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라티온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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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가 생성된 전투만 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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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이름
교전국
공격측
방어측

폴란드 침공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파일:단치히 자유시 국기.png 단치히 자유시 파일:소련 국기 (1936-1955).png 소련
파일:폴란드 국기(1928–1980).svg 폴란드 제2공화국
단치히 우체국 방어전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파일:단치히 자유시 국기.png 단치히 자유시
파일:폴란드 국기(1928–1980).svg 폴란드 제2공화국
바르샤바 전투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파일:폴란드 국기(1928–1980).svg 폴란드 제2공화국
비츠나 전투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파일:폴란드 국기(1928–1980).svg 폴란드 제2공화국
브주라 전투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파일:폴란드 국기(1928–1980).svg 폴란드 제2공화국
겨울전쟁
파일:소련 국기 (1936-1955).png 소련
파일:핀란드 국기.svg 핀란드 공화국
콜라 전투
파일:소련 국기 (1936-1955).png 소련
파일:핀란드 국기.svg 핀란드 공화국

가짜 전쟁
파일:영국 국기.svg 대영제국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프랑스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노르웨이 침공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파일:영국 국기.svg 대영제국
파일:노르웨이 국기.svg 노르웨이 왕국
프랑스 침공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프랑스 파일:영국 국기.svg 대영제국
아라스 전차전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프랑스 파일:영국 국기.svg 대영제국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됭케르크 철수작전
파일:영국 국기.svg 대영제국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프랑스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이탈리아의 프랑스 침공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이탈리아 왕국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프랑스
북아프리카 전역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이탈리아 왕국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파일:비시 프랑스 대통령기.svg 비시 프랑스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미국 파일:영국 국기.svg 대영제국 파일:영국 국기.svg 영연방 파일:자유 프랑스 국기.svg 자유 프랑스 파일:폴란드 국기(1928–1980).svg 폴란드 망명 정부 파일:이집트 왕국 국기.svg 이집트 왕국
몰타 항공전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이탈리아 왕국
파일:영국 국기.svg 대영제국
영국 본토 항공전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이탈리아 왕국
파일:영국 국기.svg 영국 파일:폴란드 국기(1928–1980).svg 폴란드 망명 정부
독수리의 날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파일:영국 국기.svg 대영제국
유고슬라비아 침공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파일:헝가리 왕국 국기(1915-1918, 1919-1946).svg 헝가리 왕국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이탈리아 왕국 파일:불가리아 국기.svg 불가리아 왕국 파일:크로아티아 독립국 국기.png 크로아티아 독립국
파일:유고슬라비아 왕국 국기.svg 유고슬라비아
그리스 침공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이탈리아 왕국
파일:그리스 국기(1863-1924, 1935-1973).svg 그리스 왕국
타란토 공습
파일:영국 국기.svg 대영제국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이탈리아 왕국

마타판곶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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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이탈리아 왕국
라인 연습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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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영국 국기.svg 대영제국 파일:폴란드 국기(1928–1980).svg 폴란드 망명 정부
크레타 섬 전투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파일:영국 국기.svg 대영제국 파일:그리스 국기(1863-1924, 1935-1973).svg 그리스 왕국
바르바로사 작전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파일:루마니아 국기.svg 루마니아 왕국 파일:헝가리 왕국 국기(1915-1918, 1919-1946).svg 헝가리 왕국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이탈리아 왕국
파일:소련 국기 (1936-1955).png 소련
브레스트 요새 방어전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파일:소련 국기 (1936-1955).png 소련
발트해 전역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파일:핀란드 국기.svg 핀란드 공화국
파일:소련 국기 (1936-1955).png 소련
브로디 전투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파일:소련 국기 (1936-1955).png 소련
비아위스토크-민스크 전투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파일:소련 국기 (1936-1955).png 소련
계속전쟁
파일:소련 국기 (1936-1955).png 소련
파일:핀란드 국기.svg 핀란드 공화국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은색 여우 작전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파일:핀란드 국기.svg 핀란드 공화국
파일:소련 국기 (1936-1955).png 소련
뮌헨 작전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파일:루마니아 국기.svg 루마니아 왕국
파일:소련 국기 (1936-1955).png 소련
스몰렌스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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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소련 국기 (1936-1955).png 소련
우만 전투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파일:소련 국기 (1936-1955).png 소련
키예프 전투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파일:소련 국기 (1936-1955).png 소련
페르시아 침공
파일:소련 국기 (1936-1955).png 소련 파일:영국 국기.svg 대영제국
파일:팔라비 왕조 국기.png 이란 제국
레닌그라드 공방전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파일:핀란드 국기.svg 핀란드 공화국
파일:소련 국기 (1936-1955).png 소련
모스크바 폭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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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소련 국기 (1936-1955).png 소련
모스크바 공방전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파일:소련 국기 (1936-1955).png 소련
로스토프 전투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파일:소련 국기 (1936-1955).png 소련
세바스토폴 공방전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파일:루마니아 국기.svg 루마니아 왕국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이탈리아 왕국
파일:소련 국기 (1936-1955).png 소련

