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내전 (r20220720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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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1918–1937).svg 러시아 내전 관련 틀 파일:러시아 국기.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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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내전
Гражданская война в России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50px-Intervenci%C3%B3nInternacionalEnVladivostok--throughrussianre00willuoft.jpg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행진하는 연합군[1]
날짜
1917년 11월 7일~1923년 6월 16일
장소
구 러시아 제국 영토, 몽골, 페르시아 북부
원인
볼셰비키의 정권 독점에 따른 반볼셰비키 세력 중심의 전국적 반발
교전국
적군
백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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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1918–1937).svg 러시아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
파일:1920px-Flag_of_the_Ukrainian_Soviet_Socialist_Republic_(1919-1929).svg.png 우크라이나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
파일:1920px-Flag_of_the_Byelorussian_Soviet_Socialist_Republic_(1919-1927).svg.png 벨로루시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
파일:자캅카스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 국기(1925-1936).svg 자캅카스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파일:1920px-Flag_of_the_Commune_of_the_Working_People_of_Estonia.svg.png 에스토니아 노동 인민 코뮌
파일:1920px-Flag_of_the_Latvian_Soviet_Socialist_Republic_(1918-1920).svg.png 라트비아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
파일:1920px-Flag_of_the_Lithuanian-Byelorussian_SSR.svg.png 리투아니아-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파일:극동 공화국 국기.svg 극동 공화국
파일:1920px-Flag_of_Khiva_1920-1923.svg.png 화레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파일:1920px-Flag_of_the_Bukharan_People's_Soviet_Republic.svg.png 부하라 인민 소비에트 공화국
파일:몽골 인민 공화국 국기(1921-1924).svg 몽골 인민 유격대[1]
파일:1280px-Flag_of_the_Tuvinian_Peoples_Revolutionary_Party.svg.png 탄누 투바

비볼셰비키 좌파
파일:150px-Socialist-Revolutionary_Party_flag.svg.png 사회혁명당 좌파[2]
멘셰비키 좌파[3]
파일:250px-RPAU_flag.svg.png 자유지구(1919~1920)[4]
파일:1280px-Darker_green_and_Black_flag.svg.png 녹군(1919~1920)[5]
파일:rC9lmmQ.png 크론시타트 반군[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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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러시아 국기.svg 러시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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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돈 코사크 국기.svg돈 공화국[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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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Flag_of_the_Ural_government_(1918).svg.png 코무치[4]
파일:900px-Flag_of_Kuban_People's_Republic.svg.png 쿠반 인민공화국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20px-Flag_of_Mongolia_%281911-1921%29.svg.png 대몽골국
파일:Buddhist_swastika.png 아시아 기마사단[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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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폴란드 국기(1928–1980).svg 폴란드
파일:체코 국기.svg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
파일:핀란드 국기.svg 핀란드
파일:에스토니아 국기.svg 에스토니아
파일:라트비아 국기.svg 라트비아
파일:리투아니아 국기.svg 리투아니아
파일:몰다비아 민주 공화국의 국기.jpg 몰다비아 민주 공화국
파일:아르메니아 국기.svg 아르메니아 민주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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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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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캐나다 자치령 국기(1868-1921).svg 캐나다 자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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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50px-State_Flag_of_Serbia_%281882-1918%29.svg.png 세르비아 왕국

