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타우 후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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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구스타우 후사크(Gustáv Husák, 1913년 1월 10일 ~ 1991년 11월 18일)는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대통령(1975–1989), 공산당 서기장(1969–1987)을 역임한 인물이다. 정상화(normalizace, normalizácia) 과정에서 프라하의 봄에 의한 자유화 조치를 대부분 취하했으며, 민주화 운동을 억압했다. 그러나 1989년 벨벳 혁명 이후 밀로시 야케시(Miloš Jakeš)에게 정권을 넘기고 은퇴했다.


2. 생애[편집]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헝가리 왕국 포조니히데쿠트(Pozsonyhidegkút, 현 슬로바키아 두브라우카·Dúbravka)에서 출생했으며 체코슬로바키아가 1918년에 독립하자 공산당에 입당했다. 그러나 나치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병합으로 체코는 보헤미아-모라비아 보호령이 되었으며, 슬로바키아에는 요제프 티소가 이끄는 나치 독일의 괴뢰국슬로바키아 제1공화국이 탄생했다. 후사크는 티소에 반대하는 슬로바키아 저항운동에서 활동했고 소련이 해방점령한 전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그 경력과 공산당원임을 이용해서 중앙 정부에 들었갔다.[1] 그러나 1950년 클레멘트 고트발트가 주도한 반스탈린주의자 숙청에 걸려서 목숨만 건진 채로 1963년까지 당에서 제명되었다.

한편 안토닌 노보트니가 이끄는 스탈린주의자 그룹은 흐루쇼프가 주도한 탈스탈린주의 운동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 초반까지 억압적인 행태를 취하고 있었으며, 체코우월주의를 주장해서 슬로바키아를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면서 슬로바키아 공산당과 대립하였다. 결국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의 지원을 받은 개혁파가 둡체크를 수반으로 당내 혁명을 일으켜서 노보트니를 은퇴시키고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내세우며 개혁을 시도하였다. 이때 후사크도 정치적으로 복권되었다.

그러나 브레즈네프는 당내 강경파들의 압박으로 종래의 알렉산데르 둡체크 지지를 그만두었고 프라하의 봄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후사크는 혁명이 실패하자 재빨리 태도를 바꿔서 보수파의 거두가 되었으며 소련군에 전적으로 협조하면서 스보보다를 대통령으로 올리고 자신이 서기장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그 후 정상화 정책을 통해서 민주화, 자유화 분위기를 억압했으며 체코슬로바키아를 충실한 바르샤바 조약의 일원으로 남겼다.

반면 국내의 반소 자유화 운동을 억압하는 동시에 후사크는 소련을 압박해서 경제적, 군사적 원조를 이끌어 내었으며 억압적인 정치 현실에 실망한 인민들을 달래기 위해서 브레즈네프의 소 거래(little deal)[2]를 본뜬 3H정책을 시행하였으며 이는 70년대의 경제적,사회적 안정을 이루어내는 동시에 일시적으로 체코슬로바키아인들의 관심을 정치로부터 떨어뜨려 놓았다.

하지만 국내의 반체제 운동을 완전히 사그러들지 않았고 헬싱키 선언의 준수를 요구한 지식인들의 선언인 77헌장이 발표되고 80년대 들어서 경제가 다시 침체된데다가 소련에서 고르바초프가 집권하며 개혁개방의 바람이 불자 후사크 정권은 흔들리기 시작했고, 후사크 개인의 건강도 썩 좋지 않던 상황이었다.[3] 후사크는 소련에서 개혁의 바람이 불어오는것과 상관없이 보수적인 정책을 고수하려했지만 89년 벨벳 혁명이 일어나자 당에서 제명, 야케시에 정권을 넘겨주고 은퇴하였다. 물론 공산정권도 곧 무너지고 체코슬로바키아는 민주공화국이 되었다. 후사크는 1991년에 세상을 떠났다.

체코와 슬로바키아 민주화운동가들에게 배신자로 취급받으며 평가가 좋지 못하지만 후사크 실각 이후의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타 동구권 국가보다는 사정이 낫다고는 해도 경기침체와 물가상승을 격은 영향으로 인해서 체코와 슬로바키아에서 노년층을 중심으로 향수를 가지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한다.[4]

[1] 정확히는 체코슬로바키아가 1945년 해방 당시까지만 해도 퍼센트 거래(percentage deal)의 일부가 아니었기 때문에 잠시 에드바르트 베네시를 대통령으로 하는 민주공화국으로 존속했었다. 하지만 베네시는 뮌헨 협정 때문에 친소파였고, 1948년 총선에서 부진할것으로 예측되자, 이오시프 스탈린의 명령하에 공산당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총리직을 고트발트에게 반강제로 넘겨줬다. 결국 체코슬로바키아는 소련의 위성국으로 전락해버렸던 것이다.[2] 1970년대 들어서 현실사회주의권의 성장이 서방을 추월하지 못함이 분명해지고 오히려 사회분위기가 과도하게 보수적이고 침체되자 인민들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서 석유나 자원을 판 돈으로 서방의 경공업 제품이나 사치품을 사서 복지를 확충하는 정책이다. 즉 정부는 인민들에게 여러 경제적, 사회적 혜택을 폭넓게 제공하고 인민들은 그 대가로 공산정권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단기적으로는 1970년대 동구권의 전성기를 열었으나 현실은 미래를 담보로(외채문제) 경제적 위기를 방치한 땜방용 조치였기 때문에 80년대 말 공산권 붕괴의 원인이 되었다[3] 후사크는 담배를 빽빽 피어대던 골초였으며, 1970년대 중반에는 당뇨병으로 인해 백내장 수술을 받아야했다. 다만 눈의 경우에는 수술을 받으면서 어느정도 회보되었다고 한다.[4] 체코에서 199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 보혜미아 모라비아 공산당이 상당한 득표율을 획득하기도 했다. 다만 2010년대 후반에는 지지층들이 대거 ANO 2011로 흡수되면서 세가 악화되어 군소정당으로 전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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