르제프 전투
파일:소련 국기 (1936-1955).png 소련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데미얀스크 전투
파일:소련 국기 (1936-1955).png 소련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영불 해협 돌파작전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파일:영국 국기.svg 대영제국
마다가스카르 전투
파일:영국 국기.svg 대영제국 파일:남아프리카 연방 국기.svg 남아프리카 연방
파일:비시 프랑스 대통령기.svg 비시 프랑스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 제국
제2차 하르코프 공방전
파일:소련 국기 (1936-1955).png 소련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청색 작전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파일:루마니아 국기.svg 루마니아 왕국 파일:헝가리 왕국 국기(1915-1918, 1919-1946).svg 헝가리 왕국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이탈리아 왕국 파일:크로아티아 독립국 국기.png 크로아티아 독립국
파일:소련 국기 (1936-1955).png 소련
엘 알라메인 전투
파일:영국 국기.svg 대영제국 파일:영국 국기.svg 영연방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이탈리아 왕국
PQ-17 공격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미국 파일:영국 국기.svg 대영제국 파일:소련 국기 (1936-1955).png 소련
디에프 상륙작전
파일:영국 국기.svg 대영제국 파일:캐나다 자치령 국기.svg 캐나다 자치령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스탈린그라드 전투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파일:루마니아 국기.svg 루마니아 왕국 파일:헝가리 왕국 국기(1915-1918, 1919-1946).svg 헝가리 왕국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이탈리아 왕국 파일:크로아티아 독립국 국기.png 크로아티아 독립국
파일:소련 국기 (1936-1955).png 소련
천왕성 작전
파일:소련 국기 (1936-1955).png 소련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파일:루마니아 국기.svg 루마니아 왕국 파일:크로아티아 독립국 국기.png 크로아티아 독립국
횃불 작전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미국 파일:영국 국기.svg 대영제국
파일:비시 프랑스 대통령기.svg 비시 프랑스
튀니지 전투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미국 파일:영국 국기.svg 대영제국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이탈리아 왕국
겨울폭풍 작전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파일:소련 국기 (1936-1955).png 소련
바렌츠 해 해전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파일:영국 국기.svg 대영제국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
파일:소련 국기 (1936-1955).png 소련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쿠르스크 전투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파일:소련 국기 (1936-1955).png 소련
스몰렌스크 전투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파일:소련 국기 (1936-1955).png 소련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미국 파일:영국 국기.svg 대영제국 파일:영국 국기.svg 영연방 파일:자유 프랑스 국기.svg 자유 프랑스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이탈리아 왕국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파일:비시 프랑스 대통령기.svg 비시 프랑스
플로이에슈티 공습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미국
파일:루마니아 국기.svg 루마니아 왕국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파일:불가리아 국기.svg 불가리아 왕국
도데카니사 전투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파일: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국기.png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파일:영국 국기.svg 대영제국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이탈리아 왕국
노스케이프 해전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파일:영국 국기.svg 대영제국

몬테카시노 전투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미국 파일:영국 국기.svg 대영제국 파일:폴란드 국기(1928–1980).svg 폴란드 망명 정부 파일:영국 국기.svg 영연방 파일:자유 프랑스 국기.svg 자유 프랑스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파일: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국기.png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
파일:소련 국기 (1936-1955).png 소련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안치오 상륙작전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미국 파일:영국 국기.svg 대영제국 파일:폴란드 국기(1928–1980).svg 폴란드 망명 정부 파일:캐나다 자치령 국기.svg 캐나다 자치령 파일:자유 프랑스 국기.svg 자유 프랑스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파일: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국기.png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논쟁 작전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미국 파일:영국 국기.svg 대영제국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카메네츠-포돌츠크 포위전
파일:소련 국기 (1936-1955).png 소련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노르망디 상륙작전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미국 대영제국 파일:영국 국기.svg 영연방 파일:자유 프랑스 국기.svg 자유 프랑스 파일:폴란드 국기(1928–1980).svg 폴란드 망명 정부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빌레르보카쥬 전투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파일:영국 국기.svg 대영제국
바그라티온 작전
파일:소련 국기 (1936-1955).png 소련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파일:루마니아 국기.svg 루마니아 왕국 파일:헝가리 왕국 국기(1915-1918, 1919-1946).svg 헝가리 왕국
타넨베르크 선 전투
파일:소련 국기 (1936-1955).png 소련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바르샤바 봉기
파일:폴란드 국기(1928–1980).svg 폴란드 망명 정부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미국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팔레즈 포위전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미국 파일:영국 국기.svg 대영제국 파일:캐나다 자치령 국기.svg 캐나다 자치령 파일:폴란드 국기(1928–1980).svg 폴란드 망명 정부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용기병 작전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미국 파일:영국 국기.svg 대영제국 파일:캐나다 자치령 국기.svg 캐나다 자치령 파일:자유 프랑스 국기.svg 자유 프랑스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라플란드 전쟁
파일:핀란드 국기.svg 핀란드 공화국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휘르트겐 숲 전투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미국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마켓 가든 작전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미국 파일:영국 국기.svg 대영제국 파일:캐나다 자치령 국기.svg 캐나다 자치령 파일:폴란드 국기(1928–1980).svg 폴란드 망명 정부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아헨 전투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미국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아르덴 대공세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미국 파일:영국 국기.svg 대영제국 파일:캐나다 자치령 국기.svg 캐나다 자치령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프랑스 공화국 정부
보덴플라테 작전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미국 파일:영국 국기.svg 대영제국 파일:캐나다 자치령 국기.svg 캐나다 자치령 파일:폴란드 국기(1928–1980).svg 폴란드 망명 정부
부다페스트 공방전
파일:소련 국기 (1936-1955).png 소련 파일:루마니아 국기.svg 루마니아 왕국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파일:헝가리 왕국 국기(1915-1918, 1919-1946).svg 헝가리 국민단결정부