동맹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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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오스만 제국 국기.svg 오스만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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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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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1918–1937).svg 블라디미르 레닌
파일: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1918–1937).svg 레프 트로츠키
파일: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1918–1937).svg 이오시프 스탈린
파일: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1918–1937).svg 미하일 칼리닌
파일: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1918–1937).svg 미하일 투하쳅스키
파일: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1918–1937).svg 세묜 부됸니
파일: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1918–1937).svg 알렉산드르 예고로프
파일: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1918–1937).svg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파일: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1918–1937).svg 세묜 티모셴코
파일: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1918–1937).svg 미하일 프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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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1918–1937).svg 알렉세이 브루실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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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1918–1937).svg 필리프 미로노프
파일: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1918–1937).svg 주쿰스 바시에티스[2]
파일: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1918–1937).svg 니콜라이 포드보이스키[3]
파일: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1918–1937).svg 세르게이 카메네프[4]
파일: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1918–1937).svg 파벨 디벤코[5]
파일: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1918–1937).svg 바실리 알트파터[6]
파일: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1918–1937).svg 세르게이 라조[7]
파일: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1918–1937).svg 이반 튤레네프
파일: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1918–1937).svg 이오나 야키르
파일: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1918–1937).svg 예브게니 베렌스[8]
파일: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1918–1937).svg 파벨 벨로프
벨로루시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
파일:1920px-Flag_of_the_Byelorussian_Soviet_Socialist_Republic_(1919-1927).svg.png 빌겔름 크노린
파일:1920px-Flag_of_the_Byelorussian_Soviet_Socialist_Republic_(1919-1927).svg.png 알략산드르 체르비아코프
우크라이나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
파일:1920px-Flag_of_the_Ukrainian_Soviet_Socialist_Republic_(1919-1929).svg.png 게오르기 퍄타코프
파일:1920px-Flag_of_the_Ukrainian_Soviet_Socialist_Republic_(1919-1929).svg.png 흐리호리 페트로우스키
파일:1920px-Flag_of_the_Ukrainian_Soviet_Socialist_Republic_(1919-1929).svg.png 미콜라 스크리프니크
파일:1920px-Flag_of_the_Ukrainian_Soviet_Socialist_Republic_(1919-1929).svg.png 볼로디미르 자톤스키
극동 공화국
파일:극동 공화국 국기.svg 바실리 블류헤르
파일:극동 공화국 국기.svg 알렉산드르 크란스노시초코프
파일:극동 공화국 국기.svg 니콜라이 마트베예프
파일:극동 공화국 국기.svg 이에로님 우보레비치[9]
몽골 인민 유격대
파일:몽골 인민 공화국 국기(1921-1924).svg 담딘 수흐바타르
파일:몽골 인민 공화국 국기(1921-1924).svg 허를러깅 처이발상
파일:몽골 인민 공화국 국기(1921-1924).svg 다르자빈 로솔
파일:몽골 인민 공화국 국기(1921-1924).svg 솔리인 단잔
자유지구
파일:250px-RPAU_flag.svg.png 네스토르 마흐노
파일:250px-RPAU_flag.svg.png 마리야 니키포로바
파일:250px-RPAU_flag.svg.png 세멘 카레트니크
녹군
파일:1280px-Darker_green_and_Black_flag.svg.png 니키포르 그리고리예프[10]
파일:1280px-Darker_green_and_Black_flag.svg.png 알렉산드르 안토노프[11]
파일:1280px-Darker_green_and_Black_flag.svg.png 다닐로 테르필로[12]
크론시타트 반군
파일:rC9lmmQ.png 스테판 페트리첸코
사회혁명당 좌파
파일:150px-Socialist-Revolutionary_Party_flag.svg.png 마리야 스피리도노바[13]
파일:150px-Socialist-Revolutionary_Party_flag.svg.png 미하일 무라비요프
파일:150px-Socialist-Revolutionary_Party_flag.svg.png 야코프 블룸킨[14]
파일:150px-Socialist-Revolutionary_Party_flag.svg.png 보리스 캄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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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러시아 국기.svg 알렉산드르 콜차크
파일:러시아 국기.svg 표트르 브란겔
파일:러시아 국기.svg 니콜라이 유데니치
파일:러시아 국기.svg 안톤 데니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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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러시아 국기.svg 알렉세이 칼레딘
파일:러시아 국기.svg 라브르 코르닐로프
파일:러시아 국기.svg 파벨 베르몬트아발로프
파일:러시아 국기.svg 게오르기 스타르크
파일:러시아 국기.svg 미하일 스코로두모프
파일:러시아 국기.svg 보리스 시테이폰
파일:러시아 국기.svg 아나톨리 페필랴예프[1]
파일:러시아 국기.svg 그리고리 세묘노프
파일:러시아 국기.svg 미하일 드로즈돕스키
파일:러시아 국기.svg 알렉산드르 쿠테포프
파일:러시아 국기.svg 세르게이 마르코프
파일:러시아 국기.svg 미하일 케드로프[2]
파일:러시아 국기.svg 콘스탄틴 네차예프
파일:러시아 국기.svg 이반 칼미코프
파일:러시아 국기.svg 빅토르 페필랴예프[3]
파일:러시아 국기.svg 미하일 베렌스[4]
파일:러시아 국기.svg 이반 로마놉스키
파일:러시아 국기.svg 예브게니루드비크 밀러[5]
파일:러시아 국기.svg 블라디미르 마이마옙스키
돈 공화국
파일:돈 코사크 국기.svg 표트르 크라스노프
파일:돈 코사크 국기.svg 아프리칸 보가옙스키
쿠반 인민공화국
파일:900px-Flag_of_Kuban_People's_Republic.svg.png 알렉산드르 필리모노프
파일:900px-Flag_of_Kuban_People's_Republic.svg.png 안드레이 시쿠로[6]
대몽골국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20px-Flag_of_Mongolia_%281911-1921%29.svg.png 복드 칸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20px-Flag_of_Mongolia_%281911-1921%29.svg.png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파일:우크라이나 국기.svg 미하일로 흐루셰우스키
파일:우크라이나 국기.svg 세몬 페틀류라
파일:우크라이나 국기.svg 바실 비시바니[7]
파일:우크라이나 국기.svg 스뱌토슬라우 슈람첸코[8]
벨라루스 인민공화국
파일:구 벨라루스 국기.svg 얀 시에라다
파일:구 벨라루스 국기.svg 스타니슬라우 불락발라호비치
바스마치 운동
파일:JjVeuXZ.jpg 이스마일 엔베르
파일:JjVeuXZ.jpg 이브라힘 벡
에스토니아

파일:에스토니아 국기.svg 요한 라이도너
협상국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모리스 자냉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루이 프랑셰 데스페레
파일:영국 국기.svg 알프레드 녹스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오타니 키쿠조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유히 미쓰에
동맹국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 헤르만 폰 아이히호른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 뤼디거 폰 데어 골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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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합스부르크 기-헝가리 기.png 아르투어 폰 슈트라우센부르크
파일:오스만 제국 국기.svg 누리 파샤[9]
파일:우크라이나 국기.svg 파울로 스코로파즈키

결과
적군 승리, 소비에트 연방 결성[2]
병력
적군 549만 8천명[3]
백군 102만 3천명
간섭군 25만 명
피해 규모
적군 사상자 150만 명[4]
백군 사상자 136만 명
간섭군 사망자 2만 명
1. 개요
2. 명칭
3. 발단
4. 전개
5. 절정과 반전
5.1. 적군: 최악의 위기
5.1.1.1. 병사: 징병제 → 500만 병력
5.1.1.2. 지휘관: 구 제국 출신 친소 장교들 영입
5.1.1.3. 수송력 보유: 철도 장악
5.2. 백군
5.2.1. 구심점(최고사령관) 부재
5.2.2. 병사: 70만 병력
5.2.3. 지도층 불신
5.3. 내전의 국제화
5.3.1. 극동의 협상국 진출
6. 결말
7. 영향
7.1. 한국 독립운동에 끼친 영향
8. 백계 러시아인 유민
9. 이 시기를 소재로 한 대중문화작품
9.1. 게임
9.2. 소설
9.3. 만화, 애니메이션
9.4. 영화
9.5. 음악
10. 기타
11. 관련 인물
12.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10월 혁명 이후 혼란해진 러시아에서 벌어진 전쟁, 흔히 적백내전이라고도 불린다. 볼셰비키가 정권을 탈취한 1917년 11월 7일을 시작으로 보는 견해에는 이견이 없지만 끝은 그 견해에 따라 다르다. 실질적인 끝은 콜차크의 러시아국이 붕괴한 1920년 2월로 보지만, 백군 일파인 표트르 브란겔의 남러시아 임시정부나 몽골의 미친 남작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 같은 경우 1921년까지 버텼으며 공식적인 종결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프리아무르 임시정부가 망한 1922년 10월 25일으로 본다. 최후의 백군이 사라진 날은 1923년 6월~10월쯤이며, 일본이 북사할린에서 철수한 것을 기준으로 따지면 1925년이다. 1차 세계대전의 상흔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러시아 전역이 피해를 입다 보니 피해 규모는 엄청나게 컸다. 당시, 러시아 총인구 약 9천만 중 전사자만 백만명 단위고 아사자는 천만에 달할 것이라고 추산된다.

