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틴 폰 노이라트
최근 편집일시 :
1. 개요[편집]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는 나치 독일의 외교관이자 친위대 상급집단지도자, 국가외무장관을 맡았다.
2. 초기 행적[편집]
뷔르템베르크 왕국 호프구트클라인글라트바흐(Hofgut Kleinglattbach)에서 장원영주 겸 뷔르템베르크 왕국 궁정사무원의 아들로 태어난 노이라트는 튀빙겐 대학교와 베를린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고향인 뷔르템베르크 왕국의 법무관이 되었지만 1901년에 독일 외무성에 들어가 이 해에 결혼하여 두 자녀를 두었다.
3. 제1차 세계 대전[편집]
주 런던대사관 부영사, 주 콘스탄티노플 대사참사관으로 일하던 노이라트는 그 사이인 1916년 제1차 세계 대전때 예비역 장교로 종군하면서 철십자훈장을 수상했다. 1917년부터 이듬 해까지 뷔르템베르크 국왕인 빌헬름 2세(뷔르템베르크)를 보좌하며 궁정집사로 취임하기도 했다.
4. 정치인으로서의 행적[편집]
전후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대통령의 요청으로 외무성으로 되돌아 온 노이라트는 덴마크 영사, 이탈리아 대사를 지냈는데 이탈리아 대사재임시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즘에 감명을 받았다. 1930년부터 1932년까지 영국대사로 부임한 후 귀족출신이던 노이라트는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총애로 1929년에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외무장관이 급사하자 그 후임으로 각광받았지만 의회의 지지를 얻지못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32년에 남작내각이라 불린 파펜 내각에서 외무장관으로 발탁된 노이라트는 이어서 쿠르트 폰 슐라이허 내각, 히틀러 내각에서도 유임되어 1933년의 국제연맹 탈퇴와 1935년의 영독해군조약의 체결, 라인란트 진주 등 외교적인 역량을 발휘했다. 귀족출신에다가 국제적으로도 지명도가 높았던 노이라트는 실무경험이 부족한 히틀러 내각에서 위신을 부여받았다. 하지만 이후 히틀러 내각의 고문이던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가 두각을 드러내면서 1936년부터 노이라트의 외교활동은 제한을 받기 시작했다.
5. 나치당원[편집]
1937년에 노이라트는 나치당에 입당했지만 히틀러의 전쟁계획에는 반대하여 1938년 2월 4일에 외무장관 자리에서 해임되었다. 그러나 내각에 잔류는 했지만 외교정책은 리벤트로프에게 완전히 권한을 내주고 말았다.
6. 제2차 세계 대전[편집]
1939년에 체코 보호령의 총독으로 부임한 노이라트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체코인 레지스탕스 진압 등에 나섰지만 전체적으로 온건한 정책을 펴서 강권적 통치를 원한 히틀러의 신뢰를 잃고 말았다.[1] 1941년에 부총독 자리가 신설되자 국가보안본부장이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부총독으로서 프라하에 부임했다. 하이드리히는 체코 전역에 극심한 탄압정책을 편 후 노이라트의 실권을 빼앗았다. 하이드리히의 암살 후에도 후임 부총독이 된 쿠르트 달루게와 친위대 상급집단지도자인 카를 헤르만 프랑크에게도 밀린 노이라트는 1943년 8월 24일에 총독직을 사임하게 되어 전직 내무장관이던 빌헬름 프리크에게 자리를 내 주고 말았다. 노이라트는 하인리히 힘러로부터 명예친위대 대장의 칭호를 부여받았지만 이후 직접 정치에 관여하는 일은 없었다.
7. 전후 재판과 최후[편집]
전후 프랑스군에게 체포된 노이라트는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전범으로 기소되어 침략전쟁 기획, 전쟁범죄, 반평화적 범죄, 인도주의에 반한 죄에서 모두 유죄선고를 받고 금고 15년형을 선고받은 후 슈판다우 교도소에서 복역하다가 1953년에 건강악화로 인해 가석방되었다.[2] 그 후 노이라트는 은거지였던 엔츠바이잉겐(Enzweihingen)에서 1956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1]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감형이 되는 요소 중 하나로 작용하였다. 1939년 체코슬로바키안들 석방을 위해 보안경찰과 SD를 중재한 것, 1941년 폰 노이라트가 너무 온건하다고 질책하면서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를 대신 보내겠다는 히틀러에 반기를 들었지만 설득에 실패하자 사임하겠다고 한 것, 그리고 본인의 사표가 수리되지 않자 체코 보호령 총독으로 일하기를 거부했다는 점이 판결문 후반부에 기록되어 있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본 노이라트 판결문[2] 모든 범죄에 기소되어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들중 노이라트만 유일하게 금고형이 선고되었다. 그리고 이는 유죄 판결을 받은 이들의 형 중 되니츠의 10년형 다음으로 가장 가벼운 형이었다. 반면 나머지 인물들(괴링, 리벤트로프, 요들, 카이텔, 로젠베르크)은 사형 선고.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21 00:17:13에 나무위키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