비스와-오데르 대공세
파일:소련 국기 (1936-1955).png 소련 파일:루마니아 국기.svg 루마니아 왕국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동프로이센 공세
파일:소련 국기 (1936-1955).png 소련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드레스덴 공습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미국 파일:영국 국기.svg 대영제국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봄의 새싹 작전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파일:소련 국기 (1936-1955).png 소련
베를린 전투
파일:소련 국기 (1936-1955).png 소련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이터성 전투
파일:나치 독일 군기(1938–1945).svg 독일 국방군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미국 파일:슈츠슈타펠 깃발.png 항복파 무장친위대
파일:슈츠슈타펠 깃발.png 항전파 무장친위대
※시기 구분은 전투 및 교전 발생 일자 기준, 전투 기간은 개별 문서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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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999
||<tablewidth=100%><width=10%><colbgcolor=#536349><rowbgcolor=#536349><tablebgcolor=#FFF,#1f2023> {{{#FFF '''연표'''}}} || {{{#FFF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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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라인란트 재무장]]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padding: 0px 5px; border-radius: 4px; background: #999; color:#fff; font-size: 0.88em"
7월}}} [[스페인 내전]] 발발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padding: 0px 5px; border-radius: 4px; background: #999; color:#fff; font-size: 0.88em"
12월}}} [[방공 협정]] ||
|| [[제2차 세계 대전/연표#1937년|{{{#FFF 1937년}}}]]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padding: 0px 5px; border-radius: 4px; background: #999; color:#fff; font-size: 0.88em"
7월}}} [[중일전쟁]] 발발([[루거우차오 사건]]) · [[국공합작#s-3|제2차 국공합작]]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padding: 0px 5px; border-radius: 4px; background: #999; color:#fff; font-size: 0.88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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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차 세계 대전/연표#1938년|{{{#FFF 1938년}}}]]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padding: 0px 5px; border-radius: 4px; background: #999; color:#fff; font-size: 0.88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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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뮌헨 협정]] ||
|| [[제2차 세계 대전/연표#1939년|{{{#FFF 1939년}}}]]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padding: 0px 5px; border-radius: 4px; background: #999; color:#fff; font-size: 0.88em"
4월}}} [[스페인 내전]] 종결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padding: 0px 5px; border-radius: 4px; background: #999; color:#fff; font-size: 0.88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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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폴란드 침공]]('''[[제2차 세계 대전]] 발발''') · [[가짜 전쟁]]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padding: 0px 5px; border-radius: 4px; background: #999; color:#fff; font-size: 0.88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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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차 세계 대전/연표#1940년|{{{#FFF 1940년}}}]]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padding: 0px 5px; border-radius: 4px; background: #999; color:#fff; font-size: 0.88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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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영국 본토 항공전]]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padding: 0px 5px; border-radius: 4px; background: #999; color:#fff; font-size: 0.88em"
9월}}} [[삼국 동맹 조약]]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padding: 0px 5px; border-radius: 4px; background: #999; color:#fff; font-size: 0.88em"
10월}}} [[그리스 침공]] ||
|| [[제2차 세계 대전/연표#1941년|{{{#FFF 1941년}}}]]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padding: 0px 5px; border-radius: 4px; background: #999; color:#fff; font-size: 0.88em"
5월}}} [[비스마르크 추격전]]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padding: 0px 5px; border-radius: 4px; background: #999; color:#fff; font-size: 0.88em"
6월}}} [[바르바로사 작전]]([[독소전쟁]] 발발) · [[계속전쟁]]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padding: 0px 5px; border-radius: 4px; background: #999; color:#fff; font-size: 0.88em"
9월}}} [[레닌그라드 공방전]]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padding: 0px 5px; border-radius: 4px; background: #999; color:#fff; font-size: 0.88em" 
10월}}} [[모스크바 공방전]]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padding: 0px 5px; border-radius: 4px; background: #999; color:#fff; font-size: 0.88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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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
||<-2> {{{-1 {{{#FFF ※ 매년 전황·추세 등 상세한 내용은 연표 해당 연도 참고}}}}}} ||

[각주]


바그라티온 작전
독소전쟁의 전투

파일:external/www.emersonkent.com/russia_bagration_1944.jpg

기간
1944년 6월 22일 ~ 8월 19일
장소
소련, 헝가리 왕국, 발트 3국,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교전 국가 및 세력
[[소련|

소련
display: none; display: 소련"
행정구
]]

파일:폴란드 국기.svg 폴란드 인민군
[[나치 독일|

나치 독일
display: none; display: 나치 독일"
행정구
]]

파일:헝가리 왕국 국기(1915-1918, 1919-1946).svg 헝가리 왕국
파일:루마니아 국기.svg 루마니아 왕국
지휘관
파일:소련 국기.svg 게오르기 주코프
파일:소련 국기.svg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파일:소련 국기.svg 이반 코네프[1]
파일:소련 국기.svg 콘스탄틴 로코솝스키[2]
파일:소련 국기.svg 게오르기 자하로프[3]
파일:소련 국기.svg 이반 체르냐홉스키[4]
파일:소련 국기.svg 이반 바그라먄[5]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에른스트 부슈[6]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발터 모델[7]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발터 바이스[8]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쿠르트 폰 티펠슈키르히[9]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니콜라우스 폰보어만[10]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게오르크한스 라인하르트[11]
결과
소련군의 승리
영향
독일 중부집단군의 궤멸, 소련군의 독일 본토 진입
병력
칼 하인츠 프리저[12]의 추측
총 병력 250만여 명[13]
전차 3,715대
돌격포 2,355대
포 45,000여 문
항공기 8,000여 기

데이비드 글랜츠의 추측
총 병력 1,670,300명
전차 3,841대
돌격포 1,977대
포 32,718 문
항공기 7,799기
총 병력 849,000여 명[14]
전차 400여 대
돌격포 452대
포 3,236문
대공포 1,500여 문
항공기 920기
피해규모
총 피해 77만여 명
전사/실종 18만여 명
부상/질병 59만여 명
전차/돌격포 2,957대 손실
포 2,447문 손실
항공기 822기 격추
총 피해 40만여 명
전사/실종 25만여 명
포로 15만여 명
부상 10만 명
전차/돌격포 600여 대 손실
중포/항공기 1,700대 손실

1. 개요
2. 배경
3. 소련군의 작전 입안, 준비
4. 상황
4.1. 독일군
4.2. 소련군
5. 전투서열
5.1. 소련군 전투서열
5.2. 독일군 전투서열
6. 전개 과정
6.1. 기만 작전
6.2. 공세 개시
6.2.1. 비텝스크 공세
6.2.2. 모길료프 공세
6.2.3. 보브루이스크 공세
6.2.3.1. 독일 제9군의 탈출
6.2.4. 전선 돌파
6.3. 민스크 해방: 포위망의 완성
6.4. 전과 확대
7. 결과
8. 여파
9. 대중매체



1. 개요[편집]


러시아어: Белорусская операция[15], Белорусская наступательная операция «Багратион» [16]
독일어: Operation Bagration

소련군이 독소전쟁 발발 정확히 3년 만인 1944년 6월 22일 벨라루시 일대의 독일 중부집단군을 상대로 실시한 대반격 작전. 소련이 독일에 내린 사형 선고라고 불린다.[17] 동부전선에서 소련군의 1944년 하계공세는 서방 연합군이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에 상륙한 오버로드 작전[18]과 시기를 맞추어 진행되었다. 미국이 랜드리스를 통해 보낸 엄청난 수량의 차량으로 기동력과 압도적인 전력을 갖춘 소련군은 공세작전에 적합한 여름기간 동안 동부전선 전체에 걸쳐 반격에 나섰다.

당시에 소련군은 동부전선 최북단의 핀란드와 카렐리아를 우선 공격했고(카렐리아 공세, 6월 10일) 이후 독일 중부집단군이 담당한 벨로루시에 주공세를(바그라티온 작전 6월 22일), 이어서 발트3국에 배치된 독일 북부집단군에 보조 공격이 이어졌다.(레제크네-드빈스크 공세 7월 10일, 프스코프-오스트로프 공세 7월 11일) 그 후에 폴란드 남부의 북우크라이나 집단군(리보프-산도미에시 공세, 7월 13일)과 마지막으로 발칸반도의 남우크라이나 집단군을 공격했다.(제2차 야시-키시네프 공세 8월 20일) 이 중에서 가장 전력이 집중되어 가장 큰 성과를 거둔 곳이 주공이었던 벨로루시의 중앙집단군에 대한 바그라티온 공세였다.