러시아 내전은 그 특성상 여러가지 이념들이 모두 혼합된 복잡한 정국이었다. 좌우 갈등은 물론 좌파 내부에서도 비혁명 좌파 정당들은 무력으로 소비에트 정권을 세우는 데 극렬히 반대하고 러시아 공화국을 해체시킨 10월 혁명을 부정했다. 단순한 혁명의 연속이나 발전이 아닌 볼셰비키의 반란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중도좌파인 트루도비키나 카데트는 백군의 선봉장이 되었고[5], 볼셰비키 독재에 항거하는 몐셰비키, 좌파 SR, 아나키스트들은 백군, 적군을 모두를 적으로 간주하면서 독립적인 행동을 개시했다. 여기에 러시아 제국이 무너진 틈을 타 러시아의 지배를 받던 폴란드,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발트 3국,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등이 독립국가를 세우고 적군 및 백군 세력과 모두 싸웠다. 공산 혁명을 저지하기 위해 1차 대전협상국 측인 미국, 대영제국, 캐나다, 일본 제국, 이탈리아 왕국, 중화민국, 프랑스 제3공화국은 물론 독일 제국동맹국 역시 백군 측과 폴란드,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발트 3국 등의 민족주의 군대를 지원했다. 시베리아 전선의 다국적군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를 참고.

그래서 러시아 내전을 단순히 적군과 백군의 대결로 볼 수 없다. 볼셰비키도 처음에는 여러 좌파 정당이나 전선을 회유했으나 백색 테러나 내전 상황을 명분으로 일당 독재를 확립한다. 이를 혁명의 배반으로 간주한 사회혁명당 좌파였던 파니 카플란은 레닌을 암살하려 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2. 명칭[편집]


한국에서는 적백내전이라는 별칭으로도 많이 불렸다. 내전의 주축이 볼셰비키 정부군과 대항군이 각각 적군(Красная Армия, Red Army), 백군(Белая Армия, White Army)[6]이라고 불렸기 때문이다. 적색은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을, 백색은 혁명 이전의 질서를 의미한다.

하지만 10월 혁명으로 볼셰비키의 독재와 두마 폐쇄에 실망한 네스토르 마흐노의 남우크라이나 흑군[7], 알렉산드르 S. 안토노프가 이끈 녹군(탐보프 농민군을 위시로 한 반볼셰비키 농민 반란군), 그리고 피지배 민족의 분리주의 세력[8]도 있었기 때문에 단순한 적백 대립으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 따라서 최근에는 러시아 내전이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하는 추세이다.


3. 발단[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50px-Russian_civil_war_in_the_west.svg.png

러시아 내전(적백내전)의 초기 배경.

1917년 10월 혁명 이후 군대의 상당수는 볼셰비키의 휘하에 들어갔지만, 군대에 남아 있는 병사보단 집에 간 병사가 훨씬 많았다. 볼셰비키 정권이 지주토지를 분배하고 있었으므로, 농민 출신의 병사들은 집에 가야만 자기 몫의 토지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농촌을 장악하러 간 공산당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혁명 시점에서 블라디미르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는 러시아의 중심 도시들만 장악했을 뿐이었고, 지방엔 볼셰비키에 반대하는 정치 세력들이 상당했다.[9] 때문에 위협을 느낀 볼셰비키 정권이 제헌의회를 해산하자 반볼셰비키 진영과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내전이 발발한다. 결국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반란을 기점으로 러시아 전역에서 반란이 터진다.

그 결과 각 세력은 자신들의 지역정권을 수립해 군웅할거에 들어갔다. 여기에 폴란드, 카자크, 각 지역 부농들의 사병이나 타타르인과 중앙아시아 지역의 이슬람 등 종교적 봉기와 발트, 캅카스 지역의 민족주의 봉기 세력까지 겹치면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조직들이 적군에 대항했다. 또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기 이전에는 독일군이 이들을 계속적으로 지원했다. 게다가 협상국 역시 종전을 전후하여 볼셰비키 정권을 무너뜨리고 다시 독일군과 계속 싸우는 정권을 세울 목적으로 반볼셰비키 세력을 지원하면서 전쟁은 엎치락 뒤치락을 반복하고 있었다.


4. 전개[편집]


파일:external/rkka.ru/gvc3.jpg
1917년 말 ~ 1918년 초까지의 전황.

파일:external/rkka.ru/gvc4.jpg
1918년 중엽 ~ 1919년 초반기까지의 전황.

내전 초기에는 중앙 라다를 중심으로 우크라이나가 독립을 선언하고 돈 쿠반 지역의 카자크도 반기를 들었다.[10]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맞서 싸웠던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을 적군이 강제로 무장 해제시키려고 들었다가 오히려 역으로 자극하여 그들이 '시베리아 철도를 타고 모스크바로 진격하는' 등의 불리한 전황이 계속되었다.

여기에 협상국은 러시아에 지원했던 장비와 물자, 그리고 협상국 내에 남아있던 러시아 지원용 물자를 백군에게 넘겼다. 이를 통해 백군의 전투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콜차크의 시베리아 백군은 서쪽으로 점차 모스크바를 향해 오고 있었다. 자세한 건 시베리아 내전 참고. 하지만 백군은 단 한번도 적군보다 장비 면에서 우세한 적이 없었다. 적군은 페트로그라드(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당시 이름), 툴라 조병창, 이브제스크 조병창 등 제국 시절의 핵심 총기, 야포, 탄약 생산 시설을 대부분 점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백군은 내전 내내 장비 면에서 불리했다. 경제가 이미 붕괴한 상황이었기에 적군이라고 해서 장비가 풍요로운건 아니었지만.

전황이 워낙 다급한 나머지 적군은 백군이 차르를 되찾을까 우려해 1918년 7월엔 예카테린부르크에서 니콜라이 2세 일가를 전원 처형하는 사태까지 발생하였다.[11]


5. 절정과 반전[편집]



5.1. 적군: 최악의 위기[편집]


파일:external/rkka.ru/gvc6.jpg
1919년 적군에게 최악일 뻔했던 전황. 모스크바에서 남쪽으로 거의 60km 앞까지 적이 진격해 함락이 눈 앞이었지만 얼마 안가 반격하게 된다.

1918년 말엔 적군이 사방에 공세를 취했으나 공세는 얼마 안가 막히게 되었고, 그 후 백군이 동쪽에서부터 거센 반격을 한지라 한때는 적군이 이대로 망하는 게 아닌가 할 정도였다. 내전 초부터 시베리아는 물론이고 유럽 러시아도 절반 이상 날아간 상황이었다. 유데니치의 에스토니아 백군 때문에 페트로그라드의 함락이 눈 앞이라 수도를 모스크바로 옮긴 적도 이때. 게다가 백군은 전차와 항공기를 소수나마 장비했고, 각 부대의 훈련 및 부대 내부의 상하명령체계도 잘 잡힌 편이었다.

