로 히틀러가 자신의 군사적 작전에 일일이 간섭하고 훼방을 놓으려 하자 히틀러에게 9군의 사령관이 누구냐며 직접 질문하는 식으로 강경하게 밀고 나가기도 했다. 물론 결과는 성공.[40] 치타델 작전은 당시 국방군의 유명한 명장들 대부분이 위험성을 언급하며 반대했었다.[41] 다만, 만슈타인은 하리코프 전투에 이에 적이 전열을 정비하기 전의 즉각적인 공세를 주장했고 히틀러는 준비 후 공격을 주장했고 히틀러의 뜻이 관철 되었기에 만슈타인에게만 책임을 떠넘길 수는 없겠지만 제3차 하리코프 전투 직후의 독일군 역시 너덜너덜한 상태였기 때문에 히틀러의 의도가 잘못된 것도 아니었다. 문제는 소련이 동원 능력에서 독일을 능가하고 있었을 뿐더러 독일이 쿠르스크를 언제 공격할 지까지 전부 꿰뚫고 있었기에 쿠르스크로 전력을 집중시킬 수 있었기에 준비를 한들 소련과의 격차가 더 벌어질 뿐 좁혀지지 않았다는 것이다.[42] 쿠르스크에서 싸우던 전선 부대에 많은 장비를 긴빠이 당하긴 했지만 어쨌든 투입 되지 않은 채로 대기하고 있었다.[43] 물론 장성들의 사기 진작과 충성 맹세를 위해 집합시켜 놓고 최고위 장성을 불러다가 호통을 쳐댄 히틀러의 삽질도 삽질이지만, 그만큼 만슈타인의 후빨이 씨알도 안 먹혔다는 걸 잘 말해주는 일화라 볼 수 있다.[44] 만슈타인의 회고록만의 문제는 아니고 독일 국방군 장성들 회고록의 전반적인 문제다.[45] 국내에는 최근 출간된 번역 서적이라도 해당 서적들은 서구권에서 1990년대에 출간되어 최신 연구를 반영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고, 각주에 있는 유명한 전사학자들의 인용 서적들은 그보다 더 오래 전인 1960, 70년대에 출간된 서적들인 경우가 많다.[46] 참고로 아돌프 히틀러의 유대인 상관으로 그에게 1급 철십자 훈장 수훈을 추천했던 후고 구트만 육군 중위는 프로이센이 아닌 바이에른 왕국군의 육군 장교다.[47] 그 전에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엄명으로 '천박한' 부르주아들의 장교단 진입이 불가능했다.[48] 애초에 레빈스키 가문과 만슈타인 가문 모두 프로이센의 명문 귀족 군인 가문이었음으로 대부분이 기독교도임을 알 수 있다.[49] 판사는 프로이센이 아닌 독일 지역에서 19세기 중반 이후 나오기 시작했고 대학 교수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자유 직업인 변호사의사가 많았다.[50] 먼나라 이웃나라 독일편에 수록된게 전파되었을 확률이 있다.[51] 'Heinrich Friedrich Karl Reichsfreiherr vom und zum Stein' 그냥 보통 슈타인 남작으로 불린다. 프로이센 개혁의 업적도 있지만 반유대주의 발언으로도 유명하다.[52] 영화 다운폴에서 히틀러의 공격 명령을 무시해서 뚜껑을 열리게 만든 바로 그 사람이다. 실상은 그냥 이유없이 명령을 씹은게 아니라 슈타이너에게는 공세를 펼치기는 커녕 전선을 사수할 병력조차 모자랐지만.[53] 준왕족 취급을 받는 이전 통치 가문 슈탄데스헤어에서 찾아보더라도 수십 개의 'Stein'이 나온다.[54]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상인들이 돈으로 나라에 공헌하면 작위를 퍼 주는 식으로. 그전에도 마찬가지다. 18세기 프랑스 대혁명 당시 앙시앵 레짐은 약간 과장이고 그 당시 귀족들도 대부분 부르주아들이 출세해서 귀족이 된 것이지, 봉건 귀족은 매우 소수였다. 멀리 갈 것 없이 조선시대공명첩을 떠올려 보자.[55] 이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나 19세기 독일 각 지방 정부마다 유대인 판정 기준이 같다. 현대에도 유대인이라는 드립을 듣는 사람들 대부분은 유대교도 믿지 않고 계율도 지키지 않거나 혼혈이 되어도 그냥 유대인 취급하면서 넣어 버리는 경우가 많다. 카를 마르크스, 멘델스존 같은 경우 조상 대에 기독교로 개종했지만 유대인 드립 공격을 받았다. 정작 자신들은 유대인이라는 자각도 없었다. 재미교포 3세와 비슷한 포지션.