히틀러와 독일군은 동부전선에서 소련군의 주공 방향을 오판했다. 그 결과 소련군은 전략적 기습을 달성했고 독일군과 중부집단군의 허를 찌를 수 있었다. 여기에 히틀러가 중부집단군의 후퇴불가를 고집하면서 독일군은 단순한 패배를 넘어서는 대참사를 맞았다. 소련군은 벨로루시 돌출부의 정면을 돌파하여 벨로루시와 리투아니아 일대를 휩쓸며 취약한 중부집단군을 포위섬멸하였다.

당시 중부집단군을 구성한 4개 야전군 중에 정면을 담당한 3기갑군, 4군, 9군에 타격이 집중되었다. 3개 군 모두 전면적인 재건에 착수했으나 중부집단군의 잔해더미에 불과했다. 특히 민스크 일대에서 포위섬멸 당한 제4군의 피해가 가장 극심했다. 독일군은 신임 중부집단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모델 원수가 기동방어와 적절한 대처로 공세 시작 1달 반만인 8월 초순 경에 소련군의 진격을 바르샤바 근처에서 간신히 정지시켰으나 이미 중부집단군이 치명상을 입은 상태였다.

한편, 서부전선에서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뒤이은 프랑스에서의 전투도 이즈음에 연합군의 승리로 마무리되어가고 있었다. 독일군은 동서 양쪽 전선에서 서방 연합군과 소련군의 역대 최대규모의 공세를 받아 완패했다. 그 결과 나치독일은 수년간 지배했던 프랑스 및 동유럽의 점령지 대부분을 상실한 채 독일본토로 밀려났다. 아직 전쟁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지만 연합군과 소련군이 다음으로 독일 본토의 심장부를 향해 밀고들어오는 것은 시간문제에 지나지 않았다. 이로써 히틀러와 제3제국의 운명은 패망까지 카운트 다운에 들어가게 되었다.

2. 배경[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astern_Front_1943-08_to_1944-12.png

바그라티온 작전 전해인 1943년 여름에 소련군쿠르스크 전투를 승리로 마무리지었다. 쿠르스크 전투가 아직 채 끝나기도 전에 소련군은 동부전선 곳곳에서 반격을 개시했다. 쿠르스크 전투 이후인 1943년 하반기부터 이듬해 1944년 초까지 6개월에 이르는 기간 동안 소련군의 반격은 특히 전선 남부인 우크라이나에 집중되었다. 히틀러가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의 탄광지대 상실을 우려하여 우물쭈물하는 동안 소련군은 드네프르 강을 순식간에 돌파해버렸다. 남부집단군은 힘겨운 퇴각전투를 치르며 우크라이나에서 간신히 후퇴했다. 1944년 봄 무렵에 이르면 소련군은 동부전선의 남부에서 우크라이나 깊숙이 진격하여 북쪽으로는 벨라루스 남단, 서쪽으로는 폴란드 일대에, 남쪽으로는 루마니아 왕국 국경의 발칸반도 입구까지 밀고들어왔다. 한편 비슷한 시기 동부전선 북쪽 지역에서는 더이상 레닌그라드 포위를 유지할 수 없었던 북부집단군이 소련군의 압박으로 인해 포위를 풀고 서쪽으로 물러나며 기나긴 포위전이 마침내 끝났고 레닌그라드는 해방되었다. 중부집단군 역시 요충지인 스몰렌스크를 내어주고 벨라루스 방면으로 밀려났다.

독일군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동부전선에서 해빙기로 인해 전투에 부적합한 계절이 찾아오면서 전선은 우크라이나를 싹 뺏겼지만어느정도 안정화되고 일단은 그럭저럭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이제 독일군의 관심은 다가오는 1944년 여름에 소련군이 동부전선에서 과연 어디를 공격해올 것인지에 모아졌다. 1944년 여름에는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방 연합군이 프랑스에 상륙을 실시할 것이 너무도 명백해진 상태였다. 동부전선의 소련 역시 연합군의 상륙에 발맞추어 대대적인 하계 공세에 나설 것이 확실했다. 수세에 몰려 전략적 방어자의 입장이 된 독일은 그나마 잔존한 전력을 동부전선의 어디에 배치해야할 지, 적의 주공방향을 고민해야되는 처지였다.

동부전선에서는 북부집단군과 남부집단군의 전선이 밀려나자 결과적으로 중부집단군의 담당지역인 벨로루시 일대가 소련군 방향으로 돌출되었다. 중부집단군이 버티고 있는 이 돌출부는 이른바 "벨로루시 발코니"라고 명명되었다.(위 지도에서 보라색으로 표시된 지역) 당시 독일은 동부전선에서 소련군이 벨로루시 발코니 바로 남쪽에 위치한 북우크라이나 집단군(종전의 남부집단군)을 공격하는 상황을 가장 우려했다. 북우크라이나 집단군은 중부집단군의 벨로루시 돌출부 남쪽 측면의 연결지점인 폴란드 남부일대와 갈리치아[19]에 배치되어 있었다.

히틀러와 독일군의 관점에서 봤을 때 직전까지 소련군은 우크라이나 해방에 집중했고 우크라이나 전선에 이미 막대한 소련군 병력들이 전개되어있었다. 따라서 소련군이 폴란드 남부에서 우크라이나 서부에 걸친 갈리치아 지역에서 하계 공세를 계속 이어가리라고 본 것이었다. 더욱이 독일군이 보기에 소련군이 동부전선 한복판인 갈리치아를 돌파했다가는 동부전선 자체가 남북으로 결딴이 날 판이었다. 일단 갈리치아가 돌파될 경우 그 위쪽의 중부집단군과 북부집단군 전체의 배후가 위협에 처하게 된다. 또한 남쪽으로는 이미 잇따른 패전과 전황 악화로 동요하고 있는 발칸의 추축국들이 연합군측으로 전향해버릴 위험이 컸다. 특히 루마니아 왕국의 경우는 당시 나치 독일에게 그나마 유일하게 남은 석유공급처였다. 루마니아를 잃는다는 것은 곧 독일의 확실한 패망을 의미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어느쪽이던 간에 독일군으로서는 북우크라이나 집단군이 돌파되는 상황만큼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치명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독일군은 북우크라이나 집단군의 담당지역에 전력을 집중했고 히틀러와 독일군 지휘부의 관심도 온통 중부집단군의 정면이 아닌 남쪽 측면에 쏠려 있었다. 하지만 소련군은 이미 동부전선 전체에서 반격을 실시할 수 있을만큼 전력상 압도적인 우위에 있었고, 논의 끝에 벨로루시의 중부집단군 정면을 주공세지역으로 결정하였다.