그러나 적군이 가장 몰렸을 때도 모스크바 등지의 주요 도시와 거점은 적군이 확실하게 장악하고 있었으며, 각 거점도 확실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이 점은 사방에서 몰려들고는 있지만 각지에 분산돼서 통일된 명령체제가 없는 백군보다 확실하게 유리한 상황이었다.


5.1.1. 레프 트로츠키의 등장[편집]



5.1.1.1. 병사: 징병제 → 500만 병력[편집]

이에 더해 레프 트로츠키가 대대적으로 적군 조직을 전선군과 사단 단위로 개편하고 1918년 6월에 징병제를 실시하였다. 그 이전까지 적군의 주축은 혁명의 지지기반이었던 도시 노동자였으나, 이후로는 농민에 대해서도 징병제를 실시하였다. 근대국가에 익숙하지 않은 농민들의 징병제에 대한 반대는 무력으로 억눌렀다. 탈주자는 재판없이 총살되었으며, 탈주한 병력이 발생한 부대는 고대 로마에서도 제대로 집행한적 없던 10분의 1형을 실시하여 병사 10명 중 1명을 무작위로 총살하는 등 폭력과 권위주의에 의해 통제되는 군대를 만들었다. 최종적으로는 5백만에 육박하는 병력을 편성, 물량 공세를 펼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비윤리적인 방법을 통해서 징병한 병력들은 전략적인 능력을 가질지언정 극도로 경직적인 군대였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장군과 지휘관들이 자신들의 병력들을 군벌화시키려는 시도들에 상당히 취약해졌다. 이러한 이유로 벌어진 것이 그 악명 높은 대숙청이었다.


5.1.1.2. 지휘관: 구 제국 출신 친소 장교들 영입[편집]

그리고 고질적인 지휘관 부족 및 군사적 능력 보충을 위해 과거를 묻지 않고 구 제국 장교들을 대거 영입했다(228호 명령).[12] 대표적인 경우가 알렉세이 브루실로프 상급대장이다. 브루실로프 장군의 경우 붉은 군대에 가담했던 외아들이 반혁명군에 처형당했던 개인적 이유도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그를 움직인 것은 바로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이었다. 독립국을 세운 우크라이나의 분리독립을 좌시할 수 없었던 적군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해 대부분을 점령했는데, 우크라이나와 폴란드가 동맹을 맺어 폴란드군이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지원하자[13],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일부라는 관념이 뿌리박힌 러시아 제국 장교들이 제발로 적군에 찾아와 가담하는 경우도 많아졌다.[14] 브루실로프는 아예 트로츠키의 군사고문으로 활동하다가 20년대에 은퇴한 후 자연사했다. 그 외에 알렉세이 쿠로팟킨[15] 대장도 적군에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백군의 참가 권유를 거부하게 만드는 활동을 벌였다. 하지만 이후 대숙청의 일환으로 혐의점이 의심되는 여러 장교들이 숙청되거나 감시에 시달렸다.


5.1.1.3. 수송력 보유: 철도 장악[편집]

이렇게 적군의 전투력이 개선되자 전황은 적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적군은 통일된 군사력에 철도도 장악하고 있으니 부대를 이곳 저곳으로 재배치하는 데 확실히 유리했다.


5.2. 백군[편집]



5.2.1. 구심점(최고사령관) 부재[편집]


이에 반해 백군 측은 적군에게 대항한다는 것만 빼면 다른 집단의 합이었으며, 심지어 서로 싸우기도 하는 등 통일된 행동이 불가능했다. 원래 백군의 각 부대는 장비도 좋고 부대 내부의 상하명령체제도 확실했지만 각 부대를 통합지휘할 최고사령관이 없다는 것은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명목상으로는 콜차크가 최고지도자이긴 했지만 다른 지역에 명령을 내릴 방법은 전무했다. 이는 적군에게도 큰 문제긴 했지만 체카란 무자비한 정보 기관의 존재, 그리고 공산주의자들을 모두 모은 위원회를 통해 해결했다. 전투가 끝나고 후에 명령에 불복종하면 공포를 통해서 적군계 군벌들을 통제했고, 공산주의 계열 인사들은 위원회 내에서 언제든 일선 병력들에게 보낼 전략적인 명령을 결정할 수 있었다. 이러한 명령을 전달할 수단은 백군과 비슷한 수준으로 희박하긴 했으나 최소한 전략적인 명령을 할 수 있다는 것과 전략적인 판단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엄청난 차이를 만든다.

그러나 백군은 단순히 찢어져 있는 수준을 뛰어넘어, 각기 다른 이상을 가지고 활동하는 이들이 군벌들을 이루고 있었다.[16] 더군다나 1920년 콜차크가 체코 군단의 통행과 거래되어 처형당하자 세력이 더욱 약화되었다.


5.2.2. 병사: 70만 병력[편집]


게다가 백군은 주로 러시아의 주변부를 장악했기 때문에 장악한 면적에 비해 인구가 적었으므로 최전성기에도 68만 이상의 병력을 동시에 운용해본 일이 없다. 이래서야 장비가 좋아도 이기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설상가상으로 백군 부대가 패하면 가지고 있던 좋은 물자와 장비를 적군에게 내주게 되니 안 그래도 강한 적군이 더 강해지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5.2.3. 지도층 불신[편집]


백군 지도층 상당수는 귀족, 지주, 자본가 등 구(舊) 지배계급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그 목적도 혁명 전 체제 복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따라서 전쟁과 가난으로 지칠대로 지친 노동자, 농민 출신 병사들의 호응을 받기 어려웠다. 게다가 사병들은 카자크·중산층 출신 의용병도 있었지만 대부분 징집을 통해 강제로 군인이 된 이들이었다. 이로 인해 사병들의 불만이 많았고 군 기강도 전반적으로 해이한 편이었는데, 볼셰비키 정부의 백군 사병들의 불만을 겨냥한 선무 공작에 상관 살해 및 투항하거나 탈영하기 일쑤였으며 사병들이 장교들을 붙잡아 넘기거나 반란을 일으키는 일이 다반사였다.