[56] 현재 일본에서 연예인이나 스포츠 선수들이 좀만 떠도 2ch에 상주하는 넷우익, 혐한초딩들이 재일 판정에 집착하는 것과 비슷하다.[57] '폴란드에서 루마니아에 이른다' 는 지역 개념은 2차대전 이후 현대 국경을 기준으로 했지만, 2차대전 패전 이후 해당 지역에서는 독일계가 대거 추방당했으므로 '그 지역의 독일인들을 붙잡고 너 유대인이냐고 물어보는 꼴'이란 2차대전 이전 시기를 기준으로 한 이야기이다.[58] 'oooo는 유대인계 성이다' 라는 식의 소위 '유태인 판별법'이 얼마나 어처구니없고 허망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극명한 사례중 하나로, 일본의 작가이자 러시아어 통·번역가, 동유럽 전문가였던 요네하라 마리가 소개한 '동유럽 지역에서의 유태인 판별법'이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동방식민운동에 의해 독일인과 슬라브인이 섞여 살게 된 동유럽 지역에서 유태인들이 사용하던 성씨를 가려내는 방법으로 요네하라 마리 역시 친한 선배였던 동유럽 문학 연구자에게 전해들은 팁이라고 하는데, 간단히 설명하면 해당 지역의 유태인들이 쓰는 성은 독일계 성이다(=슬라브계 성을 쓰는 이는 유대인이 아니다.)는 것이다. 이는 역사적으로 보면 중세~근세 무렵까지만 해도 독일 문화권은 오히려 유대인들에 대한 차별이 상대적으로 덜한 지역이었기에 많은 유대인들이 정착하여 동화되었던 사실에서 기인한 것으로, 말하자면 독일인들의 이주와 함께 동유럽으로 이주한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독일 사회와 상당히 동화된 상태였기에 독일계 성을 사용한 것이다. 마침 만슈타인 역시 프로이센 귀족 가문 출신이니 이 기준이 적용되는 범위 출신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렇게 보면 '유태인들이 쓰는 성씨' 운운이 얼마나 우스운 이야기인지 상식적으로 쉽게 알 수 있다. 폴란드에서 루마니아에 이르는 중·동부 유럽 벨트에서 '유대인계 성씨'를 찾아내겠다는 것은 그 지역의 독일인 대부분을 붙잡고 "너 유대인이냐?" 고 물어보겠다는 소리랑 똑같다는 뜻이다[57]. (게다가 만슈타인의 본래 출신 가문은 '레빈스키' 이니 이는 독일계 성씨조차 아니다.) 결론은 '유대계 성씨' 운운하는 떡밥 자체가 중세·근세 이후 근대를 거쳐 현대에 이르는 동유럽의 역사 (그중에서도 유대인의 정착사)에 대해 전혀 모르는 이들이 19세기 말~20세기 초의 반유대주의 음모론에 의해 만들어진 혐오떡밥을 그대로 물어버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59] 물론 나치 인종적 판별 기준으론 혈통의 1/4 이상이면 유대인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들이 유대인이라는 자각조차 없었지만 당연히 홀로코스트 때 끔찍하게 살해당했다.[60] 만슈타인 가문에서도 다르지 않다. 삼촌인 에른스트 폰 만슈타인이 유대교도였다.[61] 구제국 기준으로 유대인이 아니지만 나치의 기준으로 유대인.[62] 독일 국방군의 장교 진급에는 후견인의 중요성이 높았다고 한다.[63] 물론 아주 많지는 않았고, 그나마 장성급은 몰라도 영관급 장교는 1/4 유대인은 물론이고 그 이하로 피가 섞인 인원들도 대부분 1943년 이전에 강제 제대당했고, 당연히 상당수가 홀로코스트의 희생자가 되었다. 유대인만이 아니라 홀로코스트의 다른 희생자인 집시 혼혈인 역시 마찬가지 운명을 맞았다.[64] 드립의 원조는 19세기 오스트리아 제국 수도 (Wien) 시장이었던 카를 뤼거다. 부유한 빈의 유대인들은 건드리지 않는다는 뜻이다.[65] 그런데 어머니가 그냥 바람 피운게 아니라 어머니의 외삼촌과 바람을 피운 것이다. 족보상으로 어머니가 사촌 누나가 되는 꼴(...). 자세한 내용은 에르하르트 밀히 항목 참고.[66] 이 둘 역시 현질 외의 다른 방법으로는 얻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