3. 소련군의 작전 입안, 준비[편집]


쿠르스크 전투 직후 시작된 우크라이나 탈환이 마무리되고 있던 1944년 3월부터 소련군 지휘부는 다음 공세의 기회를 찾기 위해 동부전선 각 지역을 점검했다. 논의 끝에 소련군은 벨로루시에 버티고 있던 독일 중부집단군의 정면을 공격해 섬멸시키기로 결정했다.

이런 결정이 나온 이유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먼저 동부전선의 다른 방면으로 주공을 돌릴 경우 벨로루시에 있는 독일의 중부집단군이 소련군의 측면을 위협할 우려가 있었고 돌출부의 중부집단군을 견제할 만한 병력도 별도로 필요했다. 반대로 벨로루시에 대한 공세가 성공하면 중부집단군 자체를 분쇄해버릴 수 있었고, 북부집단군의 보급과 퇴로까지도 차단할 수 있었다. 벨로루시의 중부집단군을 격파하면 소련 영토를 완전히 해방시킬 수 있을 것이었고 벨로루시를 넘어 폴란드에까지 소련군이 진격하여 독일본토와 베를린까지 위협해 볼 수도 있었다. 또한 압도적인 전력 우위에 선 소련군은 동부전선의 중부 뿐 아니라 동부전선 전체에 걸친 공세를 준비 중이었는데 벨라루스에서의 성공은 다른 전략적 공격 축선에서의 추가적인 공격을 펼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기도 했다.

소련군은 1944년 여름에 야심찬 4개의 대공세- 카렐리야 작전, 바그라티온 작전, 리보프-산도미에시 작전, 이아시-키시너우 작전을 계획 중이었다. 소련군의 계획은 동부전선 북쪽에서 남쪽에 이르기까지 모든 지역을 순차적으로 공격하는 것이었다. 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주공지역이 바로 벨로루시를 공격하는 바그라티온 작전이었다. 나폴레옹 전쟁 때의 러시아 제국장군이었던 표트르 바그라티온의 이름을 따서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이름 붙여진 이 공세에는 중부집단군을 상대로 소련군 4개 전선군이 투입될 예정이었다. 공세 계획의 전모는 이오시프 스탈린과 총군부사령 게오르기 주코프, 총참모장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부참모장 알렉세이 안토노프만 알고 있었다. 보급과 작전 단계의 어려움을 고려하여 5개의 작전은 북에서 남으로 시차를 두고 진행될 것이었다.

마지막 전략 계획이 고안되기 전에 스타브카는 야전 조직과 그 사령관들을 교체했다. 규모가 큰 서부 전선군은 관리가 수월하도록 제2 벨로루시전선군과 제3 벨로루시전선군으로 나누어졌다. 다른 전선군들도 개칭되거나 담당 지역이 조금씩 바뀌었다. 공세가 개시될 프리퍄티 습지 북쪽에는 카렐레야전선군, 레닌그라드전선군, 제1, 2, 3 발트전선군, 제1, 2, 3 벨로루시전선군이 배치되었다. 프리퍄티 습지 남쪽에는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이 배치되어 추후 공세에 가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당시 제1 우크라이나전선군 사령관을 맡고 있던 주코프의 후임으로 이반 코네프가 임명되었다. 주코프와 바실렙스키는 스타브카 대리로 전선에 파견되었다. 주코프는 제1벨로루시전선군과 제2벨로루시전선군의 통합지휘 및 조율을 맡고, 바실렙스키는 제1발트전선군과 제3벨로루시전선군의 통합지휘 및 조율을 맡았다.

한편 전선군 사령관들은 배치된 77개 사단과 5개 전차군단, 총 100만명의 군대로 소련군이 독일 중부집단군에 대해 확실한 전력 우위를 점하기에는 아직 부족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소련 전선군들에는 5개 야전군과 2개 전차군, 1개 폴란드 야전군, 11개 전차군단 등 총 40만 명이 증강되었다. 스탈린은 작전의 구체적 사안을 마련하기 위해 5월 22일에서 23일까지 독일 중부집단군과 대치중인 대부분의 지휘관들을 모스크바에서 벌어지는 작전 회의에 불러들었다.

주코프와 바실렙스키는 중부집단군의 대부분을 민스크 동쪽에서 포위 섬멸하고 이 작전과 함께 이반 홉하네스 바그라먄의 제1발트전선군과 이반 체르냐홉스키의 제3벨로루시전선군이 돌출부 북쪽 비텝스크의 독일군을 포위한다는 계획이 나왔다. 돌출부 남쪽에서는 콘스탄틴 로코솝스키가 2개 전차 군단을 이끌고 프리퍄티 습지 바로 북쪽, 보브루이스크 주변에 배치된 독일군에 대해 이중의 포위 작전을 실시하겠다는 방안을 제출했다. 복잡한 기동 작전을 별로 좋아하지 않던 스탈린은 보브루이스크 작전에는 심하게 반대했지만 로코솝스키는 결국 뜻을 관철시켰다.

회의 끝에 마침내 바그라티온 작전의 최종적인 윤곽이 나왔다. 공세는 벨로루시 발코니의 독일군 진지의 남익과 북익에서 야전군 규모의 기동 집단이 각각 전술적 포위진을 형성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제1발트전선군과 제3벨로루시전선군이 협조, 스몰렌스크 북서쪽에 위치한 돌출부 북쪽의 비텝스크를 포위하고, 제1벨로루시전선군은 돌출부 남쪽의 보브루이스크를 포위한다. 동시에 북쪽에서 비텝스크 돌파가 성공하면 협조한 제5근위전차군과 1개 기병-기계화 집단이 제3벨로루시전선군과 협조하여 독일군의 후방인 민스크를 향해 종심 깊은 포위전을 실지한다. 제1발트전선군은 북익을 보호하기 위해 드비나 강 서안을 따라 동프로이센을 향해 서쪽으로 진격한다. 제1벨라루스전선군 좌익에서는 추후, 프리퍄티 습지 남쪽에서 코벨 지역으로부터 비스와 강을 향해 제2전차군이 공세를 시작한다. 공세 날짜는 잠정적으로 6월 15일에서 20일로 결정되었다.