5.3. 내전의 국제화[편집]


백군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적군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도 깨졌으니 우크라이나[17], 폴란드[18], 핀란드, 발트 3국[19], 캅카스 3국[20] 같이 러시아에서 독립을 시도했던 국가들을 재흡수하고 국제주의 이념에 따른 공산화를 시도했고, 이는 조약 체결 때부터 레닌의 계획대로 정해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레닌의 의도와 달리 러시아로부터 막 독립을 쟁취하려던 신생 독립국에게는 정권만 바뀐 러시아의 재정복 시도이자 볼셰비키 정부의 야욕으로 비춰졌다.

소비에트의 서방 공세로 알려진 적군의 동유럽 침공은 1918년 말에 개시되어 구 러시아 제국령 위에 세워진 모든 신생국가가 대소전쟁에 휘말렸다. 그러나 볼셰비키의 시도는 발트해 국가들이 간섭군과 함께 적군을 몰아내고,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서 폴란드군이 기적적인 반전에 성공하는 등 도처에서 대패하여 실패로 돌아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는 멸망시켜 벨라루스의 절반, 우크라이나의 대부분을 점령하여 괴뢰국가를 수립하는 성과는 얻었다.

적군은 1920년 말 자캅카스 방면으로도 침공을 개시했다. 자캅카스 점령은 1921년 초면 끝나 동유럽에 비하면 훨씬 수월하고 단기간에 이루어졌다. 조지아만이 적군과 격렬하게 싸워 수천의 사상자를 강요했을 뿐 아제르바이잔와 아르메니아는 상대적으로 단기간에, 거의 무혈입성에 가깝게 점령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점령이 신속하게 이뤄졌을 뿐이지 현지 민심이 볼셰비키에 딱히 호의적인 것은 아니라서, 점령된 국가들 모두 반소 봉기를 일으켜 볼셰비키에게 떼죽음을 당하는 등 1920년대 중반까지 처절하게 저항한다.


5.3.1. 극동의 협상국 진출[편집]


미국과 영국이 해군을 파견하거나 일본 제국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리에 의해 7만 명을 동원하여 시베리아를 공격하는 등 대규모의 병력을 투입[21]하여 러시아 동부 해안의 주요 항구들을 점령하고 이르쿠츠크 지역까지 진출했으나 기나긴 전쟁을 이미 치른 터에 새로운 전쟁을 하기엔 어려운 처지였던데다 간섭군 내부에서도 불협화음이 터져나왔다. 미국의 경우 일본이 러일전쟁을 정산할 요량으로 원래 주둔해야 할 블라디보스토크를 벗어나 북진하자 크게 반발, 무력 충돌 직전까지 갔다. 여하간 1920년, 러시아국 해체를 계기로 백군의 조직적 저항은 완전히 분쇄되었고, 이에 명분을 잃은 간섭군은 동시베리아의 일본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철수하고 만다. 일본은 계속 버티다가 적군의 트랴피친 부대와 충돌을 벌이는데, 이 과정에서 트랴피친 부대는 일본계와 러시아계 지역 주민들을 대규모로 학살하는 전쟁범죄를 일으켜 적군 지도부가 보낸 체카에 의해 처형된다. 이것을 니콜라옙스크 사건(Николаевский инцидент)이라고 부른다.


6. 결말[편집]


볼셰비키를 주축으로 한 적군이 승리했고, 백군과 간섭군은 패배했다. 그리고 민족주의 세력 일부[22]도 결국 분리독립에 성공했다. 볼셰비키가 세운 각 소비에트 공화국들은 1922년 세계 두번째의 공산국가 소련을 결성한다. 1921년에 외몽골에 잔존해 있던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까지 적군에게 패배했고, 이때 외몽골몽골 인민공화국으로 중화민국에서 독립하면서 두 번째 공산국가가 되었다.

최후의 백군은 태평양 연안의 아야노마이스키 구에 주둔하던 아나톨리 페필랴예프의 군대였으나 1923년 6월 17일에 패배한다. 페필라예프는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가 1938년에 처형당했다. 참고 러시아 바깥에서는 러시아 조계지였던 중동철도의 드미트리 호르바트 장군이 하얼빈과 중동철도를 장악하고 있었으나(하얼빈 혁명) 외부 지원도 다 끊긴 상황에서 동북군벌도 이기지 못할 약소 세력으로 전락한 상황인지라 중화민국이 소련을 승인하면서 가차없이 중국군에게 축출당했다. 다만 호르바트는 신강으로 달아났다가 소련으로 송환당한 다른 백군 장군들과 달리 북경에서 천수를 누리고 죽었다.

마지막 외부 간섭군이던 일본군1924년 철수했다. 일본 육군은 당초 블라디보스토크보다 더 진격하지 않겠다고 협상국에게 약속했지만 이내 북사할린, 연해주, 만주 철도 등에 이어 시베리아 오지의 바이칼 호수 동부까지 점령했으며, 최종적으로는 바이칼 호수 서쪽의 이르쿠츠크까지 점령지를 확대했다. 일본이 파견한 병력은 미국, 영국, 프랑스 등에 비해 수십 배 많았으며, 다른 간섭군이 철수한 이후에도 시베리아에 계속 주둔하면서 점령지에 괴뢰국을 건설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러시아 뿐만 아니라, 영국, 미국, 프랑스와 같은 협상국들도 일본의 행동에 '저것들이 땅 욕심을 부리는 거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다. 실제로 미군과 일본군이 무력 충돌 직전까지 가기도 했고.

허나 일본군이 대규모 병력을 파병했음에도 광대한 시베리아를 통제하기는 불가능했고, 따라서 교통의 요지만을 점령하는데 급급하여 그 빈 공간에는 적군과 이에 동조하는 파르티잔이 매복해있다가 게릴라 전법으로 공격했다. 일본군은 단독 혹은 백군과 협동으로 이들을 진압했고, 자국군이 당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민간인을 학살하고 게릴라전의 배후 마을을 불태웠으나, 이는 오히려 일본군이나 반혁명세력에 대한 지지만을 더욱더 떨어뜨렸다. 그리하여 점점 민심은 공산당 정부 쪽으로 향했고, 1920년 반혁명세력이 시베리아에서 수립한 알렉산드르 콜차크 정부가 적군의 공세로 붕괴하자 일본군도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중앙아시아에서 민족주의 세력을 비롯한 부농, 무슬림 등의 러시아 제국 시대부터 통치받다가 독립한 세력은 바스마치 운동을 일으켜 30년대 초중반까지 산발적인 싸움을 계속했다. 하지만 대세는 기울어서 적군과 이후의 소련군에게 진압된다.