스타브카는 바그라티온 작전의 기본 지침을 5월 31일에 하달하였다. 작전 계획에 따라 대군의 보급품을 옮기고 전선군을 따라 수많은 부대들이 기밀을 유지하며 전략적으로 이동했다. 남부 전선, 즉 독일 북우크라이나 집단군이 집결해 있는 갈리치아에서 주공이 있을 것처럼 보여야 했기 때무에 모든 일은 극도의 기밀 유지 하에서 이루어져야 했다. 이러다 보니 결국 원안대로 시간을 맞추는 건 어려워졌고 작전 날짜는 갈수록 연기되었다. 계속 작전이 연기되자 스탈린은 아예 공세 날짜를 바르바로사 작전이 6월 22일에 벌어진 것을 복수하는 의미로 6월 22일로 정했다.


4. 상황[편집]


파일:1620980054.png

소련군의 전력현황을 살펴보면 알 수 있듯이 북쪽의 제3벨라루스 전선군과 남쪽의 제1벨라루스 전선군에 전력이 집중되어 있고 중앙의 제2벨라루스전선군에 상대적으로 약한 전력이 배정되었다. 특히 제3벨라루스 전선군과 제1벨라루스 전선군에 엄청난 전차가 집결되어 있었다. 즉 소련군은 공세 초기단계에서 한때 독일군의 장기였던 양익돌파와 포위섬멸을 기도하고 있었다. 제1발트전선군은 제3벨라루스전선군과 같이 비텝스크를 돌파하여 독일 제3기갑군을 포위'한 뒤 그대로 라트비아의 발트해까지 밀고나아가 북부집단군과 중부집단군의 연결을 차단하고 북측면을 엄호하는 역할을 맡았다.

4.1. 독일군[편집]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독일군의 동부전선 병력은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동부전선의 병력은 서부전선의 적을 막기 위해 차출되었으며 특히 루프트바페연합군의 폭격에 대응하기 위해 서부전선으로 전력이 집중되었다. 독일 동부전선군 휘하의 전투기는 4,000여 대에 불과했던 반면 소련군은 7,000여 대의 전투기를 동원할 수 있었다. 이 무렵 즈음에는 루프트바페가 독일 본토 항공전에서의 극심한 손실로 이미 붕괴직전에 내몰린 상태였다. 동부전선의 독일군은 이전에도 몇차례의 포위전을 루프트바페의 지원에 힘입어 극복해왔으나 이제는 루프트바페의 엄호는 커녕 오히려 소련공군을 걱정해야하는 처지가 되었다. 동부전선에서 제공권의 상실은 독일군에게 치명적이었다. 제공권을 상실하며 독일군은 소련군 진영에 제대로 항공정찰을 실시할 수가 없어서 완전히 장님 신세가 되었다. 광대한 동부 전선에서 열세한 병력으로 수비를 하기 위해서는 적의 주요 공격지점에 정확한 시점에 예비대를 보내야했다. 하지만 항공정찰이 거의 불가능해지면서 최전선 후방에서 소련군의 부대 이동이나 집결에 대한 정보를 얻기가 어려워졌다.

당시 동부전선 독일군의 지휘체계도 문제가 컸다. 아돌프 히틀러는 동부전선에서 가장 유능한 지휘관인 에리히 폰 만슈타인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원수를 경질시켰다. 클라이스트 원수가 경질되면서 클라이스트의 A집단군은 남우크라이나 집단군으로 개칭되었고 신임 사령관으로 히틀러의 신임이 두터운 페르디난트 쇠르너가 임명되었다. 쇠르너는 무능한 인물은 아니었지만 전임자인 클라이스트에 비할바가 아니었다. 더욱이 쇠르너는 동부전선의 심각한 위기상황에서도 히틀러에게 직언을 할만한 인물도 아니었다. 중부집단군 사령관은 에른스트 부슈원수였다. 부슈 원수는 동부전선의 북부집단군 산하 제16군 사령관을 역임했는데 레닌그라드 전선에서 훨씬 우세한 소련군을 상대로 뛰어난 방어전을 지휘한 바 있었다. 하지만 이 시점 즈음에 이르면 부슈 원수는 히틀러의 후퇴불가 방침만을 부하들에게 되풀이하는 의욕적이지 않은 태도로 일관하고 있었다. 결국 부슈는 바그라티온 작전 개시 1주일이 안되어 발터 모델 원수로 교체되었고 동부전선의 독일군 중 최악의 패배를 당한 장군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독일군이 벨로루시 발코니에서 대비를 했다고는 하지만 독일군은 소련군의 하계 공세가 우크라이나에서 남부 폴란드와 발칸 반도로 진격하여 다른 추축국들을 전쟁에서 떼어 놓는 것이라고 오판하고 있었다.[20] 이게 아주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닌게, 동유럽 추축국들이 독일을 배신하고 떨어져 나가는 정치적 타격은 무시하더라도 독일의 생명줄인 루마니아의 플로에슈티 유전지대가 위험한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독일군의 주력 기갑 장비들은 당시 격전이 예상되는 프랑스와 북우크라이나 일대에 주로 배치되어 중부집단군은 보병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21] 1944년 3월엔 기갑사단 2개를 포함해 중부집단군에 소속되어 있던 사단 9개가 북우크라이나 집단군에 증원됐고[22][23] 중부집단군 전체에서 제20기갑사단만 유일한 기갑예비로 남게 됐다. 공세 개시 전 20기갑사단의 전력은 4호 전차 50량 정도의 불충분한 전력만을 보유하고 있었고, 중부집단군은 기갑전력의 대부분을 돌격포와 소수의 대전차자주포에 의존했다.

공세개시 시점에서 에른스트 부슈 원수가 이끄는 독일 중부집단군의 총전력은 4개 야전군에 후방 치안임무를 담당한 벨라루스 지구 사령부로 구성되었다. 중부집단군은 예하에 34개 보병사단, 2개의 공군 야전사단, 7개 보안사단, 2개 기갑척탄병 사단, 1개 기갑사단을 비롯한 총 47개 사단으로 구성되었고 펠트헤른할레 기갑척탄병 사단이 추가되었다. 소련군의 공세를 맞게될 정면의 3개 군(제4, 제9, 제3기갑)이 총 34개 사단이었다. 얼핏보면 중부집단군은 상당한 전력이었다. 그러나 그 실상은 히틀러가 소모된 부대들을 보충하는 것보다는 끝도 없이 신편부대를 편성하는 것을 선호했음으로 중부집단군의 예하 사단들은 심각할만큼 부실한 상태였다.

또한 중부집단군의 전력은 방어에 용이한 거점이 아닌 행정 중심지에 집중배치되어 있었다. 그 결과 각 보병사단간의 간격은 기준의 배인 24Km~30Km인 상태였다. 그리 밀집되지 못했던 독일군은 예비대도 없이 소련군의 공세에 맞서야 할 상황이었다. 중부집단군의 예비는 5개 사단이었는데 예비대의 핵심인 제20기갑사단은 상당히 약화된 상태였다. 또한 장비의 부족이 심각하여 제3기갑군은 이름만 '기갑'이지 편제상 기갑 부대는 하나도 없었다. 인접한 북부집단군도 기갑예비가 제12기갑사단[24] 하나뿐이었는데 즉, 북부집단군과 중부집단군의 담당지역인 동부전선의 절반에 해당하는 영역을 기갑사단 단 2개가 책임지고 있는 형편이었다.[25] 히틀러가 아무리 프랑스와 북우크라이나에 집중하고 있는 상황이라곤 해도 중부집단군이 담당한 벨로루시지역은 위험천만하게 방치된거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이들이 방어할 벨로루시 돌출부의 경우 남쪽의 대습지와 동쪽에 흐르는 몇 개의 강을 제외하면 전혀 방어할 지형이 없는 곳이었다. 여기에 있는 도시들도 지하실이 없고 목조 가옥이 많은 등 요새화하기에는 부적합한 곳이었다. 게다가 간신히 참호선을 마련한 제1선이 돌파되면 더 이상 제대로 된 방어선을 건립하기도 힘든 곳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부족한 병력과 낡고 수량이 적은 장비만으로 전방거점과 전선을 고수할 것을 강요 받았으니 일단 돌파당한다면 포위섬멸당하기 딱 좋았다.

이렇듯 압도적인 소련군을 상대해야했던 중부집단군은 지나치게 늘어진 전선을 따라 부대가 흩어져있는 위험천만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나마 합리적인 대책은 소련 영내에서 부대들을 뒤로 물려 전선을 축소하고 예비대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시점 즈음에 히틀러는 현실감각을 완전히 상실하여 점령지 포기를 강박적으로 거부했다. 히틀러는 점령지를 포기하고 물러난다면 다른 추축 동맹국들이 동요할 것이다는 정치적 이유를 들어 퇴각을 거부했다.[26] 하지만 취약한 지점에 독일군이 전진 배치되었다가 섬멸당한다면 동맹국과의 외교에서 더욱 불리해질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말도 안되는 궤변이었다. 히틀러는 연합군이 프랑스 해안선에 상륙하자마자 병력을 집중하여 쓸어버리고서는 서부전선의 가용병력을 동부전선에 투입할 수 있을거라고 여겼고 심지어 다시 한번 우크라이나 등을 탈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망상했다.[27] 독일군 수뇌부 상당수도 바르바로사의 재현까지는 무리지만 '영미군이 프랑스에 상륙하자마자 쓸어버린다면 아직 해볼만할지도?' 라는 생각을 소련군과 연합군의 가공할 화력과 물량을 맞닥드리기 전까지 하기도 했다.[28] 어쨌든, 히틀러는 서방연합군을 막아낸 후 다시 동부전선에서 반격을 하기 위해서라도 반격의 발판이 되어줄 벨로루시 돌출부를 비롯한 소련 내 점령지에서 후퇴를 금지했다. 히틀러와 독일군은 위험천만한 도박을 벌이고 있었다.

4.2. 소련군[편집]


독일군이 이렇게 빈약한 데 비해 소련군의 공세 준비는 어마어마했다. 바그라티온 작전에 참여하는 4개 전선군은 제1벨로루시전선군의 좌익을 제외하고 14개 제병협동군, 1개 전차군, 4개 항공군, 118개 소총병 사단과 2개 소총병여단, 2개 기병군단, 8개 기계화 또는 전차군단, 수십 개의 포병 제대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병력은 125만 4,300명이었고 전차와 자주포 4,070대, 야포 2만 4,363문, 항공기 5,327대로 장비했을 뿐 아니라 추가로 항공기 1,007대가 더 있었다.

제1벨로루시전선군의 좌익은 41만 6,000명의 병사와 1,748대의 전차와 자주포, 8,335문의 야포와 박격포, 1,456대의 항공기가 5개의 제병협동군, 1개 전차군, 1개 항공군, 36개 소총병사단, 2개 기병군단, 4개 전차 또는 기계화군단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소련 주둔 미 육군 항공단 소속의 B-17 폭격기의 폭격지원이 있었는데[29], 하필이면 미군 폭격기가 소련군 차량대열을 오폭해서 장교 1명과 그 참모진 서너명 정도가 죽고, 소련군 수십명이 부상당하는 바람에 스탈린의 직접명령으로 연합작전은 취소되었다.


5. 전투서열[편집]



5.1. 소련군 전투서열[편집]


  • 제1발트전선군
    • 제4충격군
    • 제6근위군
    • 제43군
    • 제1전차군단

  • 제3벨라루스전선군
    • 제5군
    • 제31군
    • 제39군
    • 제11근위군
    • 제2근위전차군단
    • 제5근위전차군
    • 기병-기계화집단:
      • 제3근위기병군단
      • 제3근위기계화군단
      • 제3근위전차군단

  • 제2벨라루스전선군
    • 제33군
    • 제49군
    • 제50군
    • 전선군 기동집단

  • 제1벨라루스전선군
    • 제3군
    • 제28군
    • 제48군
    • 제65군
    • 제9전차군단
    • 기병-기계화집단:
      • 제1근위전차군단
      • 제4근위기병군단
      • 제1기계화군단


  • 중부집단군 및 육군총사령부 예비
  • 백러시아 군관구: 기병대장 백작 폰 트라흐
  • 제9군: 보병대장 요르단
  • 제2군[30]: 상급대장 바이스

"신께서 누군가를 멸하고 쓸어버리려 하실 때에는, 먼저 그 눈부터 멀게 하시는 법이지."