7. 영향[편집]


러시아 내전은 백군의 완벽한 패배와 신생 강대국 소련의 성립으로 끝났다. 러시아 내전에선 적군은 '군대'라고 부를만한 규모의 병력과 패권을 획득했으나 백군은 완전히 찢어져 군벌 집단으로 변해버리고, 결국 러시아 백군 파벌 인사들은 도망가거나 죽었거나 추방당했다. 내전 중 백군 인사들이 유럽 국가들로 대규모 망명을 하게 되면서 자신들의 경험을 통해 맹목적인 공포에 가까운 수준으로 유럽 반공주의를 강화시켰고, 이를 넘어 이후 세계 2차 대전 당시 동부전선에서 소련군 포로들이나 반공 러시아인들을 긁어모아 만든 러시아 해방군 등의 친독 부역자 세력들은 백군을 자신들의 선조로 여기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소련은 소련 나름대로 이때 세계 열강들의 침공을 일시에 받은 경험이 충격으로 남아 두고두고 자본주의 국가들의 침공을 두려워하는 트라우마가 되었다고 한다. 특히 이오시프 스탈린은 이에 대비하기 위해 광적으로 공업화에 집착하였다. 또한 사회주의 혁명의 확산 실패와 러시아 내전의 위기는 트로츠키의 사회주의 혁명 확산론을 좌절시키고, 자국 공업화 및 생존을 주장한 스탈린의 주장을 강화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이게 급속한 공업화와 농업 집단화를 불러들여 많은 폐해를 일으켰다.

이 전쟁과 제1차 세계 대전에서의 전훈은 소련식 기동전에 대한 교리가 정립되는 배경이 되었다. 또한 이때 러시아 내외의 반볼셰비키 세력을 제거하면서 얻은 경험으로 첩보 능력이 발달해 냉전시기 소련의 첩보전 능력에 일조하기도 했다. 강제수용소가 처음 설치된 것도 이 시기의 일이었지만 이 당시 수용자들은 내전 후 대부분 석방되었다.[23] 또한 소비에트 적군이 실전을 거치면서 기존 군 내의 합의적·민주적 분위기가 약화되고, 일사불란한 군대식 관료체제가 대세가 된 것도 이 시기로 여겨진다. 그래서 연구자에 따라 러시아 내전이 볼셰비키의 성격을 바꾸었고, 이것이 소련의 관료독재화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여기기도 한다.

그리고 일본은 이 전쟁을 계기로 연해주 일대와 중국 일대에서 자기들의 세력을 넓혀가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그때까지 일본의 뒤를 봐주던 미국의 반감을 사게 되어 1930년대에는 미일관계가 전쟁만 없을 뿐이지 서로를 가상 적국으로 상정하게 되었고 결국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7.1. 한국 독립운동에 끼친 영향[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Hong_Beom-do_1921.jpg
적군의 제식 군모인 부됸노프카를 쓴 홍범도 장군

러시아 내전에서 많은 극동 지방의 한인들이 적군에 많이 가담했다. 일본이 세력을 넓히기 위해 연해주 일대로 들어와 적군과 충돌할 수 밖에 없었는데, 탄압받던 한인들은 주로 사상적인 이유보다는 일본과 싸우기 위해 적군에 가담한 경우가 많았다. 적군 내에서도 이들 한인 부대들이 열심히 싸웠다는 증언이 많았다. 다만 이들은 의도치 않게 소비에트 정부의 지휘에 따라 백군과도 전투를 해야 했다. 만주 지역에서 항일투쟁을 위해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에 가담했던 한인들도 국공내전에서 국민혁명군과의 전투에서 소모된 경우가 이와 비슷한 예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적군 뿐만 아니라 소수 백군에 가담한 한인들도 있긴 했다.

또한 이 전쟁은 일제강점기 당시 만주-연해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독립군 진영의 분열을 일으키는 데에 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 그 결과가 바로 자유시 참변. 당시 좌우 할 것 없이 수많은 독립군들이 러시아 내전에 참여했다. 후에 국민혁명군대한민국 육군의 장성으로서 중일전쟁한국전쟁에서 일본군과 북한군을 상대로 큰 공을 세우는 김홍일 중장도, 불과 21세의 나이로 적군에 가담해 대한의용군을 지휘하며 시베리아 전역에서 백군을 상대로 성공적인 지연 철수전을 수행했다. 다만 그는 정치적인 이유로 적군에 가담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원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게서 자유시에 독립군들이 집결하니 휘하 병력을 데리고 자유시로 가라는 명령을 받아 움직이고 있었지만, 중간쯤 왔을 때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자 근처 러시아 한인촌에서 백군측에 일본군이 합류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잔여 병력을 수습하여 적군에 가담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공산주의자들이 당파 싸움을 일삼고 소련측이 한국 독립운동을 영 돕지 않자, 배신감에 치를 떨며 미련 없이 러시아를 떠나 중국 국민혁명군에 가담했다.

다만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기 전엔 이 러시아 내전으로 인해 독립군이 뜻밖의 소득을 거두기도 했다. 위에 언급된 체코슬로바키아 망명 군단시베리아 철도를 타고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해 선박으로 귀국했는데, 이 과정에서 이들이 상당량의 군사 장비를 북로군정서 등 독립군 측에 매각한 것. 이는 청산리 전투 등의 후에 벌어질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큰 도움이 되었다.


8. 백계 러시아인 유민[편집]


이 시기에 반볼셰비키 세력들이었던 러시아 귀족들과 기존의 지주층, 러시아 정교 사제, 반공산주의자들이 난민이 되어 이스탄불, 파리, 베를린, 뉴욕 등 전 세계 각지로 망명했다. 이들은 당연히 극도의 반소·반공 정서를 가지고 있었고 유럽, 미국의 반공정서 형성에 기여했다. 일부 학자들은 나치를 지지했던 반공주의의 기원을 여기에서 찾기도 한다. 일부 백군들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소련을 무너뜨릴 것이라는 이유로 나치 독일을 지지하기도 했으며, 독일이 조직한 러시아인 부대에 입대하기도 했다. 일례로 백군 장군 중 하나인 표트르 크라스노프는 백군이 망하자 독일로 탈출했고, 나치 독일이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자 SS 카자크 군단을 지휘했다.

그외에 살아남은 백군과 반공주의자들은 소련 정부의 힘이 미치지 못했던 중앙아시아몽골, 시베리아 등지로 숨어들어서 도적이 되거나 중화민국의 땅이었던 만주신장 중가리아로도 많이 넘어갔다. 이들을 '백계 러시아인'이라고 하며 중화민국에만 8만 명이 넘게 망명했다.[24] 전직 백군 출신들은 중국 군벌들의 용병이 되어 중국 내전에 참전하기도 했는데 특히 장쭝창이 이들을 편애하였다. 백계 러시아인 여성들은 이들의 정부이 되기도 했다. 앙드레 말로인간의 조건에도 백계 러시아인들 묘사가 나온다. 만주 최대 도시였던 하얼빈에는 이들만 거주하는 디아스포라가 형성될 정도였다.[25] 성스차이가 장악한 신장성에서는 소련군 장교가 백군 출신 병사들을 지휘할 때도 있었다고 한다.

백계 러시아인은 국공내전으로 중국이 공산화될 때까지 중국에 있다가 일부는 소련으로 송환되었고, 일부는 필리핀 등 해외로 흩어졌다. 중화민국에서 살다 죽은 어떤 백군 장군의 묘비는 수십 년 후 지나가던 홍위병들에 의해 뜬금없이(...) 폭파되기도 했다.

이외에도 어떤 백계 러시아인들은 인도네시아, 호주, 뉴질랜드나 아프리카 영국 식민지까지 가는 등, 세계로 탈출한 백계 러시아인들은 결국 무국적자로 떠돌아야 했다. 극소수는 일제강점기 조선까지 들어왔으나, 북한 정권이 들어서자 모두 소련으로 송환되었고 서울에 있던 러시아인 커뮤니티도 6.25 전쟁 때 북한이 서울을 점령하자 모두 소련으로 보내졌다.

당시 함경도 사람들의 증언 중[26]에 한반도 북부 함경북도 함경남도까지 와서 함경도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구걸하는 것을 실제로 목격했다는 증언도 있다. 딱하게 여긴 함경도 사람들이 고등어를 갖다주자,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날걸로 먹었다고 할 정도라 했고, 처음 보는 새파란 눈을 가진 하얀 사람들을 보며 놀라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했으며, 파란 눈이 이쁘다는 말을 했다던 사람도 있었다 했다. 이후로는 함경도에서 밍기적거리며 지내다가 돌아가거나 만주 전략 공세 작전 이후 일본이 전쟁에서 패하자 소련이 내려와 눌러앉아 살던 백계 러시아인들을 잡아갔다는 증언도 있다.#
당시 한국 문학계에서 '소냐' 니 어쩌니 하는 러시아계 백인 여성들이 나오는 작품들도 백계 러시아 피난민들의 영향이다.


9. 이 시기를 소재로 한 대중문화작품[편집]



9.1. 게임[편집]


  • 배틀필드 1: 차르의 이름으로 DLC의 맵 중 2개의 맵이 러시아 내전을 다루는 맵이다. 볼가 강, 스탈린그라드의 구 이름인 차리친으로 등장한다. 현재 적백내전을 다룬 유일한 게임이다.


9.2. 소설[편집]




9.3. 만화, 애니메이션[편집]




9.4. 영화[편집]


  • 적과 백: 내전에서 적군 편으로 가담한 헝가리 의용군들이 주인공이다. 전투에서 패한 후 백군 카자크에게 포로로 잡혀 처형당하기도 하고, 백군이 거점을 함락시킨 뒤 러시아인 포로들만 처형하고 헝가리인 포로는 풀어주기도 한다. 백군 지휘관이 헝가리인 포로에게 "이건 우리들의 전쟁이다"라면서 끼어들지 말고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고[27] 타이르는 장면도 있다.



9.5. 음악[편집]




10. 기타[편집]


  • 러시아 제국이 러시아 혁명으로 무너지고 러시아 내전이 진행되면서 모스크바가 볼셰비키에 장악당하고 백군 잔존세력은 극동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쫓겼는데, 이들에 의해 몇 개월간 블라디보스토크가 제4의 로마로 추대되기도 했다. 제1 로마→제2 콘스탄티노폴리스→제3 모스크바로 이어지는 러시아인들의 정통성 계보에 따른 것이다.

  • 이 당시 개발된 무기 중엔 테크니컬의 조상뻘 되는 무기도 존재했다. 타찬카(Тачанка)라고 불리는 민간의 건초 달구지나 이동용 마차를 징발해 맥심 기관총 같이 당시로는 거치식으로만 사용 가능하던 초기 기관총을 달아 이 끌게 한 물건으로, 러시아에선 네스토르 마흐노에 의해 개발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그에 따라 '마흐노의 마차'라는 별명이 있다. 생각보다 기동성이 좋아 쏠쏠하게 써먹었다고 하며 무려 독소전쟁까지 잘 사용되었다.

  • 백군에 표트르 크라스노프(붉은) 장군[28]이 있었고 적군에 파벨 알렉세예비치 벨로프(하얀) 장군[29]이 있었다. 서로 대비되는 성씨를 가졌는데 심지어 최후도 정반대이다.

  • 당시 백군과 적군은 각자의 복수심에 의해 점령지 주민들을 학살, 방화하는 일을 빈번하게 벌였고, 여기서 적색테러백색테러라는 용어가 생겨났다.

  • 흥미로운 사실 하나, 위키백과의 적백내전 항목은 영어판보다 독일어, 루마니아어, 러시아어판이 더 자세하다. 특히 독일어 항목이 그렇다. 러시아어의 경우는 러시아사의 중요 사건 중 하나라서 그렇게 특이한 일은 아니며 루마니아어의 경우도 루마니아와 가까운 곳에서 발생한데다가 자기들도 베사라비아 문제로 직접적으로 관련있는 사건이므로 역시 특이한 일은 아니지만, 독일어권 국가들[30]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기에 의외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독일어권의 경우 독일이 레닌을 직접 보내기도 했고, 내전 전후로 꽤 많은 독일계 사회 주의자들이 활동했기에 완전히 연관이 없는 건 아니다.

  • 김경천, 한용운이 이끈 소수의 조선 독립군은 러시아 내전에 참전한 적이 있다. 이들은 적군 편에서 싸웠는데, 이는 백군에 일본군이 있기 때문이었다. 적군에 가담한 독립군들은 조선 이민자가 많은 연해주 일대에서 게릴라전과 테러, 첩보 활동 등을 해 적군을 도왔다. 그러나 이 참전용사들은 이후, 스탈린 정권이 들어선 이후 호전적으로 굴던 일본 제국만주국의 압박[31]과 당시 이뤄지던 소수 민족 박해 정책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했다. 한마디로 토사구팽.