제39기갑군단장 포병대장 마르티네크, 공세 직전에 부하와 나눈 대화 중[31]


























"반갑네. 그런데 제 9군은 없어졌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위기상황이다. 중부집단군 전면이 비어있다!

히틀러, 신임 중부집단군 사령관 발터 모델 원수와의 대화 중































[1]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 사령관[2] 제1벨로루시전선군 사령관[3] 제2벨로루시전선군 사령관[4] 제3벨로루시전선군 사령관[5] 제1발트전선군 사령관[6] 6월 22일~28일까지. 28일 이후부터는 중부집단군 사령관직에서 해임되고 발터 모델이 지휘를 맡았다.[7] 중부집단군 사령관. 6월 28일 전까지는 에른스트 부슈가 사령관을 맡았다.[8] 제2군 사령관[9] 제4군 사령관[10] 제9군 사령관. 6월 28일 전까지는 한스 요르단 장군이 사령관을 맡았다.[11] 제3기갑군 사령관[12] 전격전의 전설의 저자이다.[13] 폴란드 증원군 7만 9천여 명 포함.[14] 전투원은 486,493 명.[15] 벨로루시 작전[16] 벨로루시 공격 작전 "바그라티온"[17] 그나마도 발터 모델 장군의 분투가 없었다면 독일군은 더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을지도 모른다. 오죽하면 발터 모델 장군이 없었다면 연합군은 1944년안에 독일을 완전히 점령시킬 수도 있었다는 관측까지 나올 정도이다.[18] 1944년 6월 6일[19] 현 서부 우크라이나 일대[20] 당시 육군 동부 정보국은 이에 대해 판단을 내리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소련군의 우세는 너무 확고하여 중부,북,남우크라이나 집단군 어디로든 동시에 압도적인 공세가 가능했다. 정보국은 벨로루시에서의 공격이 임박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프리피야트 습지대와 카파르티아 산맥 사이의 북우크라이나 집단군이 훨씬 중요했기에 중부집단군에 전력을 집중할 수가 없었다. 실제로 이 지역을 담당한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은 개전이래 최대 규모로 증강되었고 작전의 1단계에서 독일군 일부 예비전력이 벨로루시로 빠지자 2단계 공세를 개시했고 당일 전선을 간단히 돌파했다.[21] 1944년 6월 독일이 보유한 기갑사단 28개 중 9개가 서부 전선 15개가 우크라이나에 배치되어 있었으며 그나마 정수의 절반이상이라도 채우고 있던 13개 사단은 서부에 9개 북우크라이나 집단군에 4개가 있었고 이 중에서도 핵심전력인 완편 기갑사단의 경우 서부에 4개 북우크라이나 집단군이 3개를 보유 중이었다.[22] 중부집단군에 소속되어 있던 돌격포 여단 2개와 중전차 대대 1개도 북우크라이나 집단군으로 보내졌다.[23] 이 여파로 바그라티온 작전 개시 당시 독일군의 기갑 전력은 서부전구와 북우크라이나 집단군에 몰빵되어 있었다. 당시 북우크라이나 집단군 사령관이었던 모델은 적의 규모가 어떻든 이정도 기갑전력이라면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장담했다.[24] 바그라티온 공세 개시 이후 중부집단군에 증원된다.[25] 당시 동부 육군을 총괄한 육군 최고사령부 OKH는 전략 예비대가 사실상 전무했다.[26] 실제로 이 시점에서 이탈리아는 진작에 추축국에서 이탈하였고 핀란드는 소련군의 공세를 받아 이탈 직전이었다. 나머지 중요한 동맹인 헝가리와 루마니아 역시 이탈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27] 이 때문에 43년 말부터 만슈타인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서부에 우선권이 부여되었고 44년 봄에는 육군 전력의 불과 53%의 전력만이 동부전선에 배치되어 있었다. 동부전선을 담당하던 육군 최고 사령부는 참다못해 따졌지만 서방 연합군을 몰아내면 당장 동부로 지원해주겠다는 답변이 돌아올 뿐이었다. 소련군의 공세가 임박했는데 전략 예비대가 수천km 떨어진 프랑스 해안에 있는 상황이었다.[28] 이는 당시 동부 전선을 제외한 국방군 고위 장성들의 공통된 망상으로 노르망디에 연합군이 상륙하자 해군 참모부 비망록에는 '어쩌면 짧고 강렬한 전투로 전쟁의 향방을 결정할 수 있게 되었다.'라고 적었으며 히틀러의 부관 슈문트는 이제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선언하기도 했다.[29] 영국 처칠의 "멈추지 않는 폭격작전"(Unstoppable Bombing)으로 연합국은 영국, 튀니지, 소련에 각각 공항을 지어 폭격대가 기지복귀를 위해 선회해서 되돌아가다가 공격당해 격추당하는 일이 없도록 영국에서 뜬 폭격기가 독일을 폭격하고 튀니지의 비행장으로 쭉 날아갔다가, 튀니지에서 보급받고 다시 독일을 폭격하며 소련으로, 소련에서 다시 독일을 지나가며 영국으로 주둔지를 계속 옮겨가며 공격해대었다. 1943년 허스키 작전의 성공으로 이탈리아에 연합국 주둔지가 생기자 튀니지 비행장은 사실상 폐쇄하고 이탈리아에 새로운 비행장을 건설하여 더욱더 촘촘한 "멈추지 않는 폭격작전"을 실행했는데, 바그라티온 실행전에 몇몇 폭격비행단이 소련에 있는 연합군 소속 비행장에 주둔해 있던것을 루즈벨트 대통령의 제안으로 공격에 동원한 것이다. 당시 독일공군 전투기 총감이었던 아돌프 갈란트의 수기, "처음과 끝"에서 언급됨[30] 제2군은 바그라티온 작전에 부분적으로만 참가했다.[31] 중부집단군의 일선부대들은 자체적으로 꾸린 정찰대로 상당히 정확하게 적정을 파악하고 있었고, 전면에 어마어마한 소련군이 집결 중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고위사령부 전체가 소련군의 기만에 낚인 히틀러의 눈치를 보느라 최면에 걸린 것 마냥 눈 앞의 위험을 무시하고 있었다. 마르티네크를 비롯한 일선 장병들은 예고된 재앙을 괴로운 심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