  • 이와 비슷한 시기에 이웃국가였던 핀란드에선 핀란드 내전이 벌어졌는데, 러시아와는 반대로 백군이 승리했다. 핀란드의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이 대단한 지도력을 보여줬으며, 장비와 실전 경험이 풍부한 독일 제국군이 부대를 파견해 백군과 같은 편에서 참전하는 등 적군에게 불리한 요소가 많이 작용하였다.



11. 관련 인물[편집]







12.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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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왼쪽에서부터 성조기프랑스의 것으로 추정되는 삼색기, 영국 해군의 군함기와, 일본 제국 해군욱일기가 보인다.[2] 다만 내전 직후 만들어진 것은 아니고 2개월 후인 12월 결성되었다.[3] 흑군, 녹군, 크론슈타트 반군 제외[4] 흑군, 녹군, 크론슈타트 반군 및 적군 입원자(624만 3천명) 제외[5] 다만 콜차크의 반동적 군대가 1918년부터 독재정권을 수립하면서 숙청되었다.[6] 백위대, 백색 운동이라 지칭되기도 했다. 백군은 지방에 따라 하얀 완장을 두르기도 했으며, 유명한 부대들은 하얀색 또는 검은색 군복을 입었고, 주요 부대들은 이전 러시아군의 군복 혹은 독일로부터 지원받은 군복을 개조해 사용했다. 각지의 백군 군벌들이 통일된 체계를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부대와 지방에 따라 옷이나 상징이 천차만별이었다.[7] 남우크라이나에서 활동하던 아나키즘 무장 단체.[8] 폴란드 제2공화국,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벨라루스 인민 공화국, 핀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조지아, 아르메니아 제1공화국, 아제르바이잔, 쿠반 인민공화국, 돈 공화국, 몰다비아 민주 공화국, 바스마치 운동.[9] 1917년 11월 두마 선거에선 사회주의 계열의 사회혁명당(나로드니키)이 농촌 지대에서 압승을 거두면서 40%의 지지율로 제1당이 되었다. 볼셰비키는 주요 도시 공업 지대에서 승리하면서 24%의 지지율로 제2당이 되었다.[10] 이들은 같이 적군에 맞서 싸웠으나 백군 간의 갈등 또한 만만치 않았다.[11] 니콜라이 2세의 4녀 아나스타시야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 공주가 이때 몰래 빠져나와 살아남았다는 소문이 꽤 오랫동안 퍼졌다. 자신이 아나스타시야 공주라고 주장한 여성도 있었고, 폭스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이 애니메이션은 항상 디즈니로 오해하는 경우도 많다) 만화영화 <아나스타샤>도 만들어졌지만, 아나스타시야 공주의 유해가 발견되면서 소문은 거짓으로 밝혀졌다.[12] 하지만 볼셰비키는 이들을 신뢰하지 않았다. 포섭된 백군출신 장교는 가족이 인질로 잡혔고 불온행동 시 본인과 가족을 총살하겠다는 협박아래 입대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정치장교와 비밀경찰을 통해 행동을 통제당하고 감시받았다.[13] 자세히 설명하면, 우크라이나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독립국인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을 수립하여 러시아로부터 분리독립했는데, 적군은 1919년 1월 초 괴뢰정권인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을 수립하고 그 직후 침공하여 키예프를 비롯한 우크라이나의 대부분을 점령했다. 이 상황에서 폴란드가 우크라이나와 동맹을 체결하여 1920년 5월 키예프까지 점령하는 일이 터진 것이다.[14] 러시아는 오늘날에도 이러한 시각을 유지하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은 2009년 데니킨이 안장된 돈스코이 묘지를 참배하던 도중 "데니킨은 우리들(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관계에 어느 누구도 끼어들 수 없다고 말했다. 이는 오직 러시아의 권리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그 정도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분리를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우크라이나인들의 입장이야 물론 다르지만.[15]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군 총대장이었던 사람이다.[16] 제정복고를 원하는 세력뿐만 아니라 공화국의 수호를 원하는 세력도 있었다. 일례로 미하일 알렉세예프는 공화국을 지지했지만 미하일 드로즈돕스키는 입헌군주제를 지지했다.[17] 당시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18] 당시 폴란드 제2공화국[19]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20]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21]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블라디보스토크에 상륙해 신한촌 사건을 일으켰다. 신한촌 사건에서 한국의 지도자급 위치에 있던 독립운동가 최재형이 일본군에 붙잡혀 총살당했다.[22] 폴란드, 핀란드, 발트 3국. 몰다비아는 독립했다가 투표를 거쳐 루마니아 왕국에 병합.[23] 당시 적군에는 구 제국의 장교들이 대거 유입되었다. 이들 중 볼셰비키의 이념에 공감해서 지원한 사람은 극소수였고 많은 수는 기회주의자거나 잠재적 반역자라고 볼 수 있었다. 실제로 내전 시기에 구 제국 장교들에 의한 적군에 대한 반란 내지 사보타주 행위는 결코 적지 않았고, 이런 반란을 억제하기 위해 정치장교의 배치는 필수적인 사항이었다.[24] 북만주 일대는 한때 러시아 제국이 영토로 강점했을 정도로 러시아가 많은 노력을 기울인 땅이다. 하얼빈은 러시아가 지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25] 731 부대 희생자 상당수가 백계 러시아인이었으나, 일본에서는 이들을 마치 전쟁 포로인 것처럼 날조, 왜곡했다.[26] 1912년생, 작고[27] 이는 지휘관 개인의 생각일지 몰라도 백군은 세력별로 협상국과 동맹국 등 세계 각국의 지원을 받았고 외국군의 주둔을 허용해 외세의 꼭두각시라는 욕을 많이 먹었다.[28] 백군이 망하자 독일로 도망가 나치 SS 카자크 군단의 지휘관이 되었고, 전후 소련군에 송환되어 전범 재판을 받고 처형당했다.[29] 러시아 내전 적군 지휘관 중에서도 대숙청을 피하고 독소전쟁 시기에도 장군이 되어 지휘했으며 1963년까지 천수를 누리다 죽었다.[30] 독일, 오스트리아, 룩셈부르크, 스위스, 리히텐슈타인, 벨기에[31] 당시 조선계 이민자들 다수가 극동 지역에서 활동했는데, 만주군이 독단으로 이러한 명분을 들고 소련을 공격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